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계 스킬 (1)
24화. 혼돈계 스킬
“저거 괜찮은 건가?”
알부케르크는 아직도 시끄러운 입구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나 역시 힐끗 그곳을 바라보곤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절대 못 뽑을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입구엔 경비병들이 죄다 달려들어서 온갖 자세로 「자이언트」를 뽑아보려 애썼다.
네댓 명이 달라붙어 뽑아보기도 했고, 함께 힘을 줘 아예 밀어보기도 했으며, 어디서 가져왔는지 줄을 가져와서 줄다리기를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자이언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체 그동안 저걸 어떻게 들고 다닌 건가?”
알부케르크가 신기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의 시선이 내 전신 곳곳을 훑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힘이나 무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이언트」는 나를 주인으로 등록한 아이템이었다. 즉,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자이언트」를 들 수 없다.
물론 이런 시시콜콜한 얘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운동을 열심히 하면 됩니다. 단백질도 꼬박꼬박 섭취해주고요.”
“······자넨 다 좋은데 가끔 너무 재미없는 농담을 하는군.”
* * *
왕의 알현실.
영화에서나 봤던 광경을 실제로 보는 것에 조금은 기대하고 있었다.
거대한 돌기둥. 높은 천장. 새빨간 카펫과 양옆에 늘어진 일렁이는 횃불. 고요한 적막 속 탁탁 튀는 불똥과 날카로운 시선으로 불청객을 살펴보는 귀족. 삼엄하게 경계하는 강철갑옷을 입은 기사와 병사들.
그리고 모든 걸 오롯이 품은, 홀로 우뚝 솟은 철의 왕좌.
하지만······.
‘······그냥 잘 꾸민 부잣집 느낌인데.’
실상은 그냥 조금 큰 부잣집에 있는 커다란 방이었다. 물론 그냥 방이라고 치부하기엔 조금 더 크긴 했고, 곳곳에 배치된 물건들에서 돈 냄새가 나긴 했지만, 내 기대엔 크게 어긋났다.
하긴, 이곳은 외관부터 성보다는 저택에 가까웠으니······.
“그래. 네가 이번에 큰 공을 세운 괴물사냥꾼이라고?”
한참을 알부케르크와 대화하던 왕이 이제야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실망이 깃든 시선을 감추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전하. 요한이라고 합니다.”
“흐음! 처음 보는 외양이로군. 어디 출신이지?”
“이곳으로부터 아주 먼 동쪽의 끝. 아침이 선명한 곳에서 왔습니다. 아마 너무 멀어서 모르실 것입니다. 저도 이곳에서 우리 민족을 보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아침이 선명한 곳이라? 그래. 네 말대로 전혀 모르겠군.”
“전하. 지금은 요한의 출신이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알부케르크가 왕의 호구조사를 끊으며 끼어들었다.
“으음. 그렇지. 지금은 어떤 칼이라도 잘 들기만 하면 되니······ 그래, 괴물사냥꾼 요한. 너에게 의뢰할 것이 있어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둘이 대화하는 게 오래 걸려서 그렇지, 생각보다 살라자르 왕은 크게 이것저것 따지지 않았다. 이렇게 바로 의뢰를 하겠다고 말하는 걸 보면 말이다.
“이 왕성 지하엔 창고가 있다. 포르티야가 독립하면서 지었던 보물창고지. 그런데 얼마 전부터 보물창고에 접근할 방법이 없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보물창고에 접근할 방법이 없다? 열쇠를 잃어버렸다는 건 당연히 아니겠고.
“말 그대로다. 보물창고로 내려가는 나선형 계산을 아무리 내려가도 그 끝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지.”
“끝없는 계단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확실히 기이한 일이군요. 들어갈 방법을 찾으려고 했던 적은 없습니까?”
알면서 물었다. 분명 있겠지.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외부인인 나를 불렀을 리는 없을 테니.
“당연히 했었지. 건축자와 공학자를 불렀더니 자신들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며 도망쳤다. 놈들의 목을 베고 다음엔 성직자를 불렀지. 성직자는 보물창고가 저주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헌금으로 과한 돈을 요구했지.”
“그 성직자의 목도 베셨습니까?”
“어찌 성직자의 목을 베겠나? 그냥······ 멀리 남쪽으로 보냈지.”
리스보아 남쪽이면······ 안달루시아 지방이다. 아직도 이교도와 한창 전쟁을 치르는 지역. 베리아 반도의 국토회복전쟁은 수백 년째 계속되고 있으니까.
