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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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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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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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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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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쪽

월스트리트 저널 테스트. (3)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주)가온 이사회의장 직속 전략기획실은 연말임에도 무척 분주했다.


“밀레니엄 힐턴으로 들어온 매각대금은 부채상환에 써보지도 못했습니다.”


경영지원팀장 조준열의 말에 문지열 실장의 고개가 돌아갔다.


“경주 힐턴은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혹시 들은 거 없어?”

“차명으로 관리되던 지분을 사모님에게 몰아주지 않을까요?”

“(주)대유와 대유자동차를 제외하고 나머지 계열사는 모두 매각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하지?”

“채권은행에게 대출금을 출자 전환하도록 했고, 필요한 경우 감자를 단행하도록 했습니다.”

“기존 50대 그룹 계열사에 적용했던 워크아웃 안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인가?”

“예.”

“(주)대유는 건설과 인터내셔널로 분리되는 것이 확실한지 다시 한 번 확인해보도록 해.”

“몇 번을 확인했습니다.”


본래는 대유그룹 핵심계열사 12개에 대한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이 진행되어야 했다.

그런데 (주)가온의 전략기획실과 다온로펌, 나래안전 시스템의 인맥을 총동원해 몇 가지 부분에서 구조조정안을 바꿨다.

본래 워크아웃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대유증권 같은 금융계열사도 포함시켰다.

독자생존으로 가닥이 잡혔어야 할 대유건설도 포함시켰다.

그를 위해 (주)가온의 주거래은행 시민은행을 움직였다.

주채권은행인 제일은행과 102개 금융기관이 참여하는 채권금융기관 협의회에서 시민은행이 제법 목소리를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증권과 건설 두 곳에 눈독을 들이는 국내 기업이나 금융사는 없지?”

“예.”

“캐피탈과 다이너스클럽코리아는 어떻게 하겠대?”

“가온GP에서 증권을 인수하면서 함께 인수하려고 한답니다.”


산업은행은 빠르게 대유그룹에 대한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그 결과 12개에 달하던 대유그룹 계열사를 분할 및 신설해 24개사로 만들고 ‘빅딜’ 방식을 통한 M&A를 추진하게 됐다.

그룹사를 해체하고 각 법인을 다른 대기업에 넘기는 구조였다.

(주)가온의 회장 래리 킴은 산업은행과 채권단에 인수하고 싶은 기업에 대한 의견을 전달한 상태다.

건설과 증권의 경우 독자생존이 가능할 것이란 실사 의견이 있었다.

(주)가온의 의지대로 무시됐다.

어떤 대기업보다 현금유동성이 월등한 (주)가온이다.

중견기업 주제에.

게다가 대유그룹 워크아웃이 발표되고 나서 미국에서 19억 달러(2.2조 원) 상당의 (주)가온과 계열사 유상증자 소식이 전해졌다.

채권단에서 그것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모를 리가 없다.

그 외에도 모든 한국 언론마다 류지호와 JHO Company 계열 투자회사가 나스닥 주식을 처분해 얼마를 벌었는지 대대적으로 떠들었다.

그로 인해 거의 변동이 없던 한국인 부자순위가 바뀌었다.

그것도 엄청난 액수 차이로.


“김 회장은 한국을 빠져나갔대?”

“예.”

“대유그룹 문제는 인수합병에만 집중하자고.”


금융감독원이 대유그룹 워크아웃 대상 계열사 실사 결과를 내놓으면서 대유그룹의 천문학적인 분식회계 의혹을 제기했다.

장부에 92조원으로 잡혔던 자산이 61조원으로 급감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얼마 남아 있지 않던 대유에 대한 시장 신뢰마저 산산조각 났다.

여론은 경영진 문책론으로 들끓었다.

결국 금감원은 대유특별감리반을 출범시키고 9개월에 걸쳐 조사를 벌여 분식회계 등 혐의로 대유 임직원 52명을 검찰에 고발하게 된다.

