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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또 다른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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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연재수 :
1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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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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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674,356

작성
13.10.19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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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1. 계절이 바뀌는 때 (ED)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14.

- U3[area :013]의 환기가 끝났습니다.


편승은 암릿 째로 팔뚝을 넣고 돌렸다. 3중으로 차단된 격벽이 올라가며 문제의 장소가 열렸다.

“해커가 순순히 당해줬으면 좋겠지만…그건 욕심일 겁니다.”

펄스 라이플을 겨누며 브렌이 충고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원래 머리 굴리는 자들이 자기 몸 하나는 끔찍이 챙기는 법이다.

“나도 기대는 안했네.”

“그런데도 수면가스를 살포하셨습니까?”

“가스 살포 후에는 무조건 공기 정화기가 가동되고, 트랩들이 일시적으로 unlock되지. 만약 안쪽에 터치패널이 있다면 내가 조종할 수 있네.”

“왜 진작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브렌은 편승을 구해냈을 때 상황을 떠올렸다. 그 당시 편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릴 만큼 여유 있지 않았다. 분리주의자들에게 포위되어 있는데다가, 정작 본인은 가스에 취해서 해롱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트랩을 조종할 방법이 있다면 사용했어야지, 어째서 그런 모습으로 적에게 사로잡히기 직전까지 갔을까.

“그게 통하는 곳은 몇몇 장소밖에 없네. 다른 곳은 해킹 때문에 트랩들이 아예 먹통이었고.”

“그 말씀은…여기가 그 몇 안 되는 장소라는 거군요.”

“펄스캐논 모드를 해제시킨 것도 그것 때문일세. 앞서 말했다시피, 여기는 많은 회선들이 몰려 있는 장소네. 벽을 뚫어버리는 미니건도, 기계에 영향을 미치는 고출력 에너지 무기도, 여기서는 쓰면 안 되네.”

“안티 에너지 실드는 쳐져 있겠지요?”

“글쎄……여긴 독자적인 시스템이니 괜찮겠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 조심하게. 도면은 숙지했겠지?”

“일주일은 안 잊어버릴 겁니다.”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음을 옮겼다. 브렌은 펄스라이플 한 자루로 단출하게 무장했지만, 편승은 이것저것 챙긴 게 많았다. 샷건과 단분자 커터만으로도 부족해서, 등에 바디벙커까지 지고 있다. 이건 브렌이 바득바득 우겨서 들고 온 것이다. 브렌 자신은 무쇠다리 믿고 피하면 되지만, 회장님은 그러기 힘들다며 여차하면 몸이나 가리라고 한 것이다. S급 용병의 권고이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브렌이 잔뜩 긴장한 것처럼 보였기에 편승은 두말 않고 따랐다.

“그나저나 자네 구두는 왜 그 모양인가?”

“변태를 만났습니다.”

뜻밖의 답변에 편승은 브렌을 쳐다보았다. 이런 식의 과격한 어휘를 즐겨 사용하는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자가 여기에 있단 말인가?”

브렌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않길 바랍니다.”

그 말에는 많은 의미가 묻어 있었다.

싸우기 벅찬 상대. 위험한 자. 되도록이면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만나더라도 싸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읽혀진다.

“동료였었나?”

“옛날 일입니다.”

“마음에 걸린다면, 사람을 더 부르는 게 어떤가?”

“파이오니어 컴퍼니의 무장경비이기 이전에, 저는 S등급 용병입니다. 프로페셔널은 감정에 휘둘려선 안 됩니다.”

“알겠네.”

편승은 암릿의 호출모드를 닫았다.

적어도 그가 프로임을 스스로 인지하는 한, 고용주로서 그를 신뢰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이어진 전투에서 그는 자신의 의지를 증명했다.


◇◇◇◇◇◈◇◇◇◇◇◇◈◇◇◇◇◇◇◈◇◇◇◇◇


구원절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이른 아침의 거리는 직장인과 학생들로 북적였다. 학생들은 손에 든 음료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있는 힘껏 자전거를 밟아댔다. 급하게나마 뭔가를 먹은 학생들은 그나마 나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통근해야 하는 직장인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달려야 했다. 그렇게 달려서 제때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냐면 그것도 아니다. 곳곳에 정원초과로 쫓겨난 직장인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반면 그런 어수선함 속에서 차분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바로 상점 주인들이다. 문을 열고, 쓰레기를 치우는 손은 바빴지만 여유가 묻어난다.

