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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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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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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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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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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5)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아주 인기인이 되셨습니다. 아! 원래 인기인시죠. 슈퍼스타가 되셨습니다.”

“다 회사에 도움이 됩니다. 뱁새가 황새의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


문지열 실장이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일반적인 기업이라면 있을 수 없는 모습이다.

감히 팀장 나부랭이가 회장에게 싸가지 없이 까불대다니....

그런데 가온그룹에서는 임원과 직원들 간에 나이에 따른 위계질서나 군대서열 문화가 느슨한 편이다.

황재정처럼 노골적으로 까불거리진 않지만, 대체로 평사원들도 간부들에게 할 말은 하는 편이다.


“다른 기업들은 정규직을 계속해서 축소하고 비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가온그룹은 그 반대이니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언론에서도 칭찬이 자자하지요.”


래리 킴은 회장으로 부임한 후로 가온그룹 산하 기업들의 업무 보고와 사업 진행들을 검토하고 조정하는 데만 한 달이 소요되었다.

그가 한국에서 웨딩 사업부문에 관여할 때보다 기업들이 월등히 커지고 사업들의 규모 또한 이전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대기업들의 사업규모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직은 작았지만.

그럼에도 수억 원에서 많게는 수천억 원의 자금이 들어가는 신규 사업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특히 센텀시티 가온타운 개발은 단일 사업규모만 놓고 봐도 조 단위의 투자가 이루어질 예정이다.

10년 후에는 매년 조 단위의 매출을 거둘 수 있는 규모의 사업이긴 하지만.

게다가 국내에만 머물지 않고 해외 사업들이 준비되고 있다.

가온그룹 계열사 사장들은 의욕에 불타올랐다.

올해 각 사업별로 막대한 자금을 투입할 것이라 오너가 공언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긴급한 사업부터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김양호 사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가온으로 온 걸 후회한 적이 있었습니다.”


황재정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좋은 분위기에 초를 치려는 줄 알았다.


“사실 주위에서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IMF라고 하더라도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오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러데 처음으로 후회 한 걸 후회했습니다. 지금은 제가 좋은 회사 다니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회사의 분위기가 긍정적으로 바뀌면 업무 능력도 올라가기 마련이다.

비록 100대 기업에 이름을 올릴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가온이 그룹으로 위상이 올라가면서 대기업의 이름값 앞에서 주눅 들던 직원들 사이에서 한번 해보자 라는 도전적인 모습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곧장 나타났다.

무주리조트 매출, 백화점 매출이 인수전보다 늘었다.

일단 그룹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 사업 부문에서 매년 무서운 성장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인수·합병한 회사 직원들의 눈빛은 도전 정신을 넘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해지고 있었다.

류지호가 화제를 돌렸다.


“내부 인사 처리는 잘되어 갑니까?”


황재정이 대답했다.


“승진 인사와 자리 배치를 모두 끝마쳤습니다.”

“한동안 어수선할 줄 알았는데 수월하게 자리를 잡을 것 같군요.”


가온그룹 산하 기업들의 인사 대부분을 끝냈다.

새롭게 계열사로 편입되었거나 이제 막 사업에 진입한 분야에서 대규모 인력 보강도 이루어졌다.

기존 회사에서도 많은 인사이동이 있었다.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한 인사였다.

승진한 인물 중 상당수가 파격적인 인사였다.

가온그룹의 인사 시스템은 나래안전 조사팀의 도움을 받아 각 계열사의 핵심 인물들에 대해서 철저하게 조사한다.

업무 처리 능력은 물론이고, 인성과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성, 평판 같은 외부적인 상황도 인사 시스템에 등재되어 있다.

가정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것도 승진 인사에 고려될 정도다.

류지호는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인간은 목표의식만 뚜렷하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열심히 하게 되어 있다.

젊고 유능한 인사들이 대거 고위임원으로 승진하는 것을 봤으니, 야망이 있는 직원들이 자극을 받아 더욱 열심히 할 것이다.

