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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또 다른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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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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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14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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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1. (8)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12.

2세대 단말기들이 처리한 결과물들은 고스란히 시뮬레이션에 반영되었다. 다양한 변수들이 개입되며 데이터의 값이 변했다.

그럴 수록 백분율로 표시된 [미 구현] 데이터가 천천히 줄어들고 있었다.

“이것 봐라?”

화면가득 흘러넘치는 데이터의 홍수를 바라보던 남자가 눈을 빛냈다. 남자는 차가운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약국에서 파는 파란색의 흔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거기에 검은색 야구모자까지 쓰고 있어 드러난 건 두 눈뿐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앉아있는 곳에서 고개를 들면 차갑게 식어가는 시체까지 널려있다. 여러모로 의심받기 딱 좋은 모습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에게 참견할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그는 벽에 기대어 편하게 앉아 있었다.

“굉장하군. 이런 식으로 해결할 줄이야.

남자는 꼬리를 무는 데이터를 보며 감탄했다. 그는 단말기에 5개의 창을 띄워놓고 있었는데, 내용은 다르지만 엇비슷한 형식의 데이터가 끊임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미리 입력된 내용을 출력하는 거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그게 아님을 안다.

이건 출력된 정보가 아니다. 입력 정보다.

원래 사람은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하도록 되어있다.

욕심을 내어 여러 가지 일을 병행하면, 그만큼 손실을 입는다. 스트레스 때문에 일의 능률이 떨어지며 실수도 잦아진다. 결국 시간 내에 끝내지 못하고, 결국 모든 일을 포기하게 될 수도 있다.

귀로는 뉴스를 들으면서, 프로그램을 짤 수 있겠는가.

단순히 음악을 듣는 거라면 몰라도, 정보가 포함된 뉴스를 들으면서 꼼꼼함이 필요한 작업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머리를 쓰는 작업을 하면서, 또 머리를 쓰는 작업을 병행할 수 없는 법이다.

하물며 동시에 다수의 프로그램을 짜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러나 지금 그러한 상식이 깨지고 있었다.

“패턴을 보면 같은 사람의 솜씨. 남은 건 한사람뿐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직접 보니 당황스럽군.”

누가 봐도 그럴 것이다. 아무리 손이 빨라도 데이터의 입력속도에는 한계가 있다.

지금 화면에 떠오르는 데이터는 초당 수십 줄의 속도로 휙휙 지나간다. 5개의 창 모두 말이다. 그러니까 초당 500줄의 데이터가 새로 입력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사람의 솜씨가 아니다.

“내 손이 10개라 해도 불가능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남자는 손을 쥐었다 폈다. 애초에 그가 맡은 일은, 파이오니어 빌딩의 보안 시스템 해킹. 그의 입장에서는 정말 시시한 일이었다.

그래서 지하에 있다는 별개의 연구시설도 조금 건드려주었다. 접속 중인 10명의 호스트를 로그아웃시킨 건 확실히 재미있었다. 무슨 드림워커니 뭐니 했지만, 이름값도 못하는 얼간이들이었다.

이제 임무는 모두 완수했다. 자리를 피하는 게 나았다. 불청객은 잔치가 끝나기 전에 빠져나가야 하는 법이니까.

그가 도맡은 일은 해킹에 불과 했지만, 그 결과 사람이 죽었다. 당장 지척에 널린 시체만 십여 명이니, 아마 다른 곳에서는 더 많이 죽었을 것이다. 사실상 그는 테러의 한 축을 담당한 것이다. 더군다나 구원절에 저지른 일이다. 들키면 결코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당연히 그의 이성은 자꾸만 자리를 피하라 하고 있다. 하지만 그놈의 호기심이 뭔지 엉덩이는 무겁기만 하다.

“대체 이게 인간인가?”

의뢰받은 일을 모두 마치고 장난삼아 흔적을 남길 생각에 비상회선을 넘겨보지 않았다면, 이 기막힌 일을 해내는 자에 대해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주저 없이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고, 그의 호기심에는 불이 붙었다.

“살짝 찔러보자.”

상대의 정체가 너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로그아웃시킨 드림워커보다 더 싸우는 재미가 있을지 모른다. 설사 진다고 해도 꼭 도전해보고 싶은 상대다.

남자는 단말기의 패널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뜻대로 조작하진 못했다. 뒤에서 뻗어온 누군가의 손이 제지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하얗고 투명한 피부의 손은, 생각보다 억세서 붙잡힌 손목이 저려왔다.

