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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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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연재수 :
1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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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2.26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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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16)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16.

대련 모드 중에서도 룬 슬레이어는 직업과 스킬의 이점을 무위로 돌려버리는 극악한 난이도를 자랑했다.

룬 카드라는 존재 때문이다.

“접속하자마자 가지고 있는 스킬에 맞게 룬 카드가 주어질 거예요. 스킬을 사용할 때는 반드시 룬 카드를 조합해야만 하죠. 그러지 않으면 스킬이 발동되지 않아요. 아, 그리고 한번 사용한 룬 카드는 소멸해요.”

사쿠라의 설명을 듣고도 위즈는 이해하지 못했다. 어째서 난이도가 높다는 건지.

‘한번 사용한 카드가 소멸하면, 같은 스킬을 반복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인가?’

하지만 룬 카드가 손에 들어오자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스킬 하나에 소모되는 룬 카드들은 보통 서너 장.

그런데 위즈의 ‘정령강화’와 ‘별 하늘 아래 어둠가시 밭’ 모두 카드 A, B가 사용된다. 물론 같은 카드가 두 장이나 주어질 리 없다. 만약 ‘정령강화’를 사용하면, ‘별 하늘 아래 어둠가시 밭’을 포기해야 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어느 하나를 사용해버리면, 다른 스킬은 봉인당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기회비용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다른 스킬도 마찬가지다. ‘진각’은 ‘정령강화’와 한 장이 겹친다.

“거기에 또 하나. 필요 없는 카드를 모아서 ‘룬 슬레이어’라는 스킬을 사용할 수 있어요. 이건 상대가 가진 카드를 많게는 5장까지 파괴할 수 있죠.”

위즈는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스킬 사용이 제한되는데, 거기에 더해 상대를 물 먹이는 것까지 가능하다니. 이래서야 스킬을 많이 배워도 소용없군. 고르고 골라서 최소한으로 스킬을 사용해야 해. 이거 이미지 트레이닝대로 풀려나가지 않으면, 스킬이 남아돌아도 질수 있겠는 걸? 어째서 사쿠라는 이런 방식을 선택한 거지?’

사쿠라는 마법사. 위즈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주문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혼자서도 공격과 방어는 물론, 자잘한 보조주문까지 써가며 만능에 가까운 전투를 수행할 수 있다. 위즈는 사쿠라가 그런 장점을 포기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


이번에 선택한 필드는 삼림지대였다. 숲을 이루는 나무들은 굽은 곳 하나 없이 길게 쭉 뻗은 삼나무가 대부분이다. 콜로니 최상층에 위치한 식물원의 삼나무 숲도 여기만큼 울창하진 않다.

“가슴까지 상쾌해지는 곳이군.”

위즈는 허리어름에 못 미치는 작은 덤불과 잡목들을 피해 걸음을 옮겼다.

원래 자연은 한 가지 수종만으로 숲을 구성하진 않는다.

삼나무의 잔가지는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으며, 그 밖의 나무들은 낮은 곳에 가지를 퍼뜨리고 있다. 그래서 시야 확보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곧 안개가 밀려들자 가시거리가 6m정도로 제한되어버렸다. 농도마저 짙은 탓에 안개는 물처럼 무겁고 끈적거렸다.

‘그래도 멈추면 안 된다.’

위즈는 조심스레 걸음을 내디뎠다. 상대는 마법사.

앞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탐지주문으로 이쪽을 찾아내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

아니 위저드 마크라도 찍어 두었다면, 즉시 공격도 가능하다. 한 장소에 머물러 있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다.

위즈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재빠르게 이동했다. 엄폐물을 벗어날 때가 가장 위험한 법이지만, 공격은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위즈가 가진 카드 세장이 박살났다. 시작부터 난관이다.

‘룬 슬레이어를 사용했군. 하지만 필요한 카드들은 모두 살아남았어.’

그렇지만 딱히 상황이 나아진 것도 아니다. 위즈가 가진 스킬들은 대부분이 패시브 스킬이거나, 전투에는 사용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진각이나 정령강화 정도나 사용할 수 있고. 별 하늘 아래 어둠가시 밭은 마력을 몽땅 빨아가니 함부로 쓸 수 없다. 나머지는 필사나 지도 제작 같은 건데, 이건 싸움이랑 상관없으니……큭!’

위즈는 이마를 매만졌다.

천천히 흐르던 안개가, 어느 샌가 완전히 정체되어 있었다.