5년 후, 대법원에서 대유 관계자들에게 실형과 함께 23조원의 추징금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한다.

대유그룹 회장 몫은 무려 18조원.

사법사상 최대 추징금이다.


비슷한 시기 LA 시청 로비.

JHO REAL ESTATE의 자회사 Playa Vista Develop Company 사장 랜스 맥그래디(Lance McGrady)가 언론인들을 불러 기자회견을 열었다.


- 이 지역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해안 습지 중에 하나인 발로나 습지와 관련된 환경단체의 민사소송에서 로스앤젤레스 고등법원에서 모두 기각되었음을 알려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또한 우리는 환경단체들과 미래지향적인 합의를 도출하게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어 Playa Vista 개발 실무자들이 차례로 나와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첫 번째는 가스 누출과 관련된 논란에 대한 LA건축안전국의 발표가 있었다.

환경단체가 해당 지역에 메탄가스가 누출된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전문 탐사기업과 계약해 철저하게 조사를 벌였다.

결국 Playa Vista 개발 프로젝트 현장에서 중대한 결함이 있을 수 없다는 보고서가 정식으로 시의회에 제출되었다.


- 다만 LA건축안전국(LADBS)에서 상업시설 지하에 통풍구 및 가스 완환 시스템과 경보 장치를 설치할 것을 권고했고 우리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행할 계획입니다.


두 번째는 교통 혼잡을 완화하는 방안을 도시설계에 반영하는 것과 에너지 절약 시스템, 무독성 및 재활용 재료 사용, 환경 파괴를 최소화하는 녹색개발 모델을 채택하기로 했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 또한 신재생에너지를 적극적으로 채택하고 개발지역의 모든 공원과 조경 지역에서는 재활용된 물을 사용하기로 최종적으로 결정되었음을 알립니다.


LA 시의회는 이전부터 Playa Vista 개발 프로젝트에 적극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JHO Company가 사업을 인계하면서 환경단체까지 태도가 돌변했다.

20년 넘게 개발이 지지부진했던 것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 Playa Vista 개발사의 모회사인 JHO Company의 소유주 류지호는 해안과 인접한 발로나 습지의 163에이커를 개인적으로 구입해 시에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류지호가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습지 보호 절충안을 통 크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반대론자들의 입을 닫게 만들어버렸다.


- 미스터 류가 기부한 부지는 인공적인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 남겨지고 보존될 것입니다. 또한 해당 지역이 아메리카 원주인들에게 중요한 지역이었음 잘 알고 있는 미스터 류는 개발 중 발견되는 유적, 유물 등을 보존하기 위해 해당 구역에 공원 및 숲으로 조성해 보호 할 것임을 약속했습니다.


대략 20만 평의 습지를 류지호가 구입해 시정부에 기증하기로 했다.

또한 인디언의 성지였던 곳이 발견되면 그 또한 보존하기로 약속했다.

미국의 개발회사였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일단 기증하는 부지를 빼고 무려 150만 평이 남는다.

20억 달러 안팎의 개발비용 역시 주식을 처분하고 손에 쥔 돈의 1/10 수준 밖에 안 된다.

심지어 발로나 습지 기부를 통해 세금혜택을 볼 수도 있다.


- 우리는 Playa Vista 프로젝트를 통해 21세기 친환경과 첨단인프라가 융합된 도시의 모델을 선보일 계획입니다. 많은 성원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스티븐 아들러를 비롯해 Playa Vista 개발에 오랜 시간 공을 들였던 이들은 류지호가 나선다고해서 달라질 것이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반년도 되지 않아 환경단체와 일부 지역주민단체를 굴복시켰다.

욕심을 내려놨기 때문이다.

주택 장사할 생각이 애초에 없었기에 가능한 양보다.

25만 평(인디언 유적 포함)을 개발하지 못한다는 것은 개발업자 입장에서 엄청난 손해다.

