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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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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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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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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3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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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민중의 적. (3)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합정동에 위치한 WaW 프로덕션 오피스에는 수십 명이 모여 회의를 진행할 수 있는 공간이 새롭게 마련되었다.

더이상 <복수의 꽃>처럼 규모가 큰 대본리딩도 호텔을 빌려 할 필요가 없어졌다.

<민중의 적> 대본리딩 역시 합정동 오피스에서 소박하게 진행됐다.

물론 주요 배역들은 시간 날 때마다 불러서 리딩을 했다.

영화와 관련한 주요 포인트를 배우들에게 짚어주었다.

설형기 배우가 경찰서 세트에서 대본리딩을 하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13년을 생활한 공간에 좀 더 친숙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열심히 하는 자세는 좋았다.

다만 경찰서라는 공간과 접점이 없는 배우들도 많다는 사실.

때문에 설형기의 의견은 기각됐다.

류지호는 <민중의 적> 시나리오를 수십 번을 읽었고, 각색에도 참여했고, 최종고를 가지고 콘티도 했으며, 마지막으로 스토리보드로 장면연출까지 끝내 놨다.

그럼에도 배우들이 모두 모여 각자의 개성과 톤으로 대본을 읽는 걸 보고 있자니 ‘이런 맛이 있었구나’하는 새로운 감흥을 받았다.

그런 기분에 휘둘릴 일은 없다.

영화의 톤 앤 매너에 변화를 준다면 구상한 것이 무너질 수도 있을 테니까.

영화연출에서 있어서 변덕은 크게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일부 감독은 변덕을 예술적 직감이라고 포장하기도 하지만.

암튼 배우들 사이에서 <복수의 꽃> 대본리딩 소문이 귀가 따갑게 돌았다.

따라서 자기캐릭터에 완벽히 몰두해 온전히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며 열띤 현장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감정선과 토씨 하나하나 트집을 잡아 설명하는 감독도 있다.

류지호는 그런 성향의 감독은 아니다.

다만 걸리는 부분에 있어서는 대본리딩이 끝난 후에 개인 면담을 통해 배우들과 캐릭터에 대한 논의를 이어갔다.

오리지널 <민중의 적>에 출연했던 배우들도 좋은 배우들이었다.

다만 류지호에게는 의리로 뭉친 배우사단이 있다.

예전 단편영화부터 인연을 맺은 배우들, <복수의 꽃>에 출연했던 배우들로 일부 배역교체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검사, 목욕탕 조폭, 안수의 부하, 어느 회사 부장 배역 등이다.

오리지널 시나리오는 코믹한 상황이 많진 않았다.

그걸 연출이 또 배우가 코믹하게 묘사했다.

자연스럽게 배우들의 연기가 떠있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류지호는 감초역할이 특기인 배우들의 연기톤을 잡아주느라 시간을 꽤 할애했다.

대본리딩도 무사히 마무리되고, 남은 것은 고사(告祀)뿐.

영화계에는 일종의 미신이라거나 속설이 많았다.

가장 중요한 미신은 촬영 전에 반드시 무사안전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내는 것이다.

세트장 천장에 설치된 조명 바텐에서 귀신이 보이면 영화가 대박이 난다던가, 한창 촬영을 하는데 비가 왔다가 그치면 대박 난다던가, 소품으로 준비된 음식을 먹으면 3년간 재수가 없다던가, 총알이 없지만 프롭 총에 저격당하면 재수가 없다던가, 촬영장에 불이 나거나 불씨가 있으면 대박이 난다던가 하는 많은 속설도 있다.

또한 동물과 아기가 주연을 맡으면 잘해봐야 본전이라며 기피하는 경향이 있고, 영화 개봉을 앞두고 감독·제작자·주연배우는 절대 장례식장에 가지 않는 미신도 있다.

웃는 돼지머리를 올려놓은 고사상에 절을 하는 스태프를 보며 전하영 피디가 말했다.


