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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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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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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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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3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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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너희가 삼류를 아느냐? (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남산을 떠나려는 류지호를 영화인회의 간부들이 붙잡았다.


“요즘 우노 차 대표는 번호표 뽑고 3시간, 무비서비스 강 감독은 5시간, WaW 박 대표님은 3일 전에 약속을 잡아야 만날 수 있어. 자네는 아예 만날 수조차 없고. 어째 류 감독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워.”


류지호에게 엉겨 붙는 영화인회의 간부들에게 박건호 대표가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1시간입니다. 그 이상은 곤란합니다.”


류지호는 충무로 선배 일곱 명을 밀레니엄 힐턴 커피숍으로 데리고 갔다.


“마치 청문회에 불려나온 것 같기도 하고... 선배님이 이렇게 모두 오실 줄 몰랐습니다. 하하하.”


영화인회의 발기인 중 한 명인 이승훈 감독이 대답했다.


“차 한 잔 마시며 한국영화에 대해 이야기나 나눠보자는 자리야.”


차분한 목소리만큼이나 지적인 감독이 이승훈이다.

선한 성품이지만, 의외로 강성이고, 다혈질이다.

류지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평소 천사 같았던 이 감독이 말싸움 끝에 몸싸움까지 벌이던 모습을.

평소에는 사람 좋고, 이지적인 감독이다.

그런데 아니다 싶으면 뒤집어지는 성격이다.

아는 사람만 알지만.


“박 대표님과 함께 보자고 하신 거 보니까, WaW에 요청하고 싶으신 거라도 있는가 보네요?”

“요청이라기보다는....”


이승훈 감독이 동료를 일별하고 류지호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자네, 계속해서 극장을 늘릴 생각인가?”

“향후 10년 간 전국 도시마다 적어도 하나의 멀티플렉스를 세울 생각입니다.”

“류 감독.”


연극배우 출신이자 영화배우이며 제작자인 명우석의 부름에 류지호가 싹싹하게 대답했다.


“예. 선배님.”

“한국영화.... 류 감독이 다 해먹을 셈이야?”


돌려 말하는 법이 없는 양반이다.

류지호는 의뭉을 떨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큰물에서 놀아야지 이 사람아. 충무로판에 뭐 먹을 것 있다고 배급과 극장을 모두 장악하려고 해. 우리는 자네 행보에 우려를 금할 수가 없어.”

“그렇습니까?”

“막말로 WaW가 다 해먹으면 남은 사람들은 뭐 먹고 사나?"

"글쎄요. 제가 아는 것과 조금 다릅니다만?"

"......?"

“WaW와 일하는 스태프는 다른 제작사보다 30% 이상 페이를 더 받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주 WaW가 배급하는 모든 영화의 박스오피스가 씨네필을 통해 투명하게 공개되고 있죠. WaW와 제휴 관계에 있는 영화사들의 수익률이나 자립도도 좋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건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극장은.... 그것만은 포기하면 안 되겠나?”


왜 그러는지는 안다.

수직계열화로 인해 WaW 엔터테인먼트가 한국영화계에서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 걱정되는 것이다.


“관객만족도 1위, 통신사, 카드회사 할인혜택도 빵빵한 것으로 알고 있고, 화면 밝고 선명하지 사운드 섬세한.... 그런 극장을 없애란 말씀은 아니시겠죠?”

“내 말뜻을 못 알아듣는 척 하는 건 아니겠지? 독과점 말이야. 독과점.”

“WaW가 현재 영화배급과 극장에서 독과점을 하고 있단 말씀이시라면 납득할 수 없습니다.”

“자네가 지금까지 벌이고 있는 모습이나 앞으로 예상되는 모습은 미국 메이저 스튜디오가 하는 것과 똑같아. 그것까지 부인하지는 않을 테지?”

“저도 하나만 여쭤보겠습니다.”


얼마든지 하는 표정으로 명우석이 자신만만해 했다.


