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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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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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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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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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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어쩌면, 혹시, 설마 했던 일.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류지호와 매튜 그레이엄 두 사람은 인천국제공항 출국장을 나서자마자 급박하게 움직였다.

곧바로 태안보건의료원으로 달렸다.

병실에 도착해 본 풍경 때문에 두 사람은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


어딜 봐도 위독한 모습이 아니었다.

민병길 원장은 침대에 누워 태평스럽게 잡지를 읽고 있었다.


“할아버지!”

“아저씨!”


민병길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시끄러워!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

“내가 죽었다는 소식이라도 들은 게냐?”

“....!”


천리포수목원 관리부장이 끼어들었다.


“류 감독, 우리 원장님 좀 말려봐요.”


민병길이 메마르고 퀭한 눈으로 관리부장을 째려보며 물었다.


“뭘 말려?”

“낮이나 밤이나 눈만 뜨면 책을 놓지 않고 계시잖아요! 쉬세요. 제발~”


그제야 류지호와 매튜 두 사람의 눈에 병실 풍경이 들어왔다.

침대 머리맡엔 수목 관련 잡지와 서적들이 쌓여 있고, 병실 한쪽에는 각종 꽃바구니와 과일 바구니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투약하는 게 고통스러우실 텐데 그 와중에 독서에 열중하시니.... 워낙 독한 노인네라서 정신력으로 고통을 숨기고 있으셔서 망정이지....”

“지금 내 욕했냐?”


평생 그림자처럼 민병길을 따른 관리부장이다.

두 사람이 함께 한 시간이 길었고, 그 만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이다.

따라서 민병길이 투병으로 예민해져서 성질을 부리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시늉만 하는 것이다.

민병길은 평생 한국의 정·재계와 무수한 인연을 맺었다.

그럼에도 깊은 교유관계를 맺은 인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한국은행 근무 시 사귄 친구들 특히 전 한국은행 총재와의 우정은 유명했다.

그 외에 수목원 식구들과 류지호 정도다.

민병길에겐 1961년에 입양한 양자가 있었다.

자식에게 자신의 한국성을 따르게 하지 않았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미국의 친 혈육 몇 명 빼고는 가족도 없다.


“의사 말 좀 들으세요.”

“내겐 독서하는 게 안정이야.”

“이거 구해와라 저거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 알아 와라.... 잘도 지시하십니다.”

“어허. 말이 많다.”


민병길과 관리부장이 옥신각신했다.


“할아버지, 쉬고 계세요. 맷과 잠시 나갔다 올게요.”

“얼굴 봤으니 됐어. 바쁠 텐데 그만 가봐.”


병실을 빠져나온 두 사람이 담당 의사를 찾아갔다.

의사의 소견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현재로서는 통증에 대한 처방만 하고 있는 상황.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밖에는 말씀드릴 게 없어요.”


서울의 대형병원으로 옮기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의사면담을 마친 류지호와 매튜는 서울로 올라가지 않았다.

태안읍에 방을 얻은 후 사흘 동안 병원을 들락날락거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문안을 하고 돌아갔다.

한국은행 출신 증권맨, 식물학계 교수와 연구원을 비롯해 다양한 사람들이 다녀갔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있는가 하면, 손자뻘의 대학생도 있었다.

강원도 산골의 촌로도 찾아왔다.

저 멀리 전라남도 땅끝마을에서 올라온 여성 불자도 있었다.

학창시절 민병길로부터 학비를 보조받았다는 중년의 변호사도 있었다.

꽃바구니를 들고 온 70대 할머니의 문병이 꽤나 은근하고 다정다감했다.

한때 장안에서 명성을 날린 기생이었다는 그녀는 젊어서 사귄 이방인 청년을 변함없이 마음에 두고 있다고 수줍게 고백했다.


“우리 원장님은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특별히 친한 사람도 없어.”


최측근이랄 수 있는 수목원 관리부장의 말이었다.

