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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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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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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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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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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4)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그리고 말입니다. 영화판에서 평생을 헌신하다가 은퇴하는 영화인들이 풍족하진 않지만 나름 연금을 받으면서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반평생을 영화업계에 종사하면서 남은 것은 지병과 월세가 밀린 반지하방 뿐.

류지호는 그나마 악착같이 버티고 버텼던 거다.

어린 후배들이 생활고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었다.

누구는 그걸 개인의 무능과 잘못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오죽 못 났으면 그러냐고.


“나는 영화인들의 경제적인 궁핍함이나 생활고를 국가나 사회의 책임 또는 짐으로 떠넘기고 싶지 않아요.”


한종혁은 임금인상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예상했다.


“업계가 해결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예술을 하는 판이잖아요. 그러니 자본주의 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어야겠죠.”


류지호가 충무로 영화인 모두를 먹여 살릴 수도, 영화 산업 전체를 책임질 수도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다만 최소한, 기본적인 것만은 만들어놓고 싶었다.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차고 넘치게 충족되었다.

그러고도 남는 경제적 풍요를 자신의 일터를 위해 써도 될 정도로.


“그래서 대유증권을 인수·합병하는 것과 함께 이번 참에 보험업도 진출하려고 합니다.”


한종혁 팀장은 뜬금없는 보험업 진출에 얼굴 가득 의문부호를 그렸다.

영화사나 스턴트 또는 특수효과 부서가 보험을 들을 수는 있다.

영화나 드라마 촬영을 하면서 불의의 사고로 배우와 스태프가 사망하는 일이 몇 번 있었으니까.

문제는 영화인들의 평균적인 소득수준을 봤을 때 보험 가입이 만만치 않았다.

프리랜서들이라서 직장보험을 가입할 수도 없고.


“영화인 분과별로 교섭 자격이 있는 노조나 조합이 만들어지면 그들 단체가 연금이나 상조를 만들 수 있도록 해 볼 생각입니다.”


한종혁은 감히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했지만, 백퍼센트 실패에 한 달 월급을 걸 자신이 있었다.

미국처럼 영화인 수백만 명이 업계에서 종사하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의 영화인들은 돈을 모으는 것이나 쓰는 것에 개념이 없었다.

한종혁이 볼 때는 영화인이라는 사람들은 대체로 즉흥적인 면이 강했다.

내일이 없는 사람들 같다고 할까.


“영화인 단체가 보험사에 맡긴 연금을 운용해 큰 이익이 나도록 도와줄 겁니다.”


보험사가 류지호의 투자를 그대로 따라하면 된다.


“각 조합의 연금 재정을 풍족하게 만들어서 조합원들의 부담을 줄여야겠죠.”

“....음.”

“물론 각 조합은 절대 원칙을 세워야 할 겁니다. 많이 버는 조합원이 더 많이 부담한다.”


한국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방식이다.

더 많이 버는 사람이 덜 내고 싶어 온갖 꼼수를 쓰는 나라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유인책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고액의 연금을 내는 헤드스태프의 세금을 조금 낮춰주는 것 같은.”

“안 될 겁니다 아마도.... 그래도 고민해봅시다. 조합이 직접 연금을 관리하게 하면서 세제혜택을 받게 할 것인지. 가온그룹 계열의 보험사가 연금을 관리해주면서 영화인 특약 패키지 상품으로 고액 납부자에게 인센티브 형식으로 제공할지 등.....”

“추후 보험사가 계열사로 들어오면 함께 논의를 해보겠습니다.”

“한 팀장은 내가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으라고 말해주는 겁니다. 따로 한 팀장 선에 뭔가 준비할 것은 없어요. 적어도 십년은 이른 이야기니까.”

“아....”

“혹시 모르니 영화인 재교육 강사들에게 넌지시 그런 이야기를 흘려 봐요.”