“백설, 광성, 올리온은 괜찮고 WaW는 왜 안 됩니까? 그들이 가온보다 훨씬 규모도 크고 욕심도 많은 대기업인데.”

“WaW가 한국영화산업 전체를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한 개 회사가 판 전체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권력을 가지고 자본을 독식하면 그것이 공정하고 정의롭다고는 할 수 없지 않겠나?”


정의는 몰라도 지금까지 WaW 엔터테인먼트는 공정한 경쟁에 벗어났거나 룰을 어긴 적이 없다.


“왜 이런 말씀까지 해야 하지는 지 알 수 없지만, 특별히 비밀도 아니기 때문에 말씀드립니다. WaW는 극장과 배급 부문에서 한국영화 전체에서 40%를 넘길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만 해도 판을 좌지우지할 점유율이다.


"가온이 무슨 오성그룹이라도 되는 줄 아십니까? 아니 오성도 못할 걸요? 전국 도시와 마을마다 극장을 세울 순 없습니다. 그리고 광성백화점이 몇 갠 줄 아세요? 걔들이 자사 백화점에 멀티플렉스 입점하면 순식간에 200개 스크린은 우습게 확보합니다. 백설그룹은 또 어떻구요. 1,500억 원 투입해서 멀티플렉스 계속해서 늘려간다지 않습니까? 올리온도 일본 자본 받아서 메가시네마 영업점 늘릴 예정이라던데요? 물론 가온과 대기업 간의 피 튀기는 멀티플렉스 점유율 전쟁 벌이면 충무로도 곤란하긴 합니다. 배급비용이 늘어날 테니까.“


박건호 대표가 한 마디 거들었다.


“아마 영세한 배급업자는 씨가 마르겠지요.”

“멀티플렉스 독과점 안 됩니다. 걱정 마세요. 대기업들은 끝까지 극장사업 확장 못 합니다. 그리고 영화계는 극장 많아지면 나쁠 것 없습니다. 그것보다 스크린 독과점을 더 걱정해야 합니다.”


멀티플렉스 구조를 제대로 이해를 못하는 이들이다.

벌써부터 스크린 독과점의 구조를 알 리가 없다.


“이번 주 개봉하는 <글래디에이터> 스크린이 몇 개인 줄 아십니까?”

“......”

“다음 달 개봉하는 <미션임파서블Ⅱ>의 스크린 숫자는요.”

“......”

“5월과 6월에 개봉하는 할리우드 대작영화 네 편이 전국 스크린의 삼분지 이를 차지할 겁니다. 그 기간 개봉하는 한국영화들이 확보한 스크린은 전체 스크린의 20% 미만이고요.”


아.


그제야 영화인회의 멤버들이 스크린 독과점의 구조를 이해했다.

멀티플렉스 배급시장에서 극장과 스크린은 개념이 다르다.

멀티플렉스의 장점은 다양한 영화를 한 공간에서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멀티플렉스 상영관의 2/3를 한 영화가 차지한다?


“멀티플렉스가 PC방처럼 동네마다 들어가면 영화계는 나쁠 게 없습니다. 하지만 몇 개 영화가 멀티플렉스 스크린을 독점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될 겁니다. 다른 영화의 상영기회까지 빼앗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더더욱 스크린쿼터를 사수해야지!”

“개혁적인 목소리를 높이시는 것 좋고. 저도 선배님들의 뜻을 지지하는 입장이지만.... 조금 더 현실적인 부분에도 관심을 가져주세요.”

“......?”

“작년에 한국영화 점유율이 40%를 넘었습니다. 올해 역시 그에 근접한 점유율이 나올 것으로 예측되고 있어요. 정부가 약속을 지키라고 나오면 어쩌실 겁니까?”

“국민의 정부는 영화계와 지난 대선에서 약속을 했어.”


류지호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이전 삶에서 영화인들이 뒤통수를 맞은 것까지도 알고 있다.


“미국무역협회와 미영화협회가 우리 정부에 압력을 가하면요? 정부 대신 영화인들이 미국통상부와 싸울 겁니까?”

“......”

