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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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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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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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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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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영화가 영원히 머무는 곳.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재미있는 건, BS가 WaW를 벤치마킹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DreamFactory가 아니고요?”

“제휴영화사에 지분출자를 하는 방식 말입니다.”

“아스트로에서 독립하는 조 피디의 나비 필름에 지분출자를 할 모양이군요?”

“예.”


WaW 엔터테인먼트는 초창기부터 제휴영화사에 지분 출자를 했다.

제휴영화사에서 준비하는 영화에 대해 최초 검토 독점권과 배급 우선권을 넘어, 계약 기간 동안 함께 간다는 방향성을 명확히 했다.


“주브 픽처스하고 전략적 제휴도 고려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사정이 썩 좋지 못하다고 보고 받은 것 같은데요."

“주브는 BS와 이야기가 되기 전에 올리온, 유리코리아와 먼저 접촉했지만, 추구하는 방향이 달랐던 모양입니다. 그들과 제휴 건이 어그러지고 BS와 급속도로 진전되고 있는 것 같더군요.”

“대기업 가운데 그나마 BS가 90년대 중반부터 영화판에 발을 담갔고, 그래서 조금은 충무로 문화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한데..... 최근에 영화판에 들어온 대기업과는 노선이나 마인드가 맞지 않을 수도 있겠죠.”

“이희경 부회장 말로는 별 기대 없이 제안했는데, 주브 픽처스 측에서 배급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WaW에 대한 견제는 아니었을까요?”

“저희는 주브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만.....?”


류지호는 이 맘 때 BS 엔터테인먼트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다양한 충무로 투자배급사와 신생 제작사들과 긴밀하게 제휴관계를 맺기 시작하던 시점이다.

주브 픽처스는 <로스트메모리 2009>부터 내리 세 편의 블록버스터에서 투자배급을 맡았다가 대참패를 겪게 된다.


“올리온이 떠맡기엔 리스크가 큰 프로젝트였을 겁니다. 솔직히 이희경 부회장 입장에서는 <2009 로스트메모리스>를 올리온이 가져갔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올리온과 광성의 경우도 BS처럼 시행착오를 겪으며 한국영화에 수업료를 많이 내 봐야 하는데.....”


BS로 사명을 변경하기 전 백설그룹은 한국영화판에 진출하면서 나름 비싼 비용을 지불했다.

그런데 다른 두 대기업은 영화판에 무임승차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WaW의 제휴영화사에 변동은 없어요?”

“기존 제작사들과 별 다른 트러블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박진택 감독이 관여하고 있는 진인사필름을 제휴영화사로 받아들였지요.”


류지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박진택 감독의 차기작에 조감독으로 합류할까 말까 고민하던 때가 이 때 즈음이었다.

이제는 그 영화사에 투자와 배급을 하는 회사를 소유하고 있는 입장이 됐다.


“극장 부율조정 문제는 소강상태인 것 같네요?”

“다른 파워 있는 배급사에서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니까요.”

“시작하는 방법이 잘 못 되었을까요?”

“단번에 문제가 풀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잖습니까?”

“그렇긴 한데... 일방적으로 몇 사람이 시작해서 공론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해 당사자들이 협의할 수 있는 공간을 먼저 마련하고 천천히 수순을 밟았어야 했나 싶네요.”


슬라이딩 시스템이라는 것이 있다.

영화에 따라 개봉기간에 따라, 극장과 배급사의 몫을 변경하는 방식이다.

류지호는 영어권 국가에서 시행하는 슬라이딩 시스템을 한국에 도입하고 싶었다.

그 전에 예술영화와 저예산 상업영화의 생존을 보장할 기본 상영기간이 법적으로 마련되어 있어야 하겠지만.


“극장 부율문제를 거론하면서 금기시해야 할 것이 두개가 있습니다. 첫째, 쿼터문제를 거론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둘째는 경쟁을 하더라도 요금을 내려선 안 된다는 거지요. 요금을 내리는 건 공멸하는 지름길이니까요.”

“참 민감한 문제이긴 해요. 잘못하면 역풍을 맞을 수도 있으니.”

