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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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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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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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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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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Surfin USA!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권위가 있는 자가 협상 분위기를 몰아가면 상대가 그 분위기에 휩쓸릴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그리고 그 같은 협상 방식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된 방식이다.


“나스닥 주식을 처분하고 있다고?”


보고서에 읽고 있는 대니얼 그레이엄은 아들인 매튜에게는 시선조차 두지 않고 물었다.

심지어 목소리에 정 한 톨 담겨 있지 않았다.

매튜 그레이엄 역시 아버지 못지않게 말투에 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뉴스 못 봤어?”

“그깟 10억 달러 현찰을 쥐려고 백억 달러가 넘는 가치의 주식을 전부 처분한다는 거냐?”

“내 동생이 불안하대.”

“뭐가?”

“알잖아. 벤처 쪽이 과열되고 있는 거. 너도나도 성급하게 샴페인을 터트리고 있지.”

“쯧쯧.... 꿀을 따려면 벌에 쏘일 각오는 해야 하는 법이거늘.”

“꿀벌처럼 한 방 쏘고 장렬히 죽으려고?”


일반 벌이나 말벌, 땅벌은 독을 쏘고도 살아있다.

그런데 꿀벌의 경우는 한번 쏘고 나면 그대로 죽는다.


“자신 없으면 안전을 우선하는 것도 좋겠지.... 그것이 너희 두 놈의 한계인 것이고.”

“빌어먹을 돈을 어떻게 이겨.”

“왜 못 이겨?”

“헛소리는 사절이야.”


대니얼의 미간에 골이 깊게 파였다.

막내 아들놈의 말투가 유난히 거슬렸다.


“돈을 이기는 것은 더 많은 돈이다.”

“그럴 줄 알았어.”

“언제까지 애처럼 굴 테냐?”

“철든 지가 언젠데.....!”

“발끈한다는 자체가 아직 철이 들지 않았다는 증거야. 그때가 좋을 때야. 많이 즐겨둬라. 시간은 절대 너를 기다려주지 않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대니얼 그레이엄이 고개를 들어 매튜의 뻔뻔한 낯짝을 매섭게 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형 M&A 판에 마수를 뻗쳤더라?”

“.....?”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Hughes Electronics의 위성방송은 나 줘.”


Hughes Aircraft의 방위사업 부문은 2년 전 패트리어트 미사일로 유명한 유나이티드 레이시온 컴퍼니에 매각됐다.

현재는 최대주주인 Durant Motors가 위성 관련 사업 3개 부문을 매각하려고 하고 있다.


“....뭐?”


난데없는 말에 대니얼 그레이엄은 아들놈의 의도를 읽어내지 못했다.


“뭘 어쩌라고?”

“Hughes/Direc 텔레비전 사업 부문을 내게 떼어 달라고.”

“왜 욕심이 나는데?”


혹시 자신의 비즈니스를 방해하기 위해서라면 대니얼은 칭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만큼 머리가 컸다는 의미가 되니까.


“우리가 약하다고 경쟁사들이 설렁설렁 상대해 주는 게 아니잖아.”

“지상파를 샀어야지. 쯧.”


한때 CBS는 노려볼 만도 했다.

G&P가 도와준다는 전제 하에.


“그때는 자금도 신용도 다 부족했으니까.”

“흥. 지금은 좋아졌다는 뜻이냐?”

“당연하지!”


돈이면 뭐든 할 수 있는 세상이다.

오히려 그런 세상이라서 사람의 진심이 무엇보다 귀중해졌다.


‘아마 사람의 진심마저 이용하려고 드는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도 알 수 없는 훈훈함이겠지.’


매사 삐딱하던 매튜 그레이엄이 자세를 바로 했다.


“나도 그레이엄의 후손이니까 사리사욕을 좀 채워야하지 않을까.”

“네 몫은 없어!”

“아니던데?”


매튜 그레이엄이 가문의 사업과 완전 동떨어진 류지호 소유의 금융 사업을 책임지고 있다고 해도, 가문의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그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고 있다.

