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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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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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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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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3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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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너희가 삼류를 아느냐? (3)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지난 연말 <넘버 쓰리>로 성공적인 감독 데뷔를 한 송진한 감독의 두 번째 극영화 <Fin de Siecle>이 개봉했다.

세기말의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을 세 가지 주제로 엮어 만든 독특한 형식의 영화다.

<넘버 쓰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듯 영화에서는 일류는 없고 모두가 삼류판인 90년대 한국사회의 일면을 풍자와 특유의 독설로 풀어냈다.


“왜 그렇게 삼류를 좋아하고 그들의 삶에 애정이 묻어있을까요, 감독님은?”

“삼류의 삶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고 인생이기 때문에요. 그래서 그런 삶을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송진한은 자신의 지적 수준과 예술적 능력을 잘 알고 있는 감독이자 작가다.

우리 사회의 적나라한 묘사가 삼류의 특권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의 비판과 독설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그로 인해 주간 영화잡지에 20자평을 쓰는 영화평론가들과 감정싸움을 벌였다.

<Fin de Siecle>의 주인공 중 한 명(김강수)인 시나리오 작가(감독 본인)가 영화 속의 평론가에게 다음과 같은 대사를 한다.


[자네는 자네 마누라한테도 별을 주고 그러나? 마누라 얼굴은 두개 반, 젖퉁이는 별 세 개. 사랑하는 대상이라면 신중해야지. 영화를 밥그릇으로 보니까 함부로 별점을 주고 그러는 거 아냐? 천박한 짓이야. 그런 짓 하지 마.]

[20자평이라면서 20자도 못 지키는 인간들이 무슨....]


영화에서 대놓고 20자평을 메겨 오던 영화평론가들을 저격했다.

당연히 영화잡지에 별점과 20자평을 쓰고 있던 자칭 영화평론가들이 발끈했다.

그리고 연대의식을 발휘해 <Fin de Siecle>의 별점을 보이콧했다.

완전히 별점을 메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일치단결해 일제히 별 셋을 줬다.

보이콧이라면 0점을 줘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감독을 저격하려면 최하점인 1점을 주던가.

영화평론가들은 0점이나 1점은 오히려 사람들이 흥미와 관심을 보이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무난한 별 점을 줌으로써 물타기를 했다.

무난하고 평범한 점수를 매겨 독자들이 자신들의 보이콧 행위 자체를 알아차리기 어렵게 만들었다.

비평도 거부했다.

심지어 해당 영화잡지는 <Fin de Siecle>의 기사를 의도적으로 줄이는 것으로 항의했다.

그리고는 그들의 독한 혀라고 할 수 있는 20자평에서....


- 세상은 시궁창, 나는 가련하고 당신들은 비열하다.

- 정면 승부할 줄 알았더니 막판에 꼬리를 내리네.

- 목에 힘을 빼면 더 멋있었을걸(글자수 세지 말 것).

- 20자평은 세기말의 타락이 아니라 세기말적 유머입니다.

- 20자평을 거부할 만한 자질이 있는 영화.


영화평론가라는 이들은 스스로 점잖은 예술 애호가이자 지식인이라고 자부한다.

그런 점잖은 이들이 속 좁고 불쾌하며 한편으로 오만한 방식으로 감독을 엿 먹였다.

영화 속에서 자신들을 조롱했다는 이유로.

자신들은 비평의 한 방식이라고 주장하겠지만.

류지호가 보기에 연약한 영화감독에 대한 테러행위였다.


“세기말로 상징되는 90년대 한국사회의 여러 부조리를 풍자하는 과정에서 입만 살아 문화 권력으로 작용하려는 부조리한 한국 지식인들을 까는 과정 중에 도출된 대사잖아요. 자신들은 서푼의 지식 가지고 영화를 난도질 하면서 영화에서 풍자 좀 했다고 발끈해서는 영화잡지 중에서 판매부수나 파급력에서나 가장 큰 잡지에서 노골적으로 횡포를 부려요? 만날 기득권 어쩌구저쩌구... 조롱하던 사람들이 정작 자신들이 기분 나쁘단 이유로 마치 기득권처럼 굴더군요. 현실판 저질 코미디였죠.”

