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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연재수 :
95 회
조회수 :
215,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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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809,561

작성
20.07.1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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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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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글자
18쪽

숙원 홍씨 38. 운명적인 만남

DUMMY

숙원 홍씨 38. 운명적인 만남


단진은 그대로 있었다. 지나가는 사내가 단진을 ‘탁’ 치고 가면서 길을 막고 있다고 야단을 쳤다. 그제야 단진은 오고가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진이 돌아보니 진양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단진은 사방을 둘러보며 찾았다. 그러다 한쪽 골목 끝에 진양의 뒷모습이 보였다. 단진은 재빨리 쫓고 싶었지만 넘어질 때 다친 무릎의 상처 때문에 쉽지 않았다.

진양이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섰다. 양쪽에 자리한 집들은 창고이거나 뒷문이었다. 진양은 천천히 걸었다. 진양이 방향을 틀어 더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호위무사들은 진양이 갑자기 골목으로 들어선 게 미행 때문이라 여겼다.

순포가 뒤를 힐끗 보고 말했다.

“대군마마, 처리하겠사옵니다!”

진양이 말했다.

“그냥 두거라! 아는 놈이다!”

단진이 소리쳤다.

“네 이놈!”

진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단진이 서둘러 와서 진양의 앞을 가로막았다. 진양이 단진을 보았다. 김가가 칼을 뽑으려는데 진양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김가와 은가가 단진이 누군지 알아보고 진양을 보았다. 순포는 무슨 일인가 싶어 보고 있었다.

단진의 눈에는 불길이 일었고 진양의 눈빛은 얼음처럼 고요했다.


단진이 손가락으로 진양을 가리켰다.

‘너, 조선 금수저, 말 위에서 싸가지 없게 말하는 너!’

‘천한 입이 아니라, 백성의 입이다! 전하와 세자저하께서 귀 기울여 주시는 백성의 입이다! 세자저하께서 귀히 여기시는 백성의 목숨이란 말이다! 알겠느냐?’


진양은 단진을 꼭 다시 보고 싶었다. 단진은 여전히 전장을 누비는 장수보다 더 큰 결기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이 살인자! 죄가 없다고 했잖아, 고향으로 간다고 했잖아! 왜 죽였어! 왜! 보내준다 해놓고, 왜 죽였어!”

진양은 팔딱팔딱 뛰는 게 재밌어 대꾸해줬다.

“살 수 없을 거라 하지 않았느냐!”

“네놈이 뭔데, 네놈이 뭔데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살 수 있다 없다 판단을 해! 네까짓 게 뭔데!”

김가가 소리쳤다.

“네 이놈,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냐?”

단진이 김가에게 고함쳤다.

“입 닥치거라! 네놈은 할 줄 아는 말이, 어느 안전인데 함부로 말하느냐! 그 말 밖에 없느냐! 전에도 말하지 않았느냐! 어린 상전이 제대로 알지 못하면, 네놈이라도 가르쳐야 할 것이 아니냐!”

진양이 조용히 말했다.

“해서?”

단진이 진양을 보았다.

진양이 말했다.

“네놈이 나를 가르치겠단 것이냐?”

“네놈의 집안이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도, 아무리 양반이어도 사사로이 사람을 죽이면 벌을 받아, 그것이 조선의 법이야, 너는 법대로 처형당해야 돼!”

“내가 사람을 죽였다? 증좌가 있느냐?”

“나! 네가 화살을 쏴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누가 실성한 네놈 말을 믿는단 말이냐? 나는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

진양이 단진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내가 죽인 건,”

진양이 고개를 숙여 단진의 눈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짐승이다.”

단진은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있었다.

진양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짐승이기에 죽은 것이고, 짐승이기에 소달구지에 끌려 이리저리 다니다 까마귀의 먹이가 되는 것이다.”

단진의 가슴이 거칠게 뛰었다.

“죄를 짓는 순간 짐승이 되는 것이다, 알겠느냐?”

