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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또 다른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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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연재수 :
1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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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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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1.30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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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글자
27쪽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4)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4.

“저기……미리 알현요청을 해야…….”

위즈 옆에 따라붙은 3왕자가 불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절차를 무시하고 알현실로 쳐들어가면 왕족 모독죄를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이야 세상물정 어두운 이방인이라 봐주었지만 두 번째는 없다.

그 의견엔 위즈도 동의했다.

하지만 지금 알현실에서 열리는 중신들과의 회의보다도 중요한 볼일이 있다.

“전 알아버렸습니다.”

“무, 무엇을요?”

“유린이란 이름의 남자가 자신의 누나에게 저지른 일을.”

3왕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설마 거기까지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위즈가 내지른 말에 충격은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컸다.

“어쩔 생각이에요. 당신은 그분의 복수를 하려는 건가요?”

“복수?”

위즈는 걸음을 멈췄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졌다.

자신은 이들을 한 번도 적대하지 않았다. 앞서 알현실을 찾을 때도 그랬으며, 다시 만나려는 목적에도 악의는 없다.

그런데도 당사자 앞에서 복수를 입에 올리는 왕자.

“난데없이 복수라니요. 왕자님? 제가 크레센토 왕가에 원한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까?”

“아닌가요?”

“당연히 아니죠. 이곳에 처음 와서 밟은 땅이 미노클입니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여긴 제 근거지나 마찬가지인 곳입니다. 그런데 근거지의 토착세력을 적대하다니요. 그것도 왕족을?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한 겁니까?”

“그, 그야……선조의 일기장을 당당히 요구했고, 무엇보다…….”

“또 뭔데요?”

“에켈 요새에 가둔 마물에게 명령해서 폭도들을 진압했지 않습니까. 비록 마물이 죽어버렸지만……결국 그분의 의지를 이으신 것 아닙니까.”

“수백 년 전에 죽은 사람의 제자가 되었으니, 이제 선대에 얽힌 일을 추궁할 거라 생각한 겁니까?”

왕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굴 표정을 보니 답을 얻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위즈는 이마를 쳤다. 핏 스톤이 에켈 요새를 습격한 무리를 섬멸한 건 맞다.

그것이 위즈를 돕는 행동인 것도 맞다. 하지만 그건 마스터가 남긴 유언을 핏스톤이 충실히 따른 것에 불과했다.

일단 퀘스트에 딸린 설명만 해도, 핏 스톤의 마스터는 제자를 구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만나러 오라고 했을 뿐이고, 실제 가서 만났을 때도 뭔가 거창한 것을 해주려 하지도 않았다.

만약 위즈가 핏 스톤의 마스터-witch였다면, 2시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에 많은 것을 가르치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런데 witch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뭔가 서두른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위즈는 늘 하던 대로 필사만 죽어라고 하다가 돌아왔다.

무엇보다 witch는 자신이 가진 것의 일부를 전한다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했다. 위즈를 제자로 여겼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전하겠다고 했을 것이다.

‘2시간이 너무 짧다면 책이나, 무기 같은 거라도 전해야 옳아.’

그러나 위즈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왕자의 생각이 터무니없다 여기는 이유다.

“저는 그 누구의 제자도 아닙니다.”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어째서 다시 아바마마를 알현하려는 겁니까? 우리들은 당신의 요구를 들어주었잖습니까.”

“그야 아까 말한 문제때문이지요. 남매간에 벌어진 상잔.”

“제자도 아니고, 복수하려는 게 아니라면서요?

이야기가 자꾸만 뱅뱅 돈다. 핵심을 말해야만 해결될 문제다. 하지만 복도에서 지껄일 이야기가 아니었다. 역시나 높으신 분들과 함께 할 이야기.

위즈는 다시 한 번 무례를 감수하기로 했다.

“뭐, 뭐하는 겁니까!”

위즈의 어깨에 덜렁덜렁 매달린 채 왕자가 소리 질렀다.

“뻔하지 않습니까?”

위즈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왕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다간 국왕 모독죄로 처형당한다고요!”

“꼭 필요한데다가, 옳은 일인데 고작 그런 이유로 머뭇거린단 말입니까? 처형? 그게 뭐 두려운 일이라고 그러는 겁니까?”

