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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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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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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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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민중의 적. (5)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금호동의 한 대중목욕탕.

평소보다 일찍 영업을 종료한 목욕탕에서 <민중의 적> 제작진이 분주하게 촬영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베테랑 제작부에게도 목욕탕 섭외는 쉽지 않다.

보통 목욕탕은 늦게까지 영업하고 일찍 문을 여는데, 문을 닫은 후에도 내부를 청소하고 정리하느라 쉴 틈이 거의 없이 돌아간다.

때문에 촬영협조를 기피하는 편이다.

또 하나 보조출연자 문제도 골치거리다.

알몸으로 출연해야 하는 특성 때문에 여탕 촬영은 말할 것도 없고, 남탕 촬영에서 보조출연자를 섭외하기 쉽지 않다.

일당을 많이 준다고 해도 선뜻 출연하겠다는 보조출연자를 찾기 쉽지 않다.

출연약속을 해놓고 막상 촬영장에 나타나지 않는 보조출연자도 있을 정도다.

스태프들이 출연료를 받고 목욕탕 장면 촬영에 동원되기도 한다.

얼굴이 절대 나오지 않는 조건으로.

장소섭외와 출연자 문제만 힘든 것이 아니다.

물기와 습기가 많은 장소 특성상 장비 관리에 어려움이 따른다.

무조건 카메라에 방수커버를 씌운다.

할리우드에서는 수중촬영 하우징을 사용할 때도 있다.

습기는 필름에게도 악영향을 주지만, 디지털 카메라는 더 취약하다.

Origin 카메라는 완전한 밀폐구조가 아니다.


“감독님, 그냥 수중촬영 하우징을 준비할걸 그랬어.”


김영복 촬영감독이 투덜거리자 류지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냥 방수커버로 만족합시다. 보험 들어놨으니까 너무 걱정 말고.”

“보험이 문제가 아니잖아. 오작동 일으킬까봐 그렇지.”

“괜찮을 걸? 다양한 환경에서 테스트를 했다니까. 큰 문제없을 거야.”


이동화가 두 사람 대화에 끼어들었다.


“감독님, 바로 촬영 들어가실 건 아니죠?”


류지호가 대답 대신 김영복을 쳐다보았다.

그에게 물으라는 의미다.


“우린 진작 스탠바이 중. 바로 카메라 돌릴 수 있어.”

“한 삼십분만 기다려주실 수 있으세요?”

“왜?”

“배우 준비가 아직 끝나지 않아서요.”

“문신 때문에?”

“예.”


건달로 출연하는 배우는 촬영장에 도착하기 전부터 전신문신 분장을 받았다.

장장 8시간이나 걸렸다.

그럼에도 문신이 완성되지 않은 모양이다.

얼마 전에 촬영을 마친 <조폭마누라>에서는 더 심했다.

여배우의 문신 작업만 무려 16시간이나 걸렸다.

암튼 오랜 시간에 걸려 그린 문신인데 촬영만 들어가면 말썽이다.


“컷!”


계속해서 NG 상황이 벌어졌다.

그려놓은 문신이 물기에 줄줄 흘러내렸다.

목욕탕 내부의 수증기 때문이다.


“제작부! 탕에 물기 모두 빼!”


김재욱이 제작부를 지휘해서 남자목욕탕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열·온탕의 물을 모두 빼내고, 냉수로 채웠다.

마른 수건으로 바닥의 물기까지 모두 닦아냈다.

뜨거운 습기가 어느 정도 제거되자 문신이 더는 흘러내리지 않았다.

디지털 카메라 역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딱히 복잡한 동선이나 콘티가 아님에도 시간을 제법 잡아먹는 촬영이다.

모두 문신 때문이다.

스티커타투나 헤나타투가 국내에 도입된 시기가 아니었다.

스티커타투는 말 그대로 스티커를 붙였다 떼면 피부에 일정기간 문양이 유지되는 타투고, 헤나는 염색에 쓰이는 염료 혹은 약재를 이용해 며칠 정도의 기간 동안만 문양을 피부에 남아 있게 하는 타투다.

물론 특수분장팀에서 부분 헤나는 가능했다.

전신에 헤나 타투를 하는 것은 아직은 힘들었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전문가를 불러올 수도 없다.

이 한 장면 때문에 몇 백만 원을 쓸 수 없었으니까.

