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연재수 :
95 회
조회수 :
215,201
추천수 :
1,167
글자수 :
809,561

작성
20.10.22 11:00
조회
1,933
추천
11
글자
22쪽

숙원 홍씨 64. 단진, 궁 밖으로 나오다

DUMMY

숙원 홍씨 64. 단진, 궁 밖으로 나오다


단진이 향의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단진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계속 웃었고 그런 단진을 보며 향도 웃고 있었다.

햇살이 머문 듯 입가의 미소도 떠나질 않았다.

단진과 향은 서로를 보며 웃고 있었다.

흰 저고리에 하늘색 치마를 입은 단진과 용포를 입은 향에게 아침 햇살이 쏟아졌다.

단진의 입꼬리는 올라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단진이 웃음을 참아보려 입을 다물었지만 금세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단진의 웃음이 향에게도 닿아 향도 연신 웃고 있었다.

“궁 밖에 나가는 것이 그리도 좋으냐?”

“예 저하. 또한...이상하옵니다 저하.”

향이 보았다.

“이리 고운 옷을 입었더니 자꾸 웃음이 나옵니다. 마치 날개를 단 것 같사옵니다. 헌데 날개는 달았으나 날개가 다칠까봐 날기는커녕 오히려 천천히 걷게 되옵니다. 해서 자꾸 웃음이 나옵니다. 저를 위해 옷을 입은 것인데, 제가 옷을 모시고 다니게 생겼사옵니다.”

향이 웃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꾸만 웃음이 나옵니다.”

향이 물끄러미 보았다.

단진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단진은 수줍은 듯 쓰개치마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박 내관님이 지어주셨사옵니다. 동궁전 망신을 시키면 안 된다 하시며 이리도 좋은 옷을 지어주셨사옵니다.”

향이 단진을 보는 눈에 애틋함이 가득 찼다.

단진은 조금이라도 향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일찍부터 서둘렀다.

“저하. 소인이 마음이 급해 너무 일찍 왔사옵니다. 허니 저하께선 일을 하시고 소인은 잠시 여기 앉아있어도 되겠습니까?”

“그리하거라.”

단진은 향을 물끄러미 보았다.

동궁전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햇살이 향에게 머물렀다. 향의 기품 있는 얼굴에, 장계를 든 손에, 장계를 보고 있는 눈길에 햇살이 반짝였다. 햇살이 향의 깊은 눈동자를 따라 글을 읽어 내려갔다.

단진이 햇살이었다. 햇살이 되어 향과 함께 숨 쉬고 있었다.

단진의 입가에 또다른 미소가 걸렸다. 햇살이 쏟아지듯 단진의 마음에 향이 들어찼다.

향이 시선을 들었다. 단진이 향을 보고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은은한 눈길이 너무도 뜨거워 박 내관은 데일 것 같았다.


“저하. 다녀오겠사옵니다.”

동궁전 마당에 단진과 도포에 갓을 쓴 공두가 향에게 인사했다. 단진은 쓰개치마를 팔에 두르고 다소곳이 서 있고 공두는 파란색 비단 보자기를 안고 있었다.

향은 새 옷을 입고 아이처럼 좋아하는 단진을 보았다. 그러다 단진의 하늘색 치마 끝으로 보이는 검은 가죽신에 시선이 갔다.

향은 눈길을 거두고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조심해서 잘 다녀오도록 하거라.”

단진이 활짝 웃었다.

“예 저하.”

향이 단진을 보았다. 향을 보던 단진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

“저하. 소인이 없어도 오늘 하루 잘 보내셔야 하옵니다...”

향이 웃었다.

“그리도 내 걱정이 되더냐?”

향이 단진의 맑은 눈을 보았다.

“이리 생각하거라. 네가 궁 밖에 나가 나를 떠올리면 내가 잘 못 지내는 것이다. 네가 궁 밖에 나가 마음껏 웃고 즐기느라 궁을 잊어버린다면, 내가 잘 보내는 것이니, 나를 위해 그리하거라. 할 수 있겠느냐?”

단진은 향이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전해져 뭉클했다.

박 내관은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이는 연모하는 이들이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장면이었다.

