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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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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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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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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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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소중한 걸 놓치지 않으려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저희 연구센터는 대전의 지역적 인프라를 기반으로 새로운 첨단 영상기술 메카를 꾸리기 위해 의미 있는 첫 걸음마를 막 떼기 시작했습니다. 지속적인 투자와 연구개발이 이루어진다면, 한국 SF영화의 탄생도 꿈꿔볼 수 있습니다.”


류지호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피식.


SF영화는 많은 영화감독들의 로망이다.

하지만 어설프게 건드렸다가 낭패 보기 십상인 장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막대한 제작비.

때문에 아무 감독에게나 SF영화 연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일부 선민의식에 찌든 평론가들이 SF영화에 대한 판타지를 관객들에게 심어주고 있다.

SF영화에 반드시 메시지와 철학이 내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독 SF영화장르에 미학적·예술적 잣대를 높게 세운다.

수백 편의 SF영화중에서 명작이라고 불릴 영화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놈에 철학적 물음병이라니....!’


SF영화장르를 예술지향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사람들은 SF영화를 통해 과학 기술의 위력을 실감하면서 자신들이 여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그것을 충족해 준 것으로 영화를 만든 첫 번째 목적을 이룬 것이다.

주제의식이니 철학적 담론을 거들먹거리는 것은 지식자랑을 하고 싶어 안달 난 먹물들의 선민의식일 뿐이다.

물론 철학을 잊은 과학은 있을 수 없고, 철학과 과학은 쌍둥이란 관점에서 SF장르는 진리에 대한 의문과 탐구, 인류에 대한 경고 등 감독이 의도하지 않아도 담론이 만들어지긴 한다.

그렇다고 해서 관객에게 SF장르는 무조건 새로워야 하며 묵직한 주제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세뇌에 가까운 강요를 해선 안 된다고 류지호는 믿었다.

수많은 먹물들이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최악의 쓰레기라고 평가길 주저하지 않는데, 그 영화를 본 1억 명이 넘는 사람들은 쓰레기를 보며 열광하는 바보천치일까.

이 시기 한국의 SF영화장르는 일부 평론가와 준비 안 된 영화인들의 성급함으로 인해 필요 이상의 진입장벽이 생겨버렸다.

PC통신 시절 SF장르 소설 활성화로 인해 문학분야에서는 날로 발전하고 있음에도 만화·영화 분야로 연결되고 있지 않아 류지호로서는 매우 유감이었는데, 안심하고 SF영화를 맡길 감독도 눈에 띠지 않고 있었다.

암튼 류지호 본인은 언제든 SF영화를 찍을 수 있다.

여러 개의 SF 영화 시나리오를 써놨고, 틈이 날 때마다 손을 보고 있다.

좋은 원작을 언제든 구입할 수도 있다.

제작비도 얼마든지 조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탄탄한 인프라와 자신만의 크루를 갖추고 있기도 하고.

그렇다고 해서 가볍게 건드릴 순 없었다.

당장 Snowstorm Entertainment에 <스타크래프트>와 <워크래프트>의 실사화에 함부로 나서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치열하게 영화 판권구입 협상 중인 <AKIRA> 역시 성급하게 실사화 약속을 남발하지 말라고 말해두었다.


‘제작비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시기를 잘 조율해야 하지만.....’


이전 삶에서 <아바타>의 제작비는 2.4억 달러였다.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은 2.8억 달러였고, 경쟁사 타임-워너의 <저스티스 리그>는 무려 3억 달러였다.

<캐리비안의 해적 : 낮선 조류>는 3.8억 달러의 예산을 썼다고 하지만.

부담스러운 예산임에는 틀림없다.

이 영화들의 손익분기점은 6억 달러가 넘었다.

물론 인건비 부담(주연배우 몸값)이 만만치 않아서 실제 영상 구현에 들어가는 예산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또한 기본적으로 3,000만 달러는 각종 세금 혜택 등으로 보전 받기도 하고.

암튼 SF영화는 VFX만 가지고는 안 된다.

프리프로덕션부터 포스트프로덕션까지 관련 기술이 총망라되어야 하기에.


‘Snowstorm IP 활용에 대해서도 고민이네.’


류지호는 Snowstorm을 인수하는 순간부터 고민에 빠졌었다.

<아바타>에 앞 서 <스타크래프트> 실사영화를 공개하는 것이 좋을지 그 이후에 기술이 좀 더 성숙해 지면 할 것인지.

