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폭렬천사의 셸터

또 다른 셸터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게임, 판타지

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연재수 :
152 회
조회수 :
231,887
추천수 :
5,519
글자수 :
1,674,356

작성
14.01.25 00:45
조회
853
추천
24
글자
21쪽

4. 고통을 먹는 자 (3)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3.

안드리크에서 빠져나온 지 사흘이 흘렀다.

그동안 위즈는 빌헬름텔에게 궁술의 기초를 배웠다. 아처들의 전투 스타일을 파악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이다. 빌헬름텔은 순수 아처로 키운 유저. 그가 전해주는 노하우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현실에서 활을 쏘는 것과, 더 오션에서 활을 쏘는 것에는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빌헬름텔은 활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그러자 화살이 5미터 가량 앞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저는 시위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그냥 걸기만 했지요. 그래도 화살은 발사됩니다. 왜냐하면 게임 시스템 상, 화살이 걸리면 무조건 발사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는 화살을 걸고 당긴 뒤, 활시위를 놓는 과정을 모두 거쳐야 화살이 발사된다. 하지만 더 오션에서는 ‘당긴다’는 과정이 필수가 아니다. 누구나 활을 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당긴다’는 동작은 무의미합니까?”

“원칙은 그렇습니다. 대다수의 아처들은 이렇게 활을 쏘지요.”

“그런 화살이 맞기는 합니까?”

“당연히 잘 안 맞지요. 활은 누구나 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목표를 맞추는 건 별개의 문제이지요. 마찬가지로 누구나 검이나 도끼, 몽둥이, 단검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격이 성공하는 건 별개의 문제이지요. 그건 유저들도 다 알고 있을 겁니다. 아처에게 중요한 것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역시 명중률이지요.”

“맞습니다. 그래서 아처들은 장비에 붙은 옵션 중에서도, 특히 명중률을 많이 따집니다. 뿐만 아니라 스탯을 집중력 위주로 올리지요. 마지막으로 이글아이 같은 스킬은 꼭 배우고요. 하지만 저레벨 때 쓰레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저 레벨이니 당연히 장비도 좋지 않고, 스탯도 낮으니까요.”

“게다가 패시브로 적용되는 이글아이의 수준도 낮습니다. 그러니 수동적으로 활을 쏘면, miss가 자주 뜰 수밖에요. 잘 보시길. 저기 보이는 나무의 옹이구멍을 쏠 테니.”

빌헬름텔은 활시위에 화살을 살짝 얹었다. 앞서 보여준 성의 없이 발사하기다.

당연히 화살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박혔다. 화살촉이 목표를 정확히 향했음에도 그렇다.

“그리고 이번엔 제대로 활시위를 당겨서 쏩니다.”

엄지와 검지, 중지를 사용해 화살 깃을 쥔 빌헬름텔이 옹이구멍과 대각선이 되게 섰다. 그리고 그대로 화살을 시위에 걸고 잡아당겼다. 완만하게 구부러진 활대가, 가파른 곡선을 그리며 휘었다. 활대를 쥔 손은 흔들림 없이 전방을 향해 내뻗은 상태. 어깨 뒤까지 젖혀진 팔꿈치도 돌처럼 단단하게 유지되어 있다.

“현실에서는 이렇게 오랜 시간 사격자세를 유지하면 팔에 무리가 옵니다. 하지만 이곳은 게임. 목표물을 앞에 두고 얼마든지 자세를 유지할 수 있지요. 그리고 발사할 순간을 신중히 고르는 것만으로도, 시스템 상 명중률이 30% 가산됩니다. 게다가…이 상태에서 화살촉에 마법을 부여할 수도, 스킬로 화살에 위력을 더할 수도 있습니다.”

빌헬름텔은 손을 살짝 뒤틀며 화살을 놓았다. 핑 소리와 함께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옹이구멍에 박힌 화살이 부르르 떨렸다.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나무에서 화살이 돋아난 것처럼 보일 지경.

“아처에게 있어서 당긴다는 것은, 화살을 컨트롤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당기는 동작의 반복이 익숙해지면, 그 속에서 특별한 것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나무에 박힌 화살을 보러 갈까요.”

두 사람은 가까이 다가가 나무를 살펴보았다. 화살촉은 옹이구멍을 뚫고, 나무 뒤까지 튀어나와 있었다. 샤프슈터들 특유의 피어싱 샷이었다.

