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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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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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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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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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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민중의 적. (7)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로케이션 촬영을 마무리했다.

세트촬영 전까지 정비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모처럼 자유시간을 갖게 된 류지호가 강남의 한 재개발 아파트 단지에 모습을 드러냈다.

각종 촬영장비들이 곳곳에 펼쳐져 있는 것을 봐서 영화 촬영장이다.

모두 4개 동으로 이루어진 재개발 아파트 단지에서 영화촬영이 한창.... 진행되고 있어야 했다.

헌데 고요하고 차분하기만 했다.

아파트 단지 중앙 공터에서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음에도.


“......?”


한편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듣기로는 폭발장면과 와이어액션 장면을 찍은 예정이라고 했다.

특수효과가 많은 장면은 준비시간도 오래 걸릴 수밖에 없으니까.

류지호가 방문한 이곳 촬영현장은 한·중·일 합작 스파이액션 영화를 찍고 있다.

한국에서는 투자·제작을 홍콩과 일본의 배우들이 출연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로 낯선 고급세단이 들어서자 스태프 한 명이 달려왔다.

차에서 내린 류지호가 달려온 여자 스태프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말 좀 물을게요.”

“어?”


여자스태프는 어쩔 줄 몰라 ‘어버버’ 거렸다.

그러더니 넙죽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류지호가 말을 잇기도 전에 사방에서 인사를 건넸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


갑자기 스태프들이 몰려와 인사를 건넸다.


“예. 반갑습니다.”


이번 삶에서는 인연이 없는 스태프들이다.

그럼에도 마치 잘 아는 사람인 것처럼 류지호를 반겼다.

이전 삶에서 함께 작품을 했던 스태프도 몇 명 보였다.


“.....?”


류지호의 시선이 분장 케이스를 정리하고 있는 여자 스태프에 고정됐다.

류지호와 눈이 마주친 여자 스태프가 엉거주춤 일어섰다.

여자스태프가 꾸벅 인사를 했다.


피식.


가볍게 목례를 하는 류지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일반인치고는 꽤나 예쁜 얼굴이다.

키도 큰 편이라서 팔다리가 길쭉길쭉하고 스타일도 세련됐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한번쯤 돌아볼 만한 외모다.

전처라고 해야 할지.

이번 삶에서는 인연이라고는 한 톨 없는 여자였지만, 기억에는 전처로 뚜렷하게 남아 있는 친구다.

지금쯤 축구영화를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엉뚱한 영화를 하고 있다.


‘필모를 숨겼을 수도 있겠지.’


류지호는 조명탑차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조명 스태프들을 눈으로 훑었다.

혹시나 이전 삶에서 전처와 바람피웠던 남자가 이 작품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해서.

의미 없다.

이전 삶에서 연이 완전히 끝났다.

뒤돌아 볼 필요가 없다.

좋지 않은 인연이었다.

그렇다고 해코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선의를 베풀 마음은 더더욱 없었고.

그저 생판 모른 채로 살아가면 그 뿐이겠지.


“수고가 많으십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 하세요.”


이 현장에 있는 스태프 대부분은 류지호도 잘 모르는 이들이다.

그럼에도 다들 선망하는 아이돌스타를 마주한 팬처럼 굴었다.

가까이 다가서지는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어쩔 줄 몰라 해바라기처럼 뜨거운 시선을 던졌다.

사실 젊은 영화인들에게 류지호는 스티븐 아들러 감독과 동급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지고 있다.

현역 할리우드 감독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메이저 스튜디오 오너에다가 아카데미 시상대까지 섰던 유일한 한국인이니까.

영화인들에게 억만장자 같은 타이틀은 중요하지 않았다.

꿈의 공장, 전 세계 영화 산업의 중심지에서 당당하게 활약하는 유일한 한국인이다.

선망을 넘어 경외의 대상이 류지호다.

류지호가 한국 영화계에서 상대하는 인물들이 충무로 대표하는 이들이다 보니 충무로 바닥의 생생한 민심을 잘 몰랐다.


“그런데 진짜 우리 촬영장에는 어쩐 일이시래?”

“제작부, 혹시 오늘 회식 있어?”

“갑자기 방문하신 거라서.... 저도 잘.....”


제작부도 알 리가 없다.

사전에 류지호가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도 없고.

류지호의 개인적인 용무 때문에 이 촬영장을 방문했다.