참고로 한국에선 1992년 눈썹미용 문신이 의료행위로 판정된 후, 문신을 새기는 행위는 의사 외에는 시술 자체가 불법이다.

피부과나 성형외과 의사가 일정 교육을 받고서 시술 할 수는 있다.

현행법상 단순히 귀를 뚫는 행위도 의료인이 아니면 할 수 없다.

그에 따라 헤나 문신의 경우도 제약 조건이 있었다.

인도와 이집트에서 결혼 의식의 하나로 내려온 헤나 문신은 살갗 염색이다.

천연 염색 헤나파우더를 반죽해 피부 위에 그림을 그린다.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는 것과 같은 이치로 1~2주가 지나면 저절로 사라진다.

현행법상 염색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소는 미용업으로 분류된다.

미용업은 공중위생법의 적용을 받고 지방자치단체에 신고를 하도록 되어 있다.

염료 혹은 약재를 사람의 피부에 입히는 것이기 때문에 헤나 타투는 해당 기관에 등록된 사람만 허용된다.

영구적인 문신을 시술하고 돈을 받지 않을 경우 의료법 위반(무면허)이 되고, 돈을 받을 경우 보건범죄특별단속법 위반이 된다.

따라서 합법적인 문신 시술은 피부과나 성형외과에서나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 문신을 시술하는 병원은 거의 없다.

이 당시만 해도 공식적으로 문신 시술을 하고 있는 피부과나 성형외과 의사는 국내 다섯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전신 문신을 하는 의사는 아예 없었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바디페인팅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문신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차츰 없어지게 된다.

10년이 흘러야 그 같은 법이 사실상 사문화된다.

그렇다고 합법화가 되지는 않는다.

어쨌든 현재는 미용업 등록이 되지 않은 사람이 헤나 타투를 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신고라도 당하게 되면 무자격 시술자는 구류 혹은 벌금을 부과해야 한다.

당연히 류지호가 그 같은 상황을 모를 리가 없다.

특수분장팀은 몰랐지만.

다만 류지호는 특수분장팀이 해보는 데까지 해보도록 내버려두었다.

시행착오가 있어야 분장 분야도 발전할 수가 있으니까.


“앞으로 한국영화에서 문신을 한 캐릭터가 수없이 많이 등장하게 될 겁니다. 충무로 분장팀은 인체에 무해하면서 안전한 헤나 타투 방법을 미리부터 익혀 둘 필요가 있어요.”

“한국에서는 배울 데도 없어요. 조폭 타투해주는 데 가서 배울 수도 없고. 가까운 일본으로 가야 할까요?”

“일본도 비의료인의 타투는 불법일 겁니다, 아마도.”

“.....예?”


전 세계에서 의료인이 아닌 사람이 하는 타투를 불법으로 규정한 국가는 대한민국과 일본 두 곳 뿐이다.

일본마저 2020년 타투를 합법화한다.

그 후로 불법인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LA에 교포가 설립한 메이크업스쿨이 있어요. 오스카 수상자도 배출한 유명한 학교죠.”


충무로에도 미국 유학파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더러 있다.

그들은 주로 prosthetic makeup(보철 분장)을 배웠다.

즉 괴물, 다친 얼굴, 노인 분장 등 배우의 얼굴을 변형하는 기술들이다.

인체모형인 dummy를 전문적으로 배워오는 분장사는 한 명도 없었다.


“단! 미국에서 배워온다고 능사가 아니에요. 미국식 특수분장은 돈을 많이 잡아먹어요. 그대로 따라하면 충무로에서 단가 못 맞출 겁니다.”

“결국 또 맨땅에서 헤딩해야 하는 거네요?”

“어쩔 수 없어요. 충무로 방식에 맞는 분장방식도 연구해야 하고 그에 맞는 저렴하면서 인체에 무해한 재료를 찾아야 하죠.”


당장은 돈이 안 된다.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 해야 할 정도로 척박한 분야다.


“당장은 힘들 겁니다. 대신 지금부터라도 노하우를 쌓아가게 되면 늦어도 10년 후에는 충무로에서 독보적인 되겠죠.”


덤으로 노하우를 후배들과 공유하면 더 좋고.


“그런 부분을 영진위에서 좀 도와주면 좋은데.....”

“한국 영화와 방송계에서 활동하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몇 명인지 모르지만, 다함께 뭉치세요.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럿이 뜻을 모으고 돈을 모으고 스폰서도 구해서 함께 연구개발하면 좋잖아요.”