- 사실 별점 시스템은 창간 당시부터 매우 거센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지요.


별점이나 20자평을 재미로 보면 문제될 것은 없다.

신문에 나오는 일일운세처럼.

문제는 일일운세도 지나치게 맹신하는 사람이 있듯이 영화 별점을 통해 영화 관람을 선택하는 독자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이다.

인상비평 축에도 들 수 없는 말장난일 뿐인데.


- 어쨌거나 대부분의 평론가들과 언론이 영화의 한결 같은 주제 의식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매우 완성도 높다는 점을 어느 정도 평가해주었습니다.


심지어 영화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평론가들조차 그러한 부분들은 인정했다.


“그런데 평론가들의 횡포로 해당 영화잡지는 <Fin de Siecle>에 대해 제대로 기사를 내는 것을 사실상 거부 내지 포기해버린 상황이 되어버렸죠.”


<넘버 쓰리>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촉망받는 영화감독의 두 번째 작품과 관련되어 나온 기사는 단 셋.

평론가와 잡지사 측에서는 노골적으로 영화 죽이기에 나서지는 않았다.

다만 제대로 된 영화 리뷰조차 싣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었다.

물론 크게 기대 받는 신인 감독의 두 번째 영화로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있는 영화인 것은 분명했지만, 지나치게 주제의식을 드러내다보니 관객들에게 거부감을 들게 한 것도 사실이었다.

류지호는 그런 부분까지 편을 들어 줄 생각은 없었다.


“평론가라고 하지 말고 프리뷰어나 작가라고 하는 것은 어떨까요? 프리뷰와 리뷰는 분명 다르잖아요. 한국의 영화평론 수준이 어떤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고 봐요.”


프리뷰는 내용을 간결하게 소개하면서 주관적인 감정을 덧붙이는 글이다.

감상문도 프리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 의장님도 감독이시니까 아무래도 감독의 입장을 대변할 수밖에 없으시겠죠.

“평론이 하는 일은 작품이나 계획에 대해서 그 가치를 분석하고 판단하고 비판할 거리가 있다면 이에 대해 비평하게 됩니다.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의 영화를 본 주관적인 소감은 홍보마케팅에 도움이 되죠. 감상문과 평론의 가장 큰 차이는 맥락과 가치 재창조가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는가에 있어요. 단순히 재미있다, 연출이 깔끔하다, 내 마음에 든다 하는 평가만 존재하는 평론은 감상문일 뿐이에요. 즉 가치의 재창조가 없는 글은 감상문일 뿐이죠. 아, 물론 감상문을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감상문을 쓸 순 있어요. 다만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이 돈을 받고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이 보는 매체에 기고를 하잖아요. 감상문 수준이 되어선 안 되는 거죠. 진정한 평론은 감독을 반성하게 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 나가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과서적이고 상식적인 말이다.

그럼에도 류지호의 인터뷰를 지켜보는 커뮤니케이션팀장 고현준은 미간에 깊을 주름을 만들고 있다.

류지호가 일부러 논쟁거리를 만들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 가치의 재창조가 없는 비평은 비난일 뿐이다?

“교과서에 나오는 말이죠.”


가치 재창조는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이란 아무런 맥락 없이 그 차제만으로 의미가 있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즉 예술비평은 작품이 어느 맥락에서 나왔으며 그 맥락의 거대한 흐름 가운데 어디쯤 속해 있는지, 그리고 다른 작품들과 어떻게 다르며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파헤치는 행위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객관성을 필요로 한다.

주관이 들어갔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납득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송 감독이 왜 평론가들과 갈등을 벌였는지 충분히 공감하지만 굳이 말싸움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감독이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거든요. 영화감독 없이는 영화평론가도 없는데... 지난 번 별점사태 때 영화와 평론의 역할과 관계를 제대로 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전혀 없었어요. 그저 해프닝이었죠. 할리우드도 어느 순간부터 비방과 비평이 불분명해지고 있어요. 영화평론가와 팬의 애매한 경계에 위치한 사람들이... 가령 연예부 기자 같은 사람들이죠. 그런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펜의 위력으로 비방과 비평 사이에서 위험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죠.”


