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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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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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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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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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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베를린영화제.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제52회 베를린영화제는 2월 6일에 시작됐다.

류지호 일행은 영화제 중반에서야 베를린으로 날아왔다.

개막작으로 <헤븐>이 상영되었고 모두 389편의 장·단편 및 다큐멘터리가 차례로 상영되고 있었다.

폐막작은 찰리 채플린의 고전 <위대한 독재자>다.

한국영화로는 <복수의 꽃>, <나쁜남자>, <고양이를 부탁해>가 초청됐다.

한국영화는 아니지만 일본의 씨네콰논이 제작한 김태평 납치사건을 다뤄 화제가 됐던 <K.T>가 상영될 예정이다.

경쟁 부문에는 <복수의 꽃>을 포함해 총 24편이 최고의 영예인 '황금곰상'을 놓고 치열한 경합을 벌이게 된다.

한국과 일본, 미국 영화 몇 편을 제외하면 개막작을 비롯해 4편의 독일영화가 본선에 오르는 등 유럽영화가 경쟁작 리스트를 채웠다.

영화제에서 인맥을 쌓은 유럽의 영화인들을 만나고 돌아온 전하영이 대뜸 말했다.


“하야오 감독을 폄하하고 싶진 않지만, 베를린영화제 측의 속셈이 너무 뻔해 보여요.”

“원래 다 그런 겁니다.”


이번 영화제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기습적으로 경쟁부문에 들었을 때부터 뒷말이 무성하리라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영화제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은 어느 정도 결과도 예측했다.

류지호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영화제가 종반으로 치달을 때까지도 이 일본 최고의 흥행작이 황금곰상을 받으리라곤 어느 누구도 쉽게 예상치 못했다.

류지호는 전하영 피디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수상 가능성을 높게 볼 줄은 몰랐다.

베를린 영화제 수뇌부들의 정치적 딜레마를 이해하고 있어야 했기에.


“한국영화 관계자들이 정신 차려야 해요.”


뭘 새삼스럽게....


“보세요. 일본하고 중국영화계가 유럽영화제에다가 얼마나 로비를 하는지.”


그녀가 이야기하는 로비는 향응접대나 뇌물공여 같은 것이 아니다.

인적 네트워크를 의미했다.

일찍부터 해외영화제를 다녀본 WaW 직원들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일본과 중국 영화계가 유럽 영화제 관계자들에게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

특히 일본은 패전 이후 정부와 민간이 힘을 합쳐 해외영화제에 자국 영화를 소개하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여왔다.

중국 역시 70년대부터 세계 3대 영화제라고 불리는 곳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할리우드의 공세에 맞서기 위해서는 아시아 영화와 공조해야한다.”


유럽영화제 관계자들에게 그런 인식을 심어줬다.

그 결과 일본과 중국 영화를 많이 소개할 수가 있었다.

두 국가의 명감독들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80년대 말부터 일본·중국 영화가 문제작을 내놓지 못하자, 국제영화제들이 홍콩과 대만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다 한국까지 시선이 닿았다.

현재는 한국에서 강렬한 인상을 주는 문제작이 나오지 않기 시작하면서 이란 등 중동국가 쪽으로 시선을 옮기고 있는 추세다.

그런 분위기를 반영하듯이 이번 베를린영화제에서 아시아영화의 숫자가 많이 줄었다.

90년대 이후 세계 영화제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 아시아영화지만, 이번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대받은 작품은 <복수의 꽃>, <나쁜남자> 포함해서 단 4편에 불과했다.

전임 집행위원장의 주요 노선이었던 할리우드 영화 우선권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대신 ParaMax 같은 준메이저 영화사의 독립영화들이 화려한 할리우드 영화들의 발자국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제 상영작 대부분은 유럽영화들이 차지하고 있다.


“올해 초에 유로화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어요. 유럽 대륙이 통합을 향한 큰 발을 내디뎠다고들 하죠. 베를린영화제가 유럽영화들로 도배된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에요.”

“기자들 사이에서 그런 말이 나오긴 하더라구요.”

“토론토까지 가세하면서 국제영화제 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어요. 아마 칸과 베니스에 아시아영화를 많이 빼앗겼을 겁니다.”

