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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우리 학교에 관심 받고 싶은 변태 한 놈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1.09 05:53
최근연재일 :
2021.11.25 17:14
연재수 :
366 회
조회수 :
553,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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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4
글자수 :
2,992,898

작성
16.04.02 21:39
조회
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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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글자
21쪽

02화 - 3

DUMMY

“······.”



잠은 망각이다. 유일하게, 잠든 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 멍한 상태에서, 물 속에 빠진 것처럼 깊은 잠에 빠지면, 괴로운 생각, 힘든 생각 모두 잊을 수 있다. 요즈음의 나는, 잠에 취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이 되면, 그런 마약같은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 학생 신분은 하루종일 자고 싶은 잠마저 벗어난다. 몇 년을 아침에 계속 일어나는 게 버릇이 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일말의 마지막 양심일까. 모든 것을 내팽겨치고 슬퍼할 정도는 아닌 것일까, 내 슬픔은.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 찰 때에 나는, 그만 생각하는 것을 그만둔다.


준이가 하늘나라에 간 지 26일 째. 매일매일 기록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신경 쓰지 않아도 머릿속에 위젯이 떠 있는 것처럼 자동으로 알아서 날짜를 세고 있다. 벌써 한달이 다 돼 간다. 한 달이 지났지만 변한 건 없다. 아니, 나만 변하지 않았다. 나머지는 모두 변했다.





나만 이상한 걸까, 나만 예민한 걸까. 아직도, 준이가 죽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슬픈데, 처음 받아들였을 때보다는 무뎌졌지만 그래도 똑같이, 눈물이 나올만큼 슬픈데. 세상은, 준이의 죽음을 너무나 일찍 받아들였다. 아니, 받아들인 게 아니라 ‘잊어버렸다’.


준이 부모님은 그러지 않으셨겠지, 자식이니까, 가슴에 묻으셨겠지. 어쨌든 어른들은 슬퍼도 슬픈 걸 티를 낼 수도, 일상생활에 지장을 일으킬 수도 없으니까. 준이 언니, 오빠도 마찬가지로, 대학생 이상의 분들이니까, 슬프지만 다들 어쩔 수 없이 일상을 살아가겠지. 나도 그러고 싶었다.


벌써 세상은, 준이 같은 거 원래 없었던 것처럼 아주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되고 있다. 북녘에서 미사일을 쐈다느니, 미국에서 괴상한 대선후보가 한국 핵 무장을 찬성한다느니, 중동에서 이슬람 과격분자들이 테러를 일으켰다느니, 그런 뉴스 같은 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나에게 중요한 건, 준이에 관한 것이니까.


준이는 우리 학교가 아니었다. 우리 학교는 여고니까. 준이 학교에서, 준이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싶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벌써 없어졌을 것이다. 준이 친구들도 슬퍼하겠지만, 그들은 금세 잊었을 것이다. 고3이라는 절대명제가 있으니까. 타이밍도 안 좋게 죽었지, 준이는. 괜히 모진 소리 한 마디 생각했다 또 눈물이 고인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더는, 눈물은 아무것도 갖다주지 않는다. 울어도 소용없으니까.


친구들이 애쓰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실제로 친구들은 아주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애들이 없었다면, 난 진작에 폐인처럼 틀어박혀서 몇 번이고 자살 시도 하고 그랬을 테니까. 시아, 웅도, 희세, 리유, 다른 애들 덕분에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일상에 복귀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나다.


하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 잊혀지지 않는다. 머릿속에 계속 떠오른다. 아니, 나는 잊을 수 없다. 세상 모두가 잊는다고 해도, 난 준이를 잊을 수 없다. 마지막까지 준이랑 있었던 게 나였는데. 마지막까지, 그 때 이미 숨이 끊어졌는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마지막에, 그 순간에 나를 보는 준이의 눈빛은······ 후우.


내가 잊고 싶다고 해도, 또 잊혀지는 것도 아니긴 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계속해서 떠오르는, 준이에 대한 것.







