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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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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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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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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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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예술 한 번 해보자고!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한동안 서울에만 머물고 있던 류지호가 교외로 나들이에 나섰다.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풍경에 시선을 던지고 있던 류지호가 한국에서 찍을 영화를 떠올렸다.


복수로 피는 꽃(이하 복수의 꽃).


갑오년 농민전쟁을 주요 모티브로 쓴 시나리오다.

동학농민전쟁은 한국 근대사에서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다.

<복수의 꽃>의 메인 플롯은 아니지만, 영화의 전반을 떠받치는 배경이다.

연화라는 이름의 충청도 지주의 무남독녀가 주인공이다.

우금치 전투에서 조일 연합군에 동학농민군이 대패한다.

퇴각하는 동학잔당에 의해 연화의 집안이 풍비박산 난다.

사실은 동학군 패잔병이 아니다.

동학도로 위장한 도적떼였을 뿐이다.

도적떼가 훑고 지나간 마을에 관군이 들이닥친다.

관군의 행패는 도적떼보다 더하다.

동학군과의 전투로 받은 분노를 풀기라도 하듯 마을의 아녀자를 겁탈하고 아무 죄도 없는 장정들을 매타작하고 총살한다.

그런 참혹한 광경을 경험한 연화는 복수를 결심한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다.

삼남지역(충청, 전라, 경상)에서 각시탈 연쇄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무명의 사부로부터 칼 쓰는 법을 배운 연화가 원수를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살인을 저지른다.

삼남지방에서는 이 연쇄살인범을 ‘각시‘라고도 하고 ’색시탈바가지’라고도 부른다.

원수를 동학도로 오해하고 있는 연화는 도적떼를 찾아내 처지하는 과정에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복수심이 흔들리지는 않는다.

연화는 복수를 완성시키기 위해 지리산 깊숙이 숨어사는 도적떼의 수괴를 찾아간다.

특별할 것 없는 여인의 복수극이다.

메시지라고 할까, 주제라고 할까.

별 것 없다.

굳이 대보라고 하면 복수의 허망함 정도.

한편으로 실패한 혁명인 줄 알고 있는 동학농민전쟁은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란 것을 주장하는 것까지.

에필로그에서 동학군의 일부가 무장독립투쟁으로 옮겨가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핏빛 복수극에 약간의 희망을 묻히긴 한다.

영화든 노래든 문학작품이든.

명작 혹은 걸작으로 남는 많은 작품들은 그 시대의 루저(또는 약자)를 다루는 경우가 많다.

루저를 통해 시대상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복수의 꽃>에는 지배계층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당시의 밑바닥 삶만을 담을 예정이다.

류지호는 이 시나리오를 쓰면서 두 개의 영화를 떠올렸다.

하나는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 다른 한 편은 <바람의 검심>이다.

몇 달 전이었다.

<킬 빌>의 쿠엔 태런티노에게 <복수의 꽃> 영문 시나리오를 보여줬다.

그런데 그는 영화의 스토리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Eye-MAX 카메라로 찍을 거란 말이야?”

“응.”

“왜?”


Eye-MAX의 신형 카메라 개발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테스트를 위해 영화를 찍는다고 말할 순 없었다.


“압도적인 자연과 풍광을 영상에 담아보려고.”

“스크립트에는 내내 여후아? 여후? 그 여자만 계속 쫓아다니던데.... 70mm 스크린 사이즈로 영화 내내 풍경만 보여줄 생각이야?”

“그럴 리가! 퀸이 좋아하는 사무라이 영화와 장철의 <외팔이 검객> 같은 무협영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검술 액션 시퀀스를 보여주려고.”

“내 영화 스크립트 읽고 영감을 받았어?”


여성 주인공의 복수극.

원수를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살해한다는 스토리.

그 외에는 공통점이 없다.

어차피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이후로 여성 복수극 서사는 다 거기서 거기다.


“고등학교 때 썼어.”

“진짜?”

“영화의 배경에 내 조국의 아픈 역사를 깔고 있거든. 만약 이 스크립트대로 영화가 나오면 한국에서 제법 시끄러울지도 몰라.”