“부산 씨네박스에서 티켓값을 4,000원으로 내리려는 것을 막으려고 배급협회에서 얼마나 애썼는지 모릅니다. 영국의 경우를 보면 극장 간 경쟁의 결과 요금하향조정이 이루어지면서 경영상태가 어려워졌습니다. 요금을 내리면 극장매출이 줄었습니다. 그러면서 부율은 배급사에 더 불리해졌지요. 지금은 배급사 38%에 극장 62%로 주도권이 완전히 전복된 상태라고 합니다.”

“좋은 콘텐츠가 많이 만들어지면 6:4 부율이 불가능한 건 아니에요.”

“외화는 해외시장 박스오피스에서 이미 증명된 데이터가 있지만, 한국영화는 증명이 불가능합니다. 결국 한국영화 부율을 올릴 근거가 없죠. 쉽게 해결 될 사안이 아닙니다.”


박건호 대표가 부율 조정의 속도조절을 완곡히 표현했다.


“배우, 감독, 제작사.... 제대로 된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들에게 그 가치를 인정해주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는 게 당연한 것인데... 그게 참 어렵네요.”

“한 사람이, 한 개 회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 같아서는 확 한국영화판 전체를 사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니까요.”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다.

당장 삼대 메이저가 다 해먹는 일본이나 두 개 메이저가 다 해먹었던 홍콩의 경우만 봐도 답이 나온다.


“조급증을 버리세요. 한국영화는 한국만의 길을 찾아야 하는 겁니다. 하루아침에 의장님이 활동하시는 할리우드처럼 될 순 없습니다.”

“알아요.”


한국영화계에 좋은 분위기들이 감지되고 있다.

WaW와 함께 가야할 충무로가 꿈쩍도 하지 않으니 류지호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그간 WaW가 배급, 유통의 시스템을 구축하고 체인을 형성하는 등 비즈니스 쪽에 중점을 뒀다면 앞으로는 콘텐츠 성장에 주력할 계획입니다. 향후 5년 간 좋은 콘텐츠를 만들도록 집중적으로 도와주거나, 직접 만들거나, 애니메이션 등 관련 콘텐츠로 옮겨가는 방식이 될 것입니다.”

“국산애니메이션은 여전히 저비용 기술문제에만 집착하는 식으로 방향설정이 잘못돼 있는 것 같던데...”

“인건비 타령만 하면서 정작 중요한 기획과 스토리에 대해서는 날림인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애니메이터들 수준이 정말 세계적인데, 이야기보다 비용에만 매몰되어 있으니...”


Hues & Rhythm Studios에서 일하는 한국인 애니메이터는 물론이고 한국의 만화탄압 정책으로 인해 먼 미국까지 와서 일거리를 찾다가 Timely Comics에 입사해 작화작업을 하는 한국인 만화가들의 수준은 최정상급이다.

심지어 성실하기까지 하다.


“만화영화 부분도 차차 나아질 겁니다.”

“WaW로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는 좀 들어와요?”

“작년에 십 여 편 들어왔는데, 우리 피디들과 기획실에서는 별 매력을 못 느낀 것 같습니다.”

“가능성조차 발견하지 못했어요?”

“약간의 가능성만이 보였다면 감독님께 리포트가 전달되었겠지요.”

“그것도 그러네요. 5년 동안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는 단 한 편도 제게 넘어 온 것이 없었으니...”

“일단 감독님께서 제안한 <도깨비> 프로젝트와 전래동화 가운데서 해외에서도 먹힐 만한 아이템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WaW 엔터테인먼트는 전래동화 가운데 콩쥐 팥쥐, 장승과 탈, 곰과 멧돼지의 여행 그 외 심청전과 전우치전 등을 현대적으로 각색해 DreamFactory 스타일의 애니메이션을 궁리하고 있다.

또한 전래동화 속 등장하는 도깨비들을 모아서 장편으로 재구성하는 프로젝트와 호랑이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모아 한 편의 장편으로 융합하는 시도도 하고 있다.

하루 이틀 만에 뚝딱 만들어질 기획이 아니다.


“아시아 외 지역에서 직접 배급은 해볼 만 해요?”

“실제로 해외배급을 해보니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 동안 WaW 엔터테인먼트는 ParaMax 해외배급에 의존해 왔다.

