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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연재수 :
9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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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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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10.2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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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숙원 홍씨 65. 단진, 한양 기방에 들다

DUMMY

숙원 홍씨 65. 단진, 한양 기방에 들다


“봄아!”

“준아!”

창이는 믿을 수가 없었다. 창이의 눈앞에 단진이 있었다. 창이의 세상이 눈앞에 있었다. 창이가 단진의 작은 품에 안겼다. 단진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고 단진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창이는 시간이 이대로 멈춘다면 더는 바랄 게 없었다.

창이가 너무 꽉 안아서인지 단진이 꿈틀댔다. 창이가 팔에서 힘을 풀자 단진이 고개 들어 창이를 보았다. 단진이 햇살처럼 웃었다.

“준아! 잘 지낸 것이냐?”

“예 마마. 잘 지냈습니다. 어찌 기별도 없이 오셨습니까?”

단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단진은 창이의 뺨에 난 흉터를 손으로 만졌다.

“이게 무엇이냐? 다친 것이냐? 어쩌다 다친 것이냐?”

“여름이가 고양이처럼 할퀴었습니다. 허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단진이 웃었다. 단진은 무뚝뚝하게 서 있는 백겸을 보았다. 백겸은 단진을 보고 있을 뿐 말이 없었다.

창이는 단진을 보느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진은 오랜만에 백겸과 도화, 창이를 보고 있으니 너무 좋아 입이 귀에 걸려있었다.

“백주대낮에 언제까지 붙어 있을 것이오? 열매바위, 이년 참으로 보기 난감하오!”

속이 훤히 보이는 저고리를 입고 있는 월이 쏘아붙였다.

단진은 그제야 월과 초련, 빙 둘러 있는 많은 기녀들을 보았다.

월은 부채를 탁 접으며 말했다.

“복숭아 같이 생긴 애기씨는 대체 누구길래 열매바위 품에서 떨어지질 않는 것이오?”

단진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해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창이는 단진을 놓아주지 않았고 눈길을 떼지도 않았다. 창이는 단진을 보며 웃고 만 있었다. 보다 못한 도화가 창이의 팔을 떼어냈다.

공두는 한쪽 다리를 마루에 올린 채 볼썽사나워 보이는데 전념을 다했고 인옥은 쓰개치마가 벗겨진 것도 모르고 기녀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도화가 뭐라고 하려는데 연월이 설화와 함께 왔다. 이른 시각이었으나 연월은 붉은 꽃이 수놓아진 저고리에 화려한 장신구를 했고 치장에 빈틈이 없었다.

“궁에서 내금위장이 오셨다니? 무슨 일로 오신 것이냐?”

도화는 공두를 걷어차고 싶었다. 공두가 기방 입구에서 ‘내금위장이 납시셨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모양이었다. 해서 기녀들이 나와 그들을 도화 처소로 데리고 왔다. 월이 이 소식을 듣고 기녀들을 몰고 와서 기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세 사람을 구경하고 있었다.

도화가 서둘러 말했다.

“행수님. 내금위장이 아닙니다. 장난을 친 것입니다.”

연월은 혹시라도 백겸과 창이가 사고를 친 건 아닌가 싶어 서둘러 왔다. 연월에게는 무예시합에서 우승한 창이와 백겸이 기방에 있는 건 뜻밖의 수확이었다. 허나 득이 되는 만큼 위험부담도 안아야 했다.

연월은 내금위장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공두를 보고, 귀한 댁 마님인 인옥을 보고 단진에게 눈길을 돌렸다.

연월이 단진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다가갔다.

“이곳에 올 분들이 아닌 것 같은데, 이 기방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단진이 방끗 웃었다.

“행수 어르신이시지요? 말씀 놓으시지요! 저희는 도화의 벗입니다. 또한.”

단진이 백겸을 힐끗 보고 말했다.

“저는, 제 오라버니와 벗이 이곳에 있어 잠시 얼굴을 보러 왔습니다.”

연월은 백겸을 보았다. 백겸의 얼굴이 단진의 얼굴에도 있었다.

연월은 기방 행수의 눈으로 단진을 살폈다. 순한 눈에 눈빛은 강하고 하얀 피부에 얼굴선과 귓불에서 목선까지 선이 곱고, 이목구비는 조화를 이뤘다. 맑은 눈에 적당히 솟은 코에 적당히 도톰한 입술. 단정했다. 허나 입술에서도 눈빛에서도 웃음에서도 어느 곳에서도 여인의 교태는 없고 천진스러웠다. 저런 얼굴 하나가 기방에 있다면 기방 문턱에 불이 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사내란 본디 교태가 흐르는 여인보다 단아하고 천진한 여인에게서 교태를 끌어내는 걸 즐기는 존재였다.