아직은 연예부 기자 수준에서 행해지고 있지만, 곧 블로거들이 가세하게 된다.

2010년대에는 스트리머들이 감상문 수준의 비평을 자유롭게 하면서 감상과 비평의 경계에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불분명한 리뷰가 양산된다.


“좋은 평론은 영화가 가지고 있는 맥락과 그 가치를 알게 함으로써 영화팬들에게 영화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감독과 작가가 더 나은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좋은 감상문이라고 다르지 않아요. 좋은 감상문은 그것을 쓴 영화팬들이 빠르고 간편하게 영화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과 감상을 전함으로써 다른 영화팬들에게 더 넓은 선택의 폭을 제공할 수 있으니까요.”

- 우리도 영화전문 잡지가 있었지만 폐간되었거나 폐간 위기에 놓여 있지요. 그리고 주간지 성격의 대중지만 남았죠.

“특정 잡지를 언급해서 조금 그렇지만 씨네마21, 씨네필 둘 모두 사실 전문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타블로이드 같아 보이죠. 키노 수준의 허세는 바라지 않지만 좀 더 전문적이면 좋으련만...”


스크린이니 로드쇼니 하는 잡지도 있었지만, 결국 스타 화보집 아니냐라는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월간동양 기자는 류지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면서도 ‘싸움’ ‘허세’ 같은 자극적인 단어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감상문에 불과한 글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봅니다. 감상문과 평론은 목적도 다르고 대상도 달라요.”

- 씨네마21에 비평글을 쓰는 평론가들 수준이 감상문 쓰는 수준이라고 보십니까?

“본인들이 잘 알겠죠. 평론가들은 리뷰인지 프리뷰인지 명확히 해야 합니다. 그래야 감상문에서 객관성 찾다가 엉성한 글이 나오지 않을 테니까. 스스로 평론가, 리뷰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영화의 맥락을 파악하고 그 가치를 집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을 우선시하거나 맥락도 파악 못하고 영화 내용과 다른 작품과의 비교만 논했다면 그건 평론이 아니라 감상문이라고 인정을 해야겠죠.”

- 한국 영화평론에 대해 부정적이시군요?“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다고 대학 강단에서 학생을 가르친다고 해서 평론을 잘하리라는 보장이 없어요. 지식과 통찰력이 없는 평론은 영화팬을 혼란스럽게 할 뿐이에요. 비평의 가장 큰 함정은 내가 보고 싶은 작품을 미리부터 상정해 놓고 그것에 끼워 맞춰서 작품을 분석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거죠. 내가 보고 싶은 영화에 대한 소감은 일기장에 써야겠죠.”


류지호의 비판 강도가 점점 세지고 있었다.


“UCLA의 모 교수님이 그러셨지요. 비평은 주장이 아니라 설득이다. 리뷰와 프리뷰의 차이는 설득에 있다라고.”


비평은 대상을 분석한 후, 그를 근거로서 자신이 생각하는 대상의 가치를 논리적으로 정립하고 설득하는 행위이다.

작품의 이해를 통한 가치평가를 하되 제대로 속속들이 알고 나서 평가를 해야 한다.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하고.

단순히 작품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감독의 영화관과 주제의식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즉 작품과 감독을 이해하고 그를 통해 도출해낸 자신만의 가치평가를 누구나 납득할 수 있게 써내려가는 것이 평론과 비평인 것이다.


“현학적인 단어와 문장을 나열해 놓는다고 해서 가치평가의 질과 신뢰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작품과 감독에 대해 열심히 파악하고 분석한 것은 예의이기도 하고. 영화라는 것은 감독의 모든 것이 걸려 있습니다. 그런 것에 가치를 매기는 일인데,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이 노력하여 만들어낸 작품을 쉬이 평가해서는 안 되잖습니까?”


비평의 가장 기본이 설득이듯 영화감독도 마찬가지다.

비평은 공감을 얻지 못해도 상관없다.

대중들의 취향과 기호는 다 제각각이니까.

그러나 영화감독은 대중들로 하여금 자신의 영화에 공감하도록 해야 한다.

비평가보다 영화감독이 하는 일이 더욱 어렵다.