시아 말대로, 좋았던 일들을 떠올리려 노력해봤다. 그건 시아가 말하기 전부터도 했었다. 나랑 준이랑, 분명 좋았던 일들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아무리 생각해도 못해준 것밖에 안 떠오른다. 괜히 짜증냈던 거, 힘들게 했던 거, 싸웠던 거. 멋대로 톡 씹고, 분명 내가 잘못했는데도 괜히 생떼 부리고.


그 때 더 잘해줄 걸, 그 때 그러지 말걸, 그런 후회와 안타까움 뿐. 이제는 더는 닿을 수 없기에 더욱, 어찌할 수 없는 슬픈 감정들.


다시금 고이는 눈물. 안 돼, 안 돼 하면서 슬픔을 삼킨다. 생각하는 것을 그만둘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는.



“일어났니?”

“······.”

‘끼이익.’



누운 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나. 엄마의 목소리에 상념이 깨진다. 황급히, 베개에 얼굴을 묻어 눈물을 닦는다. 대답하지 않고 이불을 머리까지 푹 뒤집어쓴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엄마의 말은. 어차피 무시하고 가만히 있다면 또 잠들 것이고, 엄마도 제 풀에 지칠 것이다. 그 뒤로 날짜 관념은 잊은 지 오래지만, 어쨌든 학교를 다니다보니 오늘이 휴일인 것 정도는 아니까. 어차피 겨울방학 보충수업이기도 하니까, 안가도 큰 탈이 있는 것도 아니기도 하고.



“친구들 왔어! 너는 약속해놓고 그것도 까먹니?”

“······에?”



엄마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다. 애들이 왔다고? 무슨 애들. 나는 그런 말 전혀 못 들었는데. 아무리 학교에서 멍 때리고 있다고 하지만, 누구도 딱히 놀러온다는 말은 안 했는데.


일어나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아침 8시 30분. 이렇게 이른 아침에, 대체 누가 온 거야. 황급히, 눈물을 닦고 얼른 책상 위의 머리띠를 들고 머리를 묶고 밖으로 나간다.



“아, 이제 일어났어. 뭔가 민폐같네, 하하.”

“민폐 맞거든. 연락도 안 하고 주말 아침부터 놀러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

“언니 안녕하세요~”



내 얼굴을 보고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으며 말하는 웅도. 가만히 태클을 거는 희세, 방긋 웃으며 인사하는 시아. 멀뚱히, 세 사람을 쳐다본다.



“······어쩐 일이야.”

“아, 놀러갈까 했는데, 어제 말을 못 해서. 휴대폰은 꺼져 있어서, 어떻게 할까 하다가 그냥 아침에 왔어.”

“미안해, 괜히 말도 안 하고 와서. 웅도 얘가 원래 충동적이잖아.”



가만히 물어보니 웅도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한다. 옆에서 희세가 보충설명 해준다. 난감하다. 방금 전까지 잔뜩 울고 있어서 눈 빨갛게 돼 있을 텐데. 다 알아 차렸으려나. 우선은 씻어야겠다.





“······잠깐만, 나 일단 씻을게.”

“어! 그럼 우린 방에 가 앉아 있을게!”



당장에 ‘아니, 놀러 가고 싶지 않은데.’ 하고 냉정하게 말할까봐 마음이 떨렸는데, 미래는 의외로 흔쾌히 씻는다고 하곤 발걸음을 옮긴다. 긍정적 반응에 얼른 부자연스러운 과장된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희세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미래에게 말한 사정은 사실 거짓말. 일부러 이 시간에 온 거다. 딱히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희세 말대로 충동적으로. 물론 시아나 희세에겐 어제 말했고. 그래서 희세에게 계속 잔소리 듣고 있지만.