위즈는 고개를 돌려 왕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강제로 어깨에 둘러매어진 왕자는 코앞에 들이밀어진 거인의 얼굴을 보며 몸을 떨었다. 위즈의 무례함은 더 이상 참을 수준을 넘어섰다.

“그 몸이 진짜가 아니라서 그런 겁니까? 그만큼 이곳의 예법이며, 우리들의 존재가 하찮게 여겨지는 겁니까? 그래서 사형도 아무렇지 않은 겁니까? 당신에겐 가짜 죽음이니까?”

죽어도 다시 부활해 싸우는 병사. 그게 이방인인 것은 맞다.

또한 대부분의 이방인에게 있어, 더 오션은 그저 오락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그 절반은 현실에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다. 게임과 관련되어 흐르는 돈의 흐름 때문이다.

위즈는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해봐야 게임 속 프로텍트의 작용으로, 그런 정보는 이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AI로 움직이는 존재들이 이방인에게 쓸데없는 의문을 품어봐야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은 필요하다.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위즈의 태도에, 벌써부터 왕자가 반감을 내비치고 있다. 앞으로의 게임 플레이에 악영향을 미칠 건 불 보듯 뻔하다. 어쩌면 왕자가 극단적인 행동을 취할지도 모른다.

‘살려달라고 소리만 질러도, 난 왕자를 해하는 자가 되어버려.’

왕자를 둘러맨 모양새부터가 수상쩍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곳은 왕궁이다.

위즈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요소는 넘치고도 남는다.

“왕자님. 가짜 목숨이란 표현,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저희들의 용맹, 저돌성은 그래서 생겨나는 거니까요. 이방인으로 불리는 것도 당연합니다. 주인이 되지 못하고 겉돌 수밖에 없는 존재는, 언제까지나 제3자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이방인들이 어째서 여기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야……가라앉은 땅을 끌어올리고, 언제 벌어질지 모를 마족과의 다툼을 대비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하지만 결국 우리들 이방인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이 세계가 마족에 침공당해 멸망해도 이방인들은 원래 살던 세계에서 잘 살아갈 겁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당신들, 이방인들이 여기 있는 것입니까?”

“순수한 호의라고 생각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호의……말입니까?”

“네. 호의입니다.”

“당신들의 행동에 호의가 깔려 있다는 말입니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위즈는 왕자를 내려놓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모자손으로 거칠게 벽을 때렸다. 갑자기 무력시위를 하자 왕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 만약에 어떤 무뢰배가 아녀자를 희롱한다고 칩시다. 그 곁에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 아이와 남편이 있고요. 왕자님은 우연히 그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당장 그 무뢰배를 잡아들여 벌을 받게 합니다.”

“그런데 왕자님은 변복 중이며, 곁에 호위기사도 없는 몸입니다.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고, 혼자 상대하다간 왕자님이 다칠지도 모릅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가장 가까운 경비대를 찾습니다. 그리고 신분패를 제시하고 병력을 빌려 처리합니다.”

“방법이 두 가지로 나뉜 이유는 왕자님의 안전 때문이로군요. 맞습니까?”

왕자는 얼굴을 붉혔다.

“누구나 자기 목숨은 소중히 여깁니다. 그게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맞습니다. 생명은 소중한 겁니다. 그런데 만약 왕자님이 아무리 칼에 찔려도 죽지 않는 몸을 얻었다면 어땠을까요? 경비대를 부르러 가셨을까요, 아니면 직접 달려들어 처리하셨을까요?”

“직접 처리했겠지요.”

“어린애의 힘이라도 말이지요?”

“경비대를 부르러 가는 동안, 사람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망설일 틈이 있습니까?”

위즈는 왕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거칠게 느껴지지 않게, 부드러운 손길로.

연장자가 애정을 담아 쓰다듬는다는 느낌은 들지만, 무례하진 않을 정도로 머리를 쓰다듬는 건 위즈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위압감을 주는 덩치와 커다란 손은 아이의 머리통을 통째로 덮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왕자는 묵묵히 위즈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건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입니다. 누구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고, 누구나 할 수 있지요. 하지만 목숨 때문에, 이해관계 때문에 미뤄질 뿐입니다. 그건 비겁한 게 아닙니다. 나름의 사정 때문인 거지요. 우리 이방인들도 원래 세계에서는 그렇게 행동합니다. 우리도 똑같은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이 세계에서만은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목숨이 아깝다고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않아도 됩니다. 노상강도에게 죽을 위협에 처한 상인을, 상처투성이가 되어 싸워 구해낼 수 있습니다. 이해관계에 얽혀 주저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들은 이방인. 당연히 이 세계에 연고가 없습니다.”