그러니 아무리 작품을 못 만들거나 대충 만들었다고 해도, 그것이 대충 쓰거나 비방만 있는 비평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더더욱 리뷰라는 타이틀을 달고.


“영화 평론이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선 안 되겠죠. 그렇게 될수록 대중들과 점점 더 멀어지게 될 겁니다.”

- 한국영화계에 영화평론가들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산업 자체가 워낙 작아서 평론 같은 분야는 몇 명이 다 해 먹었죠. 신인 비평가가 나오기가 어렵다고 들었어요. 영화 평론 쪽 진입장벽이 꽤 높은 것으로 압니다. 나눠 먹을 밥그릇이 작잖아요.”


류지호가 영화평론계까지 마수(?)를 뻗을 순 없다.

영화평론가는 영화와 관객 사이에 위치해야 한다.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의도와 관객들의 반응 사이에 있어야지 어느 한쪽만을 대변한다면 오류가 된다.

영화평론가도 관객이지만, 그 입장만 내세워선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영화평론가는 관객을 위해서 평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영화를 위해서 평을 해야 한다.

넋두리와 같은 글을 써놓고 그것을 비평이라고 우긴다고 그게 평론이 되는 것이 아니다.

혼자만 알 수 있는 현학적 표현을 몇 줄 써 놓고 그것을 평론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좋은 비평이 되는 것도 아니다.


‘몇 명의 고인물들이 몇 개 되지도 않는 매체에서 사골을 우려먹고 있지.’


영화 비평으로 먹고 살 수 없으니 젊은 피가 수혈되지도 않고.

고전 무협지도 아닌데 고색창연한 문어체로 온 잡지를 채워서 마니아들이 ‘키노체‘라고까지 숭배했던 모 잡지는 류지호도 한때 열광했었다.

물론 이전 삶에서다.

과거로 돌아와 냉철한 시선으로 본 그 필체는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고 방언처럼 지껄이는 허언증에 불과했다.

평론가의 몰락은 기정사실화되었다.

DVD 부록에 별의 별 정보가 다 담기기 시작하고, 인터넷이 일상이 되면서 과거 평론가들만 독점하고 있던 지식이 영화팬들에게 상식이 되어가고 있다.

점차 전문가와 마니아 사이의 리뷰에서 별 차이가 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전문가들이라는 이들이 전문적이며 깊은 교양으로 무장한 평론을 쓰는 것이 아니라 취향 고백을 늘어놓기 때문이다.

독설에 이해와 설득이 포함되지 않았다면 비방일 뿐이다.

비평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영화 이야기는 충분히 했으니까, 투자 분야에서도 두각을 보이고 계신 감독의 한국경제와 더 나아가 세계 경제 동향에 대해 대화를 나누시죠?”


고현준 팀장이 인터뷰 흐름을 바꿀 것을 제안했다.

월간동양과의 인터뷰는 특별히 정해진 주제나 이슈가 없었다.

특별 초대석 형식이라서 지면도 상당히 많이 할애 받기로 했다.

3시간이라는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이어진 인터뷰에서 류지호는 다양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다음 날에는 웨딩매거진 <마이 웨딩>과도 인터뷰를 진행했다.

영화잡지나 여성지는 <Remo : The Deatroyer> 홍보를 위해 지겹도록 인터뷰를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응하지 않았다.


“조금은 센 발언들을 했는데 왜 잔소리가 없어요?”

“가끔 천둥벌거숭이 같은 기자들과 평론가들이 주제도 모르고 감독님을 비방하는 글을 내곤 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한 번 독한 소리를 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언론과 미디어 노출 관리는 비서실이 아닌 전략기획실 내 커뮤니케이션팀에서 하고 있다.

좀 더 체계적인 P.I를 위해서다.

어떤 경우에는 문장이나 어휘 사용에 대해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도 했다.


“메이저와만 인터뷰한다고 볼멘소리가 나온다면서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작은 매체들은 관리가 안 되기 때문에 메이저와만 하시는 게 좋습니다.”

“작은 미디어라고 너무 괄시하지 말고 지면인터뷰라도 하는 걸로 해 봐요.”