“아무래도 현실은 냉혹하니까.... 제가 알기로도 아시아 감독들의 1순위는 칸, 다음이 베니스, 또 다음이 토론토가 되고 있다고 하죠.”


영화 자체의 평가와 명성은 칸과 베니스에서 챙기고, 북미 진출을 위해서는 토론토를 찾는 것이 최근의 분위기였다.


“올해 베를린이 경쟁부문에 독일영화 4편을 올려놓은 것을 보고, 유럽 쪽 기자들은 황금곰상은 민망해서 못 줄 것 같고, 은곰상은 확실히 받을 것 같다고 전망하더라구요.”


류지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영화제나 자국 영화가 선전해 주길 바라는 것은 똑같다.


“영화제 분위기를 봐서는 <복수의 꽃>이나 <나쁜남자> 수상이 쉽지 않겠어요.”


전하영의 우려와 달리 류지호는 천하태평이었다.

사실 별 관심이 없었다.

Eye-MAX 포맷으로 만든 최초의 상업 극영화 <복수의 꽃>이 멀티플렉스 상영관에서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가 중요할 뿐.

영화제에는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영화를 찾아서 보는 팬들이 몰려든다.

갖가지 피드백이 쏟아질 시사회로 이보다 좋은 환경이 없다.

애니메이션 Eye-MAX DMR이 속속 개봉 대기 중이다.

실사 극영화로는 <복수의 꽃>이 최초다.

<블랙호크 다운>이 2월 말 개봉이 예정되어 있긴 했다.

촬영 초반 Eye-MAX 카메라가 파손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블랙호크 헬기가 작전지역에 침투하는 시퀀스 외에는 모두 35mm 카메라로 촬영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한편의 Eye-MAX DMR 영화 <아폴로13>의 재개봉은 여름이다.

<블랙호크 다운>이 제작비 문제로 Eye-MAX DMR까지 포기하면서 Eye-MAX 실사 극영화 최초 공개는 <복수의 꽃>이 차지하게 됐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류지호의 행보는 매번 남들이 안하는 것에 있었으니까.

어쨌든 최초라는 타이틀은 <복수의 꽃>을 홍보하는데 도움이 된다.

국제영화제에서의 평가는 덤이다.


❉ ❉ ❉


베를린영화제는 세계 4대 영화제로 꼽히는 유서 깊은 국제영화제다.

그런데 다른 국제영화제와 비교해 겉모습만 보면 소탈한 편이다.

여름 전후로 휴양지에서 열리는 칸과 베니스 영화제와는 달리 추운 겨울,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 도시 한 가운데서 열린다.

레드카펫 행사도 굉장히 간소하다.

게다가 주 행사장인 베를리날레 팔라스트(Berlinale Palast)는 소닉센터 8개 건물 사이에 위치해서 크게 이목을 끌지도 않는다.

그 같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영화제가 열리는 2월 초중순에는 포츠담 광장(Potsdamer Platz)의 소닉센터에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2000년에 개장한 베를리날레 팔라스트 대극장은 1,8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영화제가 열리지 않는 기간에는 뮤지컬이나 연극 공연장으로 사용된다.

뒷말들이 무성하긴 했지만, 이번 베를린영화제가 흥행에 성공한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42만 명의 관객이 극장을 들락거릴 거라는 조직위원회의 전망처럼, 베를린영화제의 중심부인 포츠담 광장 주변은 영화제를 찾은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메인 극장인 시네막스와 시네스타 매표소는 낮부터 저녁까지 관객으로 북적거렸고, 메인 행사장인 베를리날레 팔라스트의 붉은 카펫 부근에는 혹시 무비스타가 얼굴을 비추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진 행인들이 붙박이처럼 멈춰서 있었다.

개막작 <헤븐>은 프랑스에서 개봉일 흥행 신기록을 세웠고, <고스포드 파크>, <뷰티풀 마인드> 같은 작품의 표는 일찌감치 동이나 추가 상영이 긴급 편성되기도 했다.


“<복꽃>도 추가 상영이 긴급 편성되었대요.”


전하영 피디가 상기된 표정으로 소식을 전해왔다.