“노조... 말씀이세요?”

“노동조합이 되었든, 협동조합이 되었든.”


충무로 기술 파트협회에는 분과들이 있다.

문제는 일을 안 한다는 점이다.


“노조가 만들어진다고 해서 잘 돌아갈까도 싶지만.... 없는 것 보다는 나으니까요.”


영화계 노조와 일반 산업의 노조는 성격을 달리해야 한다.

적어도 한국처럼 영화가 완전히 산업으로 자리를 잡지 못한 경우에는.

임금협상이나 복지확충에만 매달려선 안 되고, 자본이 부족하고 신기술 정보가 취약한 개별 회원 대신 조합이나 협회차원에서 새로운 트렌드의 기술들을 수혈해 줄 필요가 있다.

산업이 안정된 다음에는 회원 각자의 몫이겠지만.

미국의 각종 협회에서는 정기적으로 혹은 비정기적으로 각종 세미나를 열어서 회원들에게 새로운 기술과 관련 정보를 제공해 준다.

암튼 충무로 사람들이 볼 때 류지호는 영화와 관련된 것에서는 모르는 게 없다.

뭐든지 물어보면 자세하게 알려준다.

때론 대안까지도 제시해 준다.


“우리 감독님 같은 분이 문화체육부 장관이 되셔야 하는데.....”

“차라리 대통령을 시켜주면 한국영화가 10년 더 빨리 발전할 걸.”

“경제도 잘하시지 않을까?”


문신 문제로 인해 촬영이 지연되면서 스태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었다.

민원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다.

왜 류지호에게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목욕탕 장면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그럼에도 명대사라고 할 수 있는 유명한 장면을 완성할 수 있었다.

충무로 신인배우들의 자유연기의 단골 레퍼토리가 되는 강철중의 바로 그 대사.


[그러지 마라. 형이 돈 없다 그래서 패고.....]


대중들은 설형기 배우의 실제 모습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다.

평소 매체 노출도 거의 안 하고, 영화에서는 너무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

그로 인해 실제 모습이 가려져 있다.

류지호가 기억하는 설형기는 징그럽게 ‘능글맞은 배우’였다.

성격은 능글맞은 것과 거리가 멀다.

다만 배우로서 캐릭터에 따라 능수능란하게 변신할 수 있는 배우다.


“한마디로 연기를 잘 한다는 말이죠.“


설형기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웬 칭찬?”


설형기는 완전 강철중화 되어 있었다.

카메라 밖에서도 특유의 썩은 미소를 지어보이기 일쑤다.

설형기는 치열하게 대본을 분석하는 스타일의 배우가 아니었다.

시나리오를 열심히 읽지 않는 배우로 유명했다.

그 때문에 한때 난독증이 있다는 루머까지 돌았을 정도다.

시나리오를 꼼꼼히 읽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 만의 연기법에 기인했는데, 처음 두세 번 읽고 받은 그 인상과 느낌을 토대로 캐릭터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캐릭터에 자기가 들어가는 것이 아닌 캐릭터가 자신에게 들어오는 것을 추구한다.

미국식 메소드 연기법과 유사하다.

영화 속 캐릭터에 동화되기 보다는 설형기 그 자체가 캐릭터가 되는 방식이다.

그 때문에 모든 연기가 똑같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아직은 먼 이야기다.


❉ ❉ ❉


김영찬 배우가 촬영장에 도착해서 처음 류지호를 마주친 후 너스레부터 떨었다.


“이러다가 내가 류 감독의 페르소나가 되는 거 아녀?”

“특별출연입니다. 단역이죠.”

“주인공이 아니면 어때? 벌써 류 감독 영화 세 편이나 출연했는데.”

“건강관리 잘하시고 오래오래 연기 생활 하세요.”

“내가 류지호 사단의 맏형이라고 불리는 거 알지?”

“누구누구 사단이 뭐가 좋아요. 김영찬이란 배우 자체가 인정을 받아야지.”

“반쯤 먹고 들어가니까.... 나 좀 많이 써줘.”

“TV예능이나 밤무대 쪽으로 발만 담그지 않으면 형님은 항상 제 영화에 단골로 나오실 겁니다.”

“말해 뭐해. 그쪽은 거들 떠 보지도 않으니까 걱정 마.”

“일 좀 많이 하셔야 하는데....”