“솔직히 고사 비용만 몇 백만 원이에요. 건너뛰고 싶지만, 괜히 현장에서 사고라도 나면 고사 안 지내서 그렇다는 말 나올까봐.”


대박기원과 무사안전 기원 고사를 지내면 정말 흥행이 폭발하고 아무런 사고가 나지 않을까.

사실 아무도 모른다.

근거도 없고.

류지호가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쿨 할 수가 없죠. 안 지키면 찝찝하니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무조건 절을 해야 했는데, 감독님이 개개인의 종교나 신념을 존중하라고 해서....”

“르노오성은 외국회사지만, 프랑스 본사에서 파견된 CEO를 비롯해서 외국인 임원들도 한국의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려고 노력하죠. 작년 Pray ceremony for prosperity(융성기원제)라고 해서 고사를 지냈다고 하죠. 관복과 관모까지 쓰고 제사상에 절을 했다고 들었어요.”

“처음 절을 안 했던 여배우가 영화판에서 호되게 욕을 들어 먹은 적이 있었어요. 외국인도 하는데 한국인이 고사상에 절도 못하냐면서.”

“충무로 미신과 루틴은 말만 다를 뿐이죠. 징크스는 다른 문제이지만. 원래 고사라는 것이 정화수나 햇벼 놓고 가족의 평안과 재앙 퇴치를 빌고 또 풍년과 가호를 기원하며 집귀신에게 지내던 제사라고 하죠.”

“그러니까요.”

“전 피디도 종교 때문에 절을 하면 안 되나 봐요?”

“기도로 대체해야 하는데.... 막상 절을 안 하자니 찜찜해서.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그래요. 요새는 다시 절을 하는 분위기에요.”


배우와 스태프가 촬영 전 고사를 지내는 것은 별 탈 없이 크랭크업하기를 바라는 일종의 기원과 기도의 의미를 갖는다.

또한 충무로에서 터무니없는 괴담이 회자되는 것은 대중의 관심을 끌어오고, ‘대박난다’는 징조로 스태프의 기운을 돋우기 위함이다.

사고 없이 무사히 촬영을 마칠 수 있다면, 그래서 조금이나마 영화의 성공에 보탬이 될 수 있다면 굳이 찝찝한 마음을 안고 갈 이유는 없다.

그것이 병적으로 기독교를 신봉하는 뼛속 깊은 신도라고 할지라도.


“미신이든 뭐든 이런 요식 행위로라도 제작진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면 좋은 거죠.”

“그나저나 손님이 진짜 많이 왔네요.”


<민중의 적> 고사장에 많은 영화인들이 다녀갔다.

실제 류지호가 아는 충무로 영화인이라고 해봐야 몇 명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별의 별 영화인들이 얼굴도장을 찍고 갔다.

심지어 BS그룹 부회장 이희경까지 다녀갔을 정도다.

공동제작을 맡은 무비서비스의 강은석 감독이 판을 크게 키운 영향도 컸다.

제작발표회는 크랭크업 후에 따로 일정이 잡혀 있었다.

마치 제작발표회라도 하는 것처럼 많은 기자들을 불렀다.

무비서비스가 WaW 엔터테인먼트와 전략적 동맹을 맺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서다.

류지호는 <민중의 적>의 제작과 총지휘라는 타이틀을 강은석에게 양보했다.

원안을 쓴 구병환은 프로듀서 타이틀을 받았다.

투자와 윤색에 참여했지만, 류지호는 감독 크레디트 하나만 갖기도 했다.

주렁주렁 크레디트를 받아봐야 류지호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없기에.

<민중의 적>이 류지호의 영화인생에서 큰 의미를 가진 영화는 아니었다.

필모그래피에 웰메이드 스릴러 영화 한 편이 추가될 뿐.


“감독님, 좋은 영화 만드는 팁 좀 알려줘 봐요.”