“확실히 감독님이 북미보다는 유럽에서 더 인정을 받는 것 같아요.”

“Eye-MAX 포맷이라는 특수성 때문이겠죠.”


영화감독 류지호는 유럽영화계와 접촉이 잦은 편이 아니었다.

따라서 자신이 유럽에서 작가 대접을 받고 있다는 걸 체감하지 못했다.

독일의 한 영화기자는 류지호가 십대시절 작업한 단편영화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개성적인 영화스타일 때문에 유럽에 마니아가 많다고 알려줬다.


“<The Killing Road>의 팬이 많았는데, <Remo>를 두고 실망한 이들이 많다고 해요.”

“블록버스터라서....?”

“아무래도 전형적인 상업영화잖아요. 페이퍼백 소설원작의 실사화이기도 하고.”

“오리지널이 망한 영화이기도 했고...”

“그래서 이번에 출품한 영화에 대해 기대하는 분위기라네요. 복수극이라서 감독님 특유의 스타일로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하는 분위기래요.”

“영화보고 실망하겠는데요?”

“왜요?”

“사회 이슈를 부각하거나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기대했을 텐데, <복꽃>은 지엽적이고 사소하잖아요.”

“민중혁명을 배경에 깔고 있는데도요? 그리고 Eye-MAX라는 포맷의 실험성도.....”

“안 먹힐 것 같네요.”


베를린영화제는 여타 영화제들에 비해 상업성을 배제한 실험적이고 예술성이 높은 작품들 위주로 소개된다.

일반 영화팬도 실험성은 비교적 쉽게 구별해낼 수 있다.

문제는 ‘예술성‘이다.

영화예술은 역사가 짧기 때문에 여전히 논쟁적이다.

다만 영화비평가 프랑소와 트뤼포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시작된 개념인 ‘작가주의’를 알면 일반대중도 영화의 예술성에 대해 대략적인 감을 잡을 수가 있다.

영화감독은 장인과 같아서 그가 만든 작품에 자신만의 특별함을 남겨놓는다.

작품에 일종의 지문날인 혹은 서명을 남긴다는 개념이다.

따라서 관객은 감독이 남긴 지문이나 서명을 보고 누구의 작품인지 알아볼 수 있다.

지문이나 서명으로 비유한 것은 같은 장면을 똑같은 구도로 촬영해도 감독마다 제각각의 화면과 정서가 나오기 때문이다.

영화작가는 특정한 주제나 기법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동시대에 오로지 그 감독만이 그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 만큼 독자성을 갖는다.

쿠엔 태런티노의 영화는 내러티브 측면에서는 하찮다.

그런데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기법과 주제의식 그리고 특유의 스타일은 동시대에 그만이 가진 독특한 스타일이다.

류지호가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기법 중 하나인 롱테이크, 익스트림 롱쇼트는 명감독들이 수없이 써왔던 흔한 영화문법이고 언어였다.

그런데 그 기법에 류지호만의 지문이 묻어있다.

단 한 작품이 인상적이었다면 평가조차 받지 못했다.

첫 단편영화였던 <영정사진>의 수평 달리쇼트부터 최근의 <복수의 꽃>에서 보여준 원씬원쇼트까지.

비록 후대에까지 하나의 기준이 될 만큼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닐지라도.

류지호만의 양식이 분명 존재했다.

그래서 ‘작가주의‘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유럽에서 류지호가 씨네아스트(Cineaste)로 규정되고 있다.

모든 영화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천만영화라고 불리는 상업영화의 메시지가 미학적으로 또 효율적으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불특정 다수에게 널리 감명을 줬다면 그것을 두고 예술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말장난 같지만, ‘예술성‘과 ‘예술적인‘ 것은 다르죠. 관객은 ‘예술성’을 추구하지만 영화비평가는 ‘예술적인’ 것을 추구하니까요.”

“그 반대가 아니에요?”

“나치 독일의 유명한 선전영화 <Triumph des Willens(의지의 승리)>는 1930년대 영화가 맞나 싶을 정도로 혁신적인 영상미를 보여줘요. 대학의 영화나 예술 관련 강좌에서 영화기술의 이해를 위한 예시로 자주 인용되죠. 노골적인 인종차별영화인 미국의 <국가의 탄생>도 그래요.”


