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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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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05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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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17화 - 3

DUMMY

‘짝!’

“너 같은 미천한 년 없애는 거, 닭모가지 비트는 것보다 쉬운 것도 몰라? 천방지축으로 날뛰어 봐. 멋대로 지껄여 보라고. 누가 죽는 지, 제대로 보여줄 테니까.”

“컷! 키야~ 언제봐도 유진이 연기는 역대급이라니까! 유진이 너, 그거 연기 아니지?!”

“……시끄러. 네가 대본에 이렇게 써 놨잖아.”

“언니 저 마음에 안 들죠? 헤헤헤헷.”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 반 장기자랑은 연극이다. 연기를 잘 하고 있다면, 그냥 쭉 이어나가면 되는 일. 헌데 미래는, 미래 감독님은 영화감독 코스프레에 심취했는지 아무 NG도 문제도 없는 장면에 ‘컷!’을 외치고 끼어들어선 드립을 치고 있다. 이제는 다들 대사도 외우고 연기도 잘 해서, 20분 정도면 아무렇지도 않게 끝낼 수 있는 연극인데.


아, 연극의 내용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막장 드라마. 주인공인 나는 양반집 자제, 결혼한다는 가문의 규수 역시 양반집 자제. 유진이 역할. 그냥 양반하고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살면 될텐데, 주인공은 이상하게 ‘진정한 사랑’ 이딴 드립이나 치다 동네 평민 여자애, 리유를 만나서 신분의 격차로 이런저런 고통을 겪다가 결국 마지막에 결혼식에 유진이를 버리고 동반으로 도주하는, 그런 느낌의 이야기랄까.


완벽하게 막장드라마인데. 아니, 라노베인가. 조선판 라노베. 뺨을 때리며 저런 대사를 하는데 조선시대인가 싶기도 하고. 요즘 퓨전 사극 유행하던데 그런 투인가 싶기도 하고.



“이제, 좀만 있으면 진짜네.”

“응.”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유진이. 민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녀 역할을 충실히 하며 옆에서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 전야제까지는 꽤 시간이 남아 있다.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맞춰보고 마지막 리허설 때 맞춰보고 끝내기로 했으니까. 좋은 점은, 연극 하나만 하면 되니 축제 당일에는 축제를 즐기기만 하면 된다는 점.


……좋긴 뭐가 좋아. 창피해 죽겠는데. 벌써부터 살짝 긴장되는 것 같다. 게다가 무슨 대사는 그렇게 많은지, 외우느라 죽는 줄 알았다고. 이러다 배우로 진로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 할 정도로 열심히 외웠다고.



“자, 자. 대충 다 했으니까 이따 리허설 때까지 모이는 걸로!”

“겁내 편하네.”

“아, 할만큼 다 했잖아요? 그럼 쉬는 거지! 축젠데. 뭐 앓고 있을 거에요? ‘으으, 어떡하지! 곧 있으면 무대 올라가는데!’ 애도 아니고.”



미래 사단의 장점은 칼퇴근(?)이다. 미래 본인이 널널하고 털털한 성격인지라. 내 탄성에 미래는 눈을 흘기며 말한다. 또 침착맨 만나러 가겠지. 다른 애들은……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또 나만 혼자 남겨두고 자기들끼리 놀러가는 것 같다. 유진이의 은은한 미소를 보면 확실한 것 같다.



“아, 연습 다 끝났어?”

“응. 방금 전에.”

“헤에. 연습하는 거 보고 싶었는데.”



빈 교실에 혼자 멍 때리고 있는 나. 문득 문 쪽에서 빼꼼 고개를 내미는 성빈이. 구교사 빈교실에서 연습하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용케 찾아왔다. 희세와 마찬가지로 메이드복 차림. 거, 3반 반장 독하네. 애들이 반발도 안 하나. 메이드복 입고 돌아다니면 창피하잖아.



“같이…… 축제 구경이나 할까.”

“엣. 그래도 돼?”

“아니 내가 뭐 다른 애들이랑 다니면 안 되나.”

“그치만~ 헤헤. 있잖아! 웅도는.”

“아직 없거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성빈이에게 제안. 눈을 크게 뜨는 성빈이. 이내 놀리는 듯 눈을 샐쭉 뜨고 말한다. 말하는 것만 보면 나 여자친구 사귄 지 50일 정도 된 것 같다. 실제로는 전혀 아닌데. 더 어색한데.



“내가 희세 대신 일 해줄까?”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너 이제 겨우 생긴 휴식시간 아니야? 오전부터 계속 일했잖아.”