탐이 났다. 문득 진양이 떠올랐다.

저런 얼굴이라면 콧대 높은 진양은 물론이고 기녀들을 우습게 아는 자들을 발아래 꿇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허나 눈빛의 결기를 보니 그럴 일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해서 더 탐이 났다. 너무도 탐이 났지만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연월은 아쉬운 듯 얕게 숨을 내쉬었다. 연월의 마음을 다 읽고 있다는 듯이 설화가 웃었다.

연월의 눈에 창이가 들어왔다.

바위 같은 사내의 달뜬 심장소리가 느껴졌다. 바위 같은 사내가 웃고 있었다. 바위 같은 사내를 뚫은 것인가, 저 천진함이 사내의 마음을 바위로 만든 것인가. 연월은 그제야 창이가 어제 진양에게 맞선 연유를 알 수 있었다.

연월이 도화를 보며 말했다.

“귀한 손님들이니 안으로 모셔야 하지 않느냐? 행여나 남들 눈에 띄어 좋을 게 없다! 귀한 물건은 누구나 탐을 내지 않더냐!”

연월이 창이에게 시선을 두며 말을 이었다.

“꽁꽁 숨겨두어야지! 그런다 해도 빛은 새어나가겠지만.”

연월이 단진을 보았다.

“언제든 놀러 오십시오!”

단진이 활짝 웃었다.

“예 행수 어르신. 저희 도화와 오라버니와 벗을 잘 부탁드립니다.”

단진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야! 나원빈! 너 미쳤어? 그냥 밖에서 기다리지! 마님과 궁녀를 기방에 데리고 오면서 내금위장이 왔다고 소리를 질러?”

도화 처소에 들어온 내내 인옥은 도화가 무서워 단진의 옆에 꼭 붙어 있었다. 단진은 도화의 잔소리조차도 너무 반가웠다. 창이는 단진의 앞에 앉아 웃고 있고 백겸은 단진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도화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어 앉지도 않고 서 있었다. 어젯밤엔 창이가 진양과 맞서질 않나 백겸은 술에 취해 큰소리로 나비문신에 대해 떠들지 않나, 오늘은 마님에 궁녀에 내금위장이라고 소리까지 지르고 나타났다.

점입가경이었다.

“제정신이냐고? 마님이랑 나인이 기방에 왜 와?”

단진이 배시시 웃었다.

“태희야! 화내지 마! 화낸다고 우리가 들어온 게 바뀌는 건 아니잖아. 다신 안 올게! 너희들 사는 거 보고 싶어서 온 거야! 너희들이 나에게 올 수는 없으니까!”

창이가 단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역시 우리 봄이 똑똑해! 이미 일어난 일은 화낸다고 바뀌지 않아!”

도화가 싸늘히 창이를 보았다.

공두는 병풍 앞 비단 보료에 앉아 장침에 팔을 기대고 앉아 대감처럼 행세했다.

“무얼 하는 것이냐? 내금위장님께서 오셨는데, 출출하구나. 먹을 걸 가져오거라. 이 귀하신 분께서 닭을 끌고 오느라 아주 고단하다. 뿐이냐? 저 닭이 제 친구 닭을 닭장에서 몰래 빼내오느라 아주 힘들었다.”

도화는 그제야 인옥을 보았다.

“너 설마...담 넘어 도망친 건 아니지?”

인옥이 단진의 뒤로 숨었다.

도화가 팽 돌아 소리치려는데 백겸이 벌떡 일어섰다.

“서봄! 일어나! 궁으로 들어가!”

단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오늘 첫 휴가야! 저하께서 우리에게 휴가 주신 거야! 진짜야!”

백겸은 싸늘했다.

“더 사고치지 말고 궁으로 들어가! 그리고 당분간 궁 밖에 나오지 마!”

공두가 벌떡 일어나 지랄지랄 했다.

“야! 서여름,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궁팀 브레인은 나야! 닭 담당은 나라고! 그리고 우리 오늘 진짜 놀러 나왔어. 아직 시작도 안했어! 너는 이렇게 좋은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아주 좋아 죽지! 나는 저 닭 때문에. 저 닭이 시도 때도 없이 저하 스토커 짓 하는 바람에 똥 쌀 시간도 없어!”