선생님께 조언을 듣고, ‘평소처럼 대하자’ 라는 모토를 잡은 나. 희세와 시아에게 얘기했다. 다들 납득하는 분위기. 그럴 만도 한게, 희세는 원래부터 온건파였고 시아는 행동파로 움직였다가 꽤나 큰 상처를 받았으니까. 그 뒤로는 의기소침해져서 미래에게 섣불리 말을 못 거는 시아다. 그렇다고 해도 계속 미래에게 들러붙기는 하지만.


······그런데 이런 식으로 놀러오는 거, 전혀 ‘평소 같지’ 않잖아. 평소 같이 한다고 해 놓고. 뭘 어찌해도 사실, 무엇인가 ‘어찌’ 하려고 하면 이미 평소 같지 않은 거긴 한데. 별다른 건 아니고, 주말이니까 별 거리낌 없이 친구들끼리 노는 것처럼 해서, 미래의 기분을 좀 더 북돋아주고 싶은 마음이니까. ······그게 강경파 아닌가, 싶은데.



“다 좋은데. 왜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온 건데. 이런 주말에 미래가 다 씻고 나갈 준비 하고 있을 것 같아?! 우울한 상태 아니더라도, 보통 주말엔 늦게까지 자잖아. 엄청 큰 실례라고. 안 씻은 모습 보여주는 것만큼 여자애에게 실례인 거 없거든?!”

“죄송합니다. 다 제 잘못이지요. 다 제가 못난 탓이지요.”



희세는 잔뜩 언짢은 표정으로, 불편한 심기를 대놓고 드러낸다. 나는 얌전히, 고분고분 고개를 숙이고 희세에게 사과한다. 마나님이 지적하시면 겸허히 받아들여야지. 이거 얘기하면 또 희세, 귀여운 반응 보여줄 것 같은데. 시아도 있으니까, 부끄럽기도 하고, 하지 말아야지.



“그래도, 언니 씻으러 갔잖아요? 저희랑 놀겠다는 거죠!”

“무작정 쳐들어 왔는데 어떻게 매몰차게 내쫓아. 이게 무슨 ‘평소대로’야. 누가 봐도 특별한데.”



시아의 말에 희세는 뾰족하게 대꾸한다. 그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시아가 아니지 티격태격 둘이서 잔뜩 싸운다. 나는 중간에서 흐뭇하게 두 사람이 싸우는 걸 구경하며 앉았다.












“그래서, 저희 어디 가는 건가요?”

“영화관 가려고. 아침 첫 편 영화를 봐 줘야지!”

“그냥 조조 할인 받으려고 이 아침부터 온 거 아니야.”

“······후후후. 들켰군.”



시아의 물음에 눈썹을 꿈틀거리며 능글맞게 말하는 나. 미래를 잔뜩 의식하며 말한다. 미래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별다른 반응이 없다. 희세의 말에 음흉하게 웃으며 대답. 뭐, 우리가 주말에 나와서 별달리 할 게 있나. 영화 보고, 점심 먹고, 카페 가서 얘기나 하다가, 뭐 오락실이라던지, 노래방이라던지. 별달리 크게 할 건 없는데, 다같이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것중에 하나가 영화 감상이니까.



“미래 넌 영화 보는 거 좋아했던가?”

“······별로. 다운받아서 보니까. 돈 아까워. 예전에 준이랑 갔을 때도, 별로 가기 싫다고 뗑깡 피웠었는데.”

“아······ 그, 그렇구나.”



자연스럽게 평소처럼 말을 걸었다가 나지막이 말하는 미래의 대답에 나는 굉장히 의기소침해졌다. 괜히 미래와 침착맨과의 추억을 꺼내서 미래의 기분을 우울하게 만든 건 아닐까 싶다. 슬쩍 미래 눈치를 살펴본다. 뭔가 그렇게 슬퍼 보이진 않는데. 아니야, 속으로 삼키고 있을 지도 몰라. 그냥 가만히 있어야겠다.



“무슨 영화 볼 건데?”

“가서 보겠지만 우선은, 그 디즈니에서 만든 영화 있던데.”