아시아 지역 외에는 직접 배급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해외배급팀에서 충무로의 누가 외국에 배급했다더라 하는 말이 다 거짓말이란 것을 알겠다고 말합니다. 결국 미니멈 개런티만 받고 영화를 넘긴 것을 직접 배급했다고 말한 경우가 태반이었던 것이지요.”


WaW의 경우도 ParaMax 배급을 이용하지 않았다면 미국시장에 영화를 제대로 풀지 못했을 터.


“미국시장에서는 메이저 배급사에 의존하지 않으면 사실상 돈 벌기 어렵고, 지나치게 의존하다보면 다 뺏기게 되고.... 그렇죠.”

“언젠가 미국시장을 공략하면 좋겠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일본은 마케팅비가 많이 드는 시장이라 전용 시스템을 만드는 건 아직 어려울 것 같습니다. 씨네콰논이 얼마나 해줄지 기대 반 걱정 반이기도 하고.”

“일본은 장기적으로 개척해야 할 시장이라고 봐요. 일본시장 공략하는 동시에 대만과 홍콩시장을 함께 들어가는 것도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동남아시아 시장도 일부 실패도 있었지만 시도도 많이 해봐야 하는 곳입니다. 해외시장을 위해선 지역성을 살린 작품도 나쁘진 않지만 범아시아적인 영화제작에 힘써야 할 것 같습니다.”

“현지화도 고려해 주세요. 우리 콘텐츠를 현지영화로 만들거나 현지 영화를 우리식으로 해석해 리메이크해도 좋을 것 같아요.”


대만의 청춘영화나 멜로 장르는 한국보다 좋은 작품이 꽤나 많다.

영화를 수입해서 배급하는 것도 좋지만 판권을 사다가 리메이크를 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홍콩 지사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움직여 볼 생각입니다.”

“배급시장에는 변화가 좀 생겼어요?”

“무비서비스, BS 양대 전선에 양성규, KTB, 오성벤처투자, 에그씨네마가 제휴한 ‘A라인’ 등이 끼어들어 새롭게 배급라인을 형성하는 모양새입니다. 그 외에는 다 고만고만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네 번째 메이저는 어디가 될 거라고 보세요?”

“아직은 예상하기 힘듭니다. 감독님이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영화업이 만만한 것이 아니라서.”

“이제 한국영화 시장이 5,000억 규모는 너끈히 넘었겠죠?”

“비디오 시장이 눈에 띠게 죽고 있어서 조금 걱정이긴 합니다만, 올해 그 정도 규모는 무난하게 달성할 것 같긴 합니다. 사실 이정도 시장 규모에서 3대 메이저 정도 나오는 건 당연한 것이긴 합니다. 한해에 나오는 영화만 몇 편인데 한두 배급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직배사들 실적은 어때요?”

“여전합니다.”

“한국영화가 점유율을 많이 따라잡지 않았어요?”

“실제 현장에서 체감하기로는 3.5:6.5 정도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한국영화가 전반적으로 올라온 것이 아니라 몇 편이 점유율을 모두 책임지고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한 해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박스오피스 순위를 매겨보면 여전히 할리우드 영화가 대부분이다.

50위 안 한국영화는 많이 보이지도 않는다.

대신 서너 편의 빅히트 작품이 점유율을 대부분을 차지하는 매출을 기록 중이다.


“올해 하반기부터 한국형 블록버스터라고 까부는 영화들이 줄줄이 개봉할 텐데 걱정이네요.”

“절반은 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다행이고요.”

“WaW는 언제나 자신 있습니다. 시스템화하고 조직화되어 발전해나가고 있어서 제가 없더라도, 누가 오더라도, 잘 굴러갈 수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한국 최고의 스튜디오가 되는 날 은퇴하셔야지. 대표님 없으면 WaW는 시스템만 번듯한 영화사가 될 겁니다.”


박건호 대표가 대답 없이 푸근한 미소만 지어보였다.


“아참! D-Cinema 논의는 잘되고 있어요?”

“배급협회 차원에서 먼저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NAB2001에서 루카스씨가 필름이 곧 죽을 거라고 선언했어요. 필름이 쉽게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영광의 시대도 얼마 안 남았다고 확신해요.”