“감독님께서 구상하시는 일이 시스템보다는 의식개선과 문화가 받쳐줘야 하니까요?”

“정확해요. 충무로 문화와 의식이 변해야 합니다.”


조합이나 길드는 하루하루 업무에 치일 정도로 바빠야 정상이다.

조합원들의 권리침해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니까.

그런데 충무로 협회들은 동네 이발소나 노인정 같다.

심지어 영화인회의도 친목단체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노조로서 인정을 받는 조합이나 길드가 하루 빨리 만들어져야 한다.

모래알 같은 영화인들을 뭉치게 할 수 있는.

또 자기 밥그릇을 스스로 챙길 수 있는.


“아무래도 토종 충무로 자본 중에서는 무비서비스가 스튜디오로 개편되는 것에 가장 근접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무비서비스가 되었든 우노필름이 되었든.

류지호는 충무로 토착 제작사 중에서 메이저 스튜디오가 나오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한국영화에 대한 애정이 있다.

또한 업계 종사자들의 처우에 대해 안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다.

영화로 번 돈을 다시 영화에 투자하고, 성공하면 스태프들의 보수도 신경 쓴다.

기업처럼 오로지 이윤과 성과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한국영화 전체의 질적인 부분도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가만, 로터스가 이맘때 상장사가 되지 않았나....?’


류지호는 회귀 전 기억을 끄집어냈다.

이 시기 즈음해서 벤처 쪽에서 신기한 경영 덕에 주목받는 기업 둘이 있었다.

소위 벤처연방제를 주창한 메딕슨과 그 연방제라는 개념을 충실히 따른 로터스다.

결국 벤처연방제라는 개념이 황당한 소리로 치부되었지만, 이 당시만 하더라도 그들의 기세는 정말 기존의 재벌들을 몰아 낼 것 같이 무서웠다.

메딕슨은 엄청난 현금을 고스란히 날리는 재주밖에 없었다.

하지만 로터스라는 회사는 벤처연방제의 가능성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보여줬다.

류지호는 로터스의 다른 분야의 투자는 잘 알지 못했다.

다만 영화 부분에 한정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BS E&M 등장 이전 엔터테인먼트 공룡 기업이었다.

무비서비스와 우노를 모두 품었을 정도였으니까.


“혹시 로터스 홀딩스라는 회사와 충무로가 결합하는 움직임은 없어요?”

“무슨 회사인지....?”


한종혁 팀장이 모를 정도면 아직 로터스가 충무로 전면에 등장하진 않은 모양이다.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말아요.”


참고로 로터스는 올해 코아텍이라는 회사를 인수한 후 사명을 로터스 홀딩스로 변경한다.

지주회사 밑으로 30개에 달하는 자회사들을 거느리게 된다.

헌데 자회사와의 관계가 대기업의 주종적인 관계가 아닌 TriGem그룹의 ‘회원사’ 개념과 비슷했다.

이전 삶에서 최전성기에는 산하의 회원사로 맺어진 자회사들이 대단했다.

영화 제작투자배급사인 무비서비스, 영화관 체인 프리머스시네마, 영화제작사 ASTRO, 음반 및 매니지먼트사 ASTRO HQ와 ASTRO 계열의 영화관 씨너스, 한국 굴지의 음반제작 & 도소매업체 예정미디어와 영화 세트, 장비 대여업체 시네마아트, 영화 투자배급사 청우람과 IM픽처스, 방송용 프로그램제작사 김영학 프로덕션, 매니지먼트사 맥시컴퍼니, 든든한 골수 마니아들을 잔뜩 재어 놓은 손놀이 게임, 그리고 온게임네트, 제네세스 멀티미디어, 포스닥, 이 앤 텔, D & D, 웹시네마, 보다텔 등.

BS E&M이 일부 자회사를 인수하기 전까지 그 기세가 실로 무서웠다.

비록 10년 천하는커녕 4년을 채 채우지 못했지만.

출범 당시의 의도는 좋았다.