정원의 잘 가꿔진 나무들도 두 사람을 보며 연모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박 내관은 한쪽에 서 있는 내관과 나인들을 쏘아보았다. 그들은 잽싸게 고개를 숙이고 아무것도 못 본 척 못 들은 척했지만 이미 궁 전체가 다 아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단진이 웃으며 말했다.

“예 저하. 그리하겠사옵니다. 또한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겠사옵니다.”

공두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멋진 척했다.

“저하. 내관 장공두, 저하의 명을 받고 신나게 놀다 오겠나이다. 소신, 저하에 대한 걱정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사오나. 소신, 저하의 명대로 오늘 하루, 궁도 잊어버리고 발길 닿는 대로 잘 놀다 오겠나이다. 심려치 마시옵소서.”

배시시 웃으며 들떠 있는 단진과 어디로 튈지 모를 공두를 보자 박 내관은 이건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만 심부름을 내보낸다는 건 자신의 발등을 인두로 지지는 격이었다.

박 내관이 서둘러 말했다.

“저하. 아무리 생각해도 둘만 보내는 게 너무도 걱정이 되옵니다. 해서 소인이 두 사람에게 당부할 말이 있사옵니다.”

때마침 단진이 해맑게 말했다.

“그리 걱정되시면 같이 가시겠습니까?”


단진이 쓰개치마로 얼굴을 푹 가리고 겨우 눈만 빼꼼 내민 채로 가고 있었다. 바로 옆에는 공두가 비단 보자기를 꼭 안고 있었다.

그들은 운종가로 들어섰다. 맑은 하늘에 뭉게구름이 떠다니고 이른 시각이었지만 운종가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상인들은 장사를 준비하느라 손님들을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장사 준비로 분주한 상인들과 지나치면서도 하나라도 더 구경하기 위해 눈길을 돌리는 행인들의 표정은 하늘만큼이나 밝았다.

허나 공두의 얼굴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단진이 서둘러 가다가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치마에 걸렸다. 그러자 공두가 단진의 팔을 잡아주는 척하면서 세게 꼬집었다.

단진은 소리도 못 지르고 쓰개치마를 열고 공두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공두가 쓰개치마 속으로 들어가라면서 꼬집었다. 단진이 열 받아서 한 걸음 다가갔다.

앞서 가던 박 내관이 돌아보았다. 단진은 잽싸게 쓰개치마 속으로 숨고 공두는 안고 있는 비단 보자기로 얼굴을 가렸다.

박 내관이 다시 앞서 걷자 공두는 단진을 몸으로 밀쳤다. 단진이 튕겨져 나가며 마주오던 아씨와 부딪쳤다. 단진이 고개 숙여 사과하고 다시 쪼르륵 제자리로 갔다.

단진과 공두는 궁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 계속해서 싸워대고 있었다. 단진은 처음 정식으로 궁을 나왔지만 그런 감상에 젖을 여유가 없었다. 공두가 단진을 어찌나 꼬집어 대는지 단진의 팔에 멍이 들 지경이었다.

단진도 박 내관이 진짜로 따라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박 내관의 동행이 반갑지 않았지만 지금은 공두 때문에 화가 나서 폭발 직전이었다. 단진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공두가 또다시 지랄지랄 했다.

“닭! 너 약 먹었어? 미친 거야? 같이 가시겠습니까? 너는 나를 고통 속에 몰아넣기 위해 태어난 게 분명해! 너 때문에 매일 같이 두들겨 맞고, 사지로 나만 몰아넣더니! 조선 닭대가리. 뱀 잡아먹은 닭대가리! 같이 가시겠습니까?”

공두가 쓰개치마를 위에서 들어 올려 단진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진이 쓰개치마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몸으로 공두를 탁 쳐냈다.

단진이 얼굴을 내밀고 애써 누르며 말했다.

“야! 나원빈, 그만해! 내가 일을 이 지경을 만든 게 아니고 나 때문에 네가 나온 게 먼저야. 그걸 생각해!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니었어도 박 내관님은 나왔어! 무슨 뜻인 줄 몰라? 것도 모르면서. 브레인? 너 브레인 하지 마!”