창이가 단진을 보았다.

공두가 단진의 흉내를 냈다.

“저하. 산책을 하셔야 하옵니다. 쩌하. 쩌하. 쩌하 아니 되옵니다. 쩌하. 쩌하. 소인이 없어도 되겠습니까? 오죽 오죽~ 꼴 보기 싫으셨으면 밖으로 내보냈을까? 지난번에는 저하께서 참다 참다 저 닭 꼴 보기 싫어서 눈을 가렸어! 저 닭이 하도 저하를 노려봐서. 우리 지금 들어가면 저하 기절하신다. 난 죽어도 그냥은 못 들어가!”

공두가 갓을 풀어 던지듯이 놓고 배 째라는 듯이 보료 위에 드러누웠다. 단진도 백겸의 시선을 피해 딴청을 부렸다.

백겸은 당장이라도 단진을 잡아 끌어낼 기세였다. 창이가 일어났다.


창이가 도화와 함께 백겸을 데리고 마당으로 나왔다.

백겸은 나비문신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상황에 단진을 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었다. 백겸은 단진을 궁으로 들여보내야 했다.

창이는 얼마 만에 만났는데 이렇게 단진일 들여보낼 수는 없었다. 창이는 단진일 지킬 수 있었다.

그들은 잠시 있었다.

도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들어가란다고 가겠어?”

백겸이 말했다.

“밖에 나가게 할 수는 없어!”

창이가 말했다.

“나비문신이 노리는 건 우리야. 우리가 떨어져서 걸으면 돼!”

백겸은 싸늘했다.

“나비문신이 그 정도로 허술할 것 같아?”

백겸이 도화를 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지내면 너도 위험해! 우리가 나가야 돼!”

도화가 성질을 냈다.

“헛소리하지 마! 내 눈 앞에 있어! 이곳만큼 안전한 곳은 없어. 그리고 나비문신은.”

“나비문신이 뭐야?”

단진이 마루에 나와 있었다.

도화가 짜증을 냈다.

“너는 알 거 없어. 안으로 들어가 있어!”

창이가 단진에게 다가갔다. 창이가 윗옷을 젖혀 어깨의 문신을 보여주었다.

“내 어깨에 나비문신이 있어. 그 얘기 하고 있었어! 별 거 아니니까 들어가 있어!”

단진은 창이의 나비문신을 보았다. 그러다 창이의 몸에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와 살피려는데 창이가 서둘러 옷을 입고 웃었다.

도화가 단진을 보고 있는데 몸종 년이가 왔다.

“아씨, 삼년이란 노비가 찾아왔어요!”

도화는 눈치 없는 놈이라고 속으로 욕을 해댔다. 창이가 잽싸게 단진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마마는 안에 계세요. 이따 놀아야 하지 않습니까!”


삼년은 겁에 질려 나무 뒤에 숨어 있었다. 기방에 누가 들어간 지 봤기에 생각 같아서는 도망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시간이 없었다. 모든 걸 오늘 해결해야 했다.

백겸과 도화, 창이가 기방에서 나오자 삼년이 튀어나가듯 다가갔다.

도화가 싸늘히 말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보고해야지. 도성에서 있던 일을 보고하는 게 내 일이잖아! 진양이 왈패들과 부부 죽인 놈들 잡겠다고 다니고 있어. 그런데 수레를 끌던 나를 찾고 있대.”

백겸과 도화, 창이는 심드렁했다. 그들은 지금 단진을 생각하고 있었다.

도화가 말했다.

“넌 주막에 가 있어. 오늘은 오지 마!”

삼년이 퉁명스레 말했다.

“서봄 있어서?”

“봤어?”

삼년이 백겸을 보며 말했다.

“봤어! 서봄 왔으니까 잘됐네. 다들 모여서 집에 갈 의논해야지. 서봄한테 나도 이제부터 함께라고 얘기해야지!”

창이가 딱 잘랐다.

“넌 봄이 앞에 나타나지 마!”

삼년이 불만스레 말했다.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른 게 사람이라지만, 너무하는 거 아냐? 내가 너희들 힘들 때 구해줬잖아. 벌써 잊었어?”

창이가 싸늘히 말했다.

“너도 잊었어? 네가 멍청한 짓 해서 왈패 열둘에 부부 둘에, 열넷이 죽었어! 거기다...”