“혹시 네 나라에도 서부개척 시대 같은 역사가 있었어?”

“웨스턴무비가 떠올랐어?”

“군대, 보안관, 농민, 건맨... 소드맨인가? 암튼 일본인은 백인 정복자를 상징하는 건가?”

“한국 액션영화도 좋아한다고 하더니 다 거짓인가 보네? 우리 역사를 하나도 모르나봐? 한국영화 좋아한다는 말은 이제 어디 가서 하지 말아줘.”

“좋아한다니까! 네가 디렉터 정을 만나게 해줘서 내가 얼마나 기뻤는데!”


류지호는 JHO Security Services의 탐정들은 사람 찾는데 귀신들이다.

한국출신의 정창화 감독을 찾아달라고 의뢰하자 얼마 안 가 찾아냈다.

그는 영화감독이었던 것을 밝히지 않고 오렌지카운티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

류지호는 노년의 정창화 감독을 찾아뵐 때 태런티노를 데리고 갔다.

참고로 쿠엔 태런티노는 가장 최고의 무술영화로 장철의 <외팔이 검객>과 정창화의 <죽음의 다섯손가락>을 꼽았다.


“한 때 우리 민족은 일본의 지배를 받았어. 식민지 시절의 조선이 배경이야.”

“...흠. 앵글로색슨이 인디언 부족과 연합해 또 다른 인디언 부족을 학살한 것과 비슷한 건가?”

“아니거든! 궁금하면 나중에 한국역사책 읽어봐.”

“차라리 영화를 알려줘.”

“누가 영화로 역사를 배워?”

“영화가 뭐가 어때서? 2시간만 투자하면 그 나라의 문화, 역사, 사회를 알 수 있지.”

“이래서 영화 만드는 사람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니까.”


전 세계 수많은 영화팬들이 할리우드에 의해 왜곡된 미국의 역사를 간접 학습하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미국의 역사를 배우려고 해선 안 된다.


“Eye-MAX란 말이지?”

“꿈도 꾸지 마.”

“왜?”

“<킬 빌>을 Eye-MAX로 촬영하려면 최소 1억 달러는 필요해. 굳이 70mm 스펙터클이 필요한 영화도 아니고.”

“쳇. 자기는 꼴리는 대로 다 하면서......”

“<재키브라운> 투자했다가 얼마나 손해 봤는지 잊었어? 내게 자기만족적인 영화 찍는다고 뭐라 할 처지는 아닐 텐데?”

“내 영화가 신경 쓰여? 세상에서 새로운 이야기는 없어.”


비슷한 콘셉트와 소재로 맞붙는 경우가 할리우드에서는 비일비재했다.

따라서 류지호가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다만.


“퀸이 워낙 잘 나가야 말이지. 비교될 것 같아서.”

“복수하는 여자의 처절한 이야기가 처음도 아니고, 내 영화는 펑키한 스타일이야. 네 영화는 아마도 농담 한 마디 안 나오는 진지한 영화일 테지. 문제없을 것 같은데?”


어차피 쿠엔 태런티노의 <킬빌>은 ParaMax Films 투자·배급이다.

소송에 휘말릴 일은 없다.

그럼에도 류지호는 사전에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을 일찍부터 정리해 놓았다.


피식.


류지호에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넓적한 얼굴로 실실 거리던 태런티노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부우웅!


류지호가 타고 있는 차량이 영동고속도로 여주 나들목을 빠져 나왔다.

차창을 열자, 훅하고 맑은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차창 밖으로 고개를 살짝 빼서 저 멀리 한때 골프장 부지였던 산을 눈에 담았다.

여전히 WaW 스튜디오 공사가 한창이다.

인수할 때 이미 골프장의 기반 공사를 위해 땅이 파헤쳐져 있었다.

그 때문에 스튜디오 공사 진척이 빠른 편이다.


끼이익.


