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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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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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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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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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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민중의 적. (4)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영화 로케이션 촬영에서 쾌청한 날씨는 분명히 축복이다.

그런데 때론 그로인해 촬영을 망치기도 한다.

비록 너무 쾌청한 날씨 때문에 촬영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긴 했지만, 오늘 촬영의 하이라이트 촬영을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바로 송 형사가 권총으로 자살하는 장면이다.

자살 장면을 리얼하게 만들기 위해서 더미 머리에 총알이 관통한다.

동시에 차창엔 피가 흩뿌려져야 한다.

좁은 차안에 설치된 이런저런 특수효과 도구들이 카메라 앵글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꽤나 애를 먹었다.

특수효과팀과 특수분장팀이 준비하는 동안 연출부와 제작부 막내가 워셔액과 마른 수건을 챙겨 카메라 옆에서 대기했다.


“액션!”


슉!


특수효과 총은 가스 건이다.

특효팀이 너무 서둘렀다.


“NG!"


특효팀의 준비는 순식간에 끝났다.

오히려 튄 피를 닦아내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해 들어갔습니다!”

“무시해. 찍던 거 계속 찍어.”


촬영장에서는 한 번 일이 꼬이기 시작하면 계속 꼬이는 법이다.

초대형 버터플라이까지 치고 촬영을 하기 시작하자 해가 구름 속으로 숨었다.

이럴 때 찍을 장면을 변경하게 되면 또 다시 꼬일 수가 있다.

차라리 바뀐 분량을 밀어붙이는 것이 좋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한 번만 더 가시죠.”


한 번에 만족할 만한 장면이 나오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거의 없다.

여러 번 NG가 났다.

<게임의 법칙>을 찍을 때만 해도 위험천만하게 배우의 눈 바로 앞에서 쇠구슬을 쐈다.

피주머니도 원격 조정이 되지 않았다.

배우가 직접 손에 쥐고 눌러서 터트렸다.

이젠 특수효과 장비나 기술이나 모두 좋아졌다.

그렇다고 모든 충무로 특수효과팀이 골고루 실력이 올라온 것은 아니다.

업계 톱 디스트로이어와 그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는 안재민의 비주얼 FX 정도가 류지호가 원하는 수준에 겨우 턱걸이 하는 단계다.


“혹시 모르니까 다들 밥 빨리 먹고 대기해!”


언제 또 다시 하늘에 구름이 낄지 알 수 없다.

스태프들이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얼른 챙겨먹었다.

오후가 되어서도 해가 구름에 숨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방파제에서 하염없이 구름이 몰려오길 기다렸다.

어느새 시간이 오후 3시를 넘어갔다.

점심 식사 전에 한 시간 정도 촬영하고, 계속 카메라를 돌리지 못하고 있다.

짜증이 날만도 한 상황이다.

짜증은커녕 긴장한 파트도 있다.

촬영팀이다.

수시로 DALLSA OriginⅡ를 점검하는데 열중했다.

류지호가 미국에 다녀오는 동안 지겹도록 테스트 촬영을 했다.

그럼에도 촬영팀은 불안하기만 했다.

<민중의 적>이 한국 최초 디지털 영화는 아니다.

테이프 녹화방식이 아닌 하드디스크 저장방식의 시네마 카메라는 처음이다.

혹시나 영상 데이터가 제대로 저장되지는 않았는지, 백업한 데이터가 날아가 버리지는 않을지.

한시도 긴장을 늦출 없었다.


“자 찍자! 준비해!”


스태프들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해가 구름에 잠시 가릴 기세다.

모든 세팅이 일사분란하게 끝나고 배우까지 자리를 잡았다.


“.....!”


감독과 촬영감독 모두 촬영개시 큐사인은 뒷전이다.

하늘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에이 씨.....“


안타깝지만 구름이 해를 비켜갔다.

다시 허탈해지는 순간이다.

방파제는 해를 가릴 만한 그늘이 한 군데도 없다.

당연히 일사광선을 그냥 맨몸으로 막아야 했다.


“구호물자 기다리는 아프리카 난민신세가 따로 없구만.”


동시녹음기사의 투덜거림에 주변 스태프들이 낄낄거렸다.