창이는 삼년이 때문에 단진이 궁에 들어간 걸 떠올리자 치밀었다.


꽃비가 흩날리고 단진이 이향을 바라보며 걸어가고 있었다.


창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찌해서인지 그날은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가 않았다.

삼년이 창이를 째려보았다.

“너희들 때문에 나는 지금 쫓기는 신세야! 한성부 앞에서 너희들이 만난 그놈, 그놈이 나를 두 번이나 쫓아왔어. 그놈이 내가 수레를 끌었다는 걸 알아. 나는 이제 그놈한테 쫓기고 진양에게까지 쫓기게 됐어. 너희들을 위해서라도 나를 보호해줘야지. 안 그래?”

창이는 차가웠다.

“그냥 가서 말해! 내가 그랬다고!

“난 여기 있다가 서봄 만날 거야. 그리고 이제 함께라고 이야기할 거야! 싫든 좋든 한배를 탔어!”

창이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봄이 앞에 나타나면 넌 나한테 죽어!”

백겸이 창이를 말렸다.

“준아, 들어가 있어!”

창이가 삼년을 노려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백겸이 삼년을 보았다.

“야, 이재열! 상황 봐가며 떠들어. 나중에 와!”

“이재열이라고 부르지 마. 이재열은 이런 수모를 참을 수 없으니까.”

삼년의 눈에 독기가 서려있었다. 백겸은 삼년이 멍청한 척 행동하지만 약삭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백겸은 삼년을 좋아하지 않지만 필요했다. 다른 건 몰라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모든 사람이 다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삼년이 다시 저자세로 말했다.

“나는 삼년이야. 그렇게 불러줘! 그리고 서봄 나왔잖아. 서봄이 나 싫어하는 거 알아. 하지만 우리 집에 가야지. 서봄 언제 또다시 나올지 모르잖아. 다 모여서 의논해야지. 자객이고 뭐고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면 다 상관없는 거잖아!”

삼년은 물고 늘어져야 했다. 단진이 때문에 이들에게서 버려질 수는 없었다. 또한 지금 삼년은 들창코 왈패들에게도 쫓기고 있었다. 소식통에 의하면 들창코 왈패가 삼년을 잡아 손과 발을 자르겠다고 찾고 있다고 했다. 삼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단진과 담판을 짓고 백겸과 창이의 도움으로 들창코 왈패들에게서 벗어나야 했다.

백겸과 도화는 나비문신에 급급해 잠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을 잊고 있었다.

삼년이 말했다.

“우리가 다 한 자리에 모여야 돼. 우리가 역사를 바꿔야 하지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 갑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잖아.”

삼년은 교활했다. 백겸과 도화가 가장 원하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내 말 다 안 믿는 거 알아. 그러니까 오늘 서봄을 꼭 만나야 돼. 서봄은 혁이 마지막에 같이 있었잖아. 혁이에게 무슨 말을 들었을 거야. 그래야 너희들이 적극적으로 집에 돌아가는 길을 찾을 거 아냐!”

도화가 말했다.

“얘 말이 다 틀리다고 할 수 없어. 서봄 언제 또 나올지 알 수 없으니까. 다 모여서 이곳에 올 때 이상했던 일들을 조합해 봐야 할 거 같아.”

삼년이 백겸을 보았다.

“너희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걸 알아. 하지만 난 너희들에게 필요한 존재야! 난 정보도 빨라! 지금 이 안에 서봄만 있는 게 아니야!”

백겸과 도화는 무슨 소린가 싶었다.

삼년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기방 입구를 힐끗 보고 말했다.

“이 안에 진양이 와 있어! 내가 들어가는 거 봤어! 서봄 들어가고 나서 바로 들어갔어! 두 사람이 마주칠 뻔했다니까!”

백겸과 도화가 놀라서 보았다.

삼년이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생각 같아서는 도망가고 싶었지만 우리는 한배를 탔잖아. 내가 도와야지! 그리고 내가 깜박 잊고 말 안한 게 있어. 서봄과 진양에 관한 거야!”

백겸이 보았다.


창이가 방으로 들어와 보니 모두가 잠이 들어 있었다. 단진과 인옥은 바닥에 누워 손을 꼭 잡고 마주본 채로, 공두는 보료 위에서 한쪽 다리를 탁자에 올려놓고 자고 있었다.