류지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LA 인근에서 150만 평이 넘는 부지를 얻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실상 마지막 남은 알짜 유휴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지역에 스튜디오와 자회사의 캠퍼스를 이주시키는 것만 해도 남는 장사다.

류지호는 부동산개발로 수익을 내기 위해 Playa Vista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JHO Company 계열 기업들에게 투자하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 돈을 버는 길이긴 하지만.


✻ ✻ ✻


뉴욕 월가의 GARAM Invest.

매튜 그레이엄이 보고서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며칠 후 뉴욕 증권거래소 마지막 거래가 있기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개의 보고서와 각종 서류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똑똑.


보고서를 읽는 데 집중을 했다고 해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집중하지는 않았다.


“들어와.”


집무실 문이 열리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는 동양인 남자 류지호다.


“어서와.”

“형이 집중하고 있는 모습은 꽤 오랜만이네.”


매튜가 다짜고짜 류지호에게 서류철 하나를 내밀었다.


“뭔데?“

“일단 봐.”


류지호가 받아 서류철을 들췄다.

올해 보고받는 숫자들은 하나 같이 비현실적이었다.

이번에는 더 했다.


“아 참, 실례. 저기 접객용 소파에서 봐.”


한편에 마련된 응접소파에 자리를 잡은 류지호가 본격적으로 서류를 확인했다.


“차 한 잔 마실래?”


류지호에게서 예상 밖의 말이 나왔다.


“차보다는 혹시 맥주 있어?”

“후후... 맥주? 지금?”

“이것 확인하는 것 외에 따로 할 일도 없어.”

“당연히 맥주 있지.”


미니바에 다녀온 매튜의 손에 맥주가 두 병 들려있었다.

미국은 CEO 집무실에 미니바가 있는 곳이 꽤 많다.

물론 미니바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근무 중에 술을 마신다는 것은 아니지만.


꿀꺽꿀꺽.


류지호가 단숨에 맥주병의 반을 비웠다.

그리고 확인한 나스닥 주식 처분 결과는....


‘....?’


GARAM Invest의 벤처캐피탈 부서에서는 일리노이주에 본사를 둔 한 무선통신업체에 5,000만 달러를 투자한 바 있다.

인터넷이든 통신이든 유선보다는 무선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장기적 전망에 따른 결정이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그 회사는 BT&T와 돕슨이란 통신사에 24억 달러에 매각됐다.

그 투자를 통해 2년 만에 13억 달러를 거뜬히 벌어들였다.

또 인터넷 콘텐츠 서비스 업체 한 곳과 광통신망접속 업체에 각각 1,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현재 두 회사의 자산가치는 각각 12억 달러와 16억 달러가 되어 있다.

여기에다 장단거리 전화와 데이터전송 업체에도 850만 달러를 투자했는데, 그 업체 역시 자산가치가 2억 달러로 부쩍 늘었다.

GARAM Invest는 2년 전에 5억 달러의 펀드를 모아서 모두 통신관련 벤처에 투자했다.

현재까지 원금의 10배인 50억 달러의 수익이 전망되고 있다.

올해에만 월가의 벤처캐피탈 다섯 곳에서 10억 달러 이상의 펀드를 조성했다.

그 펀드는 모두 통신장비와 서비스, 네트워크에 투자됐다.

그 외에도 다양한 펀드들이 기술기업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닷컴 기업들은 돈이 넘쳐 어쩔 줄 모르는 실정이다.

공모주시장(IPO)에서도 닷컴 기업들은 연일 상종가 행진이다.

류지호는 GARAM Ventures를 설립할 때만해도 본인이 닷컴버블 중심에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광풍을 제대로 경험하고 있었다.

GARAM Invest 또한 알아서 닷컴버블에 편승해 돈을 벌어들였다.