실제로 영화사적으로 두 영화가 후대에 미친 영향이 매우 크다.

많은 감독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고.


“그런데 당시에 나치를 추종하던 독일 국민들에게는 깊은 감명을 준 영화였겠지만, 지금의 독일 국민들이 그 영화를 보며 깊은 울림을 받겠어요?”

“욕을 하겠죠. 나치 영화니까.”

“그처럼 <의지의 승리>는 예술적이긴 하지만 예술영화는 아니게 되는 거죠. 보편적인 대중의 관점에서 봤을 때.”


상업영화와 예술영화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에 류지호는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예술영화는 감독의 세계를 영화로 펼친 후에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여 줄 관객을 찾아다닐 뿐이에요. 상업과 예술이 지향하는 바와 범위가 다르지만 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것은 똑같아요. 다만 예술영화는 상업영화처럼 불특정다수를 타깃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관객을 대상으로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죠.”


<복수의 꽃>은 불특정다수를 타깃으로 기획되고 제작된 영화다.

그러니 이분법적 논리로는 예술영화라고 할 수 없다.

다만 그 영화의 각본과 연출을 한 류지호가 시네아스트라는 점.

때문에 ‘예술성‘은 몰라도 ’예술적일‘ 수는 있다.


“뭔가 복잡한 말 같은데... 암튼 비평가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라는 거잖아요?”

“대중들이 좋아해야 돈을 벌죠.”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였다면 신경 쓰지 않는다.

한국영화니까 걱정이 된다.

한국영화는 산업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에 류지호 같은 감독의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면 관련 장르의 투자가 위축된다.

게다가 올해 개봉할 대작한국영화들이 줄줄이 망할 것을 생각했을 때, 류지호 같은 중견(?) 감독의 영화가 관객 점유율을 떠받쳐줄 필요가 있었다.


“다 왔네요.”


대화를 나누는 사이 <몬스터 볼>의 시사회장에 도착했다.


“Jay!"

“하이. 마리아~”


류지호는 포옹인사를 해오는 마리아 베리를 가볍게 안아줬다.


“디렉터와 동료 배우들 인사시켜 줄게.”


마리아 베리가 <몬스터 볼>의 감독 데릭 포스터와 출연배우인 윌리엄 손튼, 클리프 레저를 차례로 소개했다.


“존 오랜만이에요?”

“반갑네.”


마지막으로 Tigers Gate Entertainment의 회장과도 인사했다.


“마리아가 여자연기상 수상이 유력하다면서요?”

“<아이리스>의 주디와 이파전이야. 자네 영화에 출연한 아가씨도 후보 아니었어?”

“이번 베를린영화제에 여성 캐릭터가 강조된 작품들이 너무 많아서... 나는 누굴 응원해야 할지 난감한 처지네요.”

“하하. 자넨 작품상과 감독상도 노려볼만하지 않나.”

“다른 후보작에 비해 아직은 애송이라고 할 수 있죠.”

“즐거운 시간 보내게.”


류지호는 마리아 베리의 옆 좌석에 앉아 영화를 감상했다.

<몬스터 볼>에서 그녀가 드러낸 것은 적나라한 알몸만이 아니었다.

할리우드 스타라는 이미지에 갇혀 있던 자신의 내면세계를 폭발적으로 분출시켰다.

남편을 사형대에 보낸 직후 외아들마저 사고로 잃은, 너무나 가난하고 가련한 여성이라고 하기에 그녀의 외모가 너무 화려해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연기는 훌륭했다.

최근 <스워드 피쉬>, <X-맨>, <007 어나더데이> 같이 전형적인 할리우드 상업영화에 연달아 등장하면서 연기보다는 미모를 뽐내는 것에 그쳤다.

마침내 <몬스터 볼>에서 류지호의 <The Killing Road> 전후로 보여주었던 배우로서의 재능이 되살아난 것처럼 보였다.


‘거, 자식이 생각보다 까탈스럽네....’


시사회 후 뒤풀이 파티에 초대받은 류지호는 클리프 레저와 친분을 쌓으려고 했다.

