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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눈물의 잔상

미완성교향곡

웹소설 > 작가연재 > 로맨스

완결

홍라온
작품등록일 :
2012.07.25 14:05
최근연재일 :
2012.07.25 14:0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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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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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3.29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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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교향곡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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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20. Maurice Ravel(라벨) - Tzigane(집시), op.76


19세기 프랑스 작곡가 라벨의 작품으로, 그 기본은 헝가리 집시계열 민속 무곡 차르다시(czardas)의 스타일을 따른다. 우수가 담긴 느린 카덴짜풍의 느린 라슈와 차차 격동을 가하는 프리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야성적인 집시풍 음악으로, 난해하면서도 복잡한 바이올린 기교가 총 망라되어 있는 곡이라고 볼 수 있다. 바이올린의 고유음색을 풍부하고도 격하게 표현해내며, 집시의 감성이 녹아들어 어딘가에 정착하지 못하는 떠돌이의 인생애환이 음악의 공명으로 재현되는 곡.

처음 그 곡을 이야기했을 때,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신동이라 불리던 차예빈이라 하더라도, 공백기가 있었던 데다가 새끼손가락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곡은 무리라고 말이다.

“누나가 하고 싶은 곡이면 상관없어요.”

유일하게 고개를 끄덕여 준 것은 우현이었다. 모두가 무리라고 말하는 가운데, 다른 곡을 선택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설득을 하는 가운데, 우현만은 예빈의 선택을 지지해주었다.

사고로 손가락을 다치기 전까지, 예빈은 주로 밝고 화려하며 경쾌한 음색을 구사했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행복함에 젖어 있었으니, 그 음색을 표현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음악 자체가 되는 것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아마 그 때의 예빈이라면, 애초에 이 곡은 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집시의 감성 같은 것, 그 고뇌 같은 것은 표현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치 감정의 저 깊은 밑바닥까지 파고 들어가, 고뇌하는 그 감정은 그 때의 예빈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잃어보고, 빛에서 어둠으로 추락했으며, 또한 그 바닥에서 처절하게 기어 올라온 지금의 예빈이기에 표현할 수 있는 것.

단지 음정의 나열을 위해 다시 바이올린을 잡은 것이 아니다.

표현하고 싶은 것, 전하고 싶은 것, 바이올린 음색에 그 모든 것을 담기 위해 바이올린을 다시 손에 쥔 것이다.

행복도 절망도 모두 밟고 지나온 지금의 예빈이기에 표현할 수 있는 곡.

무리라고 해도 예빈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새끼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겠다고 손에 쥐었을 때부터, 이미 그 시작부터가 모든 것이 ‘무리’였다. 그 ‘무리’라는 것 앞에, ‘한계’라는 것 앞에 또 다시 무릎 꿇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억지로 죽여야만 했던 지난 몇년만으로 충분하다.

살아있는 지금, 숨을 쉬고 있는 살아있는 존재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싶다.

그 한계 앞에 엉망진창으로 깨질 지라도, 그냥 주저앉아만 있는 것 보다는 낫다. 바닥을 보지 말고, 있는 힘껏 앞을 보는 법을 배웠으니까. 앞을 향해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준 우현이 곁에 있으니까. 언제나 곁에 있어주는 우현을 위해서라도, 예빈은 모두가 무리라고 말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곡을 선택했다.

라벨의 찌가느, 집시라는 듯의 곡으로 예빈은 음악 콩쿠르 바이올린 부문에 출전했다.

모두들 만만치 않은 실력이었다.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예빈은 새삼 자신이 무모한 도전을 벌이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긴장감에 먹혀버릴 것만 같은 기분. 온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

예선을 통과할 때까지는 그저 무작정 달리기만 했다. 어떻게 달렸는지 스스로의 기억 속에도 희미하게 밖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그저 달렸다. 하지만 예선 통과를 하고 본선에 오르게 되자, 점점 모든 것이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예선만이라도 통과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통과하고 나니 더 욕심이 생긴다. 하지만 예빈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예빈은 필사적으로 자기 자신을 제물로 삼아 불타오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결국은 또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는 불안감. 손가락에 무리를 주고 있다는 자각은 있다. 지금 꽤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도.

그대로 주저앉아, 또 다시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면 될 거라고. 그러면 어느 새 모든 것이 끝나있을 것만 같은, 도망가고 싶어지는 기분, 지금당장이라도. 한 명 한 명, 차례대로 무대에 오르고, 예빈의 순서가 다가 올 때마다 심장박동 소리는 더욱 격해지고 있다.

지극히도 산소가 부족한 느낌. 홀로 이산화탄소만이 그득한 곳에 갇혀버린 것만 같다.

“…….”

짓눌릴 것만 같았던 순간, 떨리고 있는 예빈의 손을 잡아준 것은 크고 따스한 손이었다. 예빈보다 훨씬 커다란 손으로, 아무 말 없이 예빈의 손을 잡아주는 그 온기에 몸의 떨림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제가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인 줄 아세요?”

“언제인데?”

딱딱한 얼굴 표정이 부드러워지는 예빈을 보며 우현은 물었다.

“누나랑 같이 연주할 때요. 누나는요?”

“…….”

‘나도 마찬가지야.’라는 말 같은 건, 언제나 그랬듯이 솔직하게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우현이 갖고 있는 그 행복이라는 감정보다도, 예빈 자신의 감정이 더 클 지도 모른다. 너무도 소중해서 절대로 다시는 잃고 싶지 않은 절박함으로,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함께 연주되는 그 순간의 행복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 발버둥을 치고 있다.