뉴욕에서 투자한 닷컴 혹은 기술주들은 류지호가 전혀 모르는 회사들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어떤 광케이블 통신업체는 나스닥에 등록되면서 주당 공모가로 36달러를 책정했지만 거래 첫날 95달러를 찍었다가 84달러에 장을 마치는가 하면 또 다른 통신업체 역시 31달러에 공모가가 형성됐으나 거래 첫날 96.75달러에 장을 마감, 212%나 오르기도 했다.

GARAM Invest는 그 같은 IPO를 통해 수억 달러의 수익을 챙겼다.


“......”


어느 덧 월가에도 석양이 드리워졌다.

붉은 노을을 받은 탓인지 류지호의 얼굴은 활화산처럼 붉게 물들어 갔다.

한 병으로 부족했는지 아예 류지호가 미니바를 들락거리며 맥주를 꺼내 마셨다.

류지호 발 아래로 빈 병만 세 개째.


“오늘 밤에 선상파티 있거든. 갈래?”

“글쎄....”

“선상에서 보는 뉴욕의 야경은 정말 예술이야. 오랜만에 뉴욕에 왔는데 그 정도 여유는 즐겨야지.”

“음....”

“널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

“파트너 동반?”

“상관없어.”

“드레스 코드는?”

“일단 집으로 가자.”


보고서를 모두 확인한 매튜 그레이엄이 류지호를 자신의 팬트하우스로 데리고 갔다.


✻ ✻ ✻


류지호는 시상식도 아닌데 오랜만에 턱시도를 빼입었다.

매튜 그레이엄과 함께 허드슨 강을 유유히 떠가고 있는 크루즈 선상 파티에 참석했다.

화려한 뉴욕의 야경 못지않은 풍경이 크루즈 안에서 펼쳐졌다.

드레스 코드에 맞춰 한껏 멋을 부린 선남선녀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각자만의 파티를 즐겼데, 참석자들의 면면에 걸맞게 상당히 호화로운 파티가 연출됐다.

그 중에 거물들도 꽤 눈에 들어왔다.

올해 비로서 류지호가 ‘차세대 지도자‘라는 딱지를 뗐다.

작년만 해도 The Hollywood Reporter가 선정하는 '미 연예산업 미래를 짊어질 차세대 지도자 35인'의 일원이었다.

올해부터는 ‘할리우드를 이끄는 지도자 100인’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미래를 이끌 기대주가 아니라 현재 업계의 유력한 거물이란 평가다.

류지호가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말을 걸고 인사를 할 필요가 없다는 걸 뜻한다.


“동생아, 파티 재밌게 즐겨라.”


벌이 꽃을 찾아 떠나듯 매튜 그레이엄이 냉큼 떨어져나갔다.

류지호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일단 난간으로 가서 허드슨강 풍경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뉴욕의 야경은 여전히 멋졌다.


“......”


이런 파티도 따지고 보면 일의 연장이다.

먹고 마시며 노는 것이 진짜 목적이 아니다.

파티가 끝나면 각종 기사들이 다음 날 신문에 파도처럼 쏟아진다.

그 증거가 바로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기자들이다.

이 파티의 호스트는 제이크 T 멜란(Jake T Mellan)이다.

뱅크 오브 뉴욕(Bank of New York)의 멜란(Mellan) 가문 후손이다.

제이크 멜란은 대학을 졸업한 후 패션, 통신, 금융 분야를 두루 거쳤는데, 언론을 이용한 비스니스 수완이 꽤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선상 파티 또한 인맥과시와 함께 언론플레이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초청자 반은 그의 인맥이었고 나머지는 기자들이었다.

참고로 이전 삶에서 제이크 멜란은 비트코인에 투자했다가 엄청난 대박을 친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전 재산에 비하면 그리 큰돈은 아니었지만.

암튼 그는 21살 때 3,000만 달러 상당의 신탁을 가문으로부터 상속받았다.

다소 흥청망청 돈을 쓰며 살고 있긴 하지만, 또 그만큼 벌어들이고 있기도 했다.