“음─ 원래, 누군가는 희생이 필요한 법이니까. 타이밍이 꼬여서, 헤헷.”

“됐어, 됐으니까 가. 성빈이랑도 놀면 되지.”

“어머─ 벌써부터 바람기?”

“아 그러니까 사귀지도 않았다니까 그러네! 애들 왜 그래!”



잔뜩 은근한 말투로 말하는 성빈이에게 대답. 그러니까, 희세랑 그럭저럭 좋은 시간 보낸 건 사실이지만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니까! 오히려 손 잡으려다 탁! 손 뿌리쳤다고! 젠장. 또 씁쓸해지네.



“언제 사귀게? 나는 그렇게 멋지게 차놓고. 마음 다 정한 줄 알았는데, 아직 아니야?”

“……너 왜 갑자기 이렇게 요망해졌는데.”

“에헤헤. 잘 보이지 않아도 되니까. 막말해도 되는 거 아니야, 나 이제? 아직도 웅도 앞에서 막 그래야 하나?”



성빈이와 같이 축제의 거리를 걷는다. 활기찬 성빈이의 말투에 솔직하게 말한다. 그렇잖아? 솔직해진 성빈이라도 이렇게까지 쾌활하게 얘기하진 않았는데. 이어지는 그녀의 솔직한 말에 힐끔 눈을 피한다.



“……그런 게 더 귀여워보이는 게 함정이지만.”

“엣…… 고, 고마워.”

“어색해하지 마! 더 이상해지잖아!”



아직까지, 그래도 영향이 남아 있는 성빈이. 내 칭찬에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하며 대답한다. 괜히 더 어색해져서 소리친다. 얼마만큼 날 좋아하는 건데, 얘는?! 못난 내가 다 양심이 찔리잖아!



“……그! 그럼, 아직 희세한테 고백 안 했어?”

“고백은커녕 더 어색해지는 기분인데.”

“에? 왜?”



그러게요. 왜 그런지는 나도 궁금하네요. 분명히, 호감은 있는 것 같은 느낌인데. 원래 세상 만사가 그런 법이잖아. 가까이 하고자 하면 멀어지고, 막상 아무 생각도 없으면 도리어 다가오고.


성빈이는 이상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그렇게 물어봐도 난 몰라.’ 하고 대답. 마치 남일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는 성빈이.



“그럼, 언제 고백하려구?”

“……타이밍 봐서.”

“올해 안에는 할 거야?”

“그래야지.”

“2학기 안에는 할 거야?”

“……응.”

“그럼 언제!”

“아 왜 네가 성환데!”



이어지는 성빈이와의 티격태격 대화. 고백을 하는 건 나고, 사귀는 것도 난데 도리어 성빈이가 성화다. 짜증스럽게 말하니 성빈이는 눈을 치켜뜨고 나를 쳐다본다. 화난 건 아닌데, 이런 표정의 성빈이는 또 처음본다.



“단순히 웅도 네가 고백하는 게 별 거 아닌 게 아니거든?! 우리 모두랑 사귈 수 있는 기회비용 치르고 고백하는 거잖아! 그럼 얼른 해서 얼른 사귀어야지! 그래야! ……나도 얼른 잊을 거 아니야!”

“……그, 런건가.”

“그런 거야.”



가던 길을 멈추고, 허리에 손을 올리고, 꾸짖듯이 정색하고 말하는 성빈이. 그 시퍼런 기세에 나는 차마 성빈이를 쳐다보지 못하고 잠자코 대답한다. ‘사귈 수 있는’ 이라는 말에 또 기분이 이상하다.


그래, 사귈 수 있었지. 충분히 이상하지 않지. 성빈이 말대로, 나는 유진이하고도, 성빈이하고도, 민서하고도, 시아하고도. 앞서 보자면 리유랑은 사귀었었고, 재결합은 못 했지만. 응? 제일 먼저 말한 미래의 고백을 받는 선택지도 있었을 테고.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모든 선택지를 포기하고, 단 하나의 선택지만 남기고 있다. 희세. 눈치가 없지 않는한, 바보가 아닌 담에야 최종적으로 내가 선택한 게 희세라는 건 누구라도 알겠다. 그리고, 희세도 어느 정도 은연중에 눈치 채고 있겠지.

만화 같은 거에서 꼭 그런 장면 나오잖아. ‘내 몫까지 살아가라고!’ 그런 걸까, 성빈이의 말은. 자기 고백까지 매몰차게 거절하고 사귈 희세라면, 얼른 고백해서 행복한 모습 보여줘, 그래야 깔끔하게 포기할 테니까. 그─런건가.



