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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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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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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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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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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영화가 영원히 머무는 곳. (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준비는 하고 있어. 앞으로 비디오숍만이 아니라 약국, 편의점 등 다 해야 될 것으로 봐. 홈페이지 정도는 기본으로 가지고 있어야 고객의 요구 수렴에서 뒤처지지 않을 것이고. 인터넷은 개별숍으로 보면 원하는 정보를 찾고 검색하고 감상을 올려 작품을 고르는 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기능을 할 거야. 감상을 올려놓은 고객에게는 무료 대여권이나 보너스 점수를 주는 서비스를 한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숍 외부로 보면 숍 간의 정보 교환의 창구가 돼 결집력을 키우게 되고 제작사의 횡포를 극복할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를 일으킬 것으로 기대하는데..... 청계천 도매시장의 경우 비디오들을 인터넷에 목록화해서 올려만 놓으면 숍이든 개인이든 비디오를 사고 싶은 사람은 누구라도 이 인터넷을 활용해 살 수 있게 될 텐데 말이야. 구체적인 미팅은 갖지 못했지만 인터넷을 잘 아는 분들께 협조요청을 해 놓은 상태이고 최소한 올해 안에 가시적인 효과를 내려고 해.”


길게 말을 늘어놓은 사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시시콜콜 너무 많은 것을 털어놨기 때문이다.


“한남동 주변과 회사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한 비디오 대여점을 돌아본 결과 업주들이 한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있었죠. 인터넷을 통한 사업이에요”


실제 자본력을 갖추고 있는 국내외 업체 몇 곳에서 비디오 업계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긴 했다.

그런 시도들은 신통치 않았다.

그렇다고 StreamFlick 사업모델이 한국에서 유효하지도 않고.

국내 최대 비디오대여점 체인 영화마을과 으뜸과 버금은 각각 600여개에서 300개로 200개에서 150개로 가맹점 숫자가 뚝 떨어졌다.

향후 전망도 밝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한목소리로 한국의 부가시장 가운데 비디오는 끝났다고 말한다.

DVD는 조금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인터넷 부분은 조금 신중하셔야 합니다.”

“자본력 때문에?”

“만약 사장님이 지금까지 한국에서 출시된 모든 타이틀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인터넷에 올려놓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아요?”

“좀 더 손님들이 영화를 선택하는데 편리해지지 않을까?”

“사장님의 홈페이지에서 비디오를 검색한 다음 P2P 사이트에서 영화를 다운로드 받아서 볼 겁니다. 사장님 매장에 찾아와서 비디오를 빌려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이전 삶에서 그런 일이 만연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류지호 역시 영화를 인터넷에서 불법 다운로드로 많이 봤었다.

현직 영화종사자인 주제에.


“그래서 말인데.... 사장님한테 투자를 좀 해보고 싶어요.”

“무슨 투자?”

“매장을 대로변에 유동인구 많고 교통 편리한 곳으로 옮겨드리죠. 사장님은 더 넓고 쾌적한 공간에 여기에 미처 진열하지 못한 비디오를 창고에서 꺼내와 진열해서 고객들에게 대여해주세요. 인터넷이니, 고객관리, 시장 확대... 아니 시장의 현상유지는 스펙트럼DVD에서 책임지겠습니다.”

“영화마을처럼 프랜차이즈라도 해보게?”


사장은 매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스펙트럼DVD가 대여점 사업을 한다면 무조건 직영점 체계가 될 겁니다. 스펙트럼DVD가 제작·유통사이기 때문에 직영점에 일방적 횡포, 대여료 덤핑 절대 없을 겁니다. 또한 모든 매장에 POS 시스템을 운용할 생각이고. 간단하게 음료도 판매할 거고, 캐릭터 상품 판매부터 아네모네 프랜차이즈와 연계해 복합공간으로 꾸밀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사장님이 준비하는 인터넷에 정보를 정리해 올리는 것도 당연히 진행되고.”

“됐네.”


사장이 단칼에 거절의 의사를 내보였다.


“일없어.”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여기....!”


류지호가 명함을 한 장 계산대에 놓았다.

사장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영화로도 모자라 비디오까지 다 해먹으려고 하나?”

“부가시장의 한 축이 죽어가는 속도를 최대한 늦춰보려고요. 모두가 하지 말라고 하는데, 왠지 해야 될 것 같네요.”