그렇게 4시가 넘어가고 5시가 다가올 무렵이다.

우여곡절 끝에 꾸역꾸역 촬영을 이어갔다.

결국 마지막 한 컷만 남겨두었다.

마약가방을 들고 강철중이 방파제를 따라서 뛰어가는 장면만 찍으면 힘겨웠던 방파제를 벗어날 수가 있다.

설형기 배우가 뛰어야 할 거리는 대략 200미터.

NG가 나면 그 거리를 몇 번 왕복해야 한다.


“벌써부터 이렇게 빡세면 앞으로 얼마나 더 고생을 시키시려구....”


입으로는 투덜거렸지만, 눈은 웃고 있는 설형기다.

처음으로 류지호와 작업하는 그는 현장분위기에 매우 만족했다.

뭔가 촬영현장이 정리정돈이 잘 된 느낌이랄까.

촬영을 준비할 때나 카메라를 돌릴 때나 똑같이 차분하면서 기계적인 느낌을 받았다.


“감독님, 속초항 가셔서 회 한 접시에 소주 한 잔 하시죠.”

“한 접시가지고 되겠어요? 입이 몇 갠데.....”


설형기 배우는 소문난 애주가다.

딴에는 하루 종일 땡볕에서 고생을 했으니 소주 한 잔이 간절했던 모양이다.

감독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핑계가 필요했을 수도 있다.

첫 촬영부터 날씨가 도와주지 않아 고생을 좀 했다.

주식투자나 사업적으로는 ‘거저먹는‘ 느낌을 떨칠 수 없는 류지호다.

예상대로 되니까.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전문가들이 알아서 돈을 벌어다 주고 있기도 했고.

그런데 영화작업을 할 때만큼은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뭐 하나 쉽게 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이 만만하지가 않다.

마음먹은 대로 다 되면 삶의 긴장감이란 없었을 텐데..... 류지호에게는 천만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만큼은 뜻대로 잘 안 돼서 긴장할 수밖에 없으니까.


❉ ❉ ❉


쏴아아아!


비에 젖고 있는 교통신호기.

아직 앳된 얼굴이지만 앙다문 입술과 진지만 얼굴이 무척 강직해 보이는 교통경찰관.


툭툭.


교통경찰의 모자에 빗방울이 방울지다가 뚝뚝 떨어진다.

빗속 교차로 중앙에 선 교통경찰이 절도 있게 수신호를 보낸다.


띠릭!


교통경찰이 차고 있는 무전기에 붉은 신호가 깜빡였다.


- 컷!


차도와 인도 사이에서 대기하고 있던 우의를 입은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사거리로 튀어나갔다.

경광봉을 힘차게 흔들며 무질서한 차량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우의를 입은 이들 사이에 김재욱이 끼어있다.

이들은 <민중의 적> 제작부들이다.

촬영협조를 위해 현장에 나와 있는 실제 교통경찰을 도와 차량통행을 도왔다.

방금 전까지 수신호를 보냈던 교통경찰은 단역배우다.

즉 실제상황이 아니었던 것.

실제로 비가 오고 있는 이곳 사거리는 <민중의 적> 촬영현장이다.

강원도 촬영을 마치고 철수한 제작진은 본격적인 서울의 로케이션 분량을 찍어나갔다.

본래 오늘 예정된 촬영은 분식집 액션장면이었다.

비가 올 것이란 일기예보로 인해 급하게 일정이 변경되었다.

혼잡한 서울 도심 교차로에서 살수차를 동원해 촬영을 할 순 없었다.

서울시에서 허가를 내주지도 않고.

비 오는 날 도둑촬영 허가를 간신히 받았다.

그것도 출퇴근 시간이 아닌 하루 중 교통량이 가장 적은 시간에 겨우 1시간 허가를 얻었다.

그렇다고 순진하게 1시간을 칼 같이 지켜서 촬영하는 일 따위 충무로와 방송계에는 있을 수가 없다.

1시간 허가를 얻으면, 안면몰수하고 버티고 버텨서 최대 3시간을 촬영하는 것이 관행(?)이다.

어쩔 수가 없다.

이 당시만 해도 서울시와 경찰청은 도심에서 하는 촬영을 매우 싫어했다. 따라서 협조를 잘 안 해줬다.