“배우들은 어디에서 대기하죠?”


똘똘한 인상의 남자가 스태프를 대표해 나섰다.


“배우 누구 말씀하시는 건지....?”

“재클린.”

“아! 우첸리안씨 만나러 오셨구나.”


한때 남자들의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킨 청순가련의 대명사로 특히 <천장지구>라는 홍콩 영화 전설의 느와르 로맨스 히로인으로 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여배우가 우첸리안이다.

영어이름은 재클린 우.


“저를 따라 오세요.”


자신을 조감독이라 소개한 똘똘하게 생긴 청년이 류지호를 안내했다.

조감독이 촬영지가 아니라 아파트 단지 밖에 세워져 있는 대형 밴을 가리켰다.


“저기 저 차입니다.”

“안내 고마워요.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촬영 준비 하세요.”

“...아, ...네.”


조감독이 얼버무리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그리고 옅은 한숨을 내쉬며 터벅터벅 걸어갔다.

조감독도 찍고 싶었다.

누구보다 격렬하게.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 문제다.


톡톡.


류지호가 밴의 창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뒷좌석 창문이 아니라 운전석 창문이 내려왔다.

대뜸 중국말이 들려왔다.

류지호는 영어로 용건을 말했다.


“지호 류라고 합니다. 재클린과 약속이 되어있습니다.”


덜컹!


뒷문이 열렸다.

서핑복처럼 몸에 쫙 달라붙는 가죽 옷을 입은 166Cm의 여배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영화 촬영용 의상을 입은 재클린 우다.


“와우! Jay?”

“오랜만이야. 재키.”


두 사람이 가볍게 포옹하며 인사를 나눴다.

두 사람은 구면이다.

류지호의 아시아 순방길에 홍콩의 영화계 인사가 주최한 파티에서 안면을 텄다.

며칠 전에 영화 촬영을 위해 한국에 들어온 재클린 우는 마침 한국에 머물며 영화를 찍고 있는 류지호에게 연락을 했다.

한국 영화계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류지호가 유일하다시피 했다.

<민중의 적> 촬영으로 한창 정신이 없어 만나지 못하다가, 마침 브레이크타임에 시간을 내서 인사나 나눌 겸 촬영현장을 찾았다.


“점심 같이 먹을 수 있어?”

“물론! 그런데.....”


재클린 우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만들어지며 못 마땅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때, 아파트 입구 방향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독님!”


류지호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른 사람을 쳐다봤다.

마흔 초중반의 남자와 가온그룹 영화사업 부문의 2인자라고 할 수 있는 주영호 본부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오고 있었다.

WaW가 투자·제작·배급하 모든 한국영화가 주영호 본부장의 손을 거친다.

그런 인물이 남의 촬영장에 와 있었다.


“주 본부장이 어쩐 일이세요?”

“모르고 오셨군요?”

“....뭘요?”

“우리가 <엔젤>의 배급사입니다. 투자도 조금 했고요.”

“그랬어요?”


주영호 본부장이 함께 온 남자를 돌아봤다.


“이 감독 인사드리세요.”


남자가 허리를 납작 접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의장님! <엔젤>을 연출하고 있는 이승주 감독입니다.”

“아, 네. 류지홉니다.”


류지호가 내민 손을 공손하게 붙잡은 이승주 감독이 무척 황송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런 모습이 보기가 싫은 모양이다.

재클린 우는 이승주 감독과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어딘지 냉랭한 분위기까지 감돌았다.

재클린 우를 슬쩍 의식한 류지호가 입을 열었다.


“실례되는 질문인 줄은 알지만, 혹시 재클린의 오전 촬영분량이 남아 있습니까?”

이승주 감독이 머뭇거렸다.


“미안합니다.”


재빨리 사과한 류지호가 재클린 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재클린 점심시간까지 근처 카페테리아에서 기다릴 게.”

“아닙니다! 점심 먹고 촬영해도 됩니다.”

“촬영이 먼저죠. 사전에 양해도 구하지 않고....”

“괜찮습니다. 어차피... 가시죠! 요 근처에 조용한 커피숍이 있습니다.”


이승주 감독은 촬영은 뒷전이었다.

본인까지 함께 가려고 했다.

주영호 본부장이 나섰다.


“이 감독은 얼른 가서 촬영 해. 한 커트도 찍지 못했잖아.”