워낙 가문이 가문이다 보니.

제이크 멜란은 매튜 그레이엄처럼 괴짜였다.

두 사람은 여러 면에서 비슷한 면이 많았다.

심지어 알코올 의존증까지도.

다만 술에 취하지 않은 제이크 멜란은 수완이 꽤 좋은 비즈니스맨이면서 신사의 면모를 보였다.

따라서 그의 인맥 또한 대체로 신사숙녀라고 할 수 있다.

류지호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파티가 막바지로 접어들 무렵까지는.


“왓 더 퍼.....!”


크리스 앤더슨(Chris Anderson).

그의 조부는 월스트리트 큰손이다.

부친 역시 미국 금융계에서 꽤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의 친구들은 모두 아이비리그 출신들이다.

게다가 미국 500대 부자에 속하는 집안의 자제들이다.

그와 패거리들은 억양의 차이, 스피킹의 능숙함에 따라 외지인과 현지인을 구분했다.

개인주의적 성향 때문에 사람의 인격을 깎아 내리는 말이나 제스처를 잘하지 않는 편이다.

그들이 차별하는 것은 오직 피부색과 출신국가뿐이다.

그래서 그들 패거리에는 동양인이나 아랍인은 단 한 명도 없다.


“지금이라도 자신 없으면 사과를 하지?”


류지호와 크리스의 앞에 술병이 놓여있다.

한 병만으로 족히 서너 명의 장정을 보내 버릴 무지막지한 술이다.

도수가 55도가 넘은 술이 무려 5병이나 놓여 있다.

상류사회의 젊은 남자들 대부분이 마초다.

아니다.

마초이고 싶어 한다.

남성다움을 뽐내는 것도 뽐내는 것이지만, 초원의 맹수들 사이에서 내가 이빨이 더 튼튼하다느니 발톱이 날카롭다느니 으스댄다고 할까.

아메리칸 풋볼이 처음 시작된 곳이 아이비리그였다는 것을 떠올리면 바로 납득이 간다.

겸손하면 바보로 취급당하거나 잡아먹히는 세계.

최소한 센 척해야 그나마 대접 받을 수 있는 세계.

류지호는 한국의 상류사회를 아직 경험해 보진 못했다.

아마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한국의 아침드라마에서 재벌이나 고소득 전문직을 묘사할 때 어떤 전형성이 있다.

오만하고 이기적이며 얌생이처럼 점잖은 척 하면서 은근히 상대의 성질을 건드리는 모습들 같은.

그런 캐릭터가 매체에서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것은 현실에 그 같은 캐릭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혹은 작가나 대중이 그들에 대해 받는 인상이 그런 것에 가깝거나.

그런데 실제 상류사회일원들은 그 반대다.

어떤 척도 안 한다.

그저 포커페이스다.

누군가에게 어떤 인상을 남겨야 한다면 당당하고 검허하며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탁월한 배우들이다.

덜떨어진 인물이나 영화나 드라마의 클리셰를 연출할 뿐이다.

그 덜떨어진 인물이 바로 크리스 앤더슨이었다.

류지호 앞에 술병이 놓이게 된 발단은 작은 다툼에서 시작됐다.

술을 마시지 않는 매튜 그레이엄을 향해 크리스가 빈정거렸다.

매튜 그레이엄은 죽을 뻔한 이후로 마약을 완전히 끊었다.

심지어 술과 담배도 멀리하려고 했다.

자신과 동류였던 매튜 그레이엄이 바른 생활 사나이인척 하는 꼴이 아니꼽게 보였을까.

크리스 패거리가 그런 매튜 그레이엄을 놀려댔다.

형이 양아치들에게 놀림 당하는데 참을 동생은 없다.

형보다 더 힘이 센 동생이라면 더더욱.

처음에는 좋은 말로 타일렀다.

선민의식이 골수까지 들어찬 크리스 앤더슨이 들을 리가 없다.