‘안개의 흐름에 집중하면 삼나무를 돌아 나오는 기류를 감지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래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다.’

위즈는 손을 내밀어 휘휘 저었다. 손에 나무가 걸리면 살짝 옆으로 피해 움직이기 위해서다.

그때였다. 사쿠라의 목소리가 울린 것은.

“플레임 캐논!”

위즈는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뛰었다. 숲속이라 목소리가 울려 방향이 왜곡되고 있었지만, 충분히 긴장하고 있었기에 위즈는 헤매지 않았다. 안개너머에서 번쩍이는 빛이 일었다.

그 빛을 본 위즈는 제대로 찾아왔다고 여겼다.

허나 엉뚱한데 한눈을 판 위즈는, 발밑에 튀어나온 나무뿌리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거리가 멀지 않…….’

위즈는 나무뿌리를 밟고 균형을 잃었다. 그런 위즈의 머리를 스치며 큼직한 불덩어리가 지나갔다.

쾅!

숲속의 안개가 떨리며 근처의 사물들이 오렌지색으로 물들었다.

무심결에 뒤를 돌아본 위즈는, 불붙은 나무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것을 보고 납작 엎드렸다.

축축한 안개속이지만, 여기저기 튄 불씨 때문에 삼나무들이 불길에 휩싸였다. 위즈가 몸을 피한 나무도 불이 붙었다. 멀쩡히 서 있었다면, 위즈도 같을 꼴이 되었을 것이다.

고개를 내밀어 뒤쪽의 상황을 살핀 위즈는, 처참하게 망가진 숲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굉장한 위력이다…….”

그저 불이나 붙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폭발이 일어난 현장은 나무들이 압력을 이기지 못해 뒤로 쓰러져 있었다. 간간히 멀쩡히 뿌리가 박힌 것들은 모조리 부러질 정도의 폭발.

당연히 나무들은 고열에 타버려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이것이 캐논급 발사체 주문의 위력!’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사쿠라가 쓸 다음 주문이, 지금 사용한 것보다 약하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저런 게 또 날아들면 그걸로 끝이다.’

마법사가 무서운 이유는, 공간을 장악하는 능력과 의외성 때문이다.

주문 하나만 제대로 사용하면 이기던 쪽도 패배하게 만드는 힘!

이 힘은 마법사를 귀족으로 대우받게 만들어주었다.

특히 위즈가 사쿠라와 대련을 하면서 걱정했던 게, 원거리에서 강력한 주문을 쏘아붙이는 것이었다.

이렇게 당하고보니 역시 방법은 하나뿐이다.

거리를 더욱 좁히는 것.

강력한 주문일수록 캐스팅 시간이 길어진다. 그동안 마법사는 방어에 취약하다.

‘설사 한 번에 해치우지 못한다 해도 좋아. 내가 나타나 방해하면, 캐스팅이 실패하도록 만들 수도 있어.’

매캐한 연기가 안개와 섞이며 시야는 더욱 좁아졌다. 주문에 맞은 삼나무들이 부서지면서 퍼뜨린 불씨가, 숲 곳곳에 불길을 지피고 있었다. 지금은 지나온 쪽에서부터 천천히 퍼지는 중이었지만, 곧 거대한 산불이 되어 뒤를 쫒을 수도 있다.

‘어찌됐든 최대한 가까이 붙인다.’

그런 위즈의 의도를 모를 사쿠라가 아니다. 곧바로 다음 주문이 날아들었다.

“매직 캐논!”

이번엔 안개 속에서 노란 빛이 일직선으로 뻗어 나왔다. 발사체라기보다는 레이저 빔에 가까운 공격이었다. 위즈는 이미 바닥에 엎드린 상태였다. 이번엔 폭발음 같은 게 울리진 않았다.

‘이상하다? 지금 주문도 캐논이니까, 그저 그런 위력은 아닐 텐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위즈는 바람이 거세지자 의문을 접었다. 안개가 밀려나고 있었다. 마치 태풍이 불어 닥치는 것처럼 엄청난 풍속이었다.

위즈는 날려가지 않도록 바닥에 드러난 나무뿌리를 단단히 붙들었다. 그랬음에도 당장이라도 날려갈 것처럼 몸이 들썩거렸다.

잠시 후 바람이 그쳤다.

하지만 위즈는 끝났다고 안심하지 못했다.

누가 화염방사기를 들고 쏘아대는 것 마냥, 거대한 화염이 뒤에서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위즈는 이게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파이어 스톰이다!’