그리고 어떤 곳에서는 아직 세상과 섞이기엔 너무 어린 아가들이 새근새근 잠에 빠져 있다. 반면 밤새 시달린 부모들은 충혈 된 눈을 들어 아침을 준비할 것이다.

세상은 아무것도 모르고 평온하다.

뉴스는 시시껄렁한 연예인의 스캔들과, 의원들의 비리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저 켜놓기만 한 TV앞에는 아무도 앉아있지 않다. 아나운서가 오늘 무슨 옷을 입었는지 사람들은 관심도 없다.

아무도 파이오니어 빌딩이 테러 당했다는 것을 모른다.


- 당연한 일이지만 언론 통제는 계속되어야 하네.

“이렇게나 죽고 다친 사람이 많은데 말입니까?”

- 최대한 막아보게.

편승의 지시를 받은 비서실의 모두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일은 화려하게 벌려놓고 나더러 뭘 어쩌란 말이야!”

서류더미 속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우앗! 그거 무너뜨리지 마요!”

비서실 사람들은 상사의 히스테리보다, 서류들이 섞이는 게 더 두려웠다.


◇◇◇◇◇◈◇◇◇◇◇◇◈◇◇◇◇◇◇◈◇◇◇◇◇


파이오니어 빌딩 곳곳에는 아직까지도 그때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구멍 난 벽들은 최우선 복구 대상으로 지정되었지만, 아직까지도 고치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핏자국과 시체를 전부 치워놓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주일은 더 지나야 원상복구 되겠군.”

브렌은 칠리 핫도그를 입속에 쑤셔 넣고 우물거렸다. 그리고 또 새것을 꺼내 포장을 뜯으려 했다. 그러나 왠지 뜯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고개를 돌리니 청소도구와 용접기를 든 사람들이 째려보고 있다.

청소로봇만으로도 치우기가 힘들어서 비번인 무장경비들까지 투입되고 있었는데 브렌만 놀고 있는 것이다.

“이크.”

그는 자리를 피했다. 결코 눈치가 보여서가 아니다. 그저 일하다가 갑갑해서 잠깐 나온 것뿐이다. 저들이 하는 일은 그냥 몸으로 때우면 그만이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건, 머리를 쥐어짜야 한다.

사무실로 들어간 브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단말기를 켜고 작성하던 보고서를 여는 것이었다. 이번 테러로 인한 손실과 사후 처리가 주된 내용이다. 브렌은 핫도그 포장을 이로 물어뜯었다. 그러나 귀퉁이만 조금 뜯겨지고 말았다.

“에이, 신경질 나네.”

S급 용병이라 해도, 그는 무장경비다. 현장에서의 능력이 S급이지, 사무실에서 문서 작업하는 것까지 그렇진 않다. 원래 이런 일은 윗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브렌의 위로 영희 단장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 보고서 작성은 영희 단장의 몫이다.

하지만 회장은 영희가 부재중이라며 브렌의 불만을 일축했다.

문서작업을 전혀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사무실에 앉아 있으니 좀이 쑤신다. 안내데스크에 앉아 TV를 보는 것과는 다른 무료함이다. 지금이라도 다 때려치우고 싶다. 당장이라도 밖에 나가서 밀걸레로 바닥을 반짝반짝 닦고, 철판을 용접해 이어붙이고 싶다. 그게 적성이 맞다. 맘에 안 들면 그냥 뛰쳐나가면 그만이다. 세상엔 S급 용병이 노는 꼴을 못 보는 훌륭한 고객들이 많다. 그만큼 귀하신 몸이다.

“지금도 그렇긴 한데…….”

브렌은 시무룩해졌다.

사흘 전 회장에게 아쉬운 소리만 하지 않았어도 그리했을 것이다.

그때는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지껄였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더욱 황당한 건 회장이 망설임 없이 부탁을 들어준 것이다. 너무도 시원시원해서 저녁 메뉴정하는 것처럼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말해놓고 브렌이 놀라 손사레를 쳤을 정도니까.

