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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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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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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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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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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삼류를 아느냐?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지난 해 여름이었다.

충무로 현장영화인들을 중심으로 한국영화인회의가 출범했다.

한국영화제작을 주도하는 양성규, 박광우 등 제작자 및 투자배급업자, 현장 영화인과 영화하계 인사들까지 가담해 227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스크린쿼터 연대에서 출발한 이 단체로 인해 기존의 한국영화인협회와 함께 한국영화계를 양분하는 모양새가 만들어졌다.

한국영화인회는 그동안 진보적 성향의 현장영화인들과 제작일선을 떠난 퇴역영화인들 중심의 한국영화인협회 간 영화법 개정과 영화진흥위원회 구성 등을 둘러싼 진보-보수 노선 갈등이 첨예화되던 끝에 탄생했다.

이념갈등이나 진영의 갈등을 보기 힘든 것이 신구세력 간의 충돌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했다.


“참고로 감독님은 한국영화인협회 회원에서 제명되셨습니다.”


박건호 대표의 말에 류지호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난 협회에 가입도 안했어요. 웬 제명이요?”

“<퇴마기록> 제작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리시는 순간 자동적으로 회원이 되셨습니다.”

“와아. 원래 협회가 그렇게 일을 일사천리로 처리했어요?”

“WaW 오너를 누가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회비는요?”

“WaW에서 알아서 납부했습니다.”


류지호는 한국영화인협회의 속셈을 추측할 수 있었다.

분명히 WaW와 류지호는 그들 입장에서는 밉고 싫은 존재다.

그들은 그랜드벨 어워즈 파행과 영화진흥위원회 구성 등을 놓고 현장 영화인이 아닌 기득권 세력에 류지호가 힘을 보태주길 희망했다.

WaW와 류지호는 영화산업에서 거대한 기득권이었으니까.

비록 지금까지 개혁적인 움직임을 보였다고 하더라도.


“어딜 가나 둘 이상 모이면 밥그릇 싸움이군요.”

“인과응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명예롭게 일선에서 물러설 시기도 후배들에게 마지막 존경을 얻을 기회도 놓쳤지요.”

“혹시 제작가협회나 영화인회의 대표가 되실 생각은 없어요?”

“필요하십니까?”

“우리가 국제영화제도 지원하고, 제작사가 조금이라도 수입을 보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충무로가 변화는 속도가 더딘 것 같아요. 우리만 표준계약서를 쓰고, 임금과 노동시간을 보장한다고 되는 건 아니잖아요.”


무비서비스와 우노필름 같은 대형 배급사들도 동참해야 하는데, 벤처연방제라는 것을 만들어 덩치를 키우는 것에 한눈을 팔고 있었다.

백설, 광성, 올리온 같은 대기업은 충무로 개혁에는 애초에 관심도 없었고.


“WaW가 적극적으로 충무로 개혁에 나서길 바라십니까?”

“개혁처럼 거창한 건 아니고.... 발전속도를 조금 올리고 싶어서요.”

“제가 나선다고 해서 대표에 추대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누가 충무로 파워랭킹 2위를 무시하겠어요.”

“1위가 나서시는 건 어떻습니까?”

“전 할 일이 많잖아요. 미국을 오가는 것도 솔직히 벅찹니다.”

“감독님의 일까지 도맡아 처리하느라 저도 벅찹니다만.”


류지호가 벌여놓은 일이 좀 많아야지.


“그냥 우리 앞가림만 하는 걸로 하죠. 하하하.”


두 사람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그들을 태운 승용차가 남산의 구 영화진흥공사 앞에 멈췄다.

차에서 내린 류지호와 박건호는 곧장 건물 로비로 향했다.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국영화인회의 관계자들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우리가 늦은 건 아니죠?”

“아닙니다. 정확히 맞춰 오셨습니다.”

“선배님들께 인사나 드리죠.”

“절 따라오십시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영화인회의 관계자들의 안내를 받아 시사실로 향했다.

영화인들을 위한 D-Cinema 강연을 부탁받았다.

표면적인 이유 외에 다른 의도도 있었다.

한국영화인회의에 대한 류지호의 지지를 이끌어낼 의도도 숨겨져 있었다.

알면서도 강연을 수락한 류지호다.


“단순한 신구갈등이라고 보면 곤란합니다. 류 감독.”


오랜 만에 만나 인사를 나눈 신강 대표가 다짜고짜 영화인회의 당위성을 설파했다.