화재가 발생한 산속에서, 상승기류가 발생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풀무질을 해준 것과 같은 효과를 내어 불길이 거세지는 효과를 낸다. 그리고 숲속에는 불에 탈것들이 아주 많다.

사쿠라는 플레임 캐논으로 미리 불을 질러놓고, 매직 캐논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강한 바람을 만들어냈다.

주문에 밀려난 공기가 빈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을 채우기 위해 다른 지역의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그것이 조금 전 발생한 거센 강풍의 정체였다.

이렇게 생긴 바람은 혼자서 오지 않았다. 뒤편의 화재현장에서 불길을 가득 이끌고 와 풀어놓았다. 이미 곳곳이 불바다였다.

‘하……역시 학자군 계열 직업의 꽃이라 불릴만하군. 캐논급의 주문을 연계해 이런 효과를 내다니.’

위즈는 사쿠라와의 대련에 크게 욕심내진 않았다. ‘마력을 보는 눈’이란 스킬을 얻지 못해, 카피캣으로 마법을 훔쳐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얻을 건 고작 마법사와의 전투 경험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정말 어마어마하지 않은가?’

위즈는 모자손을 내려다보았다. 평소대로 모자손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은 게 흔들리려 하고 있었다.

‘저들은 바하르칼 용병이다. 언젠가는 적이 되어 만날 수도 있어. 모자손이라는 아이템으로 마법사가 아닌 유저가 주문을 쓸 수 있다는 건 숨기는 게 좋아. 이건 어디에도 없는 정보니까.’

에켈산에서야 마법사 행세를 했으니, 모자손에 대한 정보를 숨길 수 있었다. 허나 지금처럼 애매하게 전사인 척을 하고 있으면서 마법을 사용하면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

‘이건 작은 승리다. 여기에 목을 매면 안 돼.’

애써 마음을 다독이며 위즈는 다짐했다. 꼭 마력을 보는 눈을 얻어서, 제대로 마법을 배우고 말겠다고.

“거기 계속 계시면 감사! 매직 스피어! 플레임 스피어!”

사쿠라의 주문이 연달아 위즈를 노렸다. 위즈는 몸을 굴리며 주문을 피해내고, 포복에 가까운 동작으로 달려 나갔다. 위즈는 단검을 꺼내어 입에 물었다.

‘계속 당하다보니 살짝 약 오르네. 못해도 한방은 먹여야지 안 되겠어.’

위즈는 주눅 들지 않았다.


◇◇◇◇◇◈◇◇◇◇◇◇◈◇◇◇◇◇◇◈◇◇◇◇◇


사쿠라는 손에 쥔 카드를 이리저리 골라 맞추며 히죽거렸다.

어차피 마법이란 수인을 맺고, 마법 시약을 사용해야 하는 것.

아니, 마법시약은 생략할 수 있어도, 수인은 아니다.

그런 번거로운 과정이 카드 몇 장을 손에 모으는 걸로 끝나니 편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다른 주문과 중복되는 카드가 있다 해도, 그녀가 가진 스킬이 압도적으로 많다. 잘만 피해가면 앞으로도 5방은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

“그전에 여기까지 온다면 성대하게 환영해줘야겠지.”

사쿠라는 첫 번째 주문으로 미스티 가든을 사용했다. 광역마법이면서 한번 뿌려두면 1시간동안 머물러 있는 안개는 삽시간에 숲을 뒤덮어버렸다.

이는 마법사인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와 동시에 W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에제키엘에는 못 미쳐도, 그녀 정도면 뛰어난 마법사에 속한다. 자신이 안개 속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읽고 대응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마법을 연계해 산불을 일으킨 것도 꿍꿍이가 있었다.

불을 사용하면서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간은 불을 이용해 많은 것을 이루어왔다. 불은 인간에게 친숙한 도구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불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을 때 벌어지는 재앙.

그중에서도 가장 원초적인 공포는 산불이다.

“꾸물거리면 산불을 더 넓게 퍼뜨려버릴 테니까.”

이미 파이어 스톰을 인위적으로 일으켜 뜨거운 맛을 보여준 참이다.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달려올 수밖에 없으리라.

이동 중인 건 사쿠라 역시 마찬가지다. 어찌되었거나 대련중이다. 숨어서 주문 몇 방 날리는 정도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사쿠라는 물러 터지지 않았다.

위력이 강한 주문으로 무력시위도 충분히 했고, 뒤편엔 불까지 질러두었으니 W는 도망가지 못한다. 이제까지 그녀가 한일은 그 정도 의미밖에 없다.