또한 류지호는 직원들의 불필요한 야근과 주말 근무를 철저하게 배재했다.

단순히 열심히 일만 하는 것은 비효율이다.

잘하는 것이 효율이다.

정해진 일을 정해진 근무시간 안에 해내는 것이 진짜 실력이다.

그 같은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것이 기업의 역량이고.


“두 사람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앞으로도 잘해줄 것이라 믿어요.”


김양호가 아부성 발언을 했다.


“이 모든 것이 의장님의 복 아니겠습니까?”


얼씨구.

문지열 실장이 또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아무리 밑의 사람들이 올바른 제안을 한다 해도 이를 실행에 옮길 사람이 귀를 닫고 있으면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류지호에게 두 사람이 두 손을 공손히 맞잡았다.

그 꼴을 지켜보는 황재정은 점심 먹은 것이 올라올 것 같았다.

어쩌랴, 상관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월급쟁이의 숙명인 것을.

황재정이 볼 때 류지호는 준비된 뛰어난 경영인은 아니다.

하지만 좋은 기업가가 될 수는 있다.

한때 라이벌이었지만, 영원한 죽마고우를 보며 황재정은 그런 생각을 했다.


❉ ❉ ❉


지난 10년 동안 충무로는 전례 없는 지각 변동을 겪었다.

가장 큰 변화는 한국영화에 애정이 없는 제작자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간 점이다.

외화를 수입해서 돈을 벌고, 수입에 필요한 쿼터를 채우기 위해 마구잡이로 영화를 찍어대던 제작자들이 설 땅이 없어졌다.

또 하나의 사건은 할리우드 직배사의 공습으로 인해 한국영화 고사를 걱정해야 했던 한국영화가 우려를 씻고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 중심에 WaW 픽처스와 젊고 창의적이며 도전적인 프로듀서들이 있었다. 실제로 9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서 제작되는 영화 70% 이상이 WaW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20명 남짓한 기획자들의 손을 거쳤다.

그들이야말로 한국 영화의 경쟁력을 높인 주역들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탁월한 흥행 감각을 선보이고 있는 신강, 영화 마케팅의 귀재라는 평판을 듣고 있는 여성 기획자 심희명, 항상 새로운 감각으로 승부한다는 차성재가 대표적이다.

작년 극장가 흥행에서 한국 영화가 차지한 비율은 무려 40%가 넘었다.

서울 지역에서만 244만 명이라는 경이적인 숫자의 관객을 동원한 양성규 감독의 <쉬리>는 물론이고 <주유소 습격사건>이 84만 명을 동원했으며, <텔미섬딩>이 73만 명,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68만 명, <해피엔드>가 55명, <자귀모>가 42만 명, <유령>이 36만 명을 거두는 흥행성공을 거뒀다.

고작 10여 만 명 끌어 모은 ‘실패작’이 흥행 베스트5 자리에 안쓰럽게 끼어들곤 했던 한국영화계였다.

그런 시대에 비한다면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관객들이 한국 영화를 찾았다.

이들 작품의 성공 비결 속에는 앞 서 네 명의 이름이 꼭 끼어있다.

박건호 대표는 WaW 픽처스를 통해 <쉬리>,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텔미섬딩> 등을 투자·배급했고, 강은석 감독은 자신이 대표로 있는 무비서비스를 창구 삼아 <주유소 습격사건>, <자귀모> 등을 히트시켰다.

양성규 감독은 <쉬리> 대성공 이후 자신의 프로덕션을 통해 <은행나무 침대Ⅱ>를 제작했고, 차성재는 <유령> 외에도 마니아적 요소가 강한 장르영화들을 계속해서 선보이고 있다.

박종환·이태양·강태진으로 대표되던 한국영화 배급계의 트로이카 체제가 21세기를 맞아서는 WaW 픽처스로 천하통일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다.