게다가 장남인 앤소니 그레이엄은 아버지의 후광을 받고 있음에도 현상유지를 하는 것에 그치고 있는 반면에 미운오리새끼 같았던 막내는 독립(?)한 후 월가의 거물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급변하는 시대에서 그레이엄 같은 상속가문을 현상유지라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능력이 있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장남 앤서니는 최근 망나니 매튜와 자주 비교되고 있었다.

그로인해 정신을 차린 매튜 그레이엄은 가문의 후계구도를 흔들 수도 있는 강력한 변수로 떠오르고 있었다.


“법대로 할까?”

“뻔뻔한 놈!”


왠지 대니얼 그레이엄이 이를 가는 것 같다.

가문의 원수도 아니고.

자신의 피붙이임에도 대하는 태도나 감정이 일반적이지 않았다.


“누굴 닮았는데, 그럼.”


대니얼 그레이엄에게 막내아들은 아픈 손가락이 아니라 잘라내고 싶은 손가락일 때가 있었다.

한동안 없는 셈 치고 살 정도로.

최근에는 그 아픈 손가락이 다 나은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능글맞고 뻔뻔하기까지 한 모습을 보자니 속에 열불이 터진다.

저 모습이 어찌 냉혈의 그레이엄이랄 수 있을까.


“잡소리 다 필요 없고! Hughes/Direc 위성사업부는 내 거야. 그레이엄이 인수하더라도 쪼개거나 나누지 말고 온전하게 내 품으로 들어왔으면 좋겠어.”

“미친 놈!”

“그거 먹고 떨어질 게.”

“이놈에 자식이!”


뭔가가 매튜 그레이엄에게 날아갔다.


쨍그랑.


- 꺼져!

- 그냥 순순히 내 놔. 모두에게 평온이 찾아온다니까!

- 너 때문에 평화가 깨질 판이다, 이 자식아!


십 수 년 만이다.

대니얼 그레이엄의 집무실에서 부자지간에 고성이 오간 것이.


❉ ❉ ❉


<Remo : The Destroyer> 포스트프로덕션을 진행하는 동안 류지호는 윌리 워커와의 약속을 지켰다.

윌리 워커와 그의 부족(Tribe)원들에게서 서핑을 배웠다.

서퍼들은 자신들의 무리를 부족이라고 불렀다.

그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에게 서핑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었다.

서프컬처(Surf culture).

서퍼의 행동방식, 그들이 쓰는 언어, 입는 옷, 서프보드 꾸미는 방식, 파티에서는 듣는 음악 등 힙합문화와 또 다른 서퍼들만의 문화가 따로 존재할 정도다.

이런 부족문화 때문인지, 서핑을 단순히 멋으로 즐기려고 하는 사람들을 배척하고 무시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류지호 역시 윌리 워커의 부족민들과 어울리는데 약간의 장벽이 있었다.

그런데다가 백인 서퍼 일색이었다.

많은 서퍼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했다.

인종차별과는 달랐다.

서퍼와 뜨내기를 구분하는 선입견 같은 것이라고 할까.

물 반 서퍼 반.

서핑 포인트로 유명한 바다의 풍경은 정말 장관이다.

서핑은 캘리포니아 해변에서 너무나 쉽게 볼 수 있는 '풍경'과 같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류지호는 서핑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안 해봤다.

생소한 문화였으니까.

한편으로 동경하는 마음이 있기도 했다.

물은 인간 본연의 감정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다.

동경과 공포라는 상반된 감정을 준다.

어쨌든 류지호는 모래 위에서 서핑의 기본자세나 요령을 배웠다.

사실 널빤지에 올라타 파도를 타는 것이 무슨 즐거움이 있을까 싶었다.

그런 질문을 했다가는 야단맞을 분위기라 입 밖으로 내놓지는 않았지만.

한편으로 어릴 때 비료포대기 한 장을 깔고 앉아 비탈길을 미끄러지거나 겨울에 고무함지를 타고 눈밭을 미끄러져 내려오던 쾌감을 떠올리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2주의 기본 훈련을 받았다.


“이제 바다로 나가보자.”

