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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연재수 :
36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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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4.1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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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03화 - 2

DUMMY

“저기, 성빈아.”

“응?”



아침부터 공부하고 있는 성빈이. 요즈음 성빈이는 아주 공부 삼매경이다. 쉬는 시간에 쉬지 않고 공부하는 성실한 성빈이에게 말을 거는 건 참 난감한 일이다. 그래도, 폐 끼치는 것인줄은 알지만 용기를 내 말을 걸어본다. 난 이기적이니까.



“공부하는 거 방해해서 미안한데, 잠깐만 시간 뺏어도 될까.”

“어, 어 무슨 일 있어? 뭔데?”



엄격·근엄·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니 도리어 성빈이 쪽에서 날 걱정하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큭, 역시 성빈이는 착해. 아침이라 교실에 애들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뭔가 교실에서 얘기하긴 그래서 바깥으로 나왔다. 목적지는 자판기 앞 쉼터.





‘드르륵! 덜컹.’

“자.”

“응, 고마워 웅도야.”



귀한 성빈이의 공부할 시간 뺏었으니, 음료수는 내가 산다. 성빈이는 조신한 느낌으로 음료수를 받고 자리에 앉는다. 달깍 음료수를 따 마시며 빤히 나를 쳐다보는 성빈이. 나는 할 말을 정리한다.



“그래서, 무슨 얘기?”

“아니, 내가 할 얘기는 아니고. 성빈이 네 얘기를 들었으면 좋겠어.”

“엑? 나? 무슨 얘기??”



내 대답에 눈이 커지는 성빈이. 당혹스러워 하며 어쩔 줄 몰라한다. 얼른 말을 잇는다.



“어제, 담임 선생님 말 듣고 고민하게 됐는데. 이제 우리, 고3이잖아?”

“응응, 그렇지.”



풀어나가는 내 말에 성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한다.



“한참 공부해야 하는데. ‘목표의식’ 같은 게 전혀 없으니까. 핑계 같지만, 정말 공부가 안 돼.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 무슨 대학을 가고 싶은지, 무슨 과를 가야하는지, 내 꿈이 뭔지,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어쨌든 뭐가 뭔지 더 모르겠어. 더 병X이 된 거 같아.”

“응응응, 응.”



내 말에 성빈이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목표가 있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성빈이도 내 말에 공감이 되는지 흥미가 있는 표정이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이어 말한다.



“그래서 어제, 희세랑 얘기해봤는데. 정 모르겠으면 다른 애들 꿈이나 목표대학 들어보면 좀 괜찮아지지 않을까, 해서.”

“······어제 뽀뽀하던 게 그런 진지한 얘기였어?”

“아니아니, 그건, 그, 어떤 그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이랄까, 그─.”



내 진지한 얘기에 성빈이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살짝 상기된 얼굴로 말한다. 괜히 부끄러워지는데. 그건, 희세가 상여자(?)라서. 기습뽀뽀니까.



“풉. 잘 사귀고 있나보네, 둘이.”

“아 뭐······그렇지. 아, 이게 아니라! 이 얘기가 아니야!”



싱긋 웃으며 말하는 성빈이. 자연스럽게 대답하다가 얼른, 주제를 원래대로 돌린다. 귀한 성빈이 시간 뺏어다 말하는데 이런 잡담할 수는 없지.



“응응, 그래서 내 얘기 듣고 싶다는 게 그런 거야?”

“응, 그렇지. 성빈이 요즘 너 열심히 하잖아, 공부.”

“뭘, 별로 하지도 않는데.”



성빈이는 겸손을 떨지만 엄밀히 말하면 사실이 아니지. 분명 눈에 띄게 많이 공부하고 있는 성빈이인데, 요즈음.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하면, 그 배려심 많고 남 위하는 성빈이가, 미래 사건 때 도움을 못 줄 정도였으니. 눈치 살펴서 말을 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그 공부 잘하는 성빈이가 이렇게나 열심히 공부하는 거 보면, 지망대학 엄청 높은 데 아니야?”

“아하하······ 잘하진 못하는데. 3월 모의고사도 망했고.”

“에이, 하긴 뭐 그런 건 상대적인 거니.”