“벌써 샤프슈터로 2차 전직을 한 겁니까?”

“아직 아닙니다. 그저 흉내만 냈을 뿐이지요. 진짜 피어싱 샷은 나무를 뚫고나가, 뒤에 숨은 적을 서너 명씩 뚫어버립니다.”

“이게 단순히 컨트롤의 위력이란 겁니까?”

“아처뿐만 아니라 모든 직업이 다 그렇겠지만, 아처는 특히 컨트롤의 유무로 실력에 차이가 납니다. 잘 보시길.”

말을 마친 빌헬름텔은 화살을 가볍게 시위에 걸고 손가락을 떼었다. 그러자 화살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박혔다. 여기까지는 위즈도 예상했던 일이다. 하지만 같은 방법으로 발사된 두 번째 화살이 같은 곳에 겹쳐 박히자 위즈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미리 말씀 드리는 데, 이건 이글아이 때문이 아닙니다. 아직 이글아이를 배우지 않았거든요.”

“아니, 어째서 아직까지?”

“이유는 나중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일단 지금 쏜 화살들은 모두 당기지 않고, 시위에 걸기만 해서 발사한 겁니다. 이글아이도 배우지 않았고, 이 활도 초보 때 사용하던 활 그대로입니다. 명중률을 높일 만한 어떤 요소도 개입되지 않은 겁니다.”

“그럼 어째서 같은 지점에 화살이 겹친 겁니까?”

“그거야 활시위의 이정도 위치에 화살을 걸면…….”

핑.

“같은 자리로 날아가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위즈는 귀신이라도 보는 기분이었다. 빌헬름텔의 말은, 오발로 날린 화살이 같은 곳으로 떨어지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의도된 오발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대단하긴 하지만,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는 화살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처가 가진 가장 큰 약점은, 화살이 노리는 곳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숨어서 쏘지 않는 이상,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다수의 적과 싸우는 상황을 가정해보죠. 저는 정면의 적을 노리고 화살을 걸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정면의 적이 방패로 몸을 가립니다. 하지만 화살은 엉뚱하게 멀리 떨어진 적을 맞춥니다.”

“아!”

빌헬름텔의 말대로라면, 적들은 화살이 날아갈 곳을 예측할 수 없다. 때문에 제대로 대응하기 힘들어진다. 또한 아처가 노리고 있다는 부담을 주어, 적들을 산만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 온다. 심리적으로 압박하여, 우위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흔히들 명중률을 높이려면, 집중력 스탯을 올려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그리고 신중하게 기회를 노려 약점을 노리지요. 정론입니다. 당연한 거고,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죠. 하지만 그것 말고도 명중률을 올릴 방법이 있다면? 연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발이 명중이라더니, 이런 식으로 공격하는 방법이 있었군요.”

“더 오션에는 숨겨진 비법들이 많습니다. 다양한 변수들을 제거하기보다는, 그걸 이용해 변칙적인 플레이를 하는 법들이지요. 앞서가는 사람들에게 그 정도 능력은 있는 법입니다. 말해놓고 보니 제 자랑만 한 것 같아 쑥스럽네요. 하하하.”

“혹시 곡사로 쏜 화살도 일부러 오발처럼 꾸밀 수 있습니까?”

“그건 어렵지요. 직사보다 화살에 담긴 힘이 부족해서, 목표를 맞히기도 힘듭니다. 게다가 곡사는 화살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갈 때, 거치는 위쪽 공기에 영향을 받아 틀어져버립니다. 영화 속에서처럼 다수가 일제히 쏘아 올리면 모를까, 솔직히 곡사는 잘 안 쓰는 기술입니다.”

“2차 전직을 해서, 리얼계 플레이를 졸업한다면?”

“그래도 굳이 곡사를 사용할 이유는 없습니다. 차라리 ‘화살비’ 스킬을 쓰는 게 더 나을 테니까요.”

화살비는 화살촉만 담긴 기다란 대롱을 높이 쏘아 올려, 일정 범위의 적에게 피해를 주는 광역 스킬이다.

“그럼 어지간해서는 곡사로 화살을 날리는 경우는 없다, 이거로군요.”

“맞습니다. 그나저나 슬슬 승부를 가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래야겠군요. 딱 1분밖에 안 남았으니.”

