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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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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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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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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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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베를린영화제. (6)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한국의 삼대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이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심각한 표정의 프로그래머들 사이로 끼어들며 류지호가 농담을 던졌다.


“초청작을 두고 서로 싸우시는 거 아닙니까?”

“아, 감독님....”

“왜들 심각해요?”

“개최시기와 성격이 달라 같은 작품을 두고 다툼이 벌어질 것 같진 않아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프로그래머들은 서로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감독님 영화는 세 영화제 주제와 맞아서 고민이 깊습니다.”


전주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볼멘소리를 했다.


“부산영화제만 너무 편애하시는 것 아닙니까?”

“영화제가 코앞에 닥쳐 있는 전주는 급하긴 하겠네요.”

“국내 영화제간의 조율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외국의 배급사들이 조건을 따지고 들면서 저울질하기에 그게 좀 힘듭니다. 그래도 윤곽을 모두 확정해 조만간 서울에서 초청작 명단을 발표할 예정이긴 합니다.”


11월에 개최되는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상대적으로 느긋했다.


“내심 낙점한 작품은 여럿 있는데 눈에 번쩍 뜨일 작품은 없네요.”

“우리 부천은 알찬 성과를 올렸습니다. 고른 수준의 작품을 꽤나 많이 확보했죠.”

“한국의 국제영화제에서도 다채로운 영화들로 채워졌으면 좋겠네요.”


전주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류지호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복수의 꽃>을 개막작으로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은 너무 섭섭해 하지 말아주세요.”

“개봉이 잡혀있으니.... 어쩔 수 없죠.”


올해에만 류지호의 영화 두 편이 개봉될 예정이다.

상반기는 <복수의 꽃>이 하반기에는 <민중의 적>이 개봉된다.

배급 스케줄로 인해 한국의 영화제에는 전주영화제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전주국제영화제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부산과 부천에 국제영화제가 있는데 왜 또 만들어?”


출범 전부터 전주국제영화제는 그 같은 비판에 직면했다.

지난해에는 영화제 직전에 프로그래머가 바뀌는 악재까지 닥쳤다.


“대안의 영화라는 원칙을 저버리지 않고서 차분히 성과를 쌓아왔지만, 솔직히 말씀드려서 올해에도 상황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한국에 있지도 않지만 류지호는 영화계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고 있다.

영미권 영화는 배급사들이 이윤 논리로 막혔고, 개막작으로 올릴 마땅한 한국영화 역시 선정할 수 없었다.


“저희 영화제가 칸영화제와 기간이 가까운 탓에 미리 점찍었던 남미의 수작 몇 편을 칸에 뺏기기도 했죠. 250편 정도를 초청하긴 했는데, 대중적으로 알려진 감독의 작품은 많지 않지만, 프로그램 하나하나에 땀 냄새가 배어 있다고 자부합니다.”


동병상련일까.

부산과 부천의 프로그래머들이 말없이 잔을 부딪쳤다.


“<복수의 꽃>을 개막작으로 상영할 수 있게 되어서 영화제의 위상이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또 다시 얼굴에 금칠하는 말이 나올 것 같아 류지호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한편에서 홀로 팔짱을 낀 채 서있는 김우혁 감독을 발견했다.

이전 삶에서 인연이 없었다.

이번에서는 국내 시상식에서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예전 어떤 감독은 베드씬을 호텔에서 미리 찍어보는 짓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자기 영화에 출연할 여배우와.”


김우혁이 류지호에게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감독은 자신의 욕망을 영화를 통해 투영하기도 하죠. 만약에 현실에서 재현한다면 사이코패스일 겁니다. 명백히 범죄죠.”

“......”

“요즘은 충무로에 그런 감독은 없을 겁니다. 아마도.”

“......”

“나는 충무로에서 조수생활을 안 해봐서 직접 보지는 못했어요. 그래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리더군요. 감독이 여자 배우에게 디렉션 준다면서 부적절한 신체 접촉을 상습적으로 한다거나 여성으로서 모멸감이 들 정도로 터치를 하는 일이 있었다고 하네요. 요즘 그랬다간 큰일 나죠. 아마 영화판에서 매장당할 겁니다.”


이전 삶에서 연출부 생활을 할 때 류지호는 영화현장에서 온갖 성희롱을 직접 보고 경험하기도 했다.

영화판에서는 여성만 성희롱의 피해자가 아니었다.