성빈이 입장에선 망했다는 성적도, 나에게는 꿈의 성적일 텐데. 하지만 뭐, 이런 건 절대적인 비교를 할 수 없으니까. 성빈이가 목표로 하는 점수에 못 미치면 망한 거겠지.



“그래서, 성빈이는 어떤 꿈과 어떤 지망 대학을 갖고 계신가요.”

“에, 뭔가 설문조사 하는 거 같애.”

“빨리 말해주세요. 현기증 날 것 같단 말에요.”



성빈이는 말하기 부끄러운지 어째 시원하게 말하지 않는 것 같다. 분위기를 바꿔서 얼른 재촉한다. 피식 웃는 성빈이. 진짜 얼른 알고 싶다. 내 미래를 위해서.



“난, 변호사가 꿈이야. 그래서, S대 법대에 가려구.”

“우와······ 말도 안 되게 높잖아. 목표치가.”

“응응! 그러니까 열심히 공부해야지. 이제와서 늦은 것도 같지만.”



조심스럽게 말하는 성빈이. 그 말에 뭔가 뒷골이 섬짓해진다. 말로만 듣던 S대, 그것도 법대라니. 그렇다면 성빈이가 ‘망했다’라거나 ‘공부 많이 하는 거 아니야’라고 하는 게 충분히 이해가 간다. 법대라면 충분히 그럴만하지.


성빈이도 공부를 잘 하는 편이지만, 내가 알기론 전교 20등 정도는 무리없이 하는 걸로 알고 있지만, 확실히 법대는 힘들다. 여긴 엄청 큰 도시권 학교가 아니니까. 수도권 학교에서 전교 20등이면 충분히 가겠지만, 이런 지방 소도시 학교에서 전교 20등인 건. 무엇보다 전국민 서열화를 할 수 있는 모의고사 결과를 보면 명명백백하게 알 수 있겠지.



“모의고사 몇 점 나와, 성빈이 너?”

“어······ 총합 대략─ 400점 초반 대?”

“음······.”



그렇다면 무리. 애초에 그런 천상계(?)에는 근처에도 못 가본 나지만, 그런 정보들은 어디선가 속속들이 주워들으니까. S대라는 접두사에, 소위 잘 나가는 과라는 법대니 의대니 하는 과까지 접미사로 추가된다면. ‘최소’ 470은 넘어야 갈 수 있지 않을까. 희세라면 가능할지도. 확실히. 그만큼 희세는 무서운 녀석이다. 전국구로 돌려도 충분히 괴물인 애니까.



“열심히 한다구 하지만······ 역시, 고3 들어서 공부하는 건 별다른 효과가 없는 거 같애. 강남이나 서울 애들은 고1때부터 엄청 과외 받고 학원 다니고 그런다는데. 서울 애들은 야자도 안 한데. 다 학원 가니까.”

“응, 그건 나도 들었었어.”



그렇다고 한다. 시골 중소도시인 우리하곤 별다른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어떻게 보면, 그것 또한 벌써 시작점부터 다른 싸움일지도 모른다. ‘수능’ 자체는 절대적으로 평등한, 세계적으로 봐도 전무후무하게 공평한 기회를 주는 시험이겠지만, 그것을 준비하는 고등학교 과정에선. 아니, 구태여 고등학교가 아니라 초·중·고 12년 전과정 통틀어서 전부.


부자이고, 인프라가 잘 갖춰진 도시에 사는 애들이라면 어릴 때부터 학원에 과외에, 엄청나게 갈고 닦았겠지. 기초부터 심화까지, 이미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별다른 그런 것 없이 순수히 학교에서만 다니는 우리는 어쩔 도리 없이 밑을 받쳐준다. ‘상대평가’라는 허울 좋은 이름 하에.



“나는 어째, 거지같은 생각만 드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그냥 때려 치고 기술 배워야 하려나봐.”

“왜, 왜 그래. 진짜론 그렇게 못 할 거면서.”

“헉······ 갑자기 비수 던지고 그래, 성빈이 넌.”

“아핫, 미안.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의외로 일침을 날리는 성빈이. 그렇지, 절대 그렇게는 못 하지, 내 성격상. 아무리 수능을 못 보고 점수가 시궁창이라도, 대학 안 가고 기술 배우는 선택지는 못 고르지, 나란 녀석은. 그렇게 생각하니까 더욱 시무룩해진다. 아니, 지금은 그런 우울한 생각으로 기분을 잡칠 때가 아니다. 내 목표, 내 미래.



