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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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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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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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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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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민중의 적. (8)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감독은 촬영 개시부터 종료까지 정해진 촬영 일정에 따라 촬영 장소에 출석해 배우 및 스태프에게 연출방향을 지시하는 등 촬영과 관련된 용역을 제공해야 한다. 이때 감독은 제 5조 (1)항에서 정한 예산과 일정을 준수해야 한다. 당사자 일방이 고의 또는 과실로 본 계약상 채무를 이행하지 않은 경우, 상대방은 구체적인 채무불이행 사실과 경위 그리고 기한을 적시한 서류를 내용증명 우편으로 발송해 그 이행을 최고하고, 그 기한 내에 이행이 없을 때는 본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이승주 감독은 계속해서 멀뚱히 류지호를 쳐다보기만 했다.

게으른데다 눈치까지 둔했다.


“감독의 귀책사유로 본 조 (4)항에 따라 본 계약이 해지되는 경우 감독은 본 계약 해지일로부터 삼 개월 이내에 제작사로부터 지급받은 연출료를 모두 반환해야 하고, 제작사는 나머지 연출료의 지급 의무를 면한다. 아 또 그 밑으로 쭈욱~ 내려가 보면 고의 또는 과실로 본 계약을 위반한 자는 계약 위반으로 인해 상대방에게 발생한 일체의 재산적,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 라고 되어 있네요.”

“혹시 지금 저를 자르겠다고 하시는.... 에이, 아니죠?”

“해고가 아닙니다.”


그러면 그렇지.


“계.약.파.기입니다.”


이승주 감독이 혹시나 잘못 들었나 싶어 류지호를 빤히 쳐다봤다.


“정한 예산과 일정을 준수해야 한다. 이 감독은 성실의무를 위반했습니다. 과실도 아니고 고의적으로. 안 그렇습니까?”

“......!”


잠시 당황스런 표정을 짓던 이승주 감독이 버럭 소리쳤다.


“누구 맘대로!”

“누구 마음이 아니라, 계약서에 따른 조치입니다.”

“제가 뭘 잘 못했다는 겁니까!”

“9개월 간 전체 분량의 20% 소화가 말이 됩니까? 20회를 촬영했는데, 콜타임에 제 때 현장에 나온 것이 손을 꼽을 정도라면서요?”

“....우리가 일반 회사원도 아니고. 출퇴근 시간이 정해진 것은 아니잖습니까.”

“아무렇게나 일을 할 것이라면 전체, 월간, 주간, 일일촬영계획은 왜 세웁니까? 그에 따른 예산편성은요?”

“메이저 영화사라고 이래도 되는 겁니까?”

“그래도 됩니다. 이 감독이 계약서에 서명을 했기 때문에.”

“....이익!”

“광고 감독을 좀 해봤다구요? 그때도 지금처럼 일했습니까?”

“.....”

“자신 없으면 블록버스터 건드리지 말았어야죠.”


겨우 광고 감독 주제에 블록버스터를 찍는 것이 가당키나 하냐고 꼬집는 것은 아니다.

할리우드의 스콧 형제는 광고감독 출신이지만 명감독으로 이름이 높았으니까.

다만 능력도 없는 이가 분수를 모른다고 대놓고 면박을 준 것이다.


“....!”


류지호의 면박에 이승주 감독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냥 책만 넘겼어야 했습니다.”

“......!”

“남의 돈 가지고 영화로 딸딸이 칠 수 있는 감독... 충무로에서 세 명도 안 됩니다.”


류지호의 직설적인 말에 이승주 감독이 황당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설마 류지호의 입에서 상스러운 표현이 나올 줄 몰랐으니까.

그래서 더 충격적이었다.


“내용증명이 갈 겁니다. 오늘은 얼굴보고 계약 파기에 대해 직접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만나자고 했습니다. 정 없이 곧바로 내용증명만 보낼 순 없으니까.”

“흥! 마음대로 될 것 같습니까?”

“변호사를 선임하세요. 법원에 이의신청도 하고.”