그러나 계열사가 거의 30개에 육박하자 회사 안에서 온갖 불협화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인 여러 기업들의 사장들은 믿음으로 모인 게 아니다.

로터스의 자본만 보고 모였다.

어쩔 수 없는 삐걱거림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 무리의 수장들을 이끌 강력한 리더십도 없었고.

가장 먼저 ASTRO가 로터스 연방에서 탈퇴했다.

로터스와 무비서비스가 합병하면서 상대적으로 찬밥이 된 ASTRO 픽처스였으니 한편으로 이해가 가는 결정이었다.

로터스 연방체제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던 ASTRO였다.

큰 축의 이탈로 새로운 개념의 한계가 드러났다.

사실 자본만으로 묶인 회사들이 무슨 일을 같이 한다는 것은 힘들다.

벤처 연방으로 모이는 과정이 기업사냥꾼들의 수법과 다르지 않았고.

로터스 홀딩스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경영이 안정된 산하 회사를 하나하나 통합하기 시작했다.

또 다시 실책을 범했다.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다.

산하의 게임 회사 NMG와 합병했는데, 지주회사보다 NMG의 가치가 더 높았다.

합병으로 인해 로터스(플래너스)는 지주회사 역할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산하 기업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분사했던 무비서비스가 BS E&M에 매각되었다.

멀티플렉스 사업 외에 영화투자배급에서 별다른 영향력이 없었던 백설그룹이 본격적으로 한국 영화 산업에서 거대한 지분을 갖게 되는 계기였다.

똑똑한 척은 엄청 해댄 영화계 거물들이다.

M&A전문가이자 금융가들에게 홀딱 넘어갔다.

결국 일궈놓은 것을 빼앗기고 대기업에게 갖다 바친 꼴이 되었다.

그것이 이전 삶의 충무로의 역사다.


‘그렇게 대기업에 다 갖다 바쳤으면 본인들이라도 떼돈을 벌어서 떵떵거리고 살면 좋으련만....’


시대를 풍미한 이름들이 뒷방 늙은이가 되어버렸었다.

유명 대학 영화과 강단에서 후학도 기르고 나름 영화계 어른 대접을 받긴 했다.

영화 제작자가 투자를 못 받으면 그런 삶이 과연 보람이 있을까.

그것도 환갑도 안 된 한창 나이에.


‘그냥 내버려둬야 할까? 아니면 선배들이 자본가들에게 이리저리 치이지 않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까?’


로터스 연방에 합류했던 영화계 선배들에 대해 류지호가 존경심이 크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무비서비스와 ASTRO가 대기업에 인수합병 되고 두 명의 전설적인 제작자가 실권을 상실하게 되면서 그들만의 영화적 도전과 색깔이 없어진 양산형 한국영화가 제작되는 불행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이 마뜩찮았다.

또한 로터스의 붕괴 과정에서 연쇄적으로 중소 배급·제작사들이 몰락한다는 것도 신경 쓰였다.

이전 삶에서는 그 일로 인해 스크린 독과점과 영화 창작의 주도권이 대기업 자본에 완전히 종속되게 되는 분기점이 되었다.

즉 바람직하지 않은 영화계 환경이 조성되는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대기업이 주도권을 쥠으로써 산업은 안정된다.

대신 한동안 창작력이 제자리걸음 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한 팀장, 우리가 무비서비스와 ASTRO를 품에 안으면 한국영화를 다 먹게 되겠죠?”

“감독님 지시로 50%가 넘을 수도 있는 한국영화시장에서 점유율을 간신히 40%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마 두 제작사를 자회사나 계열사로 받아들이면 독점에 가까운 지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대기업에 넘어가게 내버려두기도 영 거슬리는데.....”


류지호는 대기업이나 금융자본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세하고 불안정한 한국영화의 든든한 자금줄이다.

또한 좋은 파트너다.