“어차피 한 시간만 있으면 점심시간이잖습니까. 스태프들 더러 좀 더 쉬라고 하지요 뭐.”


류지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


주영호 본부장의 표정 역시 차갑게 변했다.


“류 감독님하고 재클린씨하고 두 분이 식사하라고 하고 자네는 나와 촬영장으로 돌아가자고.”


이승주 감독이 주영호 본부장에게 이끌려 아파트 단지로 향했다.


“조감독!”


류지호를 안내했던 청년이 뛰어왔다.


“오셨습니까!”

“촬영 준비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야! 이 새끼야! 지금까지 뭐 했어?”

“뭐부터 찍으실 줄 알아야 준비를....”

“하~ 이런 돌대가리 새끼를 봤나. 이런 걸 조감독이라고 어디서 데리고 왔는지... 날샌 새끼.....”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말이 있다.

<엔젤> 촬영장에서 감독과 조감독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습이 그랬다.

이승주 감독은 최근 충무로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유형의 감독이었다.

툭하면 늦게 촬영현장에 나타난다.

촬영 전날 과음은 기본이다.

콘티도 없이 그때그때 기분 내키는 대로 찍는다.

스태프와 의사소통, 그런 거 모른다.

‘레디 고‘만 열심히 외친다.

사실 큐사인도 조감독이 할 때가 많다.

콘티가 없으니 촬영감독이 알아서 현장에서 동선을 짜기 일쑤다.

충무로에 세대교체 바람이 불면서 퇴출 일순위가 된 감독 성향이다.

새벽 6시에 집합한 스태프는 감독이 나타날 때까지 목 빠져라 기다리길 어언 20회 차.

전날 감독이 술을 마신 사실을 알게 되면 조감독이 요령껏 집합시간을 몇 시간 늦추기도 했다.

그러면 귀신 같이 제 시간에 나타나 폭언과 갑질을 시전했다.

전형적인 ‘감독놀이‘가 펼쳐지고 있는 촬영현장이 <엔젤>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WaW 엔터테인먼트가 투자·배급하는 영화이면서 홍콩, 일본과 합작영화에서.


✻ ✻ ✻


손님이 한 명도 없는 근처 카페다.

류지호와 재클린 우는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눴다.

두 사람은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

카페 주인은 무슨 이야기가 오고가는지 알지 못했다.


“LA에서는 주로 서핑을 한다며?”

“높은 파도를 탈 정도는 아니고. 적당히 즐기는 정도는 돼.”

“난 스쿠버다이빙을 하고 있어.”


바다 혹은 강에서 하는 취미생활을 많은 정신과의사들이 배우들에게 권장한다.

바다에서 하는 휴식은 육체적인 피로 회복은 물론이고 정신건강에도 해양치유가 도움이 된다.

아름다운 해양기후와 경관은 수면의 질을 높이고, 혈압(심박수)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다.

해양치유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서구권에서는 각광받는 산업이다.


“대만 근처 바다를 탐사하면서 수중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재미에 푹 빠져 있어.”

“대만 근처에서만?”

“현재는 그래. 나중에는 전 세계 바다를 다 탐험해 보려구.”

“일은 안 하고?”

“틈만 나면 배낭 하나 메고 유럽도 가고, 캐나다도 누비곤 했는데, 뭘.”

“회사에서 허락을 해줘?”


재클린 우는 대답을 삼갔다.

홍콩의 연예매니지먼트의 90%는 삼합회가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클린 우가 소속된 기획사 역시 삼합회의 사업체 중 하나였다.

홍콩의 영화제작사는 산업자본이나 금융투자자본이 들어오면서 삼합회의 영향력이 다소 희미해지긴 했지만, 매니지먼트 업계는 여전히 삼합회가 장악하고 있다.

홍콩과 중국 연예계에서 심심하면 섹스·누드 스캔들이 터진다.

그 대부분이 삼합회가 의도적으로 터트린 사건들이다.

삼합회는 뜨겠다 싶은 혹은 떴다 싶은 연예인들에 대해서 무조건 누드사진 찍어놓는다.

성상납 강요는 기본이다.

만약 거부한다?

어느 날 갑자기 조용히 연예계에서 사라진다.

실종되거나 중국 어딘가로 팔려간다.