이곳은 일반 필드가 아닌, 대련모드 속의 인스턴트 필드였다.

승부방식은, 먼저 유효타를 내는 쪽이 승리하는 ‘퀵 앤 데드’ 모드.

아처의 특성상 거리가 너무 가까운 지금이 불리했다.

빌헬름텔은 백스탭을 밟으며 거리를 벌렸다. 위즈는 거리를 좁히기 위해 정령강화를 신발에 걸며 다가섰다. 그리고 진각을 밟음과 동시에 화염돌격을 발동했다.

그것만으로도 위즈는 1m까지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위즈는 달리는 속도 그대로 단검을 내질렀다. 코앞에 날붙이가 왔다 갔다 하는데도, 빌헬름텔은 화살을 시위에 메기지 않았다. 그저 양손을 늘어뜨린 채 백스탭으로 위즈를 피해 다니기만 했다.

“공격을 하라고요! 공격을! 코로나!”

위즈의 발끝을 따라 불꽃이 길게 이어졌다. 그 순간 빌헬름텔의 눈이 번쩍였다.

그는 백스탭을 쓰지 않고 바닥에 누워버렸다. 그의 시선에 비어 있는 위즈의 하단이 잡혔다.

발차기라는 큰 동작 후에 생긴 빈틈.

그의 손이 화살통을 들락거렸다. 모두 합쳐 세 발의 화살이, 한꺼번에 활시위에 걸렸다. 하지만 걸어놓기만 했지 당기진 않았다.

팅티팅.

제멋대로 튀어나간 화살이지만, 위즈는 피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그렇다면 적어도 크로스 카운터를!’

위즈는 발에 힘을 주어 빌헬름텔을 짓밟았다.

“진각!”

하지만 발에 밟히는 건 맨땅이다. 빌헬름텔이 누운 자세 그대로 2m나 밀려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살은 위즈의 허벅지와 아랫배에 명중했다.


<빌헬름텔 님의 승리>

<대련모드를 종료합니다.>


주변의 풍경이 일그러지며 숲이 사라져갔다. 그리고 강을 낀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중립도시 시에니투스와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곳이다. 대련을 위한 안전지대가 필요해 이곳에 들른 것이다.

“조금 전 날린 화살. 그거 특수 화살이죠?”

“보통 화살입니다. 무기상점에서 싼값에 떨이로 구매한 거지요.”

그러면서 화살통을 끌러 내미는 빌헬름텔.

위즈는 화살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살대가 휘어진 것도 있었으며, 화살촉이 완전한 마름모 모양이 아닌 것도 있었다. 심지어 화살깃이 엉클어진 것도 있었다. 한마디로 돈 받고 파는 게 이상한 불량품들이었다.

“이걸 쏘았다고요?”

“위즈님이 보시기엔 화살의 상태가 형편없어 보이겠지만, 사실 이 정도면 전투에 사용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아처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보는 겁니다. 사냥꾼들은 활을 잡기 전에 그것부터 가르치죠. 절 가르친 사냥꾼 NPC는 악조건에서도 활을 쏘는 명사수였습니다. 그는 부러진 화살로 곰을 격살시킬 때, 비로소 한사람의 진정한 활잡이가 된다고 했습니다. 화살의 상태에 따라서 적절한 힘을 배분하고, 실현가능한 목표를 상정하는 것. 그것이 비결이죠.”

“그렇지만 이 화살들은 상태가 너무 나빠요. 발사체의 중심을 잡아줘야 할, 화살깃이 상한 건 특히 치명적인 결함이잖아요?”

“화살깃이 상한 것들 중에서, 촉의 모양이 일정치 않은 것을 주십시오.”

위즈는 딱 그렇게 생긴 화살을 넘겨주었다. 빌헬름텔은 강가 근처에 놓인 바위로 다가갔다. 둥글둥글한 자갈들이 잔뜩 깔린 바닥을 내려다보던 빌헬름텔이 입을 열었다.

“여긴 마찰계수가 그리 높진 않겠군요.”

그러면서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위즈가 골라준 화살을 시위에 메겼다. 조금 전 대련모드에서, 위즈를 노릴 때와 같은 자세. 이어진 결과도 동일하다.