UCLA 선배 이광운 감독은 과격한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수구세력과 진보개혁 영화인의 세력 싸움이야.”


두 사람은 두 단체의 갈등에 대해 단순한 신구갈등이 아닌 기득권 유지를 바라는 소수의 영화인들과 현장영화인들의 충돌이며 권익과 영화정책, 법제개혁을 희망하는 다수의 선·후배 영화인들의 21세기 한국영화 선언이라고 주장했다.


“산업적, 문화적 시스템을 만들기에 앞서 무엇보다 영화계 내부의 자기 개혁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겠나?”

“그렇지. 인식과 태도가 변하지 않았는데 시스템만 변하면 절름발이와 다름없지.”


류지호가 듣기에는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은 혁명가들처럼 분연이 떨치고 일어서서 여러 사안에서 기존 기득권들과 충돌했다.

낡은 제도와 관행은 새로운 세대의 반발로 없애거나 개선된다.

시대의 흐름이다.


"영화인회의는 영화진흥위원회의 정책사업 방향을 설정하도록 돕고 기존의 낡고 잘못된 관행을 타파하는 활동을 펼치려고 하지만, 일부 기득권 세력의 내 밥그릇 지키기 때문에 반쪽짜리에 머물고 있어. 류 감독이 참여해 준다면 더 광범위한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아.“


영화인회의 사무총장이 강연에 앞 서 마련한 티타임에서 부탁했다.

여담으로 영화인회의 1기 상임집행위원회는 몇 달 후에 총사퇴하게 된다.

그랜드벨 어워즈 파문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인데, 이후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운영되다가 2기가 출범하게 된다.

2기부터 진정한 영화인회의 활동이 시작되게 된다.

영화 제작환경 및 근로조건 개선.

지역영상위원회의 전국적 확대.

영화진흥위원회에 대한 감시와 비판.

완전등급심의제 실현과 각종 관계 법규 개선.

통합시청각법의 입법 및 관련정책 조정.

독립영화 및 창작영화 지원.

중요 중단기 과제를 설정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한국영화인협회와 사사건건 부딪친다.


‘많이들 왔네....’


시사실 통로까지 빈틈없이 들어찬 인파들을 보며 류지호는 다소 느슨했던 마음을 추슬렀다.

얼추 계산해 봐도 300명 가까운 인원이 D-Cinema 강연을 듣기 위해 찾아왔다.


씨익.


류지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 모습이 할리우드와 다른 면이다.

할리우드에서는 디지털 영화에 대해 거부감을 표하는 영화인들이 너무나 많았다.

반면에 충무로의 젊은 영화인들은 디지털 영화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새로운 첨단기술에 대해 호기심과 도전정신을 불태우고 있었다.

영화인 모두가 D-Cinema를 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 참석한 영화인들의 도전정신과 새로움에 대한 갈망은 진짜고 진심이었다.

대충 훑어본 참석자 면면만 봐도 류지호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D-Cinema 시대에 재능을 만개하는 젊은 영화인들이 거의 대부분 참석했기 때문이다.

류지호는 마이크에 대고 소리가 잘 나오는지 확인했다.


“아아.”


다소 소란스러웠던 장내가 정리됐다.


“안녕하세요.”


객석에서 류지호를 향해 박수가 쏟아졌다.


짝짝짝.


류지호는 잠시 반가운 얼굴들을 슥 훑었다.

개중에는 네가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 하나 보자고 전의를 불태우는 이들도 보였다.

지금 시기의 충무로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만, 디지털 영화기술은 한국영화의 중요한 경쟁력 중에 하나가 된다.

할리우드나 유럽 영화계가 수십 년 쌓은 아날로그 노하우를 10년 만에 따라잡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디지털 영화는 다르다.

선진국과 한국의 기술력의 차이가 거의 없다.

VFX 분야에서 앞서간 첨단기술은 몰라도 영화공정의 기본적인 기술은 돈만 주면 얼마든지 할리우드의 최첨단 기술과 장비를 구입해 사용할 수가 있다.

류지호가 가진 자본력, 소유하고 있는 미국·캐나다 영화기술 기업들과 연계한다면, 충무로가 디지털 영화 부문에서 만큼은 충분히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이전 삶에서도 충무로는 적극적이고 도전적으로 디지털 영화를 도입했다.

짧은 시간에 시행착오를 집중적으로 겪으면서 관련 노하우를 쌓았다.