“희세하고 상담할 때, 희세 목표 대학도 들었어?”

“응, 대학까진 안 정했는데. 유아교육과 가고 싶데. 유치원 선생님이 꿈이라.”

“아······ 그래. 의외네.”

“그치? 분명히 더 높은 데 고를 줄 알았는데.”

“······부럽다. 솔직히.”



성빈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는 나. 뭐 딱히 숨기거나 할 이유는 없잖아? 지망 대학인데.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다 말을 꺼내는 성빈이. 확실한 목표가 있는 희세가 부럽다는 것인지, 아니면 충분히 갈 수 있는 희세의 상태가 부럽다는 것인지. 둘 다려나. 난 둘 다.



“웅도 너는? 아, 아직 못 정했댔지.”

“아아~ 다들 근사한 목표 가지고 뛰어가는데~ 나는 모르겠다. 내가 모르면 안 되는데, 내 미래.”

“응, 그렇지.”



자포자기하는 심정의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해주는 성빈이. 그 차분한 대답이 도리어 상처가 될 것 같다. 이건 뭐, 어떻게 답이 없네. 성빈이의 말을 들어도, 뭔가 도움이 되는 것보단 더 조바심이 나는 것 같다. 성빈이는 충분히 멋진 목표를 세웠고, 그에 걸맞게 뛰어가고 있는데. 나는. 나는! 하아.



“나도 사실은, 그렇게까지 엄청, 변호사가 되고 싶은 건 아니야.”

“음? 그러면?”



살짝, 나를 쳐다보며 말을 꺼내는 성빈이. 의외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성빈이를 쳐다본다. 확고한 신념을 갖고 행동하는 듯한 성빈이인데, 늘 성실하게 살아가는 성빈이인데?



“막연하고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해보고 싶다고 마음 먹었으니까. 끝까지, 열심히 해보려구. 성적은 아직 한참 부족하지만. 그래도, 변호사 목표로 하고 열심히 공부하면, 다른 것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설령 법대는 못 가도.”

“······그렇네. 그럼 나도 변호사 할까.”

“에······ 웅도는 모의고사 어느 정도 나오는데?”

“······300 미만. 죄송합니다. 자살하러 갈게요. 저 같은 거, 그냥 빨리 죽는 게 사회에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아아아! 아니야 아니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다시 한 번 깨우치는 현실에 깊은 탄식을 하며 자살할 준비를 한다. 성빈이는 착하니까 그렇게 말하지만, 역시 별다른 쓸모가 없다. 이렇게 낮은 성적으론, 그저 그런 삼류대학 가서 등록금이나 축내며 해외에서 일하고 계신 아버지 등골만 빼먹고 어영부영 4년 허비하다 취업도 못하고 잉여백수가 되겠지. 하! 생각만 해도 가슴 떨리는 신나는 미래인데.


······이게 아니잖아! 지금 자학하려고 온 게 아니라, 목표를 찾으려고 성빈이 시간 뺏고 있는 건데! 정신 차리자.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 돼. 좀 더 명백한 목표를 찾아내야만!



“우선은, 공부 해보는 게 어때?”

“뭐······ 라고?!”



그, 그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을 줄이야. 꿈이 어쨌든, 우선 공부를 해놓고 보면 모든 게 해결되는 일 아닌가······ 말은 쉽지, 그 공부가 안 된다니까.



“사실 나도, 정~말 변호사가 되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확신이 있진 않거든. 그러니까, 웅도 너두, 우선은 목표 대학 정도만 정하고, 그 학교 커트라인에 맞게 열심히 공부하면 할 의욕이 생기지 않을까, 싶은데.”

“음······.”



확실히, 지금 오락가락하는 내 상황에선 그게 최선이긴 할 것 같다. 어느 정도 현실을 봐 가며 나에게 조언해주는 성빈이. 하기사, 19년 동안 별다른 목표도 꿈도 없던 녀석에게 갑자기 며칠 만에 ‘네 목표와 꿈을 정해봐. 그리고 그것에 맞춰서 대학도 정하고.’ 라고 하면 정할 수 있겠어. 인생이 달린 일인데, 며칠 만에 경솔하게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래도 뭔가, 탐탁지는 않다. 확실치 못한 건 늘 불안한 마음을 동반하니까.