“에, 그거 되게 아동용 영화 같던데. 오빠는 의외로 키덜트?”

“아니, 볼만하다길레.”



희세의 물음에 간신히 분위기를 다시금 붙잡았다. 미래를 위한 나들이지만 미래에겐 말을 못 걸겠다, 솔직히. 아까처럼 될 까봐 눈치 보여서. 그래, 일단은 시아랑 희세랑 평소처럼 얘기하면서 무난한 분위기를 만들자. 미래는 아직까진, 별다른 반응이 없이 그저 무덤덤하다.






“재미있는 거 같애, 의외로.”

“응, 확실히. 어린이 영화는 아니지?”



영화를 다 보고, 희세의 평에 대답하는 나. 힐끔 미래를 쳐다본다. 아까까지의 멍한 무표정보다는 확실히, 눈빛이 조금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다. 조금 눈치 보이기도 했는데.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티격태격 하는 걸 보고, 또 예전에 침착맨이랑 영화 보러 왔던 기억 같은 게 떠올라서 미래 감정이 북받쳐올라 울컥 울어버리거나 하지 않을까 하고 조마조마했는데. 그런 건 다행이 없나보다.



“언니는 재미있었어요? 전 되게 재미있었는데!”

“······응, 재미있었어.”



시아의 밝은 목소리의 물음에 미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어깨를 으쓱이며 싱근 웃으며 내 쪽을 쳐다보는 시아. 나와 희세도 마주 웃었다.








--







“너무 말랐는데. 미래 원래 이만큼 말랐어?”



희세의 말에 미래는 뭔가 애잔한 표정으로, 말없이 미소 짓는다. 송준이가 죽은 지 한 달, 그 동안 밥도 제대로 안 챙겨 먹고 심적으로 고생을 했으니 있던 살도 쭉쭉 빠지겠지. 애초에 미래 자체가 그렇게 살이 있는 편도 아니었는데. 미래의 쓸쓸한 미소에 시아도 쓸쓸한 느낌으로 미래를 본다.


옷가게에 왔다. 점심 먹기 전에 시간이 좀 남아서, 영화관 근처 옷 가게를 돌아다니며 옷을 사기로 했다. 옷을 사기 전에 미래에게 옷을 대보며 대충 맞는 사이즈를 찾아보던 희세. 깡마른 미래의 몸을 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본 질문이었다.



“······가슴은 원래 작았어. 지금은 거기서 반컵 정도 더 작아진 것 같애. 망했네. 이제 B 근처도 못 가. 난 72야.”

“······!”

“저도 A컵이에요! 언니 저랑 동지네요!”



잔잔한 표정으로, 가슴을 내려다보며 말하는 미래. 깊은 회한과 체념이 담긴, 어느 현자의 눈빛을 하고 있는 미래다. 전혀 예상치 못한 미래의 드립에 허가 찔린 희세. 흠칫 놀라 말을 잇지 못한다. 시아는 잔뜩 좋아라하며 동의하는 말을 한다. 하긴, 미래·시아·리유 이 셋이서 3대빈유니까. 3대 거유는, 희세·민서·선생님······ 아 그냥 그렇다고.



“암만 여고를 2년 다녔어도, 그래도 나도 남잔데. 남자애 앞에서 그런 얘기는 좀 그렇지 않냐.”

“왜요, 오빤 가슴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희세 언니랑 사귄 거 아니에요? 이거 이거!”

“뭐, 뭐라는 거야?! 그, 그런 거일 리 없잖아! 이, 이거 크다고 좋을 것도 하나 없는데!”

“와, 기만자! 저희 같은 사람들이 가슴 때문에 얼마나 피해를 보는데!”



이번 일을 겪으며 느낀 건데, 시아랑 희세는 참 상극이구나. 의견도 그렇고, 가슴도 그렇고. 아니 그냥 그렇다고. 난 그냥 입 다물고 짜져 있어야겠다.