“시원하게 스크린쿼터 축소를 받아들이세요.”


명우석이 화난 표정으로 외쳤다.


“이보게!”


다른 선배들의 표정도 잔뜩 굳어졌다.


“대신 극장 스크린배정 독과점 방지와 표준상영계약서,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의무 등록 기타 등등. 정부와 딜을 하실 것을 추천 드려요.”

“그것들과 스크린쿼터와 같은 선상에서 논의하는 게 타당하다고 보나!”

“막말로 스크린쿼터가 있다고 해서 지금까지 제대로 지키는 극장이 얼마나 됩니까? 솔직히 실효성도 별로 없잖아요.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구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실을 왜 인정을 안 하십니까. 한국영화는 비수기에 몰아서 극장에 걸어버리거나 할리우드 영화 라인업 땜빵용으로 상영하는 풍토잖습니까. 향후 5년 안에 전국 스크린수가 1,500~2,000개로 늘어날 겁니다. 10년 후에는 3,000개 가까이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전국 멀티플렉스 300석 이상 주요 스크린을 <타이타닉>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모두 차지하고, 100석짜리 스크린에 형식으로 한국영화를 상영하게 되면요. 혹은 그런 상황을 WaW, 백설, 광성, 올리온 같은 대기업이 투자·배급하는 한국영화에 똑같이 적용하면요?”

“설마 담합이라도 한다는 거야?”

“극장이 담합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마케팅 능력이 있는 거대 배급사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극장은 배급사가 주는 영화를 거는 것 뿐. 대기업이 한국영화계와 무슨 상관이랍니까? 돈 되는 영화 거는 게 장땡 아니겠습니까?”


이승훈 감독을 시작으로 영화인회의 멤버들이 한 마디씩 던졌다.


“공정경쟁위원회에 제소되겠지.”

“그런 걸 감시감독 하기 위해 영진위가 자리를 잡아야 하는 거야. 이권이나 떡고물을 얻어먹으려는 게 아니라.”

“영진위가 제도적 개선을 추진할 권한이 없지만, 피해자인 제작 주체들을 대신해 불공정한 유통 상황들을 지적해야 해.”


류지호는 순진한 생각들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솔직히 왜 영화진흥위원회에 얽매이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한 거 아닌가, 이 사람아.”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국민의 정부의 포괄적 문화정책 아래서 영화진흥법 개정이 되면서 민간주도의 영화진흥위원회가 탄생했다.

제2차 개정 영화진흥법에 따라 ‘영화계의 운명을 결정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부여받았다.

개정 법안에 따르면 영화진흥기본계획의 수립, 위원회의 운영 관련 사항, 영상제작 관련 시설의 관리 및 운영, 영화진흥금고의 관리와 운용, 조사·연구·교육·연수, 한국영화 수출 및 국제교류, 스크린쿼터 시행 관련 업무 등을 맡게 됐다.

또한 한해 1,000억 원대에 이르는 큰돈을 굴리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공적 자금을 다루는 데는 책임감과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중립적이고 합리적으로 집행했다고 해도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고요. 매번 공정성 문제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위원회에 들어가야지. 그것 때문에 협회 사람들과 트러블이 발생하는 것이고.”

“개인적인 생각으로 개별 사업이 아니라 산업 전반을 위한 인프라 확대나 복지 등의 공익추구 용도로 자금 운용을 합리화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자네는 민간주도의 영진위를 반대하는 것인가?”

“반대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찬성합니다. 다만 영진위가 지원기관이 아닌 정책기관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정부와 입법기관 그리고 영화계 사이에서 소통창구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진흥금고 따위 문화관광부에 줘버리고 순수하게 조사·연구·교육·연수, 한국영화 수출 및 국제교류, 스크린쿼터 시행 관련 업무 및 메이저 투자·배급사들의 독점적 횡포를 막기 위한 환경 조성 등 밥그릇 놓고 내가 합법적으로 먹네 네가 불법적으로 먹네 싸우지 않는, 정책연구와 시장 감시감독 역할을 수행하는 기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영화인들끼리 권력과 뽀찌를 놓고 싸움을 벌이는 이전투구의 장이 아니라요.”