차량 행렬이 스튜디오 부지로 들어서자, 여지없이 현장소장이 직원들과 버선발로 뛰쳐나왔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수고가 많습니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류지호는 야외 세트 구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현장소장과 직원들이 졸졸 따라왔다.

가온그룹이 대유건설을 인수하려고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

현장소장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 오너가 될지 모르는 류지호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었다.


“준비하시는 영화 세트장 가십니까?”

“소장은 가서 일보세요. 현장감독을 해야 하는 사람이 날 따라다녀서 되겠어요?”

“아, 네! 그럼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현장소장과 직원들이 넙죽 허리 숙여 인사했다.

한참을 망부석처럼 서 있다가 류지호 일행이 시야에서 사라지고서야 현장사무실로 돌아갔다.

여주 WaW 스튜디오의 야외 세트장은 시대별로 네 개의 구역으로 나눠져 있다.

류지호의 영화 <복수의 꽃>은 1920년대 전라도지방이 주요 배경이다.

수만 평의 드넓은 부지에 일제강점기 군산거리를 재현한 세트가 지어지고 있다.

나무가 울창한 숲 안쪽에는 지리산에 숨어사는 도적떼 수괴의 움막 세트가 지어질 예정이다.

사운드 스테이지는 공사가 끝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세트 촬영은 양수리 종합촬영소에서 하기로 했다.

주요 로케이션은 한국민속촌, 군산, 전국 각지의 산과 들이다.

<복수의 꽃>에서 제작실장을 맡게 된 친구 김재욱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류지호가 원하는 로케이션 장소를 물색 중이다.


뚝딱뚝딱.


군산거리 야외 세트장은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다.

세트팀 목수들을 지휘하고 있는 30대 중반의 남자가 보였다.

윤민구 미술감독.

미국의 유명한 영화 전문학교 AFI출신이다.

사실 그의 이력은 꽤 특이했다.

홍대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한 후 고우찬의 아버지 고성재가 운영하는 인테리어업체에 입사했다.

고성재 밑에서 디자이너로 1년 넘게 일했다.

미국 유학을 원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스스로 유학비를 벌어야 했다.

고성재의 회사에서 일하며 나름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일찍 기반이 잡히다보니 유학에 대해 망설이기 시작했다.

결국 회사에 다니게 되면 유학은 영영 어려워질 것 같아 사표를 던졌다.

고성재는 사표를 받는 대신 윤민구에게 제안을 했다.

유학비를 지원해 줄 테니 한국으로 돌아와 회사로 복귀하는 것으로.

윤민구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무작정 미국으로 떠났다.

교포가 운영하는 광고 프로덕션에서 3년 일한 후에 AFI에 입학해 영화 미술을 전공했다.

유학생 모임에서 류지호를 알게 되었다.

류지호는 디맨션이나 ParaMax Films에서 제작하는 다이렉트 비디오나 B무비 미술파트 일을 맡기며 경력을 쌓도록 도와주었다.

마침내 류지호가 한국에서 데뷔를 하게 되면서 윤민구를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키웠으니 써먹어야지.....!’


때마침 충무로에서도 아트디렉터라는 영화미술 분야가 막 등장하기 시작했다.

젊은 기획 프로듀서와 유학파 감독이 작업하는 영화 위주로 아트디렉터의 영역이 구축되고 있다.

기성세대들에게는 영화미술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아 여전히 소품이나 구해서 배치하고, 세트를 만들고, 의상 설정에 도움을 주는 정도에서 머물고 있다.

충무로의 배타적이면서 프로덕션 디자인을 인정하지 않는 풍토 때문에 아트디렉터들이 남몰래 설움이 쌓이던 시기다.

류지호는 자신의 크루들이라고 할 수 있는 <복수의 꽃> 제작진에게 할리우드 프로덕션 디자인을 제대로 보여줄 생각이다.


“윤 감독!”

“감독님!”


윤민구가 류지호에게 달려왔다.


“고생이 많아요.”

“고생은 요. 내 손으로 백랏에 풀 세트를 지어본다는 게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죠.”

“불편한 건 없어요?”