최근 한국영화에 장바이쯔와 장쯔이가 출연해 화제가 됐다.

재클린 우는 그 둘보다 훨씬 앞 서 1996년 한국영화에 처음 출연한 바 있다.

이번 영화가 두 번째다.

장바이쯔의 아버지가 삼합회와 관련 있다는 사실은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장바이쯔가 한국 영화제작 상황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쳐서 영화 촬영팀이 겁을 집어먹었다는 우스갯소리도 나돌았다.


‘뭐 성과 관련된 건 세계 어디 영화판이나 자유로울 수 없지.’


충무로에서 조직폭력배 세력이 많이 빠져나간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연예계 종사자 행세하는 조폭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성상납.

업계에 있다 보면 모를 수가 없다.

그 정도로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

알고도 일상인 것처럼 무덤덤해진 것도 사실이고.

조폭과 성상납.

나만 그런 문제에서 깨끗하다고 해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모른 척 가만히 있는 것은 방조하는 것과 같으니까.


“미스터 박이 식사에 나를 초대했어.”

“박건호 대표님?”

“응. 서울에서 촬영 모두 마치고, OST 녹음까지 끝내놓고 함께 식사하자고 하더라.”

“혹시 회사 대표도 함께 왔어?”

“응.”


명목상 재클린 우가 소속된 회사의 대표는 여성이다.

실제로는 삼합회 존재를 가려주는 바지사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홍콩과 싱가포르 연예계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여장부였다.

삼합회 외에 싱가포르 화교 권력자들과 화려한 인맥을 자랑하고 있었고.

<엔젤>에도 일부 투자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Jay도 함께 볼 수 있는 거야?”

“글쎄. 스튜디오에서 촬영을 하고 있을 것 같긴 한데.”

“아쉽네....“

“혹시 할리우드에서는 제의가 없어?”

“있기는 한데.... 난 미국까지 가서 영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홍콩영화도... 조금 지쳤고.”


이 시기가 지나고 얼마 안 가 재클린이 출연한 영화나 드라마를 볼 수 없게 된다.

류지호가 기억하기로 별의 별 루머가 떠돌았던 것 같았다.

영화출연이나 가수활동은 전혀 하지 않고, 스쿠버다이빙에만 빠져 지냈다고 했던 것 같았다.

실제 재클린 우는 수년 동안 쓸데없이 수중 다큐를 몇 년 동안 찍는다거나 해외여행을 다니게 된다.

일련의 행동은 삼합회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다.


“나중에 영화제에서 다시 봐도 되고, 혹시나 캘리포니아에 놀러오면 연락해. 미국에서 사귄 친구들 소개시켜 줄게.”

“스캔들 터질 걸?”


류지호가 양 팔을 활짝 벌리고는 동시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상관없다는 투다.

관여하는 영화마다 터지는 염문설, 심지어 게이설까지 지긋지긋하다 못해 해탈의 경지에 이른 류지호다.

<불초자 열혈남아>라는 요상한 느와르 로맨스 영화가 있었다.

액션영화인 줄 알고 비디오를 빌렸다가 되도 않은 멜로영화여서 화가 났던 영화다.

오로지 여주인공 재클린 우를 보는 재미로 끝까지 다 본 영화였다.

영화는 형편없었지만, 배우들이 연기로 멱살 잡고 끌고 갔던 영화로 기억했다.

또 한편의 재클린 우의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화가 있다.

바로 레슬리 청과 찍은 <야반가성>이다.

한때 홍콩영화 여배우 중에서 마거릿 청과 함께 유일하게 좋아했던 재클린 우다.


“난 그냥 혼자 돌아다니는 게 좋아. 파파라치라면 아주 지긋지긋해.”

“걱정 마. 미국에선 따돌릴 방법이 있으니까.”

“유럽이 아닌 나라는 좀 그런데....”


파파라치도 문제지만, 삼합회의 감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류지호 역시 저간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촬영은 얼마 남았어?”

“나도 몰라.”


재클린 우는 지금 찍고 있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무척 시큰둥했다.

건성으로 영화에 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홍콩으로 돌아가기 전에 내 촬영장에 한 번 놀러와.”

“그래도 돼?”

“내 회사와 거래하는 케이터링 서비스가 꽤 괜찮아.”

“알겠어.”


이후로 영화 이야기보다는 서로의 취미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나눴다.