그 뒤를 박종환 라인을 이어받은 무비서비스와 대기업 계열의 백설 엔터테인먼트가 맹추격하는 입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현시점의 충무로를 움직이는 파워맨 사인방이 청담동 모처에서 회동을 가졌다.

류지호의 전화 한 통화로.


“강은석 감독님은 외국계 벤처 캐피털에서 투자를 받으셨다고요?”

“호기 윈버그라고 혹시 알아?”

“글쎄요. 월가라면 몰라도 호주계는 잘 모르겠네요.”

“객관적으로 우리 회사 가치가 어느 정도 되는지 알아보려고 실사를 받았어. 근데 그쪽에서 200억을 투자하겠다고 먼저 제안하더라고. 무비서비스가 건강성이나 성장 가능성에 대해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뜻 아니겠나?


차성재 대표의 입 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전형적인 침소봉대(針小棒大) 즉 작은 일도 크게 부풀려 말하는 것이었으니까.


“사실 그동안 제작비 투자받으면서 시시콜콜 간섭하는 것에 질려버렸었는데, 앞으로 돈에 관해서는 적어도 아쉬울 것이 없어졌어. 내가 <이재수의 난> 제작지원 한다고 대기업이고 창투사고 쫓아다니며 고생했던 것 생각하면.....”


양성규 감독이 축하를 건넸다.


“잘됐네요. 축하드립니다. 감독님.”


그로서는 부러운 부분이다.

<쉬리>의 대성공을 발판으로 중국, 일본, 동남아시장을 포함한 아시아 영화계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구상 중에 있었다.

쉽게 현실화시키기 어려운 이번 프로젝트가 제 궤도에 오를 경우 양성규 감독이 갖는 파워는 WaW 픽처스를 뛰어넘을 수도 있었다.


“<유령>에서 드라이 포 웻이 꽤 그럴 듯 하던데요? 어떻게 하신 거예요?”


드라이 포 윗(Dry for wet')은 물 한 방울 없이 조명과 스모그로 심해를 표현하는 특수효과 기법이다.

실제 물속에서 진행되는 수중촬영을 wet-for-wet이라 하고, 수중 장면을 물속에서 찍지 않고 스모그로 공간을 가득 채운 후 촬영하는 것을 dry-for-wet이라 한다.

한국에서는 차성재 대표의 우노필름이 제작한 <유령>이 처음으로 시도했다.


“뭐만 하면 다 안 된대. 해보지도 않고 말이야. 안 그래 류 감독?”

“못해서 그런가요? 대표님처럼 믿고 맡겨주지 않으니까 다들 포기하는 거죠.”


표절 논란이나 완성도와는 관계없이 분명 영화계의 고정관념을 깬 것만은 틀림없다.

‘우린 안 돼‘와 같은 패배감에 사로잡혀 기껏해야 코믹멜로나 에로영화를 양산해내던 국내 영화계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계기가 되었으니까.


“일본 수입사 오야가 그러는 거야. <퇴마기록>도 그렇고 <유령>도 그렇고 자기들 같았으면 절대 만들지 못했을 거라고. 언제 한국영화가 이리 컸냐고 놀라더라고.”


충무로 파워맨 사인방은 자신감으로 무장한 채 자신들의 영화적 야망을 실현해나가고 있었다.

<쉬리>의 대성공은 양성규 감독을 벤처 자본의 첫 번째 표적으로 만들었다.

그는 넘쳐나는 벤처자본 가운데 국내 최대 벤처투자사인 기술종합금융(TKB)을 선택했다.


“양 감독은 TKB로부터 60억 받았다면서?”

“네. 그렇게 됐습니다.”


어찌 보면 의리를 저버린 행동일 수도 있다.

제작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손을 내밀어 준 것이 WaW 픽처스였다.

이제 와서는 다른 자본과 결탁을 하게 됐으니.

류지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물었다.


“공짜는 아니겠고... 지분을 그쪽에 주었겠네요?”

“....네.”