문제는 영화인들이 너무 어설프게 굴다가 그들 밑으로 종속되었다는 사실이다.

영화란 상품을 오로지 이윤 획득의 수단으로만 보고, 영화계 특유의 문화를 무시한 채 돈벌이 도구로만 여기다가 결국 창작자들의 도전의지를 꺾어버린 사례들.

점차 관객들은 식상함에 질려 가고, 소수의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감독이 견인하는, 일본과 홍콩영화계가 걸었던 몰락의 길이다.

일본영화와 홍콩영화는 자국 내에서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한국영화라고 해서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물론 미국계 OTT가 한국영화의 영광을 수년 간 이어갈 수 있게 해주긴 하지만.

돈이 안된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다.

한국영화계에 투자한 것이 아니라 한국산 상품에 투자를 한 것이니까.

할리우드라고 해서 그런 과정을 피해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스스로 혁신하면서 돌파구를 마련해냈다.

독립영화나 B급 영화판을 침범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배웠다.

그곳에서 새로운 혁신이 일어나고 돈을 벌어줄 인재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알게 됐기에.

할리우드와 뉴욕의 영화계가 대립하고 있지만, 미국의 영화산업전반이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에는 협력을 하고 있다.

물론 할리우드는 거대한 자본에 종속되어 몰 개성한 영화들이 양산되고 있기는 했다.

그럼에도 인디영화와 B급영화에서 문제작과 문제적 인물들이 탄생해 꾸준히 신선함을 제공하고 있다.


“그랜드벨어워즈 측의 스폰서는 계속해서 거부하실 생각이신지.....”

“올해부터 영화인회의에서 주최한다면서요?”

“예.”

“관제 시상식, 비리로 ‘얼룩진‘ 이란 멍에는 쉽게 벗지 못할 겁니다. 마음 같아서 역사속에서 퇴장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데.... 조광영화상과 경쟁할 번듯한 영화제 있으면 좋으련만.”

“한국연극영화TV예술상이 있지 않습니까?”

“TV 부문도 함께 시상하잖아요.”


영화시상식은 단순히 영화인에게 상을 주고 축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거대한 퍼포먼스다.

영화상의 권위는 그 국가의 영화산업의 현주소를 보여주기도 한다.

일본과 홍콩 영화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그들 국가의 영화시상식도 덩달아 권위가 있었다.

아시아 각국에서 주목했다.

이젠 아니다.


“일본과 홍콩 영화제의 공백을 부산국제영화제가 잘 비집고 들어간 것처럼 국내 영화상도 아시아를 대표할 만한 빅 이벤트가 되면 좋을 텐데....”


아카데미 시상식은 본 행사가 열리기 전 최소 3일 전부터 축제가 시작된다.

그리고 아카데미 레이스라고 해서 프로모션이 대략 반년 전부터 시작된다.

게다가 아카데미 수상은 심사위원 몇 사람만의 밀실 야합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시상식의 수상작·수상자는 대략 5,000명(2000년 현재)의 아카데미 회원들의 투표로 결정된다.

회원들은 오로지 자신이 일하고 있는 분야에서 다섯 편을 선정할 수가 있다.

다만 작품상은 모든 회원이 투표할 수 있다.

영화 업계의 전문가들이 그 해 가장 좋았던 영화를 선정하는 방식인 것이다.

반면에 한국은 소수의 심사위원을 선정해서 그들에게 전권을 준다.

백인 남성의 취향과 의견이 대세라고 욕먹는 아카데미지만, 적어도 십 여명의 전문 심사위원에 의해 수상작과 수상자가 결정되는 한국의 영화시상식보다는 공정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암튼 보고 하느라 수고했어요.”


한종혁 팀장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류지호가 주머니에서 휴대폰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사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가 업무용이다.

업무용은 한국에서만 쓰는 번호다.

저장되어 있는 번호를 눌렀다.

잠시 후,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이구, 이게 누구야? 살아 있었나 보네?