류지호는 떡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말이 나온 김에 주요 한국영화계를 이끄는 선배들을 향해 영화진흥위원회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영진위가 영화인들에게 욕을 많이 먹지만, 정책연구실에서 월별 영화산업 통계 발표, 영화 관객성향 조사, 상시적인 포럼 개최를 통한 제도 개선, 해외 통신원을 활용한 세계영화산업의 동향 파악 등을 통해 갖가지 진흥책들을 쏟아낸다.

영화인들이 그걸 써먹지 못해서 그렇지 유익한 데이터들이다.


“그걸 누가 모르나 이 답답한 사람아. 그런 영진위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영화협회와 대립하고 있는 거란 말이야.”

“예산과 권력을 일정부분 포기하면 안 됩니까?”

“......!”

“그깟 150억, 원로들에게 줘버리세요. 양수리종합촬영소도 영진위에서 분리시켜버려야 합니다. 이제 몇 년 만 지나면 양수리 촬영소는 경쟁력 없습니다. 지금 상태로 영진위가 가동된다고 해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들 입맛에 맞는 사람들이 위원장이 될 텐데 왜 당장만 보십니까?”


이전 삶에서 영진위 위원 구성은 늘 개혁과 보수 사이에서 저울추가 왔다갔다했다.

문화계에서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분야가 영화계다.

분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념을 지향하며 등장한 영화인들이 한국영화의 역사와 전통을 부정하는 듯한 행태를 보이고, 행동한 것은 영화계에 깊은 상처로 남을 것이다.]

[기존 영화계 역시 새로운 변화를 인식하지 못한 채 관행적인 행태로 영화계의 자긍과 전통을 지키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영화인협회와 영화인회의가 서로를 향해 쏟아내는 비판을 요약하면 그랬다.

모든 영화인들이 이들에 동조해 편을 나눠 싸우지 않는다.

일부 권력이라는 완장을 차고 싶고 뭔가 된 것처럼 행세하는 소수의 기득권들이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선동해 대립하고 갈등을 유도하고 있다.

갈라치기는 어떤 사회에서나 통한다.

심지어 영화계에서조차도.


“자네는 계속해서 이편도 아니고 저 편도 아닌 애매한 포지션을 계속 유지한다고 보면 되겠나?”


이들이 류지호에게 진짜 듣고 싶은 말인 것 같았다.

차라리 중립을 지켜달라.


“영진위는 관심도 없습니다. 한국영화산업 시스템 그리고 스태프들의 처우개선에 관심 있을 뿐입니다. 정치질 하는 협회가 아니라 회원 권익을 보호하는 조합이 하루 빨리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돈 떼먹는 놈 있으면 처벌받게 하고, 부당한 처우를 당하면 길드가 나서서 도와주는. WaW 같은 메이저들과 정기적으로 계약, 임금체계, 근로조건, 보험 등을 협상할 수 있는 길드가 하루 빨리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선배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넨 노조를 찬성하나?”

“당연한 거 아닙니까?”


류지호의 되물음에 도리어 당황하는 선배들이다.

이승훈 감독이 정신을 차리고 변명처럼 말했다.


“스태프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기에 노조설립을 원천봉쇄하려는 줄 알았지. 진심이라면 내가 오해한 건가?”

“WaW가 표준계약서를 만들어 사용하면 뭐합니까? 이를 동의하고 합의한 노동자 측 대표가 없어서 요식행위나 마찬가지인데. 개별계약을 하려고 해도, 누구는 기존 관행대로 해달라고 하고, 스태프마다 천차만별입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대표님?”