“여기까지.”

허스키한 목소리가 달콤하게 귓가를 적셨다. 남자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주변에 동작감지기와 적외선 센서를 깔아두었었다. 그런데 누군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경보가 울리지 않았다. 머리가 쭈뼛 섰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무릎에 올려둔 스턴 건을 찾아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기도 전에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온몸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수천 개의 바늘로 쑤셔대는 것 같았다.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천식환자처럼 허겁지겁 숨을 들이켰지만, 들어오는 공기의 양은 평소의 반의반도 안 된다.

“이게 더 자연스럽겠죠? 여긴 신경가스가 퍼졌던 자리니까.”

붙잡힌 손이 자유를 찾았다. 하지만 그는 상대를 공격하지도, 도망치지도 않았다. 아니 못했다. 삽시간에 앞이 깜깜해지며 몸이 균형을 잃었고, 귀도 들리지 않았다. 온몸의 감각이 마비되어갔다. 그는 자신이 바닥을 긁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과도하게 힘을 준 손가락에서 툭 소리가 나며 손톱이 들려졌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치달아 올랐다. 당장이라도 손을 움켜쥐고 진정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바닥을 긁는 손에는 힘이 들어간다. 결국 손톱이 완전히 들려져 덜렁거리는 상태가 되었다. 그가 허우적거릴 때마다 섬뜩한 붓 터치가 바닥에 남겨졌다. 주변은 추상화를 그린 캔버스처럼 변해갔다.

그 흔적은 그의 몸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눈에서, 코에서, 귀에서, 입에서.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가 샌다. 그가 뒹구는 곳은 금세 피 웅덩이로 변했다. 그러고도 남자는 계속 꿈틀거린다. 한 가닥이라도 신경이 살아 있는 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생생한 고통은 심장이 멎는 순간까지 계속 남자를 괴롭힐 것이다.

하얀 손의 주인은 남자의 단말기를 챙겨들었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이는 법. 당신은 너무 지나쳤어.”


◇◇◇◇◇◈◇◇◇◇◇◇◈◇◇◇◇◇◇◈◇◇◇◇◇


“으윽!”

편재는 몸을 뒤틀며 신음을 흘렸다. 온몸이 갈가리 찢겨져 나간 것처럼 아프다. 눈을 뜬 편재의 시선에 두루뭉술한 실루엣이 잡혔다. 사람이었다.

누굴까. 흐릿해서 알아보긴 힘들다. 그냥 사람이 있다고 알아볼 정도였다. 편재는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어째서 이렇게나 고통스러운지.

여긴 아직 셸터인지. 테러범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이런 질문이 튀어나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눈앞의 사람은 탈속적인 존재로 보였다. 딱히 종교를 믿지 않는 편재이지만 그렇게 믿었다.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머무른 휘황찬란한 빛 때문이다.

그건 마치 종교관련 그림들에서 표현된 휘광-아우라 같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성인(聖人)이나 천사 같은 존재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편재는 질문의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이 얼마나 시대착오적 생각인가.

지금은 과학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다. 어찌하여 현실의 문제에 대한 답을 허구 속의 존재에게서 얻으려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지금도 계속되는 이 고통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편재는 외부로부터의 자극으로 인한 통각에 둔감해졌다. 생물체가 감각을 느끼는 최소한의 자극인 역치(閾値)가 지나치게 높기 때문이라고 의사들은 말했다. 한마디로 남들처럼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접시에 베인 것만 봐도 그렇다. 만약 접시가 깨지며 소리가 나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편재는 역치를 뛰어넘는 고통을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다. 단, 상상은 해보았다.

고통을 느끼게 된다면, 죽음에 이를 정도의 중상을 입을 때뿐일 것이라고.

그리고 지금 편재는 고통을 느끼고 있다. 온몸으로.

그렇다면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는 게 아닐까. 그런 자신의 눈앞에 뭔가 신비로운 존재가 나타났으니 심증은 확신으로 바뀐다. 어째서 이런 꼴이 됐는지도 궁금하고, 빌딩의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 역시 그러하다.

시력은 쉬이 회복되지 않았지만, 의식은 점차 또렷해졌다.

“여긴 사후세계입니까?”

상대가 웃는 것 같았다. 하얗게 드러난 치아가 가지런하다.

대답대신 편재의 이마에 물수건이 올려졌다. 그 차가움에 몸서리치며 편재는 깨달았다. 이건 현실이다.