창이는 이부자리를 펴고 인옥을 눕혔다. 창이가 단진을 조심스레 안아 인옥의 곁에 눕혔다.

창이는 단진의 자는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조선에 와서 처음 단진을 만난 날이 떠올랐다. 단진을 업고 걸어오며, 단진과 함께 봄을 맞고 여름을 맞고 가을을 겨울을 나는 달콤한 꿈을 꾸던 시간이 떠올랐다. 잠이 깨서 등 뒤에서 꼼지락거리던 단진이 떠올랐다. 국밥집 방안에 단진을 눕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단진을 두고 가는 게 아니었다. 창이는 조선에 와서 하는 일이라고는 후회뿐이었다. 어찌해서 날마다 매 순간 후회를 해야 할까. 후회한다 해서 바뀌는 건 없지만 후회마저 하지 않는다면 견딜 수 없는 것일까.

가장 후회가 되는 건...

단진의 얼굴에 햇살이 비추었다. 단진이 찡그렸다. 창이는 행여나 단진이 깰까 싶어 손으로 햇살을 막았다.

창이의 그늘 아래서 단진이 이렇게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하게 하고 싶었다. 아니 단진이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단진이 있어야만 창이는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창이는 단진을 보며 또다시 다짐했다.

집에 가자. 함께 집에 가자.

문이 열리고 도화가 들어왔다. 도화가 들어오다 창이를 보았다. 백겸은 들어와 단진을 보았다. 백겸의 눈길이 창이의 손에 닿았지만 잠시였다.

도화가 창의 붉은 천을 내렸다. 햇살이 가려지자 창이가 손을 내렸다.

창이는 여전히 단진에게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모두 고단했나봐. 자는 모습 보면 애처롭다더니, 원빈이 저 자식도 자는 거 보니까 궁 생활이 힘들었는지 짠하네. 놀러 나와서 잘 놈이 아닌데.”

창이가 단진의 옆에 누워 눈을 감았다. 단진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도화와 백겸은 서로를 보았다. 이들이 자고 있는 게 고마웠다. 창이에겐 지금 진양이 행수 연월을 만나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기로 무언의 합의를 했다.

도화는 아마도 진양이 백겸과 창이에 대해 물어보러 온 거라 여겼다.

이젠 진양까지 나타났다. 도화는 단진이 궁에 들어갈 때까지 무슨 일이 더 일어날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화는 진양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갔다.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옅은 숨소리만 들리는 평화로움 속에서 백겸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백겸은 입안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백겸이 단진의 머리맡에 앉았다. 단진을 살폈다. 살이 빠져 수척해진 것 같았다.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단진의 손을 보았다. 상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아버지가 보면 속상해 하겠다는 생각이 바람처럼 불어왔다.

백겸은 단진이 잠이 깨지 않게 조심스레 손을 이불 속에 넣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백겸은 단진을 보면 속이 끓어오르면서도 안쓰러웠다. 단진이 문종 때문에 밖에서 밤을 지새우고 앞으로 문종 때문에 무슨 짓을 할지를 생각하면 불안했다.

단진으로 인해 문종이 마음을 움직인 게 두려웠다.

거기다 진양까지.

조금 전 삼년이 한 말을 떠올렸다. 지난번 단진이 궁 밖으로 나왔을 때 진양을 만나 죽이겠다고 했다고 했다. 백겸은 단진이 피비린내 나는 역사 속에 빨려 들어가는 걸 지켜만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무슨 방법을 써서든 단진을 집으로 데리고 가야 했다.

백겸은 단진을 물끄러미 보았다.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자리를 바꾸고 있었다.

백겸과 도화도 피곤해서인지 모두가 함께 있어서인지 깜박 잠이 들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악!!!”

공두는 눈을 뜨자마자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모처럼의 휴가인데 깨우지 않았다고 지랄지랄 하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유시까지 가려면 빨리 놀아야 돼!”

운종가에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단진과 공두, 인옥은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공두는 자고 일어나더니 유시 전까지 오라는 소리를 유시까지로 바꿔 기억했고 단진도 그런 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입궐 시각이 오후 5시에서 7시로 바뀌었다.

고운 한복을 입은 여인들끼리 노리개를 대보며 좋아하고, 꽃신을 구경하는 애기씨들이 있었다. 단진과 인옥은 노리개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어 쓰개치마를 그곳에 올려두고 그냥 왔다.

인옥은 단진과 함께 이 길을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 죽을 것 같았다.