“보자보자 하니까, 사람을 뭐로 보고.... WaW가 메이저면 답니까!”

“감독입네 폼 잡지 말고 성실하게 사세요. 대한민국의 감독지망생이 수천, 수만 명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연출 기회인데 게으릅니까? 당신 같은 감독들 때문에 한국영화가 도매급으로 싸구려 취급받는 겁니다.”


류지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본인의 권리는 변호사를 통해 관철하세요. 이쪽에서도 적극적으로 대응할 테니까.”


류지호가 축객령을 내렸다.


썅!


이승주 감독이 욕설을 씹어뱉으며 WaW 엔터테인먼트를 떠났다.

진짜 강자는 고의로 약자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저 무심코 움직인 것뿐인데, 약자 입장에서는 재앙으로 다가오는 것뿐.

이번 경우도 그렇다.

류지호의 말 한 마디가 영화업계의 질서를 바꿀 수도 있기에.


똑똑.


전하영 피디가 류지호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왜 직접 하셨어요. 주강필름의 사장도 있고 WaW에서 처리해도 되는데....”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겠어요?”

“그러다 진짜 지옥가시겠네.”

“죽다 살아난 놈이 지옥인들 대수겠어요?”

“뭔 소리래?”


킥킥.


웃는 류지호가 진정하길 기다렸다가 전하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베를린영화제에서 초청장이 도착했어요.”

“세 명이에요?”

“네.”

“영화제 기간 동안 딱히 바쁜 일 없는 사람들은 모두 함께 갈 수 있게 해줘요.”

“숙소는....?”

“베를린에도 JHO가 계약한 호텔이 있을 걸요? 한국에서 넘어가는 인원수가 정해지면 그쪽에 전화해서 방 배정 받으면 될 겁니다.”

“당장 프로젝트 굴리지 않고 있는 피디들 감독님 묻어서 베를린 가도 될까요?”

“얼마든지.”

“땡큐. 서얼!”


<복수의 꽃>은 기대한 대로 베를린영화제 경쟁작 부문에 초청됐다.

보통 국제영화제는 감독, 프로듀서, 배우를 위해 3~5장의 항공권과 호텔을 제공한다.

전하영 피디는 <복수의 꽃>을 핑계로 시간이 되는 WaW 임직원들을 데려가길 원했다.

휴가를 가는 것이 아니다.

후배들에게 해외 영화 관계자들과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출장비를 청구하면 회사차원에서 출장비를 지원해준다.

그럼에도 셀럽 중에 셀럽 류지호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일단 폼이 나니까.

그리고 류지호를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거물들의 안면을 익힐 수가 있다.


❉ ❉ ❉


광장은 도시 속의 개방된 장소다.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다.

고대 그리스 도시에는 아고라(agora)라고 하는 광장이 있었고, 종교·정치·사법·상업·사교 등 시민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주위에는 공공생활에 필요한 건축물들이 둘러서 있고 회의장·사원·점포·주랑 등이 차지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시민들의 휴식 장소이자 때론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중세에는 교수형이나 단두형 같은 공개처형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기도 했다.

한마디로 광장은 대표적인 공공장소다.

영화 <베테랑>에서 조태오는 명동이라는 유동인구가 많은 길 한복판에서 서도필 형사와 주먹다짐을 벌인다.

끝내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체포된다.

명동 한복판은 공공장소다.

‘공공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재벌 2세를 시민들이 자유롭게 통행하는 길거리에서 형사가 패버리고 수갑을 채우는 것으로 설정한 것은 <베테랑>의 탁월 선택이었다.

일반 범죄영화처럼 은밀한 공간에서 처리했다면 재벌 후계자라는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법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그 짜릿함은 반감됐을 수도 있다.

비록 중세시대 광장에서 단두형을 받는 결말은 아닐지라도.

<민중의 적> 오리지널 영화에서 강철중과 조규환은 어두컴컴한 한강 노들섬에서 최후의 대결을 펼쳤다.

류지호는 그 시퀀스를 영화 <베테랑>처럼 공공장소로 바꾸려고 했었다.