“공짜로?”

“내가 십 년 넘게 WaW에 영혼까지 갈아 넣었거든요.”

“전 피디가 평소 하고 있는 것들이 좋은 영화 만드는 법이겠죠.”

“......?”

“기획은 주어진 조건에서 효율적으로 시간과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 목적이잖아요. 좋은 기획이 좋은 영화를 만들죠.”


전하영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영화의 시작은 기획이다.

어떤 이야기를 어떤 대상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그런 계획 없이는 한 발도 진행할 수 없는 것이 영화다.


“비용절감을 위해 프리프로덕션 기간을 충분히 갖는 것이 중요해요. 내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의 장점과 약점을 기획단계부터 최종 마케팅까지 매 단계마다 평가를 해야 하겠죠. 무턱대고 돈과 시간을 아낀다고 능사가 아니잖아요. 프리프로덕션 기간을 적게 가져간다고 비용절감이 되는 게 아니란 것은 전 피디도 잘 알잖아요.”


끄덕끄덕.


“배우와 스태프는 신중하게 선택하되 수준을 높게 잡아야겠죠. 원활한 소통이야 말하면 입 아픈 이야기고.”


영화과 학생들을 위한 강연마다 류지호가 반복해서 하는 이야기다.


“프로듀서든 감독이든 목표를 높게 잡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최고의 각본, 최고의 배우, 최고의 스태프, 최고의 장비 그리고 최상의 촬영장소. 그걸 갖추고 시작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야겠죠.”


듣기에는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들 같다.

막상 해보려고 하면 결코 쉽지 않다.

뭐든지 최선의 선택이 최선의 결과로 돌아오진 않으니까.

그래서 편법과 꼼수가 동원된다.

제작비가 없어서 한국영화가 나빴던 것이 아니다.

꼼수와 직무유기, 나태가 한국영화를 망쳐왔다.

그리고 또 하나는.


“와~ 별 일이네.”


전하영 피디가 탄성을 터트렸다.

류지호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피식.


류지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평소 견원지간 같았던 영화인들이 한 테이블에서 마주 앉아 편육과 막걸리를 먹고 마시고 있다.

편 가르기가 종족특성인지, 좁은 영화판에도 파벌이란 것이 존재했다.


“감독님은 존재 자체로 남북화해를 시키네요. 호호.”


<민중의 적> 고사장에서는 누군가에 대한 미움의 감정을 잠시 내려놓았다.

영화판의 파벌도 의미가 없었다.

한국영화 최고 권력자의 영화 고사장이기에 연출되는 풍경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온갖 추태를 부렸던 영화인들이 류지호 앞에서는 고분고분해졌다.

류지호가 한국영화의 지배자는 아니다.

그렇지만 그의 결정에 따라 누군가의 영화가 나락을 갈 수도 천당을 맛볼 수도 있다.

그런 현실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한국영화에 가장 많이 투자하는 큰손이자, 가장 많은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는 영화사의 오너이며, 가장 많은 스크린을 보유한 극장체인과 프로덕션 인프라스트럭처를 보유한 종합엔터테인먼트 그룹의 오너가 류지호다.

그런 류지호 앞에서 누구의 라인이니 파벌이니 하는 것은 하등 쓸모가 없었다.


✻ ✻ ✻


한국의 형사 영화 장르에서 <투캅스>는 그간 건드리는 것이 조심스러웠던 경찰을 그것도 비리경찰을 본격적으로 다룬 첫 영화였다.

프랑스 영화의 표절로 빛이 바래긴 했지만, 한국 장르영화 지평을 넓힌 영화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후로 대중들에게 강렬하게 기억된 형사 캐릭터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영구가 독보적이다.

<민중의 적>, <와일드카드>, <부당거래>, <베테랑>, <범죄도시>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영화의 단골소재인 안티히어로 형사의 초석을 다진 작품이다.