“어차피 코엑스몰 극장 개장 전에 몰아서 인터뷰 하셔야 합니다. 그때까지는 언론 노출을 자제하시는 걸로 하시지요.”

“알겠어요.”


매니지먼트 CHAN의 김민아는 커뮤니케이션팀이 유난을 떤다고 구시렁거렸다.

한국에서야 대충 인터뷰해도 된다.

국내에서는 인터뷰 파급력도 그리 크지 않다.

언론사에서 편집과정에서 마사지(?)를 잘 해주기도 한다.

문제는 류지호가 한국에서 한 인터뷰 내용이 미국 매스컴에서도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점이다.

JHO Company가 상장기업이었다면 류지호의 말 한마디로 주가가 출렁일 수도 있다.

기업 이미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물어뜯으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이들도 많다.

굳이 말실수로 빌미를 줄 필요까진 없다.

그렇다고 겸손만 떨어선 안 된다.

한국언론에서는 그래도 되겠지만, 미국에서 그랬다가는 호구인 줄 안다.

때론 월간동양과의 인터뷰 때처럼 강력한 메시지를 던질 필요도 있다.


✻ ✻ ✻


송진한 감독의 첫 작품인 <넘버 쓰리>는 뚜렷하고 일관된 사회비판적 주제의식을 매끄럽게 코미디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그런데 <Fin de Siecle>의 경우, 특유의 사회비판적 주제의식은 여전한데 풍자적인 맛이 쏙 빠져버린 작품이 되어버렸다.

블랙코미디와 주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미장센, 톤 등은 전작에서 발전된 모습을 보여줬지만, 류지호로서는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담고자 하는 이야기가 넘친 아쉬움이 드는 영화다.

영화 내내 신들린 듯이 까댄 탓에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고 할까.

마지막에 가서는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마무리 지어버림으로써 끝까지 본 사람을 황당하게 만들기도 했다.

흥행은 쫄딱 망했다.

서울관객 수 3만9천명.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관객은 <넘버 쓰리>같은 미친 듯한 풍자 코미디를 기대했는데, 막상 영화는 신랄하고 삐딱한 정치도덕 교과서 같았기 때문이다.


“하하하.”


주점에서 류지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서울 변두리 주택가의 평범한 주점이다.

류지호와 송진한 감독이 막걸리에 파전을 안주삼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왜 웃어?”

“재미있어서요. 감독님은 안 재밌어요?”

“불쾌하기만 했지.”

“개인적으로는 감독님이 겪으신 일이 다른 영화에도 많아졌으면 좋겠네요.”

“영화비평가와 감독이 감정싸움 하는 게 뭐가 좋다고.”

“미국에서는 또 하나의 재미에요. 관객들에게 흥미로운 싸움판이고 그 때문에 의외로 흥행에 도움이 될 때도 있더라구요.”

“류 감독... 아, 이젠 가온그룹 총수신가?”

“총수는 래리 킴 회장이 하겠죠. 저야 지주회사 의장일 뿐이고.”

“이사회 의장이 총수 아닌가?”

“총수니 회장이니 듣기 거북해요. 그냥 감독이라고 하세요.”

“남들은 빌딩 하나 가지고 있어도 회장이라고 불리길 바라는데.... 재벌 주제에 겸손한 척 하기는.....”

“저 때문에 재벌 이미지 세탁이 되고 있다면서요? 재벌이 뽕도 안하고 여자연예인도 안 건드리고... 큭큭.”

“삼세들은 죽어나겠지. 류 감독이 자수성가로 워낙 크게 성공해서 재벌 후계자들 부담이 이만저만 않을 거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정진하면 좋은 거죠.”


재벌가 내부는 어떨지 모르지만, 한국의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재벌의 후계자 기준이 이전 보다 크게 높아졌다.

서른 전에 글로벌 기업을 일군 한국인 기업가가 탄생했기에.

뭘 해도 비교될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WaW와 하라니까 굳이 태양영화사로 가져가서는....”

“사장님하고 의리가 있지. 어떻게 류 감독한테 가져가겠어. 내가 어려울 때 얼마나 많이 챙겨준 양반인데.”