마치 아고라에서 민중 재판이 벌어지던 것을 암시라고 하듯이.


“죽일 놈은 죽여야지.”


강은석 감독이 한 말이다.

그는 세련되고 고급스럽지만, 온건한 류지호의 마무리를 바꾸자고 설득했다.


“진짜 조규환 같은 놈들이 세상에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 영화로라도 그런 놈들은 죽는다는 걸 보여줘야지.”


왠지 설득력이 있었다.

권선징악의 완성은 용서라고 말한다.

먹물들의 고상한 위선이 아닐까.

진정한 권선징악은 죽음을 통해 완성되는 것은 아닐까.

물론 현실에서가 아니라 창작물에 한해서다.

법치주의가 확립된 현실에서는 정의로운 폭력이란 결코 있을 수 없으니까.

그럼에도 주인공이 악당을 패 죽이는 것은 류지호가 보기에도 너무 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그게 강철중스러운 거잖아. 복잡한 생각 없이 본능적이고 남자답게 직진!”

“하하. 솔직히 설 선배의 액션연기가 영 젬병이긴 해요.”


설형기 배우는 강렬한 이미지와 달리 몸 쓰는 것에는 소질이 없었다.

액션연기에 소질이 없는 것을 확인하면서 액션 합이 덜 복잡한 스타일로 바꿨다.


“권선징악이란 메시지는 애매하고 오글거려서는 안 된다고 봐.”


강은석 감독은 <민중의 적> 엔딩에 있어서만큼은 단호했다.

강철중이 조규환을 패 죽이는 것으로 마무리하길 주장했다.


[악은 이토록 거침없이 자신의 길을 가는데 어째서 선은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가....]


<황혼>이란 드라마에서 박진이란 캐릭터가 한 유명한 대사다.

힘 있는 자가 더 큰 힘을 갖고 그걸 휘두르면 아무 탈이 없다.

어설픈 힘이 문제를 만든다.

인류 역사상 약자가 힘 있는 자를 전복시킨 예는 몇 번 없다.

그런 일이 벌어진 후로 사회가 크게 변하긴 했다.

시민혁명이나 유혈 민주화투쟁이 그런 거다.

선(善)한자는 약하면 안 된다.

강해야만 자신의 선(善)을 또 신념을 관철시킬 수 있다.

힘없는 선(善)은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죽도록 패긴 하는데, 조규환이 맞아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관객의 상상에 맡기는 걸로 하죠.”


강은석 감독의 조언을 받아들이지만, 조규환을 죽이는 것은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기로 했다.

그 결과 엔딩 시퀀스를 강은석 감독의 아이디어대로 찍었다.

다만 미장센은 훨씬 풍부해졌다.

쨍한 HMI에 의지한 밤 조명, 촌스럽게 한강변에서 되도 않는 액션을 연출했던 오리지널을 아마추어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고급지게.

두 사람은 마치 진흙탕에 빠져 살기위해 몸부림치는 것처럼 처절하게 사투를 벌인다.

4K 디지털 카메라에 담긴 소스는 포스트프로덕션에서 뉴욕 맨해튼의 야경을 방불케 하는 멋진 아파트 야경 CG가 배경에 심어져 더욱 화려한 영상을 뽐낼 예정이다.

나쁜 형사와 최악의 범죄가가 부의 상징인 한강변 초고층 아파트를 배경으로 해서 살아남는 자가 승자가 되는 최후의 대결을 벌이는 것이다.

굳이 의미를 찾을 필요까진 없다.

멋진 야경이 화면에 잡히는 것만으로 훨씬 영상미가 살아날 테니까.


[양친살해가 백년에 아무 관계두 없는 사람 재미로 죽인 죄 백년~ 민주경찰 얼굴에 칼 들이댄 죄 십오 년~ 합이 이백십오 년에 다량의 마약 소지죄 추가~ 사형!]


류지호가 작년 연출한 <복수의 꽃>은 비주얼 면에서 한국영화를 뛰어넘었다.

이번 영화도 마찬가지다.

특히 조명에 힘을 많이 주기 때문에 영화 ‘때깔’이 예사롭지 않았다.