잠자코 있던 박건호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몇 해 전부터 꾸준히 여러분에게 설명했습니다. WaW는 협회든 조합이든 영화계를 대표할 수 있는 단체가 만들어진다면 당장 표준계약에 대해 논의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틈만 나면 말하곤 했죠. 불법 유통되는 영화 콘텐츠의 확산으로 홈비디오 등 부가판권 시장이 몰락하게 된다고 경고해 왔습니다. 이 상태로 가다가는 한국영화 전체 매출에서 극장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는 기형적인 시장 구조가 만들어질 거라고. 스크린쿼터 아주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언젠가 축소되거나 없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패배 가능성이 높은 부분에서 전략적으로 후퇴하고 반드시 승리해야 할 전투를 이기는 걸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영화인회의 멤버들은 납득한 얼굴들이 아니었다.

스크린쿼터는 한국영화의 최후의 보루라고 믿고 있었기에.

폐지하자는 것이 아니다.

축소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얻어내자는 것인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한국영화 편인 류지호라는 절대 권력자가 뻔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그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소위 ‘86’세대 엘리트들은 영화계 수구보수와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문명과 사회가 하루가 다르게 숨 가쁘게 변화하는 것을 외면하는 것인지 아니면 발맞추지 못하는 것인지.

항상 과거의 방식에 사로잡혀 있다.


‘세상을 바꾸는 혁명이란 삶의 끈을 놓지 않고 스스로를 먼저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했지.’


❉ ❉ ❉


영화인회의 초청 강연을 다녀온 지 이틀 후.

원로 배우 두 명이 류지호를 충무로 아스토리아 호텔로 불렀다.

일방적으로 만나자고 했지만, 류지호는 순순히 호텔 커피숍을 찾아왔다.

영화진흥공사 사장까지 지낸 전설적인 원로 배우.

영화인협회 이사장인 원로 여배우.

두 대선배가 류지호를 불러냈다.


“정부의 이념적 전략과 그것을 등에 업은 몇몇 아류 영화인들의 동조로 결국 영진위가 만들어지긴 했지. 권력이라는 완장을 차니까 호기를 부리는 것 같은데 오래 가지 못할 거야.”


전 영진공 사장의 말에 류지호가 반박했다.


“국회로부터 국정감사를 받고, 기획예산처가 주관하는 공공기관 경영평가를 받게 될 준정부기관입니다. 정치권과의 결탁을 말씀하시는 것은 민주적 운영원리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겁니다.”

“영화계의 중지를 모은 것도 아니고, 저들끼리 영화제에서 만나 약속한 것이 결탁이 아니고 그럼 뭔가?”


류지호가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두 원로 배우는 자신들의 말만 늘어놓았다.

영화계 후배들에 대한 독설만 있었다.

우월성, 선민의식, 배우병.

평생을 무비스타로 살아온 선배들이다.

말끝마다 스타병적 언사와 모습을 드러냈다.


“선배가 잘못했다고 너희 다 물러가라 이런 식이면 공산당과 뭐가 달라?”


원로 여배우 선배는 이성보다는 감정적으로 대응했다.


“우리보고 인사도 안 하는 애들이었어. 영진위 사건은 영원히 못 잊어. 용서가 안 돼.”


전 영진공 사장은 나름 윗사람 태를 내려고 애썼다.


“류 감독, 자네 혼자서 영화 잘 만든다고 영화계가 잘 돌아가진 않아.”


계속해서 원로 여배우 선배는 지나치게 감정적이었다.


“요즘 증말 충무로가 참 가관이야.”

“.....”

“여러 가지 장르의 영화가 생산돼야 하는데 전부 흥밋거리에만 치중해서 가는 게 안타까워. 청소년들이나 아이들이 봐서 좀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유의 영화도 나와야 하지 않을까? 그런 게 많이 결여된 것 같아. 흥행이 잘돼서 돈 벌겠다는 생각이 우선적이겠지만, 영화정책이 좀 정화돼야 한다고 봐.”


옳은 말이다.

그럼에도 사용하는 단어 중에 거슬리는 표현이 간간이 눈에 띠었다.


“저는 그냥 삼류 감독일 뿐이라서 제 영화 연출하기도 벅찹니다.”


장장 한 시간 동안 원로 배우 두 사람의 설교를 들었다.

듣고 나서 남는 것이 없었다.