이제 결정타를 먹여야 한다.

‘이동 중에 맞닥뜨려 교전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긴 한데…….’

사람들은 마법사와 전사가 싸울 때 거리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마법사가 충분히 거리를 벌리면 마법사가 이길 확률이 높고, 전사가 충분히 거리를 좁히면 전사가 이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절반만 맞는 소리다.

단순 직업 상성만 따지면 분명 그럴 것이다.

마법사는 방어력이 취약하다. 거기에다 수인을 맺고, 시약을 준비하고, 캐스팅을 하는 과정은 방해받기 쉽다. 그래서 마법사들은 입문할 때 방어주문부터 배운다.

바로 배리어다.

이 주문은 마법방어력과 지능 스탯에 따라 방어 효율이 높아진다. 그리고 다른 주문과 달리, 스킬Lv.10이 되면 시동어만 외쳐도 활성화된다.

물론 지금은 카드를 조합해 사용할 수밖에 없어, 미리 카드를 뽑아둔 상태다.

‘배리어가 있으면 설사 기습을 받는다 해도, 주문을 사용할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어.’

그리고 공격이 실패한 상대는, 죽여 달라고 모습을 드러낸 짓을 한 거나 마찬가지.

가까이에서 사용한 주문은 게임 시스템 상, 카운터 어택 판정을 내릴 것이다. 단순한 매직 애로우라도 치명타가 터지는 것이다.

마법사는 거리가 멀어도 무섭지만, 가까우면 더 무섭다.

사쿠라는 걸음을 멈췄다. 안개 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무수히 나타났다. 하지만 탐지되는 대상은 하나뿐이다.

“일루전 스크롤인가?”

던전에서 맹독 스크롤을 사용하는 것을 눈여겨보았기에, 상대가 일루전을 사용했다고 놀라진 않았다. 무엇보다 시각적인 효과만 주는 허상에 현혹될 사쿠라가 아니다.

“무시하자.”

일루전을 지울 능력은 있지만, 그런 일 따위에 낭비할 정도로 카드가 넉넉한 것도 아니다.

그녀는 숲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W를 찾는 건 쉬웠다. W는 일루전 스크롤을 미친 듯이 찢어대고 있었다. 주변에는 일루전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사쿠라는 미간을 좁혔다. 자신은 충분히 인기척을 내며 걸어왔다. 바닥의 잔가지도 몇 번이나 밟아 부러뜨렸고 거리마저 가깝다. 그런데도 W는 자신을 보지 못한 것처럼, 스크롤을 찢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다. 아니, 무시하고 있다.

“일루전은 분신술 같은 게 아니랍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뽑아내서 뭘 어쩌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여기서 끝내드리죠.”

사쿠라는 양손에 든 카드를 합쳤다.

“아이스 캐논!”

안개를 이루는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들어 응결하더니, 얼음덩이가 되어 뭉쳤다. W는 아예 스크롤 뭉텅이를 통째로 꺼내들어, 단검으로 그어버리고 있었다.

사쿠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코앞에서 W가 사용한 스크롤만도 어마어마한 분량이었다. 실제로는 더 많이 사용했을 테니, 거기에 얼마나 많은 돈을 쏟아 부었을 지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차라리 그 돈으로 좋은 장비를 구입하는 게 이득이다. 그걸 모를 정도로 W는 어리석은 자인가?

그녀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이제 3초만 기다리면, 아이스 캐논이 발사 될 것이고 W는 패배한다.

‘그런데 어째서 불안한 거냔 말이야?’

사쿠라는 배리어를 만드는 카드들을 꺼내들었다. 뭔가 나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3초가 지났음에도 아이스 캐논은 완성되지 않았다. 도리어 이제까지 만들어가던 얼음덩어리마저 금이 가 부서져 내렸다.

“무, 무슨…….”

사쿠라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EMP가 부족하여 주문이 캔슬 됩니다.>


사쿠라는 눈을 부릅떴다. 이곳에 마법사라곤 자신뿐이다.

그런데 EMP(환경마력)가 고갈되어 버리다니?

W는 좍좍. 스크롤을 계속 찢어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사쿠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이걸 노리고?”

W가 싱긋 웃었다.

“반쯤은 도박이었는데 먹히는군요.”

스크롤을 모조리 찢은 W가 몸을 일으켰다. 그 손에 들린 단검이 번쩍 빛을 냈다.

“이젠 제가 반격을 할 차례…….”

“항복.”