류지호는 누구보다 진지하게 프로덕션 디자인 개념을 도입했다.

미장센에서도 탁월하다.

<민중의 적>이 유머가 양념처럼 맛있게 버무려진 액션스릴러 정도에 머물지 않고, 적절한 품격을 갖춘 사이코패스 장르영화가 될 수 있도록 자신만의 스타일을 입혔다.

그를 위해 2.35:1의 시네마스코프 화면비는 필수였다.

양옆으로 넓어진 화면을 채우기 위해 더 꼼꼼한 미술, 더 풍부한 조명이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오리지널 영화에서 촌스러운 장면을 꼽자면 한 둘이 아니겠지만, 류지호가 끔찍하게 생각하는 장면은 취조실을 묘사하는 장면들이다.


‘고전 스릴러 영화도 아니고 탑 조명이라니.....’


취조실 책상 중앙에 갓등을 설치해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오로지 중앙만을 밝게 만들어 빛과 어둠을 날카롭게 대비시키는 기법이다.

아직까지도 할리우드 느와르나 범죄스릴러 영화에서도 종종 사용되는 미장센인데, 오리지널 영화에서는 도저히 봐줄 수 없을 정도로 촌스러운데다가 상황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게 사용되었다.

따라서 류지호는 모든 취조실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로 했다.


“어쭙잖은 심리적인 조명 안 해. 렘브란트 조명 같은 거 생각도 하지 마.”


김영복 촬영감독은 취조실 장면에서 느와르 영화풍의 빛과 어둠이 날카롭게 대비되는 렘브란트 조명을 쓰려고 했다.

류지호는 레퍼런스 영상으로 <원초적 본능>의 유명한 취조실 장면을 제시했다.

어둡고 답답한 80년대 고문실 같은 취조실이 아닌, 좀 더 현대적이고 세련된 공간으로 디자인되길 원했다.

<원초적 본능> 취조실 같은 장면을 만들기 위해서는 조명이 복잡하게 설계해야 하고, 포인트 조명까지 섬세하게 디자인해야 한다.

조명팀의 아이디어만 가지고 안 된다.

프로덕션 디자인도 함께 아이디어를 짜내야 했다.


“무슨 형사가 조폭한테 날붙이 사용법을 물어?”

“실제 강력계나 형사계 형사들 사이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래.”

“그걸 조폭들이 도와준다고?”

“방법이 없잖아.”

“한국에는 CSI가 없어?”

“국과수야 있지. 미드처럼 체계가 잡혀 있진 않대. 걸음마 단계 수준이라더라.”


칼잡이 용만을 취조하던 방으로 강철중이 들어와 다짜고짜 자문을 얻는 장면이 있다.

바닥을 구르는 일선형사들은 조폭 칼잡이 전과자들에게 흉기와 자상과 관련한 범행수법 자문을 받기도 한다.

이 당시만 해도 함정수사도 비일비재했다.

강력계 형사들이 깡패보다 더 깡패처럼 행동하는 것도 사실이었고.

미국의 TV시리즈 <CSI> 때문에 한국 대중의 눈높이가 상당이 높아졌다.

현실의 한국과학수사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상황이다.

어설프게 <CSI> 따라하다가는 고증무시 밖에 안 된다.


“온 사방에 CCTV로 도배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형사들은 밤낮으로 발로 뛰며 수사를 해야 한다네. 한국영화에서 첨단 기법을 동원해 사건을 해결한다는 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이야.”

“마냥 웃기려고 넣은 장면이 아닌 거구나?”

“실제 형사들에게 자문을 받았다니까.”


김영복이 취조실을 다시 한 번 둘러봤다.


“괜찮겠어?”

“뭐가?”

“블루 때깔?”

“응.”

“색채학에서 블루는 긍정적인 상징으로 주로 쓰이잖아. 부정적인 의미는 차가움 정도인데....”


일반적으로 파란색의 상징은 싱그러움, 침착, 젊음 등 주로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광고에서는 정직과 신뢰를 상징하기도 한다.

