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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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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연재수 :
152 회
조회수 :
231,827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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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674,356

작성
13.11.05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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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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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글자
22쪽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9)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9.

“으다다다다.”

도서관의 한구석, 뼈 부딪치는 소리가 나도록 몸을 뒤트는 자가 땅딸보가 있었다. 그가 앉은 책상에는 필기구와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치우지는 않고 쌓여만 가는 책의 무게로 인해, 책상의 합판은 이미 크게 뒤틀려 있는 상태다. 도서관을 관리하는 직원이라면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도 주의를 주지 않았다. 심지어 깐깐한 도서관 사서마저도 침묵하고 있다.

땅딸보와 함께 온 금발머리의 꼬마 때문이다.

도서관은 위험하지 않고, 권력과도 거리가 멀다. 귀족들은 이 배움의 전당에 드나드는 게 교양과 품격을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따라서 귀족은 물론 왕족들까지 어릴 때부터 도서관에 드나든다. 특히나 왕립 도서관에는 그런 높으신 분들의 모습을 자주 관찰할 수 있다. 도서관의 직원들이 유력자들의 얼굴을 외우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권력에 아부하려함이 아니라, 실수로 명을 단축하기 싫어서이다. 그것은 왕립도서관의 분관인 이곳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사서를 비롯한 모든 직원들은 땅딸보 옆의 금발꼬마를 보고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에반젤린 유린 베스퍼셰일 미노클. 나이는 어리지만 영민하기로 소문난 크레센토의 제3왕자.

지금 도서관 직원들은 초비상사태다. 혹시나 특별감사라도 시작될까봐, 도서목록과 예산관련 서류가 가지런히, 더욱 가지런히 정리되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마시던 차를 내뿜으며 대청소를 시작했다. 이 시간 창고와 사무실은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다. 그러한 폭풍에서 소외된 사람은 사서와 그의 보조였다.

“이상하네요. 저분이 여기 올 이유가 없는데.”

이 도서관은 분관이다. 철저히 이방인을 위해 완전 개방된 장소로, 왕자가 읽지 못한 책은 한권도 없다. 그런 희귀한 책은 본관의 비밀서가에 보관된다.

“설마 저 못난이를 만나는 게 목적일까요?”

“모르겠구나.”

“귀족이면 어쩌죠? 전 사흘이나 책 쌓아놓고 치우지 않는다고 잔소리했어요.”

보조의 말을 듣자, 사서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난 인격적인 모독을 했다.”

“뭐라고 하셨는데요?”

“책 읽는 사람은 어딜 가고, 웬 맥주통이 앉아 있다고 했다.”

“에……원색적으로 개나 돼지 같은 단어를 쓰진 않으셨으니 그나마 낫네요.”

“그러고 나서 ‘이제 보니 구정물 통이로군’ 하고 정정했다. 바로 옆에서.”

“크헉.”

보조는 기겁했다. 책 읽는 사람의 옆에서 그 사람의 교양을 깎아내리는 표현을 쓰다니. 그의 상관이 귀족 모독죄로 잡혀가는 모습이 생생히 그려진다.

“왜 그러셨어요?”

“저 많은 책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리니 나도 화가 났다.”

“어떡해요. 우리.”

“모르겠구나.”

두 사람은 불안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처분만 기다릴밖에.


◇◇◇◇◇◈◇◇◇◇◇◇◈◇◇◇◇◇◇◈◇◇◇◇◇


“저는 위즈님이 책만 읽고 계시다는 말을 듣고 걱정되어 찾아왔는데, 위즈님은 반갑지 않으신가봅니다?”

위즈는 신음을 흘렸다. 그야 반갑긴 하다. 처음에만 그래서 문제지.

어떻게 된 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위즈를 찾아와 졸라댄다. 그 뛰어난 변장술을 푼 원래 모습 좀 보자고. 이름 알았으면 됐지 또 뭘 바라는 거냐며 뿌리쳐도 끈덕지게 달라붙는 왕자. 이 3왕자라는 꼬마는 소문과 달리 한가한 게 틀림없다.

“제가 먹다 버린 사탕입니까? 이제 좀 떨어지십쇼.”

왕자는 어이없어하더니 손가락을 들어 안내데스크를 가리켰다. 사서와 그의 부하가 하얗게 질리는 게 보인다.

“방금 전 저들이 무례하게 군거 다 봤습니다. 화도 안 납니까? 제가 안 왔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괜한 참견이란 겁니다.”