단진이 폭발했다.

“허면, 너도 짐승이다! 해서, 나도 널 죽일 거야!”

단진은 앞뒤 재지도 않고 주먹을 불끈 쥐고 덤벼들었다. 진양이 손등으로 단진을 후려쳤다. 단진이 날아가듯 문에 부닥쳤다. 단진의 입술이 터져 피가 배어 나왔다. 단진은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단진은 핏발 선 눈으로 진양을 노려볼 뿐이었다.

진양이 웃으며 말했다.

“그놈을 죽인 건 내가 아니다!”

단진이 보았다.

“너 때문에 죽은 것이다!”

.....

“네놈의 그 어리석음과 무모함 나약함이 죽인 것이다, 잊지 말거라!”

진양이 돌아섰다. 단진이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서둘러 쫓아가려다 멈칫했다. 단진이 주변을 보니 육갑과 함께 도망치던 곳이었다. 자신이 부닥친 문이 육갑과 함께 도망쳐 들어간 창고였다. 힘없이 죽어간 육갑이 단진을 보고 있었다.


진양이 장터를 벗어나 사거리 느티나무 아래에 이르렀을 때 소리가 들렸다.

“네놈이 틀렸다!”

진양의 눈꼬리가 내려가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진양이 돌아섰다.

단진이 눈을 부릅뜨고 다리를 절룩이며 걸어오고 있었다. 단진은 진양에게 시선을 둔 채로 걸어왔다.

단진이 진양 앞에 섰다. 푸르른 느티나무 아래 단진과 진양이 마주 서 있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흩날렸다. 진양은 단진을 보았다. 얼굴은 멍들고 입가는 터져 피가 맺혀 있었지만 눈빛은 또렷했다. 단진의 눈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단진은 아까와는 다르게 흥분은 가라앉았고 눈빛은 더욱 단단했다.

“네놈이 틀렸다.”

진양은 보고 있었다.

“그 아이를 죽인 건, 내가 아니다, 네놈이다! 눈은 뜨고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는 있으나 듣지 못하는 네놈의 병든 생각, 병든 마음이 죽인 것이다,”

.....

“짐승이라 했느냐? 사람을 짐승이라 말하는 네놈은 대체 어디서 무얼 배운 것이냐! 배우긴 한 것이냐? 사람과 짐승을 구분할 줄은 아느냐?”

김가가 소리쳤다.

“네 이놈! 감히 어느 안전이라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단진이 김가에게 소리쳤다.

“입 좀 닥치거라! 아까도 말하지 않았느냐! 네놈이 하지 못하니 내가 하는 것이다! 내가 목숨이 귀하다는 것도 모르는 이 무지랭이에게 가르치고 있질 않느냐!”

김가가 팽 돌아 다가가려 하자 진양이 제지했다. 진양이 무사들에게 손짓하자 무사들이 뒤로 물러섰다. 진양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단진이 진양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잊지 말거라, 그 아일 죽인 건 너다! 사람과 짐승도 구분 못하고, 사람 목숨이 귀하다는 것도 모르는 네놈의 무지함이 죽인 것이다.”

진양은 보고 있었다.

“한 사람이 죽는다는 건, 한 세상이 끝나는 것이다.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친구고 누군가의 전부가 끝나는 것이다, 그 누군가의 세상이 끝나는 것이다. 해서 그 세상을 끝나게 했을 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단진이 결연하게 말했다.

“너는 반드시 죗값을 치를 것이다!”

진양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 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이 할 수 없다면,”

단진이 단호히 말했다.

“내가, 내가 할 것이다. 내 손으로 반드시 너를 죽일 것이다!”

진양이 한 걸음 다가갔다.

“나를 죽이려면 힘을 키워야 할 것이다.”

단진이 조용히 말했다.

“너 같이 사리분별 못하는 꼬마를 상대하는데, 그리 큰 힘이 필요할 것 같진 않구나! 기다리거라!”