각양각색의 문병객이 말해주듯 민병길은 25세 때 미군 청년장교로 한국에 첫발을 디딘 이래 57년 간 수많은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가 친했던 한국인들은 정·재계의 유명 인사들보다 청년 지식인이나 가난한 예술가 같은 보통 사람들이 더 많았다.

특히 농부들을 좋아해서 젊었을 땐 시골 마을을 많이 찾아다녔다.

천리포에서 베풀어진 지난 팔순 잔치에는 추위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골촌로들이 찾아와 무병장수를 빌어줬다.


“지호야... 내가 왜 너를 좋아하는 줄 아니?”

“후원금을 많이 내놔서요?”

“예끼 이놈아!”


외모만 서구인이지 말투만은 영락없는 한국의 여느 시골 노인네다.


“네 눈빛이 선량하고 얼굴 윤곽이 맑고 체구가 약간 말라서 그랬다.”


류지호가 농담으로 받았다.


“할아버지 이상형에 제가 부합될 줄은 몰랐네요.”


민병길은 유독 한국인을 좋아했다.

같은 동양인이라도 중국인이나 일본인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음험해 보이고 약삭빠른 인상이 싫다는 것인데, 심성이 너그러운 그도 민족성에 관한 편견이 심한 듯 보였다.

한국인의 장점이 선량하고 여유가 있는 모습이라 이야기 하곤 했다.


‘선량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여유는....’


류지호로서는 솔직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인생은 길어야 백년이지만, 나무는 천년을 산단다. 아마도 내가 평생을 몰두했던 원예나 네가 하고 있는 예술이나 비슷한 면이 많지 않을까 싶어.”

“.....”

“한국은 산악지대가 전 국토의 66%나 되는 데도 산림자원에 대한 관심이 너무 미약해. 내가 아는 한, 소나무와 잣나무를 구분할 줄 아는 한국인은 10%도 안 된다. 내가 언젠가 보니까 자연보호를 한다고 어깨에 띠를 두르고 거리나 등산로 입구에서 캠페인을 하던데, 그것도 이상해. 더욱 한심한 것은 쓰레기를 줍게 한다고 봄철에 수백 명의 청소년들을 산 속에 풀어 놓는 것이야. 쓰레기는 줄어들지 모르지만 자라는 새싹들이 그들의 발길에 밟혀 죽을 테니 얼마나 애석한 일이냐.”


류지호는 토를 달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어쩌면 민병길과의 마지막 대화가 될 수도 있었기에.

그렇게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결국 민병길이 그토록 좋아하는 꽃, 목련이 필 때 영면에 들었다.

유족으로는 미국인 여동생과 양아들 둘 뿐이었다.

유족들은 태안보건의료원 장례예식장에서 시신을 안치하고 5일장으로 장례를 모셨다.

주제넘게 류지호가 상주를 할 순 없었다.

그저 의형인 매튜 그레이엄과 함께 가족처럼 장례식장을 지킬 뿐.

수많은 조문객들이 다녀가고, 심지어 그 대단한 대니얼 그레이엄까지 바쁜 시간을 쪼개 한국의 태안까지 날아올 정도다.

당연히 류지호의 가족들도 태안으로 내려왔다.

유족들과 관계자들은 천리포 수목원에서 영결식을 거행한 후에 민병길 본인의 손길이 진하게 묻어있는 천리포수목원 뒷동산에 안장하기로 했다.

영결식은 그가 몇 년 전 귀의한 원불교식으로 치러졌다.


"경전처럼 살다간 우리 시대의 성자."


원불교 참석자가 민병길의 행적을 표현한 말이었다.

민병길은 꽃상여에 실려 마을 친구의 선소리를 좇아 수목원 구석구석을 밟고는 영원한 휴식에 들어갔다.

작년에 원예인으로서는 최고 영예인 금탑산업훈장을 받았고, 작고한 뒤엔 국립수목원 ‘숲의 명예전당’에 동판 초상이 헌정됐다.

지금까지 전당에 헌정된 사람은 단 5명뿐이니 얼마나 영예로운 일인지 말해 준다.