그때 회장이 지은 미소를 잊을 수 없다. 마치 약점이라도 잡은 사채업자 같달까.

그렇게 야생마는 코 뚫린 송아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내가 미쳤지. 목을 졸릴 때 뇌세포가 죄다 망가져버린 거야. 바보. 머저리. 쪼다 같으니.”

하지만 이미 저지른 일. 그리고 시간을 돌려 그 자리에 다시 서도 결과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몇 번이고 같은 요구를 했을 것이다.

결국 아쉬운 건 브렌 쪽이다. 무리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호의를 베풀어 준 회장에게, ‘귀찮아서 보고서 안 쓸랍니다.’ 할 수 없단 말이다.

결국 핫도그나 우물거리며 숫자를 살피는 수밖에.

초안은 이미 새벽에 잡아두었다.

정해진 양식대로 숫자 때려 넣고, 데미지 리포트 원본을 첨부 했다. 거기에 이번 일에 대한 자신의 견해까지 첨부했다. 완벽하진 않을지 몰라도, 딱히 책잡힐 게 없는 구성이다. 게다가 대외비 문서이니 잘 만들고 못 만들고도 의미 없다. 그저 있는 내용에 충실하면 된다. 사실상 다 만들어진 보고서다.

그런데도 제출하지 못하고 끙끙 앓는 이유는……

“몇 번을 봐도 안 맞잖아!”

벌떡 일어선 브렌의 뒤로 의자가 거칠게 물러나 벽에 부딪쳤다. 그는 사무실을 왔다 갔다 하며 서성였다. 아침에 눈을 붙이고 일어나 다시 검토를 하던 중 발견된 문제점. 그것은 침입자의 숫자다.

제압당한 침입자들에게서 들은 숫자는 320명. 동작감지기를 비롯한 데이터와 대조한 결과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생존자는 25명. 시체는 291구.

4명이 빈다.

이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펄스캐논과 미니건에 당한 시체들 중에 섞여 있을 수도 있어서, 유전자 검사까지 해가며 사망자를 걸러냈다. 그런데도 4명의 종적은 찾을 수 없다.

행방불명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도 무인경비 로봇들이 구석구석 수색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걸 보면, 빠져나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찾지 못한 해커 때문이다.

그 당시 회장과 함께 쳐들어간 곳에는 해커가 없었다.

단말기를 비롯한 해킹장비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눈치 채고 내뺀 것이리라.

“어딘가에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면, 나머지 3명도 살아있겠지.”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를 모를 뿐이다.


◇◇◇◇◇◈◇◇◇◇◇◇◈◇◇◇◇◇◇◈◇◇◇◇◇


편승은 사흘이나 걸려 작성된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매뉴얼대로 잘 만들어져 이해하기도 쉬웠다. 다만 사망자의 숫자가 맞지 않을 뿐. 하지만 편승은 수고했다며 브렌을 내보냈다. 이건 브렌이 무능해서가 아니다.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강박사를 호출했다. 몇 분 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중늙은이가 들어왔다. 자신의 살기마저 버텨내던 당찬 사람이 사흘 만에 망가진 것을 보니 편승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안절부절못하던 브렌도 그렇고, 초췌해진 강박사도 그렇고. 이들의 모습만 보면 자신이 아랫사람을 마구 굴려대는 악덕사업주가 된 것 같다.

“무슨 일인가.”

힘없는 질문에서 알 수 있듯이, 강박사는 뇌가 제대로 기능할 상태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편승은 인스턴트 스프를 큼직한 머그컵에 담아서 건네주었다.

“일단 드시지요.”

“얼마나 부려먹으려고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마셔두지.”

덥석 받아들면서도 튕겨대는 강박사는 얼굴하나 변하지 않았다. 뻔뻔하기도 하지. 그러나 편승은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러니까 제가 무슨 노예상인이라도 된 느낌이군요.”

“제대로 아는군.”

“음…….”

“뒤치다꺼리하는 사람들 모두가 같은 생각일걸세.”

본전도 못 찾았다. 가만히 있으면 좋았을 것을. 편승은 화제를 돌렸다.

“해커가 행방불명된 건 알고 계시지요?”

“나도 귀 달려 있네. 아마 멀쩡히 살아 있겠지.”