글씨가 아주 조금 삐뚤어졌다. 역시 대화를 하면서 필사까지 하는 건 무리다. 이래서야 결과물이 좋게 나올 리 없다. 위즈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왕자님도 알다시피, 이건 제 모습이 아닙니다.”

“압니다. 날마다 모습이 바뀌는 걸 보고도 모르겠습니까.”

“제가 왜 이러고 다니는 것 같습니까?”

“글쎄요. 만나기 싫은 사람이라도? 앗, 설마 도박 빚?”

“하하……좋을 대로 생각하십쇼.”

“과연…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왕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더니, 작은 주머니를 꺼내들어 확 펼쳤다. 여지없이 황금빛 광원효과가 눈을 찌른다.


<왕실의 황금동전을 구경했습니다.>


위즈는 냉큼 주머니를 닫아버렸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도박 빚이라면서요? 얼만지는 몰라도 이거 하나면…….”

“아이고.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합시다.”

이 철딱서니 없는 왕자야. 위즈는 왕자를 끌고서 책장이 늘어선 사각지대로 갔다. 그리고 카무플라주 스킬을 풀어버렸다. 한계까지 커진 키가 책장의 끄트머리까지 닿았다. 왕자는 입을 헤 벌리고 위즈를 올려다보았다. 보통사람 기준으로도 큰 키는, 아이의 시각에서는 거인과 같은 위압감을 받게 하였다.

“이제 됐죠?”

“으, 으음. 이해했습니다.”

헛기침을 하며 침착하려 애써도 어린애는 어린애.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이래서 위즈는 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현실에서도 이런 덩치가 어린아이에게 다가서면, 애들은 십중팔구 울어버린다. 그건 더 오션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본모습을 보고 놀랐으니까 약속대로, 두 번 다시 변장을 풀라는 말은 하지 말아요.”

“아, 알겠습니다.”

위즈는 얼른 땅딸보의 모습으로 변했다. 왕자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마법이 아니면서 이런 일이 가능하다니……탐나는 능력이로군요.”

“하지만 저밖에 못 씁니다.”

“하긴.”

이미 자신의 마법사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닐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왕자의 포기는 빨랐다.

“그런데 체형이나 성별은 바꾸지 못하는 겁니까?”

“성별은 시도하지 않았지만, 겉모습뿐이니까 어떻게는 가능할 겁니다.”

“체형은 변화가 힘들군요.”

안타깝게도. 그게 문제다. 체형은 현실의 편재를 빼다 박을 수밖에 없다.

네메시스가 카무플라주 스킬을 만들 때 물었었다. 키를 선택하겠느냐, 체형을 선택하겠느냐. 위즈는 당연히 키를 선택했다. 변장을 할 때, 키의 크고 작음은 커다란 변수니까.

그 결과 위즈는 어떤 모습을 해도 뚱보를 벗어나지 못했다. 거인 뚱땡이, 그냥 뚱땡이, 난쟁이 뚱땡이. 어린애의 모습일 때는 그나마 귀엽기라도 했다.

‘어서 다이어트를 성공해야지.’

이미 식사를 조절은 기본이요, 미친 듯이 운동을 하며 지방을 태우고 있다. 편재의 몸에서 살이 빠져나가면, 카무플라주로 변화한 위즈의 모습도 지금과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

“이제 궁금증은 다 풀리셨을 테니……저는 이 책을 모두 필사해야겠습니다. 이번에도 방해 하시면, 왕자님 얼굴 안 보렵니다.”

“허, 야속한 사람. 어차피 이거만 주고 가려고 했습니다.”

왕자가 주머니를 다시 내밀자, 위즈는 또 과도한 광원효과가 생길까봐 책상 밑에서 열어보았다.


<쇠로 만든 거무튀튀한 반지를 습득했습니다.>


위즈의 허락도 없이 반지는 손가락에 끼워졌다. 말하자면 귀속아이템.


------------------------------------

[호출반지][내구도 없음][사용횟수 : 3회]

크레센토의 제3왕자와 연락할 수 있는 반지. 만날 장소정도만 간단히 전할 수 있다.

사용하려면 반지를 문지르며「유린 멋쟁이♡」라고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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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린은, 그러니까……왕자님 이름에 들어 있는 그거죠?”

“맞아요.”

“안 받을래요.”

위즈는 반지를 빼려고 했다. ‘유린 멋쟁이♡’라니 멀쩡한 정신으로 할 법한 소리인가. 아무리 든든한 유력자를 호출하는 반지라 해도 이건 아니다.