원예계의 노벨상이라는 영국 왕립원예협회의 비치 메달도 수상했고, 미국 프리덤 재단이 주는 평화와 자유, 민주주의 실현에 헌신한 공로로 메달을 받기도 했다.

한 때 한국 자생식물을 해외에 반출했다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세계 식물지도에 한국이 편입된 것은 전적으로 민 원장의 공로다!”


국내 식물학계의 원로학자이자, 서울대 명예교수, 우리식물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의 일갈이었다.


[한국에도 훌륭한 수목원이 있다는 것을 세계에 알린 사람도 민병길 원장, 세계의 희귀식물을 들여와 국내학계에게 연구자료로 제공한 것도 민병길 원장이었다. 특히 완도 호랑가시를 비롯해 몇 종의 한국 고유 식물을 세계에 알린 공로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


한국의 지상파 방송과 뉴스전문채널에서도 민병길의 타계 소식을 주요 뉴스로 다뤘다.

암선고를 받은 후로 민병길은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 전에는 천리포 수목원의 장래문제를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었다.

따라서 천리포 수목원의 처리를 놓고 설왕설래가 있었다.

그때 유가족이 류지호만 따로 불렀다.


“수목원의 미래는 미스터 류와 이 교수에게 맡긴다는 유언을 남기셨어요. 다른 유언 내용은 밝힐 수 없음을 이해바라요.”


수목원을 팔라는 놈부터, 지자체에 기부하라는 뻔뻔한 공무원까지.

별의 별 작자들이 나댔다.

어떤 국회의원은 후원회 결성에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은 주제에 재단이사장인 민병길이 타계하자 그 자리를 탐내기까지 했다.

류지호는 민병길의 친우 이 교수와 심복이었던 관리부장을 따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서울대학에서는 수목원을 기증받지 않기로 했다고요?”

“한 동안 논의를 한 것으로 아네만..... 어떤 결론도 도출하지 못했지.”

“관리부장님, 현재 나와 가온그룹의 후원 외에 일반 후원 상황은 어때요?”

“2년 전 처음 후원자를 공모했는데, 현재까지 들어 온 금액은 1억 2천만 원 정도네.”

“천리포수목원 후원회장도 태안에 와 있어요?”

“아직 태안에 있을 걸세.”

“불러주세요.”


천리포수목원 재단 이사회, 직원들, 후원회장이 한자리에 모였다.

류지호는 그들과 함께 수목원의 미래를 위해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


“수익사업을 벌이는 한이 있더라고 무조건 자체운영을 해야 합니다!”


수목원 직원들이 일치된 의견이었다.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18만평 부지 전체에 철책을 둘러쌓아 외부인의 출입을 막아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처럼 수목원 식물을 보호하고 새로운 종자발굴과 묘목 연구에만 집중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식물관련 학자 중심의 이사회의 권고였다.


“수목원을 일정한 날에 개방하는 행사를 열면 좋겠습니다. 그때 모금행사도 벌이고요.”


후원회의 요청도 있었다.


“큰 액수를 모아 준 회원분들께는 고맙지만 연간 4억 원의 운영비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류지호 의장께서 매년 1억 원을 후원해주시고, 다울재단도 매달 후원을 해주고 계시는데다가 다행히 산림청으로부터 매년 3억 원씩 지원금을 주기로 해서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수목원 관리부장의 설명이었다.

솔직히 류지호는 수목원 운영에 연간 4억이나 들어가는지 몰랐다.


‘말씀을 하시지....’


류지호는 자신과 다울재단의 후원만으로 충분히 운영이 가능할 줄 알았다.

사실 운영자금의 부족분은 민병길이 증권투자 자문료를 받아 충당해 왔다.


“후원회장님, 현재 천리포 수목원 후원 상황은 어떻습니까?”


류지호에게 지목을 받은 전북대 생물학과 교수가 입을 열었다.