진양이 단진을 보았다. 단진이 돌아섰다.

진양은 입으로 ‘꼬마’ ‘꼬마’ 라고 말하고는 박장대소했다. 단진은 진양의 웃음소리를 등 뒤에 두고 걸어갔다. 단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진양은 눈물까지 닦아가며 아이처럼 웃었다. 단진이 들꽃처럼 작아 보일 때 진양이 웃음을 멈췄다. 또다시 선이 고운 계집이란 생각이 들었다. 단진을 후려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단진의 뺨이 손에 닿을 때 전율이 일었다. 짜릿했다. 처음이었다. 기다려졌다.

진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향이 미소 지었다.

지난번 역병으로 피해를 봤던 민가를 다시 찾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고 아직 밥때가 되지 않았는데 아궁이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라왔다. 밥 냄새를 맡은 아이들이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낮은 담장 너머로 아낙이 웃으며 아이들의 얼굴을 씻기고 있었다. 지난번에 향에게 성난 얼굴로 임금 할애비라도 되느냐며 날을 세운 아낙이었다. 가물어 갈라진 땅에 비가 와 비옥한 땅이 된 듯, 아낙은 그렇게 웃고 있었다.

나무를 한가득 메고 오던 사내가 향을 알아보고는 서둘러 다가왔다.

“나으리!”

향이 사내를 보았다. 역병에 일자리를 잃고 구휼미 구경도 못했다고 성을 내던 사내였다. 향이 내민 돈 주머니를 혼자 차지하려던 사내였다.

사내는 지게를 내려놓으며 동네방네 떠나갈 듯 소리쳤다.

“뭐 하는가? 나으리가 오셨네! 그 나으리가 오셨어!”

밥주걱을 든 채로, 꼬던 짚신을 든 채로 백성들이 향에게 몰려들었다. 조금 떨어져있던 무사들이 다가오자 향이 눈짓을 했다. 박 내관은 향이 걱정돼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

사내는 달라져 있었다. 굶주린 이리 같던 눈은 사라지고 없었다.

사내가 멋쩍은 듯 웃으며 향에게 말했다.

“그때는 제가 배가 고파 눈이 뒤집혔나 봅니다...”

다른 사내가 말했다.

“그때 네놈이 걷어찬 다리에 멍이 아직도 안 풀렸어...”

한 푼만 달라고 구걸했던 아이가 그 사내에게 말했다.

“나는 아재가 발로 차서 대갈통이 아직도 아파! 근데 밥 먹을 땐 안 아파!”

아이의 말에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향이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사내가 쑥스러운 듯 향을 보며 말했다.

“역병이 돌기 전에는 쌀 한 톨이라도 나눠먹던 사이였는데...뱃속에 거러지가 들으면 짐승이 되나 봅니다...나으리 덕분에 귓구멍으로만 듣던 구휼미를 뱃속에 넣고 보니...뱃속이 든든해야 사람이 되나 봅니다. 고맙습니다 나으리.”

향이 웃었다.

“내 덕이 아닐세, 응당 받아야 할 자네들의 몫이지. 일자리는 구했는가?”

사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역병을 앓았다 해서 써주질 않습니다. 짚신도 팔고 나무도 해다 팔고. 팔 수 있는 건 다 팔고 있는데, 역병 걸린 놈 나무는 불도 안 붙는지...”

향은 알 것 같았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어찌되었는가?”

아낙이 대답했다.

“집집마다 한명씩 맡아, 때 되면 있는 밥상에 수저 하나 더 얹고 있습니다.”

어느새 마을 사람들 모두가 너나 할 것 없이 인사하며 고맙다고 했다. 사람들은 향의 옆에 바짝 붙어있는 박 내관을 밀쳤다. 사람들은 구휼미를 가져온 성 무사와 정 무사에게도 연신 고맙다고 했다. 찬밥 신세가 된 박 내관과 최 무사 권 무사는 서로를 보다가 웃었다. 박 내관은 향의 환한 얼굴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후다닥 집 안으로 들어갔던 사내가 짚신 한 짝을 들고 나왔다.