“고 사장님이 어려움 없이 일할 수 있게 서포트를 잘해주고 계십니다.”


유학파인 윤민구는 기존 충무로 세트팀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겨우 60여 편 제작되는 한국영화다.

기존의 영화 미술을 독식하다시피 했던 미술팀 입장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경쟁자가 달가울 리가 없다.


“지금 일하는 목수 아저씨들은 아저씨 회사에서 지원해준 모양이네요?”

“네.”

“가벽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기본구조를 철근 콘크리트로 하니까 전문시공업체를 끼고 하는 게 아무래도... 그렇겠네요.”

“감독님하고 고 사장님하고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목수 아저씨들도 다 알던 분들이라 불편한 것도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영화 세트는 목조로 짓는다.

야외 세트 역시 비용이 적게 들고 건축이 용이한 목조로 제작되는 편이다.

하지만 류지호는 발상을 달리했다.

건물의 골격을 튼튼한 철근으로 만들기로 한 것.

영화에 따라서 골격만 남겨두고 철거해 완전 다른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했다.

심지어 내부를 꾸밀 필요가 없는 건물은 컨테이너 박스를 쌓아 놓고 겉만 적산가옥처럼 꾸미도록 했다.

할리우드 야외 세트와 한국식 세트의 장점만 살린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이전으로 넘어가면 사정은 조금 달라지겠지만, 근·현대 야외 세트는 자유롭게 베리에이션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태풍이나 화재로 소실 되도 뼈대는 남아 있겠죠?”

“전부 그런 건 아닙니다. 저쪽 양편의 적산가옥 보이시죠?”


윤민구가 가리키는 곳으로 류지호가 고개를 돌렸다.


“저쪽 블록 여섯 채는 실제 군산에 존재하는 적산가옥을 모델로 재현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전부 목재로 짓고 있습니다.”

“나중에 다른 영화 찍을 때 60~70년대 평양 시가지나 서울, 부산 시가지로 보일 수 있겠어요?”

“적산가옥 이층에 가벽만 세우면 크게 지장 없을 겁니다. 어차피 저곳들도 1층은 철근으로 기둥을 세우고 있으니까요.”


일제강점기 군산시내 야외 세트는 직선으로 100미터 거리에 조성되고 있다.

류지호는 윤민구의 안내를 받아 한창 공사 중인 세트를 둘러보았다.

30분 정도 세트장을 돌아봤을까.


“류 감독!”


김영복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형이 어쩐 일이야? 촬영 중 아니었어?”

“촬영 쫑 한지가 언젠데?”

“그랬나?”


류지호의 예언(?) 대로 김영복 기사는 충무로에서 잘나가는 촬영감독으로 첫 손에 꼽힌다.

몇 년 사이 한국 흥행영화 대부분을 그가 촬영할 정도다.

작년 <텔미섬딩>을 끝내고, 곧바로 <JSA>에 합류해 촬영을 마친 모양이다.


“씨네-누보와 계약했어?”

“<엽기적인 그녀>?”

“응.”

“하기로 했다.”

“잘했어. 형이 그거 들어가기 전에 내 영화 끝내줄 게.”

“진짜 되겠냐? 12월에는 쫑해야 돼.”

“돼. 형도 스토리보드 봐서 알잖아.”

“70mm로 찍겠다며?”

“형은 드라마와 액션에만 힘 빡 줘. Eye-MAX 카메라는 전문 오퍼레이터가 운용할 거니까.”


<복수의 꽃>은 Eye-MAX 카메라로 촬영할 예정이다.

Eye-Max 카메라 운용을 위해 캐나다에서 전문 오퍼레이터와 그의 팀을 불러올 예정이다.


“진짜 35mm로 찍어도 되는 거야? 슈퍼가 아니라?”

“응.”

“그게 돼?”


김영복은 일반 35mm 필름을 디지털 공정으로 70mm로 만든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억지로 블로우업 하면 되기야 하지만, 화질을 어떻게 해결할지 미심쩍었다.