특히 <민중의 적>의 강철중은 한국의 형사 영화 장르에서 비교 대상을 찾을 수 없는 독보적인 Bad Ass 캐릭터다.

영화 <민중의 적>의 오프닝 시퀀스는 대한민국 경찰의 이중적인 모습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시작한다.

영화가 시작하면 강철중의 내레이션과 함께 대한민국 경찰의 늠름한 모습(?)과 강동경찰서 강력반의 활약을 묘사한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 영화답게 강철중의 첫 내레이션부터 찰진 욕설이 돋보인다.

류지호의 주요 필모그래피를 장식하는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거의 예외 없이 롱테이크로 시작하고 있다.

감독 류지호의 시그니처다.

당연히 <민중의 적>에서 마약조직을 소탕하는 강동서 강력반의 모습과 동료 형사가 범인에게 칼에 찔리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찍을 예정이다.

류지호의 장기 중에 하나가 인물의 동선을 따라가는 카메라 워킹이다.

특히 오프닝 시퀀스에서 영화의 주요 인물들은 물론, 이들의 상황과 영화의 배경이 되는 주요 공간, 그 분위기까지 한 번에 소개하는 게 특기다.

특히 실외에서 실내로 혹은 그 반대로 이동하는 롱테이크 기법은 스테디캠 활용의 완성형이란 평가를 받을 정도다.

바로 옆에서 보는 듯 생생한 현장감.

매끄러운 카메라 워킹에서 느껴지는 리듬감.

더불어 인간의 불안정하고 나약한 내면을 한 호흡으로 담아냄으로써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들어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한편으로 편집 없는 날 것의 이미지가 둥글둥글한 서사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암튼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면, 곧바로 강철중과 송 형사의 장면으로 넘어간다.

마약조직을 소탕한 후 증거품(마약)을 압수해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다.

이때 송 형사가 전화 한 통을 받는다.

비리 사실이 드러났다는 동료형사의 연락이다.

송 형사는 모든 죄를 자신이 뒤집어쓴 채 자살한다.

잠시 차 밖에 나가 있던 강철중은, 난데없는 총성에 놀라 차로 돌아오지만···

송 형사는 이미 죽어 있다.


[미안하데이···]


라는 독백 같은 유언을 남기고.

<민중의 적> 크랭크인에서 찍을 장면들이다.

이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멀리 강원도 옥계항의 시멘트를 주로 운송하는 항구까지 왔다.

거대한 시멘트 저장고가 바다를 위협하듯 우뚝 솟아있는 방파제에서 <민중의 적> 제작진이 한창 촬영 준비에 여념이 없다.

범죄현장을 급습한 후, 송 형사와 강철중은 장물(마약)을 챙겨 한몫 크게 잡을 수 있는 상황이다.

이런 장면은 의례 불길하게 어두침침 짙은 구름이 낀 날씨가 제격이다.

범죄스릴러 영화에서는 기본이다.

뻔한 암시다.

현재의 불안함도 보여주고 미래 벌어질 불행까지 암시하는.

류지호는 그 같은 클리셰를 피할 생각이 없었다.


‘굳이 이런 장면까지 꼬아서 어렵게 풀 필요가 없으니까.’


따라서 꾸물꾸물한 날씨나 하늘에 짙은 구름이 낀 날에 촬영하길 원했다.

날씨는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

일기예보조차 불명확했고.

촬영지인 옥계항의 1,300m 방파제에 그늘이 있을 리가 없다.

가을 뙤약볕이 내리쬐는 방파제에서 스태프들은 땀을 뻘뻘 흘렸다.

구름이 끼었을 때를 맞춰 촬영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럴 때면 갑자기 구름이 걷혔다.

또 다시 구름이 낄 때까지 기다리는 과정을 반복했다.

쉽지 않은 촬영이다.

촬영스케줄을 짤 때 초반에는 쉬운 촬영 위주로 잡는다.