“네 이년! 네년이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공두가 단진의 팔을 힘껏 비틀었다. 단진은 너무 아파서 쓰개치마를 내리고 치마를 확 들고 공두를 퍽 걷어찼다.

공두는 너무 아파서 말도 못하고 폴짝폴짝 뛰었다.

단진이 공두에게 다가가 싸늘하게 말했다.

“여기까지야! 한 번만 더 이년 저년 해봐. 가만 안 둔다! 그리고 너 나 때문에 매 맞은 걸로 우려먹기 다 끝났어. 다 썼다고! 알았어? 나도 더는 안 참아!”

공두가 눈을 부라렸다. 당장이라도 비단 보자기를 던질 기세로 노려보았다.

“야! 닭! 네가 안 참으면 어쩔 건데?”

그때였다.

박 내관이 확 돌아봤다. 운종가 한복판에서 오가는 사람들이 보는 것도 모르고 단진과 공두가 쌈닭들처럼 싸워대고 있었다.

박 내관이 서슬 퍼런 눈으로 그들에게 걸어왔다. 단진은 쓰개치마 속으로 공두는 비단 보자기 속으로 숨었지만 소용없었다. 박 내관의 분노의 화살은 쓰개치마를 뚫고 비단 보자기를 뚫었다.

박 내관이 떡집을 돌아 골목으로 단진과 공두를 끌고 갔다. 공두는 그 와중에도 떡집에서 나는 구수한 냄새에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박 내관이 골목에 서서 그들을 노려보았다. 단진은 쓰개치마를 어깨에 내리고 양손을 모으고 다소곳이 있었다. 공두는 비단 보자기를 꼭 안고 눈치를 살폈다.

박 내관은 이것들을 못 믿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따라나선 게 아니었다. 저하께서 분부하신 명이 따로 있었기에 나온 것이다.

박 내관의 머리에서 펄펄 가마솥이 끓었다.

공두를 노려보던 박 내관의 시선이 단진을 향했다. 박 내관이 어찌나 부들부들 떠는지 단진은 한 걸음 물러섰다.

박 내관은 이것들이 이렇게 싸우는 것보다 이 못난이가 이토록 고와 보인다는 게 견딜 수가 없었다. 저하께서 단진을 바라보던 눈길이 떠오르자 당장이라도 요절을 내고 싶었다.

박 내관이 뒷목을 잡으며 혼잣말 했다.

“내가 내 발등을 인두로 지졌다. 동궁전 망신을 시키게 뒀어야 했다.”

박 내관이 손을 탁 내리고 단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형판대감 댁에 도착할 때까지 내가 한 번이라도 더 뒤를 돌아보게 되면, 너희들은 도성 구경은커녕 바로 궁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단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떻게 나온 궁 밖인데.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또한.”

박 내관이 공두를 노려보았다.

“네놈이 지은 죄는 죽음으로 물어 마땅하다. 허나 이제껏 봐준 것이다. 더는 봐줄

수가 없다. 내가 한 번만 더 뒤를 돌아보게 되면, 네놈은 내시부 규율에 따라 죽게 될 것이다.”

공두가 두려움에 질려 단진이 뒤로 숨었다.

단진이 쓰개치마를 폭 쓰고 자신 있게 말했다.

“박 내관님, 걱정 마십시오! 박 내관님께서 돌아보지 못하시도록 저희들이 앞장서겠습니다. 갑시다 장 내관!”

단진이 성큼성큼 가고 공두가 잽싸게 뒤를 따랐다.

박 내관의 머리에서 가마솥 뚜껑이 날아갔다.


박 내관과 단진, 공두가 김종서 집 앞에 도착했다. 박 내관은 집 앞 네 필의 말이 묶여 있는 걸 보았다. 젊은 가노가 말에게 물을 주고 있었다.

박 내관이 가노를 보며 물었다.

“안에 손님이 계시는가? 이 말은 다 무엇인가?”

가노가 박 내관에게 말했다.

“함길도에서 부장들이 오셨습니다. 또한 오늘 야인 중 한 명이 함길도로 돌아간다 합니다.”

박 내관은 단진과 공두를 보았다. 단진은 그새 쓰개치마를 내리고 두리번거리고 있고 공두는 말을 보며 입으로 ‘따그닥 따그닥’ 말 타는 흉내를 내고 있었다.