“Eye-MAX Corp.이 DMR이라고 70mm 마스터링 기술 개발이 막바지에 와 있거든. 오리지널 70mm 화질에는 어림도 없지만, 디지털 스캔 기술도 많이 발전했고 디지털 보정 기술도 꽤 올라와서 어느 정도 가능할 것도 같아.”


DMR(Digital Media Remastering)은 Eye-MAX Corp.의 독보적인 기술력을 자랑하는 기술로 35mm 필름을 디지털 스캔한 후, 각종 보정을 거친 후 70mm Eye-MAX 전용 필름 포맷으로 변환시켜 주는 기술이다.

Eye-MAX 포맷이 전 세계 일반극장에서 상영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기술이 Eye-MAX MPX다.

일반 멀티플렉스에 Eye-MAX 포맷의 상영관을 호환시켜주는 극장 시스템이다.

류지호는 <복수의 꽃>을 통해 두 기술을 테스트해 볼 생각이다.


“쉴 거 다 쉬고, 널널하게 찍을 거 아니었냐?”

“내가 언제 널널하게 찍는 거 봤어?”

“미국에서 찍은 영화 DVD보니까 설렁설렁 걸어 다니던데?”

“감독이 발바닥에 땀나게 뛰어다니는 것도 웃기잖아.”

“명수형은 그러거든?”

“형이 오죽 답답하면 감독님이 그랬겠어.”

“자식이, 말 한마디를 안 져.”

“걱정 마, 형. 내가 단편영화 찍던 애송이가 아니야. 엄청 업그레이드 돼서 돌아왔어.”


김영복이 걱정스레 말했다.


“12주, 60회 가지고 진짜 되겠어? 요즘 대작은 그렇게 안 찍어.”

“500억짜리 영화도 15주에 마쳤거든요.”

“제작비도 어마무시한데 회차라도 줄이는 게 맞겠지, 뭐.”


<복수의 꽃> 제작비는 60억.

초과될 것을 예상해 2~3억 예비비를 편성해 놓았다.

참고로 <쉬리>와 <JSA>의 순제작비는 45억 선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영화에서 대작 축에도 못 든다.

2002년 줄줄이 개봉하는 <예스터데이>, <2009 로스트메모리>,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용가리>에 비하면 한국형 블록버스터 명함도 못 내민다.

어쨌든 <복수의 꽃> 제작비 상당 부분은 시대극 세트 제작과 Eye-MAX 관련 예산과 후반작업이 차지한다.

다만 Eye-MAX 카메라 일체는 현물 투자를 받기로 했다.

DMR과 MPX 테스트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1시간 촬영 분량의 Eye-MAX 전용 필름의 가격은 운송비 포함해서 4만 달러가 넘었다.

<복수의 꽃> 제작진은 Kozak 본사에 20만 달러 상당의 필름을 주문해 두었다.

70mm 전용 필름 값만 2억 이상이 소요될 예정이다.


“단편 찍을 때도 돈지랄을 하더니, 이제는 대놓고 돈을 바르는구만?”

“하고 싶은 영화 마음껏 해보려고 돈을 버는 거야. 당연히 돈지랄을 해야지.”

“나야 땡큐지. 연달아 슈퍼35mm 했는데, 이참에 진짜 70mm도 경험해보고. 좋다, 아주.”

“막상 경험해보면 진저리 칠걸?”

“왜?”

“보면 알아.”


크고, 무겁고, 소음 장난 아니고, 필름 로딩 번거롭고....

성격 급하고 예민한 사람은 스트레스를 꽤나 받을 수도 있다.


“Eye-MAX로 찍는 최초의 상업영화가 되는 건가?”

“아닐 걸?”

“다큐 말고 상업영화가 있었어?”

“리드 스콧 알지?”

“당연히 알지.”

“그 양반이 영화 한 편 들어가는데, 일부 장면에서 Eye-MAX 카메라로 찍고 싶은 모양이야.”

“SF영화야?”

“아니. 모가디슈 전투를 다룬 영화.”

“.....?”

“있어. 미국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준 전투가.”