어렵거나 중요한 장면들은 처음이나, 마지막에 촬영하지 않는다.

또한 날씨는 반드시 사전에 확인하고 계획해야 한다.

감독의 촬영 패턴을 고려해서 촬영 계획을 세워야 하고.

가능하다면 내용상 연결된 대로 스케줄을 짜면 좋다.

몰아서 촬영해야 하는 분량 위주로 묶어서 일정을 짜야 하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로케이션과 오픈세트, 세트촬영을 뒤섞지 않아야 하고, 오랜 시간 지방만 돌아다니지 않도록 배려하는 스케줄을 짜는 것이 좋다.

또한 적은 인원으로 촬영이 가능한 장면들은 따로 모아 놓는 것도 중요하다.

이동화는 현시점에서 충무로에서 촬영스케줄을 가장 잘 짜는 조감독이었다.

그렇게 스케줄을 짜도 언제나 현장에 나가면 변수 투성이일 경우가 허다했다.

옥계항 시멘트 공장 방파제 촬영이 그랬다.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항구다.

방파제를 통째로 빌렸다.

허가 받은 날짜는 이틀.

그 안에 촬영을 마쳐야 하는데 날씨가 안 도와줬다.

날씨 때문에 겨우 하루 더 연장할 수 있었다.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다.

이틀에 걸쳐 꾸역꾸역 대부분의 장면을 촬영했다.

이제 송 형사의 자살 장면과 강철중이 도망가는 장면만 촬영하면 된다.

날씨만 도와준다면.

스태프들이 새벽부터 몰려와 방파제에 세팅을 해두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구름 낀 하늘이 오늘에 와서는 쾌청하게 맑았다.


“연결장면이라서 날씨가 너무 맑으면 꽝인데, 이거....!”

“좀체 구름도 해를 가려주지 않네.”


그늘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방파제에 그나마 파라솔들을 쳐놓았지만, 배우들과 헤드스태프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일반 스태프들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땡볕 아래서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촬영이 지연되면서 다를 조금씩 지쳐가는 모습이다.

카메라와 함께 파라솔 그늘 아래 있는 김영복 촬영감독 역시 기운이 빠지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이러고 있으니, 덥고 지치네.”


류지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게 버터플라이 치고 특효 들어가는 것부터 찍자니까.”

“차에 피라도 튀기면 골치 아프니까 그렇지.”

“괜찮아. 미술팀에 이야기해서 얼룩 효과 좀 내달라고 하면 돼.”

“설 배우는?”

“예술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촬영 순서야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거지.”

“감독이 까라고 하면 까야지. 맘대로 하세요. 감독님~”

“안 기사!”


류지호가 특수효과팀 안재민을 호출했다.


“더미 준비할까?”

“응.”


잠시 후, 특효팀원들이 더미를 가지고 왔다.

송 형사로 출연하는 배우의 상반신과 똑같이 생긴 더미다.

이 더미를 놓고 특수효과팀이 제작할 것인지 특수분장팀에서 할 것인지를 두고 신경전을 벌인 일이 있었다.

비록 한 작품이었지만 할리우드 영화 맛을 본 안재민이다.

당연히 자신의 특효팀에서 더미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텔미썸딩>에서 특수분장 솜씨를 인정받은 오기호 기사는 자신의 전문분야라며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더미 자체는 특효팀에서 제작하고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것은 특수분장팀에서 하기로 교통정리를 했다.

원래 충무로에서는 이런 부분을 서로 떠미는 것이 관행이다.

일단 돈이 안 된다.

심지어 사비까지 따로 드는 경우까지도 있다.

기껏 열심히 만들어 와도 감독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한 소리하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도 하고.

류지호는 그런 꼴 절대 못 보는 성격이다.

두 팀이 원활하게 협조하도록 김재욱을 끼워 넣어 중재(감시)하게 했다.