박 내관은 단진에게 시선이 갔다. 저하께서 단진일 내보낸 건 심부름이 목적이 아니었다. 도성 구경을 하게 하려는 뜻이었다. 괜히 단진일 사람들 앞에 세우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궁과 마찬가지로 궁 밖에도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았다.

박 내관은 결정했다.

“그만 돌아들 가거라.”

단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박 내관이 공두를 보며 말했다.

“저하께서 너희들에게 특별히 내리신 소중한 시간이다. 허니 잘 놀다들 오거라.”

박 내관이 공두에게 다가가 살벌하게 말했다.

“허나, 명심해야 할 것이다. 홍단진은 궁녀로서 처신을 잘못하면 네놈은 죽는다. 홍단진이 사고를 쳐도 네놈은 죽는다. 홍단진이 동궁전 망신을 시켜도 네놈은 죽는다. 홍단진에게서 삼보 이상 떨어져도 네놈은 죽는다. 홍단진이 제 시각에 궁에 들어오지 못해도 네놈은 죽는다. 유시 전까지 돌아와야 할 것이다.”

공두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 내관이 눈짓을 하자 공두가 비단 보자기를 내밀었다. 공두는 지금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박 내관이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단진이 다급히 말했다.

“저하의 심부름은요? 제가 직접 이 집에 들어가야 합니다.”

단진은 인옥을 못보고 그냥 갈 수는 없었다. 단진이 계단에 발을 올려놓자 박 내관이 싸늘히 말했다.

“허면 택하거라. 심부름을 하고 바로 궁으로 들어가던가, 아니면 이대로 가서 도성 구경을 하던가, 둘 중 택하거라.”

단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심부름을 하고 바로 궁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단진이 계단 하나를 올라갔다. 그때 공두가 단진을 잡아끌어 내렸다.

공두가 잽싸게 말했다.

“저희들은 유시 전까지 입궁하겠습니다!”

공두가 단진을 질질 끌다시피 데리고 갔다. 박 내관은 그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공두가 나무 아래로 단진을 끌고 왔다. 단진이 공두의 팔을 뿌리쳤다.

공두가 지랄지랄 했다.

“너 미쳤어? 어떻게 얻은 자유인데? 저 집 들어가 뭐하려고? 집 구경하게?”

“소이 봐야 할 거 아냐! 여기까지 왔는데 소이 안 만나고 그냥 가?”

“걔만 사람이야! 여름이도 있고 준이도 있고 왕태희도 있잖아! 특히 여름이, 네 혈육이야. 세상에 피보다 더 진한 게 뭐가 있어?”

단진이 김종서 집을 잠시 보고 차분히 말했다.

“나는 너랑 있고, 여름이는 준이 태희랑 있는데, 소이만 혼자잖아. 얼마나 힘들겠어! 그동안 안부도 못 전했는데. 소이 보고 가자. 응? 다음에 또 나올 수 있잖아!”

“야! 혼자라 얼마나 좋을지는 생각 못하냐? 너, 걔가 너 좋아하는 거 같지? 걔 너 되게 싫어해! 걔가 너 욕하고 다닌 거 너 몰랐지? 닭이랑 친구하는 게 좋겠어?”

단진은 단호했다.

“나는 소이 만날 거야! 너는 네 갈 길 가!”

“야!”

공두가 양손을 바르르 떨었다. 공두는 단진의 눈을 보는 순간 알았다. 절대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이다. 기절을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수도 없었다.

공두는 콧구멍을 벌렁거리고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소이만 보면 되는 거지?”

단진이 공두를 보았다.


용무용과 호와 결, 승무가 방에서 나왔다. 승무는 갓을 손에 들고 봇짐을 메고 있었다. 그들이 신발을 신는데 석이 별채로 뛰어 들어왔다.

석이 말했다.

“형님, 동궁전에서 사람이 나왔습니다.”

용무용이 보았다.

“무슨 일로 나왔느냐?”

“전하의 교지가 내려져 저희가 조선인이 되면 축하연회를 궁에서 준비하겠다고 합니다. 궁에서 술과 음식을 보내고 수라간 상궁들을 내보낼 거라 했습니다.”