드륵. 의자가 밀쳐지며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사람을 불러올게요.”

인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편재는 한숨을 쉬었다.

“간호사였구나.”

편재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리 아팠어도 그렇지, 대뜸 깨어나서는 사후세계냐고 묻다니. 간호사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편재는 미지근해진 물수건을 뒤집으며 중얼거렸다.

분명 ‘미 구현’된 데이터들을 unlock시켜서 적용시키는 작업 중이었다. 완성률은 대략 60% 정도. 이대로 가다간 완성률 70%를 넘기는 것도 힘들다고 네메시스는 경고했었다. 레드오션의 세계관이 의외로 구멍이 많아서 생긴 일이었다. 그래서 편재는 암릿에 저장되어 있는 데이터를 가져다 쓰기로 하고 7세대 단말기를 기동했다.

마침 최근에 끝낸 작업물이-신화나, 음식, 주거문화를 비롯한-인문사회학 계열의 자료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편재는 압축된 데이터를 풀어서…….

“그 다음은 기억이 없어.”

편재는 신음을 흘렸다. 이렇게 밖에 나와 있는 걸로 보아, 강제로그아웃 당한 게 틀림없다.

“1시간을 헛되이 날려버렸구나.”

편재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때 강박사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하얀 가운 곳곳에 시커먼 기름이 튀어있는 것으로 보아, 한참 기계를 만지작거리다 온 것 같았다. 그는 편재에게는 눈길조차 안주고 탁자위의 차트부터 확인했다. 디스플레이에 떠오른 정보를 확인하던 강박사가 눈을 치떴다.

“허?”

뭐가 문제인지 강박사는 차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쪽 일에 문외한인 편재가 보기에는 같은 내용을 보고 또 보는 것 같았다. 그게 자신과 관련된 일이라는 예감에 편재는 괜히 신경이 쓰였다.

“강박사님. 잘못된 거라도 있습니까?”

“…….”

“박사님?”

편재가 재차 부르자 강박사는 입을 열어 말하려다 차트를 보여주었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낫겠지.”

강박사가 그래프를 손으로 짚었다.

AM 11:45 - ‘편재’님의 멘탈 그래프.

편재도 기억났다. 이건 셸터 접속 전에, 이것저것 측정한 기록이었다.

“셸터 기동전의 것이네. 그리고 이건 밖에 나온 뒤의 것이고.”

편재는 두 개의 그래프를 나란히 놓고 보았다. 높낮이가 일정했다.

겉보기에 차이는 없었다.

처음의 것은 셸터에 접속하기 전에 검사한 내용이었다. 이상이 발견되지 않아서 OK사인이 떨어졌던 걸로 기억한다.

“이 두 그래프가 닮은 게 그렇게 이상한 일입니까?”

“모든 게 일정대로 되었다면 지극히 정상이었겠지.”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셸터에 있었는데, 갑자기 깨어나 보니 밖에 나와 있고. 몸은 이렇게 아프고.”

“아프다고?”

“외상은 없지만 아픕니다. 누가 제 몸을 걸레짝처럼 찢어발긴 느낌이에요. 강제로그아웃 된 겁니까?”

강박사는 안경을 치켜 올렸다.

“강제로그아웃 되었다고 그런 고통을 느끼진 않네. 자네는 일시적 정전으로 인해 셸터에서 튕겨져 나온 거네.”

“강제적이란 점에서 결국 같은 것 아닙니까?”

“아니. 다르네. 강제로그아웃은 정해진 프로세스를 거쳐 순차적으로 인간의 정신을 방출 시키지. 하지만 자네는 그런 과정 없이 그냥 나와 버렸어. 몸이 찢긴 것 같은 고통은 그것에서 연유하고. 아마 자네의 멘탈에도 심각한 손상이 갔을 거네.”

“그러면 이 멘탈 그래프는 뭡니까? 셸터에 들어가기 전후가 모두 같잖아요?”

“그래서 이해가 안 되는 거네. 셸터는 브림캐스터의 이론이 적용된 기계네. 브림캐스터가 무엇으로 악명 높았나? 정신병자와 자살희망자를 만들어낸 것 아닌가. 그들의 멘탈 그래프는 정상이 아니었어. 그런데 최악의 사고를 당한 자네의 멘탈 그래프가 이렇게 깨끗할 수가 있다니?”