암튼 송 형사의 상반신만 만든 더미의 품질이 류지호를 꽤나 만족시켰다.


‘그럼! 돈을 얼마나 발랐는데....’


류지호가 미국에서 첫 단편영화를 찍었을 때 현지 중소특수효과 업체가 가진 반자동 더미를 활용한 적이 있었다.

벌써 10년 전 일이다.

그때 사용했던 더미보다 현재 충무로 특효팀의 더미 수준이 떨어졌으면 복창이 뒤집어졌을 텐데, 다행히 안재민의 비주얼FX가 쓸 만한 더미를 만들어 왔다.

특수분장팀이 실감나는 분장까지 얹어 주었고.

암튼 쾌청한 날씨에도 촬영은 계속되어야 했다.

류지호의 요청에 따라서 조명부가 부랴부랴 초대형 버터플라이(butterfly)를 꺼내서 소품 차량 위를 덮었다.

영화에서는 조명기의 빛이 너무 하드하기 때문에 실크 천으로 만든 필터를 통해 빛을 부드럽게 해주거나 미세한 그물 모양의 망(Scrim)을 대서 빛의 세기를 낮춰준다.

김영복 촬영팀은 가로세로 3.5m가 넘는 초대형 스크림을 활용해 직사광선의 광량을 조절했다.

전날 찍은 커트들의 꾸물꾸물한 날씨와 톤을 맞추기 위해서다.

롱쇼트(L.S)나 풀쇼트(F.S)가 아니기에 스크림을 사용해도 문제가 없었다.


“역시 우리 감독님은 현장에서 결정이 빨라서 좋다니까.”


전하영 피디에게 설형기 배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피디님, 우리 잘 찍고 있는 거 맞죠?”


지금까지 설형기가 찍은 영화들을 보면 커트와 커트 사이에 시간이 꽤 있는 편이었다.

촬영현장에서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류지호 감독은 정말 빠르게 찍었다.

워낙 스피디하게 현장이 돌아가니까 배우가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럼요. 감독님이 별 말씀 없다는 건 잘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에요.”

“테이크도 많이 안 가시고.... 그 뭐냐, 뭔가 휙휙 찍으시는 것 같은데....”

“감독님하고 매번 현장모니터로 확인하잖아요. 불안하면 한 번 더 가자고 하던가.”

“저야 제 연기 보기에 급급해서.”

“류 감독님이 저래보여도 디테일에 아주 목숨을 거세요. 별 말 없이 넘어간다는 것은 허용 범위 안이란 이야기니까 그 부분에서는 설 배우가 고민하지 않아도 돼요.”


스태프들이 땡볕에서도 열심히 뛰어다닌 끝에 바뀐 촬영순서가 문제없이 준비됐다.


“슛 테스트!”


류지호가 큐사인을 내자 조감독 이동화가 외쳤다.


“탕!”


이동화가 육성으로낸 총소리를 듣고 설형기가 다급하게 차로 달려왔다.

설형기 역시 더위에 꽤 지쳐 있었다.

그럼에도 노련함이 어디 가진 않았다.

리허설을 하는 순간 바짝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가장 먼저 달라지는 것은 역시 눈빛이었다.

더위 때문에 다소 멍했던 눈빛이 어느새 매섭게 변했다.

이전 삶에서도 강철중의 체형을 만들기 위해 몸무게를 8Kg 늘렸었다.

이번에는 무려 11Kg의 체중을 늘렸다.

설형기 배우 특유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만들기 위해서다.

차기작에서 감량할 생각에 치를 떨었지만, 설형기는 류지호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설형기는 영화 내내 진중 맞으면서도 한편으로 능글능글한 모습을 통해 관객의 웃음도 동시에 이끌어내야 한다.

이번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송 형사가 자살한 것을 확인하고 미친 듯 울부짖는다.

그러다가...


[씨발, 차비도 없는데 죽긴 왜 죽어....]


이런 식이다.