“초보는 한 달 동안 모래 위에서 배워야 한다며?”

“부딪치면서 배워야 빨라.”


높은 파도를 타는 것도 아니고 흔히 배럴이라고 하는 파도 사이를 미끄러질 것도 아닌데, 물에 곧장 들어가는 것이 무슨 대수냐 싶었다.

윌리 워커가 중요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초보자는 큰 파도가 오는 곳에선 절대로 혼자서 서핑을 해서는 안 돼. 만약 조류에 휩쓸렸으면 그 흐름을 거역하지 않고 흐르는 방향으로 나가는 게 더 나아. 캘리포니아 바다는 상어는 없지만 가오리에 쏘이지 않도록 조심하고.“


류지호는 여성 서퍼 에일린에게 패들링부터 바다에 떠 있는 보드에서 일어서는 법을 차근차근 배워나갔다.

에일린 역시 윌리 워커의 부족 일원이었는데, 특별한 직업이 없이 한량처럼 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서핑을 잘하기 위해 우선적인 훈련은 수영이야. 서핑의 90%는 실제 파도를 타는 것보다 패들링이 중요해. 웨이브를 잡으려면 패들링을 해서 바다 한가운데까지 나가야 하기 때문이야.“


패들링은 보드 위에 엎드려 수영을 하듯이 팔을 저어서 나아가는 행위다.


“잘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상체와 지구력이 필수지. 반드시 바다에서 수영하는 연습을 충분히 한 후에 서핑을 해야 하는 거야.”


보드 위에 서는데 10분이면 될 줄 알았다.

웬걸, 생각보다 어려웠다.

여러 번 바다에 빠져 물을 먹었다.

그럼에도 보드 위에 서서 파도에 따라 밀리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비록 찰나였지만.


“쉽지 않지?”

“장난이 아니야.”

“도망갈 생각 마. 저기 꼬마들도 저렇게 즐기잖아.”

“나도 즐기고 싶다고.”


수없이 물에 빠졌다.

어딘가에서 날아온 보드에 머리를 얻어맞기도 했다.

여기저기 멍이 들거나 상처도 생겼다.

파도에 따귀를 맞고 푹 물속에 잠겼다가 가까스로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면 또 다른 파도가 무시무시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돌진해왔다.

그렇게 깊은 바다 속에 처박힐 때는 그야말로 패닉에 빠지기도 했다.


“물일뿐이야. 그냥 즐겨, Jay!”


말로는 단순하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워서 그렇지.

긴장할수록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공포심이 만들어낸 최악의 상상은 눈 깜박하는 사이 현실이 되어 덮쳤다.

서핑보드 위에서는 류지호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그저 따르는 수밖에.


"성질나지? 그렇게 성질나니까 살아있는 느낌이 들지?“


윌리 워커가 서핑을 배운지 한 달 째 되던 날 한 말이었다.


“그렇게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넌 서퍼의 길에 들어선 거야. 하하.”


영화 <폭풍 속으로>에서 보디(Bodhi)는 서핑을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자연과 교감하는 정신적 행위로 생각하는 구루로 묘사된다.

언더 커버 유타에게 텃세를 부리던 망나니 서퍼들을 함께 때려눕힌 뒤 보디가 말한다.


[쟤네들은 기술만 중요하게 생각하지. 서핑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보들.]


류지호 본인이 서핑을 배우고 있음에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말이다.

솔직히 서퍼 보디의 분노가 공감이 되질 않았다.

한 달이 지나고 그런 생각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일으켰다가도 몇 초 버티지 못하고 물속에 곤두박질치기 일쑤인 스포츠가 서핑이다.

한 달을 파도 속에서 헤맸다.

이 정도밖에 못 타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자만 섞인 생각은 작은 파도를 제법 탈 수 있을 때 깨졌다.

멀리서부터 파도가 밀려왔다.

윌리의 부족원들에게는 한참 하찮은 파도다.

왈칵 두려움이 류지호에게 몰려왔다.

풍경과 같았던 파도가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공포가 되는 순간.

일단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멈춰 있으면 그대로 파도에 휩쓸린다.