“그게 다이더냐?”

“비단 보자기를 들고 김종서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에 무엇이 담긴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석의 눈길이 담장 쪽을 향했다. 용무용과 승무, 호와 결이 그곳을 보았다.

공두가 뒷짐을 진 채 보고 있었다. 단진은 쓰개치마를 쓰고 있었다.

단진이 속삭였다.

“진짜 너 아는 거 맞어?”

“어허, 브레인을 믿거라. 먼저 사과부터 하거라. 내가 브레인이 맞느냐? 아니냐?”

“브레인 맞아. 그런데 왜 안 와? 네가 여기 서 있으면 올 거라면서?”

공두와 단진은 용무용 일행을 보며 소곤거렸다.

공두가 빤히 보고 있었지만 용무용 일행은 담장 쪽으로 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공두가 큰 소리로 말했다.

“나를 모르는가? 무예시합장에서 보지 않았는가?”

석이 알아보고 용무용에게 말했다.

“그 이상한 내금위 별감 같습니다. 창이형님을 툭 치던 그놈 말입니다.”

용무용은 공두가 기억이 났다. 창이만큼 키가 커서 눈에 띄는 자였고 별감 옷을 입었으나 검을 잡는 자 같지 않아서 기억했다. 용무용은 공두를 힐끗 보고 그 옆에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단진을 잠시 보았다.

공두가 큰소리 쳤다.

“어허! 나를 보고도 가만있는가? 내가 무슨 일로 오셨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

그래도 그들은 움직임이 없었다.

공두가 말했다.

“무예시합장에서 우승한 놈을 내가 가르쳤네! 내 무릎 아래서 배운 놈이란 말일세, 그래도 내게 안 오는가? 이보시게!”

공두가 소리를 높여 “이보시게!” “날세!” 를 반복했다.

용무용과 승무, 호와 결, 석은 공두를 미친 놈 취급하고 그대로 별채 문으로 향했다. 용무용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싫은 얼굴 하나가 별채 안으로 쏙 들어왔다.

인옥이 배시시 웃었다.

“나가시면 오늘 마루에 앉아 있어도 되겠지요?”

용무용은 대꾸도 안하고 나갔다.

인옥이 마루에 걸터앉아 담장을 보았다. 오늘은 꼭 올까 하는 기대감보다 오늘도 아무도 오지 않을 거란 실망감이 먼저 찾아들자 인옥은 마음이 아팠다.

단진이 공두를 잡아끌고 담장 아래에 앉아 있었다.

“아예 박 내관님 나오라고 소리치지 그래! 브레인은 무슨!”

단진이 일어섰다. 공두는 단진이 집안으로 들어갈까 싶어 잽싸게 붙잡았다.

단진은 그대로 있었다.

단진의 눈에 반가운 얼굴이 들어왔다. 단진이 쓰개치마를 벗어 팔에 둘렀다.

인옥이 고개 숙인 채 손을 조물거리며 앉아 있었다.

인옥이 고개를 들었다. 인옥의 눈이 단진을 향했다. 인옥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인옥이 천천히 일어났다.

단진의 콧등이 시큰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매일 같이 문자하고 전화하고. 매일 같이 얼굴을 보던 단짝 친구였다. 매일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잠을 몇 시간을 잤는지 말하던 친구였다.

그런 친구를 만나러 오는 길이, 그런 친구를 보는 일이, 참으로 멀고도 험했고, 길고도 길었다.

길고도 긴 그 끝에 내 친구가 있으니 그걸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진이 양팔을 활짝 들었다.

“봄아!”

인옥이 달려와 담장에 붙어 단진의 손을 잡았다. 단진이 몸을 굽혀 인옥을 안아주었다. 인옥은 한참을 울었다. 단진의 눈에서 반가움이 흘러내렸다.


도화의 처소에 창이 활짝 열려 있고 백겸과 창이가 맨바닥에 누워 있었다. 어제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않아서인지 술 냄새가 진동을 한다고 도화가 창을 다 열어두었다.

창이와 백겸은 순포와 진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잠깐이었다. 머릿속에 의심과 이런저런 생각들이 줄지어 있었지만 정리할 정신이 없었다. 조금 전 해장을 하기 위해 국에 밥을 한 대접 말아먹고 햇살과 바람이 솔솔 들어오니 잠이 쏟아졌다.