필름 시대의 영광을 저물게 하는 최선봉에 류지호가 서 있다.


“필름 시대 노하우와 역량이 부족했던 한국영화에게 디지털 영화의 시대는 환골탈태의 기회가 될 겁니다. WaW에 속해 있는 엔지니어들 미국으로 자주 연수 보내세요.”


저물어가는 홍콩영화계보다 WaW 엔터테인먼트라는 선도적 기업이 있음에도 한국영화계가 디지털 시네마 부문에서 뒤쳐져 있다는 것이 류지호로서는 자존심 상했다.


“그러지 않아도 디지털 영화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끼이익!


두 사람이 이야기가 얼추 마무리 될 때 신흥대학교 앞 허름한 골목에 차가 멈췄다.


❉ ❉ ❉


영화가 영원히 머무는 곳.

도저히 비디오 대여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외관을 한 가게 앞에 류지호와 박건호가 나란히 서 있다.

지저분한 입구와 대여점 간판이라기 뭐한 상호명.

박건호 대표는 잘못 온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반면에 이곳은 류지호에게는 너무나도 그리운 곳 가운데 한 곳이었다.

영화 마니아들에게 성지 같았던 곳이니까.

지금도 마찬가지고.

한국영화 비디오든 외화 비디오든 이곳에서 구할 수 없으면 한국에서는 절대 구할 수 없을 정도로 각종 희귀 비디오를 빌려볼 수 있었던 유일한 비디오대여점이다.

영화 마니아만 아는 그 이름 미래영상.

류지호는 설레는 마음을 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 진열된 비디오의 10배나 많은 비디오가 창고에 쌓여있지 아마....?’


류지호는 추억을 곱씹으며 매장을 둘러보았다.

17평 매장 안은 사람 하나 겨우 다닐 공간을 빼고 전부 비디오 진열장이 놓여 있다.

여전히 제작사별로 분류해놓은 것이 아쉬웠다.

워낙 좁은 공간인데다가 테이프는 많고 주인이 늘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분류한 방식이다.

류지호가 방문한 이 시기 보유하고 있는 비디오테이프 수는 대략 3만장.

이중 1990년 이전 출시 프로가 1/3 정도.

최고 전성기 시절에는 한국에서 정식 출시한 비디오 및 DVD 타이틀 12만여 장 중에서 절반 정도를 취급했다.


‘여기서 구하지 못하는 정식 출시 비디오는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없었으니까.’


전국 각지에서 비디오를 빌리기 위해 찾는 전국구 대여점이었다.

지난 90년대 중반, 전국적으로 5만개에 이르는 비디오 대여점이 영업하며 최고 호황을 구가했다.

그러나 현재는 2만7천 개로 줄어들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폐업하는 점포가 속출하고 있다.

게다가 비디오의 대체품으로 기대됐던 DVD도 부진한 모습이다.

국내 비디오 대여점 중 DVD 타이틀을 구비한 곳은 20%에 그치고 있다.

그나마 보유 편수가 100여 편 정도에 그쳐 아직 제대로 된 시장을 형성하지 못한 상태다.

나름 대여점들이 자구책으로 만화·소설 등 멀티숍을 운영하고 있지만, 전망이 그리 밝지 않았다.

비디오대여점은 비디오와 만화를 구비할 경우 작으면 10평 이하 크면 30여 평 정도가 대부분이다.

소자본 개인 창업에 안성맞춤인 이 사업에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상품 체인점인 씨큐브가 들어온 것이 98년 7월이었다.

현재 씨큐브클럽은 분당에 두개의 직영점과 서울 상봉동에 하나의 가맹점을 운영하고 있다.

99년 9월에 오픈한 씨큐브클럽 상봉점은 70평 규모의 대형매장에 고급 인테리어로 단장을 하고 1만2천편의 비디오와 국내 가수의 CD와 게임 CD, 잡지, 그리고 액세서리를 갖추고 대대적인 판촉을 벌이며 고객 유치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희귀 명작 비디오 구색을 거의 다 갖췄고 장르구분을 세분화해서 서비스하고 있다.