위즈의 설명을 들은 왕자가 웃었다.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곧 이해관계란 게 생길 테지만요.”

“네. 그래서 우리들은 거리낌 없이 인간답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호의에서 비롯된 일이며, 그것을 뒷받침 하는 저돌성은 이방인이 불사의 존재이기에 가능한 겁니다. 물론 인육만두의 경우처럼, 방종을 일삼는 자들도 있겠지만요.”

“알겠습니다. 위즈. 당신이 하는 말. 이해했습니다. 순순히 공범이 되어드리지요.”

위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데없이 공범이라니?

그보다 왕자가 이렇게 순순히 자신을 따르게 될 줄은 위즈도 짐작하지 못했다.

왕자는 손가락을 펴 자신을 가리켰다.

“절 둘러매지 않고 뭐하는 겁니까?”


◇◇◇◇◇◈◇◇◇◇◇◇◈◇◇◇◇◇◇◈◇◇◇◇◇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위즈의 계획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알현실을 지키는 병사들은 낫처럼 생긴 병장기인 빌(bill)을 엇갈려 놓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래서야 처음처럼 기세 좋게 들이칠 수 없다.

“기별을 넣었으니 기다리십시오.”

“지금 회의 중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언제 끝날지 알고 기다립니까. 당장 만나 뵈어야겠습니다.”

“기별을 넣었으니 기다리십시오.”

병사들은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하긴 이게 정상이지.’

위즈는 난처한 표정으로 왕자를 돌아보았다. 어깨에 올라앉은 왕자 역시 난감해 했다. 병사들이 잘못한 일은 하나도 없다. 문제가 있는 쪽은, 절차를 무시하고 밀어붙이는 위즈다. 이건 왕자도 알고 위즈도 안다.

“시간이 없으니……조금 더 무례를 범해야겠습니다.”

“어떻게 하려고요?”

왕자가 불안하게 위즈를 바라보았다. 다행이 위즈는 병사들과 싸우려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바운티 헌터에게 습격 받은 그날! 두 사람이 먹은 스튜에는! 암수 두 마리의 꿩이 사용되었습니다!”

아는 사람만 아는 내용이 위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위즈가 경험했던 누군가의 기억.

필시 witch일 것임이 분명한 기억을 떠올리며 위즈는 시시콜콜한 내용을 읊었다.

알현실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이방인을 좋게 봐줄 사람은 없었다. 그 앞을 지키는 병사들은 수갑을 꺼내들었다.

“조용히 하시오.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란 말이오.”

위즈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리고 결혼식 날! 두 상자의!”

여기까지 말하자 문이 벌컥 열리며 국왕의 호위기사가 튀어나왔다. 이미 왕자를 내려놓았기 때문에 위즈는 걱정하지 않고 호위기사의 검을 상대했다.

‘모자손도 건틀릿의 일종이니 그럭저럭 방어는 할 수 있을 거야.’

위즈는 그렇게 여기고 모자손을 들어 공격을 막으려 했다. 잠시 후 위즈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잡았다 싶으면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검은, 이미 위즈의 전신을 난자하고 있었다.


<왕국 기사의 ‘12회 연속 베기’를 모두 맞았습니다.>

<로브에 걸린 스톤 스킨으로 총 2180의 데미지를 받아냈습니다.>

<마력이 0이 되었습니다.>

<미처 막지 못한 여분의 데미지를 받습니다.>

<320의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위즈는 입을 쩌억 벌렸다. 한 번의 격돌로 위즈는 마나가 고갈되고, 체력이 절반이상 깎여버렸다. 리얼 계열로 상대할 수준이 아니다.

‘대충하려고 나온 게 아니라, 날 죽일 작정이야.’

이렇게 되면 피하는 수밖에 없다. 이미 그에 걸 맞는 스킬도 가지고 있다.

“정령강화!”

푸르게 빛나는 덩어리가 주변을 빙빙 돌았다. 위즈는 그것을 신발에 깃들게 했다.