정확하게는 양성규 프로덕션이 TKB로부터 57억5천만 원을 투자받는 대신 지분 20%를 넘겼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강은석 감독 내심 혀를 찼다.


‘쯧. 미국에 앉아서 충무로 밑바닥까지 싹 다 훑어보고 있다고 하더니.... 류 감독이 모르는 게 없구만.’


양성규 프로덕션의 꿈은 결코 WaW 엔터테인먼트 못지않았다.

영화 제작·배급은 물론, 기왕에 창출된 IP 활용해 인터넷 사업까지 손을 뻗치려 했다.

인터넷은 국경 없는 사업이 가능하다.

양성규 프로덕션은 범아시아권을 하나로 묶은 다음 할리우드 영화, 유럽 영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야무진 꿈이다.

시대를 앞 서 간 구상이다.


‘....쉽지 않을 겁니다.’


차성재는 로터스와 합병을 논의하고 있었다.

로터스(자본), 우노(영화), EBM(매니지먼트), 전 수만기획의 정호익(음반) 등이 뭉쳐 연내 종합엔터테인먼트 회사 출범에 합의했다.


“대표에서 부사장으로 한 단계 떨어지시겠네요?”

“가 봐야 아는데... 그래봐야 나는 언제나 제작자일 뿐이지 뭐.”

“영화 제작에다가 매니지먼트까지 아우르는 구상이라면... 지금보다 업계에서 영향력이 좀 더 탄탄해지시겠어요.”

“그래도 여기 건호 형님만 할까. 그 뒤에는 자네도 있고.”

“저야 일개 감독일 뿐이고요.”

“턱도 없는 소리를.....!”


그러면서 차성재가 양성규 감독을 의식했다.

어쩌면 그의 롤모델이 류지호 일수도 있다.

영화감독이면서 메이저 스튜디오를 소유하고 운영하는 만능 영화인이니까.


“그나저나 자넨 아무렇지도 않아?”

“뭘요?”

“여기 강형이나 나나 덩치가 커져서 WaW하고 경쟁할 수 있게 되었잖아.”

“선배님들은 날 너무 띄엄띄엄 보시네요. 나는 세 분이 배급사로서 힘을 더 가지는 것에 환영하는 입장입니다. 대기업이나 금융 자본이 소위 한국형 메이저로 자리 잡기 전에 선배님들이 빨리 자리를 잡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박건호를 제외한 일행 모두가 묘한 시선을 던졌다.

아무리 봐도 류지호의 표정이나 눈빛에서나 빈말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진심이구만.”

“당연하죠. 비록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하고 있지만, 내 영화의 뿌리는 한국영화 아니겠어요?”


어딜 봐서.


“하길종 감독님, 김기영 감독님, 배창훈 감독님... 그 외에 수많은 선배감독님들 영화를 보며 자랐고, 그분들 영화로 공부를 했어요.”


물론 프랑스 누벨바그,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미국의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 등에서 훨씬 많이 배우고 자극을 받긴 했지만.


“뿌리를 잊은 놈을 사람들은 후레자식이라고 하죠, 아마....”

“......!”

“한국 영화든 뭐든 한해에 20편 이상을 배급하는 대형 배급사가 두세 개쯤 더 생겨나길 바라고 있어요. 그래야 할리우드 직배사를 견제하면서 동시에 충무로 내부적으로 상생 하는 길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하네요. 토종 영화인 출신이 메이저 스튜디오 오너가 되어야 충무로의 끈끈하고 낭만적인 문화도 지키고, 스태프의 기본권도 확보할 수 있을 테니까요. 오로지 실적과 돈만 보는 직배사, 대기업, 금융자본이 영화계를 쥐락펴락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유령> 같은 영화? 안 만들어질 겁니다. 맨 조폭코미디 로맨틱코미디만 득세하겠죠”


강은석 감독이 동감을 표했다.


“영화인들끼리는 공조 체제를 이루기가 다른 자본들보다 쉽겠지.”