“그래서 상업성이랍시고 여배우를 그렇게 많이 벗기셨어요? 제가 알기로는 비디오도 그렇게 많이 나가지 않은 걸로 아는데....”

“그건 웹하드와 와레즈 때문이고.”

“하긴 본격적인 불법 다운로드 시대가 시작되고 있긴 했네요.”


90년대 말 MP3 파일이 인터넷에서 마구 확산됐다.

CD로 불법복제 파일이 퍼지던 것에서 인터넷상에서 불법 다운로드 되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WaW와 했으면 전 세계 영화제를 한 바퀴 돌고 개봉했을 텐데....”


그랬다면 주요 국제영화제는 아니더라도 유럽권의 영화제 한 곳에서는 유의미한 결과를 냈을 수도 있다.

한국영화가 나름 유럽의 국제영화제에서 인정을 받고 있기에.


“영화제에서 성과를 냈으면 평론가들이 골질 한다고 해도 대중들이 영화 편을 들어줬을지도 몰랐어요.”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한다는 보장이 어디 있다고.”

“4대 영화제 말고도 세상에는 영화제가 얼마나 많은데요. 내가 기획했다면 선댄스에 맞춰서 제작했을 겁니다. 수상여부와 상관없이 선댄스에서 꽤 좋은 반응이 나왔을 걸요?”


<Fin de Siecle>는 부산국제영화제와 몬티리올 영화제에 초청되어 상영되긴 했다.

안타깝게도 큰 주목은 끌지 못했다.

해외 네트워크가 나름 탄탄한 WaW 엔터테인먼트가 배급했다면 상황이 조금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래도 신사적으로 싸웠네요. 미국에서는 비평가가 공개적으로 감독과 말싸움을 벌여요. 기사가 안 나가서 그렇지 파티장에서 주먹다짐도 벌이더라고요.”

“영화 비평이 심판이나 심사위원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 영화를 소비하고 즐기는 건 결국 관객이야. 평가는 관객이 하는 거야. 영화제에 출품되어 경쟁을 벌이는 것도 아닌데, 점수를 매기는 건 오만이지.”

“촌철살인과 말장난은 종이 한 장 차이죠 뭐. 아마 20자평 쓰는 그 양반들 매주 너무나 고통스러울 걸요?”

“그러니까. 왜 그런 짓을 하냐고. 그럴 바에는 좀 더 건설적인 비평을 하면 좋을 텐데.”

“비평가들이 제안한 것이 아니라 씨네마21이 만든 거니까요.”

“계속 그렇게 하다가는 언제가 스스로 영화 비평가로서의 권위를 잃게 될 거야.”

“지금도 많이 잃었죠. 솔직히 비평다운 비평하는 평론가 누가 있죠? 저는 두 분 정도 빼고는 솔직히 인정할 수 없겠던데요?”


영화사학자이기도 한 1세대 문화평론가 박창원, 스타평론가이자 마지막 로맨티스트라고 불렸던 정형일 정도.


“이야기 들었지?”

“무슨 이야기요?”

“캐나다로 이민 가기로 했어.”

“언제 떠나는데요?”

“내일이라도.”

“영화 한 편 말아먹었다고 이민 가는 건 아니겠고. 혹시 IMF 때문에 경제사정이 어려워요?”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영화감독 못해 먹겠어.”

“그럼 할리우드로 오지 왜 하필 캐나다에요?”

“영화감독으로 망했어, 이 친구야. 영화감독은 대중을 상대로 해야 하고 흥행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감독은 존재가치가 없어.”

“어디서 멍멍이가 짖는 것처럼 들리는데... 착각일까요?”

“난 홍장수나 이광조 감독을 좋아하지 않아. 난 자기만족형 영화를 만들 생각이 없어.”

“<Fin de Siecle>는 명백히 자기만족 영화였습니다만.”

“코미디야. 코드가 대중에게 먹히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내 연출이 미숙했던 거고.”

“그 양반들하고 감독님은 영화를 대하는 철학이나 취향이 극명하게 다르긴 하죠.”


류지호가 송진한의 빈 잔에 막걸리를 따라주고 다시 입을 열었다.