류지호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디지털 관련 업체들을 수집하는 것은 이전 삶에서 망친 게임·코믹스·웹툰 원작 실사영화를 살려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퇴마기록> 한 편을 살려보겠다고 한국에 VFX부터 포스트프로덕션 시스템을 아예 밑바닥부터 구축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차곡차곡 기술과 노하우를 쌓아가고 있긴 했다.

그럼에도 뭔가 미진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고.

암튼 SF잡지 어메이징 스토리스(Amazing Stories)에 스타크래프트 단편소설 <Revelations>이 연재됐다.

<워크래프트>와 <디아블로> 소설 시리즈 또한 꾸준히 출간하고 있다.

스토리와 세계관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있긴 했다.


‘중요한 건 스토리텔링인데 말이지......’


시각적으로 화려하고 아찔한 경험을 선사하지만, 어디서 많이 보던 것들이 나열된 영화는 좋은 영화가 아니다.

명품을 베껴서 팔아먹는 저질 짝퉁과 다를 것이 없으니까.

게임 ‘스타크래프트’에는 수많은 걸작 SF영화의 오마주와 표절(?)이 난무하고 있다.

그것들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할 수도 없고, 그대로 가져갈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이다.


‘아직은 시간이 좀 있으니까.....’


Snowstorm IP 프로젝트들은 아직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Eye-MAX 3D 영화로 구상 중이기 때문이다.


“다른 연구실도 둘러봅시다.”


류지호는 연구소장의 안내를 받아 대전에 갖춰진 R&D 센터를 꼼꼼히 둘러봤다.


❉ ❉ ❉


IMF 구제금융 한파와 님비(NIMBY) 심리가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쉼터마저 빼앗아갔다.

대전시 중구에 한 한방병원이 있다.

지난 1996년부터 영세민 환자 무료진료는 물론 행려환자나 무의탁 기거자에게 본인이 원할 때까지 치료와 숙식을 거저 제공하는 등 인술을 펼쳐 왔다.

그러나 1998년 말 경 5,000만 원짜리 어음을 막지 못해 부도를 냈다.

원장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울재단에 도움을 요청했다.

류민상은 사무장과 함께 직접 대전까지 내려와 병원의 실태를 확인하고, 건물이 경매로 넘어갈 뻔한 것을 막아줬다.

환갑을 앞 둔 한방병원 원장이 후회와 반성의 말을 늘어놓았다.


“모두 제 탓이지요. 사회복지법인 대신 굳이 의료법인을 고집한 탓이 컸습니다.”


처음에는 한방병원을 운영하며 친한 기독교인들과 함께 십시일반 돈을 모아 사회복지시설이나 불우한 이웃을 꾸준히 돕는 정도였다.


“가진 게 한약재이다 보니 개인적으로 불우한 노인이나 양로원 등에 한약을 무료로 나눠주기도 했지요. 그런데 사람이란 게 체질과 병이 제각각이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한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실효성이 있을 것 같아서 일반 환자에게는 돈을 받더라도 지체장애인 무의탁환자 같은 분들에게는 진료와 처방을 무료로 해주는 일이 시작했지요.”


그랬던 것이 치료와 한약재 제공은 물론 입원도 시키면서 간병과 요양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너무 안일했다.

정부에 손을 벌리지 않겠다며 사회복지법인 대신 의료법인으로 설립했던 것.

일반 외래환자들에게서 나온 수입으로 행려환자와 무의탁노인들을 보살필 작정이었다.


“법인으로 만들고 처음에는 일반 환자들도 입원을 시켰는데, 무료로 치료받는 환자들을 생각해서 일반 환자는 입원을 금지하고 통원치료만 허용했습니다. 아무래도 일반 환자를 문병 오는 이들이 많다보니 무의탁환자들은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지요.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 같아서 방침을 바꿨습니다.”


일반 환자 통원치료만 하니 수입이 현저히 줄 수밖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우한 환자들이 많이 찾게 되면서 한방병원이 사회복지시설로 인식되면서 일반 환자들의 발길이 갈수록 뜸해졌다.


“왜 그런 심리 있지 않습니까? 불쌍한 사람은 돕지만 내 집 근처에는 혐오시설은 안 된다 그런 거요.”


님비심리의 변종이라고 할 수 있다.


