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장군 공손찬(2)
“나는 하의를 죽인 하현랑이다!!”
현랑의 말에 잠시 정적이 인다. 어젯밤에 암기시킨 대사를 거의 틀리지 않고 잘 말했다. 다만 반말하는 버릇은 고쳐야겠다. 긴장하면 자꾸 반말하는 거 같다.
“하의? 황건적 출신의 하의 말이냐?”
공손찬이 놀라며 되묻는다. 다행히 반말한 것에 대해서는 크게 유념치 않는 것 같다. 잠시 어색한 공기가 감돈다. 관정이 분위기를 바꿔보려 특유의 인자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허허허. 제가 대신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관정이 가가대소(呵呵大笑)하며 분위기를 바꾸려 애쓴다.
“이분들은 현민, 현랑 형제입니다. 평원에서 하의 일당을 물리쳤다고 합니다. 게다가 주군께 임관(任官)을 청한다고 하니 제가 모시고 왔습니다.”
“음···. 하의와 그 잔당들을 물리쳤다고? 이게 정말인가?”
공손찬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못 믿겠다는 눈치.
관정이 당황하며 말한다.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절대 거짓말을 할 분들이 아닙니다.”
“음···. 관정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믿도록 하지. 그래서 내 밑에 들어오고 싶다고?”
공손찬이 현민, 현랑을 위아래로 훑어본다. 현민은 공손찬의 말투에 계속 짜증이 났지만, 고용주가 갑이다. 을의 입장인 현민과 현랑은 꾹 참는 수밖에.
“네. 공손찬님의 명성은 평원에 있을 때부터 듣고 있었습니다. 밑에서 일하게 해주시면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목숨 바쳐 일하겠습니다.”
현민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래 을은 이렇게 고개를 숙여야지.
“나도 목숨 바쳐 일하겠습니다!!!”
현랑도 똑같이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짜식. 어젯밤에 열심히 가르친 보람이 있다.
“내 명성이라. 하하하하. 맘에 드는구나. 좋다. 받아주마!”
그토록 원하던 취직의 순간이었다. 취직이 이렇게나 쉽다니. 말만 잘하면 취직하는 세상. 역시 여기는 기회의 땅이야!
“그런데 자네는 대체 무엇을 잘하는 건가?”
공손찬이 현민을 콕 찝어 말한다. 말하는 그의 태도에서 현민을 무시하는 게 느껴진다.
‘거 자존심이 상하네.’
뭐 어쩌겠는가? 옆에 있는 게 현랑인데. 비교되는 게 당연했다.
2m 25㎝의 우월한 키, 조각 같은 외모, 떡 벌어진 어깨. 어딜 봐도 162㎝의 못생긴 현민과는 다른 세계의 사람 같다. 아니지. 실제로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형은 머리가 좋습니다!!!!”
현민이 말을 하기도 전에 현랑이 소리친다.
‘그건 네 기준에서 그런 거지···.’
“아하! 모사였구만. 그럼 그렇지. 저렇게 볼품없는 자가 무장일 리가 없지.”
공손찬이 손바닥을 마주치며 말한다.
‘썅놈···. 볼품없다니···.’
현민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네. 주군. 저는 모사입니다. 동생 현랑과 함께 받아주시면 원소 놈을 제대로 엿 먹일 수 있습니다.”
“여. 엿을 먹여?”
“아. 제 말은 원소 놈을 확실히 조질 수 있다는 겁니다.”
“하하하하. 그 말이었구나. 요즘 젊은것들이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예나 지금이나 ‘요즘 젊은것들’이라는 말은 유행인가 보다.
“어디보자.”
공손찬이 군사 배치도를 본다. 그리고 무언가 계책이 생각난 듯 손뼉을 치며 말한다.
“좋다! 그렇지 않아도 전예를 지원해줄 원군을 보내려던 참이었다. 지금 당장 너희들을 전장으로 보내겠다!”
‘버. 벌써요? 나 이제 막 취직했는데···.’
공손찬의 실행력에 현민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 * *
원소의 영역에 있는 작은 도성 앞.
도성을 공격하기 위해 주둔한 공손찬군의 진영에 불길이 치솟는다. 그곳을 이끄는 장군은 공손찬 휘하의 명장 전예. 현재는 원소군과 흑산적의 협공을 받아 고전 중이다.
“장군님! 포위되었습니다. 후퇴하셔야 합니다!!”
“원군은 아직인가?”
“네. 코빼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다가 전멸하겠습니다. 어서 결정을 내리십시오. 장군.”
“흑산적 놈들!! 배신하다니. 그놈들을 믿는 게 아니었어.”
이미 흑산적 무리가 본진을 뚫고 막사 곳곳에 불을 지르고 있다.