왕자는 그런 위즈를 만류했다.

“어허! 이게 얼마나 귀한 건줄 압니까?”

“아니, 멋쟁이라니…뒤에 하트는 또 뭡니까? 새로운 발음기호입니까?”

“콧소리를 넣어 달라는 표현입니다.”

“그럼 더더욱 안 되죠! 방금 제 모습 안보셨습니까?”

왕자는 살짝 눈을 굴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피식 웃는다.

“상상하지 말아요.”

“그냥 오늘 점심엔 뭘 먹을까 생각한 것뿐입니다. 호박스프가 나오려나.”

“으윽…….”

능글거리는 왕자 때문에 위즈는 혈압이 다 오르려 한다. 그냥 책을 읽는 것보다, 필사하는 게 더 집중력 스탯이 잘 오른다는 것을 알고 필사를 한지 벌써 일주일이 되어간다. 현재 집중력 스탯은 87. 조금만 더 고생하면 100을 채울 수 있다.

‘아마 노랑머리만 아니었으면 더 빨리 끝냈을 거야.’

그래서 위즈는 왕자가 미웠다. 만약 위즈가 확장 이모티콘 팩을 받았다면, 화산폭발 같은 이펙트가 머리위에 나타났을 것이다.

왕자는 손을 흔들며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후우……참자. 참아. 까짓 거 숨어서 조그맣게 말하면 그만 아니냐.”

위즈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필사를 시작했다. 글자 하나하나마다 혼을 담아 새긴다는 기분으로 펜을 놀렸다. 하지만 왕자와 노닥거린 여파는 컸다. 글씨는 삐뚤빼뚤 중심을 잡지 못했다.

지금 위즈처럼 무직업으로 하나의 스탯을 100까지 올리려는 자는 어디에도 없다.

‘최초달성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조바심이 생긴 걸까.’

혹시라도 새치기 당할까봐 매일매일 네메시스를 통해 확인해보기까지 했다. 그러니 그런 무식한 노가다꾼은 위즈 하나뿐이다. 그런데도 불안하다. 이런 상태로는 책을 읽어도, 필사를 해도 스탯이 오르지 않는다.

집중력 스탯은 말 그대로 끈기 있게 몰두하는 집중력뿐만 아니라,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상징한다. 이점은 전투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현재 내 집중력으로는 선공으로 기습시 성공률이 10%, 하지만 맞으면서 싸우게 되면 1%다.”

그건 일반적으로 터치패널을 두드리면서 하는 식의 플레이, 즉 영혼 없는 공격에 해당한다. 유저가 집중을 해서 공격하면 100% 전부 명중이다. 실제 위즈는 초보자 사냥터에서 그 사실을 확인했다. 유저들도 상태창의 수치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적들의 수준이 올라가면 달라지지.”

숫자가 늘어나고, 지능도 높고, 장비까지 갖춘 적을 상대로도 100% 공격이 명중할 수 있을까. 그건 아니다. 위즈뿐만 아니라 다른 유저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유저들은 정신을 집중해서 한방으로 죽이려 노력한다. 그래야 집중력 스탯이 잘 늘어난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스탯은 후반부에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비록 방법이 비효율적이긴 해도, 내가 집중력을 87까지 올린 건 사실. 그런데도 왕자의 장난에 마음이 흔들린다면, 집중력 100은 단순히 타이틀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전락하고 만다. 내게 필요한 건 부동심이야.”

생각해보면 인육만두를 상대로도 겁먹지 않고 잘 버텨냈다. 암살자의 의지를 사용할 시기를 저울질하며, 상대를 도발했고 멋지게 성공했다. 그때의 위즈는 패배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조바심 내지 말자. 남들이 나보다 앞서 나간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더 오션의 모든 땅덩어리를 끌어 올리는 것이니까.’

무심코 고개를 든 위즈는 사서와 눈이 마주쳤다.

“저 사람, 휴식 없이는 능률도 성취도 없다고 했었지.”

깐깐하긴 했지만 사서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의 조언도 맞는 말이다.

망설이던 위즈는 책들을 전부 원래자리에 되돌려 두고, 필사본은 데스크에 내주었다.

사서는 딱딱한 동작으로 사본을 받아들었다. 그 옆자리에 앉은 직원이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하하 저희 선배님이 한말 너무 귀담아 듣진 마세요. 가끔 썰렁한 농담을 하신다니깐요.”