제삼자에 비해 쉽다는 거다.

영화인들의 단결과 상생은 그리 쉽지 않다.

사람은 이기적이게 마련이다.

스스로 쥐고 있는 권리와 이점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으니까.

당장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협조 안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가만히 대화를 지켜보기만 하던 박건호가 입을 열었다.


“한국 영화계가 성장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우리 제작자들끼리 동업자의식이 깊숙이 자리 잡아 서로 물고 뜯는 골육상쟁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자취를 감춰야 할 겁니다.”


박건호 대표가 89년에 개봉한 영화 제목을 빗대서 말했다.

이 영화는 그 시대에 있어서 꽤나 파격적인 소재와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불우한 과거를 가진 여주인공과 그녀의 주변 세 남자와의 충돌을 심도 있게 그려낸 수작이다.

박건호는 그 영화 속 세 남자 캐릭터를 현재 충무로 영화인들에 비유했다.

강은석 감독이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류 감독.... 혹시 내게 따로 해줄 말은 없나?”


자존심을 굽히고 한참 어린 후배 감독에게 조언을 청했다.


“해외 자본을 끌어들인 무비서비스의 경우 당장 위험은 없어 보이지만.... 국내 벤처와 손잡은 두 분 선배님들은 벤처에서 거품이 빠지는 현상에 대한 경계는 늦추지 말아야할 것으로 보여요. 벤처자본을 너무 맹신하지 마세요. 그거 도박판 꽁지입니다. 까닥하다가는 손모가지 내놔야 할지도 몰라요.”


매사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는 차성재가 움찔했다.

그리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자신의 처지를 꼬집는 것 같아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하늘을 찌를 듯 국제무대를 호령하던 일본영화계가 70년대부터 곤두박질친 이유로 제작자들의 터무니없는 간섭을 첫손가락에 꼽은 바 있어요. <영웅본색>같은 판타지 갱스터 영화와 <천녀유혼>같은 SF 무협 영화라는 독특한 장르로 아시아 시장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시장까지 잠식했던 홍콩 영화계는 또 어떤가요? 90년대 중반 들어 창의력을 잃고 배회하다가 벼랑 아래로 추락하고 있는 중이죠. 잘나가던 영화계가 망해가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 번 엇나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일본과 홍콩 예를 통해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린 사람이 이런 표현을 써도 될지 모르지만, 우리네 삶처럼 한번 추락한 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 하는 것보다 더 힘들잖아요.”


양성규 감독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사람은 산전수전 다 겪은 역전의 용사들이다.

류지호가 지적하는 냉엄한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세 사람은 충무로 흐름을 주도할 자신이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선배님들 가오 빼면 시체인 분들이잖습니까? 대통령이든 누구와 있든 항상 당당하신 분들이죠. 대기업과 제휴하든 금융이나 벤처자본을 끌어들이든. 영화인의 자존심은 지켜주세요. 충무로 후배들을 위해서요. 앞으로 한국영화판은 여기 계신 네 분께 많은 신세를 져야 할지도 몰라요. 진심으로 메이저 스튜디오로 도약하시길 기원합니다. 충무로 사람들끼리 다투지 말아주세요. 그래서 한국영화가 아시아 시장을 먹어보자고요.”


류지호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이들은 해외시장을 개척할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퇴마기록>과 <쉬리>가 해외에서 얼마를 벌어들였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한국영화에 대한 아시아권의 반응이 꽤 좋았다.

일본과 홍콩 영화의 공백을 메울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아직은 십여 편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한국영화계로 볼 때 중요한 시점이다.

한국영화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이냐에 대한 충무로 전체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어야 한다.

아시아시장에서 한국영화를 유통시킬 기회를 잡았기에.

이 기회를 어떻게 쓸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다.


“멀리 할리우드 영화를 시야에 두면서 가깝게는 홍콩영화를 많이 연구해야 합니다.”


아직은 홍콩영화에 사망선고를 내리기에는 일렀다.