비디오대여점 업주들을 위해서가 아니다.

영화 제작자들을 위해서다.

급격하게 몰락하는 비디오 대여 시장...

새로운 미디어가 옛 방식을 밀어내는 것이 당연하다.

다만 한국에서 비디오 대여점의 몰락은 너무 급격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외국의 경우 대여점 자체는 사양길이라도 인터넷을 통한 대여나 VOD 서비스 같은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추세다.

반면에 한국은 시장 자체가 아예 없어져 버리면서 단절이 된다는 문제가 있다.

영화는 극장 개봉→유료TV→비디오/DVD→공중파TV→케이블TV 같은 경로를 따라 다양하게 배급되고 여기에 소장용 DVD나 인터넷 VOD 같은 경로가 추가되면서 다양한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그러나 한국은 다른 경로는 모두 무너지고 오직 극장 개봉만이 존재하게 된다.

그것도 몇 년 사이에 급속하게.

그렇게 될 경우, 한국영화는 극장 개봉만으로 자본을 회수해야 한다.

보다 많은 제작비를 들여 한 번에 많은 스크린을 확보할 수 있는 몇몇 제작·배급사만 생존하는 상황이 되고, 이는 곧 영화의 다양성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 한다.


“이윤추구에만 매몰되어 온갖 횡포를 부리는 대기업 때문에 기존 제작사가 다 망했다.”


그렇게 주장하기 전에 한국 영화산업의 흐름과 구조적 문제를 진단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까지는 극장 개봉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비디오 수익을 통해 그런대로 제작비를 회수하기도 하고, 여러 극장을 잡기 어려운 작은 영화사라도 비디오 시장을 고려해서 영화를 제작하거나 비디오로 통할 외화를 전문적으로 수입할 수 있었다.

이제 곧 그런 것들은 다 지나간 얘기가 되어 버리고 만다.

미국의 StreamFlicks나 일본의 대형 비디오대여점 프랜차이즈처럼 20년 동안 꾸준히 버티기는 힘들다는 것을 류지호도 잘 알고 있다.

다만.


‘10년만! 딱 10년만!’


강산도 변할 시간이다.

10년이란 세월이.

그런데 10년도 채 안 돼서 그 속담은 바뀔 수밖에 없다.

강산이 변하는데 채 5년도 걸리지 않게 되니까.

류지호는 그 이상의 시간은 바라지도 않았다.

또한 그 기간 쌓일 적자를 고려하면 그 이상은 솔직히 무리다.

IPTV와 스트리밍 서비스로 완전히 전환하기 전까지 부가시장 가운데 중요한 캐시카우 하나를 유지시킴으로써 중소영화사나 독립제작사가 한두 번 실패해도 재도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류지호의 목표다.

또한 중대형 제작사 역시 할리우드나 다른 한국 대작영화에 밀려 극장에서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비디오와 DVD에서 최소한의 제작비라도 건지게 해 영화 한 편 망하는 것으로 그대로 주저앉지 않도록 안전판 하나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극소수에게 집중될 투자제작 기회를 다양한 루트로 분산시키는 효과도 기대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가온그룹은 싸워야했다.

불법 복제, 불법 유통, 불법 다운로드와.


“사양사업에 투자하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박건호 대표가 우려를 전했다.


“이제 와서 무너지는 비디오 대여점을 살리기는 어려워요.. 한국영화 배급경로를 다양화하고 시장을 살려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영화에 접근할 수 있는 경로를 포기해선 안 된다고 봐요.”

“구국의 영웅이라도 되고 싶으신가봅니다?”

“IMF 구제금융도 다 갚을 예정이라는데 구국의 영웅은 국민들이겠죠.”

“적자를 보더라도 끝까지 가실거지요?”

“끝까지는 무리에요. 다만 한계점까지 해보려고요.”

“WaW 입장에서는 비디오 시장은 있으나 마나합니다만.”


한국은 영화 비디오시장도 그렇게 크지 않았고, 직배사와 대기업이 유통을 쥐고 있어서 WaW 엔터테인먼트는 크게 재미를 보진 못했다.


“혹시 일말의 미안함을 가지고 있으십니까?”

“......?”