“지구가... 우리가 사는 나라가... 천국이면 우린 영화감독, 작가란 직업을 가질 수 없을 겁니다. 세상이 부조리하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이 신나게 까대고 조롱하고 비판할 수 있는 거죠. 왜 이런 축복 같은 직업을 버리시려고 하세요?”

“영화보다 현실이 더 영화 같아. 내가 뭘 해도 현실을 뛰어넘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정치가 개판이고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한심하고 답답한 게 하루 이틀인가요?”


벌컥벌컥.


류지호가 막걸리 한 사발을 시원하게 비웠다.


“차라리 정치를 하실래요? 이민 따위는 가지 마시고요.”

“무슨 개소리를 그렇게 정색한 얼굴로 하고 그래?”

“가서 뭐 먹고 사시게요?”

“여기서도 굶지 않고 살았는데, 그곳에서 굶을까?”

“이왕에 영화감독 때려치울 거라면 본업으로 돌아가는 건 어때요?”

“내가 본업이 어디 있어?”

“<광역수사대> 집필료 넉넉하게 드린다고 말했잖아요. 영화로 까지 못한 걸 드라마로 까보는 건 어때요?”

“관객에게 외면 받은 내가 더 이상 뭘 할 수 있겠어.”

“삼류로 오래 살아봐서 잘 아는데요. 힘 안 빼면 물에 가라앉아요. 물에 떠야 공기를 폐 속에 넣을 수 있더라고요. 그래야 수영을 하든지 잠수를 하든지 하니까.”

"류 감독이 삼류를 알아?"

"일류 빼면 다 삼류 아닙니까?"


하하하.


송진한 감독이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삼류끼리 무슨 삼류를 논해요. 주제 파악하면서 그냥 술이나 마셔요.”


킥킥.


두 사람은 헤어지기 전까지 묵묵히 막걸리만 마셨다.


“제 수석참모 전화번호에요. 그쪽으로 연락하면 제게 다이렉트로 보고가 올 겁니다.”


헤어지기 전 류지호는 도널드 제이콥의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전화를 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류지호는 송진한의 캐나다 이민을 막지 않았다.

그의 이민은 ‘유학설’로 포장됐다.

영화평론가들과 싸운 탓에 충무로에 신물이 나 이민을 가버렸다.....

혹은 영화의 흥행참패로 인해 감독으로서 진퇴를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다.

다양한 설이 난무했다.

다만 그의 갑작스러운 캐나다 이민으로 인해 감정싸움을 벌였던 영화평론가들이 어안이 벙벙해졌다는 사실.

그리고 영화 마니아들로부터 그 사태에 연루된 평론가들이 엄청난 욕을 먹었다.

한국의 태런티노가 될지도 모를 촉망받는 감독을 영화판에서 쫓아냈다고.

한편 한국의 영화평론을 강도 높게 비판한 류지호의 인터뷰가 실린 월간동양이 발매되었을 때는 기사를 보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일부 용기 있는(?) 연예부 기자를 빼고 영화 평론으로 먹고 사는 이들이 입을 싹 닫았다.

송진한 감독은 만만해서 조롱해도 되고, 할리우드에서 인정받는 류지호를 건드리는 것은 역풍이 무섭고.

류지호는 한국의 영화평론가들과 설전을 벌일 기대를 품고 있었다.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힘 센 사람에게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지식인은 정말 소수인 모양이다.


[나라를 망친 놈들도 먹물, 뇌물 주는 놈도 먹물, 그걸 받아쳐먹는 놈도 먹물, 그걸 씹고 있는 놈들도 먹물...···]


- 영화 <세기말>중에서


송진한 감독이 가족과 함께 한국을 떠나던 바로 그 날.

모두가 세기말은 끝났다고 믿었던 어느 평범한 날.

진짜 대한민국의 세기말이 막 시작됐다.

코스닥 지수가 2834.40이라는 사상 최고점을 찍었던 것.

올라갈 데로 올라갔으니.

이젠 내려올 일만 남은 것처럼 보였다.


작가의말

겨울도 몇 주 안 남았습니다. 2월에는 강추위 없이 무난하게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건강 유의하시고 즐거운 하루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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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3) +6 23.01.23 4,019 14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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