“……오늘 할까.”

“응응! 오늘 축제니까, 분위기도 그렇고 좋잖아? 이따, 전야제 끝나고라던가. 축제니까 분위기 있을 때 하는 게 성공률 높을 테니까.”



성빈이는 이제 완연한 조력자 포지션이 돼서 자기가 더 기대하는 표정으로 대답해준다. 힐끔 그런 귀여운 성빈이를 쳐다보며 묻는다.



“성빈이 너라면, 내가 오늘 고백한다면 받아 줄거야?”

“……나, 나는 언제라도…… 네가 고백만 해준다면…….”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라! 그…… 하아.”

“에? 아, 어, 미안, 착각했어! 아핳! 그, 희세 입장에서 말이지! 아흫! 나 미쳤나봐!”



성빈이, 포기했다며. 내가 말만 어떻게 꺼내면 금세 수줍은 예전 모드로 너무 잘 돌아가는데. 게다가 그게 너무 귀엽잖아! 내 대답과 한숨에 성빈이는 잔뜩 얼굴이 빨개져서 웃음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한다. 몰라, 귀여워.








--







“긴장됩니까.”

“안 되면 사람이 아니지.”



미래의 말에 한 마디 대답. 싱긋 웃는 미래. 감독으로서 한 마디 하려나보다. 감독이기 이전에, 미래도 단역으로 한 역할 하긴 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했으니까. 우리 진짜 재미있게 연습 잘 했잖아? 본방이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한 것중에 제일로 잘 합시다. 응?!”

“응!”

“네네, 여부가 있나요.”



미래는 애들을 쳐다보며 싱긋 웃으며 말한다. 10여 명의 아이들이 밝게 웃으며 대답한다. 민서도 방긋, 유진이는 살짝 비꼬는 듯한 대답. 새삼, 미래가 이렇게나 리더십 있는 녀석이었나 싶다. 사랑하면 많이 바뀐다더니, 침착맨 덕분에 이렇게나 바뀌었구나.



“제가 바뀐 건, 오빠가 8할이랍니다?”

“……뭐, 라고?!”

“헤헤헤헤헷. 그냥요! 오빠 덕분에 그나마 리얼충들하고 많이 얘기할 수 있었으니까.”



생각을 읽혔다?! 가끔 보면 미래, 내 생각을 읽고 대답하는 것 같단 말이지. 기분 탓이겠지만. 진짜 저 녀석, 무슨 능력자 같은 거 아닐까. 미래라면 그럴 것도 같아.



“후아─ 긴장돼. 웅이는 안 긴장돼?”

“안 긴장되면 거짓말이지. 근데 우리, 작년에도 했었잖아, 연극?”

“아 그런가? 히히히히.”



잔뜩 긴장한 표정의 리유. 안 그래도 새하얀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하다. 이러나 어쩌나 리유는 귀엽지. 작년의 발연기보다는 한참 나아진 리유. 내 심드렁한 대답에 리유는 싱긋 웃으며 대답한다.



“잠깐, 귀, 귀.”

“아 뭐야.”



갑자기 깨금발을 짚으며 내 귀를 잡으려 하는 리유. 이제 막 무대 올라가려는데 뭔가 싶다. 살짝 짜증을 내며 몸을 숙여 리유에게 귀를 내민다.



“히이한테는, 고백 했어?”

“……너네 압박감 때문에 못 하겠다. 왜. 이제는 대놓고 장가 보낼라 그러네.”

“에헤헤헤. 안 그랬어!”



이제는 리유한테까지 이렇게 시달려야 하나.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돼? 하는 표정으로 눈을 반쯤 뜨고 리유를 보며 대답하니 리유는 특유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이며 대답한다.



“나는, 꼭 오늘 했으면 좋겠어.”

“……생각 중이야. 끝나고, 할까.”

“그래! 우웅. 음.”



리유는 잘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구나 사실 기묘한 관계잖아. 전 여친이, 전 남친에게 자기 친구인 여자애에게 고백하라고 종용하다니. 나는 그런 거, 솔직히 미국인처럼 쿨하게 넘어갈 수 없는데. 전형적인 소심한 아시안 남자니까, 나는.


아, 나도 모르게 절로 동양인 비하를 해버렸네. 동양인인 게 문제가 아니지. 사람이 문제지. 내가 병X인 걸 그런 것으로 핑계를 돌리다니, 하하.



“음─ 나 때문에, 못 하고 있는 건 아니지?”

“아니야. 뭐, 영향이 없는 건 아닌데.”