남자들도 피해자가 될 때가 있었다.


“가끔 힘없고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 없는 처지의 단역배우들이 WaW 피디들에게 힘든 걸 이야기 한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피디들이 가만히 있을 사람들이 아닌데 판이 그러니까 할 수 없지 뭐... 그런 생각을 하는가 봐요. 아참! 내 친구 중에 공다연이라고 있어요. 대학로에서 연극도 하고 가끔 뮤지컬도 하죠. 어느 날 술에 취해 전화를 해서는 울고불고 영화판이 원래 그런 거냐고 하소연을 늘어놓더군요. 수많은 단역배우 중에 한 명일 뿐이었으니까 기억 못할 수도 있으시겠지만....”


공다연은 절대 그런 일을 겪고 가만있을 성격이 아니다.

감독의 사타구니를 시원하게 차버려야 그녀답다고나 할까.

어쨌든 파티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최근 충무로에 떠돌고 있는 여배우에 대한 김우혁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류지호는 경고를 하고 있었다.


“어떤 비평가는 감독 내면의 드러나지 않는 가치관이 영화를 통해 발현되기도 한다고 말하죠. 난 생각이 달라요. 작가나 감독이 영화를 통해 묘사하는 것은 세상과 사회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과 사유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내 안에 <The Killing Road>의 밴 사이퍼 같은 악마적인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다면 많은 문제를 일으켰겠지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김우혁의 입이 열였다.


“모르죠.... 실체를 알기 전에는 누구도 그 사람의 진정한 모습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하. 그럴 수도....”


짐짓 유쾌하게 웃는 류지호를 향해 김우혁이 억지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를 싫어하는 몇 사람이 씹고 다니면 질투나 뭐 그런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이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면 문제가 있겠지요. 감독 그게 특별한 감투도 아닌데 왜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할까요? 나는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감독이 무명 여배우 희롱하는 사람이라고 봐요. 오죽 못 났으면 그럴까 안쓰럽기까지 하죠.”

“아, 예. 제가 화장실을 좀.....”


김우혁이 더는 듣기 싫다는 듯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할리우드에 어떤 프로듀서가 있는데 참 아랫도리 간수를 못해요. 충분히 잘 나갈 수 있는 사람인데 나하고 조금 문제가 있어서 요즘 B급 영화판을 전전하고 있다네요.”

"감독님... 제 영화가 거칠다고 해서 실제 제 인격도 그럴 것이라 편견을 갖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설마 감독님 쯤 되시는 분이 충무로에서 도는 뒷담화를 믿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류지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충무로의 성희롱 같은 가십보다는 한국영화 시장의 독과점 현상이 심각하다고 봅니다. 몇몇 영화가 시장을 독식하면서 제 영화처럼 작은 영화들은 살 길이 막막해졌지요."


꾸벅.


김우혁이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자리를 떴다.

충무로에서 떠도는 소문의 반만 믿으라는 말이 있다.

다 믿어버렸다가는 바보 되기 십상이니까.

그런데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보통 근거 없는 소문이란 없는 법이다.


“.....!”


류지호의 경험에 의하면 착하고 선량하며 우직한 감독이 성공하는 확률보다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가식적인 사람들이 좀 더 성공 확률이 높았다.

할리우드도 마찬가지다.

영화판에는 누군가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교묘한 말과 아름답게 꾸민 얼굴색을 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


‘영화판만 그럴까.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


갑자기 클럽의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영화진흥위원장이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자 갑자기 댄스홀로 변했다.


휘이익!

짝짝!


WaW 피디들이 춤판에 합류했다.

송라원을 비롯해 여배우들까지 가세했다.

밤 10시에 시작된 이날 리셉션은 새벽 1시까지 예정돼 있었지만, 열기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새벽 2시를 넘겨 겨우 끝마쳤다.

그럴 정도로 영화제 기간 동안 한국영화가 거둔 여러 성과들에 모두가 신명이 났다.


❉ ❉ ❉


한국영화와 베를린영화제와의 인연은 196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강대진 감독의 <마부>가 특별은곰상을 수상했다.

1994년에는 <화엄경>이 8대 본상 중 하나인 은곰상 아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했다.

베를린영화제 8대 본상은 최고 영예인 황금공상부터 은곰상 부분의 감독상, 남자연기자상,

여자연기자상, 심사위원대상, 예술공헌상, 각본상,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일컫는다.