무조건 파도를 잡아타야 한다.

벅차다.

거친 파도가 온갖 잡념을 휩쓸고 지나간 후....

어느새 바다는 잔잔해져 있다.

그 곳에 남는 것은 포말처럼 흰 햇살과 물결의 일렁임 뿐.

허탈함이나 허무함.

그런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다.

오로지 다시 한 번 파도를 타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Jay, 고기 더 줄까?”


가사도우미들의 리더역할을 하는 샤니스가 싱글벙글했다.

류지호의 식사량이 늘었기 때문이다.

류지호가 지나치게 식단에 신경을 쓰는 편이라 샤니스는 그 부분에 걱정이 많았다.


“밥도 한 공기 더 줘요.”

“호호. 한 달 사이에 대식가가 되었네?”

“서핑이 체력 소모가 크더라고요. 잘 먹어야 오래 타겠죠.”


두 팔을 열심히 휘저어 패들링을 하고, 보드 위에서 벌떡 일어서는 테이크오프 자세만 해도 상당한 근력을 요했다.

처음엔 해변 근처에서 깨지는 거품을 탔다.

그조차 쉬운 일이 아니어서 제대로 일어서기는커녕 고꾸라져 버둥거리기 일쑤였다.

이틀의 한 번은 최소 4시간을 꼬박 물에서 보냈다.

극기 훈련이라도 온 것처럼.

태권도를 꾸준히 수련하고 있다.

그럼에도 온몸의 근육세포들이 일제히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몸살 증상이 나자 재미있기만 하던 서핑도 괴로워졌다.

그럼에도 보드 위에만 올라가면 그냥 웃음이 나왔다.


"서핑은 초보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아.“

“내가 운동신경이 떨어지는 편은 아닌데, 좀처럼 늘지 않는 것 같아.”

“다른 어떤 운동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지.”


류지호와 에일린의 대화에 윌리 워커가 끼어들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서퍼라도 충분한 파도를 만나지 못하면 만족할 만한 서핑을 할 수도 없어. 그러다보면 어릴 때부터 꾸준히 타야 파도다운 파도를 경험하면서 서핑이 느는 거고.“


윌리 워커의 부족원들은 한량들이 따로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먹고사는지 궁금할 정도로 삶이 한가로웠다.

오전에 2시간 정도 파도를 타고, 해변의 단골 펍으로 몰려갔다.

그곳에서 파티를 즐겼다.


“파도 왔다!”


그런 소리가 들려오면 파티고 뭐고 다 팽개치고 보드를 챙겨 뛰쳐나가곤 했다.

화창한 여름에는 파도가 높지 않다.

때문에 숙련된 서퍼들은 파도를 기다리다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때론 파도가 높은 곳을 찾아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기도 한다.

가을에 파도가 높아진다.

제대로 된 서핑을 즐길 수가 있다.

따라서 여름철에는 주로 초보자들이 온 해변을 점령하는 편이다.


❉ ❉ ❉


류지호가 주말을 맞이해 벨에어 집에서 빈둥거렸다.

동생 류순호는 여름방학을 한국에서 보내기 위해 떠났다.

대신 스탠퍼드에서 MBA과정을 마친 황재정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LA에 남은 황재정은 류지호의 미국사업에서 진행되고 있는 지주회사 개편에 참여하고 있었다.

거실 소파 반쯤 눕듯이 앉아서 TV를 보고 있는 류지호를 향해 황재정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서핑 안 가?”

“쉬엄쉬엄 하려고.”

“웬일이래? 한 번 꽂히면 미친 듯이 몰두하는 놈이....”

“서핑에 중독될 것 같아서. 처음 당구 배울 때랑 똑같더라.”

“서핑도 쿠션 길이 있냐?”

“눈 감고 있으면 바다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 들어. 이러다가 바다를 떠나기 힘들 것 같아.”

“그 정도로 재밌어?”

“윌리가 그러더라고 서핑은 마피아 같은 거라고.”

“조직에 한 번 몸담으면 쉽게 못 나가는 것처럼?”