“요새 많이들 찾고 있어. 회사에서도 신경 많이 써주고 있고. 나 먹고 사는 건 걱정 안 해도 돼.”


특별출연 필요 없다고 그렇게 말했건만, 김영찬은 기어코 <민중의 적>에서 카메오 출연을 자청했다.

특별출연이 불발된 송라원은 골이 났다.

류지호 딴에는 송라원의 커리어를 위해 막은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토라졌다.

송라원은 오랜만에 충무로에 나타난 이십대 초반의 풋풋한 주연급 여배우다.

매니지먼트 CHAN 입장에서는 매우 섬세하게 필모그래피를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류지호 역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고.


“역시 류 감독이야. 어떻게 알고 연기 잘 하는 애들만 모아놨네.”


류지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다들 연극판에서 유명한 배우들이다.

또한 <민중의 적>이 처음으로 캐스팅한 것도 아니다.

어쨌든 <민중의 적>의 자글자글하고 풍부한 맛을 내는 양념들이 듬뿍 담겼다.

개성이 넘치는 조연들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후한 연기력으로 무장된 베테랑 연극배우부터, 보는 것만으로도 캐릭터와 찰떡인 개성파 조연, 웃음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반드시 나타나는 조연들까지 영화 곳곳에 포진해 있다.

그 중에 한국 연극계의 큰형님으로 통하는 기진형도 출연했다.

마약범과 싸우다 상처를 입고 투덜거리는 강철중에게.


[약 뺏기고 두들겨 맞은 걔들은 얼마나 열 받겠냐?]


그렇게 후배를 다독이지만, 끝내 자살하는 송형사로 출연했다.

영화 초반에 잠깐 등장했다가 퇴장하기에 존재감을 드러내기 쉽지 않은데, 워낙에 베테랑이라서 본인이 해야 할 몫은 충분히 하고 빠졌다.

또한 대학로의 전설로 불리는 배우 강두일은 신임 강력반장으로 출연하고 있다.

80년대 중반 무려 5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연극 <칠수와 만수>에서 만수를 연기했던 배우가 강두일이다.

60~70년대 생 연극배우 지망생치고 강두일을 보면서 꿈을 키우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살아 있는 전설과도 같은 배우다.

형사반장 전문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직업군에 역할을 많이 하고 있다.

등장하자마자 욕설을 내뱉고 부하들 군기잡기에 나서지만, 차츰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묵직하게 보여줄 예정이다.

강철중에게 ‘민중의 적’으로 찍혀 일망타진 당하는 사채업자 두목은 마당극으로 유명한 중견배우가 출연해 영화의 맛을 살려줄 예정이다.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조연들의 면면은 다시는 조합될 수 없을 것 같은 연극배우 출신들이 대거 포진했다.

강철중에게 폭력혐의로 잡혀 왔다가, 난데없이 십자드라이버를 들고 연쇄절도범으로 둔갑하는 산수.

강철중이 뺏은 마약을 팔아주는 거간꾼이자 정보원 노릇도 하는 대길, 한때 칼잡이로 날리다가 지금은 제비족으로 살아가는 용만 등.

10여 년이 흐르면 한국 영화계의 허리를 든든하게 받쳐줄 배우들이 사이코패스 스릴러 영화에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가벼운 캐릭터와 맛깔 나는 연기를 펼쳐 다소 밋밋한 플롯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예정이다.


“컷! 수고하셨습니다.”

“벌써 끝난 거야?”


너무 빨리 끝나버린 촬영에 김영찬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교통법규 위반으로 강철중에게 적발된 운전자 역할로 단 한 씬에 출연했다.

강철중에게 눈감아 달라며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쥐어주는 연기라 어려울 것이 없었다.

전 같으면 이런 장면에서조차 쓸데없이 긴장감을 유발했을 터.

이번에는 설형기와 김영찬 배우가 알아서 연기 앙상블을 만들어주라며 맡겨버렸다.

설형기는 운전자가 내민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보며 망설인다.

물론 망설임은 순간적이다.

촬영감독은 망설임이 묻어나오는 설형기의 눈을 강조하기 위해 얼굴만 따로 찍자고 제안했지만, 류지호는 거절했다.

대놓고 망설임을 드러내는 것은 하수들이나 하는 방식이니까.