암튼 한국영화는 지난 1961년 이후로 7편의 본선 경쟁작을 배출했다.

제52회 베를린영화제 폐막일이 가까워지면서 최우수작품상이라고 할 수 있는 황금곰상의 주인공을 점치느라 분주했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24편의 경쟁작 중에서 압도할 만한 수작이 없어서 여러 작품이 8대 상을 나눠먹... 골고루 가져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 영화제 안팎의 중론이에요.”


영화제 기간 내내 리셉션과 파티를 열심히 돌아다니며 인맥을 쌓은 전하영이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 류지호에게 영화제 분위기를 전했다.


“911테러로 인해서 시의성 있는 사회참여적 작품이 유리할 겁니다.”

“<블러디 선데이>가 유력하다고 보시는 거예요?”

“아마도....”

“<복수의 꽃> 시사회 반응도 폭발적이었다구요.”

“원래 영화제 월드 프리미어가 다 그렇잖아요.”

“그래도 기립박수가 15분이 넘은 것은 우리 영화밖에 없었어요.”

“그거야 나와 배우들이 극장에서 뭉그적거려서 그렇죠.”


Eye-MAX 상영관이라 극장을 빨리 비워줄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류지호와 배우들은 기립박수를 충분히 즐기고 극장을 나섰다.

그로인해 영화를 관람한 이들이 무려 15분 동안 기립박수를 쳤다.


“시대극보다는 현대사의 비극을 다룬 작품들이 유리할 것 같다네요.”

“누구한테 들었데요?”

“알버트 마샬.”

“.....음.”

“유럽의 국제영화제들이 거장에 대해서 보여준 경의를 감안한다면 <아멘>(그리스), <안전한 행동>(프랑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일본)도 최소한 은곰상 수상권에 들어갈 겁니다.”

“당연히 자국 영화 4편도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누릴 것이고요?”


신임 집행위원장이 유럽영화 편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아시아영화 수상은 물 건너가는 건가.....?”

“모르죠. <복꽃>과 <나쁜남자>가 영화제 후반에 다크호스로 평가받긴 했으니까.”


현지 유력 매체들은 두 영화 가운데 한 편은 은곰상 가운데 한 개 부문은 가져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특히 <복수의 꽃>은 8대 부문 가운데서도 주요 부문 수상이 높게 점쳐지고 있었다.


“암튼, 일단 집으로 돌아가게 짐이나 쌉시다.”


그런데.

제52회 베를린영화제 폐막식이 열리기 5시간 전에 <복수의 꽃> 관계자들이 묵고 있는 Pritzkers Hotel로 긴급하게 연락이 왔다.

<복수의 꽃>팀의 폐막식 참석을 요청하는 연락이었다.


“보통 폐막식에 참석해 달라는 것은 수상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거잖아요!”

“유명인사인 감독님이 폐막식에 참석해 TV중계 화면에 잡히는 것을 원할 지도 모르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복수의 꽃>은 두 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하나는 8대 본상에 해당하는 알프레드 바우어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8대 상에 비할 수 없지만 주목할 만한 신인에게 주는 뉴탤런트 여자배우상이다.

은곰상 부문의 알프레드 바우어상은 혁신적인 영화에 주는 상이다.

심사위원들은 <복수의 꽃>이 과거 70mm 영화의 미학을 계승·발전시킨 것을 높이 사는 한편으로 플롯과 서사의 단순함을 압도적인 비주얼로 보완했다면 시상 이유를 밝혔다.

뉴탤런트 여자연기상은 신인여우상 정도에 해당된다.

<복수의 꽃>에서 열연을 펼친 송라원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많은 분들이 영화를 만드는 도구에 지나치게 집착하다고 지적하십니다. 타당한 지적입니다. 영화가 예술이 되는 지점은 관객과 만났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라는 예술은 거대한 스크린이 펼쳐진 어두운 공간에서 관객 개인이 아닌 여러 사람과 함께 체험을 공유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두 시간의 영화를 체험하는 관객 한 분이라도 더 만족감을 선사하고 싶습니다. 물론 진정한 예술가로서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수상이 더더욱 기쁘고 심사위원단 여러분께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무엇보다 오랜 친구들과 한국에서 영화를 작업할 수 있어 너무나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이곳에 오지 못한 스태프들과 하루 빨리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류지호는 안티들의 공격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수상소감으로 대신했다.