학교나 도서관 같은 시설에서는 이성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해 쓰이기도 하고.


“파란색은 정신을 안정시켜주는 효과가 있어. 심리학적으로 보면 푸른 바다와 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된다고 하지. 물론 어떤 사람은 푸른색의 물로 인해 우울증이 걸리기도 하지만. 암튼 단순한 작업을 오래 하는 작업환경에서는 푸른색 계열로 통일하는 것이 작업효율을 올려준대. 집중력도 올려주고 시간감각이 둔해져서 장시간 작업도 실제 행한 것보다 빠르게 지난 것 같은 착시를 준다고 해.”


김영복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언제 봐도 뭐 하나 건성으로 하는 법이 없는 류지호다.

취조실 색상을 파란색으로 한 것에 그 같은 깊은 내막까지 있는 줄은 몰랐다.

그저 레퍼런스로 삼은 <원초적 본능>을 벤치마킹한 것인 줄로만 알았다.

<원초적 본능>의 유명한 취조실 장면의 조명 설계는 꽤나 의미심장하긴 하지만.

천장에 있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등장인물의 얼굴에서 얼룩지는 표현이나, 곳곳에 배치된 설정조명은 범죄스릴러 특유의 분위기를 살려내면서 캐릭터의 심리까지도 동시에 표현해 냈다.

<민중의 적>에서는 그 정도로 복잡할 이유는 없었다.


“근데 Origin이 블루에서 룩이 떡 지는 게 좀 거슬리는데 괜찮을까 몰라.”

“DI에서 잡을 수 있대.”

“WDL에서?”

“블루가 떡지는 부분만 모아서 미국으로 보내야 할 것 같아.”

“그것도 협찬이야?”

“아니. 키네스코프하고 얄짤 없이 제 값 다 내야 돼.”

“청소년관람불가잖아. 손익분기점 맞출 수 있겠냐?”

“서울 50만은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개봉해봐야 알겠지.”


<민중의 적>을 류지호가 연출하게 되면서 개봉일정이 이전 삶과 달라졌다.

본래 설명절을 앞두고 개봉했었으나, 포스트프로덕션을 길게 하는 류지호의 성향상 여름 전에 개봉하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했다.

이전 삶에서는 300만 명을 동원한 영화였다.

류지호가 연출한 영화가 흥행을 못하면 좋은 작품 하나 망치는 셈이다.


“룩과 때깔이 너무 고급진 거 아냐? 날것 같은 배우들 연기와 자연스럽게 붙을까 모르겠다.”

“그래서 톤 앤 매너를 조금 밝게 가기로 했잖아. 범죄스릴러보다는 액션스릴러에 가깝게.”


전체적인 ‘필름 룩(Film look)’은 <세븐>에서 영감을 받았다.

김영복 촬영감독이 농담 반 진담 반 <세븐> 같은 영화를 찍으라고 해서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었다.

충무로에서 <세븐>의 ‘필름 룩‘을 만든다?

솔직히 어림도 없었다.

한 장면 한 장면 만들어서 찍은 영화가 <세븐>이다.

밤장면을 찍기 위해 엄청난 용량의 조명이 동원되었으며, 데이 포 나잇 촬영기법도 많이 썼다.

<세븐>의 데이 포 나잇은 한낮에 대충 일광만 가지고 촬영해서 어둡게 눌러준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밤장면을 찍는 것만큼의 공을 들여 조명을 하고 촬영해야 한다.

후반작업도 단순히 밝기만 떨어뜨린다고 <세븐> 같은 화면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부족한 예산 안에서 류지호가 요구하는 그림을 만들기 위해 미술과 조명을 하느라 스태프들이 죽을 맛이다.

필름 룩을 거칠게 풀어서 설명하면 필름으로 찍은 영상의 ‘시각적 감성‘이라고 할 수 있다.

감성이란 단어로 해석하는 것은 영화적인 시각효과뿐만 아니라, 영화적 연출도 포함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물론 충무로에서는 순수하게 시각적인 부분만을 ‘룩’이라고 표현하지만.