“에! 그럼 안 돼지! 우리가 언제적에 끝났는데! 웅이 그렇게 구질구질해?”

“그러면 넌 호주 6개월 갔다왔다고 너무 쿨해진 거 아니야?!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흥, 사랑은 움직이는 거거든.”

“우와, 미친 유치원 때 봤던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네.”

“에헤헤헤헤.”



영향이 없는 건 아니지만, 리유랑 껄끄럽지는 않다. 이런 식으로 농담 섞어서 얘기할 수 있을 정도니. 그래도, ‘언제 우리가 끝났는데!’ 는 좀 너무하지 않나. 난 그래도, 예전에 사귀었던 추억들 만큼은 우리 마음 속에 반짝반짝 빛나는 추억으로 퇴적암처럼 쌓여 있다고, 역사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남자애랑 여자애랑은 역시 성향이 다른 걸까.





“파평 윤씨 가문 ○○○라 하옵니다.”

“……네.”



본격적인 연극의 시작. 앞의 지루한 내용은 스킵. 지금은 양갓댁 규수인 유진이와 처음 만나는 장면. 나도 유진이도, 미래가 어디선가 빌려온 고운 개량한복을 입고 연극을 하고 있다. 의외로 한복이 잘 어울리는 유진이. 곱게 한데 묶은 머리도 예쁘고. 사극인지라 화장을 안 했는데 그게 더 어울린다.


묘하게 훨씬 더 긴장된다. 우리학교 여자애들만 보면 그나마 나을 것 같은데, 다른 학교 애들에다 다른 어른들까지 보고 있으니. 공휴일에 열린 축제인지라 사람이 더 많다. 그래서 긴장되지만, 최대한 유진이만 보고 자연스럽게 연기를 하고자 노력한다. 유진이는 싱긋 웃는다.



‘찰싹!’

“비천한 것이 어디…… 너 같은 거, 내 말 한 마디면 모가지 비틀어버리는 거, 아무것도 아니란 걸 모르고 나대는 것이냐?”

“……소, 소인은, 그런 뜻이 아니오라……!”

“닥쳐라!”



위기 절정 결말 이라면 대강 위기 쯤이려나. 유진이를 만나고, 리유를 만나고, 리유와 사랑이 싹트고, 이를 본 유진이가 질투에 불타 리유를 불러 타이르는(?) 장면.


참 아름답고 훈훈하게 타이른다. ……근데 이거, 너무 잘 어울리는 게 문제라는 거지. 유진이, 천상 악역이니까. 특히 저 깔보는 듯한 눈매와 당찬 목소리, 찰진 뺨싸다구까지. 진짜 연기대상 타도 될 것 같아.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 진행되고, 미묘한 실수들도 있지만 별다른 탈 없이 잘 넘어간다. 긴장해서 그런가, 나도 대사 몇 마디 틀렸는데 어떻게 얼버무리고 넘기고, 이야기는 점차 마지막 결말로 향한다.



“……!”



이제 마지막 장면. 마지막 장면을 찍으러 나가는데 문득, 희세와 눈이 마주쳤다. 바로 앞에서 구경하는 것도 아니다. 인파들 한 가운데에서, 다른 친구들과 사복차림으로 있는데도 어떻게 딱 눈이 마주쳤다.


살짝 눈썹을 찡그리고 희세를 2초 이상 쳐다보니, 희세는 싱긋 웃는다. 입모양으로 뭐라고 하는데, 대강 ‘연극 해! 바보야!’ 이런 것 같다. 황급히 시선을 유진이에게 돌려 연기를 하려 한다. 방송사고 날 뻔 했다.


마지막 장면은, 결국 유진이와의 결혼이 성사, 혼례식을 올리는 장면. 그런 결혼식에서, 깽판을 치는 나. 일을 도우러 온 리유를 붙들고, ‘내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이 사람입니다!’ 하고 도망치는, 사극이라면, 신분제가 있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장면. 뭐, 각본/기획/감독 근미래니까 이해 해야 하나. 정통 사극이 아니라, 그냥 조선시대 ‘같은’ 어떤 세계관이라고 떼우자. 어차피 고등학생들 연극인데, 이 정도면 잘 한 거지.



“……잠깐.”

“에?”



드디어, 마지막 장면의 하이라이트 대사. 내 말에 힐끔 눈을 들어 당황한 시선을 보이는 유진이. 구석에서, 아낙들과 같이 일을 돕고 있는 리유. 나는 눈을 돌려, 리유를 쳐다보고 대사를 치기 시작한다.