우노필름의 차성재 대표다.


“말투가 어째 제가 죽길 바랐던 같네요.”

- 하하하.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내가 충무로를 먹고 좋은 거지 뭐.

“쳇. 그래서 WaW랑 안하고 백설그룹으로 갈아타셨어요?”

- 그거야 투자루트는 다양한 것이 좋잖아. 걔들은 기획비도 주고 말이지.


틀린 말은 아니다.

우노필름은 WaW 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가 아니다.

WaW의 이름값 때문에 영화사 브랜드를 상실하느니 대기업과 금융권까지 루트를 다양화하는 건 현명한 처사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백설그룹은 영화 세 편을 묶어서 기획비를 대주고 있다.

WaW 엔터테인먼트는 기획비를 지불하지 않는다.

그 비슷한 명목의 회계항목은 개발비다.

개발비는 영화 예산에 포함된다.

백설그룹이 지불하는 기획비는 영화예산에 반영이 되지 않는 비회계 자금이다.

당연히 백설그룹이 주는 기획비의 회계처리는 두루뭉술했다.

WaW 엔터테인먼트는 두루뭉술한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영화 제작의 주도권이 충무로에 있었다.

따라서 대기업과 금융이 영화제작사의 방식에 맞추는 분위기다.

유독 WaW 엔터테인먼트만 까다롭게 굴었다.

그럼에도 프로듀서와 제작사들은 WaW를 찾을 수밖에 없다.

WaW 엔터테인먼트가 투자·배급하는 영화의 흥행 성공확률이 매우 높았고, 강력한 배급력과 다수의 극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쁘십니까?“

- 돈 구하러 다니느라 정신없지. 누가 하도 깐깐하게 굴어서.

“내년에 WaW와 두 작품 하는 거 아니었어요?”

- <화산고> 깠잖아.

“WaW도 포트폴리오가 있어요. 1년에 투자·배급할 영화가 정해져 있어요. 잘 아시면서.”


WaW 엔터테인먼트는 올해 우노필름이 제작하는 영화 3편을 투자·배급한다.

어쩌면 로터스 홀딩스에 인수되기 전 우노필름과의 마지막 작품이 될 수도 있다.

<시월애>,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플란다스의 개> 세 편이다.

그 외에 <행복한 장의사>는 백설그룹에서 투자배급을 맡기기로 했다.


“<무사>는 백설, 일본과 공동제작하기로 확정되었어요?”

- 응.

“결국 그렇게 됐군요?”

- 근데 웬일이야 먼저 전화를 다 주고?

“이번 주 언제 시간 괜찮으세요?”

- 이번 주?

“술 한 잔 사주세요.”

- 술은 류 감독이 사야하는 거 아냐?

“술은 어른이 사야죠. 후배가 사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 나만?

“강 감독님도 함께 보면 좋고요.”

- 강은석 감독?

“예.”

- 스케줄 확인하고 전화 줄게.


통화를 끝낸 류지호가 무비서비스의 강은석 감독과도 통화해 약속을 잡았다.

류지호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창가로 걸어갔다.

길 건너편에는 한창 한교타워 터닦이 공사가 진행 중이다.

한 낯임에도 GOM사거리(구 제일생명 사거리)는 차량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두 번째 밀레니엄을 경험했지만... 아직도 실감이 잘 안 나네.”


10여 년 동안, 이전 삶의 기억으로 큰 어려움 없이 보낸 것 같았다.

영화감독으로 또 사업 모두에서 나쁘지 않은 토대를 쌓았다고 자부했다.

21세기에는 모든 걸 기억에만 기대서는 안 된다.

우물 속에서 바라보던 하늘을 아득히 뛰어넘는 광활한 하늘 아래, 평원 작은 성을 쌓았을 뿐이다.

앞으로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성을 지키는 한편 더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터전을 늘려나가야 한다.