작은 매장에서는 불가능한 감독과 배우에 따른 진열체계도 부분적으로 도입해 대형 매장의 이점을 최대한 살렸다.

BS 엔터테인먼트에서도 2003년 상반기 멀티숍 개념의 비디오 대여점 체인을 오픈할 계획이다.

류지호는 그 같은 상황들을 지켜보며 계산이 복잡했다.

암튼 류지호는 예전 기억을 더듬어 가며 70년대 한국영화 진열대를 훑어보았다.

손가락으로 비디오케이스를 슥 훑다가 한곳에 멈췄다.

한눈에 봐도 오래된 테이프 케이스를 꺼냈다.


‘똑같은 자리에 있네.’


류지호가 꺼내든 비디오테이프는 하길종 감독의 <한네의 승천>이었다.

영상위 자료실에 필름으로만 남아있는 영화다.

이 외에도 찾아보면 무수히 많은 희귀 비디오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비디오 마니아에게는 한마디로 보물창고 같은 곳이랄까.


“사장님은 여전하시네요?”

“....?”


대여점 사장은 표정변화 없이 류지호를 슥 쳐다보고는 다시 계산대에 놓여있는 컴퓨터 화면에 집중했다.

친절한 성격의 사장은 아니다.

일명 ‘츤데레’ 스타일이라고 할까.

단정하게 보이려고 머리를 짧게 깎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사장은 본래 증권회사 출신이다.

처음 대여점을 차린 시기는 91년.

현재 위치로는 93년 봄에 옮겨왔다.

사장이 무뚝뚝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류지호 감독은 우리 회원이 아닐 텐데?”


손님에게 반말이라니.

배짱 장사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하. 유명한 대여점이잖아요. 소문 많이 들었습니다.”

“비디오 빌려 보게?”

“잠시 대화 좀 나눌 수 있어요?”


사장이 모니터를 향하고 있던 시선을 류지호에게 돌렸다.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인지.


“요즘 비디오대여점 사정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요.”

“메이저 영화사를 운영하는 사람이 비디오에?”

“스펙트럼DVD에서 출시하는 타이틀은 잘 나가요?”

“아무래도 인기 타이틀이 많다보니 다른 프로덕션 DVD 타이틀에 비해 많이 찾긴 해.”

“회원은 한 3,000명 정도 되든가요?”

“전국적으로 따지면 그렇고. 지금은 근방 손님들은 다 떨어져 나가고 있는 상황이야. 서울에서는 1,200명 정도 남았던가 그래.”

“대단하네요.”


류지호는 진심으로 놀랐다.

일부 대형 매장을 제외하고 이 정도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대여점은 전국적으로 그리 많지 않았다.


“스펙트럼DVD나 동성프로에 바라는 건 없어요?”

“류 감독이 동성프로도 가지고 있나?”


계속된 반말투에 꽤나 퉁명스러운 사장이다.

류지호는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전 삶에서 연출부 생활할 때 이 대여점에서 수많은 희귀 비디오를 빌려봤다.

연체도 밥 먹듯이 했다.

사장에게 나름 신세를 꽤 졌다.

영화하는 놈이 굶고 다니면 쓰냐고 밥 사먹으라고 대여비를 받지 않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알게 모르게 신세를 진 충무로와 방송국 조연출이 한 두 명이 아니었다.

물론 영화 평론가, 기자 등 업계 종사자들도 이런저런 신세를 지기도 했고.


“가장 절실한 것이 있긴 한데.....”

“뭔데요?”

“매달 출시 프로 중에서 꼭 수집해야할 작품 목록을 발표하는 책이 있었으면 좋겠어. 대여점 상대의 잡지들이 적지 않지만 광고비를 많이 받은 영화만 크게 소개하거든. 너무 속 들여다보이는 짓거리가 많아서 정확한 정보 얻는 데는 도움이 되질 않아. 개봉 영화는 신문, TV 등에서 대문짝만하게 되풀이해서 소개해주면서 비디오 대접은 왜 그리 소홀한 지....”

“인터넷 안 하세요?”

“하지.”

“CineFeel.com 데이터베이스에 꽤 많은 자료가 올라와 있지 않아요?”