점심까지 함께 먹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재클린 우를 만나고 온 후, 주영호 본부장으로부터 <엔젤>과 관련한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영화 <엔젤>은 최첨단 인공위성 제작프로젝트인 ‘엔젤’을 둘러싸고 국제 산업스파이와 국정원 요원의 치열한 두뇌싸움을 그리는 영화다.

재클린 우는 작전현장에 외롭게 노출돼 있는 국정원 일반요원을 보호하는 경호팀의 팀장역을 맡았다.


“자금을 전부 한국에서 조달했다면서 한국홍콩일본 합작이라구요?”


어이없어 하는 류지호에게 주영호 본부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영화 홍보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외국인 한 둘 출연해도 합작이라고 선전하죠. <엔젤>에 홍콩과 일본 배우가 중요 배역을 맡았습니다.”

“한국 배우들은 죄다 인지도가 없는 배우들이네요?”

“감독이 오디션을 보고 뽑았다는데, 기준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재클린 우는 최근 몇 년 사이 <쉬리>, <JSA>, <퇴마기록>, <풍운아> 등 전성기 시절의 홍콩영화를 능가하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한국영화에 관심이 생겨 출연을 결심했다고 이야기했다.

<엔젤>도 웰메이드 첩보액션 영화를 표방한데다가 배급을 WaW가 한다는 점이 영화 퀄리티에 대한 보증이 되어주었다.


“정확한 속내는 어떤지 알 수 있겠습니까마는..... 최근 들리는 이야기로는 재클린 우가 매니지먼트 회사와 계약기간이 끝나기만 바라고 있다고 합니다.”

“할리우드에서도 러브콜을 받고 있다고 하던대요?”

“매니지먼트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외부에서 알 순 없지만, 언젠가부터 배우 경력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2년짜리 수중 다큐를 찍고 있지 않나, 매니지먼트사가 영향력을 끼칠 수 없는 한국에서 영화를 찍는 것에 만족하고 있고.”

“태업인가요?”

“감독이 게을러서 그렇지 재클린은 촬영에 성실히 임하고 있답니다.”


재클린 우는 매니지먼트와의 계약기간이 만료될 때까지 지금 찍고 있는 한국영화를 끌고 싶어했다.


실제로 이런저런 이유들로 촬영이 지연되기 일쑤였다.

그런 밀약이라도 제작사와 맺은 것인지.

감독의 게으름 때문인지.

돌아가는 상황은 재클린 우의 바람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정리하자면, <엔젤>은 개판 오분 전이란 말이네요?”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부장이 직접 <엔젤> 현장까지 나와 보는 거구요?”

“......”

“얼마나 진척됐어요?”

“20% 조금 넘은 것으로 압니다.”

“몇 주 동안이요?”

“올 3월에 크랭크인 했습니다.”


12월에 접어들었으니 9개 월 동안 놀았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혹시 다국적 배우들 스케줄 때문이에요?”

“재클린 우 스케줄을 맞추려고 고생 꽤나 하긴 했습니다만, 그런 것치고는 말이 되지 않죠.”


류지호가 직접 촬영현장에서 확인한 것처럼 감독이 지독하게 게으름뱅이였다.

그런데다 촬영 전날 늦게까지 술을 먹는 일이 자주 있단다.

스트레스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못 잔다나.

당연히 촬영 당일에 늦게 현장에 나타나기 일쑤였다.

배우·스태프들과 계약한 기간이 훌쩍 넘어간 것은 당연지사.

결국 스태프들이 재계약을 요구했다.


“지난 달 간신히 전 스태프들과 재계약이 이루어져 촬영을 재개할 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당장 투자금 회수하고 배급계약도 해지하세요.”

“그것이...”


본부장이 난감한 듯 말끝을 흐렸다.


“투자금이 많이 들어갔습니까?”

“대략 5억 투자했습니다.”

“전체 버젯이 어떻게 되는데요?”

“40억입니다. 문제는 이놈에 주공필름이 그 돈의 상당부분을 이미 써버렸다는 겁니다.”

“20% 찍었다면서 예산을 벌써 다 썼다고요?”

“그렇습니다.”


류지호가 폭발할 것 같은 화를 간신히 눌렀다.


“우리 WaW가 일을 이렇게 하는 영화사였던가요?”

“후우. 그게 조금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다.”

“삼합회라도 엮여있어요?”