인옥이 말했다.

“봄아. 너랑 가려고 알아둔 곳이 있어. 진짜 예쁜 천들을 많이 팔아! 봄아! 그거 아니? 나 옷 만드는 재주가 있더라고. 내가 예쁜 옷 만들어 줄게! 저거 봐!”

인옥은 신이 나서 단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상점 좌판의 예쁜 장신구를 보고 인옥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옥이 꽃모양의 장신구를 단진의 머리에 대보며 예쁘다고 좋아했다. 단진이 웃었다.

단진이 돌아보았다. 노란 꽃이 그려진 전모를 쓴 화려한 기녀 도화와 키가 큰 검은 복색의 무사 백겸과 창이가 보였다. 단진은 그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가슴이 아려왔다. 단진의 시선이 장검에 머물렀다. 창이가 멋있어 보이려고 들고 나가는 거라고 할 때 단진은 더는 묻지 않았다.

단진이 도화와 눈이 마주치자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도화는 냉랭했다. 도화의 팔에 단진과 인옥의 쓰개치마가 있었다.

단진은 깜박 잊은 게 생각나서 후다닥 백겸과 창이에게 달려갔다. 단진은 도화에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그들을 데리고 갔다.

백겸은 바짝 긴장해서 주변을 살폈다. 단진이 옷섶에서 돈 주머니 두 개를 꺼냈다. 분홍색과 파란색으로 만든 돈 주머니였다. 들어있는 돈이 얼마 없어 홀쭉했다.

단진은 돈 주머니를 백겸과 창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월급 받았어!”

백겸은 주변을 살피느라 무엇이 손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단진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똑같이 나눴어! 이걸로 먹고 싶은 거 사먹고 태희 선물 사줘! 태희한테 너무 고맙잖아! 알았지? 얼마 안 되니까 아끼지 말고 써! 또 벌어다 줄게!”

창이는 단진의 맑은 눈을 보았다. 창이는 단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분홍색 돈 주머니를 단진의 손에 쥐여 주었다.

“나 돈 많아! 내가 줄게!”

“그럼 돈 없는 내가 가질게!”

언제 왔는지 공두가 잽싸게 돈 주머니를 열어 돈을 꺼내 갖고는 돈 주머니만 창이의 손에 놓고 후다닥 달려갔다.

“야! 나원빈! 안돼에!”

단진이 공두를 쫓아갔다.

창이는 단진을 보며 미소 짓고 있고 백겸은 여전히 손에 뭘 들고 있는지도 모른 채 오가는 사람들을 살폈다.

창이가 걸어가다가 단진이 조금 전까지 구경하던 장신구에 시선이 갔다.

단진과 인옥은 포목점 쪽으로 걸어갔다. 단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에 흐리고 짙은 연분홍과 다홍색 얇은 천들이 걸려서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맑디 맑은 하늘 아래 색색의 천들이 휘날리고 있었다.

천이 사람들의 얼굴에 손에 닿았기에 굳이 만져보지 않아도 얼마나 질이 좋은지 알 수 있었다. 단진과 인옥은 휘날리는 천에 얼굴을 대보며 좋아했다.

마치 손에 잡히는 바람 같았다.

어디선가 신명나는 장구 소리가 들려왔다.

공두는 아까 사온 인절미를 입 안 가득 넣고 오물거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공두가 볼썽사납게 흔들어 대서 단진과 인옥은 찌푸렸지만 곧 웃음으로 바뀌었다. 공두는 천을 젖히고 춤을 추며 앞으로 나아갔다. 한 아이가 공두를 따라 춤을 추었다.

단진도 흥이 나서 팔을 들고 나폴 나폴 흔들었다.

창이가 먼발치에서 웃고 있었다. 단진이 창이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연분홍 사이로 햇살처럼 웃고 있는 단진이 보였다. 단진이 사라졌다 보였다 했다. 창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진양은 기방 행수 연월을 만나 백겸과 창이에 대해 물었다. 백겸과 창이에 대한 정보보다 행수 연월의 눈빛을 보고 싶었다. 연월은 누구보다 사람 보는 눈이 정확했다. 연월은 백겸과 창이가 함길도에서 왔다는 말만을 해줬을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연월의 눈은 그들을 믿어도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진양은 백겸과 창이에 대해선 그들에게 직접 물어볼 생각이었다. 또한 진양은 다른 사실 하나를 알아내 흥분해 있었다. 순포에게 나비문신이 있었다.