쉽지 않은 도전이 될 것이다.


[경험은 결코 늙지 않습니다. 경험은 결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영화 <인턴>에서 시니어 인턴 벤(드니로)이 한 말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도 한다.


[옳은 일을 하는 건 절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류지호는 사업적으로 예술적으로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누구보다 월등한 경험을 해봤다는 점.

비록 잊고 싶은 기억도 뼈아픈 상처도 있었지만, 이전 삶의 경험은 결코 배신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 ❉ ❉


김양호가 가온그룹 의장 집무실 앞에서 꽤 긴장한 모습으로 서성거리고 있다.


후우.


김양호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의장님을 마주한다는 생각에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중이다.

몇 번 의장님을 수행했었다.

첫 대면은 아니다.

백화점 사업과 관련된 브리핑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오너가 주는 중압감이 대단했다.

게다가 일개 부서의 장이었던 자신을 사장으로 임명한 오너다.

무거운 책임감과 함께 사장 입장에서 오너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툭.


누군가 어깨를 쳤다.


“안 들어가고 뭐해요?”


김양호가 돌아섰다.

전략기획실장 문지열과 신임 2팀장 황재정이 나란히 서있다.


“오셨습니까?”

“들어갑시다. 의장님 기다리시겠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의전비서가 의장집무실 문을 열었다.


두근두근.


김양호의 심장은 더욱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사실은 기분 좋은 긴장이기도 했다.

자신은 부장이 아닌 5개 지점을 가진 백화점 체인의 사장이다.

가온의 그룹 개편 이후 의장과 첫 대면을 하는 임원이 됐다.

그만큼 기대를 받고 있다는 의미다.

문이 완전히 열리고, 저 끝에 있는 류지호 의장이 보였다.

흥미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흐뭇한 표정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쿵쾅거리던 김양호 사장의 심장이 안정을 찾아 갔다.


“안녕하셨습니까?”


문지열과 황재정도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류지호가 빙긋이 미소를 그렷다.


“너무 예의를 차리지 맙시다. 자, 저쪽으로 가서 앉읍시다.”


의전비서들이 커피를 내오고, 류지호는 세 사람과 잠시 환담을 나눴다.

류지호가 문지열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염기훈 팀장이 호텔로 옮기게 돼서 서운해 하진 않습니까?”


가온그룹 계열사를 관리하던 막중한 임무가 황재정에게 넘어갔다.

전임 비서실장이었다고 해도 과한 낙하산 인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런저런 말이 나올 만했다.


“영전이잖습니까. 의욕이 넘칩니다.”

“문 실장은 괜찮습니까? 센텀시티까지 맡게 됐는데.”

“업무 과중을 우려하시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제 능력 밖의 중책을 맡아 감당해 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대유건설을 인수할 때까지만 문 실장이 맡아줘요.”

“예. 의장님.”

“황 팀장은 업무 인계는 잘 받았습니까?”

"염 사장님이 업무를 꼼꼼하게 처리해놔서 크게 어려운 점이 없었습니다.“

“그래요. 황 팀장이 근무할 때에 비해 계열사의 숫자나 규모가 월등히 커졌어요. 만만하게 보면 안 될 겁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류지호가 김양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김 사장, 신촌점이 재개장을 했던데, 다른 지점도 모두 영업 중입니까?”

“신촌점을 시작으로 노원, 대전, 성남점이 영업 중입니다. 부산점은 G.O.M에 매각한 상태로 아직 극장 리모델링 공사가 끝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향후 인천점. 대구점, 센텀시티 점이 갖춰지면 업계 4~5위권에 들것으로 예상합니다.”

“적자를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방 지점들은 경기가 살아나지 않은 관계로 겨우 적자를 면하고 있습니다. 대신 멀티플렉스가 새롭게 입점한 신촌점의 경우 예년 수준인 3,000억 수준은 달성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영업이익은 예전 수준인 170억 원보다 줄어들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유는....”