강박사는 차트를 넘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50여장의 차트는, 대부분 편재가 밖으로 나온 시점에서 작성된 것이었다. 담당간호사도 측정결과가 잘못되었다고 여겼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여러 번 측정할 이유가 없다. 결과는 명명백백하다.

편재는 아무런 정신적 타격도 받지 않았다.

“그만큼 셸터에 적용된 기술이 안정적이란 뜻 아닐까요? 전 멀쩡하잖아요.”

“그렇다면 좋은 일이지만……멘탈 그래프만 보고 속단하긴 이르지. 추가검사를 요청하게. 시간이 지나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 그러고 보니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네. 어째서 단말기를 사용한 건가?”

“아, 폐쇄구역의 코어유닛 공략에 필요했습니다. 저 혼자서는 시간이 너무 빠듯했거든요.”

편재는 짤막하게 답변 해주었다. 셸터와 게임의 융합에 대해서만 설명해도, 너무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강박사뿐 아니라, 아버지를 비롯한 관계자들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역시 자세한 설명은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허…그 단말기 때문에 셸터로 공급되던 전력이 부족해져 이 사단이 난거네.”

“셸터는 지금 멈춘 겁니까?”

“다시 재가동 시켰네. 강제로그아웃 당한 사람들도 꺼내야 하니까.”

그 말을 들은 편재가 반색했다.

“그럼 저는 다시…….”

“안 되네.”

강박사는 가차 없이 고개를 저어버렸다.

“자네는 겉보기만 멀쩡할 뿐이라고 생각하네. 조금 전 자네가 그랬지? 온몸이 찢겨지는 고통을 느꼈다고. 자네 몸에 이상이 없다고 확인될 때까지는 막아야겠네. 무엇보다 지금 테러범들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있어 문제네. 셸터에는 누구도 접속할 수 없네.”

테러범을 잡고, 안전이 확보된 뒤에 해도 늦지 않다며 강박사가 만류했다. 하지만 편재는 말도 못하고 속이 탔다. 24시간 내에 네메시스의 작업을 완료해야 하는데,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있어야 하다니.

‘지금이라도 사정을 설명하고 들여보내 달라고 할까?’

하지만 그러고도 강박사를 설득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녀를 찾기 위한 절박함은 편재만의 문제다. 폐쇄구역을 열기위해 게임을 코어유닛과 연결시킨다는 발상도 쉽게 이해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프로젝트 네메시스라는 미심쩍은 시스템의 존재가 알려져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알게 되는 순간, 편재는 빌딩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셸터 구경도 못해보겠지.

‘사실을 좋게 포장해서 말해야 할 텐데. 이거 큰일이군.’

편재는 그저 강박사의 말에 수긍하는 척 고개만 끄덕였다.


◇◇◇◇◇◈◇◇◇◇◇◇◈◇◇◇◇◇◇◈◇◇◇◇◇


한 무리의 사람들이 90도로 꺾인 복도를 앞에 두고 모여 있었다. 그들은 전부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모두가 바짝 긴장해 있다. 턱밑에 흐른 땀으로 옷은 이미 젖어 축축했다.

가운데에 서 있던 리더가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조용히 앞으로 찔렀다. 그러자 바디벙커를 든 두 명이 천천히 전진해갔다. 뒤에는 펄스라이플로 무장한 사람들이 따랐다.

그때였다. 무언가가 천장에 한 번 부딪치고는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도 한 두 개가 아니다. 발밑에 뒹구는 것의 정체를 확인한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빠져나오려 했다.

곧 강렬한 섬광이 울리며 사람들이 쓰러졌다. 뒤이어 복도 끝에서 각종 화기로 무장한 자들이 튀어나와 쓰러진 자들에게 총부리를 겨눴다.

“미친 분리주의자 놈들! 오늘이 구원절인 걸 알면서 이러는 거냐!”

“닥쳐! 돼지새끼야!”

머리와 심장을 노리지 않은 공격은 살해당하는 자들이 끝없이 몸부림치게 만들었고, 현장은 더욱 아비규환이 되었다. 그 소리가 듣기 싫었던지 누군가 단분자 커터를 휘둘렀다. 비명소리가 잦아들었다.

“흥. 우리보다 좋은 장비로 무장했다는 놈들이 이렇게나 전투에 서툴러서야. 아예 날 잡아잡수쇼 하고 고개를 내미는 꼴이라니.”