“일단 들어오면 그걸로 끝이래. 출구가 없단다.”

“너라면 조절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취미 이상이 되면 안 될 것 같아.”

“뭐든 적당히 즐겨야지. 너무 빠져들면 생활 리듬이 깨지지 않겠냐?”

“뭐 그렇지....”

“넌 해야 할 일도 많잖아.”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찾고 있었는데, 서핑은 UCLA에 다닐 때부터 꼭 한 번은 해보고 싶었거든. 조금 빡세게 배워두면 나중을 위해 좋겠다 싶었어. 가끔 한 번씩 바다에 나가서 서핑을 하고나면 한 주가 충전이 될 것 같긴 해.“

"하긴, 다른 곳에 가도 골프나 태권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서핑은 아니지. 서핑은 캘리포니아에 사는 사람들만이 갖는 특권일 수도.....“

“너는 요새 뭐해? 골프 치냐?”

“한국에서 비즈니스하려면 골프는 기본으로 배워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골프는 할 만 해? 은근히 운동신경 꽝 이잖아.”

“돈이면 어는 정도 가능해지긴 하더라. 최고의 티칭프로에게 고액 레슨을 받았거든.”

“웬일이래? 황재정이?”

“시간과 돈을 바꾼 거지. 내가 아무리 운동신경이 없어도 2년 정도 고액과외를 받으니까 한국의 꼰대들하고 어울릴 정도까지 얼추 수준을 맞춘 것 같긴 하더라.”

“자식. 많이 쎄졌어. 날카롭기만 하던 놈이.....”

“뭔 개소리야?”

“그냥 강해진 거를 떠나서 사람이 좀 달라진 것 같다. 여유가 생긴 거 같은데? 원래는 조금 초조해 보였거든. 조바심도 드러냈고.“

“어차피 우리로서는 네 걸음을 따라 갈 수 없어. 이젠 널 추월하는 건 포기했다. 그냥 네 옆에 나란히 서는 걸로 목표를 수정했지.”


류지호의 친구들도 놀고만 있지 않았다.

해가 지날수록 무섭도록 성장하고 있다.

독일 유학중인 김준우는 여름방학에 한국에 들어와 개인 사진전을 열고 있다.

간간이 메이저 잡지에 실릴 화보촬영도 하고 있다.

고우찬은 JHO Security Services의 신입사원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김재욱은 예상보다 빠른 시간에 제작실장 타이틀을 달았다.

할리우드 직책으로 치면 라인 프로듀서(Line Producer)다.

라인 프로듀서는 계획된 예산과 스케줄에 맞추어서 제작을 진행시키는 할리우드에서도 전문직이다.

각종 비용의 계획과 승인, 인력의 고용과 해고, 스케줄에 따라 제작 관련 인원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일을 하는 위치이며, 촬영장에서 재정에 관한 모든 통제력을 행사한다.

영화 예산 실무의 핵심 책임자라고 보면 된다.

김재욱은 내년부터 WaW 픽처스에서 제작하는 영화에서 라인프로듀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두 명의 부하직원을 두게 되는데, 구체적인 예산 집행과 스케줄 관리를 책임지는 프로덕션 매니저와 경비의 수입 지출 현황을 관리하는 제작 회계를 각각 오른팔과 왼팔로 거느리고 현장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황재정은 한국으로 돌아가면 계열사를 관리하는 전략2팀장을 맡을 예정이다.


“염기훈 팀장을 호텔 사장으로 영전시킬 거라, 네가 복귀하는데 별 문제는 없을 거야.”

“낙하산을 펴지도 않고 그대로 꽂아버리게?”

“원래 내 비서실장이었잖아.”

“래리 아저씨를 불러들인 건 좋은 생각이었어.”

“래리라면 믿을 수 있지. 능력도 있고.”

“미국 회사도 그새 또 많이 늘었더라?”

“나도 몰라. 맷 그 인간이 회사 수집하는데 취미가 들렸나봐.”

“필요하니까, 인수를 했겠지. 자금은 문제없냐?”

“나스닥 주식들을 팔고 있어서....”