“장군님!! 어서!!”
“병사들을 모아라 산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원군이 올 때까지 항전하겠다.”
전예는 용맹스럽게 무기를 든다.
하지만 갑작스런 흑산적의 배신으로 병사들의 동요가 심했다. 이미 전의를 잃고 죽거나 항복한 병사들이 많다. 처음 북평을 출발할 때만 해도 2만 명이었던 군세는 기껏 잘 모아봤자 천여 명 정도로 초라해졌다.
“장군님. 빨리 가야 합니다. 적들이 이곳까지 몰려옵니다.”
“젠장. 휴고 이 개자식!”
흑산적 무리를 이끄는 무장 휴고. 그가 이번 일의 원흉이다. 전예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병사들을 이끌었다.
“뒤쪽의 산으로 올라간다.”
소수의 군세가 방어를 하려면 넓은 평지보다는 험한 산지(山地)가 유리하다. 전예는 병법에 빠삭한 지장(智將)답게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산 위로 뛰어 올라갔다.
“적에게 노출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차라리 후퇴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전예의 부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후우. 패배자로 사느니 나는 영광스럽게 가겠다.”
전예는 알고 있다. 공손찬은 화끈한 성격만큼이나 관용을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이다. 2만의 병사를 잃고 패장으로 돌아간다면 분명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패장으로 사는 것은 전예 스스로에게도 용납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전투를 준비한다. 두려운 자는 지금이라도 도망쳐라.”
산 위로 도망치느라 지쳐있는 군사들. 산 아래를 보니 본진이 있던 자리에 아직도 남아있는 전예의 병사들이 항전(抗戰)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휴고...”
휴고의 본대가 휘젓고 다니고 있다. 멀리서 보이는 휴고를 보니 전예는 분노에 치를 떤다.
“자. 장군님! 저기 원군입니다!”
그때 전예의 부장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부장이 가리킨 곳에는 한 무리의 기병대가 엄청난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선봉에 있는 깃발은 그들이 공손찬군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오! 제때 원군이 나타나 주었구나. 허나 그 수가 매우 적구나···.”
전예는 힘이 빠진다. 흑산적이 1만, 원소군이 1만 합치면 2만이나 되는 대군이다. 하지만 저 멀리 달려오는 기병대는 어림잡아 3천 정도밖에 되질 않는다.
지금 전예와 함께 있는 병사들이 1천여 명 정도이니 합쳐도 4천밖에는 안 된다.
“어떻게 할까요?”
부장이 눈치를 보며 말한다.
“원군에 호응하여 최후의 항전을 펼친다. 잠시 쉬면서 전투에 참여할 준비를 해라!”
“예! 장군!”
최대한 적에게 큰 피해를 주고 장렬히 전사하리라. 그래야 공손찬군에게 다음이 있다. 전예는 다짐을 굳히고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한다.
* * *
“아저씨! 저기가 우리 편이 있는 곳이라고 하지 않았어?”
현랑이 묻는다.
현랑의 옆에는 긴 수염에 험악한 얼굴을 한 남자가 말을 몰고 있다. 그는 공손찬이 원군을 이끌고 가서 전예를 도와주라고 보낸 엄강이라는 무장이다.
“하현랑 부장!”
현민, 현랑 형제는 엄강의 부장으로 이번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두 형제가 이렇게 고속승진을 하게 된 배경에는 관정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딸을 구해준 보답으로 형제를 공손찬에게 강력히 천거(薦擧)해주었다.
“응? 아저씨 왜?”
“아저씨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이 자식아! 장군님이라고 하라고!”
엄강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한 채 소리쳤다. 엄강은 다혈질에 참을성이 많지 않은 사람이다. 성질 같아선 현랑을 때려죽이고 싶지만, 공손찬이 특별히 참전(參戰)을 지시한 사람들이다. 뒤에 유력 가문이 있으리라 생각해서 참는다.
“죄송해요. 장군님. 제 동생이 아직 어려서 그래요.”
현민이 대신 사과를 한다.
“에휴. 말을 말자. 상황을 보니 흑산적 무리가 아군을 배신한 것 같다. 우리가 가서 남은 병사들을 구출한다.”
“그럼 보이는 놈들 다 죽이면 되는 거야?”
현랑이 소리쳤다.
‘아 제발 존댓말 좀 하라고!!’
엄강은 다행히 전투를 앞두고 있어 이제는 현랑의 반말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래. 우리 병사들과 같은 옷을 입은 자들이 아니면 모두 적이다. 보이는 대로 죽여라!”
“응!”
“네!”
기병대의 선봉에 특이한 기병이 있다. 말 하나를 나눠 타고 있는 두 남자. 현민과 현랑 형제이다. 그들은 선두에서 바람을 가르며 빠르게 적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형! 저기 봐. 완전 핫플이야!! 몹들 엄청 많아. 우리도 빨리 가자.”