사내가 향에게 내밀며 웃었다.

“나으리 같은 분께서 신으실 일은 없겠지만,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으리 드리려고 더 꼼꼼히 꼰 것입니다요.”

향이 짚신을 받았다.

“고맙네, 내 귀히 여기겠네!”

향에겐 가벼운 짚신이 태산보다 무거웠다. 향이 웃으며 돌아섰다. 향의 웃음 끝에 무거운 책임감이 얹어졌다. 또다시 저들의 배를 곯게 하면 분노는 전보다 더 할 것이다. 그 분노는 더 약한 자를 향할 것이고 결국 자기들끼리 으르렁거리며 다치게 할 것이다. 가장 먼저 부모 없는 아이들이 희생될 것이다.

향은 정치란 백성의 배를 채워주고 웃게 하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참 쉬운 일인데 어찌 이리 어렵단 말인가.

향이 장터에 들어섰다. 박 내관은 바로 뒤에 따랐고 호위무사들은 그 뒤를 따랐다.

장터는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웅성거려 시끄러울 정도였다. 물건을 들고 깎아달라고 하는 손님과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는 상인간의 옥신각신하는 소리조차 향에겐 노랫소리 같았다.

향의 눈에 댕기를 맨 여염집 처자 둘이 꽃신을 들고 어떤 게 예쁜지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꽃신에 눈길이 닿았다. 단진의 맨발이 떠올랐다. 박 내관이 슬쩍 꽃신을 가리고 서서 딴청을 부렸다.

향이 걸어가는데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궁둥이도 두 짝이고, 짚신도 짝이 있고, 계집 저고리 풀 때 치마도 풀어야 맛이고, 바늘 가는데 실 가고, 붓 가는 길에. 요놈이 빠지면 서운하죠 나으리!”

상인의 입담에 사대부가 사내는 다 달라고 했다. 상인은 신이 나서 물건을 쌌다.

향이 미소 지었다.


도화 백겸 창이가 터덕터덕 장터로 걸어왔다. 이제껏 김종서 집 근처에 숨어 인옥이 나오기만을 기다렸지만 헛수고였다. 도화가 인옥과 만나던 그 별채에는 김종서가 데려온 야인들이 기거했다. 백겸과 창이는 야인들의 ‘야’ 자만 들어도 지겨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창이의 부족은 조선에 적대적이기에 그들이 한양에 왔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백겸과 창이가 담장 너머로 용무용과 승무를 봤을 때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이미 야인의 복색이 아닌 조선인의 옷을 입고 있었고 살펴볼 여유도 없었다. 관군이 나타나는 바람에 바로 자리를 떠야 했다.

도화는 조금 더 기다려보려 했지만 창이가 돌아가자고 재촉했다. 창이는 단진이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결국 상의 끝에 내일 다시 오기로 결론을 내렸다.

셋은 서둘러 국밥집으로 돌아가기로 했지만 장터에 들어서며 걸음이 느려졌다.

도화는 인옥이 김종서 이야기를 하지 않아 일이 틀어졌기에 아직도 화가 났다. 내일 어떻게 인옥을 빼내야 하나 생각에 빠져 있었다.

백겸은 한양 장터 곳곳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버지가 만든 세트장에 와 있는 듯 했지만 달랐다. 이곳은 살아 있었다. 물건을 파는 상인들은 같은 듯 보였지만 다 달랐다. 비단을 파는 상인과 단검을 파는 상인의 표정이 달랐다. 오가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겸은 물건 하나하나, 사람들의 표정 하나하나를 눈에 담았다.