“아닙니다. 충분히 귀감이 될 만한 이야기였습니다.”

직원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사서를 바라보았다. 위즈의 말은 잘나신 사서님에게 어떻게든 보답을 해주겠다는 내용으로 들린다. 그의 눈에는 왕자와 어울리던 위즈가 진짜 귀족으로 보였고, 자신의 선배는 곧 감옥으로 끌려가 강제노동으로 청춘을 날릴 것 같았다.

“너무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휴식 없이는 능률도 성취도 없는 법. 가끔은 몸도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위즈는 홀가분하게 도서관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보며 사서의 얼굴은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예전에 어떤 꼬마에게 자신이 했던 말이, 그대로 저 땅딸보에게서 흘러나왔다. 이것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


위즈는 곧장 초보자들이 노는 사냥터로 향했다. 더 오션을 시작한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토끼를 잡는 유저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꾸준히 게시판을 살펴보기 때문에 그 이유도 알고 있다.

도시를 벗어나면 확률적으로 만나기 쉬운 인간형 사냥감-노상강도.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언제나 최소 두셋, 많게는 열이 떼를 지어 달려든다. 오로지 유저의 호주머니를 노리고서. 초창기 레드 오션에서는, 이들을 만만하게 보고 초보자 사냥터를 곧바로 졸업한 유저들 때문에, 모든 유저가 큰 피해를 보았다.

‘그냥 떼 지어 달려드는 거라면 늑대도 마찬가지. 노상강도들은 거기에 무기를 들고 있으며, 불리해지면 몸까지 사린다.’

첫 방의 기습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노상강도들은 도망가 버린다. 그게 반복되면 노상강도들은 경험이 쌓이고 쌓여 좀 더 노련해진다. 그리고 유저들을 잡기 시작하면, 몹 주제에 레벨업을 해버린다. 결국 초보자 사냥터를 갓 벗어난 유저가 잡을 수준을 넘어서버린다.

결국 노상강도들의 존재가 초보유저들을 가두는 울타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유저들은 하루빨리 도시 밖으로 나가서 이런 저런 퀘스트를 깨고 싶다. 해킹 전처럼 좋은 장비도 갖추고, 레벨도 예전처럼 올리고 싶다. 그렇기에 초반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 맞춰지는 건 용납할 수가 없다.

이에 한 유저가 과거의 경험을 살려, 팬 사이트에 이 같은 내용을 올렸다.


노상강도를 레벨 업 시키지 맙시다. 충분히 집중력을 올리고, 장비도 갖춰 싸웁시다.

그리고 최소 20명씩 파티를 이뤄 섬멸해야 합니다.


이에 공감하는 유저들이, 끊임없이 토끼를 잡고 있다.

위즈가 집중력을 올리는 것에는 이런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통할는지 확인하기에 앞서, 위즈는 몸을 풀기 위해 깊숙한 숲속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토끼가 리젠되는 곳과는 달리 유저들의 숫자가 적었다. 늑대와 멧돼지, 그리고 곰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노는 건 싹수가 보이는 유저들이지.’

다들 극에 달한 집중력으로 치고 빠지며, 늑대와 곰을 잡고 있다. 집요하게 급소만 노리는 자들도 있다. 이 역시 집중력 스탯을 올리는 방법이다.


<치명타가 터졌습니다.>


단순한 찌르기에 달려오던 멧돼지가 쓰러졌다. 급소를 때린 데다 치명타까지 겹쳐 멧돼지는 기절해버렸다. 저런 상태 이상을 유도하는 지능적인 플레이 역시 바람직하다. 확실히 토끼나 잡는 유저들보다 수준이 높다.

하지만 지금부터 위즈가 할 일은 그보다 더한 짓이다.

곰이 나오는 지역까지 들어간 위즈는 나무 몽둥이를 꺼내 바위에 힘껏 내리쳤다. 숲에서 이런 짓을 하면 자극받은 몹들이 몰려든다. 특히 지능이 낮을수록 그런 경향을 보이는 데, 이 경우는 곰들이 떼로 뭉쳐 달려올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정상적인 유저라면 이런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난 정상적으로 키우는 게 아니거든.’