안티들에게는 그저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뉴탤런트 상을 수상한 송라원이 수상소감을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누군가에게는 이 영화가 가슴에 깊은 울림을 줄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저는 자랑스럽습니다. 오늘의 이 기쁨은 모두 류지호 감독님 덕분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류지호는 송라원이 인터뷰 울렁증이 있다는 것을 베를린에 와서야 알게 됐다.

다행히 시상식에서 질질 짜기는 했어도 울렁증으로 허둥대지는 않았다.


‘고 놈 참... 종잡을 수 없네.....’


한국으로 돌아가는 즉시 송라원에게 인터뷰 스킬 훈련을 시키라고 매니지먼트 CHAN에 요청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폐막식을 끝으로 베를린영화제도 마무리됐다.

24편의 작품이 경합을 벌인 경쟁부문은 예상보다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계 각국의 평론가와 영화제 관계자, 기자들의 논평을 압축하면 대략 두 가지다.


- 화제작은 있어도 문제작은 없었다.

- 좋은 영화는 여럿 보이지만 아주 좋은 영화는 찾기 어렵다.


경쟁작의 대중성 그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경쟁작 중 상영 뒤 이런저런 이유로 여러 사람들의 입을 오르락내리락했던 작품은 <복수의 꽃>, <나쁜남자>, <블러디 선데이> 정도였다.

또 <로얄 테넌바움> <몬스터즈 볼> 같은 미국 독립영화와 <구름 아래서> <사소한 사고> <계단 한가운데> 등은 평균 이상의 평가를 받았다.

황금곰상의 주인공 <블러디 선데이>는 북아일랜드 분쟁을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제작한 영화로 역사적 사건을 충실히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 베를린영화제가 9·11 테러에 대한 입장으로 ‘다양성에 대한 인정’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수십 년 동안 북아일랜드가 잉글랜드에 가해온 테러의 근원을 보여주는 이 영화가 황금곰상을 받은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하는 생생한 영상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당시 사건 현장에 있었던 북아일랜드 주민뿐 아니라, 가해자인 영국군의 증언도 수용해 ‘화해’의 모양새까지 갖췄다.

참고로 감독 파울 그린그래스의 다큐멘터리적인 영화 스타일은 <본 시리즈>의 쉐이키캠과 편집으로 발전해 추후 액션영화 트렌드를 만들게 된다.

화제작이 부족해 긴급하게 초청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재팬애니메이션의 다양한 기법을 사용해 소녀들의 모험과 상상력의 세계를 표현해 주목을 받았다.

은곰상의 남우주연상 부문은 <안전한 행동>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자크 감블렝이, 여우주연상은 미국 영화 <몬스터볼>에서 혼자 아들을 키우는 미망인으로 열연을 펼친 마리아 베리가 차지했다.

베를린영화제는 이념적이고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주제를 다룬 작품에 수상의 영광을 선사하는 편이다.

이번에도 예상했던 그대로 결과가 나왔다.

특히 집행위원회가 물갈이되면서 독일영화 내지 유럽영화가 주요 상을 휩쓸 것이란 전망이 현실이 됐다.

예상 외 결과라고 하면 <복수의 꽃>이 알프레드 바우어상과 뉴탤런트 상을 수상한 점이다.

독일 현지 언론에서는 <복수의 꽃>에 황금곰상까지는 주지 않더라도 은곰상의 감독상이나 심사위원 대상은 충분히 수상할 자격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렇다고 해서 알프레드 바우어상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참고로 알프레드 바우어 프리츠가 나치 활동한 사실이 드러나 2021부터 알프레드 바우어상은 폐지된다.

관객들의 인기도를 반영하는 특별은곰상에는 프랑스 뮤지컬 코미디영화 <8명의 여인>과 <복수의 꽃>이 경합을 벌인 끝에 <8명의 여인>에게 돌아갔다.

본선 경쟁 부문에 출품됐던 한국 영화 <나쁜남자>와 한일 합작 영화 <K.T>는 관객과 현지 언론의 관심을 모았으나 본상 수상에는 실패했다.

그럼에도 베를린을 떠나는 한국영화 관계자들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전반적으로 한국영화의 평가가 좋았고, 특히 필름 마켓에서 한국영화 판매 실적 기록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특히 <복수의 꽃>이 한국영화로는 최초로 세계 3대 영화제 2개 부분 석권의 기록을 세운 것에 큰 의미를 두었다.