<정령강화(바람속성)을 사용하셨습니다.>

<신발에 적용.>

<3분간 이동속도가 증가됩니다. [(W)초당 1.2m / (R)초당 3.8m /(B)초당 2.2m]>

<3분간 이동에 따른 스테미너 소비가 0으로 감소합니다.>


“카무플라주!”

몸을 줄여서 기사의 공격을 피한 위즈는, 진각을 찍어 발생한 반동을 이용해 알현실로 몸을 날렸다. 데굴데굴 굴러간 위즈는 무릎을 꿇은 채 양손을 바닥에 대고 엎드렸다.

“국왕폐하 만만세.”

“자주 보게 되는구나. 이방인 위즈여.”

잘 벼린 칼날처럼 싸늘함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가 물었다.

국왕은 그만큼 폭발직전이었다.

위즈가 소리 지른 것들은 전부, 크레센토를 건국한 초대국왕 유린의 치부와 관련되어 있었다.

국왕으로서는 이방인 하나가 감히 협박을 한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복수를 원한다면 하게나. 하지만 치욕을 줄 생각이라면 참지 않겠네.”

국왕의 위엄어린 목소리가 위즈의 뒤통수를 때렸다.

“먼저 주변을 물려주셨으면 합니다. 이번에도 왕가의 일원들만 남아계셨으면 합니다.”

“허허. 들었겠지? 이 이방인이 중요한 볼일이 있다 하니, 오늘 회의는 이걸로 마치도록 하지.”

대신들은 군말 않고 알현실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호위기사와 궁정 마법사들은 남았다. 일방적으로 위즈가 당하는 모양새였지만, 그래도 한바탕 싸운 뒤였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국왕이 남긴 자들이다. 그만큼 신임 받는 신하들이라는 것이겠지.’

그래서 위즈도 그들을 내보내라고 하진 않았다.

“혹시, 레드 크리스탈이라는 물건이 미노클 왕가에 남아있습니까?”

국왕은 피식 웃었다.

“그대가 요구하는 것들은 죄다 민감한 것뿐이로군. 지금 내가 들고 있는 홀에 박힌 보석이 그대가 말한 레드 크리스털이라네.”

위즈는 손을 내뻗었다.

“잠시 그것을 제 손에 들려주시겠습니까?”

왕자들이 발끈했다. 위즈에게 줄곧 호의적이던 3왕자마저도 얼굴을 굳혔다.

왕이 들고 있는 홀은 단순한 예식용 막대기가 아니다. 하나의 왕조가 시작되면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왕권의 상징이며, 그것자체로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를 가진 홀을 넘겨달라는 말은, 곧 왕위의 찬탈을 의미했다.

“복수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국왕은 손을 들어 왕자들의 소란을 잠재웠다. 하지만 국왕 역시 위즈의 요구에 놀란 눈치다.

“감히 군왕의 홀을 달라는 건가?”

“제가 원하는 건 군왕의 홀이 아니라, 거기에 박힌 레드 크리스털입니다. 그것을 이 손으로 만지게 해주십시오.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싫다면 어쩔 텐가?”

“관두십시오. 이 나라 크레센토가 망하지 않고 존재하는 한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겁니다. 지금의 왕자들도, 그 후손들도, 선대의 잘못을 덮기에 바빠지겠죠. 그것이 미노클 왕가의 선택이라면 기꺼이 존중해드리겠습니다.”

“이방인 위즈여. 너무 서두르지 말게. 난 분명히 복수를 하려거든 하라고 했네. 조상이 저지른 잘못의 대가를 받아내려 온 것이라면 피하지 않겠다는 뜻이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자네는 복수를 하러 온 사람 같지는 않구먼. 내 짐작이 틀렸는가?”

“국왕 폐하의 말씀대로입니다. 복수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대는 회의를 방해하면서까지 이곳에 쳐들어왔는가. 그것도 가장 무례한 방법으로.”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하는 일에 큰 의미가 있을지……. 제 생각이 틀렸는지 맞았는지.”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모르겠습니다.”

“하려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래서 얻은 해답은?”

“해보지 않고서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논리도 결여되어 있고, 이유도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 말입니다. 그럴 때는 일단 하고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국왕은 탐스러운 수염을 쓰다듬으며, 왕좌에 등을 기댔다.