이로써 진양은 백겸과 창이의 기억을 찾아내 순포의 조직을 알아내면 되는 일이었다.

무사복에 보석이 박힌 상투관을 쓴 진양이 김가, 은가와 함께 운종가로 들어섰다.

진양은 머리가 복잡하거나 생각을 정리할 때면 늘 운종가를 걸었다. 북적거리는 인파 속에서 생각을 반복해서 하면 가장 중요한 핵심이 남았다.

진양은 또다시 백겸과 창이 생각을 했다.

이상한 건 그놈들이 같이 사는 도화란 기녀도 역병을 앓고 일어났다고 했다. 연월의 말에 의하면 역병을 앓고 난 사람들끼리는 통하는 게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여겼지만 말이 된다고 해야 믿어지는 일도 있었다.

진양은 문득 단진이 떠올랐다. 단진이 역병을 앓고 일어나 기억을 잃었다고 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진양을 재밌게 하고 흥미를 유발하는 자들이 죄다 역병을 앓고 일어났다. 진양은 웃었다.

진양의 웃음 끝이 쓸쓸했다.

갑자기 그 작은 계집이 보고 싶었다.

자신에게 꼬마라며 기다리라고 하던 독기 가득한 눈길이 보고 싶었다.

멀어지던 그 모습이 작은 들꽃 같던 그놈이 보고 싶었다.

그때였다.

바람이 불었다. 연분홍 천들이 휘날렸다. 그 사이로 하얀 저고리에 하늘색 치마를 입은 단진이 있었다. 연분홍 천들이 휘날릴 때마다 구름처럼 단진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오늘은 사내가 아닌 계집이었다. 고운 얼굴에 댕기를 드린 계집이었다.

단진이 활짝 웃으며 팔을 나폴 나폴 흔들었다.

진양이 천을 손으로 젖히고 한 걸음 다가갔다. 단진이 가까워졌다.

진양이 또다시 천을 손으로 젖히고 한 걸음 다가갔다. 손에 닿는 천이 부드러웠다. 선이 고운 저 계집의 얼굴에 닿을 때 같았다. 들꽃 같은 저 계집 뺨의 감촉 같았다. 그 짜릿함에 가슴에 전율이 일었다.

진양이 천을 젖히고 다가갔다.

독기 가득했던 눈은 햇살을 품은 듯 따뜻했다.

처음 보는 단진의 웃는 얼굴에 진양은 처음으로 가슴이 뛰었다.

두근 두근 두근.

단진의 활짝 웃는 얼굴에 햇살이 눈이 부시게 반짝였다.

진양이 멈춰섰다.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단진과 진양이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천이 나폴거렸다. 부드러움이 진양의 손에 얼굴에 마음에 닿았다.

단진이 활짝 웃으며 진양을 보았다.

진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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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

  • 작성자
    Lv.6 k1******..
    작성일
    20.10.26 11:05
    No. 1

    오늘도 잘읽었습니다 ^^

    찬성: 6 | 반대: 0

  • 작성자
    Lv.16 vo***
    작성일
    20.10.26 13:03
    No. 2

    작가님 글은 늘 읽다 보면 바로 소설 속 현장에 같이 있는 거 같아요. 힘내셔서 계속 잼나는 이야기 들려주세요~~

    찬성: 6 | 반대: 0

  • 작성자
    Lv.7 cr*****
    작성일
    20.10.26 16:51
    No. 3

    진짜 같이 두근두근했네요~~ 작가님 글은 정말 최고입니다!! 다음화도 기대할게요!!!

    찬성: 5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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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숙원 홍씨 45. 단진의 고백 +2 20.08.10 2,349 11 20쪽
44 숙원 홍씨 44. 홍단진, 주상전하를 만나다 +2 20.08.06 2,364 12 18쪽
43 숙원 홍씨 43. 백겸과 창이 한양 기방에 들다 +1 20.08.03 2,388 11 16쪽
42 숙원 홍씨 42. 비 오는 밤, 사라진 자들 +3 20.07.30 2,401 11 18쪽
41 숙원 홍씨 41. 이향의 마음 +3 20.07.27 2,427 1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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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숙원 홍씨 39. 이향, 김종서와 야인을 만나다 +2 20.07.20 2,464 11 19쪽
38 숙원 홍씨 38. 운명적인 만남 +2 20.07.16 2,498 1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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