“멀티플렉스 극장의 확산이 비디오 대여업 불황에 한 몫 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멀티플렉스들은 대부분 시내 번화가가 아닌 아파트 대단지 인접한 곳에 위치해 있어 집에서 조금만 걸어 나가면 좋은 시설의 극장에서 영화를 감상할 수 있지요. 특히 우리 극장들은 2차 확장 입지를 그렇게 접근하고 있는 편이고 말입니다.”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겠죠. 그런데 더 큰 영향은 이동키 같은 P2P 사이트에서 영화와 음반을 다운로드 받아 보는 것이 아닐까요?”


잦은 재생으로 열화 된 저질 비디오보다 그나마 화질이 좀 더 나은 영화 파일을 일부러 찾는 영화팬들도 많았다.


“과잉투자도 심각했죠. 우리 시장 여건에 비해 비디오 대여점이 너무 많았어요. 전략기획팀에서는 비디오 대여점에도 거품이 많이 꼈었다고 진단하더라고요.”


뭐 하나 잘되면 우르르 몰려가는 습성들이 있다.

비디오 대여점이 그렇고 노래방과 PC방이 그런 분위기다.

향후 온 동네마다 커피전문점과 치킨 프랜차이즈가 넘쳐나게 된다.

겉모습만 보면 대한민국은 프랜차이즈 또는 자영업 천국 같아 보인다.

경제가 고도화할수록 각 산업의 임금 노동자 흡수력이 높아지면서 영세 자영업자는 감소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유독 한국만 예외다.

경제·사회 전체적으로 작지 않은 부담을 주게 되지만, 국가는 자영업 관련해서는 문제 해결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혹시 저작권 침해 단속에 나래안전을 이용하고 계시는 겁니까?”

“경찰이나 관련 행정기관은 예산도 없고 인력도 없다잖아요. 결국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고 민간에서 뭔가 해봐야죠.”

“너무 혼자 애쓰시는 건 아닙니까?”

“별로 애쓰는 건 없는데....”


불법복제나 다운로드 문제는 수년 전부터 류지호가 강조했던 사안이다.

나래안전에서는 경찰로부터 관련 전과자 정보를 받아 비디오와 DVD 불법복제를 암암리에 단속하고 있다.

불법 다운로드 문제는 그룹 차원에서 대중문화예술계와 함께 캠페인을 열심히 벌이고 있고.


“대기업이 영세업자들의 먹거리까지 먹어치운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영화마을이나 으뜸과 버금처럼 점포를 수백 개씩 늘일 생각은 없어요. 전국적으로 서른 개 정도.....”

“그걸로 비디오 시장을 살릴 수 있겠습니까?”

“어림도 없겠죠. 대신 비디오를 DVD시장으로 디졸브 시킬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미국의 StremFlicks와 블록버스터의 대형매장 모델을 반반씩 섞은 형태라고 할까. 영화 콘텐츠만으로는 안 되고 가온과 JHO가 가진 모든 IP를 활용할 수 있는 복합매장이 되어야겠죠.”


이전 삶에서 아이&위의 바나나프랜즈숍을 더욱 확장시킨 온오프라인 IP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장은 적자를 각오해야 한다.

가온그룹 자체 캐릭터나 특출 난 IP가 없기 때문이다.

암튼 비디오·DVD·만화 대여점을 기본으로 해서 다양한 캐릭터 상품까지 취급하는 복합매장을 기획 중이다.


“영화계에 어른이란 사람들이 제대로 어른 노릇을 해야 하는데, 젊은 영화인들에게 참 할 말이 없습니다.”

“대표님은 잘하고 계세요. 영화인 회의에서 한국영화 발전을 함께 논의하고 계시는 대선배님들도 많으시고. 영진위와 그랜드벨 어워즈 문제 빼고 스크린쿼터 같은 부분에서는 사이가 좋지 못한 선배님들도 한 목소리를 내주잖아요.”

“영화계에 진보니 보수니 정치가 들어오면 안 좋은데, 젊은 사람들과 나이 먹은 사람들이 서로 편을 가르는 게 영 보기가 불편합니다.”

“나는요 대표님.... 한국영화가 <JSA> 같은 영화도 자유롭게 만들고 반공을 주제로 한 <배달의 기수>같은 영화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만들 수 있는 환경이 되길 바래요.”

“회색은 어느 편에서도 환영 받지 못합니다.”

“환영 못 받으면 어때요? 뭐라고 앵앵거리기 전에 아카데미 초청장이나 받고 까불라지요.”