집요하고 독기어린 모습 한편으로 능글능글함까지 자연스럽게 연기에 담아했다.

선을 잘 타야 한다.

한 발 삐끗 하는 순간 연기는 물론이고 캐릭터가 무너지니까.

그렇다고 힘을 빼라는 주문을 하진 않았다.

오히려 에너지를 꾹꾹 담아달라고 주문했다.

설형기가 힘을 빼고 연기를 하게 되면, 박중환이 보여준 ‘영구‘ 캐릭터를 뛰어넘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날것 나는 연기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강철중이 마냥 가벼워져선 안 된다.

강철중은 단순한 안티 히어로가 아니다.

그 자체로 한국의 사법 딜레마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시민에게 봉사해야 하는 신분이지만 아무 것도 안 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나, 부패한 형사로 보이지만 탐욕보단 생계형 비리에 가깝다거나, 본인도 범죄를 저지르는 주제에 악당을 혼내주는 아이러니라던가....

강은석 감독의 <민중의 적>도 잘 만든 영화다.

다만 한계도 명확한 영화였다.

류지호가 <민중의 적>의 메가폰을 잡은 것은 스토리텔링 외에도 보여줄 것이 많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강은석 감독은 빨리 찍는 것과 예산을 아끼는 재주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편이다.

연출도 스토리텔링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비주얼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배우가 놀 공간은 잘 만들어준다.

그것이 전부다.

밀도 있는 장면구성보다는 상황연출에 능하다.

그래서 비주얼이 요구되는 영화를 연출하면 잘 안됐다.

강은석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흥행작들은 주로 코미디 장르 영화다.

그것이 장점이자 한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은석 감독의 영화는 재밌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면 인상적인 장면이 오래 남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인상적인 대사나 배우의 연기는 떠올라도....

<민중의 적>에는 명대사라고 할 것들이 많다.

그 말은 명장면으로 남을 부분도 많다고 볼 수 있다.

류지호는 스타일리스트 성향의 감독이다.

썩 괜찮은 시나리오, 탄탄한 연기력의 배우들... 거기에 류지호 특유의 미장센과 디테일에 강박적인 연출 스타일이 만나면 좀 더 밀도 있는 영화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자신감이 류지호에게 있었다.


작가의말

어느새 3월에 마지막 날입니다. 시간이 참 빨리도 간다 싶습니다. 새로운 달에는 모든 분들께 행운이 찾아오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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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3 한국영화에 애정이 있구나.... (2) +11 23.04.15 3,388 117 27쪽
472 한국영화에 애정이 있구나.... (1) +2 23.04.14 3,271 126 26쪽
471 한 판 크게 벌여봐야겠어요. (4) +8 23.04.13 3,311 123 25쪽
470 한 판 크게 벌여봐야겠어요. (3) +4 23.04.12 3,312 126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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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8 한 판 크게 벌여봐야겠어요. (1) +7 23.04.10 3,388 123 25쪽
467 민중의 적. (10) +3 23.04.08 3,259 120 23쪽
466 민중의 적. (9) +4 23.04.07 3,214 116 25쪽
465 민중의 적. (8) +6 23.04.06 3,129 117 23쪽
464 민중의 적. (7) +3 23.04.05 3,124 114 23쪽
463 민중의 적. (6) +7 23.04.04 3,208 120 24쪽
462 민중의 적. (5) +2 23.04.03 3,235 115 22쪽
461 민중의 적. (4) +3 23.04.01 3,266 117 22쪽
» 민중의 적. (3) +3 23.03.31 3,404 116 23쪽
459 민중의 적. (2) +5 23.03.30 3,458 115 23쪽
458 민중의 적. (1) +9 23.03.29 3,508 116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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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4 쉽게 될 리가 없겠지..... +8 23.03.24 3,315 112 24쪽
453 영화가 영원히 머무는 곳. (2) +6 23.03.23 3,314 108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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