“레디!”


파트별로 콜이 나오고 촬영팀 막내가 슬레이트까지 치고 빠졌다.

남은 건 감독의 큐사인뿐.


1초, 2초, 3초....


마치 빗소리라도 즐기는 듯.

류지호의 입에서 좀처럼 큐사인이 나오지 않았다.

누구하나 그런 류지호를 채근하지 않았다.

이미 <복수의 꽃>을 작업해 봤기에 이런 상황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빵빵.


빗속이라 평상시보다 차량 경적소리가 더 많이 그리고 더 크게 울려 퍼졌다.

마침내 빗소리를 뚫고 류지호의 큐사인이 나왔다.


“액션!”


설형기 배우가 얼른 담배를 입에 물었다.

큐사인을 바로 내지 않은 이유는 타들어간 담배의 전 커트와의 연결 때문이었다.

덤으로 배우가 충분히 감정을 잡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기도 하고.

조감독 이동화가 내심 투덜거렸다.


‘하여간 쓸데없는 데까지 디테일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실제 슬레이트를 친 후로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막상 촬영에 집중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특히 조감독과 제작실장의 애가 타들어갔다.

실제 비가 내리고 있는 현장 여건이다.

촬영허가도 단 한 시간만 받은 상황이고.

이날의 촬영 현장 난이도가 매우 높았기에 일초가 아쉬운 상황이다.


툭툭.


빗줄기가 승용차 유리에 부딪힌다.

보조석에서 담배를 물고 있던 강철중이 차 유리를 내린다.

그는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라와 겨레에 충성하고,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고, 시민에 봉사하고... 이것이 죽거나 병신이 되지 않는 한 경찰이 매일매일 해야 할 일들이다.]


강철중이 담배를 튀겨 날리고, 다시 유리창을 올린다.


[나도 경찰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투정부리는 말투다.

경찰이라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

강철중의 캐릭터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내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컷!”


허가 된 시간에서 겨우 한 시간만 넘겨서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실제 강동경찰서 교통계가 투입되었다.

인근 천호동 파출소에서 촬영지원을 왔던 순경 두 명은 근무지로 돌아갔다.

<쉬리>를 촬영하기 전까지 한국영화가 도심에서 촬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관계당국이 좀처럼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게다가 해석에 따라서 코에도 걸고 귀에도 걸 수 있는 도로교통법 때문에 공도에서 자동차 사고씬 찍으려고 해도 곤란한 점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변두리 공도에서 촬영하다가 도로에 스키드마크를 남겼다는 이유로 범칙금을 문 영화사가 한 둘이 아닐 정도다.

중앙분리대를 손 댈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유턴구간이 아닌 중앙선을 넘는 장면을 촬영하게 되면 무조건 범칙금을 각오해야 하고, 카 드리프트 기술로 인해 도로에 스키드 마크를 남겨도 무조건 범칙금을 내야 했다.

류지호가 다온로펌을 통해 법개정을 하려고 해도 국회의원들이 도로교통법 개정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시민사회의 반발을 우려해 웬만하면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나마 도심촬영이나 공도 촬영이 예전보다 많이 나아지긴 했다.

3년 전 부산영상위원회가 만들어진 후 지방자치단체에서 영상위원회가 하나둘 설립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공무원들이 로케이션 장소 협조 외에 섭외까지 도와주고 있다.

공공장소 촬영허가 부분에서도 전보다 훨씬 간편하고 편리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서울은 여전히 허가 받기 쉽지 않았다.

설령 류지호의 영화라고 하더라도.

공무원에게는 부자보다 시민들의 민원이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어이쿠. 고생이 많으십니다.”


다부지게 생긴 사내 둘이 철수를 서두르는 류지호에게 인사를 건넸다.


“두 분이 어쩐 일이세요?”

“탐문 마치고 회사 들어가다가 여기서 촬영을 하고 계시다고 해서....”


두 사람은 강동경찰서 강력계 형사들이다.

<민중의 적>의 시나리오를 쓸 때 자문을 해줬다.

전하영 피디가 서울영상위원회에 섭외를 부탁했는데, 강동경찰서 측에서 추천한 형사들이었다.