“공부하다보면 하고 싶은 것도 생기지 않을까, 하는데. 딱히 웅도가 이상하다거나 잘못됐다거나 하는 문제는 아니고, 다들 그러니까. 내 친구들도 대부분 뭐 해야될지 모르겠다고 그러니까.”

“그······런 건가.”



이어지는 성빈이의 말에, 나는 더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다. 그래, 우선은. 당연한 게 당연한 거니까. 학생은 공부를 한다. 거기다 고3은, 말할 것도 없지.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간다. 당연한 걸 지키면서 사는 게, 그게 평범한 것이고, 그게 행복해지는 가장 평범하고 성실하면서 가까운 길이겠지. 성빈이의 조언에 따라, 우선은 공부해보는 것으로. 내 마음속 가닥은 그렇게 잡혀간다.



“고마워, 뭔가 조금은 확신히 서는 것 같아. 공부를 해야 겠다는.”

“응, 같이 공부하자.”



굉장히 훈훈한 대화. 내 말에 성빈이도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성빈이는 천사다. 희세의 날카로운 지적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위안과 자극이 되는 것 같다. 좋아, 오늘 하루는 공부해볼까!








--







── “······공부 안 되잖아······ 으흑······.”

“핑계라니까, 핑계.”



저는 병X입니다. 국가의 심판을 받겠읍니다. 자체적으로 조리돌림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징징대는 내 목소리에 희세는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희세 옆의 성빈이는 안타까운 미소를 띠고 나를 보고 싱긋 웃는다. 장난 아니라고, 진짜······.


그런 간단한 다짐으로 쉽게 공부할 마음이 생긴다면, 모든 고3들이 쉽게 공부할 수 있겠지. 그게 안 되니까 학원도 다니고, 그런 거겠지. 사람의 의지력은 생각보다 무척 약하니까.


야자가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성빈이의 얘기를 아침에 듣고, 그 뒤로 14시간. 학교수업동안에도, 점심시간에도, 오후에도, 저녁시간에도, 이어지는 야자시간에도. 나는 단 한 톨도 공부를 하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만화책은 그렇게 재미있을까. 평소에는 거들떠도 안 보던 애니메이션은 왜 이리 즐거운지. 휴대폰 게임은 또 왜 이리 재미있는지. 온갖 것들이 나의 공부를 방해한다. ‘아니, 이러면 안 되지! 공부해야 하잖아!(엄격근엄진지)’하고 마음 먹어도, 내 집중력은 붕어만도 못 해서 5분만에 딴짓을 한다. 그렇게 허망하게 보낸 하루, 허망하게 보낸 14시간.


······야, 1시간 공부하고 1시간 쉬고 그렇게 널널하게 해도 7시간 공부했겠다. 나 대체 뭐하니. 진짜 이대로 가다간 뭣도 아닌 병X 되는 거 아니야.



“그냥 네가 공부를 안 하는 거잖아.”

“······흐윽. 으아아아! 자유! 프리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그럼 죽어. 그렇게 공부 안 할 거면.”

“크억.”



이제는 희세도 질렸는지 나에게 맘껏 폭언을 날린다. 충격 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희세를 보니 희세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린다. 아닐거야, 그런 게. 충격요법 같은 것일거야. 성빈이만큼 친절하진 않아도, 그래도 희세는 나를 위해주는 착한 여자애인데.







“또 어른의 지혜 상담? 이번에는 제대로? 고3이니까 쌓인 욕망을?”

“아뇨,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그렇게 멋대로 상담거리가 나오는데요?!”



기숙사로 돌아와, 모든 일이 끝나고 다시금 선생님에게 상담 요청. 원래는 이런 식으로 상담하는 거, 선생님은 상당히 싫어하시는데. 특별히 나니까 된다. 예전부터 말하지만 선생님, 여자애들은 싫어하고 나는 좋아하는 편이니까. ······좋아하는 애정의 방향이 뭔가 위험한 것 같은 게 단점인데. 어쨌든 선생님의 섹드립에 선생님이 원하는 허둥대는 반응을 보여주며, 사감실 문을 닫는다.