“해커가 셸터를 통해 사라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강박사는 스프를 후룩 마시며 우물거렸다. 씹히지도 않는 완두콩을 음미하는지 눈을 감고 진지한 표정까지 짓는다. 편승은 미식가라는 자들이 보통 저런 식으로 음식을 먹는다고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컵 스프 마시면서 무슨 진수성찬이라고. 편승이 못마땅해 할 때, 입안의 것을 다 삼킨 강박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따로 불러서 이야기하는 것은, 일을 확대시키고 싶지 않다 이거로군. 맞나?”

“네. 그리고 해커에 대한 것은 함구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유는?”

“셸터의 존재를 아는 세력은 제가 아는 한, 두 곳 말고는 없습니다.”

“무슨 소린지 알아듣겠네. 그럼 이번 테러를 뒤에서 조종한 것도 그들이겠군. 어떡할 텐가?”

편승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짓씹어대듯 말을 이었다.

“불이라도 집어삼킨 것처럼 미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일단은 참으려 합니다. 반목은 우리들의 방식이 아닙니다.”

내용은 온화했지만, 편승의 눈에서는 당장이라도 벼락이 칠 것 같았다. 그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도 강박사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젊은 자네가 뜬금없이 회장에 출마했을 때 반대하지 않은 것은, 힘만 센 멍청이가 아니기 때문이었지.”

“지금은 힘만 센 멍청이이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날 불렀지.”

강박사는 텅 빈 머그컵을 만지작거렸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강박사 역시 열이 받는다. 하지만 편승이 한말은 정론이다.

반목하지 않는다.

파이오니어 컴퍼니는 한데 묶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기위한 조직이다.

얻어맞았다고 주먹을 마주 휘두르는 건, 조직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다. 더구나 상대는 어중간한 각오로 건드릴 수 없는, 거대함을 자랑한다.

“그렇다고 가만있을 순 없지. 이럴수록 어깨를 당당히 펴야 하는 법.”

“어떻게 말입니까?”

“허세를 부리는 거네.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끄떡없다고. 그것밖에 못하는 너희들은 병신들이라고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거네.”

“으음……그러니까 결국은?”

“회합을 갖는 거지. 어떤 방식이라도 좋아. 순수한 사교의 목적이라면 더 좋겠군. 의도가 건전할수록, 부정한 것은 만천하에 드러나는 법이네.”


◇◇◇◇◇◈◇◇◇◇◇◇◈◇◇◇◇◇◇◈◇◇◇◇◇


보고서를 제출한 브렌은 맥이 풀렸다. 흐느적거리며 엘리베이터에 주저앉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깟 숫자 때문에 어찌나 골몰했는지, 눈을 감아도 내용이 아른거린다.

이제는 죽은 자들을 애도할 때다.

로비에서부터 시작된 죽음은 결국 숫자만 남아, 보고서에서 한 줄의 무게로 남았다. 그렇다고 그 많은 죽음이 가볍다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이유도 모르고 휘말려 죽은 택배기사는…….

“어? 가만?”

브렌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사망자 명단에 택배기사도 들어 있었나?

“그 청년은 경비 시스템에 걸리지 않고 들어왔어. 기록에 남을 리 없지.”

그렇지만 분명히 기억한다. 한쪽 팔이 날아간 채, 가스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기까지 했으며, 결국 과다출혈로 죽었다. 맥박도 멈췄고, 몸도 차가웠다.

브렌은 청년의 죽음에 분노하여 지하에 들어가 스캐럽을 상대하기까지 했다.

“제길. 그걸 이제야 기억 해내다니.”

그길로 회장에게 돌아간 브렌은 보고서의 오류를 지적했다. 편승은 보고서의 한 귀퉁이를 가리켰다.

“가스에 당해 죽은 건 단 한사람이군.”

편승은 단말기를 조작해 시체의 모습을 투영했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 남자가 뒤틀린 채 엎어져 있다. 얼굴마저 말라비틀어진 고목처럼 일그러져 끔찍하다. 브렌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스에 당해서 죽었다고요?”

“그렇네. 뭔가 이상한 거라도 있나?”

“스캐럽에 실린 건 TR-172입니다.”