참고로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인천 연수경찰서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명수 감독이 형사영화 시나리오를 쓰겠다고 무턱대고 찾아간 경찰서가 당시 ‘경찰24시‘라는 리얼다큐멘터리에서 자주 나온 연수경찰서였다.

이명수 감독은 연수경찰서 강력계 형사들을 일주일 동안 동행취재하며 시나리오를 썼고, 이후로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민중의 적>은 공식적으로 강동경찰서가 도움을 주고 있다.


“언제 퇴근... 아참, 강력계나 형사계는 퇴근시간이란 게 따로 없죠?”

“하하. 저희도 퇴근시간 있습니다. 그걸 찾아먹을 수 없어서 그렇지.”

“안 바쁘면 잠깐 커피 한 잔 하실래요?”

“촬영 다 끝나셨습니까?”

“비씬만 찍고 쫑이에요.”

“궁금하신 거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보안사항만 아니면 뭐든 알려드리겠습니다.”


사실 류지호는 따로 자문이 필요가 없었다.

이전 삶에서 경찰 관련해서 취재를 제법 많이 해봤기 때문이다.

<투캅스>가 제작될 당시만 해도 경찰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에 꽤 부담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투캅스> 개봉 후에 경찰로부터 항의를 많이 받았다.

그러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같은 영화에서 형사의 애환과 고달픈 일상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경찰의 태세도 많이 바뀌게 됐다.


“영화잖아요. 영화를 영화로 봐야지.”

“주인공이 골통에 또라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렇지는 않잖아요?”

“요즘 영화를 뉴스로 착각하고 보는 관객이 어디 있어요.”

“형사들 고생하는 건 이제 전 국민이 다 아는데요 뭘.”


일선 형사들은 자신들의 직업세계를 그리는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길 바랐다.

부패한 주인공이든 정의롭든 개의치 않았다.

그저 자신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다뤄주기만 바랐다.


“주인공이 정의롭게 나오길 바라는 거야 간부들이나 그렇죠. 체면이라는 게 있으니까.”


일선 형사들의 경우, 술 한 잔 들어가면 경찰의 치부까지도 서슴없이 말해준다.

반면에 간부급이나 경찰 본청 근무자들은 경찰 홍보영화처럼 멋지게 포장하는 경향이 있다.

당연한 것이다.

누구도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이 부정적으로 그려지길 바라지 않는다.

깡패나 노숙자조차도.

형사 장르 영화가 망할 때는 경찰 홍보영화로 전락했을 때가 대부분이다.

그럴 경우 한국식 신파로 흐를 경우가 많다.

암튼 류지호는 나래안전시스템이라는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보안회사를 소유하고 있다.

그곳에는 전직 경찰들이 널렸다.

강력범죄를 많이 다뤄봤던 베테랑도 많이 근무하고 있다.

류지호는 강동서 형사들과 나래안전의 전직 형사들의 자문을 교차검증해서 시나리오를 윤색했다.

이전 삶의 <민중의 적> 시나리오보다 디테일 면에서는 훨씬 좋을 것이라 자신했다.

오류도 상당 부분 잡아냈다.

<투캅스> 이후로 형사 장르에서 형사가 징계를 받으면 툭하면 교통계로 발령이 난다.

사실이 아니다.

<민중의 적>에서 강철중이 살인사건 유족인 조규환을 폭행한 것으로 한 계급 강등은 물론 교통계로 보직이동 된다.


[왜? 교통된 게 쪽팔려?]


교통계장이 강철중에게 묻는 장면이 있다.

일반인들이 몰라서 그렇지 경찰 교통계 특히 근무복 순찰경찰은 무척 선호하는 보직이다.

적어도 이 시기까지는.

칼퇴근은 물론이고, 부수입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90년대만 해도 운전자들이 면허증에 만 원권 지폐 몇 장을 기본으로 교통경찰에게 찔러줬다.

특히 교통계 중에서 꽃인 고속도로순찰대는 꽃보직으로 통했다.

1년 근무한 것만으로 아파트 평수가 바뀐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암튼 현실에서 강철중은 징계위원회에 회부가 되어 곧바로 직위해제가 되어서 근무를 하지 못하는 신분이 된다.

시나리오대로 강등이란 중징계가 내려지게 되면 기본 3개월 직무정지 상태가 된다.