“그러냐? 전쟁영화라면 70mm로 찍을 만하지.”

“요새 할리우드에서도 70mm 안 찍어.”

“제작비 빵빵하면서 왜?”

“다 돈이지 뭐. 무비스타한테는 몇 천만 달러 쥐어주고 러닝 개런티까지 챙겨주는데, 프로덕션 비용과 VFX 비용은 계속해서 깎으려고 난리도 아니더라고.”

“그런 건 충무로 제작자들이 안 배웠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WaW는 안 그러잖아.”

“그래, 너 잘났다 자식아.”

“형, 고마워.”

“뭐가?”

“충무로에서 돌고 있는 책 절반이 형한테 간다며? 그런 데도 나와 작업해줘서.”

“됐어, 자식아. 이 영화로 칸 가게 되면 나도 데려가.”

“오오. 칸을 노리고 계시다?”

“네가 좋아하는 롱테이크와 롱 쇼트 기깔나게 뽑아주마.”

“<The Killing Road>보다 더 잘 뽑아낼 수 있겠어?”

“리차드슨이 별 거냐? 형만 믿어.”


하하하.


류지호가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가소로워서가 아니다.

김영복의 의리가 기꺼웠다.

오랜만에 만난 김영복은 성격이나 태도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사실 DP 시스템을 제안했을 때 거부하면 어쩌나 걱정을 했었어.”

“충무로도 DP 시스템으로 가야 돼. 그래야 테크니션이 아니라 진짜 Lighting Cameraman이 되는 거니까.”


촬영감독을 미국에서는 DP(Director of photography) 혹은 Cinematographer라고 하고 영국에서는 Lighting Cameraman이라고 하기도 한다.

단순히 촬영기술을 부리는 전문가가 아니라 그림과 빛을 다루는 예술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꼰대들이 또 시비 걸 거야.”

“그래도 어쩌겠어. 12주 안에 쫑하려면 촬영·조명이 일사분란하게 준비해줘야 하는데.”


그리고 헤드스태프를 단일화 시켜서 감독, 프로덕션 디자이너, 촬영감독이 원활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할 의도도 있었다.


“친한 할리우드 DP 데리고 와서 찍을 줄 알았어.”


뭘 모르는 하는 소리다.


“A급 데리고 오려면 얼마를 줘야 하는지 알아? 혼자 오지도 않아. 팀을 데리고 오면 현재 제작비의 세 배 이상 들 걸?”


롭 리차드슨 몸값은 작은 한국영화 한 편을 찍을 수 있을 정도다.

그와 함께 일하는 팀원들의 주급까지 포함하면 한국영화 평균 제작비에 달한다.


“안 깎아줘?”

“형 같으면 개런티 깎아 줄 거야?”


해외로 출장 가는 것이니 더 달라고 하면 더 달라고 했지, 깎아줄 리가 없다.

롭 리차드슨 같은 A-List 촬영감독은 할리우드에서도 함께 작업하고 싶어 하는 감독과 프로듀서가 차고 넘친다.

한국까지 류지호를 따라와서 촬영을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렇다면 그 아래 급의 촬영감독을 데려오면 되지 않겠냐고 다시 질문을 받는다.


“충무로에도 그 정도로 찍는 촬영기사들이 있는데, 왜 그래야 하는데?”

“이야~ 류 감독이 그렇게까지 충무로를 높게 볼 줄 몰랐네.”

“그걸 그렇게 해석하나?”


한국의 프로야구와 비교하면 편하다.

한국야구가 미국의 더블A에서 트리플A 사이 수준인 것처럼 충무로 촬영감독의 수준은 대략 더블A 수준이다.

촬영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실력은 거기서 거기다.

그 중에 아주 특출 난 촬영감독이 가끔 탄생할 뿐이다.

촬영감독은 연출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연출자가 뛰어난 촬영감독과 만나면 가진 바 재능을 넘어서는 영화를 보여줄 수 있고, 반대로 촬영감독이 좋은 연출을 만나면 가진 모든 재능을 모두 발휘할 수가 있다.