“WaW 영화와 트라이스타 영화 위주로 되어 있잖아. 미국영화는 잘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영화는 형편없어. 내가 우리나라에 비디오소프트가 나온 이래로 모든 타이틀을 수록해서 인터넷에 올리고 싶어 컴퓨터 작업을 하고는 있지만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어 걱정이야.”

“그런 건 비디오영상협회나 배급사협회, 영진위에서 해야 하는 거죠. 그걸 왜 사장님이 하세요?”

“그 사람들이 돈 안 되는 걸 하겠나? 류 감독 회사에서도 자기 영화 위주로 하잖아.”

“그건 조금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변명을 좀 하자면, 다른 메이저 직배사나 영진위에서 CineFeel.com에 자료를 잘 안줘요. 나름 고충이 있습니다.”

“그래도 스펙트럼DVD에서 고전영화를 자주 출시해줘서 나 같은 사람들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가격이 쎄서 구입하는 것이 망설여지긴 하지만.”


스펙트럼DVD에서는 시장 확대를 위해 저렴한 가격에 대여용DVD를 출시하려고 했다.

결론적으로 할 수 없었다.

모든 비디오·DVD 유통사들이 단합해 극렬히 저지했다.

당장의 매출에 매몰된 그들 입장에서 가격 인하는 매출과 영업이익의 감소로 즉각적으로 반영되기 때문에 가격을 올리면 올렸지 내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때문에 한국의 DVD시장 전체를 키워보려고 하는 가온그룹 입장에서 업계 전체가 들고 일어나 반대를 하니 출시 가격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빠른 시일 안에 부록이 조금 줄어든 대여점용 DVD 가격은 인하할 수 있을 겁니다. 제작사, 유통사, 대여점 모두 윈윈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으니까 기다려보세요.”

“영화제작에서 상영까지는 짧은 시간이야. 이후의 세월은 대여점에서 머무는 거잖아. 영화가 마지막으로 머무는 공간이라는 사명감을 갖고 수집도 하고 경영도 해야지. 아트 영화 전문점이라 해서 찾아가 보면 동네 가게랑 다를 게 없어. 고객이 목록 갖고 와서 보여 달라는 비디오를 못 보여 준다면 창피한 줄 알고 폐업해야 하는 것 아니야?”

“무슨 비디오 가게를 사명감을 가지고 운영하겠어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거지.”

“그런 마인드가 예전에는 통했는데, 이젠 안 통해.”

“비디오 시장이 어렵다고 듣긴 했어요. 계속 현 상태를 유지하실 생각이세요?”

“지금 가게가 협소한 줄은 알지만 규모를 키울 생각은 없고 교통 편한 곳에 2~3개 더 낼 생각은 있어. 손님 가까이에서 좋은 영화를 원하는 때에 바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불현듯 떠오르는 영화를 한밤중에라도 바로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젊어서 많이 했거든. 24시간 영업이 대형 매장보다 시급하다고 봐. 부산에서까지 와서 빌려 가는 고객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비디오방도 오픈할 생각이고. 아예 보고 가면 소포로 반납하는 불편도 없을 것 같아서.”

“웬만하면 비디오방은 하지 마세요. 사장님 대여점 이미지만 나빠지고, 관리하기도 힘들 테니까요.”


초창기 비디오방은 말 그대로 영화를 감상하기 위한 장소였다.

그랬던 것이 연인들의 밀애의 장소로, 그 외에 많은 요상한 일이 벌어지는 은밀한 공간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점주들은 툭하면 민원 때문에 경찰서에 불려가기도 하고.


“희귀 비디오 수급을 잘되고 있어요?”

“가끔 청계천에 나가 옛날 프로를 사 오기는 하는데 좀 유명하다 싶은 영화는 가격을 얼마나 높이 부르는지 살 엄두가 나지 않아. 나 혼자 만족하려고 사놓는 결과밖에 안 되고. 그래서 요즘엔 신프로 구입에만 신경 쓰고 있어.”

“여기 공간 말고 창고에는 얼마나 있어요?”

“그걸 어떻게....?”

“영화잡지나 신문인터뷰에서 사장님이 자랑했잖아요. 골수 회원들은 다 아는 사실인데 뭘 새삼스럽게.....”