창이는 단진에게 빨리 가야한다는 생각에 서둘렀지만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단진에게 전해주지 못한 목걸이가 생각났다. 단진에게 선물을 하지 못하고 온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여인들의 장신구와 가락지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백겸의 시선에 한 사내가 들어왔다. 사람들 틈에 키가 큰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백겸은 저도 모르게 멈춰섰다. 멀리서 봐도 기품 있고 위엄이 있었다. 광채가 난다는 게 이런 것일까 싶었다. 무엇보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었다.

창이가 멍하니 서 있는 백겸을 보았다. 창이가 백겸의 시선을 따라갔다. 은색 상투관에 비녀를 꽂고 남색 답호를 입은 한 사내가 걸어왔다. 아름다웠다. 반듯하고 압도적인 강한 아름다움이었다. 남자인 자신이 봐도 반할만큼 매력적인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너무도 완벽해 진짜 사람인가 싶었다. 창이 역시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도화는 인옥의 집 가노를 매수할 방법을 찾기로 했다. 서둘러 가려는데 백겸과 창이가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빨리 가자고 재촉하려다 그들이 보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향이 걸어오고 있었다.

도화가 향에게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문종이야! 세자 이향!”

백겸과 창이가 놀란 듯 도화를 보더니 향에게 시선을 돌렸다. 백겸과 창이는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단종의 유배지에서 봄이 문종의 어진을 보고 있었다.

준과 태희 여름이 열린 문으로 문종의 어진을 보았다.

준이 말했다.

“문종이 잘 생기긴 했다, 남자인 내가 봐도.”

태희가 말을 이었다.

“중국 사신들도 인정한 외모라잖아. 아름다운 세자.”

여름이 문종의 어진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면 문종은 살았을 때 다 가졌어. 성군인 부친, 인자한 모친, 왕세자로 인정받고, 학자들도 인정한 학식에, 훌륭한 인품에, 무예도 뛰어났고, 체격도 좋았고, 잘 생기기까지 했으니...안타깝다. 오래 사셨다면 성군이 되셨을 텐데.”

준이 말했다.

“성군이 될 자질이 있으니까 일찍 돌아가신 거지, 원칙주의자에 철저하니까, 에너지를 올인한 거지. 혼자 사랑을 독차지하고, 너무 많은 걸 가져서 비극이 왔는지도 몰라.”

태희가 말했다.

“조선 금수저한테 질투하는 걸로 들린다. 문종도 못 가진 거 있어!”

여름이 대답했다.

“여복이 없지.”

태희가 이어갔다.

“두 명의 세자빈이 폐서인되고, 세 번째 세자빈이 단종을 낳은 후 죽고, 그 이후로 없어. 어떤 여자도.”

준이 말했다.

“왜 문종은 다시 세자빈을 들이지 않았을까? 왜? 여자에 관한 어떤 기록도 없어. 왜지?”

여름이 말했다.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가서 물어봐!”

“오케이, 가서 물어볼게.”

준이 여름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말을 덧붙였다.

“같이 가자!”


문종의 어진이 다가왔다. 가까워질수록 시간은 점점 거슬러 올라갔다.


세자 향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백겸과 창이의 눈에 보이는 건 그들을 향해 걸어오는 세자 향이었다.

백겸은 가슴이 들썩이고 몸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왕을 처음 봐서 그런 건지 향의 위엄에 압도당해 그런 건지 심장이 거침없이 뛰었다.

창이는 입안이 바싹 마르고 몸이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삽시간에 피가 다 빠져나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현기증이 일었다. 벅참인지 불안감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심장이 더욱 맹렬히 뛰기 시작했다.

도화는 경복궁 앞에서 진양과 안평이 향에게 충성 맹세를 할 때 지켜보았다. 칼보다 강한, 향의 미소가 떠올라 가슴이 뛰었다.

향이 가까워졌다.

백겸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창이는 숨이 막힐 것 같았고 도화는 두려웠다.

향의 눈길이 그들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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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원 홍씨 38. 운명적인 만남 +2 20.07.16 2,499 1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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