결국 작은 언쟁이 몸싸움으로까지 번지기 전에 제이크 멜란이 중재를 선답시고 술 대결을 제안했다.

술 잘 마시는 게 무슨 자랑거리인가 싶었다.


‘선민의식 쩔어 있는 것들이 하는 짓이라곤 유치해서.....’

크리스 앤더슨은 고등학교 때까지 풋볼 선수였다.

운동부들의 주량은 정말 장난 아니다.

평범한 사람은 절대 운동부와 술로 맞상대를 해선 안 될 만큼 술귀신들이다.

또 술에 관해서 운동부의 자부심이 남달랐다.

당연히 크리스 앤더슨은 수락할 수밖에.

이전 삶은 물론이고 17살부터 술을 마신 발랑 까진 류지호 역시 주량으로는 어디 가서 꿀려 본 적이 없다.

이전 삶에서 자타공인 충무로 최강의 애주가였다.

충무로에서 술과 관련된 여러 전설을 만들어낸 장본인이었다.

꼬리를 말고 물러설 이유가 전혀 없었다.


“시작하지.”

“얼마든지.”


류지호와 크리스 앤더슨이 55도가 넘는 술을 위장에 들이부었다.

지켜보는 파티 참석자들은 기가 찬 듯 바라봐야 했다.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남미 출신 참석자 몇몇은 남몰래 혀를 찼다.

그들은 크리스 앤더슨과 술로 경쟁하지 않는다.

휘말렸다가 부모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어라 마셔라.


술이 바닥을 보였다.

제이크 멜란이 급히 술을 다시 가져와야 했다.

안주.... 그런 거 없다.

소금 한 톨.... 스트레이트 한 잔 원 샷.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다는 표현이 들어맞을 것 같았다.

술이 들어가니 크리스가 흥이 넘치는 모양이다.

춤을 추는 것처럼 몸을 건들거렸다.

매튜 그레이엄이 은근슬쩍 류지호의 팔을 붙잡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의미다.

이미 파티참석자들은 류지호가 보통이 아님을 인정했다.

더 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후욱. 후우.


류지호는 가볍게 단전호흡을 해보기도 하고, 가볍게 태권도 스텝을 밟기도 했다.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지기 싫었다.

인종차별주의자에게는 더더욱.


‘미친.....!’


알딸딸해진 크리스 앤더슨은 점차 질려 가고 있었다.

사실 한 병 반을 비우고 나자, 기절하기 일보직전까지 몰렸다.


“쉣! 머더....퍼....!”


비틀거리는 크리스 앤더슨을 제이크 멜란이 얼른 부축했다.

이미 승부는 정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크리스 앤더슨이 바닥에 꼴사납게 자빠져도 되는 건 아니다.

두고두고 사교계의 놀림감이 될 테니까.

호스트로서 손님의 체면을 챙겨야 했다.


“그만!”


제이크 멜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류지호는 계속해서 술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꿀꺽, 꿀꺽!


마치 기계 같았다.

인간이 술을 먹는 상태가 아닌 술이 인간을 먹어 치우는 상태.

류지호의 눈빛 역시 정상이 아니다.

어느 틈엔가 크리스 앤더슨은 가드들의 의해 선실로 옮겨졌다.


“지호, 이제 그만! 게임은 끝났어. 너의 승리다!”


다시 한 번 스트레이트 잔으로 향하던 류지호의 손이 멈췄다.

그리곤 흐리멍덩한 시선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슥 훑어봤다.

류지호의 입에서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존나 잘난 것도 없는 것들이 존나 척하기는 씨발롬들이....!”


그렇게 마셔 대는데,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이상했다.

그때.


“지호....?”


섹시한 파티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류지호에게 다가왔다.


훅.


여성 향수가 류지호의 콧속으로 들어왔다.


“응? 어디서 봤는데....?”

“샤논. 샤논 T 챔버스에요. 날 몰라보겠어요?”