“그렇지……시도하지 않고서 해답을 얻을 수는 없는 법. 겁쟁이가 되어서는 실패도 얻을 수 없지. 나도 늙었군. 어느새 그런 평범한 것마저 잊고 있었어.”

위즈의 앞에 황금으로 장식된 짧은 막대기가 떨어졌다. 덩굴 식물이 막대를 타고 올라가 꽃을 피우는 부분에는 붉은 보석이 장식되어 있었다.

“아바마마! 어찌 홀을 이방인에게 주십니까!”

“미노클 왕가를 여기서 끝낼 작정이십니까!”

왕자들이 울부짖었다. 호위기사와 궁정마법사들도 뜻밖의 일에 술렁거렸다. 홀이란 물건은 저렇게 바닥에 굴러다녀서는 안 되는 물건이다. 헌데 그걸 던진 사람이 다름 아닌 국왕이었다. 그들의 동요에 국왕은 분노했다.

“닥쳐라!”

국왕이 왕좌의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저 장식용 막대기 하나 던진 것뿐이다! 그게 그렇게 큰일인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눈을 번뜩이며 국왕이 으르렁거렸다.

“선조가 저지른 과오 때문이라면, 우리 미노클 왕가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이다. 설령 유훈으로 전해 내려오지 않는다 하여도, 그 누구도 이를 피해서는 아니 된다! 우리들은 Royal blood이기 때문이다! 왕자들이여. 묻겠다. 우리가 먹는 기름진 고기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왕자들은 머뭇거렸다. 그 모습을 본 국왕은 자신의 검을 뽑아들며 소리 질렀다.

“대답하라!”

“백성의 메마른 허벅지 살입니다!”

“우리가 마시는 포도주는 어찌하여 향기로운가?”

“백성의 피는 달콤한 법입니다!”

“어찌하여 왕성은 이렇게도 높은가?”

“선조께서 시체를 높이 쌓았기 때문입니다!”

국왕은 들고 있던 검을 내던지며, 한걸음씩 높이 솟은 권좌를 내려왔다.

“그것이 우리들이 누리는 특권의 정체다. 선조에게서 물려받은 이 나라 크레센토, 그리고 성도 미노클, 내 백성들. 이 모든 것의 주인인 나, 아론 베스퍼셰일 미노클은 한시도 그것을 잊지 않았다. 우리들은 특권만이 아니라 의무도 물려받았다. 그중엔 선조의 과오를 청산할 의무 또한 포함되어 있다.”

국왕은 자신이 내던진 홀 앞에 멈춰 섰다. 위즈는 바닥에 떨어진 홀을 주워들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서있었다.

“왕자들이여. 그리고 나의 자랑스러운 검과 홀이여. 내가 왕으로서 내게 주어진 책무를 다하는 모습을 지켜봐주지 않겠는가.”

“왕의 뜻대로!”

“왕의 뜻대로!”

우렁찬 외침이 알현실을 울렸다. 위즈는 뒤를 돌아보았다. 왕자들을 비롯하여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것 참 부담되네요.”

위즈는 얼룩덜룩한 손을 들었다. witch의 훼방으로 결국 잉크를 쏟아 생긴 흔적이다. 분수대에 빠져 홀딱 젖었음에도, 조금도 번지지 않은 잉크자국. 별것 아니라고 무심코 넘겨버릴 수도 있는 사소한 것이지만, 위즈는 이것이 퀘스트 완료를 위한 열쇠라고 생각했다.

위즈가 받은 [히든 퀘스트/ 이름 모를 여인의 부탁]은 난이도가 D+였다.

그리고 난이도는 알파벳보다, 플러스(+) 기호의 유무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진다.

알파벳으로 표시되는 것은 순전히 전투의 난이도를 표시하는 것인 반면, (+)기호의 유무는 그것과는 다른 의미의 난이도를 나타낸다. 주로 퍼즐이나 퀴즈, 다양한 함정들이 첨가되어 머리를 쓰는 쪽으로 게임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는 힌트가 거의 주어지지 않는 점도 작용한다. 퀘스트 해결에 중요한 단서를 손에 넣어도, 친절하게 안내메시지가 뜨지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유저가 맨몸으로 부딪쳐나가며 진행해야 하는 퀘스트로서, 머리가 빠개지도록 고민하고-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하는 퀘스트였다.