“사람처럼 보이는 형사를 보여주겠다면서 강철중의 사소한 갈등을 남발하다보면 패륜범을 집요하게 쫓는 형사라는 큰 설정을 깎아먹을 수가 있어.”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장치로 가족도 있으니까.”

“노점상도 있고.”


악당보다 더 악당 같은 형사가 도저히 봐줄 수 없는 패륜아를 만난다.

법을 지켜야 할 경찰이 법을 밥 먹듯이 어기고, 폭력까지 불사하면서 그를 쫓는다.

과연 형사는 패륜아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징악(懲惡)이 <민중의 적>의 시작이자 끝이다.


✻ ✻ ✻


사소한 문제들이 끊임없이 발생했지만, 촬영 일정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류지호는 다른 할리우드 감독들과 마찬가지로 프리프로덕션에 심혈을 기울이는 편이다.

그래서 막상 프로덕션에 들어오면 딱히 머리가 복잡하진 않았다.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한 대로 진행만 하면 되었으니까.

할리우드 배우들 가운데는 제 고집만 앞세우는 이들도 더러 있다.

그런 이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진이 빠질 때가 있다.

한국에서는 아니다.

류지호의 말이 법이라도 되는 듯 모두가 순순히 수긍했다.

딱히 연기 부분에서 세밀한 디렉션을 주진 않았다.

이번 영화에서는 배우들에게 자율권을 꽤나 보장해 주었다.

다만.


“관객을 웃기려고 하지 마세요. 배우가 코미디언도 아닌데 왜 웃음을 유도하려고 합니까? 캐릭터의 성격이 매우 쾌활해서 가벼워 보이는 겁니다. 거기에 허세가 심하고. 양아치들 종족 특성이잖아요. 허세, 허풍....! 웃기려고 하지 말고 진지하게 하세요. 웃고 안 웃고는 관객의 몫이니까.”


연출부들이 실수하는 것 중에 하나가 등장인물의 성격을 정리할 때 ‘코믹한 캐릭터‘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어떤 창작물에도 코믹한 캐릭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이 유별나서 자주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되고 그 행동이 특별한 상황과 만나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웃음을 유발하게 하는 것뿐이다.

혹은 지능이 떨어지거나 생각이 모자라기 때문에 실수를 연발하기에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자주 유발한다거나.

코미디언은 관객을 웃기기 위해 스스로를 바보로 만들거나 때론 상대방을 멍청하게 보이게 유도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연기에서 과장은 필수다.

영화연기는 전혀 다르다.

코믹연기를 하겠다고 과장을 하는 순간 영화의 품격만 떨어뜨릴 뿐이다.

단역배우들의 딜레마가 거기서 나온다.

감독은 코믹한 연기를 주문한다.

그런데 시나리오에서 주어진 상황은 엉뚱한 언행이 나올 만한 구석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배우는 과장된 연기를 할 수밖에 없다.

억지 코미디 상황극이 만들어진다.

캐릭터들이 바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더 최악은 그런 상황에서 연극톤의 연기까지 보태질 때다.

영화가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화 되는 순간이다.

류지호는 소위 ‘감초’ 연기자들이 코미디 원맨쇼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유머를 포기하면 포기했지.


“캐릭터를 바보로 만들지 마세요. 시나리오가 만든 상황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바랍니다.”


<민중의 적>에는 얼굴만 봐도 절로 웃음이 나오는 배우들이 제법 출연한다.

웃기려고 애쓰지 않아도 주어진 캐릭터를 진지하게 연기하다 보면 관객들이 알아서 웃어줄 것이다.

영화배우가 굳이 코미디언이 될 필요는 없다.

연극배우들을 기본적으로 발성과 발음이 선명하다.

힘 뺀 일상적인 대화조차 문어체처럼 들릴 때가 있다.

자신의 말을 상대(또 관객)에게 명확하게 전달하려는 성향 때문이다.

<민중의 적>에는 연극계 베테랑 배우들이 많이 출연한다.

소위 ‘연극톤’이라고 불리는 악센트가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노기사, 하지 마세요!”


동시녹음기사가 버릇처럼 배우에게 목소리 볼륨을 올려줄 것을 요구하려고 했다.

<복수의 꽃>에서 손발을 맞춰봤음에도 류지호의 성향을 깜빡 할 때가 있는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진 없고. 마이크가 좀 더 들어오면 되잖아요.”


척하면 척이다.

조명팀이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붐마이크가 배우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와도 그림자가 배우에게 드리워지지 않도록 조명을 조금 조절했다.