“그게 뭔데 그러나.”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일시적으로 신경을 마비시키는 제압용 가스지. 역시 회장님 아니랄까봐 화장실도 크구먼. 드러누워 자도 되겠어.”

세수한다며 자리를 비운 강박사였다. 편승은 실없는 소리가 이어지기 전에 잘라버렸다.

“그러니까 비살상용이란 겁니까?”

“그렇지. 폭도 진압할 때 쓰는 가스가 TR-172네.”

“그럼 이 청년은 어째서 죽은 겁니까. 그것보다 시체가 발견된 곳은 어딥니까?”

편승은 투영된 시체사진위에 떠오른 글씨를 읽었다.

“로비 구석.”

그 즉시 세 사람은 로비의 CCTV영상을 불러와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때 강박사가 데이터에 남은 흔적을 발견했다.

“누가 삭제한 것 같군. 내가 복원해보겠네.”

자신의 암릿으로 복구 디바이스를 구동시키던 강박사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낯익은 얼굴 아닌가?”

강박사는 복구된 파일을 재생시켰다.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단말기로 손을 뻗었다.

- 살짝 찔러보자.

그때 그 뒤에서 흐릿한 상이 맺혔다. 어찌나 빠른지 저절로 생겨난 것 같았다.

- 여기까지.

허스키한 목소리가 로비를 울렸다.


브렌은 신음을 흘렸다. 결코 모를 수 없는 목소리다.

편승이 받은 충격은 더 컸다.


- 이게 더 자연스럽겠죠? 여긴 신경가스가 퍼졌던 자리니까.

청년이 죽어가는 장면이 이어졌다. 보는 이의 심장을 죄어들게 만드는 몸부림이, 소리 없는 비명이 되어 로비를 가득 채웠다.


“아니야!”

편승의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손톱이 살 속을 파고드는 것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불쾌감이 그의 몸을 흔들었다. 말로는 부정했지만 예감은 아닌 거다.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사흘 전, 편재의 문제로 자신을 걱정해주던 차가운 목소리. 그때는 사람다운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영상에 흐르는 목소리는 너무도 차갑고 낯설다.


-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이는 법. 당신은 너무 지나쳤어.

어둠속에서 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쓸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영희! 어째서 네가!”

그는 사흘째 출근하지 않고 있다. 피곤하다면서 구원절 저녁 모습을 비춘 뒤로 연락이 끊겼다. 그렇지만 휴가를 주는 셈치고 그냥 놔두었다.

“파일을 삭제한 사람은 누굽니까?”

“영희, 본인이네.”

“후……후후후.”

“자네 괜찮은가?”

“혼자 있고 싶습니다.”

착 가라앉은 편승의 목소리가 무겁게 내리깔렸다. 브렌과 강박사는 두말 않고 밖으로 나갔다. 편승은 동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편승은 가슴을 쥐어뜯었다.

한 번도 영희를 남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사실상 영희는 자신의 아들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법적으로도 떳떳한 부자관계가 된다.

한 달 뒤 영희의 생일이 돌아오면, 편家에 입적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미 모두의 동의까지 얻어놓은 상태였다. 그랬는데…….

“진짜로구나.”

영희 스스로 떳떳하다면 왜 영상을 삭제했겠는가. 그리고 왜 사흘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는 것일까. 구원절 오후, 침입자를 상대하겠다며 나간 영희가 싸우는 모습을 본 사람이 없었다.

강박사는 셸터에 뿌려진 스파이 봇을 발견해냈다.

이 모든 게 연결되자 모든 게 분명해진다.

“어떻게 네가……나한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편승은 울부짖었다.


배신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 1. 계절이 바뀌는 때 [끝] >>


작가의말

다음 화부터는 편재가 본격적으로 ‘더 오션’에 뛰어듭니다.

완전히 갈아 엎다시피 하며 쓸 것이지만, 예전에 쓴 것을 조금 고쳐쓸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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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ED) +1 13.11.22 1,147 22 15쪽
29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8) +1 13.11.19 1,216 24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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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6) 13.11.15 1,556 28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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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 (7) +1 13.10.05 3,286 60 25쪽
7 1. (6) 13.10.04 2,227 42 22쪽
6 1. (5) 13.10.02 2,266 39 17쪽
5 1. (4) 13.09.29 2,359 4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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