“……바보 멍청이.”

“……누나, 그럴 때마다 저 상처받아요. 진짜라니까요.”

“…….”

아무 말 없이 예빈은 우현의 어깨에 기댔다. 콩쿠르 본선을 앞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편안해지는 감각이 온 몸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가운데,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눈치 챈 예빈은 슬쩍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빈과 시선이 마주치자 급하게 고개를 돌리는, 우현의 학교 후배라던 소녀였다. 우현과 반갑게 인사를 했지만, 각자 본선 준비로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끈질기게 이쪽에 달라붙는 시선은 단지 우현이 학교 선배일 뿐이라는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

예빈의 시선이 자신의 왼손을 향했다. 움직이지 않는 새끼손가락, 그리고 많은 부담으로 건초염의 가능성이 보이고 있는 손가락까지.

방금 무척이나 부럽다는 시선을 보내던 소녀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예빈은 희미하게 피식 웃었다. 실제로 부러운 것은 이쪽이었다. 마음껏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는 손을 갖고 있는 그녀가 미치도록 부러웠다. 과연 언제까지 버텨줄지, 항상 한계와 불안감을 동시에 끌어안고 있는 예빈보다야 행복하지 않은가.

최소한 연주를 할 때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자폭을 하는 심정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드디어 예빈의 차례가 다가오자, 우현과 예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둘만의 무대를 향해 나란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넓은 무대 중앙에 예빈이 자리했고, 그 뒤쪽의 피아노 앞에 우현이 앉았다.

바이올린의 익숙한 감각, 마치 전장에 나서는 장수가 무기를 준비하듯, 비장하게 바이올린의 현 위에 활을 올린다. 숨까지 참고 있다가 숨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미끌어지기 시작하는 기다란 활. 그 활과 현이 만들어 내는 공명이 음악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예빈의 바이올린이 달리고, 뒤를 이어 따라오는 우현의 피아노.

눈앞의 관객들도, 다른 참가자들도, 또한 심사위원들 마저도 인식의 영역에서 밀려나기 시작한다. 그런 것들은 그저 아무래도 좋다는 느낌. 점점 이 세상 위에 존재하는 것은 예빈의 바이올린과 우현의 피아노 밖에 없는 것만 같다.

머리에서 무언가 판단을 하기보다도 먼저, 몸이 기억하고 있는 감각이 지판을 두드리고, 활을 움직인다. 모든 손가락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 보다 최소한 3배 이상의 노력이 필요한 길이었다.

아무리 예빈이라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은 있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 세상 모든 일은 행복한 면이 있으면 슬프고 힘든 면이 존재하는 것이며, 그 슬프고 힘든 면 때문에 행복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움직이지 않는 새끼손가락 때문에 얼마나 절망했던가. 그럼에도 움직이는 이 손가락들로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격했던가. 남들보다 몇 배는 힘든 길일 지라도, 이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에 얼마나 행복했던가.

행복하지만도, 불행하지만도 않은 것이 바로 삶이었다. 때론 정말 모든 것이 끊어질 것만 같은 한계에 몰리기도 하지만, 인간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주위에 존재하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특히나 특별한 의미로 존재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준다면.

예빈의 연주는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기술적으로는 분명 불안전한 부분이 존재했다. 기교의 곡으로 꼽히는 곡을 세 손가락만으로 연주해내면서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음악은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귀가 아닌 마음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 그저 음악이 아닌 예술로 표현될 수 있는 무언가가 말이다.

그 자신도 땀이 흐를 정도로, 온 몸으로 음악에 빠져들어, 듣는 사람마저도 예빈이 연주하는 음악에 빠져들게 만든다. 정확한 기교라기보다는 온몸으로 표출하는 차예빈의 감성. 평소 무뚝뚝한 예빈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강렬하고도 풍부한 깊고도 깊은 감성.

드디어 휘몰아치듯 주위에 울려 퍼지던 음들이 멎어들고, 예빈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객석에서는 박수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마라톤이라도 한 것처럼 땀에 젖었고, 숨까지 가빠진 예빈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우현이 미소 짓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거대한 산을 드디어 정복한 기분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결과는 아무래도 좋다. 예빈은 열심히 달린 자신을 마음껏 칭찬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작가모임 로맨스화원 바로가기


작가의말

사실 라벨의 음악은 볼레로를 쓸 예정이었습니다만;
예정이 급 선회하여 집시가 되었습니다 아하핫~;

사실 자폭 직전이었습니다 스스로도 orz
게시판 전부 폭파시키고 얌전히 지내자, 라고;
사라진 이미지도 돌아올 생각을 안했고;
거의 쥐어짜듯 나온 한 편입니다; 쿨럭;

게시판 몽땅 지워버리고 정말 잠수를 하려고 했....
...............................-_);;;; [도망간다]


※ 하지만!
흔적을 남겨주신 분들을 언제나 격하게 애정합니다 *-_-*

앤드류님, 언제나 감사합니다~
하하핫~ 거의 잠수였습니다만 ㅠ_ㅠ
다음 편을 물고 왔습니다; 덜덜;

silverwolf님, 이번에도 또 간만에 올라온 글입니다;ㅁ;
그래도 다음 편은 이미지곡은 정해져 있으니..
이렇게 극악적으로 주기가 벌어지진 않을 겁니다, 아마도(...)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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