사쿠라의 선언에, W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네?”

“제가 졌다고요.”

사쿠라는 재빨리 시스템 창을 불러내 SURRENDER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대련모드가 종료되며, 사쿠라의 패배가 인정되었다.

불타는 삼림지역은 사라지고, 두 사람은 황량한 벌판으로 돌아와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W가 따졌다.

“아니…마법사라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끝내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바하르칼 출신이면 근접전에 문외한도 아닐 텐데.”

“마법사가 마법 안 쓰면 허수아비죠. 어떻게 싸우라는 거예요? 게다가 대련일 뿐이잖아요.”

핑계는 그렇게 댔지만, 사쿠라가 마음먹으면 W는 쉽게 이길 수 있다.

애초에 룬 슬레이어는 스킬의 사용을 제한하는 대련모드다. 그러나 아이템 사용마저 제한하는 건 아니다.

만약 인벤토리에서 레이피어를 꺼내들고 대응했다면, 단검으로 공격하는 W를 쉽게 무릎 꿇릴 수도 있다. 아이템 특수 효과를 개방하면, 일시적으로 공격속도가 1초당 3회까지 올라가기 때문.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빙글뱅글과 했던 사전 약속 때문이다.

빙글뱅글은 위즈에게 승리 버프가 걸리길 원했다. 자신과의 격차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딱히 대련모드에서 이긴다고 이득이 되는 것도 없기에, 사쿠라는 선선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나저나……EMP고갈에 대한 것은 꽤나 고급정보인데, 그걸 용케도 알아내 사용했군요.”

“마법사는 무서운 존재니까, 대비는 해야죠.”

맞는 말이다.

“하나만 더 물을게요.”

“말씀하시죠.”

“어째서 룬 슬레이어를 사용하지 않았죠?”

사쿠라는 위즈가 먼저 룬 슬레이어를 사용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었다면, 캐논급의 주문은 사용도 못해보고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 그걸 W가 몰랐을 리 없다.

“흠…그냥 제 생각이지만, 어쩐지 여러분들이 많이 양보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상대가 선의를 보이는데, 악에 받쳐서 상대하는 것도 그렇고. 사쿠라님의 말마따나 이건 대련이니까요.”

“그런 분이 마법사에게서 마법을 빼앗고, 단검을 들이대요?”

“조금 약이 오른 것도 사실이니까요. 궁금한 게 남았습니까?”

사쿠라는 고개를 저으며 물러났다. 맥 빠진 대결이었지만, 딱히 불만은 없다. 신나게 주문을 갈기며 카타르시스를 발산했으니까.


◇◇◇◇◇◈◇◇◇◇◇◇◈◇◇◇◇◇◇◈◇◇◇◇◇


사쿠라에게서 고개를 돌린 위즈는 빙글뱅글을 바라보았다. 빙글뱅글은 주먹 쥔 손에서 뚝뚝 소리를 내며 히죽 웃었다.

“승리 버프를 받아서 민첩과 행운이 각각 +50 되었을 테지? 난 제노사이드 모드를 원한다.”

“제노사이드?”

“그래. 더 오션의 역사 속 전장에 내던져지는 거다. 장소는 선택할 필요 없어. 대련 시스템이 무작위로 골라낼 테니까. 까딱 잘못하다간 전쟁에 휩쓸려서 나와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할 수 있는데……어때? 해보겠나?”

“난전이란 소리로군요. 좋습니다. 회복아이템은 어떡하겠습니까?”

“사용하는 게 좋겠지. W는 그게 더 좋지 않겠나?”

위즈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반대입니다. 대신 필드에서 나오는 보급품으로 충당하는 게 어떨까요?”

“만약 보급품 상자에서 엉뚱한 게 나오면 힘들어질 텐데?”

“각오하고 있습니다.”

“좋아.”

상의한 대로 대련 시스템을 설정하자, 배경이 뒤바뀌면서 위즈는 어느 저택의 빈방에 서 있었다.

“다행이네. 싸움터 한가운데 던져지진 않았으니.”

위즈는 창가에 다가가 회색커튼을 젖혔다. 도시의 참상이 드러났다.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고,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간간히 번쩍임과 함께 불길이 치솟는 것으로 보아, 마법사들까지 동원된 게 분명했다.

“무턱대고 돌아다니면 눈 먼 칼에 맞겠지?”

주인 잃은 말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당연히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위즈는 전투 양상을 지켜보기로 했다.