“자꾸 월수입이 줄더니 3,000만 원 아래로 떨어지게 됐죠. 원장과 부원장 포함해서 한의사가 4명, 간호사와 그 밖에 직원까지 33명이 정식직원이었는데, 인건비만 매달 5,000만 원이 넘게 나가는데다가 투약, 시설 유지보수 같은 병원의 기본경비와 무료 환자들 숙식제공까지 합해 달마다 1억 원 이상이 들지 뭡니까.”


2년간 운영하면서 8억 원의 적자를 보게 됐다.

그때쯤 은행으로부터 병원건물을 담보로 9억 원을 빌리게 되었고,

그것이 화근이 됐다.

대출받은 돈은 당장 급한 병원을 지으면서 빌린 빚을 갚는 데 썼다.

그러니 병원 적자를 메울 도리가 없었다.

결국 부도가 났고, 한의사 4명과 간호사 물리치료사 등 의료인들이 하나둘 병원을 떠났다.


“사글세 얻어서라도 저 혼자 계속할 생각도 했어요. 자식 놈들은 제 밥벌이는 하고 살고들 있으니 혼자서 어떻게 든 될 것 같았거든요.”


어려운 사정이 알려지면서 곳곳에서 후원이 들어왔다.

결정적으로 다울재단에서 도움을 손길을 보내주면서, 병원을 의료법인이 아닌 사회복지시설로 전환할 수 있게 됐다.


“현재 근무하고 있는 부원장과 수간호사는 자신들이 일하던 병원에서 퇴사해서 저번 달에 합류했고, 일반 자원봉사자도 지원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추가 적자도 없고..... 정말 고맙습니다. 의장님... 정말 고마워요.”


한방병원장이 류지호의 손을 꼭 잡고 연신 눈물을 글썽거렸다.


“고맙다는 말씀은 다울재단 이사장님께 하세요. 나는 뭐 별로 한 것도 없어요.”

“아이구. 무슨 말씀을.... 이사장님 말씀으로는 의장님이 우리 병원 지원금을 모두 주신다고 하시던데....”

“다울재단 후원자 중 한 명일뿐입니다. 감사는 다울재단 후원자들에게 하세요.”


다울재단은 대전 한방병원 외에 전국적으로 다섯 곳의 자선병원을 지원하고 있다.

류지호는 한방병원을 떠나기 전 자원봉사를 했다.

병상 시트 수거와 교체를 돕거나 무거운 물건을 옮겼다.

서울로 돌아온 류지호는 가온웨딩스튜디오 포토그래퍼들과 함께 영정사진 봉사를 나갔다.

영정사진 무료 촬영은 주안 스튜디오 시절부터 십년 넘게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전통이다.

몇 년 전에는 영정사진 봉사활동으로 국무총리상도 받았다.

류지호는 수행원을 최소한으로 해서 상계동으로 향했다.

상계동사무소에서는 가온웨딩 스튜디오 봉사단의 도움을 받아 살아계실 때 영정사진을 준비하지 못하는 저소득 독거노인에게 그 어떤 사진보다 예쁘고 화사한 영정사진을 찍어드린다는 홍보를 대대적으로 벌였다.

오전에만 스물 넘은 노인이 사진 촬영을 하고 돌아갔다.

연세가 너무 많아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의 경우에는 포토그래퍼와 서포터가 직접 가정방문을 통해 영정사진 촬영했다.


“포토그래퍼들이 전부 DSLR로 촬영하네요?”


류지호의 물음에 박상우가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각자 취향에 따라 칸논 D30 혹은 니커 1D를 사용해.”

“필름 카메라는 안 써요?”

“웨딩포토는 디카로 작업하면 안 되지. 아직은.....”


참고로 국민 DSLR이라고 불렸던 칸논 EOS 5D Mark 시리즈는 3년 후에나 출시된다.

류지호가 상계동 한 동네 경로당에 삼각대와 간이 호리즌, 조명기 등을 설치했다.

그런 후 본격적으로 영정사진 촬영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인연이 이어진 박상우는 영정사진 봉사에 매우 열정적이었다.


“오랜만에 해보니까 어때?”

“적당히 그림만 만드는 게 아니라 제대로 하고 있어 보기 좋네요.”


봉사활동에 참여한 여직원이 경로당 밖에서 번호표를 나눠주면, 노인들은 봉사팀이 미리 준비해 온 한복 저고리나 양복을 갖춰 입었다.

간단한 화장까지 받았다.