위즈가 일으킨 소음에 유저들이 투덜거리며 떠나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사냥을 방해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방해 맞다. 계속해서 이렇게 딱딱 소리를 내고 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에 짐승냄새가 섞이기 시작했다. 곰들이 위즈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다. 이대로 있으면 자살하는 거나 마찬가지. 위즈는 길게 자른 천을 꺼내들었다. 인육만두를 혼내줄 때 사용한 슬링천이다. 위즈는 풀숲으로 돌을 날려 보냈다. 숨어서 기회를 보던 곰은 의외의 기습에 놀랐지만, 홀로 서있는 위즈에게 겁먹지 않고 달려들었다.

“나도 너 겁 안나.”

마주 달려든 위즈는 몽둥이를 들어 곰의 발을 냅다 찍어버렸다. 그리고 몸을 굴려 자리를 피했다. 곰의 앞발공격이 허탕을 치며 빗나갔다. 위즈는 자신을 공격하는 곰을 깔끔히 무시하고, 새로이 난입한 곰의 눈에 단단한 돌을 박아 넣었다. 마찬가지로 열 받은 곰은, 위즈를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그것을 피해 풀숲으로 뛰어들며, 위즈는 나뭇가지 하나를 쥐었다. 뛰는 속도 때문에 나뭇가지는 둥글게 휘어졌고, 곰이 달려드는 순간 위즈는 그것을 놓아버렸다.

철썩. 아마도 이런 소리가 났을 것이라고 위즈는 생각했다. 꽁지가 빠지게 뛰느라고 자세히는 확인하지 못했다. 중요한 건 곰이 가래 끓는 소리가 나도록 울부짖게 만든 것이다.

위즈는 이후로도 곰이 나타나는 족족 약 올려서 자신을 뒤쫓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을 쫓는 곰의 숫자는 12마리. 이 정도 숫자가 몰린 건 위즈로서도 처음이다. 하지만 불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악에 받친 곰들이 포기하고 돌아서려고 할 때마다, 때려서 반드시 어그로를 유지했다.

지금 위즈는 최대한 어그로를 길게 끄는 법을 연구 중이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딱히 달리는 속도가 빨라서가 아니다. 꾸준히 지형지물을 익혀두었기 때문.

‘몹은 새로 리젠되지만, 나무와 바위를 비롯한 지형은 그대로다.’

곰들에게 잡힐 것 같으면, 경사진 곳으로 피하고, 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지그재그로 달렸다. 곰은 지쳐서 헐떡거리고, 이 짓만 반복한 위즈는 질주 스킬까지 생겨버렸다.

스테미너가 거의 떨어질 때 즈음해서 질주가 발동했다.


<패시브 스킬-질주가 발동 되었습니다.>


====================================

[질주:MX-LV.100] [LV.1-숙련도 02.30/100%]

목숨을 걸고 달리는 당신은 어느 순간부터 다리의 감각을 느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하면 몸이 무겁지만, 이것이 반복되면 점차 단련되어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지게 됩니다.

(10분 이상 달릴 경우 이동속도가 초당 7M로 유지되며, 스테미너 소비가 1.5배로 늘어납니다)

(1시간 이상 달리면 힘, 민첩, 근성 스탯 중 하나를 랜덤획득 합니다.)

====================================


“이쯤에서 스테미너 포션을 마셔주고…….”

스테미너 소비 1.5배 증가 정도라면, 아직 상점표 포션으로 근근이 버텨나갈 수준은 된다.

위즈는 어느 풀숲으로 들어가 냅다 바닥을 내리치고는, 서둘러 왔던 길로 돌아갔다. 뒤쫓아 오던 곰들은 마주 달려오는 위즈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일렬로 나란히 서서 앞발을 치켜들었다. 확실히 위즈가 한 짓은, 곰들이 자연스레 협동을 깨우칠 정도로 얄미웠다. 아마 테이머가 위즈의 행동을 보았다면, 이런 식으로 짐승에게 전술을 습득시킬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을 것이다. 하지만 위즈가 원하는 것은 곰을 길들이는 게 아니다. 곰이라는 적의 움직임과 생태를 철저히 연구하여, 완벽히 어그로를 끌면서도 생존하는 것. 그것뿐이다.

위즈는 정면의 곰을 향해 나무 몽둥이를 치켜들었다. 투창의 자세였다.