“말해봐요. 오빠, 희세 언니 가슴 때문에 만나죠?”

“······말해 봐!”

“아니, 그렇게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 말하면, 그건 정말 엄청난 오예입니다. 저는 마음이 따뜻한 여자가, 크헉!”

“······죽을라고!”



시아의 물음에 희세도 내 쪽으로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 눈을 치뜨고 묻는다. 가뜩이나 크고 아름다운 희세인데, 그런 식으로 하면,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자석처럼 눈이 이끌리는 걸 억지로 돌려보지만, 이미 내 음흉한 시선은 어떻게 처리할 수가 없다. 희세는 빠르고 신속한 주먹을 내 명치에 내리꽂는다. 크억······! 그래도 여한은 없다······!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우우우우~”



뭐, 뻔한 거 아니겠습니까, 고등학생들 노는 게. 영화 보고, 옷 사고, 점심 먹고, 소화도 시킬 겸 노래방. 멋진 퍼포먼스를 보여줄 겸 노래를 부르며 희세에게 다가가 희세의 머릿결을 만진다. 희세는 마치 벌레라도 기어가는 것처럼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내 손을 피하며 몸도 피한다. ······그렇게까지 할 건 없잖아. 남자친군데. 시아는 좋다고 깔깔대며 웃는다. 미래도, 엷은 미소를 띤다.



“다↗행↘이다~”



노래 가사처럼, 정말 다행이다. 그래도 미래가, 내 개그에 작게나마 미소를 지어서. 오늘 놀러 데리고 나오길 잘한 것 같다. 확실히, 평소 때보다 기운을 더 차린 것 같다. 반응성도 훨씬 좋고, 무엇보다 조금씩 웃고 있다. 아까 옷가게에서도 드립 쳤었고.



“미래도 불러봐! 뭐든 좋으니까.”

“······나, 일본어노래 부르고 싶은데.”

“네, 상관없어요 언니! 저흰 일본어 모르지만.”



희세의 질문에 주뼛주뼛 대답하는 미래. 시아는 얼른 받아친다. 역시 미래야, 가차없지. 노래방 와서 일본어 노래를 부르다니. 아니, 뭐 그냥 그렇다고. 그럴 수 있지, 미래는. 도리어 평상시의 미래로 돌아오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 ~~~~~~~”

“······.”



선곡하자마자 간주도 없이 바로 나오는 노래. 슬픈 곡조. 일본어라서 무슨 가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슬픈 것 같은 느낌의 음정이다. 음이 꽤나 높은 것 같은데, 미래는 눈을 질끈 감고 열창한다. 마치, 모든 걸 노래 부르는 걸로 털어내려는 것처럼. 미래, 이렇게나 노래 잘했었나 싶은데. 노래 부르는 미래를, 가만히 쳐다본다.







“아~ 간만에 목 좀 풀었네요.”

“나는 목 다 쉰 거 같지만.”



노래방을 마치고 나오는 길, 아직 한참 낮이다. 워낙 일찍 나왔으니까, 미래랑 우리. 아직 짱짱하게 오후다. 힐끔 나를 쳐다보는 희세. 의아한 표정을 지으니 홱, 시선을 미래에게 돌린다.



“카페라도 갈래? 얘기나 더 하게.”

“응.”



바로 대답하는 미래. 확실히, 기분이 풀린 모양이다. 나도 시아도 싱긋 웃으며 희세를 따라 주위 카페로 들어간다.




재잘재잘. 떠드는 여자애들. 이런 광경을 2년이나 봐 왔으니, 이제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예전에는 혼자 안 좋은 생각 잔뜩 하고 그랬는데. 하하, 이번 겨울방학 지나면 그게 벌써 2년 전 얘기네. 여고 처음 왔을 때.