모두들 그 말에 동감했다. 아무리 자신들이 구원절을 노리고 침입했다지만, 무장경비들이 이렇게나 약하다니. 게다가 파이오니어 컴퍼니의 빌딩들 중에서도 이곳의 경비가 가장 엉망이다. 진입할 때 건물 외벽의 다연장 미사일 포트는 작동되지 않았다. 천장이며 벽에 설치되어 있을 무인 경비시스템 역시 마찬가지다.

그랬기에 이들은 너무도 손쉬운 학살을 하고 있었다.

“파이오니어의 돼지새끼들이 드디어 나태해진 거다! 우리의 꿈이 가까워졌다!”

“자유를 향해!”

“자유를 향해!”

틱, 팅. 데구르르.

승리에 도취된 분리주의자들의 발밑으로 새까만 물체들이 통통거리며 굴러왔다. 그게 뭐냐며 허둥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생긴 건 달랐지만 조금 전 자신들도 같은 것을 사용했지 않은가.

“섬광수류탄이다!”

예외 없이 밝은 빛이 터지며 분리주의자들은 신음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그들은 한 방향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위협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의 사격이라 맞을 리 없지만, 좁은 복도라는 지형상의 이점 때문에 탄막이 형성되었다. 바디벙커 같은 걸 들고 오지 않는 이상 들이밀고 올 수 없을 것이다.

탄창하나가 비워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뒤이어 다른 사람이 그 일을 대신했다. 교대하는 간격은 3~4초에 불과했다. 이들은 이런 식으로 시력이 회복될 때까지 버틸 생각이었다. 섬광수류탄에 대한 대비책치고는 하책이지만, 공격이 들어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지금 당장은 유효했다.

서서히 시력이 돌아오자 리더는 자신들의 팀원을 살펴보았다. 다들 멀쩡해 보인다. 가까이에서 폭발했으니 화상을 힙은 사람이 있을 법도 한데 부상자가 하나도 없다니? 거기다가 시력이 회복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분 남짓. 리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이렇게 빨리 회복될 리 없는데?”

그렇다면 조금 전 굴러온 것은 섬광수류탄이 아니다. 잠깐 눈을 멀게 만들었지만 지속시간이 짧다. 무엇보다 공격이 전혀 들어오지 않은 사실이 찜찜하다.

리더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들이 걸어온 길은 어딜 가고, 단단한 벽이 자리 잡고 있다. 충분히 당혹스러운 일이지만 리더는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이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다. 아마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될 것이다.

“리더…이상한 소리가?”

유난히 귀가 큰 팀원이 손짓했다. 그는 벽에 귀를 대고 있었다. 리더는 팀원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의 감각이 경고했다. 위험하다고.

“모두 엎드려!”

리더의 말에 즉시 반응한 사람은 몇 없었다. 그 대가는 섬뜩한 파육음으로 돌아왔다. 벽에 덧대어진 철판을 꿰뚫으며 주황색 빛줄기가 복도를 휩쓸었다. 그 궤적에 걸린 자들은 예외 없이 내장을 흩뿌리며 터져나갔다.

위이이잉.

전동음이 가까워졌다. 텅. 텅. 누군가 거칠게 벽을 걷어찼다. 이미 벌집이 된 벽은 쉽게 부서졌다. 벽 너머에서 나타난 것은 개틀링을 거머쥔 남자였다.

“맙소사.”

리더는 눈을 크게 떴다. 절대 사람이 들고 사용할 무기가 아니건만, 그걸 가뿐히 들고 있는 모습이라니. 여긴 액션영화 촬영장이 아니라 현실이다. 하지만 화약연기가 흘러나오는 총신을 보고 있자니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상대는 괴물이다. 그에 걸맞게 비정상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육체미 선수처럼 양복을 찢고 튀어나올 것 같은 우락부락한 근육을 보라. 저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꾸밈이지, 실전을 위한 스펙이 아니다.

징그러울 정도로 과잉 발육된 근육남이 중화기를 들고 서 있다.

어떤 영화의 사이보그를 떠올리기에 충분한 모습이다.

리더는 자신의 얼굴에 달라붙은 내장을 걷어내며 무기를 거머쥐었다. 벽 너머에서 공격을 가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저런 무장이라면 가능하고도 남는다. 그 덕에 손도 못쓰고 동료들이 당했다.

살아남은 건 리더를 포함해 단 세 명. 다들 바닥에 누워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적은, 세 사람이 이룬 트라이앵글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그것을 확인한 리더는 공격명령을 내리려 했다. 그때 리더는 보았다. 남자의 무표정한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그것은 두려움이나 당황이 아니다.