영미권에서는 극적 미장센의 미적인 표현까지도 ‘필름 룩’에 포함시킨다.

암튼 류지호는 배우들의 다소 떠 있는 연기와 할리우드 범죄스릴러 톤 앤 매너를 조화시키기 위해 꽤나 골머리를 싸맸다.

영화 <세븐> 같은 눅눅하고 어둑어둑한 분위기.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쌍욕과 말장난에 가까운 말투들.

감초배우들이 선보이는 유머러스한 상황들.

그것이 어우러지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타협을 본 것이 <원초적 본능>의 ‘필름 룩‘이다.

<세븐>보다 전체적으로 톤은 밝게 가면서 일명 ‘렘브란트 조명‘을 활용해서 콘트라스트의 마술을 부리기로 했다.

류지호의 요구치는 충무로 현실상 구현하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류지호는 요구와 함께 해답도 제시했다.

넉넉한 제작비, 최신 장비와 시스템으로.

그럼에도 스태프들이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다.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어떻게든 해내는 것이 류지호로서는 기특했다.

류지호는 취미로 한국에서 영화를 찍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무시하고 무작정 영화에 돈을 처바를 수도 없다.

자칫 WaW 엔터테인먼트의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딴 감독도 아니고 류지호 영화인데, 설마 망하려고.”


영화의 완성도가 높다고 해서 무조건 흥행에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날림으로 찍은 것처럼 보이는 영화도 천만 영화가 된다.

한 장면 한 장면이 클래식한 미학으로 가득한 영화가 본전도 못 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텔미섬딩> 정도는 하겠지 뭐.”


충무로에서는 청소년관람불가 범죄스릴러 영화는 안 된다는 속설이 있다.

지금까지 열의 아홉이 망했기 때문이다.

그런 속설을 깬 영화가 <텔미섬딩>이었다.

당시에 비해 극장 티켓가격도 천원이 올랐고 스크린 숫자도 많이 늘어났다.

비슷한 숫자의 관객을 동원하면 적어도 망했다는 말은 듣지 않을 것 같았다.


“흥행은 영화 다 만들고 난 다음에나 걱정하고. 밥값이나 하러 갑시다.”

“너는 밥값 이야기 좀 하지 마. 네 밥값이 보통 비싸야지.”

“내 입이 고급이긴 해.”


시간이 흐르는 만큼 <민중의 적> 촬영분량도 빠르게 줄어들었다.


✻ ✻ ✻


여주의 WaW 종합촬영소는 아직 정식개장을 하지 않았지만, <복수의 꽃> 야외세트를 시작으로 부분적으로 가동이 되고 있다.

사운드 스테이지 역시 아직 개방되지 않았다.

다만 특수세트 일부는 개방하기 시작했다.

WaW 종합촬영소에는 경찰서와 파출소를 재현해 놓은 특수세트가 있다.

현실의 경찰서를 그대로 옮겨놓지는 않았다.

영화나 드라마 별로 사무실 구조 변형과 자유로운 자리배치가 가능하도록 설계했다.

조명은 기본이고, 전반적인 촬영 편의를 위해 평수가 꽤 넓다.

미니 크레인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층고도 높게 지어졌다.

기존 한국 영화 속 경찰서는 방별로 나눠져서 묘사되어 왔다.

실제처럼 뻥 뚫린 공간의 세트를 만들 여력도 없었고, 그 같은 공간을 채울 소품이나 예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젠 아니다.

WaW 종합촬영소에는 집기와 소품 일체가 모두 구비되어 있다.

심지어 볼펜과 경찰조서 같은 사소한 소도구까지도 꼼꼼하게 배치되어 있다.

당연히 취조실은 물론 현행범이 머무는 유치장도 설치되어 있다.


“이걸 우리만 쓰고 없애는 게 아니란 거지?”

“그렇다더라. 책상 위치와 칸막이만 변경하면 그냥 다른 경찰서가 되는 거지.”

“WaW가 돈이 많긴 진짜 많구나. 할리우드 스타일이야 아주.”

“위층 구경은 안 했어?”