‘손에 묻은 잉크자국은 witch의 기억속에서도 언급되었지. 손에 묻은 잉크를 지워야겠다는 중얼거림이었어.’

물에 지워지지 않는 잉크는 witch의 작품이다. 그리고 홀에 박힌 레드 크리스털 역시 witch의 물건이었다. 그 둘을 한데 모으면 어떤 일이 생길 것이라는 게 위즈의 짐작이었다.

‘안 되면 나 혼자 쪽팔리는 거지.’

위즈는 홀을 들어 올려, 잉크가 묻은 손을 레드 크리스털 위에 얹었다.

둥둥.


<위저드 마크로부터 마력이 공급되었습니다.>

<witch ####의 마력패턴을 인식했습니다.>


“아…….”

“오오!”

위즈는 홀을 높이 들어올렸다. 레드 크리스털로부터 떠오른 어떤 여인의 상이 알현실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성공했군. 위즈.』

여인은 고깔모자를 벗으며 씨익 웃었다.

『안녕하신가. 크레센토의 국왕이여. 짐작하고 있겠지만, 이 몸은 300년 전 최강의 존재다.』

국왕은 고개를 숙였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위대한 영웅이시여. 복수를 원하신다면, 부디 저의 목숨을 거둬 가시길 바랍니다.”

『하……동생 놈이 그러더냐?』

“…….”

국왕은 침묵을 지켰다. 무슨 말을 해도 상대가 마음을 굳혔다면 바꿀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며, 말이란 하면 할수록 화를 불러오는 마물이기 때문이다.

『알만하군. 그 소심한 녀석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 피차 바쁜 몸이니, 몇 가지만 전하고 마치겠다. 하나, 난 복수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내 혈육이 남긴 후손들이다. 그러니 결코 너희들을 해하지 않겠다. 둘, 너희들의 시대에 마족들이 준동할 것이다. 이미 신탁이나 이방인의 유입으로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다시 강조한다. 마족은 분명히 다시 일어선다. 셋, 나는 300년 전부터 그걸 예상하고, 내 뒤를 이을 자들을 키울 준비를 해두었다. 곧 이름을 날리는 영웅들이 나타날 것이다. 넷, 그대 앞의 이방인 위즈도 그중 하나가 될 것이다. 능력이 닿는다면 마땅히 내 모든 것을 이을 테지만, 그렇지 못해도 마족과의 싸움에 도움을 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내 요구다. 레드 크리스털에는 내가 불어 넣은 마력이 상당량 남아 있다. 그것을 이용해서 위즈를 특정좌표로 텔레포트 시켜라. 녀석이 원하는 것은 그곳에 있다. 이상이다.』

그 말만을 남긴 witch는 사라지려고 했다. 국왕이 손을 뻗었다.

“그게 끝입니까?”

『그럼? 뭘 더 바라지? 보물지도나, 마법무기라도 안겨주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설마 크레센토가 그렇게 가난한가?』

“그, 그러니까……저주를 내린다거나…….”

『나는 했던 말 다시 하는 거 싫어한다. 볼일은 끝났다.』

그 말을 끝으로 witch의 모습은 사라져버렸다. 국왕을 비롯하여 왕자들은 허탈해 했고, 기사들과 궁정마법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위즈는 홀을 국왕에게 내밀었다.

“당연한 것을 고민하는 것만큼 우둔한 일도 없습니다.”

“자네는 알고 있단 말인가?”

“알고말고요.”

“그럼 묻겠네. 어째서 저분은 복수를 하지 않으시는가?”

“당연한 일 아닌가요? 저분은 동생을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 복수는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생뚱맞은 일이죠.”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선조는 저분께 결코 해서는 안 될 짓을 하였어. 그런데도 저분은…….”

“크레센토를 건국한 초대국왕-유린이란 분은……검의 달인이었지요. 그런 사람에게 찔리고도 살아남았다면, 그것도 무방비상태에서 찔렸는데도 살아남았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그건 죽일 의도가 없었던 거예요. 가족이니까 칼끝이 무뎌졌을 거라고요. 그걸 잘나신 witch님이 몰랐을 리 없어요. 거기에 하나 더. 마족 볼가가 쳐들어 왔을 때, 위기에 빠진 크레센토를 구해내기도 했잖아요. 악감정이 있는데도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어요.”