배우들이 그런 광경을 신기한 듯 지켜봤다.

보통은 조명을 손대지 않고 동시녹음과 배우가 그것에 맞추니까.

예전보다 좋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동시녹음은 촬영과 조명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조금만 붐마이크가 거치적거린다고 생각되면 대번에 호통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충무로 촬영현장이다.

아직도 그런 현장이 많다.

게다가 한국영화는 지나치게 동시녹음에 사활을 건다.

류지호의 현장에서는 그런 게 없다.

앉아서 천리를 보는 것처럼 현장의 작은 움직임까지 다 포착하는 것이 류지호다.

먼저 나서서 교통정리를 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자기들끼리 알아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과장 조금 보태면 눈빛만 봐도 상대가 원하는 걸 알아서 척척 준비한다고 할까.

<민중의 적>은 이전 삶의 영화와 모든 부분에서 다르게 결과물이 나올 것 같았다.

시나리오와 배우가 거의 바뀐 것이 없음에도.

왜냐하면 감독이 전혀 다른 성향이기 때문이다.

또한 촬영장소가 대폭 바뀌기도 했다.

조규환 부모가 사는 집은 류지호의 한남동 주택에서 촬영했다.

조규환의 집은 래리 킴 부부가 살고 있는 압구정의 80평대 아파트에서 찍었다.

산수의 사무실은 나래안전의 장문식 이사가 섭외를 도와준 실제 인천 조폭이 운영하는 주류도매상을 빌렸다.

펀드매니저 조규환의 사모펀드 사무실은 가온투자파트너스 사무실을 빌렸다.

강동경찰서는 내년 3월 개장 예정인 여주의 WaW 종합촬영소 내 특수시설 세트에 지어졌다.

이전 삶의 영화 세트보다 훨씬 풍부하고 사실적인 경찰서 미장센을 준비했다.

비주얼리스트라는 말을 듣는 감독의 작품답게 조명에도 바짝 힘을 주고 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디지털 시네마 카메라로 촬영되고 있어서 ‘룩’과 색감이 계획한 대로 나올지는 미지수였지만.


작가의말

화창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날씨입니다. 활기차고 에너지 넘치는 한 주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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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 베를린영화제. (3) +9 23.04.18 2,957 110 30쪽
475 베를린영화제. (2) +6 23.04.18 3,024 108 30쪽
474 베를린영화제. (1) +6 23.04.17 3,320 124 27쪽
473 한국영화에 애정이 있구나.... (2) +11 23.04.15 3,388 117 27쪽
472 한국영화에 애정이 있구나.... (1) +2 23.04.14 3,271 126 26쪽
471 한 판 크게 벌여봐야겠어요. (4) +8 23.04.13 3,312 123 25쪽
470 한 판 크게 벌여봐야겠어요. (3) +4 23.04.12 3,312 126 23쪽
469 한 판 크게 벌여봐야겠어요. (2) +4 23.04.11 3,334 120 26쪽
468 한 판 크게 벌여봐야겠어요. (1) +7 23.04.10 3,388 123 25쪽
467 민중의 적. (10) +3 23.04.08 3,260 120 23쪽
466 민중의 적. (9) +4 23.04.07 3,214 116 25쪽
465 민중의 적. (8) +6 23.04.06 3,130 117 23쪽
464 민중의 적. (7) +3 23.04.05 3,125 114 23쪽
463 민중의 적. (6) +7 23.04.04 3,208 120 24쪽
» 민중의 적. (5) +2 23.04.03 3,236 115 22쪽
461 민중의 적. (4) +3 23.04.01 3,266 117 22쪽
460 민중의 적. (3) +3 23.03.31 3,404 116 23쪽
459 민중의 적. (2) +5 23.03.30 3,458 115 23쪽
458 민중의 적. (1) +9 23.03.29 3,508 116 24쪽
457 무역센터가 무너졌습니다! (3) +4 23.03.28 3,409 119 22쪽
456 무역센터가 무너졌습니다! (2) +5 23.03.27 3,307 118 21쪽
455 무역센터가 무너졌습니다! (1) +5 23.03.25 3,450 113 21쪽
454 쉽게 될 리가 없겠지..... +8 23.03.24 3,317 112 24쪽
453 영화가 영원히 머무는 곳. (2) +6 23.03.23 3,315 108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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