영화계 후배들 뒷담화만 들은 것 같았다.

틈틈이 류지호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이 비칠 때는 입 안이 매우 썼다.

류지호는 두 단체 사이에서 중재를 하려는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대립 속에 끼어들 생각도 없었다.

그들이 가는 길과 류지호의 가는 길이 달랐기 때문이다.

며칠 간격으로 류지호는 대립하고 있는 두 단체의 수뇌부와 만났다.

류지호는 다시 한 번 나이가 많다고 원로가 되는 것이 아니란 걸 확인했다.

원로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원로를 자처하며 합리에 저항할 때 세상의 체계는 초라해진다.

한편으로 개혁을 외치면서도 자신에게 관대하게 구는 모습 역시 비겁해 보인다.

남에 대한 비판은 곧 비판하는 자 스스로의 행동규범을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또 남에게 했던 비판은 결국 자기에게로 되돌아오게 마련이고.

이전 삶에서 류지호는 수만 명의 영화인 중 존재감 없는 한 명일뿐이었다.

그가 냈던 목소리가 영화계에 반영될 일 자체가 없었다.

이젠 아니다.

한국영화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되었다.

말 한 마디가 업계를 들썩이게 만들 영향력이 있다.

한국영화판을 막강한 자본력으로 좌지우지 했던 폭군으로 평가될지.

한국영화 산업화에 기여한 공로로 인정받을지.

원로가 되었을 때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류지호는 궁금하지 않았다.

어떻게 평가받든 상관없이 옳은 방향이라고 믿는 것을 해 나갈 뿐.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개혁이 별 건 가....?’


이전 삶에서 본인이 당했던 부당하고 불합리하고 억울했던 일을 후배들이 똑같이 겪지 않도록 만들면 된다.

스크린쿼터 수호 백날 떠들어도 표준상영계약서와 스크린 독과점 방지법만 못하고, 영화진흥위원회 자리싸움보다 만 명이 넘는 충무로 스태프들의 생계에 보탬이 되는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이 더욱 시급하며, 영화제작예산 절감 부분에서 간이영수증 사용금지가 절실했다.


✻ ✻ ✻


가온그룹 본사의 이사회의장 집무실로 처음으로 기자들이 방문했다.

한국에서 지금까지 발행 중인 잡지 중 가장 역사가 오래된 종합 잡지이자, 국내 3대 월간 시사지로 손꼽히고 있는 월간동양 기자들이다.

월간백원이 안보, 반공, 골수보수 성향의 기사에 치우친 데 반해 월간동양은 보수 시사지임에도 스포츠와 대중문화, 과학 분야 기사도 싣는 편이다.

가온그룹 의장비서실에서는 ‘새만금개발’ 사안과 관련해 다양한 언론플레이를 기획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구독자가 가장 많은 3대 보수잡지와의 심층 인터뷰였다.

류지호는 백원 계열 시사지를 제외하고, 동양과 제일(월간시사 WIN)과만 인터뷰하기로 했다.

백원일보와 제일(월간 시사WIN) 계열 월간시사잡지에 류지호 특집 기사가 나간 바 있다.


- 새만금과 관련해 그렇게 큰 그림을 그리고 계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사업 이야기나 영화 이야기는 이 정도로 충분할 것 같고.... 많은 독자들이 감독님의 성공담에 대해 무척 궁금해 합니다.

“진부하죠. 가난한 달동네 살며 조간신문 돌리던 소년이 미국의 유력한 가문과 인연이 닿는 행운을 얻은 끝에 성공의 길에 들어섰다. 맨주먹으로 맨땅에서 시작해 자수성가한 분들에 비하면 저의 인생은 행운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 하하. 지나친 겸손이십니다.


류지호는 대꾸 없이 비서가 새롭게 가져다 준 커피를 음미했다.