가볍게 튕겨진 화살이 바위를 때리자, 빌헬름텔의 몸이 저절로 미끄러져 나갔다. 이번엔 제법 먼 거리를 이동했다.

“블런트 화살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아!”

“명중한 즉시, 대상을 밀쳐내는 효과를 가지고 있죠. 그런 화살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연습용으로 끝을 뭉툭하게 한 화살은 있지만, 그걸 맞는다고 뒤로 밀려나진 않습니다. 화살에 담긴 운동에너지는 크지 않으니까요.”

“기껏해야 리볼버의 저지력 정도겠지요.”

“하지만 여기는 게임. 화살에 더 많은 운동에너지를 담는 게 가능합니다. 그렇게 되면 작용과 반작용의 물리법칙까지 구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몸이 미끄러지듯 이동하는 것도 이 때문이지요.”

빌헬름텔이 설명한 원리는 간단했다.

강하게 쏘아부친 불량화살.

불량화살은 깔끔하게 발사되지 못한다. 주로 흔들림을 유발하는데, 이때 화살에 전해진 운동에너지의 일부가 아처에게 역류한다. 이것이 발사된 화살이 주는 반동.

만약 서 있는 상태라면 상체만 뒤로 넘어갈 정도로 강한 반동이다.

그런데 무릎앉아자세로 쏘았다면, 안정된 자세로 인해 반동을 이겨낼 수 있다. 하지만 화살 자체의 결함 때문에, 여전히 사거리가 짧으며 적중률도 낮다.

발사할 때의 반동을 어떻게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이 반동을 이용해 변칙 플레이를 해보는 건 어떨까. 빌헬름텔은 이 반동을 이용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바닥이 미끄러워 마찰력이 약해진 지면에 누워서 쏘는 것을 생각해냈다. 그 결과, 빌헬름텔은 누워서 무빙 샷이라는 기이한 사격술을 개발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몸을 밀어낼 만큼, 화살에 강한 운동에너지를 담다니. 대단하네요.”

“대단할 것도 없습니다. 힘 스탯을 부지런히 올리면 되거든요.”

“얼마나 올렸는데요?”

“어디보자…200은 진즉 넘긴 상태로군요.”

“힘을 200씩이나? 그럼 다른 스탯은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설마…그게 샤프슈터로 전직하기 위한 조건?”

“샤프슈터는 힘에 치중한, 아처의 변종입니다. 지금 올린 것만으로도 부족하지요. 앞으로 더 올릴 겁니다.”

“허…어지간한 칼잡이들보다 더 올리는 것 같은데요? 그래서야 생존률이 낮을 텐데…….”

“대신 공격 하나하나가 묵직해서, 빗겨내도 몸에 무리가 많이 가지요. 그런 적에게서 도망치는 건 쉽습니다.”

“노상강도들이 떠오르네요. 화살이 제법 아팠었는데.”

“그럴 겁니다. 노상강도들은 원래 사냥꾼이었죠? 사냥꾼들은 화살을 적게 사용해 짐승을 쓰러뜨리려 합니다. 가죽이 상하면 곤란하니까요. 사냥꾼은 사실상 샤프슈터라고 봐도 됩니다.”

위즈는 에켈 산에서 노상강도들에게 받았던 공격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들의 공격은 묵직한 맛이 있었다.

“이제 그걸 물어봐도 될까요?”

“이글아이 스킬 말이로군요.”

“네. 어째서 배우지 않은 거죠?”

빌헬름텔은 발치에서 납작한 돌을 찾아냈다. 그리고 강을 향해 언더 스로우로 던졌다. 그의 손에서 튀어나간 돌은, 수면을 두들기며 십여 차례 뛰더니 힘이 다해 가라앉아버렸다.

“이건 물수제비라는 겁니다. 한쪽 면이 납작한 돌과 수면의 각도가 맞아 떨어질 때 발생하는 표면장력 때문에, 곧바로 가라앉지 못하고 저렇게 튕겨지는 거죠. 하지만 운동에너지가 다하면 가라앉을 수밖에 없지요. 저는 제 처지가 저 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제가 잘나가고 있지만, 언젠가 운이 다하면 끝없이 추락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위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빌헬름텔은 과거 레드오션에서도 제법 알려진 실력자였다. 그 유명세만큼이나 사람이 겸손하고, 선량하다고 알려져 미워하는 사람이 드물기도 했다. 천상 선인이었다. 그런 사람이 추락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게임 속에서야 승승장구했지만, 현실에서는 안 좋은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게임으로 위안을 얻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힘들 것 같군요.”