백겸은 술이 아직도 안 깨서 한쪽 팔을 이마에 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창에 걸린 붉은 천이 바람에 나풀나풀 흔들렸다.

창이가 구르듯이 가서 백겸의 팔을 잡아당겨 벴다. 창이가 백겸을 보며 말했다.

“조선 술에 약 탔나봐. 멍청해지는 약.”

백겸이 팔을 확 빼고 찌푸렸다.

“아~술 냄새.”

“너는 꿀 냄새 나? 너 어젯밤 토할 때 내가 등 두드려줬거든. 아니 왜 술을 소화를 못 시켜!”

문이 확 열리고 도화가 발을 탁 젖히고 들어왔다. 백겸과 창이는 자동으로 앉았다.

도화가 그들을 보다가 그 앞에 앉았다. 도화는 어젯밤엔 그들이 술이 취해서 참았고 아침엔 정신이 없어 보여 참았고 밥을 먹이고 나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할 참이었다.

“정신 있어? 없어? 미쳤어?”

도화가 창이를 보며 말했다.

“증명? 뭘 증명할 건데? 대군이야! 대군! 대군이 뭔지 몰라? 대군 앞에서 술상을 내리쳐? 왜 아예 진양 얼굴을 갈기지 그랬어?”

창이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기억이 안나! 여름아, 너 무슨 사고 쳤어? 얘 술상 쳤어?”

도화가 버럭 소리 질렀다.

“독고준!”

“독고준이 누구야? 난 창인데!”

백겸이 말했다.

“다신 안 그럴 거야. 어제 내가 알아듣게 말했어!”

도화가 백겸을 쏘아보았다.

“너도 잘한 거 없어. 왜 아예 나비문신 찾는다고 광고를 하지 그랬어? 네가 독고준 붙들고 떠든 거 진양이 다 들었어! 내가 숨어서 봤거든. 어쩔 거야?”

창이가 말했다.

“아니! 너는 말리지 왜 숨어 있어? 숨바꼭질 해?”

“야!”

백겸과 창이가 입을 다물었다.

도화가 그들을 보다가 말했다.

“내가 너희들이라면 순포란 놈 어깨에 나비문신이 있는지부터 확인했을 거야.”

창이의 얼굴에 장난기가 사라지고 백겸은 술이 확 깨는 듯했다.

“뭐?”

도화가 한심하게 보고 말했다.

“진짜 둘 다 뇌 두고 온 거 맞네. 그럼 눈이라도 제대로 가져 왔어야지!”

백겸과 창이는 잠시 그대로 있었다.

“하나는 증명하겠다고 술상을 치질 않나.”

도화의 시선이 백겸을 향했다.

“하나는 아예 진양 얼굴 감상하러 왔지.”

...

“진양이 어제 그런 자리 괜히 만들었겠어? 그 순포란 놈을 의심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내가 그놈 뒤를 밟아봐서 알아. 그놈이 진양과 문종을 미행했었어.”

백겸이 잠시 있다가 말했다.

“우리를 아는 것 같긴 했는데, 나비문신까진 생각 못 했어! 이따 가서 확인할게!”

“확인하고 말 것도 없어. 그건 진양한테 맡겨! 알아서 할 거니까. 너희들은 앞으로 술 입에도 대지 마! 그리고 독고준, 특히 너. 진양 근처에도 가지도 마. 불러도 가지 마. 증명 못하겠다고 해. 그냥 계집이 맞다고 해!”

창이는 서늘했다.

“아닌 건 아닌 거야! 너도 두고 온 게 있는 것 같다!”

도화가 보았다.

“여자를 계집이라 표현하는 건 네가 더 용납 못하잖아! 다시는 그렇게 말하지 마! 듣기 싫어!”

도화는 맞는 말이라 뭐라 할 수도 없고 한 대 맞은 얼굴로 있었다.

백겸은 찌푸렸다.

“또 짝사랑 얘기야? 대체, 짝사랑하는 여자 누군데 목숨 걸어?”

창이가 정색했다.

“짝사랑 아니랬지!”