좀처럼 곁을 주지 않았다.

유쾌한 분위기 메이커로 알고 있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대신 그의 손에는 항상 카메라 들려있었고, 파티 참석자에게 정중하게 양해를 구해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데 열중했다.


“미스터 류, 내가 당신을 촬영해도 됩니까? 싫다면 찍지 않겠습니다.”

“마음대로 해. 난 상관없어.”


나중에 클리프 레저의 매니저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할리우드 제작자(장사꾼)들과 비즈니스 이야기 하는 걸 극도로 싫어한단다.

메이저 스튜디오의 오너이자 상업영화 감독인 류지호와 진지한 예술가인 자신이 맞지 않을 것이란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

영화를 고를 때 제일 먼저 보는 것이 감독인 그의 입장에서 류지호가 할리우드의 수많은 그저 그런 감독처럼 여겨지는 모양이다.


‘좀만 기다려. 이 형이 체스 영화 연출할 수 있게 판 깔아 줄게. 못된 생각만 하지 마라.’


이전 삶에서 클리프 레저는 자신이 좋아하는 체스를 소재로 한 영화를 준비하다가 약물과다복용으로 사망했다.

류지호는 그 같은 삶에 개입하기로 했다.

바뀌게 될 것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 ❉ ❉


포츠담 광장의 메인 극장 베를린날레 팔라스트(Berlinale Palast).

오른쪽에 자리 잡은 맥스웰 모터 빌딩에서 필름 마켓(UFM)이 열렸다.

영화제 개막 이튿날부터 폐막일까지 진행되는 유러피언 필름마켓(UFM)에는 세계 각지에서 모인 배급사들이 95개의 부스를 차려놓고 뜨거운 바이어 유치경쟁을 벌였다.

유러피언 필름마켓(UFM)은 칸, 밀라노, LA의 3대 영화 견본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토론토와 함께 5대 견본시에 꼽힌다.

베를린영화제가 끝난 직후 20일 개막될 LA의 아메리칸 필름 마켓(AFM)의 전초전 역할을 하고 있어 미국시장을 노크하려는 영화사들이 이곳을 징검다리로 삼고 있다.

한국의 영화진흥위원회 역시 유러피언 필름마켓에 한국영화종합홍보관을 설치해 한국 영화를 홍보하고 판촉 활동을 펼쳤다.

물론 가장 많은 영화를 가지고 필름마켓에 참가한 한국의 배급사는 WaW 엔터테인먼트였다.


“할리우드를 옹호하는 대신 독일영화를 푸대접한다!”


전 베를린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자국의 언론으로부터 그 같은 비난에 시달렸다.

그런 비난을 의식해서인지 신임 집행위원장은 자국영화와 유럽 영화를 많이 초청했다.

그 말은 부쩍 텃세가 강해졌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영화계 관계자들은 필름마켓에서도 그 같은 텃세를 체감했다.


“그럼에도 한국영화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오동석의 후임으로 해외배급을 책임지고 있는 정운영 사장이 류지호를 수행하며 열심히 설명했다.


“경쟁부문의 <나쁜남자>와 <K.T>뿐만 아니라, 포럼부문 출품작인 <고양이를 부탁해>, <낙타>까지도 매진에 가까운 호응을 얻고 있고, 이곳 언론에서도 집중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복꽃> 추가상영은 어떻게 된답니까?”

“씨네막스 Eye-MAX관에서 상영되던 다큐멘터리 영화를 조정해 긴급 추가편성하기로 했습니다. 추가 편성된 상영회까지 매진되어 전회 매진기록을 세웠습니다.”


최초의 Eye-MAX 상업 극영화란 홍보로 인해 관객들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 계약실적은 어때요?”

“무비서비스가 <화산고>를 일본에 150만 달러에 팔았습니다. <나쁜남자>의 경우 북유럽의 다섯 개 나라, 구소련 연방의 16개국에 수출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우혁 감독은 유럽에서 문제적 감독으로 유명했다.

영화 <섬>은 프랑스 시사회에서 여기자가 졸도한 사실이 알려져 하드보일드한 영화로 유명했다.