그 과정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말이야... 작가 사진보다 웨딩사진이나 이런 영정사진이 더 좋을 때가 있어.”

“......?”

“너나 나나 우리는 마음에 드는 사진이나 화면을 찍잖아. 그런데 웨딩사진이나 영정사진은 찍히는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어야 하니까.”

“그러네요. 대중예술을 한다면서 결국은 내 마음에 드는 이야기와 내 자의식이 듬뿍 들어간 작업을 하고 있네요.”

“아마 영정사진이 아니라 작품으로 접근했으면 너나 나나 저 어르신의 깊은 주름과 세월에 마모된 푸석한 피부, 그리고 삶을 관조하는 것 같은 빛바랜 눈동자에 매몰되었겠지.”


세상에서 가장 기묘한 사진은 영정사진이 아닐까.

미리 준비했든 전혀 준비하지 못했든.

아니면 사진 속의 모습이 초라하든 근사하든.

뭐가 되었든 죽음이 납득할 수 없는 것처럼, 박상우는 영정사진의 의미에 대해 납득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정성스럽게 영정사진을 찍는 행위가 죽음 앞에서 대체 무슨 소용일까 싶지만.

어쩌면 이 소용 없는 짓이라도 애써 살아있을 때 해야만 하는지 모른다고.

아주 잠시지만 죽음에 곁을 내주는 시간일 수도 있으니까.

박상우는 사진예술가다.

예술가의 사색은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는다.

예술이란 것이 인간, 삶, 세상에 대한 관찰과 그를 통한 사색에서 출발하는 법이니까.


찰칵찰칵.


류지호는 할아버지·할머니가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기 위해 노력했다.

근엄한 모습을 원하시면 그것에 맞춰서, 수줍은 모습이 예뻐 보인다고 하시는 할머니는 또 그 의도에 맞춰서.

심미적인 부분에서 류지호가 노인들보다 훨씬 뛰어나지만, 노인들이 원하는 바를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촬영했다.

포토그래퍼들은 각자 하루 10명씩 찍은 사진을 인화해서 가로 27cm, 세로 35cm 액자에 담아 공짜로 선물했다.

인화비용에 액자까지 비용 일체는 가온웨딩 스튜디오가 부담했다.


“공짜니까 여러 번 와서 찍는 사람도 있었어. 넥타이를 안 매고 왔다라고 하시는 분도 있고, 머리 염색을 새로 했다는 분도 계시고 핑계도 참 다양하지.”


삶의 마지막 모습이다.

누군들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있을까.


“처음 시작할 때는 영정사진 찍으라고 한다고 재수 없다고 혼내시는 분도 참 많았는데.”


류지호가 십 년도 더 지난 옛일을 회상하며 웃었다.


“꾸준히 돌아다니고, 동사무소에서 홍보도 해줘서 인식이 많이 바뀌었지. 언제였더라.... 인천의 용현동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어.”

“무슨 소문이요?”

“어르신들 사이에서 영정사진을 찍어놓으면 10년은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소문이 돈 거야.”

“그때부터 영정사진 대신 장수사진이라고 명칭을 바꾼 거예요?”

“우리는 그냥 영정사진이라고 하는데, 동사무소나 어르신들이 장수사진이라고 하대.”

“지방의 지점에서도 영정사진 봉사 하고 있어요?”

“어쩌다 한 번씩 멀리 시골보건소에서 먼저 연락을 한다더라. 자기 마을에 와 줄 수 없냐고. 그러면 가끔 시골도 다녀오고 그래.”

“촬영한 사진으로 전시회도 한다면서요?”

“영정사진만 하는 건 아니고, 포토그래퍼들이 스냅으로 촬영한 사진들 중에 골라서 일 년에 한 번씩 특별 전시회를 열어. 그 돈은 우리가 각출해서 하는 거다.”

“누가 뭐래요?”

“뭐 그렇다고. 강원도 시골 같은데 하루 내려가서 사진 찍고 떠나려고 하면, 어르신들이 붙잡고 잔치를 벌이기도 해. 그러면 못이기는 척 막걸리 한 사발씩 얻어 마시고 오고 뭐 그런다.”

“촬영하시고 안 찾아가는 분들은 없어요?”

“사진액자 안 찾아가는 분들도 종종 있지. 그럴 때는 깜짝깜짝 놀라지. 혹시 갑자기 돌아가신 건 아닌가 하고.”