“3년 전에 구성된 천리포 수목원 후원회는 현재 회원수가 401명입니다. 그 중 절반이 넘는 228명이 연회비 6만원의 일반회원이고, 98명이 연회비 10만원의 가족회원입니다. 평생회원을 보장하는 100만 원 이상의 기부회원은 38명뿐이고, 나머지는 연 3만원의 학생회원 37명과 연 40만원의 기관회원 7명입니다. 류 의장님 빼고 후원자 명단엔 알 만한 기업체나 재력가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 다소 아쉬운 부분입니다.”

“관리부장님, 현재 수목원이 18만 평, 7개 구역 맞아요?”

“맞네.”

“일 년 운영비는 4억 원 이고요?”


관리부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1년에 4억 원 조금 넘게 운영비가 들어가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수목원의 존립을 돕겠다는 명망 있는 기부자가 이렇게 없다니.... 국가적인 불행입니다.”

“명망가 여기 있잖아요. 엄한 데서 명망가 찾지 말고.... 운영비는 걱정 하지 마세요. 일단 수목원 개방에 대한 것만 결정합시다.”


갑론을박 끝에 현행대로 수목원을 개방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후원자들을 위해 ‘어린이 날’ ’후원회원 우정의 날‘ 등을 정해 가족동반으로 수목원을 방문하는 투어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했다.


“바뀔 것은 없습니다. 현행대로 법인으로 남겨둡시다. 직원과 관리직도 몇 명 더 채용하고, 세계 유수 대학의 식물관련 학과와 좀 더 교류를 활발히 하세요. 후원 모금 목표는 10억입니다. 채우지 못한 부족분은 전액 가온이나 다울 그리고 내가 책임집니다.”


유언장에서 언급된 인물이자 최대 후원자가 그리 정리하니 따를 수밖에.


“이사장은.... 당연히 류 의장님이?”


류지호는 한사코 고사했지만, 모두가 한목소리로 추대를 하니 도리가 없었다.


“좋습니다. 다만 수목원의 운영 지원 외에는 나는 전혀 관여하지 않습니다. 새로 임명될 원장과 관리부장에게 수목원 업무를 일임하겠습니다.”


민병길과의 인연을 떠나서 류지호 본인이 천리포수목원에 애정이 있었다.

과거로 돌아온 후 잡념으로 머리가 시끄러울 때 내려와 몸과 마음을 추슬렀던 장소가 천리포수목원이었다.

민병길 사후 천리포 수목원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렇다고 재단업무까지 맡을 여력은 없지만.

여담으로 천리포수목원의 7개의 관리 지역 중 첫 번째 정원인 밀러가든(Miller’s Garden)을 2009년 3월 1일부터 개방하게 된다.

남은 지역은 수목 보호를 위해 일반에 개방하지 않는다.

다만 대학과 연구기관에 한해서 연구목적으로만 공개한다.


❉ ❉ ❉


‘손수 가꾼 나무들을 사랑하시더라도 더는 머물지 마시고, 좋은 곳으로 가셔서 편히 쉬세요.’


류지호는 수목원을 곳곳을 산책하며 그렇게 기원했다.


“Jay!"


류지호가 수목원을 돌아다닐 때 어디선가 레오나 파커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병길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아직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하얗게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는 목련 아래로 레오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목련의 꽃말은 고귀함, 숭고함이다.


‘예쁘네...!’


사방이 하얀 목련.

나무 사이로 난 길은 마치 예식장의 신랑신부가 걷는 웨딩 아일(Wedding Aisle) 같았다.

목련의 꽃망울이 하얀색 웨딩장갑을 떠올리게 했다.


절레절레.


류지호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잡생각을 털어버렸다.

목련과 관련된 전설이 비극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안 돌아가도 돼?”

“봄 학기 브레이크 타임이야. 이번 주는 한국에 있으려고.”

“뭐 하는데?”

“글쎄. 큰오빠가 놀아주지 않을 테니까 언니랑 놀아야지 뭐.”

“제주도 놀러 갈래?”

“제주도? 뭐야 지금 나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거야?”

“그래. 데이트 신청이야.”


급작스럽게 나온 말이라 레오나가 눈만 끔벅거렸다.