미래가 기분이 풀린 것 같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예전처럼 원상복귀한 건 아니다. 수다의 대부분은 성향이 안 맞는 희세와 시아의 티격태격 이야기. 미래는 엷게 웃으며 간간히 대답하곤 한다. 그래도 훨씬 낫다. 나는 흐뭇하게, 이야기하는 세 명의 여자아이들을 쳐다보고 있는다.



“······예전에, 어릴 때. 할아버지 돌아가셨었거든.”

“······!”



뜬금없이 대화의 주제를 바꾸는 희세. 게다가, 그 말하는 것도 할아버지 돌아가신 이야기.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미래 앞에서 그런 얘기를 한다는 건······! 잠깐만 희세야, 우리 그냥 평소처럼 얘기하기로 했잖아, 근데 왜 갑자기······!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으니까, 그렇게 엄청 어린 때는 아니었지. 할아버지랑 같이 사는 건 아니고, 시골에 계셨었는데. 근데 그게 너무 슬픈 거야. 명절 때 아니면 방학 때에나 할아버지 보니까, 기껏해야 1년에 4번 정도 보는데. 이제 할아버지한테 겨울방학 숙제 얘기할 수도 없구나, 할아버지한테 생떼 부릴 수도 없구나, 그렇다고 생각하니까. 그게, 너무 슬펐어. 다시 못 만나는 것도 슬프지만, 더 돌이킬 수 없다는 게.”

“······응.”



잔잔한 목소리로 말하는 희세. 꽤나 길게 말하는 동안 나는 안절부절 못하며 미래 눈치만 살폈다. 미래는 의외로, 묵묵히 듣고 있다. 얼굴이 빨개진다거나 눈물이 고인다거나 하는 기미는 전혀 없다. 희세의 말이 끝나니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예전에 시아가 힘내라고 말할 때엔 그렇게 난리를 피우더니, 왜 희세가 말하는 건 그냥 넘어가는데. 시아 억울하겠다. 뭐, 시아는 그렇게 속 좁은 애가 아닌지라, 미래가 발광하지 않고 묵묵히 듣는 모습만으로 좋은지 입술을 깨물며 미래를 빤히 쳐다본다.



“······너희랑 노니까,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애. 얼마 전까진 진짜, 너무너무 힘들었는데.”

“언니······.”

“잊을 수 없겠지. 못해준 것만 떠오르지. 어떻게 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니까. 작별인사라도 제대로 했다면, 깔끔하게 넘어갈 수 있겠지만. 너무 정황 없이, 밀어 닥치듯이 그렇게 지나갔으니까. 시간이 지나고 지나서 겨우, 이제는 어떻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잖아. 준이, 하늘나라 간 거. 준이, 죽은 거.”

“······!”



말을 시작하는 미래의 손을 꼬옥, 시아는 불안한 표정으로 잡는다. 미래는 무덤덤하게, 마치 제3자의 일을 얘기하듯 말한다. 마지막에 ‘준이 죽은 거’ 라는 말이 미래 입에서 나오는 걸 들으니 덜컥 괜히 내가 다 겁이 난다. 받아들였구나, 송준이의 죽음을. 너무 오래 걸린 것 같은데. 아니, 짧게 걸린 걸까.



“할아버지 돌아가신 날, 무덤에 묻는 것까지 따라가서 봤거든. 할아버지 관 내려가고, 무덤에 묻히는 거 보고, 친척들, 따라온 사람들 전부 울었거든. 나도 같이 따라 울었는데, 그거 보니까, 어쨌든 마음은 편해졌었어. 아, 뭐가 어떻든 할아버지가 가셨구나. 이젠 만날 수 없구나, 하고. 갑자기 들은 할아버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지만, 묻히는 걸 보면 끝났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으니까.”

“······응.”



다시금 자기 할아버지 얘기를 하는 희세.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러니까 종결을 내라, 그런 뜻······? 미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쯤해서 내가, 토스를 이어받아야겠다.



“송준이······ 장례식 끝나고 따라 갔었어?”

“아니······ 못 갔어. 갈 수 없었어. 용기가······ 안 났거든.”