즐거워 미칠 것 같다는 표정. 그것이 극에 달해 광기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리더는 이해했다. 상대는 강하다. 적어도 S급 용병일 것이다.

싸워도 이길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항복할 수 없다. 분명 모두 죽일 것이다.

셋 다 죽는다는 결과는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그럼에도 리더는 명령해야 했다.

“쏴!”

짧은 한마디였지만,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근육질의 학살자를 상대로 사격이 가해졌다. 개틀링이 회전하며 휘둘러졌다. 리더는 눈을 부릅떴다. 방아쇠를 당겼다고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곧 죽은 동료들을 만나러 갈 텐데, 적을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말해줘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리더가 바라던 죽음은 찾아오지 않았다. 리더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남자는 자신의 코앞에 대고 개틀링을 쏘고 있었다. 하지만 소리도 없고 화약 냄새도 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자신들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다친 곳이 한군데도 없다.

리더는 황급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의 잡동사니 사이에 작은 디스크가 있었다.

“홀로그램.”

리더는 개머리판을 들어 디스크를 깨버렸다. 개틀링도 남자의 모습도 사라져버렸다.

“으아아아!”

그제서야 자신들이 속았음을 깨달은 나머지 두 사람도 분노를 터뜨렸다.

“우릴 가지고 놀았어!?”

“리더!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겁니까?”

서로 죽고 죽이는 사이라지만, 이렇게 뒤처리를 찜찜하게 해놓고 가다니. 농락당한 기분에 두 사람은 이를 갈았다. 그건 리더역시 마찬가지였다.

“남은 무기 전부 챙겨.”

리더는 부서진 벽 너머의 공간을 들여다보았다. 적은 흔적을 너무 많이 남겼다. 탄피와 화약 냄새. 이걸 따라가면 만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 다음엔? 순식간에 몰살?

저쪽의 화력이 우세한 건 사실. 일단 들키지 않게 추적하겠지만, 동작감지기나 트랩을 남기며 갔을 것이다. 드르륵 긁어버리면 세 사람의 몸은 누더기가 되겠지.

리더는 자신이 죽인 무장경비의 곁에서 바디벙커를 주워들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흔들며 내려놓았다. 철판을 덧댄 두꺼운 벽마저 뚫는 총알이었다. 이런 걸로 막는 건 무리다. 그저 피하는 수밖에 없다.

저런 무기는 금세 탄약이 고갈되어버린다. 살짝 방아쇠만 당겨도 수십 수백발이 헛되이 날아 가버리니, 그때를 노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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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4) +2 13.11.30 1,022 23 27쪽
33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3) +2 13.11.29 1,150 30 21쪽
32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2) +3 13.11.28 1,048 25 20쪽
31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1) +4 13.11.23 1,521 20 19쪽
30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ED) +1 13.11.22 1,147 22 15쪽
29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8) +1 13.11.19 1,216 24 34쪽
28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7) +1 13.11.16 1,514 29 24쪽
27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6) 13.11.15 1,556 28 23쪽
26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5) +1 13.11.13 1,750 28 21쪽
25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4) +1 13.11.12 1,143 25 14쪽
24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3) 13.11.11 1,134 31 21쪽
23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2) +2 13.11.08 1,561 39 18쪽
22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1) +1 13.11.07 2,192 36 23쪽
21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0) 13.11.06 1,138 36 18쪽
20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9) +1 13.11.05 1,530 31 22쪽
19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8) +3 13.11.02 1,113 23 20쪽
18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7) 13.11.01 1,203 32 23쪽
17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6) 13.10.29 1,151 31 23쪽
16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5) 13.10.28 1,143 27 14쪽
15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4) 13.10.26 1,476 36 17쪽
14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3) +1 13.10.25 1,585 36 16쪽
13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2) +1 13.10.24 2,418 40 21쪽
12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 13.10.22 2,117 32 15쪽
11 1. 계절이 바뀌는 때 (ED) +1 13.10.19 2,870 138 19쪽
10 1. (9) +1 13.10.16 1,911 42 23쪽
» 1. (8) 13.10.14 1,703 29 23쪽
8 1. (7) +1 13.10.05 3,286 60 25쪽
7 1. (6) 13.10.04 2,227 42 22쪽
6 1. (5) 13.10.02 2,266 39 17쪽
5 1. (4) 13.09.29 2,358 4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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