폐허 또는 맨땅에서 뭔가 이뤄내는 것에 특화된 민족답다고 할까.

결국 영상과 관련한 테크닉에서는 할리우드 못지않은 완성도를 뽐냈다.

기술이 뒷받침 되면서 창작력도 올라가게 되었고.


- D-Cinema의 개념에 대해서는 다들 아실 겁니다만, 먼저 가볍게 짚어보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류지호는 철저히 실무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강연을 이어갔다.

이론이나 학술적으로 들어가면 2시간짜리 강연으로는 턱도 없다.

<Dream Come True>와 <Escape>를 작업하며 겪은 것들을 위주로 이야기를 풀었다.

지루하고 복잡한 이론에 대한 설명은 최대한 줄였다.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이 되고, 포스트프로덕션의 공정과 최종적으로 극장에서 상영되는 것까지 <Escape>를 제작한 과정을 예시로 들며 설명했다.

간간이 10년 안에 등장하게 될 다양한 디지털 영화 기술과 환경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시대를 대비해서 충무로가 준비해야 할 것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야이...개. 씨XX들아!”


낮술에 취한 협회 원로 감독이 시사실에 난입해 걸쭉한 욕설을 쏟아놓았다.


“니들이 누구 때문에 영화를 하고 있는데! 완장 차니까 뭐라도 된 것 같지? 니들이 선배들 개X으로 본다고 뭐 달라질 것 같냐! 니들이 영화판 다 먹을 것 같아!”


진행요원들이 원로 감독을 제지했다.

그럼에도 막무가내의 행패가 지속됐다.


“우리가 어떻게 한국영화를 지켜왔는지... 니들이 알아! 아냐고! 이 개X가튼 XX덜아!”


원로 영화감독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떠들어댔다.

영화계의 갈등은 지난 90년대 초반 기획 프로듀서들이 등장하면서 이미 예견되었다.

할리우드 메이저의 직배문제와 스크린쿼터 문제로 한때는 한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내부에서 싸우더라도 밖에서 쳐들어오면 힘을 합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

그럼에도 영화계의 내재된 여러 불합리성은 언젠간 터질 화약이었다.

본격적인 갈등은 영화진흥위원회 인선 과정에서 터져 나왔다.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한 대통령 후보는 영화진흥법 개정과 민간주도 중심의 영화진흥공사 개편을 약속하면서 영화계의 지지를 끌어냈다.

당선된 후로 영화계의 숙원 중 하나인 민간 중심인 영화진흥위원회를 출범하게 되었다.

그 결과 기존의 공사를 폐지하고, 1999년 5월 위원회로 새롭게 출범했다.

집행부는 10명으로 결정됐다.

젊고 개혁적인 성향의 위원들은 영화진흥법 개정을 주장했고, 원로 영화인을 대표하는 위원들은 반대해왔다.

양측의 싸움은 ‘영진위 사태’란 이름으로 꽤 오랫동안 신문 사회면을 장식했다.

결국 집행부가 새롭게 조직된다.

상황은 진정되지 않았다.

여담으로 모든 진흙탕을 뒤로하고, 보수적인 원로 영화인 즉 영화협회 이사장을 지낸 원로 여배우는 한국을 떠나버린다.

신구갈등의 중심이었던 그녀가 비겁·무책임으로 LA로 떠나버리고, 영화진흥위원회 무용론을 주장했던 보수인사가 위원장이 되면서 방만과 무능력의 끝을 보여주며 영화계 분열을 부채질했다.


“정권 바뀌면 보자! 이 X놈에 XX들아!”


저주 같은 말을 남기고 원로 영화감독이 시사실을 떠났다.

객석 곳곳에서 혀 차는 소리와 한숨이 튀어나왔다.


쯧.

하아~


영화계 인사들이 정치권에 줄을 대는 건 어제오늘이 아니다.

특정 정당에서 공천을 받아 국회위원이 되는 경우도 몇 번 있었다.

90년대까지 충무로는 우파적인 정치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득세했다.

왜냐하면 그 동안 계속해서 우파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으니까.

살아남기 위해, 혹은 영화계에서의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또 한국영화를 보호유지하기 위해, 원로들은 여당에 협조하거나 위험한 줄타기를 해왔다.

한때 한국영화는 반공교육의 도구였고, 정권의 나팔수였다.

그럼에도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거나 독재를 풍자하는 영화도 다수 만들어졌다.