박건호 대표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오만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한 사람이 아시아에서 몇 없는 아카데미 회원이자 작품상 수상자다.

할리우드에서도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못하는 인물에게 영화 변방 충무로 영화인 따위가....


“제 아무리 내가 잘났네 네가 못났네 까불어봐야 영화 못 만들고 연기 못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좋은 영화는 좋은 관객이 함께 만들어 간다는 말도 있듯이 관객들이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많은 영화인들을 골라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힘없고 온순한 사람은 당해도 찍소리도 못한다.

그런데 힘 있는 사람이 어쩌다 화가 폭발하면 큰 사고를 친다.

박건호 대표가 곁에서 지켜본 류지호가 그랬다.

평소 행실을 보면 류지호는 분명 친절하고 온순한 사람이다.

한편으로 이기적이고 냉소적인 면도 있지만.

그런 복합적인 모습들이 종잡을 수 없는 사람으로 비춰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노릇이다.


‘평소에도 계획을 철저히 세우고 그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박건호 대표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비디오·DVD 대여점 사업 역시 무작정 저지르지는 않을 터.

분명히 미래를 내다보고 내린 결정일 가능성이 높았다.

언제나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앞을 내다보고 포석을 놓아왔으니까.

2002년 봄에 벌어질 일이다.

가온그룹 계열사인 스펙트럼DVD에서 비디오·DVD 대여점이자 음반 및 캐릭터 복합매장 스펙트럼조이숍 사업을 개시하게 된다.

기존의 비디오가게에서 벗어나 ‘홈 엔터테인먼트 전문스토어’를 표방하게 된다.

일반 비디오 대여점은 7,000만 원 정도면 차릴 수 있다.

반면에 스펙트럼조이숍 하나를 차리려면 수억 원이 소요된다.

따라서 전국의 매장은 모두 직영점 체제로 운영된다.

물론 백퍼센트는 아니다.

가온그룹에서 퇴직한 직원이나 비디오가게 영상미래처럼 제휴를 맺은 대여점 몇 곳은 본사의 지원 아래 매장을 차릴 수가 있게 된다.

가장 먼저 G.O.M 강남점과 분당 서현점에 200평 규모의 매장이 들어서게 된다.

비디오·DVD·게임타이틀 대여 및 판매, 만화책 대여, 음반 판매, 각종 캐릭터 상품 판매, 커피전문점까지 갖춘 복합매장이다.

비디오·DVD를 빌리면 ‘검은 비닐’ 대신 StremFlicks처럼 붉은색 종이커버에 넣어준다.

만화책 역시 스펙트럼조이숍 로고가 박힌 친환경 에코백에 넣어서 준다.

전 점포가 POS로 연결되어 있어 재고관리도 용이하고 비디오와 DVD 심지어 만화책까지도 고객들의 선호도 데이터베이스까지 수집하게 된다.

스펙트럼조이숍이라고 해서 비디오테이프의 운명과 대여점의 몰락을 막아내지는 못한다.

다만 스펙트럼DVD의 대여점 사업이 계속되는 기간, 한국영화 부가시장에서 최소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한두 해 적자를 보기도 하지만, 흑자를 내기까지 한다.

분명 비즈니스로는 재미를 보지 못한다.

그런데 부동산 지가 상승으로 스펙트럼DVD는 남몰래 웃는다.

가온그룹 역시 다른 한국의 재벌들처럼 부동산에 진심이기에.


✻ ✻ ✻


강남의 핵심 상권의 중심인 테헤란로.

벤처기업들이 많이 모여 있어 테헤란밸리라고도 불린다.

테헤란로와 논현로가 교차하고 있는 지점에 위치한 지하 8층의 지상 45층의 빌딩.

바로 I-Tower다.

경일산업개발의 본사사옥으로 쓰기 위해 1995년 착공됐지만, 외환위기로 인해 모그룹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매우 공을 들여 건설한 빌딩을 매각할 처지에 놓였다.

당초 아이타워의 예상 매각금은 5,000억∼6,000억 원.

경일산업개발은 감정가를 기준으로 8,000억 원 이상은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매입을 추진했던 스탠리모웬, 주택은행 등은 4,000억 원대를 고집했다.

업계는 양측이 절반씩 양보하는 선에서 매매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뒤늦게 매수자로 나선 미국계 사모펀드 돈스타가 6,632억 원에 건축물 준공에 따른 과밀부담금 등 여러 비용을 더한 7,000억 원을 제시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됐다.