<Remo : The Destroyer> 애틀랜타 로케이션 당시 펍에서 우연히 대화를 나누고 자선행사로 인연이 이어졌던 Tox Enterprises 그룹의 손녀다.


“....음. 샤논...?”

“만날 사람은 언제가 만나게 되어 있나 보네요.”


과거로 돌아온 후 취한 적이 거의 없던 류지호다.

그래서 호기를 부려봤다.

본인의 주량을 계산하지 않고 마셨다.


비틀.


샤논에게 악수를 청하기 위해 손을 내밀던 류지호가 몸을 휘청거렸다.

옆에 있던 매튜 그레이엄이 얼른 부축했다.


“샤논양이라고 했죠?”

“네.”

“동생은 조금 쉬어야 할 것 같네요. 실례하겠습니다.”


이 같은 선상파티에는 개인경호원을 대동할 수 없다.

제이크 멜란이 고용한 가드가 류지호를 부축해 선실로 들어갔다.


“너 누구냐? 왜 내 몸에 손을 대고 있는 거지?”


류지호가 다짜고짜 가드를 향해 되돌려차기를 날렸다.


휘청.


술에 떡이 된 류지호의 발차기가 제대로 펼쳐질 리가 없다.

그럼에도 반사적으로 피한 가드는 깜짝 놀랐다.

멀쑥하게 생긴 외모와 달리 발차기가 제법 매서웠기 때문이다.


“정신 차려!”


매튜 그레이엄의 고함소리에 류지호는 술이 확! 깼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류지호는 가드를 향해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술에 취해 그만....”

“이해합니다. 미스터.”

“혹시 샤워실로 안내해 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절 따라오십시오.”


류지호는 가드의 안내를 받아 객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지갑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지폐를 꺼내 가드에게 쥐어줬다.

자신의 추태를 함구해달라는 부탁이 담긴 팁이다.

안타깝게도 이 추태는 뉴욕 사교게에서 은밀히 퍼지게 된다.

그것도 엉뚱한 내용으로 각색이 되어서.

무시무시한 주량과 함께.


솨아아아.


찬물로 샤워를 하고 나니 술이 조금 깨는 느낌이 들었다.

몸과 정신을 추스른 류지호가 선상으로 나와 밤바람을 맞았다.

단번에 술기운을 날리진 못했다.

그래도 차츰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때 샤논 챔버스가 찾아왔다.


“볼 때마다 재미있는 일을 벌이고 있군요?”


류지호는 대답 없이 쓴 미소를 지어보일 뿐.


“꽤 재밌는 친구야.”


샤논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류지호를 바라보며 제이크 멜란이 중얼거렸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던 매튜 그레이엄이 입을 열었다.


“녀석과 사귀어보면 얼마나 재미없는 인간인지 알게 될 걸?”

“소문하고 달라. 꽤나 승부욕이 있어.”

“내 동생은 화나면 무서워.”

“럭키 보이니 미라클 보이니 사람들이 떠들기에 어떤 녀석인지 궁금했지.”

“실제 보니까 어때?”

“약한 맷집에 굴하지 않고 높은 목표를 세운 것은 칭찬해 줄만해.”


매튜 그레이엄이 입가에 짓궂은 미소를 걸고 말했다.


“물론 목표가 너무 거창하지만 말이야.”

“목표가 뭔데?”

“지구정복.”

“죽다 살아났다고 하더니 실없는 농담은 여전하네?”

“내가 마약에 찌들었을 때 말고, 허튼소리 하는 거 봤어?”

“몇 살이라고 했지?”

“28.”

“21살이 아니고?”

“어려보이긴 하지.”

“우린 아시아 출신을 잘 구분 못하긴 해. 물론 그들도 우리를 잘 구분 못하는 것 같지만.

“녀석의 겉모습에 속아 여럿이 혼쭐이 났지. 제이크도 못된 장난 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난 저 청년과 친구가 되고 싶은데?”