“거기 뭐가 있는데?”

“병원을 그대로 옮겨놨더라고.”

“병원 섭외 참 지랄 맞지.”

“교도소 사방도 만들어 놨다던데? 법정이랑 수술실 세트도 있고.”

“문이 잠겨있어서 들어가 보지 못했는데, 실제랑 똑같이 만들어놨나 궁금하네.”

“내년 3월에 오픈 한다니까 그때 구경해봐. 진짜 그럴 듯해.”

“감독이 할리우드에서 놀아서 그런가... 뭐만 했다하면 미국식이다.”

“그래서 감독도 막 자르잖아. 수틀리면 그냥 X되는 거야.”

“후달려서 WaW 영화 일 하겠어, 어디?”

“그래서 WaW가 자체 제작하는 영화는 죄다 A급만 들어가잖아.”

“암, 그렇고말고! 그래서 우리가 A급이란 거 아니냐.”

“오야지가 A급이지 네가 A급이냐?”


모두가 WaW 종합촬영소를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양수리 종합촬영소와 중복투자라는 이야기도 있다.

허세라며 애써 평가절하 하는 뒷담화는 기본이고.

거기에 감독 해고 이슈까지 얹어지면서 온갖 말들이 쏟아졌다.

영화판이 말이 참 많다.

말이 많이 만들어질 만큼 온갖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긴 하지만.

충무로가 시끌시끌하든 말든.

<민중의 적>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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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 어쩌면, 혹시, 설마 했던 일. (1) +9 23.04.24 3,377 122 23쪽
481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2) +4 23.04.22 3,474 122 27쪽
480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1) +10 23.04.21 3,410 113 24쪽
479 베를린영화제. (6) +5 23.04.20 3,331 124 26쪽
478 베를린영화제. (5) +8 23.04.19 3,252 113 24쪽
477 베를린영화제. (4) +14 23.04.18 3,172 143 23쪽
476 베를린영화제. (3) +9 23.04.18 2,957 110 30쪽
475 베를린영화제. (2) +6 23.04.18 3,024 108 30쪽
474 베를린영화제. (1) +6 23.04.17 3,319 124 27쪽
473 한국영화에 애정이 있구나.... (2) +11 23.04.15 3,388 117 27쪽
472 한국영화에 애정이 있구나.... (1) +2 23.04.14 3,271 126 26쪽
471 한 판 크게 벌여봐야겠어요. (4) +8 23.04.13 3,311 123 25쪽
470 한 판 크게 벌여봐야겠어요. (3) +4 23.04.12 3,312 126 23쪽
469 한 판 크게 벌여봐야겠어요. (2) +4 23.04.11 3,334 120 26쪽
468 한 판 크게 벌여봐야겠어요. (1) +7 23.04.10 3,388 123 25쪽
467 민중의 적. (10) +3 23.04.08 3,260 120 23쪽
466 민중의 적. (9) +4 23.04.07 3,214 116 25쪽
» 민중의 적. (8) +6 23.04.06 3,130 117 23쪽
464 민중의 적. (7) +3 23.04.05 3,125 114 23쪽
463 민중의 적. (6) +7 23.04.04 3,208 120 24쪽
462 민중의 적. (5) +2 23.04.03 3,235 115 22쪽
461 민중의 적. (4) +3 23.04.01 3,266 117 22쪽
460 민중의 적. (3) +3 23.03.31 3,404 116 23쪽
459 민중의 적. (2) +5 23.03.30 3,458 115 23쪽
458 민중의 적. (1) +9 23.03.29 3,508 116 24쪽
457 무역센터가 무너졌습니다! (3) +4 23.03.28 3,409 119 22쪽
456 무역센터가 무너졌습니다! (2) +5 23.03.27 3,306 118 21쪽
455 무역센터가 무너졌습니다! (1) +5 23.03.25 3,449 113 21쪽
454 쉽게 될 리가 없겠지..... +8 23.03.24 3,315 112 24쪽
453 영화가 영원히 머무는 곳. (2) +6 23.03.23 3,314 108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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