당연히 조규환 수사를 맡을 수 없다.

더더욱 강력반장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다.

류지호는 교통계로 전보되는 것을 일선 파출소로 발령받는 것으로 바꿨다.

강력반에서 수년을 구른 형사가 파출소에서 근무복 입고 민원인 상대하는 것이 좀 더 극적일 것 같았다.

오리지널 시나리오의 계절은 여름이었다.

강철중은 한여름에도 후줄근한 점퍼를 입고 다닌다는 설정이었다.

전현직 형사들은 입을 모아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 말했다.

방검복도 거추장스러워 잘 입지 않는 것이 형사란다.

권총을 휴대할 경우 수갑무게까지 포함해서 움직일 때 은근히 무게감을 느낀다고도 하고.

일선에서 흉악범죄자를 상대하는 형사들은 가능한 몸을 가볍게 하려고 노력한다.

범인에게 쉽게 옷이 잡히지 않도록 주머니도 거의 없고 품이 넓지 않는 옷을 입는 편이다.

그 외에도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오류들까지 형사들의 자문을 받아 개연성 있게 수정했다.


“나 때는 후다 딴다고 했지 아마?”

“누가 요새 이런 말을 씁니까? 저희들 깡패가 쓰는 은어 이제 잘 안 씁니다.”


연차가 조금 있는 형사와 비교적 신참에 가까운 형사들 사이에서 세대차이가 느껴지기도 했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생생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허풍과 조미료가 듬뿍 들어간 부분을 거둬내고 필요한 부분만 썼다.

때에 따라서는 허풍이 대사의 맛을 살려주기도 하지만, 어설프게 넣었다가 망한 경우가 더 많았다는 것을 아는 류지호가 섣불리 쓸 리가 없다.

범죄자들이 사용하는 은어와 형사들이 사용하는 은어는 마치 뒷골목 세계 표준어라도 되는 것처럼 동일한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사실 형사들끼리 사용하는 은어는 시기마다 다르고 또 지역별로도 조금씩 다르다.

부산의 형사들이 쓰는 표현을 서울에서만 근무한 형사가 쓰도록 하면 안 쓰느니만 못하다.

또한 실제 형사들이 사용하는 은어를 듬뿍 담는 것 역시 조심해야 한다.

감독이나 작가 입장에서 발로 쓴 리얼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자칫 관객들이 대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결국 겉멋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래서 글빨이 중요하지...!‘


성실한 취재 그리고 현직들과 풍부한 인터뷰를 토대로 시나리오를 완성한 것으로 끝이 아니다.

관객들은 영화의 사실성과 함께 판타지도 기대한다.

허구적 창작이라고 하더라도 영화적인 상상력을 실제라고 믿게 만드는 능력.

그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런 능력을 소위 ‘글빨’이라고 하는 것이고.

적어도 영화를 보는 순간에는 현실적이냐 고증 오류냐를 따지지 않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실력이다.

장르를 잘 다루는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은 그런 걸 잘한다.

개연성에 얽매이지 않고도 그럴싸하게 잘 쓴다.

그런 작가 중에 한 명이 바로 송진한이다.

송진한은 자잘한 오류들을 바로잡을 건 바로잡고 그대로 놔둘 것은 그대로 놔두었다.

무조건 오류를 바로잡다보면 이야기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특유의 맛깔스러운 대사와 상황 묘사로 무겁기만 한 사이코패스 범죄스릴러에 활력을 부여했다.

시나리오로만 놓고 보면 비리형사가 패륜범죄자를 통쾌하게 응징한다는 결론을 이미 내 놓고 거기에 맞춰 주변부 스토리를 무리하게 몰고 간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당연히 극의 흐름과 개연성에 설득력이 없어진다.

그런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일일이 끄집어내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해도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엉성한 설정은 분명 감점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주변 곁가지를 중요하지 않도록 플롯 자체를 탄탄하게 포장하는 연출이 필요했다.

치밀한 연출이나 부수적인 잔재미 요소가 잘 떠받쳐주어야 엉성함이 크게 부각은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코미디 영화를 잘 찍는 감독이 연출한 것이 잘 맞아떨어졌던 거지.’