“나는 혼약을 올릴 수 없소. 내가,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건. 다른 어떤 것도 필요 없소, 나는, 나는!”

“…….”



내 독백이 울려퍼진다. 뭔가 상당히 창피하다. 이런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를 치고 있다니. 가뜩이나 여고 축제인데 어째서인지 남자애인 내가 하고 있는 이 상황도 상당히 신경 쓰이는데. 그래도, 계속해서 대사를 친다. 마지막이다, 마지막!



“미안하오, 유진. 노력했지만, 나는 그대를 사랑할 수 없소.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건…… 리유……!”

“……아뇨, 그렇지 않아요.”

“……??”



유진이에게 매몰차게 말한 나. 휘적휘적 걸어, 리유 쪽으로 간다 나를 따라오는 조명. 나는 당차게, 리유의 이름을 부른다.


힐끔, 서글픈 시선을 보내는 리유. 그러더니 입을 연다. 자…… 잠깐만? 저기요, 정리유씨? 대사 틀렸는데요? 여기서 대사는 분명히, (조신한 듯 감동한 눈으로)네, 서방님……! 이잖아요? 근데 왜 그런 대답을?



“당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제가 아니잖아요?”

“……아, 아니,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대가 맞소!”

“……아니, 아니잖아. 정말은?”

“…….”



내 말에 허름한 흰 저고리를 입고 있는 리유는 눈을 치뜨고 나를 보며 말한다. ……연기인지, 진짜인지 헷갈린다. 리유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웅성대는 관객들. 같이 연기를 하는 다른 애들도 당혹스러워하긴 마찬가지다. 자기 파트가 아니더라도, 수백, 수천, 수억의 리허설을 가진 연극이니 이 대사가 제대로 된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파악하고 있으니까.



“소녀 때문에,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하는 것은, 그것은 아니라고 보옵니다. 소녀는 미천한 평민이지만, 그것만은 알 수 있습니다. 서방님께서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리유.”

“그러니까, 제 그늘에 더 휩싸이지 마시옵시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하시옵소서. 저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서방님.”

“…….”



리유는 어린애 같다고 생각했다. 천진난만하고, 도시 동갑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나 대형사고를 치다니.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여기서 고백하라는 거잖아. 연극을 빙자해서, ‘진정한 사랑’ 어쩌고 하는 명목으로.


날 보고 싱긋 웃는 리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강 알 것 같다. 리유는, 자기 때문에 내가 희세에게 고백 못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나보다. 연극 들어가기 전부터 이렇게 꼬아버릴 걸 생각했는지.


이미 연극은 망해 버렸다. 이상한 전개에 사람들은 쑥덕댄다. 분명히 연극 전개상 진정한 사랑의 주체는 리유고, 리유랑 야반도주(?)를 함으로써 연극이 끝나야 하는데. 정작 여주인공인 리유가 딴 소리를 하고 있으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리유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얼른!’ 하고 종용한다. 시선을 리유에게서 돌린다. 조금 앞쪽으로 걸어 시선과 몸을 아예 무대 앞 쪽으로 틀었다. 몇 백명의 관객들이 보인다. 조명 때문에 눈부셔서 사람들 표정은 잘 안 보이는데. 너무나 긴장한 탓에 심장이 미친듯이 쿵쾅댄다. ……비단 사람들이 많아서 긴장해서만은 아니리라, 이 심장의 고동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제는 말할 수 있소. 이제는, 이제는.”

“……?”

“나희세!!!”

“!!”



어디선가 들은 적 있다. 남자들은 공개 고백에 로망이 있는데, 실은 그거야말로 진짜 여자애들이 질색할만한 일이라고. 명동 한 복판에서 여자친구 소리 지르면서 고백하면, 여자친구 창피해서 돌아가신다고. 받아줄 고백도 못 받아준다고, 쪽팔려서.


내가 지금 딱 그 꼴이다.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어, 리유가 이렇게 판을 짜 놨는데. 여기서 어떻게 수습할 수가 없잖아. 또, 무대에 서니까 살짝 정신상태가 돌아버렸는지 나도 이렇게 저질러버렸다. 있는 힘껏, 목놓아 희세 이름을 부른다.










사람들은 누구인지 몰라 웅성대는데, 물론 우리학교 여자애들은 알겠지만, 그 와중에, 한가운데서 깜작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희세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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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 01화. 힘든 일은 언제나 예고 없이. +4 16.03.17 896 11 20쪽
232 3부 시작은 웅도인 줄 알았나요? 유감이네요, 미래랍니다......☆ +3 16.03.15 990 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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