그나저나 이교도와 전쟁을 치르는 곳에 성직자를 보냈다라······ 흠.
“마법사는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마법이나 주술 같은 삿된 것은 믿지 않는다. 오로지 성령께서 행한 기적을 믿을 뿐이야.”
“······?”
이상한 말이었다. 엄연히 마법과 주술이 존재하는 세계인데, 그걸 믿지 않는다니?
그렇다고 또 신앙을 크게 믿는 것 같지도 않았다. 조금 전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성직자를 남쪽 전쟁통으로 쫓아버렸다고 했으니까.
그러면서도 성령이 행한 기적은 믿는다? 이 시대 군주는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렵다더니, 딱 그 말대로다.
“마법과 주술을 믿지 않으면서, 왜 괴물사냥꾼인 저를 부르셨습니까?”
나는 살라자르 왕의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 시대의 괴물사냥꾼은 대부분 마법과 주술, 미신과 전설에 능통했다.
그건 대부분의 괴물들이 미신과 전설에 등장하기 때문이고, 그런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선 마법과 주술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실제로 죽는 괴물사냥꾼 태반은 사냥하는 괴물에 대해 몰라서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처럼 물리력으로 전부 두들겨 패고 다니는 건 특이 케이스에 속했다.
“하하하! 맞아. 나도 처음엔 그럴 생각이 없었지. 내 앞에서 허풍 떨다가 목이 잘린 괴물사냥꾼들이 많거든. 그런데 알부케르크 경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자네는 ‘방법’을 알고 있더군? 신비와 괴이를 다루는 방법을 말이야.”
살라자르 왕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순간 불쾌한 무언가가 속에서 울컥하고 올라왔다. 가슴이 끓어 오르고, 머리가 뜨거워졌다.
뭔가 ‘이상하다?’ 라고 느끼기 무섭게, 갑자기 머리가 맑아졌다. 불쾌한 무언가가 꿈틀거리던 속도 편해졌다.
“흠? 과연 듣던 대로군.”
“······?”
뭐지? 내게 뭔가를 한 건가?
“······제게 뭘 하신 겁니까?”
“그냥 간단한 테스트라네. 보물창고에 홀리지 않고 살아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한 테스트.”
“보물창고에 홀린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분명 조금 전엔 끝없는 계단 때문에 보물창고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게 말이지, 사실 얼마 전부터 보물창고를 지키는 병사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네.”
병사들이 사라졌다? 그래서 보물창고에 홀린다고 말한 건가?
“그게 정확히 언제부텁니까?”
“글쎄······ 잘 기억나진 않는군.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네.”
살라자르 왕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뭔가 짚이는 게 있어서 다시 물었다.
“혹시 이곳에도 지진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지진? 아아. 그래. 이곳에도 지진이 일어났었지. 특이하게 이 왕성에만 말이야. 흐음. 확실히 다시 생각해보니, 그 이후부터 병사들이 사라진 것 같군.”
역시!
“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래서. 어떤가? 자네가 해결할 수 있겠나?”
“대충 짐작되는 건 있습니다만, 자세한 건 직접 가봐야 알 것 같습니다.”
“오? 짐작되는 게 있다? 좋아. 기대하지. 꼭 해결하게. 보상은 분에 넘치도록 줄 테니 말일세.”
* * *
살라자르 왕과의 만남은 나에게 복잡한 질문을 던졌다.
이번 일도 그렇고, 포르토에서도 그렇고. 공통적으로 지진이 발생한 뒤에 일이 터졌다.
그리고 그 지진은 나도 겪었다. 바로 거인 왕의 무덤에서 자이언트를 얻었을 때다.
‘세 번이나 반복된 거면 우연일 리는 없다. 지진과 함께 잠들어있던 신비와 아티팩트가 깨어난 거야.’
고로 이번 일도, 깨어난 신비나 아티팩트가 만든 현상일 확률이 높았다.
다만, 왜 비슷한 시기에 지진이 일었는지까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왕성 보물창고라······ 아무래도 신비보다는 아티팩트일 확률이 높겠군.’
나는 이전에 「자이언트」를 얻으면서 겪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티팩트가 단순히 물건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신비를 변형시켰던. 「괴력」이 「신력」으로 진화했던 그 일을.
‘잘하면 이번에도 새로운 힘을 얻을 수도 있겠어.’
쓸 수 있는 패가 늘어나는 것만큼 즐거운 건 없다.