“머리도 식힐 겸 서핑을 좀 하고 싶은데, 한국에서는 제주도만 서핑 클럽이 있는가봐. 싫으면 말고.”

“아, 아니야, 갈게! 갈게! 나도 큰오빠랑 서핑 하고 싶어.”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내면 모른 척하기도 쉽지 않다.

레오나와 관련해 더는 회피하거나 미루어서는 안 되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른들의 바람과 기대를 무시하는 것도 불효고.


“레오나,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 줄은 알지?”

“어? 으응!”

“나는 한국의 사업이 자리 잡을 때까지 양국을 오가야 해.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는 일도 있거든.”


레오나는 류지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쩌면, 혹시, 설마....

하는 심정으로.


"한국에서는 아직은 내 명성이나 영향력이 필요하니까.”

“나도 로스쿨까지 마치려면 몇 년이 더 필요한 걸.”


미국은 로스쿨에서 3년간 수학한 뒤 각각의 주 별로 치러지는 변호사시험을 합격해야만 변호사로서 소송을 진행할 수가 있다.


“큰오빠가 하나 놓치고 있는 게 C&W 로펌은 미국에서만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아. 전 세계 주요 국가에 사무소를 두고 있다고. 만약 내가 변호사가 된다면 나도 세계 어느 나라로 가서 일을 하게 될지 몰라. 피차 마찬가지야.”


미국 대형 로펌들은 대부분 주요 국가에 사무소를 두고 있다.

소속 변호사들도 여러 나라를 오가며 근무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러한 다국적 로펌에서 근무하는 변호사들이나, 국내와 해외 변호사 자격증 모두를 취득한 변호사,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변호사를 보통은 국제변호사라고 부른다.


“잘도 캐서린이 너를 다른 나라로 보내겠다.”

“가족이라도 특별대우 없거든. 조기 졸업해서 2년 안에 로스쿨 갈 거야.”

“스탠퍼드 수업 따라가려면 꽤 빡빡할 텐데?”

“무리 해야지 뭐. 그래도 공부만큼 쉬운 것도 없잖아.”

“공부가 쉬워?”

“난 운동하고 잘 안 맞나봐.”

“그런 녀석이 육상에서 메달을 그렇게 많이 땄어?”

“다 어린 애들하고 벌인 경기였는걸.”

“넌 어른이었냐?”

“다 애송이들었다구.”

“그렇게 잘난 척 하다간 곁에 아무도 안 남는다.”

“큰오빠니까 솔직하게 말하는 거지. 딴 애들 앞에서는 안 그래. 그리고 난 또래 남자들한테 매력을 못 느끼겠어. 다들 유치한 것 같아서.”


청소년기의 여학생들이 또래 남자보다 조숙한 편이긴 하지만, 레오나처럼 명문가에서 태어나 자란 소녀들은 조금 더 어른스러운 편이다.

조기교육을 받아서도 선민의식이 있어서도 아니다.

조부, 부모, 삼촌들 또 혈연으로 연결된 가족 구성원들이 최고 학벌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보니 일상대화가 일반 가정과 다를 때가 많았다.

아무리 파커의 가풍이 소탈하다고 해도 억만 장자의 일상생활이 일반가정과 같을 수가 없다.

어릴 때부터 보고 듣고 느끼고 접하는 모든 것들이 남다를 수밖에.

때문에 레오나는 어지간한 남자는 눈에 차지 않았다.


“나는 가난한 집안 출신인데?”

“그, 그러니까 더 대단하지."


레오나가 말을 더듬었다.

설마, 혹시가... 진짜가 되는 순간이었기에.


"자, 자신은 변변한 능력도 없는 주제에 가문과 부모 배경만 믿고 까부는 남자들보면 한심해. 다 어린 애 같아. 매력을 못 느끼겠어. 난 큰오빠가 정말 자랑스러워. 자상하고, 모두에게 친절하고 스마트하잖아.”

“두 얼굴의 사나이면 어쩌려고?”


레오나가 아랫배에 힘을 빡 주고 입을 열었다.