“미래? 걔 이야기는 저번에 다 끝나지 않았나. 납골당 가서.”

“아뇨! 그 미래 말고요! 제, 제 미래요.”

“허어. 남자친구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네 것이 됐어. 세컨드?”

“아뇨아뇨! 자꾸 이상하게! 그거 고인드립이거든요!?”



선생님의 드립은 선을 지키는 게 없다. 섹드립도 섹드립이지만, 이제는 고인드립까지. 듣는 사람 없을 때엔 나랏님 욕도 한다지만, 그렇지만 미래 건은 드립치기엔 너무 그렇다. 아직도 생각하면 깝깝하고 답답하니까. 만족한 미소를 보이는 선생님. 선생님은 나를 바보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시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제 고3이 됐는데, 담임 선생님한테 얘기를 들었는데, 그─”

“짧게 말해. 귀찮으니까.”

“넵.”



선생님은 제멋대로이시다. ‘그러니까 3줄요약.’ 이라는 간략한 명령에 고개를 끄덕이며 최대한 짧게 말하고자 압축에 압축을 가한다. ‘제가 고3이 되어 공부하려는데 목표와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어 공부가 안 됩니다. 핑계인 건 알지만 정말 그래요. 저는 커서 뭐가 되어야 할까요.’ 하고.



“음······ 중소기업 영업직?”

“너무 완벽한 선택지 아닙니까! 제 미래는 벌써 정해져 있는 건가요?!”

“어디보자······ 너 2학년 때 마지막 모의고사 성적으로 보면······ 287? 대강 이런 느낌으로 수능 나온다면. 뭐, 인서울은 절대 무리고. 지거국도 무리. 국립대······ 간당간당한데. 그런 아무 4년제 인문계 대학 간다면, 대충 나오지?”

“······너무 적나라해서 좋네요. 하아. 그렇죠, 제 미래는. 장막을 열고 미래를 살펴보았지만 거기엔 오직······ 망각 뿐이였어.”

“망가가 아니라?”

“······!”



선생님의 섹드립에도 더는 잘 반응할 수가 없다. 선생님에게까지 이런 말을 들으니 뭔가 낙인 찍힌 기분이랄까. 이걸 바꿀 수 있는 건 단 하나, 공부를 해서 성적을 올리는 것 뿐인데. 근데 목표가 없어서 공부를 못 하겠어서 성적을 올릴 수 없어서 좋은 대학에 갈 수 없어서 목표가 시궁창이 되니, 어디서부터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있을지.


이런 때엔 차라리 누군가 강압적으로, ‘야 너, 그냥 이거 해! 네 생각따윈 중요하지 않아, 그냥 넌 이거나 해!’ 하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우리집은 도리어 그런 강압적인 분위기가 아닌지라.


엄마는 ‘공부 해야 하지 않아~?’ 하고 말은 꺼내지만 엄청 강요하거나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일은 없으시고. 아빠는 말할 것도 없이, 외국에 나가 계시니. 설령 한국에 있으시다고 해도, 성격상 그렇게 강압적인 분이 아니다. ‘네가 좋아하는 일이면 좋지?’ 하는 식.

그러니까요 아버지, 아버지 아들이 좋아하는 게 없는 거 같아요. 좋아하는 건······ 희세? 아! 능력 있고 예쁜 희세한테 장가 가서 셔터남을 하면 되겠다! 얼마나 좋은 진로인가! 미쳤냐! 흐윽······.



“······선생님은, 고등학교 때부터 선생님 하고 싶으셨나요?”

“아니. 대충 성적 맞춰서 사대 갔지.”

“······정말 희망차네요. 근데 대충 성적 맞춘 게 사대라니······ 선생님, 공부 잘하셨나보네요.”

“너보다는.”

“······네.”



이제는 상담도 뭣도 아니다. 풀이 죽은 내 말에, 선생님은 여전히 컴퓨터를 두드리며 무성의하게 대답하신다. 그냥, 원래부터 정해져 있는 거야. 공부 잘 하는 놈은 잘 하는 놈, 못 하는 놈은 못 하는 놈으로. 내려갈 놈은 내려간다는 말도 있잖아. 공부를 잘 하던 못 하던, 이 놈이고 저 놈이고 죽창 한 방이면······!