어린 시절 단편영화로 맺어진 인연이다.

훌쩍 성장한 두 사람이 다시 만나 영화를 만들 예정이다.

그것도 60억의 대작에서.

류지호가 그때 그가 아니듯, 김영복도 마찬가지다.

그는 현재 충무로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촬영감독이 되어 있다.

시대가 변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9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젊은 촬영감독들이 영화의 완성도를 상당부분 끌어올리고 있다.


“이제 빛에 대해서 좀 알아?”

“오야지도 환갑이 넘어서야 겨우 이제야 빛이 뭔지 알 것 같다고 하셨는데, 감히 내가 그런 말을 씨부릴 수 있겠냐?”


유성길 촬영감독이 생전 저런 말을 자주 했다.


“장비는 원 없이 쓸 수 있게 해줄 게. 예술 한 번 해보자고.”

“얼씨구? 네 입에서 예술 한 번 하자는 말을 다 듣고. 미국에서 약 하냐?”

“쌈마이 한 번 해보자고 할 순 없잖아.”

“쌈마이나 니마이나.... 다 영화 흥행에 달렸더라. 망하면 예술이고 뭐고 다 소용없어.”


지긋지긋했던 도제시스템이 무너졌다.

도제시스템에서는 촬영감독으로 데뷔하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하지만 김영복과 비슷한 연배의 개혁적인 촬영감독의 등장으로 이 시스템이 허물어졌다.

조수 기간이 짧아졌고 점차 전문화로 나아가고 있다.

아예 조수생활 없이 곧바로 카메라를 잡는 촬영감독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촬영감독들은 ‘오야지’에게서만 촬영을 배운 게 아니라, 정규교육기관과 유학 생활을 통해 그리고 단편영화와 CF, 뮤직비디오 작업을 통해 또한 스스로의 부단한 실험과 꼼꼼한 정리를 통해 촬영의 지평을 넓혀왔다.

촬영감독의 나이는 젊어졌고, 숫자도 급속히 늘어났다.

이 시기 한국영화의 업그레이드를 논의할 때 기술 그중에서도 시각적인 측면에서의 진보 중 상당수는 신예 촬영감독들에 힘입은 것이 컸다.


“충무로 가서 소주 한 잔 합시다.”

“술 마셔도 돼?”

“안 될 게 뭐가 있어.”

“양주만 마시는 줄 알았지.”


충무로 ‘닭한마리 집’에서 두 사람이 소주잔을 기울이는데, 촬영부가 한 명 두 명 술자리에 합류했다.

몇 시간 뒤에는 조명기사와 퍼스트가 또 몇 분 뒤에는 동시녹음 기사가, 새벽에는 오동석과 김재욱이 합류했다.

류지호는 수십 년(?) 만에 정겨운 충무로 술집들을 옮겨가며 동료들과 술을 마셨다.

술값 걱정, 차비 걱정,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마음껏 먹고 마셨다.

김재욱이 술값을 계산하려할 때 류지호가 자신의 카드를 건넸다.


“진행비로 처리하면 돼.”

“그냥 내 거로 긁어.”

“.....?”

“내가 저기 형들한테 술 참 많이 얻어먹었다.”

“단편영화 찍을 때도 네가 술 다 사지 않았냐?”

“큭큭. 그랬지.”


류지호는 자신의 카드를 김재욱에게 넘겨주고 술집을 나섰다.

김재욱과 조수들은 아마 동이 틀 때까지 술판을 이어가게 될 것이다.

택시비가 없어서, 첫 차를 기다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런 회식자리조차 없으면 스트레스와 정신적 문제를 해소할 해방구가 없으니까.

임금수준은 처참하고, 노동강도는 어떤 직종보다 높으며, 군대식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충무로.

당사자일 때 류지호는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가엾을 수가 없다.

과거에는 동료들과 함께 어울리며 술잔을 기울이고, 부당하고 불합리한 현실을 욕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젠 아니다.

부당하고 불합리한 것을 바꿀 힘이 있다.


작가의말

한 주 마무리 잘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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