“무슨 걱정이라도 있습니까?”

“제 직업은 생태연구학자. 테라포밍을 위해 지의류를 연구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것도 옛날 일입니다. 한 달 전에 사직서를 냈거든요.”

위즈는 잠자코 빌헬름텔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바깥에서 들여온 이끼 종류를 분석하던 도중, 그것에서 특이한 물질을 분리해냈습니다. 독소의 빠른 배출을 돕는 유도제 성분이었습니다. 생쥐에게 실험해보니, 중금속을 비롯한 모든 독성물질에 통했습니다. 심지어 신경계 독까지 배출시키더군요. 사실상 독에 관한한 만능해독제라고 불러도 되는 물질이었습니다. 저는 제로그라운드로 나가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며 기뻐했습니다.”

라엘리언의 공격으로 오염된 땅-제로그라운드.

방사능을 제외하고도 온갖 중금속과 약품에 절어 있어, 방호복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지옥.

빌헬름텔의 발견은 그런 지옥에서 인간의 생존율을 높여주는 대 발견이었다. 하지만 위즈는 그런 이야기를 지금 처음 듣는다.

‘정보를 통제했어? 어째서 이런 물질의 존재를 숨긴 거지?’

만병통치약이나, 불로장생의 약이라면 독점을 위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효과 좋은 해독제일 뿐이다. 그래서 위즈는 의아해했다.

“그 사실을 보고했더니, 해당 프로젝트를 중단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다음날 제 책상은 화장실 옆으로 치워졌지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걸 개발했는데, 어째서 그런 대접을 받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홧김에 사직서를 냈습니다. 돈이야 그동안 벌어둔 게 있으니, 어떻게든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 착각이었습니다.”

빌헬름텔은 허허 웃으며 고개를 털레털레 저었다.

“며칠 전 제게 법정 출두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연구비를 횡령했다더군요. 짓지도 않은 죄 의 대가로 재산을 날렸습니다. 그래서 물건들을 팔아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습니다. 게임 아이템도 제법 고가로 팔 수 있더군요.”

말을 마친 빌헬름텔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처음엔 이글아이 스킬북도 팔아버릴까 했지요. 하지만 처음 만난 사람이 보인 호의를 그런 식으로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려드리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위즈의 앞에 거래창이 떠올랐다. 거래를 원하는 물품은 이글아이(Lv.100) 스킬북. 사용하면 단숨에 스킬을 마스터 하게 되는 보물이, 다시 위즈에게 건네지려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빌헬름텔님이 이글아이 스킬을 배우셔야겠네요.”

그러면서 위즈는 거래창을 닫아버렸다.

“보아하니 구직 중이신 것 같은데, 다시 연구직으로 돌아가긴 힘들 것 같습니다. 음해까지 할 정도로 미운털이 박혔다면, 그건 콜로니 연합에서 하는 일이니까요. 차라리 전문적인 생계형 게이머로 활동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만약 레드 오션이 해킹 당하지 않았다면 괜찮은 방법이었을 겁니다. 키워둔 캐릭터와 좋은 장비가 남아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의 저는 그리 강하지 않습니다. 노가다로 돈을 벌려 해도, 저렙 때는 힘이 듭니다. 고렙이 될 때까지 버틸 생활비도 없습니다. 그러니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모두 정리하고, 빨리 다른 일을 찾는 게 좋을 겁니다.”

“그 결정, 잠시 보류 해주시면 안 될까요? 딱 이주…아니, 일주일만.”

빌헬름텔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이, 자신을 놓지 않으려 한다.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이만큼이나 설명해주면, 보통은 이해하고 넘어갈 것이다. 헌데 위즈는 자신이 게임을 접는 것만은 막으려는 태도다. 그것도 일주일이라는 현실적인 유예기간까지 걸고.

“조금 당황스럽군요. 위즈님은 제게 달리 원하는 게 있는 겁니까?”

“저는 제 편이 되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주 많이요.”

“길드를 만들 생각입니까?”

“그것과는 다른 겁니다. 평소에는 각기 하고 싶은 플레이를 하다가, 메인 퀘스트를 할 때만 모이는……일종의 프로젝트 팀 같은 거죠.”