‘이 양반들아~ <복수의 꽃>은 시작일 뿐이요.“


올해 한국 영화계에 경사들이 연이어 벌어진다.

칸영화제에서 <취화선>이, 베니스영화제에서는 <오아시스>가 감독상을 받게 된다.

특히 <오아시스>는 감독상 외에 신인여우상까지 수상하게 된다.

한국영화가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 ❉ ❉


축제가 끝나고 베를린이 일상으로 돌아갔다.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던 독일영화계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킬 소식이 독일의 대표적인 시사주간지 슈피겔에 특집 기사로 알려졌다.


[ParaMax Entertainment 독일 영화 직접 투자 감행!

최근 들어 독일영화 제작사들은 제작보다는 수입, 또는 해외 투자에 더 열을 올리고 있다. 미국영화를 수입·배급하거나 국제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것이 더 안전한 수익을 보장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제작사 사장이라는 직함은 명함에나 존재할 뿐, 증시를 통해 할리우드영화에 투자하는 데만 급급한 것이 독일 영화계 현실이다. 미국 영화인들이 독일 자본을 ‘스튜피드 저먼 머니’라고 조소하든 말든. 이렇게 당장의 이익에만 급급해 자국영화산업 발전 노력을 게을리 했던 독일 영화계는 결국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그런 상황에서 ParaMax가 독일영화에 직접 투자하겠다고 나섰다. 독일 머니도 외면하는 자국 영화에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영화투자배급사가 독일어와 독일인이 주축이 되는 영화를 투자·제작하겠다고 나선 것. 이는 JHO Company 그룹의 현지화 전략과도 일맥상통한 행보.....]


작년 한해 독일영화 점유율은 20%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마저도 흥행영화 한 편이 1,200만 명을 동원함으로써 자국영화 점유율 대부분을 채웠다.

심지어 관객 100만 명 이상 영화 세 편을 한 개의 영화사가 제작했다.

올해는 더욱 비관적일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독일영화 점유율이 10%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관객 100만 이상 동원 영화 역시 세 편도 안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성급한 감이 없지 않지만, 독일영화계의 현실이 그 만큼 비관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외국의 스튜디오가 독일영화에 투자하겠다고 나섰다.

그것도 전 세계 영화시장을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지금까지 할리우드 메이저는 시장을 잠식한 나라에서 현지화 전략을 절대 전개하지 않았다.

할리우드 영화의 점유율을 올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 않았지.

해당 국가의 경쟁력을 올려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JHO Company 계열 배급사가 전통의 영화강국 독일에 투자를 하겠다고 나섰던 것.


“황금곰상을 노린 거 아니야?”

“지호 류가 그럴 욕심이 있었다면 영화제 기간에 발표했겠지.”


ParaMax Entertainment CEO 알버트 마샬은 독일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직접 출연해 관련 내용을 확인해주었다.


“우리는 미스터 류로부터 영화제 수상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어떤 행위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베를린영화제의 공정성에 대해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오너의 영화제 수상과 우리의 비즈니스는 별개의 문제다.”


쓸데없는 구설을 피하고자 했던 발표연기였지만, 독일에서 류지호의 호감도가 조금 올라가는 효과를 봤다.

어쨌든 미국 자본의 독일영화 투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독일 영화계에서는 혼란스러웠다.

전반적으로 환영하는 입장이지만.


“어쩌다가 독일영화가 할리우드의 적선을 받을 정도가 됐나....”


자조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 ❉ ❉


<복수의 꽃> 관계자들은 이틀을 더 베를린에 머물렀다.

류지호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알버트 마샬과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독일은 영화분야에서도 저력이 있는 국가에요. 무시할 건 아니라고 봐요.”

“하지만 영화계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재 아무도 없지.”


사실 베를린학파라고 명명된 감독들은 폐쇄적인 예술가이며 작가주의 영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지지하는 독일영화 비평계는 뉴 저먼 시네마의 황금기를 그리워하는 지식교양인 그룹이었다.

독일영화 산업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고 보기 힘들었다.

얼마나 독일영화 상황이 열악하면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한 프랑스영화 <아멜리에>가 독일 자본이 대거 투입됐다는 구실로, 독일영화로 탈바꿈해 박스오피스 리스트에 올라 있을 정도다.