“아무리 무차입 경영도 좋지만, 너무 네 개인기에 의존하는 거 아니야? 사업을 자기 돈으로만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류지호의 이가 박박 갈렸다.


“왜?”

“아니야 아무것도.”


류지호는 대출이란 단어에 매우 민감한 편이다.

반지하방에서 바퀴벌레와 함께 살면서 수시로 카드론 대출 연체전화를 받을 때의 그 비참한 기분이란.

오랜만에 시나리오 하나 팔았더니 대부업체에서 득달같이 전화가 걸려와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회수해 갈 때의 그 처참한 심정은 또 어떻고.

오랜만에 고기 좀 먹나 싶지만, 빚을 갚느라 고기는커녕 쌀 살 돈도 없었을 때의 그 절망감까지.

이런 기억들은 상당부분 흐려지긴 했다.

그럼에도 궁상맞았던 지난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영혼 한 구석에 조각칼로 새겨진 것인지 불쑥불쑥 기분을 더럽게 만들곤 했다.

황재정의 음성이 류지호의 더러운 기분을 날려버렸다.


“여긴 정말 미친 것 같아.”

“뭐가?”

“쿼터제 학기가 이렇게 빡셀 줄은 직접 겪어보지 못하면 모를 거야. 넌 어떻게 UCLA에서 학기 중에 영화까지 찍었냐?“

“난 성적 욕심 안 부렸어. 졸업 하는 것이 목표였지. 그리고 예체능 특성상 전공 들어가서는 이론 강의보다 실기 위주로 돌아가니까.”

“대학원이니 그 나마 다행이지, 학부 애들 보니까 진짜 열심히 해야겠더라.”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쿼터제가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긴 한다.


“강의 자료의 매 페이지 마다 최신 논문 두세 개씩 레퍼런스는 기본이오, 두 달 남짓 되는 기간 동안 방대한 양을 커버하는데.... 이번 수업을 통해 무언가를 배웠다라는 느낌보다는 수업을 이해하기 위해 추가적으로 공부해야 할 것이 겁나 많네라는 느낌으로 강의실을 나오게 되더라고.”

“정말 수업 전에 읽어야 할 책이 많긴 해.”

“학력고사 이후로 정말 처음이었어. 매 수업시간 전후로 예습과 복습을 하고, 걸어 다니며 책을 읽게 되더라. 그런데도 따라가기가 정말 힘들어. 공부를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잘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대학원은 그 정도는 아닐 텐데?”


대부분의 미국 대학의 전통은 학부출신이 이어간다.

대학원생은 그 학교 학생이라기 보단 사실 연구하러온 직장인 비슷한 개념이기 때문에 학교 특유의 행사에 참여하고 문화를 체험할 기회 또한 거의 없는 편이다.

학위를 받는 게 쉽지는 않지만, 학부보다는 그나마 쉬웠다.

물론 의학전문대학원과 로스쿨, 공과대학원은 예외다.


“스탠퍼드 학생들이 얼마나 똑똑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거든.”

“뭐라고 대답했는데?”

“당연히 서울대나 스탠퍼드 학생들이나 똑똑해. 근데 진짜 천재라고 할 만한 학생은 소수에 불과하잖아. 반대로 거의 대다수의 학생에게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그들이 다재다능하다는 거지.”


황재정은 만능이란 표현 대신 다방면에서 조금이라도 뛰어나다고 표현했다.

능력이 비슷하다면 좀 더 사교적이고, 다방면에서 식견을 두루 발휘하는 사람이 더욱 인정받는다.

졸업 후 진로가 교수나 학자가 아니라면, 대학 내내 전공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경험과 스펙을 쌓는 것이 미래를 위해서도 좋았다.


“어릴 때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길을 알려달라고 물은 적이 있었지?”

“어디로 가고 싶은가에 달렸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어디든 상관없다고도 했고.”

“맞아. 어느 길로 가든 상관없잖아?”

“···.어디든 도착만 한다면.”

“누구나 틀림없이 도착하게 되어있어. 계속 걷다 보면 어디든 닿게 되거든!”