“....”

“어떤 때는 다른 동네에서 왔다고 가져다주면 안 되냐고 하시는 분도 있어. 예전에는 사진 찍어주고 배달까지 해야 하나 괘씸한 생각도 들었지만, 봉사하자 한 거니 두 말 없이 배달해 드리지. 그런 분들 사연을 들어보면 참 그래. 내가 사진 봉사하러 가끔 종묘공원에도 가거든. 내가 가는 날이 빌딩관리 당직일이 겹쳐서 받아갈 수 없었다고 하시더라. 부탁할 만한 식구도 없고. 갖다 주길 잘 했다 싶었지.”


박상우의 이야기를 들고 있자니 문득 홍 관장이 떠올랐다.

영정사진 촬영 봉사가 끝나자마자, 전화를 드렸다.

이미 영정사진을 찍어 두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럼에도 류지호는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사진촬영 장비들을 챙겨 인천으로 내려갔다.

홍 관장은 죽어서도 영원히 태권도인으로 남고 싶다며, 수십 년 된 낡고 헤진 도복을 입었다.

내친김에 인천에서 살고 있는 홍 관장의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류지호도 그 틈에 끼어 함께 단체사진을 찍었다.


‘돈, 명예, 권력을 얻어갈수록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주변을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삭막해 진 것일까.

대전 한방병원에서 반나절 자원봉사를 하고 영정사진 봉사와 용연태권도 동문들과의 단체사진 촬영일 뿐이었지만.

자신의 꿈과 야망을 위해 소중한 가치들을 잃어가는 것은 아닌지.

잠시 멈춰서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가온그룹은 부산 해운대구 센텀시티 복합쇼핑문화단지 착공식에서 쌀 10톤을 부산지역 영세민들에게 기증한데 이어 무주군청에 버스 두 대를 기증했다. 또한 가온그룹 오너이자 영화감독 류지호가 대전의 한 자선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모습이 시민들에 의해 알려져 훈훈함을 더했다. 최근에는 종합결혼컨설팅업체 가온웨딩 직원들과 함께 상계동에서 장수사진(영정사진) 무료 촬영 행사에 참여한 것도 뒤늦게 알려졌다. 가온그룹은 매년 수 십 억 원의 기부와 사회공헌 활동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 기업이다. 오너 일가의 기부활동도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외환위기를 벗어나고 위축되었던 기부가 다시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했으나 여전히 외환위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는데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가온그룹과 류지호 감독의 기부가 일시적인 미담이 아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으로 꾸준히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 YNTV 사회부.


센텀시티 착공식을 전후로 해서 주요 일간지 경제면과 사회면에 가온그룹의 기부와 관련된 뉴스가 연일 지면을 수놓았다.

그 가운데 다소 이색적인 기부 뉴스도 있었다.

류지호가 무주군청에 대형 버스(25인승), 소형(15인승) 각각 1대씩 기증했다는 뉴스다.

전북 무주군은 지난 1995년부터 농촌 주민들을 위해 무료로 운행하는 순환버스를 운행하고 있었다.

무료 순환버스는 무주 시가지와 무주 공용 버스터미널을 연결하는 노선으로 대형·소형 버스 2대를 오전 7시-오후 7시까지 하루 42회 연중무휴로 운행하고 있었다.

무주리조트가 버스터미널과 리조트를 오가는 셔틀버스를 운행하는 것과는 별개였다.

무주군청이 운영하는 버스가 너무 노후화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류지호가 신형으로 교체해 줬다.


“경일자동차그룹이 에쿠스 리무진을 협찬해 준 것에 대한 보답 차원이기도 했는데, 무슨 노블레스 오블리주씩이나.....”


❉ ❉ ❉


한국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류지호가 어느 순간 한국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곳은 캘리포니아 팰로알토다..

스탠퍼드 대학에서 여동생이자 연인 레오나 파커를 납치하듯 픽업했다.

커플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숲이 우거진 언덕에 둘러싸인 하프 문 베이(Half Moon Bay)의 아늑한 바닷가 마을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가까운 이 마을은 구불구불한 시골 길로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아는 사람만 찾는 관광지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태평양 바다가로 내려가는 언덕의 향기로운 유칼립투스 나무와 길을 따라 보이는 농장, 목장 및 꽃집 등이 시골 같은 정겨움을 선사했다.

아름다운 해변과 자연 환경,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바다 경관.