도화가 눈을 부릅떴다.

그때였다. 몸종 년이가 밖에서 말했다.

“아씨.”

년이가 문을 열고 말했다.

“아씨 손님이 오셨어요! 궁에서 내금위장님이 오셨어요!”

“누구? 내금위장이 나를 왜 찾아?”

“내금위장님이 닭 사왔다고 하시면 아신댔어요!”

"닭?”

도화와 백겸과 창이는 무슨 소린가 싶었다.

창이는 가만히 있다가 무심히 말했다.

“원빈이지, 이런 장난 칠 사람 원빈이 밖에 없잖아!”

창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숙원 홍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67 숙원 홍씨 67. 단진의 깊은 슬픔 +2 20.11.30 1,828 10 22쪽
66 숙원 홍씨 66. 단진, 진양에게 돌격하다 +2 20.10.29 1,891 10 16쪽
65 숙원 홍씨 65. 단진, 한양 기방에 들다 +3 20.10.26 1,928 10 26쪽
» 숙원 홍씨 64. 단진, 궁 밖으로 나오다 +2 20.10.22 1,934 11 22쪽
63 숙원 홍씨 63. 비밀의 열쇠, 백겸과 창이 +1 20.10.19 1,947 11 21쪽
62 숙원 홍씨 62. 진양, 비밀의 단서를 찾아내다 +2 20.10.15 1,953 11 19쪽
61 숙원 홍씨 61. 단진을 향한 애틋함 +2 20.10.12 1,960 11 21쪽
60 숙원 홍씨 60. 무예시합이 끝나고 +3 20.10.08 1,973 13 23쪽
59 숙원 홍씨 59. 무예시합-3 +4 20.10.05 1,990 12 22쪽
58 숙원 홍씨 58. 무예시합-2 +2 20.09.24 2,029 10 21쪽
57 숙원 홍씨 57. 무예시합-1 +2 20.09.21 2,047 10 20쪽
56 숙원 홍씨 56. 이향, 무예시합에 가지 않기로 하다 +1 20.09.17 2,065 10 17쪽
55 숙원 홍씨 55. 단진의 간절함 +1 20.09.14 2,089 9 21쪽
54 숙원 홍씨 54. 향을 지키려는 단진 +2 20.09.10 2,117 10 18쪽
53 숙원 홍씨 53. 나비문신 +2 20.09.07 2,138 10 19쪽
52 숙원 홍씨 52. 죽이려는 자, 지키려는 자 +1 20.09.03 2,163 11 21쪽
51 숙원 홍씨 51. 단진, 향의 위험을 알아채다 +1 20.08.31 2,188 11 20쪽
50 숙원 홍씨 50. 무예시합 날이 정해지다 +2 20.08.27 2,202 11 22쪽
49 숙원 홍씨 49. 여인 홍단진의 결심 +1 20.08.24 2,228 11 20쪽
48 숙원 홍씨 48. 백겸과 창이, 진양대군을 만나다 +2 20.08.20 2,269 11 21쪽
47 숙원 홍씨 47. 목멱산의 결의 +4 20.08.17 2,300 11 21쪽
46 숙원 홍씨 46. 계유정난을 막아라 +2 20.08.13 2,334 11 20쪽
45 숙원 홍씨 45. 단진의 고백 +2 20.08.10 2,349 11 20쪽
44 숙원 홍씨 44. 홍단진, 주상전하를 만나다 +2 20.08.06 2,364 12 18쪽
43 숙원 홍씨 43. 백겸과 창이 한양 기방에 들다 +1 20.08.03 2,387 11 16쪽
42 숙원 홍씨 42. 비 오는 밤, 사라진 자들 +3 20.07.30 2,400 11 18쪽
41 숙원 홍씨 41. 이향의 마음 +3 20.07.27 2,426 11 16쪽
40 숙원 홍씨 40. 꽃비 그리고 고려 제일 무사 창이, 조선 제일 무사 백겸 +1 20.07.23 2,443 11 20쪽
39 숙원 홍씨 39. 이향, 김종서와 야인을 만나다 +2 20.07.20 2,464 11 19쪽
38 숙원 홍씨 38. 운명적인 만남 +2 20.07.16 2,498 11 1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