그것도 모르고 목표물은 훤히 가슴을 드러냈다. 나무 몽둥이가 쏘아졌다. 달리는 속도가 더해진 그것은 곰을 일격에 쓰러뜨릴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명치에 틀어박히자마자, 표적이 된 곰의 몸이 기울어지며 옆에 서 있던 곰을 덮쳤다. 그 빈틈을 노리고 자세를 낮춘 위즈가 굴러갔다. 곰들은 잽싸게 빠져나간 위즈를 쫒아 몸을 돌렸지만, 곧 온몸을 찌르는 끔찍한 고통에 아우성을 쳤다. 어느 샌가 노란 구름이 주변을 덮고 있었다.

곰들은 본능적으로 그것들이 야생말벌임을 알아보았다. 조금 전 풀숲에 들어간 위즈가 부순 벌집에서 튀어나온 것들이었다. 만약 곰들이 얌전히 그 자리에 있거나, 양옆으로 자리를 피해버렸다면 피해를 덜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의 고통이 그런 생각을 가로막았다. 곰들은 무작정 왔던 길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말벌들은 멀어지는 위즈 대신 곰에게 화풀이했다. 곰들은 두꺼운 가죽을 믿고 야생말벌을 상대했다. 그러나 이 작은 곤충은 집요했다. 결국 도망치기로 결정한 곰들은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위즈는 홀로 도망치는 곰 한 마리의 뒤를 쫓았다.

상처입고 도망치는 짐승은 곰이라 해도 위즈에게 훌륭한 경험치 공급원에 지나지 않았다.


◇◇◇◇◇◈◇◇◇◇◇◇◈◇◇◇◇◇◇◈◇◇◇◇◇


이제 곰들은 위즈만 봐도 설설 피했다. 딱딱 나무치는 소리가 들리면 곰들은 점점 더 멀어진다. 저 곰들을 전부 잡아 새로운 녀석이 리젠되지 않는 이상, 위즈에게 덤빌 놈은 없었다. 산에서 야생감자를 들쑤시던 멧돼지도 위즈를 보자 후닥닥 도망 가버렸다. 다친 유저의 목줄기를 노리던 늑대는 아예 무리가 통째 내빼버렸다. 몇 번이고 위즈의 장난에 끌려 다닌 끝에, 숲속의 동물들은 깨달은 것이다. 저 인간은 죽고 죽이는 것보다, 자신들을 괴롭히는 것에 목적이 있음을.

“이 짓도 마지막인가.”

사실상 숲에서 최강자는 위즈였다.

“슬슬 노상강도들도 손봐줘야겠군.”

그러자면 역시나 지형을 미리 익혀두는 게 좋다는 건 두말할 것 없는 사실.

이 방향으로 숲을 빠져나가면, 사실상 초보자 전용 사냥터가 끝난다. 거기서부터 더듬어 가면 노상강도들의 영역권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서 가자꾸나. 곰돌아.”

위즈는 타고 있는 곰의 엉덩이를 철썩 내리쳤다. 말 못하는 짐승은 그저, 이 무서운 존재가 해코지 할까 두려워 눈물만 뚝뚝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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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1) +4 13.11.23 1,521 20 19쪽
30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ED) +1 13.11.22 1,147 22 15쪽
29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8) +1 13.11.19 1,217 24 34쪽
28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7) +1 13.11.16 1,514 29 24쪽
27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6) 13.11.15 1,556 28 23쪽
26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5) +1 13.11.13 1,751 28 21쪽
25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4) +1 13.11.12 1,143 25 14쪽
24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3) 13.11.11 1,134 31 21쪽
23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2) +2 13.11.08 1,562 39 18쪽
22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1) +1 13.11.07 2,192 36 23쪽
21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0) 13.11.06 1,138 36 18쪽
»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9) +1 13.11.05 1,531 31 22쪽
19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8) +3 13.11.02 1,113 23 20쪽
18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7) 13.11.01 1,203 32 23쪽
17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6) 13.10.29 1,151 31 23쪽
16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5) 13.10.28 1,143 27 14쪽
15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4) 13.10.26 1,476 36 17쪽
14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3) +1 13.10.25 1,585 36 16쪽
13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2) +1 13.10.24 2,419 40 21쪽
12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 13.10.22 2,117 32 15쪽
11 1. 계절이 바뀌는 때 (ED) +1 13.10.19 2,871 138 19쪽
10 1. (9) +1 13.10.16 1,911 42 23쪽
9 1. (8) 13.10.14 1,703 29 23쪽
8 1. (7) +1 13.10.05 3,286 60 25쪽
7 1. (6) 13.10.04 2,227 42 22쪽
6 1. (5) 13.10.02 2,266 39 17쪽
5 1. (4) 13.09.29 2,359 4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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