한국영화는 모르지만 김우혁 영화를 좋아하는 마니아까지 생겼을 정도다.


“마켓에서 수출상담만 이루어진 프랑스어권 국가와 일본과의 계약은 LA에 열리는 AFM에서 체결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포럼부문 초청작인 <고양이를 부탁해>를 스웨덴을 비롯해 스칸디비아 국가들, 아시아의 일본, 대만, 홍콩에 판매했습니다.”


90년대에 비해 한국영화를 찾는 바이어가 많이 늘긴 했다.


“미국 쪽 바이어 일부가 <파이란>과 <시월애> 판권을 사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리메이크하겠대요?”

“예.”

“그렇군요.”

“씨네-누보의 <엽기적인 그녀> 리메이크 판권을 WaW가 대리해서 DreamFactory와 협상하고 있습니다.”

“ParaMax에서도 <엽기적인 그녀> 리메이크 판권에 관심이 있답니다. 그쪽과도 대화를 나눠보세요.”

“예. 감독님.”


ParaMax Entertainment는 작년 10월에 <조폭 마누라>의 리메이크 판권을 미니멈 개런티 100만 달러에 구입한 바 있다.

현재는 시나리오 각색 중이다.

영문 제목은 My Wife is a Gangster.

주인공으로 류지호의 친구 마리아 베리를 포함해 2~3명의 스타급 여자배우들이 물망에 오르고 있다.


“ParaMax와 경쟁을 시켜서 DreamFactory가 헐값에 판권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세요. 판권 가격은 영화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이니까.”


참고로 류지호의 신신당부에 WaW 해외사업부는 <엽기적인 그녀> 판권상담을 아메리칸 필름마켓까지 끌고 간다.

결국 미니멈 개런티 110만 달러, 전 세계 흥행수익의 4.2% 분배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할리우드판 영문제목은 <My Sassy Girl>.

흥행 실패 정도가 아니라 개봉조차 못하고 부가시장으로 가는 수모를 겪게 된다.

또한 아메리칸 필름마켓(AFM)에서 할리우드 메이저 MSM와 <달마야 놀자> 리메이크 판권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미니멈 개런티 액수가 적은 대신 흥행수익의 5%를 받는 조건이다.

안타깝게도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되진 못한다.

어쨌든 할리우드는 소재고갈과 새로운 아이디어에 목말라 있다.

이미 검증 받은 작품을 새롭게 단장해 관객들에게 내놓는 것은 그들에게 이로운 장사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한국영화 리메이크 판권의 가격은 할리우드 작가에게 지급되는 개런티와 개발비용에 비해 훨씬 싸게 먹힌다.

평균 500만 달러가 넘게 들어가는 시나리오 개발 비용을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다.

타깃을 분명히 해서 저예산으로 만들어 팔면 최소한 손해는 안 본다.

리메이크 판권은 통상 계약금의 20%를 미리 받은 후에 제작에 들어가면 나머지 액수를 받는다.

이런 계약 구조 때문에 중간에 제작이 중단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제작이 무산되면 잔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언제든지 프로젝트가 없던 일이 되기 십상이다.

한국영화 리메이크 영화에 어떤 배우가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이 들려도 계약서에 서명하기까지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할리우드 영화 평균 기획개발 기간은 2~3년이다.

지금 판권이 팔려나가도 이르면 2004년에나 개봉된다.

류지호는 더 멀리 바라고 있었지만.


‘<주온>이었나? 원작 감독이 직접 미국에 진출해서 할리우드 자본으로 리메이크를 했었지.’


할리우드에서 일본 공포영화 리메이크 붐이 인다.

그때 <주온>의 다카시 감독은 본인 작품을 직접 할리우드 영화로 리메이크하게 된다.

그 같은 일이 한국 감독에게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당장은 한국영화의 할리우드 리메이크 성적표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

당장은 한국영화가 세계 시장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고 힘을 실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명수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을 적극 밀어주는 것처럼.

<복수의 꽃> 시사회가 열린 하루 뒤.

베를린영화제 일일 소식지 ‘스크린’ 1면 톱기사를 <복수의 꽃>이 장식했다.