“쉽지 않을 걸?”

“스코틀랜드계를 싫어하나?”

“출신, 인종 따위 상관없어. 예의 없고 잘난척하는 놈을 싫어하지.”

“크리스 앤더슨은 찍혔네?”

“아마도.”

“네 동생은 결혼했나?”

“아니. 데이트 하는 여성도 없을 걸?”

“저 둘 꽤 잘 어울려 보이는데? 맷은 어떻게 생각해?”

“내일 동부와 남부의 얌생이들이 내 동생에게 킬러를 보낼지도 모르겠는데?”


매튜 그레이엄의 말이 영 실없는 농담만은 아니었다.

샤논 챔버스는 남부와 동부 사교계 청년들이 마음에 두고 있는 아가씨 중 한 명이다.

하지만 그녀는 부자 가문의 남자들에게는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허영심 가득한 여자들과도 잘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사교계 같은 곳보다 자선행사에 관심이 많았다.


“오늘 일 괜찮겠어요?”


샤논 챔버스가 걱정스레 물었다.


“이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의 입이 무겁기만 바라야죠.”


말은 그렇게 하지만, 류지호의 표정은 걱정하는 투가 아니었다.


“제이크 멜란이라면.... 저 유명한 4대 가문 상속자니까.”

“내일 모레가 21세기인데 아직도 가문 타령이라니.....”


멜란은 170여년의 역사를 가진 가문이다.

언제나 락커팰로, 케네디, 핍스와 함께 전통의 미국 4대 상속가문으로 꼽힌다.

그렇듯 선상파티에 초대받은 사람들 가운데 어중이떠중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샤론 챔버스 역시 전국적인 지명도가 있는 유명한 상속가문 출신이었고.


“직업상 루머에는 이골이 나있어서 개의치 않습니다. 그리고 월가에서 자주 쓰는 말 중에 월스트리트 저널 테스트라는 것이 있어요.”

“......?”

“내가 하는 일이 월스트리트 저널에 보도되더라도 당당히 방어할 수 있을 정도로 일하라는 뜻이죠. 오늘의 나는 술대결의 승리자일 뿐입니다.”


풋.


샤논이 웃었다.


“아까 술김에 잘 못 들었는데, 뭐라고 한 겁니까?”

“무슨 말이요?”

“만남이 어떻다고 한 것 같은데?”

“다시 만나게 되어서 무척 반갑다고요.”

“캘리포니아로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지난달에 샌프란시스코로 옮겼어요. 앞으로 자주 볼 수 있겠죠?”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딱히 샌프란시스코에 자주 갈 일도 없고.


“아쉽지만, 한 동안 내 나라로 돌아갑니다.”


샤논 챔버스는 어딘지 아쉬워하는 기색이다.


“그랬군요.”


파티에 다시 합류한 류지호는 참석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헤이, 미스터. 잠시 대화 좀 나눌 수 있을까?”


말을 건 남자는 USA 투데이 기자였다.

미국에서는 서민신문, 중도적인 성향으로 평가받는 언론이다.

그 외에도 워싱턴 포스트나 뉴욕 타임스 기자들과도 짧게 담소를 나눴다.

간혹 술대결을 기사로 내보내도 되겠냐고 물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 파티에 초청된 기자들은 우호적인 기사를 쓸 것을 약속하고 왔다.

쉽게 말해 파티참석자들과 한통속이란 의미다.

나쁜 뜻일 수도 있고 좋은 뜻일 수도 있다.

일종의 공생관계라고 할 수 있으니까.

오랜만에 참석한 뉴욕의 파티다.

류지호는 캘리포니아 날라리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작가의말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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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 태풍을 예고하기라도 하듯이.... (1) +6 23.01.19 4,109 145 23쪽
» 월스트리트 저널 테스트. (3) +14 23.01.18 4,042 146 28쪽
396 월스트리트 저널 테스트. (2) +13 23.01.17 4,046 156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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