위험한 곳을 피하려면 치열한 격전지는 피해가는 게 좋다. 하지만 위즈가 서 있는 저택은 2층짜리 건물, 그것도 낮은 지대에 세워져 밖을 살피기엔 좋지 않았다.

“장소를 옮기자.”

위즈는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골목으로 향했다. 골목에 널린 상자를 발견한 위즈는, 그것을 쌓아 발 디딜 곳을 만들어 지붕에 올랐다. 그리고 옆 건물의 지붕으로 건너뛰면서 점차 높은 곳을 찾아나갔다.

“이쯤이 좋겠군.”

혹시라도 눈먼 화살이 날아들까 봐, 위즈는 지붕에 납작 엎드렸다.

한참을 관찰한 결과 위즈는 결론을 내렸다.

“균형을 깨드리지 않는 한, 전선은 고착화 되겠군.”

붉은 갑옷을 입은 자들이 7이라면, 푸른 갑옷을 입은 자들은 3이었다.

두 배 이상의 적을 상대로도 청군이 끈질기게 버티는 것은, 이들이 미리 진지를 구축한 채 철저히 유격전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즈는 사람이 많이 모인 곳만 골라 위치를 기억해두었다.

싸우는 곳만 피하면 어떻게든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때 위즈의 눈에 전장 한곳이 붕괴되는 모습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방패를 든 남자가 실드 차징으로 병사들을 날려버리고 있었다.

“빙글뱅글?”

위즈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방패전사니까 방어력이 높다고는 해도, 저렇게 무식하게 돌진만 하다간 뒤가 비게 된다. 그러다 뒤에서 공격이라도 들어오면 피해가 크다.

급소라도 맞으면 한방에 끝.

그걸 모를 리 없는데도 빙글뱅글은 몸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팔팔해져 날뛰었다. 그가 휘젓는 곳은 병사들이 니편 내편을 가리지 않고 뭉쳐져서 도망치기 바빴다.

“대체 무슨 생각인거야?”

그때 빙글뱅글이 고개를 들더니 씨익 웃었다. 정확히 위즈를 향해서.

“말도 안 돼. 이렇게 숨어 있는데 내가 보인다고?”

그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피해 도망가는 병사를 가리키더니, 다시 위즈를 가리켰다.

잠시 생각하던 위즈는 빙글뱅글이 전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했다.

병사들을 너에게 보낸다.

“보내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여전히 빙글뱅글의 의도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작가의말

플레임 캐논 사용 후 불타는 숲의 정경은......

퉁구스카 대폭발을 떠올리며 썼습니다.

[운석충돌로 생긴 일이라던데.....뭐 흑백사진만 봐도 위력이 짐작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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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4) +2 13.11.30 1,026 23 27쪽
33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3) +2 13.11.29 1,153 30 21쪽
32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2) +3 13.11.28 1,052 25 20쪽
31 3.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1) +4 13.11.23 1,525 20 19쪽
30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ED) +1 13.11.22 1,151 22 15쪽
29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8) +1 13.11.19 1,220 24 34쪽
28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7) +1 13.11.16 1,517 29 24쪽
27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6) 13.11.15 1,558 28 23쪽
26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5) +1 13.11.13 1,753 28 21쪽
25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4) +1 13.11.12 1,147 25 14쪽
24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3) 13.11.11 1,138 31 21쪽
23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2) +2 13.11.08 1,565 39 18쪽
22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1) +1 13.11.07 2,194 36 23쪽
21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0) 13.11.06 1,142 36 18쪽
20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9) +1 13.11.05 1,535 31 22쪽
19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8) +3 13.11.02 1,116 23 20쪽
18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7) 13.11.01 1,205 32 23쪽
17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6) 13.10.29 1,153 31 23쪽
16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5) 13.10.28 1,145 27 14쪽
15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4) 13.10.26 1,477 36 17쪽
14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3) +1 13.10.25 1,587 36 16쪽
13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2) +1 13.10.24 2,422 40 21쪽
12 2. 제3법칙 - 작용/반작용 (1) 13.10.22 2,118 32 15쪽
11 1. 계절이 바뀌는 때 (ED) +1 13.10.19 2,876 138 19쪽
10 1. (9) +1 13.10.16 1,915 42 23쪽
9 1. (8) 13.10.14 1,706 29 23쪽
8 1. (7) +1 13.10.05 3,290 60 25쪽
7 1. (6) 13.10.04 2,229 42 22쪽
6 1. (5) 13.10.02 2,269 39 17쪽
5 1. (4) 13.09.29 2,362 4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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