- 미국의 유명 잡지와 인터뷰에서 스스로는 삼류라고 규정하셨더군요. 일류와 삼류를 구분하는 기준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구분의 대상이 돈과 같이 유형적인 것이라면 보유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하면 될 일이지만, 예술처럼 무형적인 것이라면 그 구분이 쉽지 않죠. 물론 대중문화예술은 작품의 판매숫자나 인기도 같은 방식으로 가늠할 수도 있겠네요. 그것은 결과물에 해당될 경우고 예술가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사람들은 보통 삼류가 자신이 삼류인 것을 모른다고 생각들 하죠. 나는 동의하지 않아요. 어느 분야든 자신의 작품수준을 모른다면 그것은 본인이 아직 지망생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창작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수준을 모를 수가 없거든요.”


한동안 기자는 류지호의 성공 방식과 가치관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했다.

류지호는 뻔한 이야기를 내놓았다.

바로 ‘치열함’이다.

가장 무난하면서 설득력 있는 대답이다.

과거로 회귀했다고 털어놓을 수는 없으니까.

가진 게 없는 상황에서 자신을 일으켜 세워줄 힘은 오직 치열함 밖에 없기도 하고.


- 모두가 일류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에요.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해서 원래 태어날 때부터 일류였고 지금까지 일류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부러운 것이 아닙니다.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신의 노력에 의해 현재 일류의 삶을 만든 사람들이 부럽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난 것도 자기 능력이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떻게 그게 자기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것은 능력이 아니라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지 않나요? 정리하면 나는 일류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운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이 부러운 겁니다.”

- 그 열등감? 질투심? 뭐라 표현 하든 그런 특성이 삼류를 규정하는 거라고 혹자는 말합니다.

“글쎄요. 삼류는 일류가 될 수 있는 가능성과 희망이 있지만, 일류는 삼류로 전락할 일밖에 없지 않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일류였고 지금도 일류지만 영원한 일류는 없고 그 반대로 태어날 때부터 삼류였고 지금도 삼류지만 영원한 삼류 인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진 것이 없어 가난했고 경제적으로 삼류였던 우리 가족은 적어도 지금은 경제적인 면에서 일류의 삶을 영위하고 있어요. 사람들은 제가 단편영화로 주목받기 전에 결혼식비디오를 촬영했던 삼류였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비록 삼류 인생이고 마이너이지만 언젠가 일류인생, 메이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현재의 순간을 치열하게 그리고 열등감을 긍정의 힘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일류 또 사회 속에서 메이저로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희망적인 메시지군요?

“일류에게 해바라기처럼 구는 사람, 상대의 지위에 따라 처세술이 바뀌는 사람은 삼류가 아닙니다. 그저 기회주의자일 뿐이죠. 열심히 하되 비굴하지 말자. 그게 삼류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저열한 급을 삼류라고 비하한다.

‘딴따판‘에서는 조금 다른 개념으로 쓰이기도 한다.

가령 B급 정서라는 식으로.

엄숙주의를 벗어나 겉으로는 싸구려처럼 보이지만 경쾌하고 풍자와 해학을 담고 있거나 그렇게 행동하는 양식을 이르기도 한다.

저급한 수준의 예술가가 풍자와 해학을 부릴 경우 싸구려 코미디가 나온다.

고급지식과 교양으로 무장한 대중예술가가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전달했을 때 풍자와 해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Fin de Siecle>을 두고 우리나라 평론가들이 벌인 추태는 실망스럽게 그지 없었어요.”


월간동양 기자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용들은 매체에서 여러 번 소개된 뻔한 이야기들이었다.

이제 나올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의 평론가에 대해 ‘실망’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그와 관련된 논쟁을 불러 올 발언이 나올 것 같았다.

거물의 발언은 사소한 것도 크게 부풀려지게 마련이다.

인터뷰 전문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일부 표현을 숨기거나 단어 하나만 빼버려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로인해 독자들로부터 원하는 반응을 끌어낼 수도 있다.

소위 글발이 되는 기자만이 부릴 수 있는 총보다 펜이 무서워지는 마법이랄까.


작가의말

새해가 밝은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시간은 참 한결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저 흐를 뿐이네요.

즐겁고 행복하게 한 주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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