물론 후자를 만든 감독들은 모진 고초를 겪었다.

영화계 원로들이 엄혹한 시절에 어떤 포지션에 있었든, 그들이 한국영화의 산증인이자 역사란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선배영화인들에 대한 평가가 엇갈릴 순 있겠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영화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이럴 때 필요한 말이 있다.

대화와 소통.

현재 분위기를 봐서는 쉽지 않았다.

나만 옳고 당신이 틀렸다.

어찌 대화가 될까.

단순한 밥그릇 싸움이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류지호가 그들에게 공평하게 밥그릇을 챙겨 줄 수도 있으니까.

그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서 문제다.

감정문제부터 이권, 영화계 권력, 이념문제까지 뒤섞인 복잡한 갈등이다.


“....음.”


류지호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까운 강연시간을 흘려보냈다.


“마무리 말씀을 드리고, 짧게 질의응답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류지호가 연단에서 마이크를 뽑아들고 무대 앞쪽으로 걸어 나왔다.


“제가 처음 디지털 영화를 찍었을 때는 디지털 영사기를 보유한 극장이 없었습니다. 시제품으로 제작된 영사기를 긁어모아 6개 극장에서 시험 상영할 수 있었죠. 그런데 올 연말이 되면 미국 내에서 디지털 영사기 보유 극장이 40개로 늘어날 예정입니다. 그 극장에서 ParaMax Films가 배급하는 <바운스>를 상영하게 됩니다. 항공기 제조사로 유명한 Pacific Aero과 QualTech가 뉴욕의 AMT 극장에 데이터를 전송합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모두 20개 극장에서 D-Cinema 방식으로 상영됩니다. 또 내년 3월에서 <스파이 키즈>를 위성망을 통해 라스베이거스 Showest Forum으로 전송하여 상영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 D-Cinema는 이미 실험 단계를 넘어 구체적인 배급시스템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QualTech는 디지털 극장 체인 사업을 추진 중입니다. 그들의 계획은 이렇습니다. 미국의 각 스크린마다 디지털 시네마 영사기를 장기임대로 설치해주고, 설치비용 전액을 Qcom이라는 합자회사가 부담하는 대신 자사가 배급하는 영화에 대해 관객 1인당 수수료를 받는 겁니다. 일본과 유럽 또한 미국에 비해 몇 걸음 뒤쳐져 있긴 하지만, 현재 활발하게 D-Cinema에 대한 시도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도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 적기입니다. 관심 정도가 아니라 실행해야 합니다. 이상입니다.”


류지호가 연단으로 돌아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다시 무대 앞쪽으로 걸어 나왔다.


“지금까지 D-Cinema 동향, 전망 그리고 제가 실제 경험한 것들을 들려드렸습니다.”


짝짝짝.


박수가 잦아들길 기다렸던 류지호가 입을 열었다.


“몇 분만 간단하게 질문을 받아보겠습니다.”

- 디지털이 필름 화질을 따라갈 수 있다고 보십니까?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촬영 스태프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아날로그 영화 필름은 5K의 해상도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프린트를 뜨는 과정에서 그리고 배급 과정에서 여러 번의 복사와 극장에서의 반복 상영으로 원본 필름이 훼손, 열화가 발생합니다. 당연히 온전한 해상도를 극장 상영 내내 유지하기 힘든 점이 있습니다. 분명히 디지털로 제작된 파일이 아날로그 필름에 비해 해상도가 낮지만 극장에서 상영된 후에는 결국 디지털 영화가 더 좋은 화질을 보여주게 될 겁니다. 열화와 훼손이 없으니까요. 디지털 영상이 화질 면에서 필름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물론 20년 30년 후에도 그럴 것이란 보장은 없죠.”

- 결국 디지털 영화라는 게 극장만 좋은 것 아닙니까?