“─입바른 말이겠지만. 성적에 맞춰서 진로 정하는 것도 참 어리석은 짓이거든. 뭐, 나는 선생 어느 정도 맞는 것 같긴 하다만. 어쨌든. 아닌 건 아닌 거니까.”

“······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다. 성적으로 진로를 정하는 게, 옳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선생님은 컴퓨터에서 눈을 떼고,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제대로 자세를 잡으시고 말하려 하신다.



“너한테 지금 해줄 수 있는 좋은 말은 그거지. ‘그냥 닥치고 공부해.’ 아니면, ‘지방 거점 국립대라도 노려보자. 올 2등급 정도로 해보자’ 하고 현실적인 목표치를 정해주거나. 하지만,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은데.”

“······.”



‘올 2등급’이 현실적인 목표치라뇨.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금 제 모의고사 총점을 들으시고도 그런 말씀을······ 언어만 2등급이고 나머지는 5등급이에요. 어떻게 2등급으로 올립니까. ······아니, 못할 건 없을 것 같은데. 수능까지, 아직 8개월이나 남았잖아!



“뭔가 크게 잘못되었거든. 직업이 뭔지, 네가 진짜 하는 일이 뭔지, 그 대학 그 과에 가면 무얼 배우는지, 네 인생에는 어떤 영향이, 어떤 방향이 정해지는지, 아주아주 중요한데. 아무도, 그건 지도해주지 않고 그저. ‘수능만 잘 봐라’ 이러고 있거든. 그러니까 너처럼, 가닥 못 잡고 있는 바보들이 나오지. 너만 그런 게 아니라, 수도 없이 많은 녀석들이.”

“······네.”



모처럼만에 보는 선생님의 진지한 표정. 조금 흥분한 듯한 낮은 목소리에 나는 절로 집중하게 된다. 그런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내 귀에 솔깃한 얘기니까. 내가 지금 그러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것도 있지, 어쨌든 넌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인이고, 한국 사회에서 살고 있으니까. 어쨌든 수능 잘 봐서 좋은 대학 가서 입신양명하는 게 한국인의 숙명이니까. 네 뜻대로, 무슨 예능같은 거 하면서 빌빌대면서 살면서, ‘난 행복해’ 하고 자위하는 것도 좋은 인생은 아니니까. 그런 거, 선생으로서 못 보지.”

“······넵.”



두 가지의 극단적인 시선을 극명하게 드러내 설명해주는 선생님의 말에 나는 딱히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수밖에 없다. 얘기만으로 유추해보자면, 선생님도 꼭 선생님이 되고 싶어서 된 건 아닌 것 같으니까. ‘대충 성적 맞춰서 사대 왔어’ 라는 말로 보자면.



“대충 살지 마. 하루라도, 엄격하게 생각하는 시간이 적어도 한 시간이라도 있어봐. 시간이 아까울 만큼, 몰두할 무언가를 찾아봐. 지금 찾으란 건 아니야, 너 고3이니까. 생각만 하라는 거야. 그렇다고 하루종일 멍 때리진 말고.”

“······말은 잘 알겠는데, 그럼 전 무얼 해야 하죠.”

“죽어.”

“아뇨! 좋게 가다가 왜 그런 결론인데요!”

“나이 열 아홉 먹고 아직도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자아 없는 녀석이면 그냥 죽는 편이 낫지.”

“아아아앙! 제발! 절 구원해주세요! 선생님!”



드디어, 선생님에게 좋은 조언을 듣나 싶었는데 이어지는 돌직구에 퍼뜩 놀라게 된다. 결론이 죽으라는 거라니! 아무리 농담이라지만 선생님이 그런 말씀 하시면 전! 진짜 자살하러 가고 싶다구요! 계속해서 마음을 쑤셔대는 선생님의 날카로운 돌직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래, 내가 이렇게 아무 생각도 없고 수동적이야! 내년이면 성인인데도!



“음. 원래 이러면 안 되지만. 알지, 교사가 학생 개인에게 특혜를 주면 안 되는 거. 선생은, 개인교습 과외선생이 아니잖아.”