내 질문에 이어지는 미래의 대답에 숙연해지는 분위기. 그랬겠지.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겠지. 아니 그보다도, 정황이 없었겠지.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화장터나 납골당은, 시내 말고 교외에 있는데, 그런 데는 버스도 잘 안 다니거든. 장례식장에서 내주는 공용 버스는 친족들만 타니까, 미래는 본인이 승용차가 있지 않는 한 못 가거든. 자기 때문에 송준이가 죽었다고 자책하고 있던 장례식 때의 미래니까, 차마 그 버스 얻어 타고 갈 염치도 없었을 테고. 그나마 지금은, 자신 때문에 그랬다는 죄책감은 벗어난 것 같아서 다행인데.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요, 언니?”

“······응.”



시아는 시기적절하게 물어본다.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미래. 굳건한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지 않았다.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암묵적으로 서로 알고 있다. 한숨을 푹 쉬고, 나는 휴대폰을 들고 잠시 카페 바깥으로 나왔다.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일 때문에 밀리다보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 작성자
    Lv.56 다크월넛
    작성일
    16.04.03 15:41
    No. 1

    혹여나 캐릭터이름이랑성격은 그대로 두고 다 갈아엎으신건지ㅎㅎ 우선 선작은 해두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6.04.03 23:35
    No. 2

    아뇨, 갈아 엎은 건 아니고..... 그냥 극전개가 그렇게 된 건데요..... 그렇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6 진주곰탱이
    작성일
    16.11.12 15:26
    No. 3

    그래도 드립이나 팍팍 치는거보다 이렇게 잔잔하고 진지한 내용의 글도 쓰실수 있구나
    싶어서 다행이군요~ 캬캬캬캬캬캬캬캬캬캬~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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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04화 - 3 +1 16.05.29 768 7 20쪽
245 04화 - 2 +2 16.05.15 873 7 20쪽
244 04화. 바보 스터디 그룹 결성! +4 16.04.20 1,023 7 20쪽
243 03화 - 3 +1 16.04.16 892 7 19쪽
242 03화 - 2 +5 16.04.10 894 11 24쪽
241 03화. 꿈도 희망도 없어, 내 앞날은. +3 16.04.04 745 11 20쪽
240 02화 - 4 +3 16.04.03 873 9 18쪽
» 02화 - 3 +3 16.04.02 848 7 21쪽
238 02화 - 2 +1 16.03.30 822 8 19쪽
237 02화. 이제 그만, 안녕, 하고 말하고 싶어도. +1 16.03.29 963 8 16쪽
236 01화 - 4 +1 16.03.25 907 9 20쪽
235 01화 - 3 +3 16.03.23 1,048 10 20쪽
234 01화 - 2 +7 16.03.20 904 9 23쪽
233 01화. 힘든 일은 언제나 예고 없이. +4 16.03.17 896 11 20쪽
232 3부 시작은 웅도인 줄 알았나요? 유감이네요, 미래랍니다......☆ +3 16.03.15 991 10 15쪽
231 18화 - 5 +7 16.02.23 1,062 12 17쪽
230 18화 - 4 +1 16.02.22 829 9 15쪽
229 18화 - 3 +8 16.02.21 938 10 19쪽
228 18화 - 2 +8 16.02.01 907 10 22쪽
227 18화. 믿기지 않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을 때! +7 16.01.26 878 12 16쪽
226 촬영은 이제 더는 없는 건가요- +10 16.01.06 1,037 17 7쪽
225 17화 - 4 +7 16.01.06 810 16 22쪽
224 17화 - 3 +8 16.01.05 969 13 19쪽
223 17화 - 2 +8 16.01.03 942 14 19쪽
222 17화. 너에게 하고 싶은 말. +5 16.01.03 955 20 20쪽
221 16화 - 4 +5 16.01.02 791 11 14쪽
220 16화 - 3 +6 16.01.01 914 16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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