“<아멜리에>마저 없었다면 독일 자국영화 시장점유율은 비참했을 거야.”


유럽영화계 대부분이 그 같은 상황이다.

때문에 40%가 넘는 자국영화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는 한국영화를 유럽영화계가 주목하고 있다.

스크린쿼터 사수에 대한 한국영화인들을 지지하면서.


“3년 간 4편이에요?”


2003년 개봉하게 될 코미디 영화 <꿈의 유람선>, <바로 이 순간>, 2004년 개봉을 목표로 하는 <마르세유> 투자가 확정되었다.


“베를린학파라고 불리는 감독들의 작가주의 영화에도 투자할 계획이기에 한두 편 더 늘어날 수도 있고.”


영화산업의 저력과는 달리 독일영화시장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따라서 독일영화에 대한 직접 투자는 저작권 확보와 할리우드로 불러들일 인재 발굴 차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멀티플렉스 진출에 대한 이야기는 이번에 빠졌더군.”

“좀 더 지켜본다고 하네요. 4,000개 스크린이라는데, 포화상태라 진단하더군요.”


작년 독일에서 <JSA>와 <섬> 두 편이 개봉됐다.

멀티플렉스가 아닌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단 일주일만 상영됐다.

아직은 독일관객과의 문화적 차이를 뛰어 넘지 못하는 한계가 분명 있었다.


“<복수의 꽃>의 영화제 반응이 일반 상영까지 이어지게 되면 한국영화가 독일 멀티플렉스에 안착하는데 도움이 되겠지.”

“한 편 가지고 될 것 같진 않고, 양질의 한국영화가 꾸준히 독일에 소개되어야 하겠죠.”


90년대 트라이-스텔라는 영국과 프랑스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번 독일영화 투자를 시작으로 독일영화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게 됐다.

폴란드, 헝가리 같은 동유럽 국가로 진출하게 되면, 북유럽만 남게 된다.

물론 TV드라마 중동 강국 터키도 빼놓을 수 없고.

미국 무역통상부와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멀티플렉스와 직접 배급 위주로 시장에 접근하고 있다.

반면에 JHO Company는 안정된 자금력을 토대로 현지화 전략을 추가하고 있다.


“반 할리우드 전선의 선봉에라도 서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미국의 가치를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전 세계에 전파하는 것 따위는 관심 없어요. 어차피 미국영화로 돈을 버나 현지 국가 영화에 투자해 돈을 버나 내게는 돈을 버는 것은 똑같으니까요.”


물론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해외시장에서 할리우드 영화끼리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보다 틈새시장을 발굴하려고 한다. 그 속에서 경쟁력 있는 아이디어를 가진 감독과 배우를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길이 할리우드 경쟁력을 한 단계 끌어올려줄 것이라 믿는다.”


속내를 감추고 그럴 듯한 말로 포장해서 말하곤 하지만.


“계약도 몇 건 성사시켰다고 들었는데....?”

“연말에 발표하기로 했어요.”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자 파울 그린그래스와 <본> 시리즈 두 편에 대한 연출계약을 체결했다.

<본 아이덴티티>는 아직 개봉도 안 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후속편 감독을 벌써부터 내정했다.

매트 데이만의 경우는 계약서를 작성할 때 트릴로지 가능성에 대한 부속조항을 넣었다.


“충분히 황금곰상을 들어올릴 수도 있었는데, 아쉽지는 않나?”

“영화제에서 상을 많이 받아봐서 그런지 딱히 아쉽지는 않네요.”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려면 작품만 가지고는 안 된다.

프로모션(로비 포함)을 정말 열심히 해야 한다.

류지호는 수상을 위해 열정적으로 프로모션을 하진 않았다.

베를린영화제의 최대 수혜자는 독일영화도 유럽영화도 한국영화도 아니었다.

황금곰상을 수상한 <블러디 선데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도 아니었다.

황금곰상이라는 최고 영예는 얻어가지 못했지만, 류지호는 한국영화 최초로 국제영화제 두 개 부문 수상, Eye-MAX MPX 시스템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 유도, 한국영화 해외 판매 신기록 수립, 투자제작 현지화 시도, 유력 인사들과의 네트워킹, 전도유망한 영화감독과의 계약 등.

풍성한 성과를 거둔 류지호가 영화제 주인공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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