“한국 경제의 전망이 밝고 부동산 시장이 활성화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데다 아이타워가 강남 요지에 위치, 충분한 투자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고 판단해 적극적으로 매입에 나서게 됐다.”


돈스타 측에서 밝힌 내용이었다.

또 한 번의 반전이 이루어졌다.

가온그룹이 본사사옥으로 사용하겠다면서 인수전에 뛰어들었던 것.

돈스타보다 226억 원을 더 보탠 가격에 인수의향을 전달했다.

결국 입찰에 붙이게 됐고, 가온그룹이 82억 원 차이로 매입대상자로 선정됐다.

그로인해 경일산업개발은 당장 2,000억 원의 현금을 거머쥐고 한 달 내로 5,000억 원 상당의 매각대금을 받게 됐다.

부채비율이 무려 240%가 넘어가는 경일산업개발은 매각대금으로 부채의 일부를 해결해 연말에 200% 밑으로 부채비율을 떨어뜨리기로 했다.

오너인 류지호가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I-Tower 매매계약 체결식이다.

그럼에도 일부러 시간을 내서 모습을 드러냈다.

경일산업개발에게도 중요한 계약이지만, 가온그룹 역시 의미 있는 계약이기 때문에 오너인 류지호가 빠질 수 없었다.


“역시···. 지금 우리나라 돈줄은 가온이 다 쥐고 있다는 말을 명동에서 심심치 않게 들었습니다. 다 이유가 있군요. 당사자인 우리보다 더 치밀하게 계산하시니··· 이거 부끄럽습니다.”


경일개발산업 사옥에서 마주한 회장이 한 말이었다.

류지호와 래리 킴 회장이 상대 측 최고위직과 차담을 하는 사이 그룹 법무팀과 다온로펌 변호사들이 최종적으로 I-Tower 매매계약서를 확인했다.

7,000억 원이 넘는 금액의 거래이기 때문에 계약서 단어 하나까지도 신경 썼다.

밀레니엄 힐턴을 매입할 때 펜트하우스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처리한 것에 대해 오너인 류지호에게 꾸중을 들은 것을 알기에 두 번 확인 할 것을 세 번 네 번 확인했다.


“최종 검토가 끝났습니다.”


비서실장의 보고에 경일산업개발 사장이 소파에서 엉덩이를 뗐다.

그리고 류지호를 향해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회의실로 가시죠.”


일행이 회의실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기립했다.

이어 I-Tower 매매계약서 체결이 진행되었다.

따로 기자들은 부르지 않았다.

차후 두 회사가 각각 보도자료를 배포하기로 했다.

서로에게 유리한 내용을 담아서.


찰칵찰칵!


매매계약서에 서명을 마친 가온의 래리 킴 회장과 경일산업개발 사장이 악수를 나누는 모습이 연신 카메라에 담겼다.


“저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빌딩입니다. I-Tower가 귀사의 성장에 좋은 밑거름이 되길 기대합니다.”

“디자인 콘셉트로 상정한 ‘인간과 미래의 조화‘를 잊지 않겠습니다.”


I-Tower는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첨단 업무환경이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했다.

설계 시 가장 염두에 둔 점이 인텔리전트 빌딩으로서의 완벽한 공조 시스템과 에너지 절약, 그리고 환경친화성이었다.

단일층 전용면적 670평~800평의 기둥 없는 설계로 개방성을 최대한 살렸는데, 입맛에 따라 사무실 레이아웃을 구성할 수 있다.

계약은 무리 없이 마무리됐다.

계약체결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류지호가 경일산업개발 대표이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돈스타가 아니라 가온그룹에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별 말씀을.”


경일산업개발 입장에서 가온그룹의 제안을 허투루 볼 수 없었다.

새만금간척지사업이 민간주도로 전환되고 그것을 가온그룹이 개발하게 된다면, 방조제 공사 외에도 매립공사 및 인프라 공사 일감이 쏟아지게 된다.

대규모 토목공사에 한 자리 꿰차려면 잘 보일 필요가 있다.

결국은 입찰에서 가온그룹이 돈스타보다 82억 원을 더 써내긴 했지만, 이번 매매계약에는 양 사의 건설사업 부문의 협력까지 물밑에서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매매계약을 체결한 후 류지호와 래리 킴 두 사람이 역삼동 테헤란로로 향했다.