“극장에서 화면에 비 오는 걸 경험한 적이 있을 겁니다. 관객 입장에서 돈이 아깝지만, 만든 사람 입장에서도 화딱지를 넘어 자괴감이 듭니다. 수개월 동안 피땀 흘려 구현한 영상을 온전하게 관객에게 보여줄 수 없으니까요. 강연 중에도 말씀드렸지만, 배급비용 역시 획기적으로 줄게 됩니다. WaW에서 배급한 <Remo : The Destroyer>의 경우 전국 140개 극장에서 동시개봉했습니다. 프린트 한 벌 뜨는데 한국에서 260만 원 정도 드는 걸로 압니다. 프린트 비용만 3억 6천만 원 가량 들었겠죠. 위성송출 방식이든 광케이블 방식이든 외장하드 방식이든 필름 프린트보다 비용면에서 엄청난 절감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장점은 제작기간의 획기적인 단축입니다. 현장 모니터, 현장 편집 모두 훨씬 간편해지면서 현장 피드백도 빨라지게 되고, 후반작업 과정에서 CG나 합성, DI 등 수정을 위해서는 필름을 디지털로 스캔하는 과정이 필수적인데 처음부터 디지털로 촬영하게 되면 이러한 후반작업의 비용과 시간이 절감되는 효과를 가져 옵니다.”

- 한국영화의 CG가 할리우드에 비교해 어느 정도 수준입니까? 따라잡으려면 얼마나 걸릴 것으로 보십니까?

“최근 들어 많은 분들이 질문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제 답은 지금 상황으로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류지호는 냉정한 진단을 내놓았다.


- 프로듀서 입장에서는 CG비용이 부담됩니다. 안 되는 것도 무조건 된다고 하고, 적은 돈으로도 일을 진행하다가 추가비용을 요구하곤 합니다. 계속 이렇게 나가다가는 충무로와 CG업계가 불신의 장벽이 쌓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는 CG계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죽했으면 감독이나 피디가 ‘컴퓨터그래픽 하는 놈은 다 사기꾼’이라는 말을 면전에서 대놓고 했을까.

객석에서 다른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반론을 펼쳤다.


- 무조건 예산을 깎으려고만 하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런 상황에서 CG의 질이 좋아질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실력 있는 인재들은 수익성이 높은 CF쪽으로 빠집니다. 사실 우리처럼 영화 CG만을 전문분야로 삼다보면 수익을 내기 쉽지 않습니다. WCL 같은 수준의 장비에다 인원까지 감당하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도 일부 인력과 장비를 CF에 활용하면 매출이 현재보다 몇 배는 오를 겁니다. 하지만 나뿐 아니라 다른 직원들도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기 때문에 충무로에 남아있는 겁니다.


류지호가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 댔다.


“영화에서 CG분야의 문제점을 하나 말씀드려보자면, CG업계와 다른 분야 영화 스태프들이 서로의 분야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할리우드도 마찬가지지만 ‘CG는 도깨비 방망이’라는 이상한 신화가 만들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촬영된 화면, 즉 기본적인 소스에다 플러스알파를 넣는 것이 현재의 CG입니다. 촬영하지 못한 혹은 계획에도 없던 마이너스를 메우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한국 CG팀이 작업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 실망을 금치 못했습니다. CG로 넘어온 OK 커트에 스태프나 촬영 장비가 버젓이 들어와 있거나 화면이 아예 텅 비어 있거나 해서 CG팀이 그래픽으로 메우고 있더군요. 감독 이하 스태프들이 현장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모두 CG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훌륭한 아이디어를 발휘해 찍을 수 있었을 법한 장면을 CG로 처리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CG 전문가가 영화적 맥락에 맞는 특수효과를 생각하고 감독이나 프로듀서가 CG로 만드는 데 적합한 장면을 구상한다면 이런 점은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진행요원이 시간이 다 되었다는 신호를 줬다.

할 말은 차고 넘쳤다.

넘칠 것을 다 풀어놓자면 한정이 없다.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부족한 강연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짝짝짝.


류지호가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퇴장했다.

딴에는 도움 되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려고 했다.

진심어린 조언도 곁들였고.

결과적으로 약간의 잘난 척이 가미된 셀럽 놀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류지호다.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주말 보내십시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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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1) +18 23.01.21 3,891 127 26쪽
399 태풍을 예고하기라도 하듯이.... (2) +12 23.01.20 4,097 149 26쪽
398 태풍을 예고하기라도 하듯이.... (1) +6 23.01.19 4,110 145 23쪽
397 월스트리트 저널 테스트. (3) +14 23.01.18 4,042 146 28쪽
396 월스트리트 저널 테스트. (2) +13 23.01.17 4,046 156 27쪽
395 월스트리트 저널 테스트. (1) +6 23.01.16 4,087 149 24쪽
394 좀 더 자신을 믿어보게. +10 23.01.14 4,092 148 27쪽
393 Surfin USA! (3) +8 23.01.13 3,920 145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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