“설령 삼합회가 껴있어도 WaW와는 상관없습니다. 다만 제작지원을 국정원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요? 요즘 공무원들 영화 협조 잘 해주잖아요.”

“국정원요원을 멋지게 보여주는 영화라서.... 그쪽에서 기대가 무척 큽니다.”

“그쪽에서 제작비라도 줬대요?”

“자문과 촬영장소 섭외, 해외 로케이션 서포트 등 전폭적으로 밀어주고 있습니다.”

“지랄!”


류지호의 입장에서는 그런 말이 절로 나올 만 했다.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영화사가 국정원 눈치를 본단 말인가.

국정원 홍보 영화도 아니고.


“그래서 WaW가 빠지기 힘들다?”

“저희 판단으로는 죽으나 사나 촬영을 끝내서 극장에 걸어야 단 돈 얼마라도 건지고, 관련된 사람들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마무리될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그냥 5억 포기하면요?”

“작은 돈이 아닙니다. <집으로> 한 편을 제작할 수 있는 금액입니다.”

“감독 교체는요?”

“책을 감독이 썼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감독 역량이 떨어지는 걸 확인했으면 다른 감독으로 바꿔서 영화를 살려야지요. 혹시 감독이 제작도 같이해요?”

“아닙니다.”

“아휴. 먹튀 감독이네요.”

“예?”

“감독 재주는 쥐뿔도 없으면서 감독 욕심내서 영화 디벨롭 하다가 엎어지면 계약금 챙기고 다른 회사로 옮기는 감독이요.”

“....!”

“감독 이름이....?”

“이승주 감독입니다.”

“WaW로 들어오라고 하세요.”

“직접 대화해보시게요?”

“누군들 악당이 되고 싶겠어요?”

“그냥 제가 좋은 말로....”

“아니에요. 내가 직접 감독하고 담판 질게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굳이 감독님이.....”

“박 대표님이 충무로 사람들하고 얼굴 붉히는 건 좋지 않아요.”


일부러 악역을 자처할 사람은 없다.

권력이 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난 참 운이 좋아요! 강 순경님 같이 순진한 경찰을 만나서~]

[넌 진짜 운 존나게 나빠. 나같이 조옷 같은 민주경찰 만나서.....]

[조옷 까는 소리 하지 마세요~]


이틀 후, 영화 <엔젤> 감독 이승주가 WaW 엔터테인먼트를 찾아왔다.

류지호는 말없이 WaW가 오래전부터 사용하고 있는 표준계약서를 내밀었다.

감독 의무 항목을 손가락을 콕 찍으며 설명했다.


“5조 (1)항에 의거해 제작사가 정하고 감독이 동의한 예산과 일정에 따라 촬영 및 그 전후 단계에 걸쳐 한국영화계에서 관례적으로 행하는 모든 용역을 성실히 제공해야 한다.”


이승주 감독은 영문을 몰라 류지호를 바라보기만 했다.


작가의말

예전 홍콩영화 보면 시리즈가 아닌데도 수입사가 2편 3편을 막 가져다 붙이곤 했습니다. 불초자 열혈남아 역시 원제는 도시정연으로 왕가위의 열혈남아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참 비디오 수입업자들이란. 열혈남아 아류작 같지만 나름 볼만한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개인적으로 오천련보다는 여명 때문에 본 것이지만...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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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

  • 작성자
    Lv.99 Under85
    작성일
    23.04.05 12:22
    No. 1

    제가 전작에도 덧글을 달았을수도 있는데 오천련 한재석이랑 찍은 언픽스 내한 행사때 대전행사에서 실물을 봤습니다.
    예쁘기도 했지만 얼굴이 정말 작더라구요. 씨디로 얼굴을 가린다라는 의미를 실제로 이해했던 날입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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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99 OLDBOY
    작성일
    23.04.05 16:42
    No. 2

    잘 보고 있어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하얀유니콘
    작성일
    23.04.05 17:48
    No. 3

    허리우드도 홍콩도 복사 위작 들 때문에
    골치 아프죠.
    주성치가 각본 없이 영화를 찍는 이유가
    각본을 만들경우 일주일 안에 똑같은 영화
    3~4편이 만들어져 먼저 개봉된다고 하더군요.
    어버스 .아마겟돈도 본작 보다 위작들이
    먼자 개봉된 경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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