“헐크의 연인, 배티 로즈가 되지 뭐.”

“.....?”

“아니, 아니야! 아이언맨의 파트너 페퍼 포츠가 될래. 배티 로즈는 너무 수동적이고 연약한 이미지야. 페퍼 포츠는....”

“토니 스타크의 비서지. 배티는 헐크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고.”

“그래도 싫어. 최고 기업의 CEO로, 토니의 연인으로, 토니의 정신적 지주이자 아내 그리고 한 아이의 엄마로, 난 그렇게 살 거야.”

“나는 토니 스타크처럼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게 해 줄 수 없을 텐데?”


레오나가 마치 남자형제에게 하듯 류지호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나도 평범하지 않으니까.”


류지호가 그런 레오나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어트렸다.


히히.


레오나가 혀를 날름 내밀며 귀엽게 미소 지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격받을지도 몰라."


백인 우월주의 혹은 인종차별주의자.

파커가문에 속한 수많은 사람 가운데 그런 사람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 외 사람들은 두 사람이 알 바도 신경 쓸 일도 아니고.


“나두 파커이자 그레이엄이거든! 누가 감히!”


누군가가 보면 참 재수 없는 모습이겠지만, 류지호의 눈에는 귀엽게만 보였다.


“가문이나 아빠·엄마의 사회적 지위를 보고 접근하는 남자들이 앞으로 내 애인이 오빠인 걸 알게 되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을 거야.”

“큰오빠를 네 방패막이로 써먹겠다는 말이네?”

“큰오빠도 마찬가지일 걸? 할리우드 여자들이 더는 귀찮게 하지 않을 걸?”


그렇긴 했다.

가문, 학력, 미모, 나이(?)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레오나 파커였으니.

게다가 가문이 워낙 대단해야지.


“게이라는 소문도 한 번에 불식시키고.”

“그걸 누가 믿는다고.”

“스탠퍼드의 친구들은 믿던데?”

“그렇게 믿고 싶은 건 아니고?”

“모르지. 내게 은근슬쩍 진짜 게이냐고 묻더라고.”


잠시 대화가 샛길로 샜다.


“암튼, 조기졸업은 가능할 것 같아? 여름학기도 들을 거야?”

“응.”

“로스쿨은?”

“예일.”


로스쿨 Top14.

보통 T14라고도 하는 로스쿨 상위 14개 대학 중 상위 6개 학교 즉 예일, 스탠퍼드, 하버드, 시카고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 뉴욕 대학을 따로 T6이라고 하고, 극단적으로 하버드, 스탠퍼드, 예일만 제대로 된 로스쿨로 쳐주기도 한다.

Top3가 알아주는 이유는 로스쿨 졸업자들이 가장 영예로운 직장으로 여기는 법학자 및 재판관들이 대부분 이 세 학교 출신들이기 때문이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남들 다 하는 건데 뭘.”

“순호는 자주 봐?”

“작은 오빠는 요새 애인한테 푹 빠져 있어.”

“같이 산책할래?”


레오나가 냉큼 류지호의 팔짱을 꼈다.

두 사람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수목원을 거닐었다.

연애 감정이 말라버린 중년의 정신 상태.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말은 다른 경우에 쓰는 말이지만, 류지호의 경우가 그랬다.

류지호는 새삼 낸시 카트와이트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어찌되었든 말라버린 연애 세포를 되살려 준 장본인이었으니까.

여담으로 두 사람의 교제 사실이 알려지게 되어도 큰 소란은 없다.

마치 그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많은 이들이 류지호와 레오나 사이의 스토리를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두 사람이 연인으로 발전할 것이라 예상한 사람들이 많았다.

한국 네티즌들은 류지호에게 새로운 별명을 안겨준다.

도둑놈!

띠동갑 연하와 교제하거나 결혼하는 남성을 '도둑놈'이라고 풍자한다.

물론 이 별명을 얻게 되는 건 비밀연애가 들켰을 때다.

먼 훗날의 이야기다.


[나에게 없어선 안 될 단 하나를 꼭 지켜낼 수 있으면 좋겠어... 바로 당신. 토니 스타크야.]