“그것도 현실이 고달프지 않아야 가능 합니다. 일주일만 기다려 달라 하셨는데, 제겐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누명까지 쓰고 직장에서 쫓겨난 빌헬름텔은, 정신적으로 핀치에 몰려 있었다.

그걸 깨닫자 위즈는 빌헬름텔의 숨겨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세세한 지식과 비법을 알려주던 친절은, 모든 걸 포기한 자의 무소유적 사고관이 작용한 탓이었다. 사실 위즈는 빌헬름텔이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가르쳐 줄 거라 기대하진 않았다. 중요한 오의는 빼놓고 대충 알려줄 거라고 생각했다. 헌데 실제 가르친 것은 알짜배기였다.

시종일관 유지되던 차분함조차 다른 눈으로 바라보자 다른 진실을 읽을 수 있었다.

빌헬름텔은 마음이 완전히 꺾여버렸고, 그로인해 권태에 빠져들었다.

억울한 일을 당했으나, 가해자가 콜로니 그 자체이니 감히 대항할 수 없었던 탓이다.

그래서 빌헬름텔은 껍데기만 남은 상태다.

‘하지만 대련을 할 때 빌헬름텔은 그렇지 않았어. 살아있는 느낌이 들었지.’

가상현실게임이기에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 무언가가 전해졌다

거짓말 같겠지만, 실제 존재하는 일이다. 게임 속에서 육감이 작용하는 경우는 드물게나마 관측되어 왔었다. 과학자들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를 증명하는 논문도 있다.

‘빌헬름텔은 아직 완전히 무너진 게 아냐. 지금이라도 붙들어 놓으면, 그는 홀로 자신의 문제를 극복할 거야.’

강한 동료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포기할 수는 없다.

“빌헬름텔님은 현실이 안정되지 못하여 게임을 접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일주일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 충분한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제 시간을 사겠다는 겁니까? 제게 그럴 가치가 있습니까?”

“가치는 상대적인 겁니다. 연구소에서는 빌헬름텔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지만, 더 오션의 위즈는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일단 이번 한번만 따라주시면 됩니다. 이후의 결정은 빌헬름텔님 마음대로 하세요. 게임을 접으셔도 되고, 제가 말한 대로 생계형 게이머가 되셔도 좋으니까요.”

“그렇게까지 말하신다면…….”

망설이던 빌헬름텔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5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또 다른 셸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4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4) +2 13.11.30 1,024 23 27쪽
33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3) +2 13.11.29 1,153 30 21쪽
32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2) +3 13.11.28 1,050 25 20쪽
31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1) +4 13.11.23 1,522 20 19쪽
30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ED) +1 13.11.22 1,148 22 15쪽
29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8) +1 13.11.19 1,218 24 34쪽
28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7) +1 13.11.16 1,515 29 24쪽
27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6) 13.11.15 1,557 28 23쪽
26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5) +1 13.11.13 1,753 28 21쪽
25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4) +1 13.11.12 1,145 25 14쪽
24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3) 13.11.11 1,135 31 21쪽
23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2) +2 13.11.08 1,564 39 18쪽
22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1) +1 13.11.07 2,192 36 23쪽
21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0) 13.11.06 1,140 36 18쪽
20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9) +1 13.11.05 1,532 31 22쪽
19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8) +3 13.11.02 1,115 23 20쪽
18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7) 13.11.01 1,204 32 23쪽
17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6) 13.10.29 1,152 31 23쪽
16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5) 13.10.28 1,144 27 14쪽
15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4) 13.10.26 1,477 36 17쪽
14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3) +1 13.10.25 1,586 36 16쪽
13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2) +1 13.10.24 2,420 40 21쪽
12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 13.10.22 2,118 32 15쪽
11 1. 계절이 바뀌는 때 (ED) +1 13.10.19 2,873 138 19쪽
10 1. (9) +1 13.10.16 1,912 42 23쪽
9 1. (8) 13.10.14 1,704 29 23쪽
8 1. (7) +1 13.10.05 3,286 60 25쪽
7 1. (6) 13.10.04 2,229 42 22쪽
6 1. (5) 13.10.02 2,267 39 17쪽
5 1. (4) 13.09.29 2,360 42 1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