소박한 마을의 아기자기한 상점과 레스토랑은 한국의 시골과는 다른 정취를 자아냈다.

하프 문 베이 (Half Moon Bay)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인기 있는 주말 휴양지다.

하지만 평일에는 한산한 편이다.

하프문 베이에는 Ritz & Garden Hotel이 있어서 예약하면 호텔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할 수가 있고, 코트야드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칵테일을 마실 수가 있었다.

류지호와 레오나는 바다가 보이는 호텔 야외 벤치에서 칵테일을 마셨다.

해가 지자 바닷바람이 쌀쌀한 감이 있었다.

류지호가 담요를 가져와 레오나를 덮어줬다.

벤치 근처에 마련된 난로에 불도 피웠다.


“이런 곳은 어떻게 알았어?”

“제니퍼가 알려주더라.”

“칫. 여자 친구와 와 본 건 아니고?”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을 때 다운타운을 벗어나 본 적이 없어. 오늘 처음으로 다리를 건너 와 보는 거야.”

“믿어줄게.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인 것 같아. 나중에 제니퍼에게 고맙다고 해야겠어.”

“내가 아니라. 제니퍼에게?”

“큰오빠는 알려주는 대로 한 것뿐이고, 제니퍼가 좋은 곳을 알려줬겠지. 혹시 데이트 코치도 받았어?”


류지호는 하하 웃으며 레오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두 사람은 자정이 되기 전 하프 문 베이를 떠나 스탠포드 기숙사로 돌아왔다.


“기숙사에서 자고 갈래?”


류지호가 레오나의 코를 가볍게 쥐며 짐짓 혼을 냈다.


“사감에게 걸려서 기숙사에서 쫓겨나고 싶어?”


그럴 일 없다.

미국 대학 기숙사는 때론 발정기 동물의 왕국이 되기도 하니까.


“이대로 다시 스탠퍼드를 벗어나서 산호세로 놀러 갈까?”

“얼른 들어가서 쉬어. 내일 오전에 수업 있다며?”


레오나가 아쉬운 듯 좀처럼 기숙사 쪽으로 발을 떼지 못했다.

류지호가 그런 레오나를 가볍게 포옹하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


류지호가 계속 머뭇거리는 레오나의 등을 살짝 떠밀었다.

그러고 나서 레오나를 향해 엄지와 검지로 수화기 모양을 만들어 귓가에서 흔들어댔다.

레오나가 손키스를 날리고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류지호라고 해서 왜 아쉽지 않을까.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에 들어갈까....?


스탠퍼드 MBA과정을 다니게 되면, 레오나가 졸업할 때까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20만 달러 정도 기부하면 받아주려나?’


제아무리 최고 명문 스탠퍼드라고 해도 MBA 과정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현직 경영인이다.

매년 스탠퍼드 산하 아시아태평양연구소에 기부도 하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100만 달러를 장학금 명목으로 기부할 수도 있다.

닷컴버블 붕괴와 엔론사태 등으로 미국 경제에 심대한 타격이 가해졌다.

그에 따라서 미국 사립대학과 공립대학들의 재정이 바짝 줄어들었다.

특히 사립대학은 동문들의 기부금으로 각종 장학금과 교수 봉급, 기타 경비를 해결하곤 했다.

이 창구로 들어오던 기부금이 대폭 줄어들었다.

기부자만 나타났다 하면 그 자녀에게 입학특혜를 주며 대환영하는 분위기다.

실력만 있으면 돈 없어도 입학할 수 있고 당당히 졸업장을 따낼 수 있다고 알려진 미국대학이다.

한편으로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

물론 아무나 기부금 입학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너서클에 들어야 한다.

개나 소나 다 기부입학을 받아주는 것은 아니다.

류지호는 별 영양가도 없는 생각을 하며 LA 벨에어 집으로 향했다.

휴식 같은 데이트를 했음에도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늘어졌다.

그럼에도 할 일은 해야 한다.


‘소중한 걸 놓치지 않으려면.....!’


숨을 쉬고 있는 한 쉴 틈은 없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일이든, 세상살이든, 사랑에서든.


작가의말

1년에 딱 하루 스스로 불효자라고 느끼는 날입니다. 누군가 그럽니다. 불효자라고 느끼는 것 자체가 효자라는 뜻이랍니다. 효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나 감흥도 없이 사는 시대라면서.... 

화목하고 평안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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