[<Flower of Revenge>가 UFM에서 800만 달러의 판매 실적을 올렸다]


<복수의 꽃>은 아메리카 대륙을 제외한 아시아와 유럽 국가 45개국에 800만 달러(대략 96억 원) 판매실적을 올렸다.

이로써 기존 한국영화 수출기록을 두 배 이상 앞지른 것은 물론이고 개봉 전에 영화 제작비를 전부 회수하게 됐다.

곧 이어 열리게 될 AFM에서 유럽의 일부 국가와 남미 국가들과 협상을 이어가기로 했기에 수출실적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북미배급은 일찌감치 ParaMax로 결정되어 있었기에 따로 기사로 나가진 않았다.


[AFM과 칸 필름 마켓까지 마치면 1,000만 달러 수출 달성 유력.]


베를린 발 수출실적이 발 빠르게 국내에 전해졌다.

<쉬리> 이후로 오랜만에 국내 매스컴이 일차단결해서 호들갑을 떨었다.

그럴 만도 했다.

<복수의 꽃> 단 한 편으로 작년 한국영화 전체 수출액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이제 두 달이 지났을 뿐이다.

벌써부터 한국영화의 해외수출에 청신호가 들어왔으니, 한국영화계는 물론이고 매스컴에서 흥분할 수밖에.


❉ ❉ ❉


제52회 베를린영화제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 <복수의 꽃> 공식 시사회가 열렸다.

현지시각 저녁 7시가 가까워지자 소닉센터 내 씨네막스 Eey-MAX 상영관의 420석 좌석이 각국의 기자들과 영화팬들, 일부 영화제 관계자와 할리우드 영화계 인사들로 꽉 들어찼다.

류지호는 공식 시사회를 비롯해 다섯 차례 일반시사회를 가진 후, 17일 저녁 폐막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영화제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화제의 한국영화 두 편이 나란히 공개됐다.

한편은 문제적 감독 김우혁의 <나쁜남자>였고, 씨네아스트(유럽에서) 류지호의 <복수의 꽃>이 나머지 한 편이다.

13~15일에는 <복수의 꽃>이, 14~15일 <나쁜남자>가 상영될 예정이다.

류지호와 김우혁은 공식 시사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밀려드는 인터뷰 요청에 진땀을 뺐다.

두 사람의 인터뷰 기사는 스크린 데일리에 많은 지면을 할애해 실렸다.


“영화제 주상영관인 베를리날레 팔라스트의 좌석은 1800석입니다. 디렉터 류.”


갑자기 영화제 집행위원회에서 35mm 포맷 <복수의 꽃>을 메인상영관에서 틀자고 제안했다.

필름마켓에 가져온 35mm 포맷 프린트가 있기에 상영에는 문제가 없긴 했지만....


“미안하지만, 내 영화는 Eye-MAX 상영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영화제에서만이라도 관객들이 Eye-MAX 시스템으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ye-MAX 포맷의 미학이 기존 영화 미학과 무엇이 다른지 확인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집행위원회의 제안을 받고 오해를 했다.

독일영화의 강력한 경쟁작 중 하나인 <복수의 꽃>의 김을 빼려는 것은 아닌지.

그도 아니면 류지호의 성과에 흠집을 내려고 하던가.


“미학이랄 것도 없습니다. 텔레비전 사이즈가 수십 배 확장했다고 보면 됩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 역시 Eye-MAX가 무엇이 좋은지 알지 못합니다.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전문가들이 두 포맷을 비교해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영화팬들에게 새로운 것이 소개될 때는 어떤 안내서가 필요한 법이지 않습니까?”


안내서란 표현을 류지호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류지호는 베를리날레 팔라스트 특별 상영을 허락했다.

매진에 이은 긴급 편성과 1,800석 메인극장에서의 특별 상영 등 내부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 속에서 세계 최초의 Eye-MAX 상업 극영화 <복수의 꽃>이 세상에 공개됐다.


작가의말

다음 두 편은 <복수의 꽃> 극장 요약본입니다. 관심 없는 독자님이 계시다면 두 편을 스킵하고 477화로 넘기시면 되겠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한 주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PS. 유배추도사님 후원 감사드립니다. 성실연재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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