영화 <아이언맨Ⅲ>에서 밝고 지성미 넘치는 아내 페퍼 포츠가 매일 밤 악몽을 꾸며 힘들어 하는 남편 토니 스타크에게 한 말이다.

지독한 워커홀릭이자 인간의 욕심 때문에 지옥으로 떨어진 군상들을 바라보며 고민하는 ‘단테’를 묘사한 ‘생각하는 사람’처럼 ‘온 몸이 머리가 되고, 혈관에 흐르는 피는 뇌가 되어버린 류지호에서 사랑의 열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더 늦기 전에 뜨겁게 사랑하기로....


작가의말

마스크를 좀 벗어보려고 해도 황사인지 미세먼지인지 신경이 쓰여서 야외활동할 때는 꼭 착용하게 됩니다. 날씨가 더 더워지면 마스크를 벗어던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건강 유의하시고 행복한 하루 보내십시오.

PS. 주형이님 과분한 후원에 감사하단 말씀 드립니다. 성실연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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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 맹수가 얌전하도록 가만 놔둬라. (2) +5 23.05.27 3,251 119 24쪽
511 맹수가 얌전하도록 가만 놔둬라. (1) +7 23.05.26 3,189 116 24쪽
510 MUJU Rock Festival! +2 23.05.25 3,141 127 21쪽
509 류지호 사단. (5) +4 23.05.24 3,178 118 23쪽
508 류지호 사단. (4) +12 23.05.23 3,152 146 26쪽
507 류지호 사단. (3) +9 23.05.22 3,197 119 25쪽
506 류지호 사단. (2) +11 23.05.20 3,230 107 25쪽
505 류지호 사단. (1) +5 23.05.19 3,255 117 24쪽
504 영화를 하는 한 도전은 계속된다! +5 23.05.18 3,140 118 24쪽
503 권력은 사람들이 권력자라고 믿는 사람에게 있다. (2) +10 23.05.17 3,153 131 26쪽
502 권력은 사람들이 권력자라고 믿는 사람에게 있다. (1) +5 23.05.17 3,135 111 26쪽
501 실사화에 적합한 감독이라는 걸 증명할게. +12 23.05.16 3,114 121 27쪽
500 미래는 정해져 있다? +23 23.05.15 3,190 134 24쪽
499 Action Camera. +5 23.05.13 3,133 125 22쪽
498 너한테 나는 친구 맞지? (4) +9 23.05.12 3,200 125 25쪽
497 너한테 나는 친구 맞지? (3) +4 23.05.11 3,191 111 22쪽
496 너한테 나는 친구 맞지? (2) +6 23.05.10 3,190 119 25쪽
495 너한테 나는 친구 맞지? (1) +4 23.05.09 3,235 109 23쪽
494 소중한 걸 놓치지 않으려면.... +7 23.05.08 3,328 120 24쪽
493 그 정도 돈은 써도 돼. (3) +3 23.05.06 3,419 111 23쪽
492 그 정도 돈은 써도 돼. (2) +4 23.05.05 3,263 112 21쪽
491 그 정도 돈은 써도 돼. (1) +10 23.05.04 3,246 111 21쪽
490 저희 리조트에는 샛길이 없습니다! +9 23.05.03 3,250 115 25쪽
489 무럭무럭 커라! (2) +4 23.05.02 3,351 109 26쪽
488 무럭무럭 커라! (1) +4 23.05.01 3,419 114 27쪽
487 자원이 남을 때는 멀티를 건설하라.... +3 23.04.29 3,467 114 25쪽
486 만조 때 물의 흐름을 타야 한다. (3) +4 23.04.28 3,330 110 24쪽
485 만조 때 물의 흐름을 타야 한다. (2) +3 23.04.27 3,431 116 26쪽
484 만조 때 물의 흐름을 타야 한다. (1) +9 23.04.26 3,419 108 25쪽
483 어쩌면, 혹시, 설마 했던 일. (2) +3 23.04.25 3,427 128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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