✻ ✻ ✻


I-Tower.

돈스타가 인수했더라면 스타타워라고 불리 뻔했지만, 앞으로는 G-Tower라고 불릴 예정인 초고층 랜드마크 빌딩.


"뷰가 근사하지요?"

"이런 맛에 대기업 총수가 되려고 하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마저 듭니다."


최고층에서 보이는 창밖 풍경은 맨해튼 초고층 빌딩에서 보는 것과 맛이 달랐다.

서울 전역의 스카이라인이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오피스 임대상황은 어때요?”

“올 해 국내외 기업 본사와 지사 등 20여개 업체가 입주 예정되어 있습니다. 여행사, 편의점, 치과, 약국 등의 생활 편의시설을 제공하게 될 아케이드 구성도 마쳤고, 올 해 안에 영업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임대료가 워낙 높아서 아무나 입주를 못하겠네요.”


G-타워의 월 임대료는 기준층 평당 8만 원 선, 평당 관리비는 3만 원 선이다.

평균이 그렇다는 것이지 층별로

단일층 전용면적 670평~800평인 것을 감안하면 꽤나 비싼 임대료를 부담해야 한다.

여담으로 G-타워는 광성월드타워가 들어서기 전까지 한국에서 가장 부피가 큰 건물로 기록된다.

연건평이 무려 64,305평이다.

여의도 63빌딩의 1.3배다.


“빌딩 관리는 나래안전에서 맡기로 한 거죠?”

“건물 관리부터 보안 및 임대 부분까지 나래안전이 모두 책임질 예정입니다.”

“임대료가 꽤 비싸서 한동안 높은 공실율을 각오해야겠네요.”

“일반적으로 단위 면적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업종은 피해야 합니다.”

“다단계 판매회사나 보험회사요?”

“나래안전에서는 보험회사도 여성 설계사 중심의 국내사들에 대한 임차는 피할 생각이랍니다. 반면에 남성 설계사가 주축인 외국계 보험회사들에는 적극적으로 임차를 해줄 생각이랍니다.”

“국내 보험회사를 꺼리는 거야 그럴 수도 있다고 쳐도 여성 설계사가 많은 보험회사를 기피하는 건 조금 그러네요.”


실제로 대형빌딩에서는 그런 풍조가 있었다.

때문에 G-타워에는 외국계 생보사들의 영업 지점이 입주하기로 되어 있다.

여담으로 이스라엘 대사관은 대형 빌딩이 기피하는 임차인 중 하나다.

통상 대사관은 임대료를 잘 내고 빌딩의 격을 높일 수 있어 유치 대상 1호로 꼽히지만, 이스라엘 대사관은 사정이 정반대라고 한다.

테러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래리...”

“예. 보스.”

“우리가 이 빌딩 인수에 성공함으로써 한국에서의 중요한 투자처 하나를 잃었잖아요.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래리 킴은 왕년에 돈스타가 그러는 것처럼, G&P에서 부실기업을 헐값에 사들여 기업을 적당히 정상화시킨 척 하고는 비싼 값에 팔아치우는 일을 했었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에 들어온 해외투기자본의 수법을 파악하는 것은 래리 킴에게 손바닥 뒤집기만큼 쉬웠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이만한 빌딩을 찾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지난 98년부터 해외자본이 중요한 부동산은 모두 선점했습니다. 그들은 천억 대가 넘는 시세차액을 얻을 수 있는 부동산을 쉽게 찾아내지 못할 겁니다.”


1998년부터 2000년 초반까지 외국자본들이 국내 빌딩을 사고팔아 챙긴 매매차익은 3,300억 원에 이른다.

외환위기 후 5년 간 서울과 수도권에서만 외국자본이 23건의 대형 부동산 계약을 체결했다.


“그렇다면 국성건설 가지고 투자금을 회수하려고 하거나, 외환은행 같이 매물로 나와 있는 대형 은행을 인수할 가능성이 높겠네요?”

“저라면 그렇게 할 겁니다. 일단 국성건설의 채권 변제부터 할 겁니다. 인수할 때 구입한 회사채를 국성건설에 되팝니다. 주식구매대금을 이용해 일부 부채를 상환하고 남은 현금자산으로 돈스타가 인수한 회사채를 다시 상환하는데 사용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국성건설 자본인수에 2,700억 원을 투자했어도, 결국 돈스타가 인수한 회사채를 상환하는데 1,200억 원을 사용했으므로 대략 1,400억 원만으로 국성건설을 인수한 꼴이 됩니다.”