그럼에도 류지호는 사인방에게 단언했다.


“<황비홍>이 성공하면 황비홍 손자의 영화까지 나오는 곳이 홍콩영화계였어요. 이윤만 쫓는 제작자 입장에서야 순발력 있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영화 자체의 퇴행성으로 인해 오래 갈 수 없었어요.”


관객 수준을 너무 낮게 본 것도 홍콩영화계의 패착이었다.

대중문화는 그걸 향유하는 소비자의 수준에 따라 발전할 수도 정체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쓸데없이(?) 똑똑하고 지나치게 부지런한 소비자를 보유한 한국 대중문화예술계로서는 영화팬들이 고민거리이자 축복이다.


“21세기 대중문화 상품의 수준은 제공하는 입장이 아니라 그걸 수용하는 쪽에서 결정하게 됩니다.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어야 관객의 입맛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사인방은 현재 한국영화계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류지호는 3시간에 걸쳐 충무로 현안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사인방을 MPAA(미국영화협회) 방식으로 묶는 것은 실패했다.

이미 우노필름이 로터스 쪽과 긴밀하게 접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중복투자나 과당경쟁을 피할 수 있는 핫라인을 설정할 수 있었다.

이전 삶처럼 서로를 경원시하면서 경쟁에만 매몰된 관계설정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대표님.”


회동 장소를 빠져나오며 류지호가 박건호를 불러 세웠다.


“2002년까지 WaW 자체적으로 300억 만들 수 있어요?”

“300억짜리 영화 찍으시게요?”

“설마요. 그렇게 무모한 놈 아닙니다. 잘 아시면서.”

“.....?”

“인수합병 건이 생길 것 같아서요.”

“저 친구들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십니까?”

“이제야 한국영화가 산업화에 접어들었어요. 산업화 초기단계라서 역동적이고, 그만큼 안정성이 떨어지잖아요. 어떤 균형을 잡아가야 하는데.... 충무로 안에서 암묵적인 공감대도 없고, 다들 확장에만 관심이 있네요.”

“한국영화가 어떤 방향으로 균형이 잡히느냐가 진짜 문제인데 말입니다.”

“그러니까요. 홍콩영화처럼 퇴행적인 재생산 시스템으로 균형이 잡히냐, 계속 돌파를 해나가는 쪽으로 잡히냐... 지금 당장은 감이 잘 잡히지 않아요. 혹시 모르니까 WaW도 2~3년 간 준비 좀 해두세요.”

“충무로를 외부 세력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으신가 보군요?”


외부 세력이라 함은 벤처자본의 탈을 쓴 사기꾼, 돈세탁 같은 불법 통로로 영화업계를 이용하려는 범죄자들, 벤처광풍에 편승한 장사꾼들이다.


“에이~ 충무로가 제 것도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다 먹을 수도 있다. 그렇게 안 하는 것은 그래봐야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서로 경쟁하고 때론 끌어주고 밀어주고 해서 전체 파이를 키우는 것이 현명한 거니까.


“만드는 사람이 재미가 있어야 보는 사람도 재미있지 않을까요? 고도의 기술집약적인 공장제 영화도 있고, 투박하지만 한 땀 한 땀 공들여 만든 가내수공업 영화도 있고, 뛰어난 감각과 감성으로 탄생한 예술작품도 있고. 돈 안 되니까 안 찍고, 돈 되니까 홍콩영화처럼 유사 영화만 주구장창 찍고. 그러면 영화인이나 관객이나 다 재미없잖아요.”

“WaW는 남들이 꺼려하는 영화만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 게요. WaW는 공장영화도 만들고, 가내수공업 영화도 지원해서 시장에 내다 파세요. 예술작품도 많이 제작해서 팔리면 팔리는 대로 안 팔리면 안 팔리는 대로 차곡차곡 콘텐츠를 쌓으시고요.”

“남들이 꺼려하는 영화 연출하다 망하면, 낭패 보십니다.”