누가 뭐래도 이 망겜 속 세상은 플레이어에게 불친절한 세계였으니까.
* * *
쿠쿵!
나는 왕성 입구에 박아놓은 「자이언트」를 회수했다.
그 사이 경비병과 기사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는지, 「자이언트」 주변엔 사람들이 빼곡히 몰려 있었다. 힘 좀 쓰게 생긴 덩치들부터, 호기심 어린 얼굴로 구경나온 시녀들까지.
“저, 저걸 한 손으로 뽑다니!”
“체구만큼이나 힘이 장사로군!”
“가히 거인의 신력이 아닌가?”
“어머! 덩치만 사내 다운 게 아니였네! 밤에도 저렇게 사내다우려나?”
“저 우람한 팔뚝으로 내 엉덩이를 때려줬으면!”
“저 허벅지는 어떻고? 밤새 올라타도 멀쩡할 것 같은데······ 확 꼬셔볼까?”
곳곳에서 탄성이 섞인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사내들은 놀란 얼굴로 감탄을 터트렸고, 여인네들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몽롱한 눈빛을 내게 보내고 있었다.
“좋을 때군. 인기가 많겠어.”
알부케르크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자이언트」를 등 뒤에 맸다.
“인기가 너무 많아도 피곤합니다. 밤마다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거든요.”
“······진심인가?”
“글쎄요? 그나저나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이번 일을 알부케르크가 주선하긴 했지만, 그가 딱히 끼어들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그와는 오늘이 마지막이다.
“병사를 모아서 사막 대륙으로 갈 거라네.”
“사막 대륙이라면 「지지 않는 태양이 저무는 터」 너머 말입니까?”
“맞다네. 라오스 세력이 약해진 지금이 절호의 기회니까. 아마 꽤 넓은 영토를 차지할 수 있을 걸세.”
“······정복 전쟁입니까?”
그의 뉘앙스에서 단순히 사막 대륙의 거점을 마련한다거나, 약탈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조금 의아하긴 했다. 이곳도 사람이 살지 않는 버려진 땅과 녹지가 많았다.
마을과 마을 간격이 말을 타고 하루는 가야 할 정도로 띄엄띄엄했고, 그나마 있는 마을들도 50가구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 대부분이었다.
중세 서양 역사가 그렇듯, 이곳도 사람이 부족하지 땅이 부족한 동네는 아니었다.
“왜? 관심 있나? 자네가 도와준다면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작위와 영지를 주겠네.”
알부케르크의 눈빛이 달라졌다. 진짜 자신을 도와준다면 자기 땅이라도 떼어줄 기세였다.
나는 살짝 흔들렸으나, 이내 고개를 작게 저었다.
“죄송합니다. 한낱 괴물사냥꾼 따위가 어찌 공과 함께 정복 전쟁에 참여하겠습니까? 그리고 제 칼은 사람이 아니라 괴물을 상대하는 칼입니다.”
“흐음! 아쉽군.”
그는 아쉽다는 기색을 조금 보였으나, 재차 묻거나 다른 조건을 권하지도 않았다.
아마 내가 거절할 것을 알고도 아쉬움에 물어봤던 걸 거다. 내가 명예를 좇아 살인하는 기사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 또 보지. 자네가 가는 길에 항상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빌겠네.”
알부케르크는 그 말을 남기고 말에 올라탔다. 그는 저물어가는 석양을 마주하며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뒷모습과 쏟아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호의 다운 호의를 보여준 사람에 대한 답례였다.
* * *
지하 보물창고로 내려가는 계단.
나는 멀찌감치서 반은 두려움, 반은 기대감이 섞인 경비병의 시선을 등지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몇 발자국 걷지 않아 금세 계단은 어둠에 휩싸였다.
경비병들이 실종된 지 벌써 몇 주는 흘렀다고 했다. 그동안 횃불을 갈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휘이이잉.
계단 아래서부터 서늘하고 습한 바람이 올라온다.
‘묘하게 흥분되는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어째선지 이 어둡고 음습한 계단 끝을 마주하자, 알 수 없는 끌림과 흥분이 느껴졌다.
마치 장난감을 눈앞에 둔 어린아이 같은 심정이었다. 저 안에 숨겨진 미지의 힘을 갖고 싶다는 본능적인 욕망.
‘대체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저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나는 묘한 기대와 흥분을 간직한 채, 그렇게 조금씩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작가의말
재미가 없는 걸까요..? 슬슬 자신이 없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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