“복잡하네요.”

“또 저라면 국성건설에서 꽤나 가치가 나가는 부동산부터 처분할 겁니다.”


실제 2003년에 돈스타는 국성건설의 사옥을 매각한다.

그 과정에서 유형자산처분이익(356억 원)이 발생하지만. 이 자금은 곧 유상감자와 배당을 통해 투자자인 돈스타에게 회수된다.


“돈스타는 자본감소가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유상감자를 할 겁니다. 국성건설을 들여다보니까 건설업계 평균 자본금 비율보다 높더군요.”


류지호는 돈스타가 외환은행을 가지고 장난질 쳤다는 건 알았어도, 스타빌딩과 국성건설을 인수해 막대한 돈을 챙긴 것까지는 몰랐다.

이전 삶에서 돈스타는 1998년 국성건설을 인수한 후 채권변제, 부동산 처분, 유상감자, 배당금 등의 각종 방법을 동원해 투자금의 몇 배를 뽑아냈고, 경일산업개발의 I-타워를 인수해 3,000억 이상의 차액을 남기며 매각했으며, 외환은행을 인수해서 비슷한 수법을 동원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그렇게 돈스타가 한국에서 얻은 수익이 1조원이 넘었다.

그걸로 끝이면 전형적인 투기자본에 시원하게 삥을 뜯겼구나 자괴감이 드는 것으로 끝났겠지만, 돈스타는 한국정부에 5조원 대 배상 소송을 건다.

이 소송건으로 수년 간 국민의 세금 수백억 원이 소모된다.

외국투기자본의 먹튀는 물론이고 농락까지 당하게 된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임대료를 받는다고 해서 최고의 오피스 빌딩은 아닐 겁니다. 어차피 부동산은 보유하고 있으면 오를 테니까 임대료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대신 입주 기업들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최고의 기업들이었으면 좋겠어요.”

“다른 기업들은 상관없습니다. 가온이 최고가 되면 됩니다. 가온본사가 입주한 것만으로 랜드마크가 되어야겠죠.”

“옳은 지적에요.”


가온그룹이 해외투기자본의 먹튀를 모두 막을 수 없다.

그럴 자금도 없고.

다만 가온그룹에게도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투기자본이 노리는 곳에 우선 투자한다는 원칙을 세워두었다.

외국투기자본의 폐해는 국내 제도와 조세조약의 허점을 이용한 적대적 M&A와 조세회피만이 아니었다.

단기차익, 자산 매각, 환차익, 회사의 보유 자금까지 고배당으로 챙겨가기, 회사 돈을 주주 주식 매입에 사용하고 청산하기, 금융감독 회피 목적으로 상장을 폐지하고 정부의 공적 자금을 이용한다거나, 구조조정을 내세워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을 확대하고,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무시하는가 하면 금융의 공공성까지 회피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물론 해외자본이라고 해서 모두 투기자은 아니다.

한국경제와 기업에 도움이 되는 투자도 많다.

문제는 투기자본의 먹튀를 예방할 수 있는 제도와 감시·감독 시스템이 한국에 존재하지 않거나 미비하다는 점이다.


‘전문가와 시민사회가 아무리 외쳐봐야 뭐하겠어...’


소 잃은 후 네 탓 공방으로 열심히 싸운다.

그러다가 다른 소마저 잃고 난 후에야 외양간 고치는 시늉을 한다.

그것이 한국의 행정부와 국회 현실이다.

류지호라는 불세출의 재벌이 출현했다고 해서 이전 삶과 세상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무능의 문제가 아니라 탐욕의 문제니까.


작가의말

주인공이 아이타워를 팔지 않고 현재까지 가지고 있으면 월 임대료 수입만 50억 원이 넘네요. 물론 저층과 고층의 임대료와 평수가 다르긴 하지만. 암튼 한국에서 재벌의 힘은 부동산으로도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처럼 가온그룹 역시 5대 재벌과 부동산 부분에서도 어깨를 나란히 할 토대를 갖춰가고 있습니다. 참고로 2018년 기준 5대 재벌그룹이 소유한 부동산 공시지가는 70조 안팎이라고 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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