현랑이 말 위에서 몸을 들썩거린다.
“야 너는 긴장도 안 되냐? 나는 실제로 전투에 참여한다니까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데.”
“에이! 처음도 아닌데 뭐. 그리고 빨리 전직해야지. 나 아직 장군 아니잖아.”
‘넌 처음이 아니겠지만 나는 처음이라고.’
게임 캐릭터였던 현랑에게는 첫 전투가 아니다. 대규모 공성전만 수백 번을 치렀다.
물론 현민에게도 첫 전투는 아니다. 마우스와 키보드로 수백 번 전투에 참여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실제로 참여하는 건 처음이다.
“곧 전투가 시작된다! 대열을 정비하고 무기를 들어라!!”
3천 기병의 지휘관 엄강.
그가 무기를 들고 소리쳤다. 뒤따르던 기병들이 하나같이 무기를 들고 함성을 지른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3천 명의 외침과 말발굽 소리. 현민의 몸에도 진동이 느껴진다. 그 대열의 제일 앞에 자신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이 세계에서 허무하게 죽을 순 없어!’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함성을 듣자 더 긴장된다.
양쪽 뺨을 세게 때려본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현랑에게 말한다.
“현랑. 잘 들어. 적진에 들어가면 우린 무조건 제일 높은 놈한테 달려갈 거야.”
게임에서도 보스만 잡으면 몹들은 알아서 도망가거나 사라진다.
“오오. 잡몹은 무시하고 경험치 제일 많이 주는 보스 잡으러 가는 거야?”
“그래. 보스가 보이면 내가 말한테 헤이스트를 걸 거야. 그리고 너한테는 데몬부스터를 써줄게. 그다음은 어떻게 하면 될지 알겠지?”
현민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다.
첫 전투에 대한 두려움과 긴장감.
그리고
설렘.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점점 적들이 가까워져 온다.
아군이 타고 있는 말도 긴장을 했는지 앞만 보고 달려간다.
적들은 얼마 전까지 전예의 본진이었던 곳을 휘젓고 있다.
“적들이 방어 태세를 갖추기 시작한다!”
엄강이 이끄는 기병대의 함성에 그제야 적들은 무기를 들고 방어 태세를 갖추기 시작한다. 다만 아직 다 정리되지 않은 전예군과의 전투 때문에 진형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고 있다. 절호의 기회다.
“전부 나를 따라 좌군(左軍)을 먼저 친다! 아군 사이에 간격이 벌어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
엄강은 가장 허술해 보이는 좌군을 먼저 공략하기로 한다.
와아아아아아아
엄강이 이끄는 기마대 병사들이 함성을 지른다.
“장군님! 장군님!”
함성 속에서 현민이 옆에 있는 엄강을 부른다. 엄강이 귀찮은 듯이 현민을 본다.
“아. 또 왜?”
“장군님! 저희는 센터... 아니 중앙을 돌파할게요.”
적의 중앙에는 흑산적 본대(本隊)가 주둔하고 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본대와 가장 떨어져 있는 좌군을 먼저 치고 중앙으로 들어갈 거야. 잔말 말고 따라와.”
“제가 생각한 게 있어서 그래요. 저희는 중앙으로 갈게요.”
전투를 앞두고 가뜩이나 예민해져 있는 엄강이 호통을 친다.
“그렇지 않아도 소수인 병력을 어떻게 둘로 나눈단 말이냐!!”
“병력을 나누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랑 현랑만 갈게요.”
“뭐? 둘만 가겠다고? 둘이서 뭘 어쩌겠다고?”
“가장 높은 대장 놈의 목을 따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할 수 있어요! 믿어주세요!”
엄강은 믿을 수 없다는 눈치. 하지만 현민의 눈에는 강한 확신이 비춰진다. 이미 기병대는 적진에 근접해 있었다. 엄강에게는 현민을 설득하느라 낭비할 시간이 없다.
“니들 맘대로 해! 원호(援護)하는 일은 없을 것이야!”
“네! 적장의 목을 가져다 드릴게요.”
빠른 속도로 적진의 좌군을 향해 돌진하는 기병대. 그 가운데 단기의 말 한 마리가 무리를 빠져나와 적진의 중앙군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엄청난 속도로.
- 작가의말
-
흑산적(黑山賊)은 한때 강력했던 산적 집단입니다. 실제로는 공손찬과의 연합을 끝까지 놓지 않지만, 이 소설에서는 휴고가 이끄는 흑산적의 일부 세력이 공손찬군을 배신하는 것으로 각색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추천과 선작등록 그리도 댓글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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