“나도 정확히 몇 개나 되는지 몰라. 관리가 잘 안 되서 테이프 상태는 보장 못해. 아쉽지.”

“아무래도 테이프 특성 상 보관관리에 애로사항이 많죠.”

“그리고 말이야, 영화잡지들이 너무 어려워. TV의 영화 프로들도 열심히 보는데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 평론가들이 칭찬하는 영화는 손님들이 어렵다고 잘 안 보려고 해. 하여간 영화를 소개하는 사람들은 허세를 좀 뺄 필요가 있다고 봐.”

“그 부분은 평론하고 다른 분야라... 영화 마케팅에서 좀 더 쉽고 친절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건 염두에 둘게요.”

"생각만 하겠지. 별로 기대도 안 해."


사장의 냉소적인 말이 류지호의 양심을 찔렀다.

이윤이 나지 않더라도 최소한 손해는 보지 않아야 뭐든 해볼 수가 있으니까.


“다른 계획은 없어요?”

“문화원을 다니며 영화를 보고, 소형 영화 만드는 모임을 기웃거리던 젊은 시절 꿈을 생각해서 돈 없고 이렇다 할 인맥을 갖지 못한 아마추어들의 영화 모임에 도움을 주려고. 취미로 영화 만드는 이들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필름을 싸게 공급한다거나, 무료 현상, 무료 상영 같은 뒷받침이 있었으면 하지. 어차피 대여점으로 떼돈 버는 일은 불가능하고, 끊임없이 보람이라고 찾아봐야지.”

“...음!”


류지호가 사장의 말을 들으며 검지로 뺨을 긁었다.

뭔가 고민이 생겼다는 의미다.


작가의말

평안한 하루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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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1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2) +4 23.04.22 3,474 122 27쪽
480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1) +10 23.04.21 3,410 113 24쪽
479 베를린영화제. (6) +5 23.04.20 3,331 124 26쪽
478 베를린영화제. (5) +8 23.04.19 3,252 113 24쪽
477 베를린영화제. (4) +14 23.04.18 3,172 143 23쪽
476 베를린영화제. (3) +9 23.04.18 2,957 110 30쪽
475 베를린영화제. (2) +6 23.04.18 3,024 108 30쪽
474 베를린영화제. (1) +6 23.04.17 3,319 124 27쪽
473 한국영화에 애정이 있구나.... (2) +11 23.04.15 3,388 117 27쪽
472 한국영화에 애정이 있구나.... (1) +2 23.04.14 3,271 126 26쪽
471 한 판 크게 벌여봐야겠어요. (4) +8 23.04.13 3,311 123 25쪽
470 한 판 크게 벌여봐야겠어요. (3) +4 23.04.12 3,312 126 23쪽
469 한 판 크게 벌여봐야겠어요. (2) +4 23.04.11 3,334 120 26쪽
468 한 판 크게 벌여봐야겠어요. (1) +7 23.04.10 3,388 123 25쪽
467 민중의 적. (10) +3 23.04.08 3,259 120 23쪽
466 민중의 적. (9) +4 23.04.07 3,214 116 25쪽
465 민중의 적. (8) +6 23.04.06 3,129 117 23쪽
464 민중의 적. (7) +3 23.04.05 3,124 114 23쪽
463 민중의 적. (6) +7 23.04.04 3,208 120 24쪽
462 민중의 적. (5) +2 23.04.03 3,235 115 22쪽
461 민중의 적. (4) +3 23.04.01 3,266 117 22쪽
460 민중의 적. (3) +3 23.03.31 3,403 116 23쪽
459 민중의 적. (2) +5 23.03.30 3,458 115 23쪽
458 민중의 적. (1) +9 23.03.29 3,508 116 24쪽
457 무역센터가 무너졌습니다! (3) +4 23.03.28 3,409 119 22쪽
456 무역센터가 무너졌습니다! (2) +5 23.03.27 3,306 118 21쪽
455 무역센터가 무너졌습니다! (1) +5 23.03.25 3,449 113 21쪽
454 쉽게 될 리가 없겠지..... +8 23.03.24 3,315 112 24쪽
453 영화가 영원히 머무는 곳. (2) +6 23.03.23 3,314 108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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