“넵. 근데요?”

“모의고사 문제지. 년도별로, 월별로 다 가지고 있으니까. 그거 하나씩 풀어봐. 일단은 시간 구애받지 말고, 야자시간에 풀던 어떻던 풀어봐. 기초공부는 공부대로 수업시간에 몰래 하고. 일단은······ 2일에 한 개씩 풀어가지고 검사 맡아.”



A4 사이즈로 복사된 시험지를 내미는 선생님. 뭔가, 한줄기 빛이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다. 아아, 그러니까 나는 이걸 풀면 되겠구나. 풀고 선생님한테 검사 받으면 되는 거야. 야, 신난다!



“가, 감사합니다······ 근데, 그러면 수업시간에 딴 공부 하라고요? 선생님이 그런 말 해도 되요? 선생님 시간에 수리영역 풀고 그래도 되요?”

“뭘 딴지걸어. 어차피 다 그러고 있잖아, 고3들은. 나도 그랬고. 수업 들을 녀석들만 들으라고 해. 어쩌겠어, 다 수능 보자고 하는 짓거리들인데.”



선생님은 너무 솔직하다. 물론 현실이 그렇다곤 하지만 그렇게 선생님 입으로 적나라하게 말씀하시면, 그렇잖아.



“가, 감사합니다!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겠는데······ 열심히 풀게요!”

“딴청 피우지 말고, 열심히만 해. 수능 잘 봐야지. 진정한 한국에 온 걸 축하한다, 꼬꼬마야.”

“넵!”



썩은 미소를 지으며, 마저 시험지를 나눠주시는 선생님. A4용지인데도 꽤나 묵직할 정도. 그래도 나는, 마냥 웃으며 대답했다. 이렇게라도 과업이 주어지니 뭔가, 마음이 한결 놓이는 것 같은 기분.


사감실에서 나와 바로 내 방으로 들어간다. 아, 뭔가 선생님한테 상담 하니까 기분이 나아졌어. 이대로 좋은 기분으로 자고─ 내일부터 해볼까. 아니지! 이런 썩은 근성으론, 뭘 해도 안 되지! 지금 당장이다! 자리를 박차고, 가방을 대충 싸서 열람실로 올라간다. 진짜, 1시간이라도 공부 한다! 우와아아아!






그 뒤로, 엉망진창으로 새벽 2시까지 졸면서 문제 풀었다.


작가의말

내용을 구상하기 어렵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고3얘기를 쓰다보니 제가 멘탈이 붕괴되어가는지, 참 모든 게 회의적이 되네요.

아하하하. 연재주기를 조금 늦춰야 할 거 같습니다. 한...... 3~4일에 한 편 정도.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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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5

  • 작성자
    Personacon akrasia
    작성일
    16.04.11 01:22
    No. 1

    소설 속 인물도 공부를 하는데 ㅠ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6.04.11 16:54
    No. 2

    ......사람은 원래 공부를 하기 싫어한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8 벼이삭
    작성일
    16.08.20 16:03
    No. 3

    ?????400점 초반대라니 그게 무슨표현이죠. 표준점수라고 해도 서울대가 낮으몃 510 정돈데.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6.08.21 19:07
    No. 4

    ......벌써 세대차이가...... ㅠㅠㅠ
    제가 고3이던 시절엔 총합이 500점이었습니다. 언100수100외100 사탐100과탐100. 물론 나중에 문/이과로 나뉘면 사탐만200/과탐만200 이런 식이지만요. 지금은 어떤지...... 조사도 안 하고 대충 찌그린 결과네요. 그냥, 500점 만점에 비례해서 생각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6 진주곰탱이
    작성일
    16.11.14 14:25
    No. 5

    중소기업 영업직... 웅도 성적으로는 중소기업 영업직도 못 들어갑니다~
    영세중소기업이라는 조건이 붙어야지요~
    요즘 중소기업도 따질거 다 따집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우리때는 총점 400점 만점이었는데...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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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01화 - 2 +7 16.03.20 903 9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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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18화 - 2 +8 16.02.01 905 10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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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17화 - 4 +7 16.01.06 809 16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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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16화 - 4 +5 16.01.02 790 1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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