“넌 진짜 미친 놈 같아. 보면 볼수록. 천재가 아니야 넌. 그냥 미친놈이지.”

“이건 비밀인데... 멋진 사람들은 다 미쳤어.”


류지호가 짐짓 턱을 추켜들며 우쭐 거렸다.

친구 앞이니까 하는 가벼운 행동이다.


“이제 옛날이야기는 그만 하려고.”

“옛날이라고 해봤자, 10년 전이거든.”

“어제 이야기는 아무 의미가 없어. 왜냐하면 너와 나는 어제의 우리가 아니니까.”


자신이 구축해 놓았던 세계의 틀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 상황과 마주칠 때 평범한 사람은 좌표를 상실하게 된다.

바로 그때, 처음부터 자신이 누구인지를 새롭게 찾기 시작하게 된다.

내가 누구였더라....?

그리고 그로부터 자신을 찾는 새로운 여정이 시작된다.

새로운 세계로의 출구를 찾아내고 여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의지뿐이다.


며칠 후.

황재정마저 한국으로 떠났다.


“연말에 한국에서 보자.”

“너무 서핑에만 몰두하지 말고.”


류지호는 친구가 출국게이트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그러면서 기원했다.

초조함, 부담감이란 무거운 겉옷을 비로소 벗어 버리고.

인생의 새로운 여정에 들어선 친구의 앞날에 행운이 깃들기를....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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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 Quantum Jump! +5 23.02.15 3,733 134 21쪽
421 시작은 미약하지만...! (3) +8 23.02.14 3,690 123 21쪽
420 시작은 미약하지만...! (2) +6 23.02.13 3,763 116 21쪽
419 시작은 미약하지만...! (1) +6 23.02.11 3,826 121 24쪽
418 어리광은 그만 부려야 하지 않을까? +7 23.02.10 3,808 131 25쪽
417 Timely Cinematic Universe! (2) +7 23.02.09 3,822 121 24쪽
416 Timely Cinematic Universe! (1) +5 23.02.08 4,013 130 23쪽
415 언제 그런 거 신경 쓰면서 영화 했어? (3) +4 23.02.07 3,815 124 23쪽
414 언제 그런 거 신경 쓰면서 영화 했어? (2) +6 23.02.06 3,862 129 25쪽
413 언제 그런 거 신경 쓰면서 영화 했어? (1) +29 23.02.04 3,949 132 23쪽
412 화끈하게 갑시다! (2) +5 23.02.03 3,817 129 21쪽
411 화끈하게 갑시다! (1) +4 23.02.02 3,837 125 24쪽
410 꿈의 직장이잖아요. +11 23.02.01 3,962 140 30쪽
409 너희가 삼류를 아느냐? (3) +9 23.01.31 3,774 141 27쪽
408 너희가 삼류를 아느냐? (2) +5 23.01.30 3,782 129 26쪽
407 너희가 삼류를 아느냐? (1) +7 23.01.28 3,852 131 20쪽
406 예술 한 번 해보자고! +8 23.01.27 3,971 139 25쪽
405 그 양반들 간이 많이 커졌네. +2 23.01.26 3,987 144 24쪽
404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5) +6 23.01.25 3,956 142 23쪽
403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4) +9 23.01.24 4,014 145 23쪽
402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3) +6 23.01.23 4,019 149 20쪽
401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2) +17 23.01.21 4,144 161 29쪽
400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1) +18 23.01.21 3,891 127 26쪽
399 태풍을 예고하기라도 하듯이.... (2) +12 23.01.20 4,097 149 26쪽
398 태풍을 예고하기라도 하듯이.... (1) +6 23.01.19 4,110 145 23쪽
397 월스트리트 저널 테스트. (3) +14 23.01.18 4,042 146 28쪽
396 월스트리트 저널 테스트. (2) +13 23.01.17 4,046 156 27쪽
395 월스트리트 저널 테스트. (1) +6 23.01.16 4,088 149 24쪽
394 좀 더 자신을 믿어보게. +10 23.01.14 4,092 148 27쪽
393 Surfin USA! (3) +8 23.01.13 3,921 145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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