“뭐 어때요? 영화하다보면 망할 수도 있고, 칭찬 받을 수도 있고, 욕먹을 수도 있고, 뭐 그런 거죠. 제가 아직 만으로 스물아홉입니다. 살면서 최소한 10편은 연출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중에 끝내주는 영화 한 편 없을까 싶네요.”


하하하.


박건호 대표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믿습니다.”

“그럼요.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 감독님을 안 믿으면 세상에 누굴 믿겠습니까.”

“제가 대표님 고마워하는 거 아시죠?”

“아이쿠.... 또 무슨 말이 나올까 무섭네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박건호 대표가 짐짓 놀라는 척하면 먼저 떠났다.

류지호를 도와 일처리를 해 줄 유능한 사람은 세상에 많다.

하지만 이상과 철학을 공유하며 그걸 실현시키기 위해 애써주는 이는 극히 드물다.

그런 사람 중에 한 명이 박건호 대표다.

류지호는 그가 좀 더 오래 충무로의 맏형 노릇을 해주길 바랐다.

본인은 은퇴가 늦어지게 되어서 질색하겠지만.


작가의말

연휴 후유증 훌훌 털어내시고 즐거운 하루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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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 Quantum Jump! +5 23.02.15 3,733 134 21쪽
421 시작은 미약하지만...! (3) +8 23.02.14 3,690 123 21쪽
420 시작은 미약하지만...! (2) +6 23.02.13 3,763 116 21쪽
419 시작은 미약하지만...! (1) +6 23.02.11 3,826 121 24쪽
418 어리광은 그만 부려야 하지 않을까? +7 23.02.10 3,808 131 25쪽
417 Timely Cinematic Universe! (2) +7 23.02.09 3,822 121 24쪽
416 Timely Cinematic Universe! (1) +5 23.02.08 4,013 130 23쪽
415 언제 그런 거 신경 쓰면서 영화 했어? (3) +4 23.02.07 3,815 124 23쪽
414 언제 그런 거 신경 쓰면서 영화 했어? (2) +6 23.02.06 3,862 129 25쪽
413 언제 그런 거 신경 쓰면서 영화 했어? (1) +29 23.02.04 3,949 132 23쪽
412 화끈하게 갑시다! (2) +5 23.02.03 3,817 129 21쪽
411 화끈하게 갑시다! (1) +4 23.02.02 3,837 125 24쪽
410 꿈의 직장이잖아요. +11 23.02.01 3,962 140 30쪽
409 너희가 삼류를 아느냐? (3) +9 23.01.31 3,774 141 27쪽
408 너희가 삼류를 아느냐? (2) +5 23.01.30 3,782 129 26쪽
407 너희가 삼류를 아느냐? (1) +7 23.01.28 3,852 131 20쪽
406 예술 한 번 해보자고! +8 23.01.27 3,971 139 25쪽
405 그 양반들 간이 많이 커졌네. +2 23.01.26 3,987 144 24쪽
»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5) +6 23.01.25 3,956 142 23쪽
403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4) +9 23.01.24 4,014 145 23쪽
402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3) +6 23.01.23 4,019 149 20쪽
401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2) +17 23.01.21 4,144 161 29쪽
400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1) +18 23.01.21 3,891 127 26쪽
399 태풍을 예고하기라도 하듯이.... (2) +12 23.01.20 4,097 149 26쪽
398 태풍을 예고하기라도 하듯이.... (1) +6 23.01.19 4,110 145 23쪽
397 월스트리트 저널 테스트. (3) +14 23.01.18 4,042 146 28쪽
396 월스트리트 저널 테스트. (2) +13 23.01.17 4,046 156 27쪽
395 월스트리트 저널 테스트. (1) +6 23.01.16 4,087 149 24쪽
394 좀 더 자신을 믿어보게. +10 23.01.14 4,092 148 27쪽
393 Surfin USA! (3) +8 23.01.13 3,921 145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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