“그건 대의를 위해서라고 알고 있네. 당시 크레센토에는 마족과 싸우기 위해 각국의 병력들이 집결된 상황이었지. 그들마저 당하면 인간에겐 희망이 없었어.”

“당시 국왕인 유린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 것 같군요.”

“무슨 말인가? 이방인 위즈?”

“제가 알아보았는데, 크레센토 왕족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자들은 ‘유린’이라는 미들 네임을 부여받더군요. 어째서 선왕의 이름을 미들네임으로 잇게 된 것일까. 그것도 왕위계승권과는 아무 상관없이? 분명 이것 역시 유훈으로 전해지는 것이었겠지요. 그렇지 않은가요?”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대로일세. 유훈 때문이지. 그것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뒤늦게 누나의 마음을 알고 잘못을 깨달은 동생이, 누나에게 보내는 속죄의 표현이었을 겁니다. 마법사들은 오래 산다지요? 그래서 언젠가는 누나가 찾아올 것이라 생각해 일기장을 비롯해 유훈을 남겼을 겁니다.”

“그대의 말은, 선조님도…그분도……이미 마음속으로 정리한 일이었다는 것인가?”

“네. 그분에게 있어 유린님은 하나뿐인 동생이잖아요. 가족끼리는 미안하고 그런 거 없는 거예요.”

위즈의 말은 근거도 없는 억측에 불과했지만, 시각을 달리하여 다시 살피니 일견 옳아 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witch는 미노클 왕가의 구성원 그 누구도 벌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선대의 원한은 끝난 것인가.”

국왕은 맥이 풀려 주저앉았다. 위즈는 국왕의 몸을 부축했다. 호위기사들과 왕궁마법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둥둥.


<‘히든 퀘스트/ 이름 모를 여인의 부탁’의 트루 엔딩을 찾아내었습니다.>


§§§§§§§§§§§§§§§§§§§§§§§§§§§§§§§§§§§§§§§§§§§§§§§§§

[히든 퀘스트/ 이름 모를 여인의 부탁][완료]

획득한 보상 : ‘마음속 성전(聖殿)’을 얻는 방법.

§§§§§§§§§§§§§§§§§§§§§§§§§§§§§§§§§§§§§§§§§§§§§§§§§


“무사하셔서 다행……키힝.”

“괜찮다. 난 괜찮아.”

“아바마마.”

3왕자가 국왕의 품으로 달려 들어갔다. 국왕은 아무 말 없이 어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비의 품속에서 아이는 온몸을 떨며 울었다.

‘가장 불안했던 사람은 역시 3왕자였겠지.’

죽음을 각오한 아비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아이의 심정이 위즈에게 전해져왔다.

다행히도 아이 앞에서 아비가 죽는 참극은 일어나지 않았고, 미노클 왕가는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잘됐어. 참 잘됐어.’

위즈는 기지개를 켰다.


작가의말

1.

에...어중간한 데서 짤라 죄송합니다.

저는 원래 덩어리가 되는 이야기를 미리 준비해두고,

그것에 이르는 과정을 접착제처럼 사용하여 이야기를 천천히 진행시킵니다.

항상 접착제 부분이 문제네요. 잘 안써지는 부분인 거죠.

어서 빨리 생각해둔 큰 덩어리까지 가야 하는데......


2.

여기에 한가지 더. 오늘 김장합니다.

오늘 내일 사이로 더 보충하겠습니다.

4천자는 역시 너무 적지요?


++++

일요일이라 조금 힘을 써보았습니다.

1.2만자. 

제목에 은 뗍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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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1) +4 13.11.23 1,521 20 19쪽
30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ED) +1 13.11.22 1,147 22 15쪽
29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8) +1 13.11.19 1,217 24 34쪽
28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7) +1 13.11.16 1,514 29 24쪽
27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6) 13.11.15 1,556 28 23쪽
26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5) +1 13.11.13 1,751 28 21쪽
25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4) +1 13.11.12 1,143 25 14쪽
24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3) 13.11.11 1,134 31 21쪽
23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2) +2 13.11.08 1,562 39 18쪽
22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1) +1 13.11.07 2,192 36 23쪽
21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0) 13.11.06 1,138 36 18쪽
20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9) +1 13.11.05 1,531 31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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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7) 13.11.01 1,203 32 23쪽
17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6) 13.10.29 1,151 31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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