<민중의 적>은 코미디라는 보강 요소가 없으면 형편없는 영화가 될 수도 있다.

본격 사이코패스 스릴러 영화도 아니고, 치밀하게 구성된 범죄수사물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이코패스가 한국의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개념도 아니었고.

과거로 돌아온 류지호는 영화의 기초를 처음부터 다졌다.

풍부하고 깊이 있는 교양을 습득했고, 영화에 대한 시선 역시 한층 성숙해졌다.

류지호는 <민중의 적>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태도로 연출에 임하고 있다.

강박적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려던 마음을 내려놨다.

연기와 캐릭터는 배우들에게 일임하다시피 했다.

그저 배우들이 애드립을 하든 뭘 하든 류지호는 판만 깔아줄 생각이다.

이미지 부분에서도 프로덕션 디자이너와 촬영감독이 주도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도록 여지를 많이 줬다.

각 파트가 자신들의 역량을 온전히 발휘하기 위해서는 감독의 꼼꼼한 콘티는 필수이긴 하지만.

어쨌든 <민중의 적>은 두 주인공이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80%에 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체중까지 불려가며 강철중으로 변신한 설형기의 연기는 최고라는 말로 부족했다.

그 이상 더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영화를 장악했었다.

설형기가 연기하는 형사 강철중은 투철한 정의의 수호자라고 보기엔 어렵다.

마약을 빼돌려 범죄자와 내통하여 팔아먹을 궁리나 하고, 법보다는 주먹이 가까운 난봉꾼에 가까운 캐릭터다.

비록 악을 단죄하는 것이라곤 하지만, 경찰이라는 공인으로서 정해져 있는 형식과 절차를 수시로 위반한다.

난데없이 조규환의 집에 주거 침입을 하는가 하면 영장도 없이 자신만의 판단 만으로 피의자를 붙잡아 심문하고 폭행하기도 한다.

심지어 없는 죄를 만들어 전과자에게 덮어씌우기까지 한다.

범인 잡기에는 별 관심이 없고, 승진 역시 그에게는 고려대상이 되지 못한다.

강은석 감독의 전작 <투캅스>의 안정기가 연기했던 형사의 젊은 시절 같다고 할까.

오마주 비슷하게 길거리 노점상에게 용돈을 받아먹는 설정을 넣어 놓음으로써 <투캅스>의 추억을 영화에 묻혀 놓았지만.

그래서 강철중에 대한 송진한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민중의 지팡이 좋아하신다. 민중의 곰팡이다 씨X놈아!]


마누라는 도망 간지 오래다.

강철중은 홀어머니 그리고 딸들과 함께 궁상맞게 살고 있다.

그런 삶이 그를 무감각하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냉소적이고 매사 화가 나 있는 걸 수도 있다.

범인검거 과정에서 동료들이 죽음을 당하는 걸 경험하면서 경찰 본연의 임무를 등한시하면서 삐뚤어졌을지도 모르고.


[다 뭣 같은데 왜 나만 가지고 그래?]


형사라는 직업을 수행함에 있어 세상의 온갖 악을 확인한 결과 강철중은 세상이 모두 악의 구렁텅이고, 자신도 그 틈에서 얼렁뚱땅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사소한 악을 행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고.

괜히 영화를 평가하는 먹물들이 강철중 캐릭터를 한국 장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 중에 하나로 꼽는 것이 아니다.


작가의말

행복한 주말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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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99 하얀유니콘
    작성일
    23.04.01 15:54
    No. 1

    경찰들 징켸시 교통경찰로 내려가는것 은
    홍콩 경찰 영화에서 자주 쓰던 장면입니다
    홍콩도 홍콩 경찰 대학 생기기전
    경찰비리가 엄청났습니다.
    경찰 총장이 착복한돈 싸가지고 대만으로
    도망갔다 6개월만에 대만 폭력조직 에
    털려 거지 된것도 유명한 사실이니까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OLDBOY
    작성일
    23.04.01 18:41
    No. 2

    잘 보고 있어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7 손천
    작성일
    23.11.10 20:33
    No. 3

    공공의 적은 그 날것의 촌스러운 느낌이 딱좋은데 주인공이 딱 그런 분위기에 어울리는 인물이다보니ㅋㅋㅋ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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