“왜 말하다가 멈춥니까?”


황재정이 끼어들었다.


“몰라서 그러십니까?”

“뭘...?”

“그룹으로 개편하면서 비정규직 제로 선언했잖습니까? 단순 업무를 보는 인턴이나 단기 아르바이트 빼고 다 정규직으로 돌려서 회사마다 난리입니다.”


가온그룹 계열사들은 업종의 특성상 프리랜서 계약과 비정규직이 많았다.

류지호는 비정규직이 많은 영화, 백화점, 극장 사업에 정규직 전환을 지시했다.

외환위기를 겪으며 노동시장 유연화 차원에서 기업들이 주기적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있다.

그로 인해 정규직 대신 비정규직 채용을 확대하는 추세다.

같은 일을 해도 비정규직은 임금·복지 등에서 차별을 감수해야 한다.

정규직 전환 가능성이 있긴 해도 크지 않았다.

기업들의 구조조정은 현재도 진행 중이고, 많은 기업들에서 해고나 명퇴가 빈번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가온그룹 계열 회사들은 신규 직원 채용을 수시로 하고 있지만, 기존 비정규직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작업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어쨌든 비정규직이 사회문제로 크게 대두되는 시기는 몇 년이 더 흐른 시점이다.

아직은 그 문제가 크게 피부에 와 닿을 정도는 아니다.


“의장님 이름으로 된 위인전 나오면 당장 달려가 살 분위기입니다. 하하.”


작가의말

연휴 마무리 잘 하시고, 즐거운 마음으로 한 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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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9

  • 작성자
    Lv.99 시역과의
    작성일
    23.01.24 09:47
    No. 1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8 모란
    작성일
    23.01.24 09:58
    No. 2

    영화인 연금이 젤 아려울듯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7 lo******
    작성일
    23.01.24 10:00
    No. 3

    이상주의자^^

    찬성: 2 | 반대: 0

  • 작성자
    Lv.99 ehqur
    작성일
    23.01.24 10:29
    No. 4

    연금받고 안정된 생활하려면 방송국가지 왜 영화하겠어요

    찬성: 2 | 반대: 0

  • 작성자
    Lv.99 하얀유니콘
    작성일
    23.01.24 12:44
    No. 5

    2010 쯤에 유명 영화사 20대 여자 막내작가
    가 굶어 죽은 일이 있습니다.
    영화가 성공해도 수익의 80프로를 배우와
    제작자가 먹고 나머지를 스태프가 먹는 구조라
    일기장에 배가 고파죽을 지경이라고 써놨더군요.
    일을 하는테도 돈을 안줘서... ㄱㅅㄲㄷ

    찬성: 2 | 반대: 0

  • 작성자
    Lv.99 OLDBOY
    작성일
    23.01.24 13:34
    No. 6

    국민연금의 의의가 그거죠. 개인적으로 알아서 하라고 하면 절대 돈 못 모으는 사람의 비율이 압도적이니까요. 예술계는 그것이 더 극심하고요. 그걸 보고 자란 후대가 과연 영화계에 도전할까요? 그렇게 시장의 규모가 줄다 보면 시장이 망하는 겁니다. 문젠 국내에서만 지지고 볶을 일이 아니란 거죠. 현재도 외국과 싸우고 있는데 밀려버리면 진짜 빨대 꼽히는 겁니다. 홍콩과 일본이 이 꼴 났죠. 그걸 걱정하는 겁니다. 잘 보고 있어요.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59 루시오엘
    작성일
    23.01.24 13:43
    No. 7

    잘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범패
    작성일
    23.01.25 05:13
    No. 8

    모바일17/28 waw도 포리폴리오가 ㅡ 포트폴리오 ?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3 트뤼포
    작성일
    23.01.28 21:13
    No. 9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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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5) +6 23.01.25 3,954 142 23쪽
»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4) +9 23.01.24 4,014 145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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