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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연재수 :
9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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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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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10.1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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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숙원 홍씨 61. 단진을 향한 애틋함

DUMMY

숙원 홍씨 61. 단진을 향한 애틋함


궁으로 들어선 향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석양이 물러섰다. 어둠이 내리기 전의 하늘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태양의 영역도 아니고 달의 영역도 아니었다. 누구의 것도 아닌 하늘은 깊은 바다 같았다. 그 찰나의 시간 속에 단진이 홀로 서 있었다.

향이 멈춰섰다. 동궁전으로 가는 길목에 단진이 있었다. 키가 껑충 큰 나무 사이에 작은 단진이 있었다. 작은 나무처럼 뿌리를 내리고 그 자리에 있었다.

너무도 아련하여 향은 잠시 보았다.

단진은 아침에 향이 한성부로 나갈 때 인사했던 그곳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단진은 향이 돌아온 것도 모르고 동궁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청색에 황금 문양이 들어간 무사복을 입은 향이 아침 햇살 속을 걸어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단진이 다가갔다.

“저하. 너무 멋지시옵니다. 저하. 하루만큼 더 멋져지셨사옵니다. 다시 뵐 때는 더 멋져지셨겠지요!”

단진은 활짝 웃었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눈빛에 드러났다.

향이 알아채고 말했다.

“아무 염려 말거라. 아무 일 없을 것이다.”

“예 저하. 아무 일 없을 것이옵니다.”

향이 가려는데 단진이 말했다.

“하온데 저하 언제쯤 오십니까? 늦으십니까?”

향이 웃으며 말했다.

“해가 지기 전엔 올 것이다.”

“저하. 조심해서 다녀오셔야 하옵니다. 저하. 소인 여기서 기다릴 것이옵니다. 저하. 허니 꼭 조심해서 다녀오셔야 하옵니다. 소인 여기서 기다릴 것이옵니다.”


단진을 바라보는 향의 눈에 애틋함이 들어찼다.

박 내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박 내관은 서둘러 저하의 시선을 가로막아야 했지만 어째서인지 몸이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금세 어둠이 내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별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곳곳에 밝혀진 등불이 빛을 내뿜었다.

동궁전을 바라보던 단진이 돌아섰다. 향이 있었다. 향이 단진을 보고 있었다.

단진의 얼굴에 근심이 걷히며 웃음이 가득해졌다.

“저하! 저하!”

단진이 향을 향해 달렸다. 향은 보고 있었다.

단진이 향에게 가까워진 찰나에 박 내관이 막아섰다. 단진이 깜짝 놀라 멈춰섰다.

향이 지척에 있는데도 다가가지 못하고 박 내관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향이 단진에게 다가와 섰다. 단진이 향을 올려다보았다.

향이 단진을 보았다.

“오래 기다렸느냐! 좀 늦었구나!”

단진이 활짝 웃었다.

“아니옵니다 저하. 저하께서 늦으신 게 아니고 해가 빨리 진 것이옵니다!”

향이 미소 지었다.


동궁전 문 앞에 박 내관과 공두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박 내관은 오늘도 다른 내관과 나인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내보낸다 한들 홍단진이 안에 있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었다. 허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었다.

향은 동궁전에 들어 용포로 갈아입고 강녕전에 들어 전하를 알현했다. 박 내관은 조금이라도 향과 단진이 같이 있는 걸 막기 위해 단진에게 동궁전 침전 정리를 맡겼다. 향이 강녕전에서 나올 때 단진을 처소로 보내려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혹시나 향이 단진의 처소로 갈까 염려스러웠다. 동궁전으로 돌아온 향은 출출하다면서 다과상을 차려오라고 했다. 그리고 단진에게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박 내관은 하루 종일 역당과 야인으로부터 저하를 보호하기 위해 긴장해 있었다. 궁으로 들어온 순간 안도했다. 허나 잠시였다. 저하를 향해 달려오는 단진을 본 순간 역당보다 더 무서운 적이 궁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단진의 존재를 전하께서도 알고 계셨다. 저하께서 밤마다 단진과 산책을 하시니 궁에서 이를 모르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은 궁에서만 알고 있지만 이 소문이 조정 대신들에게 들어간다면 모두가 저하를 못살게 굴 것이다. 세자빈도 들이지 않고 후궁 마마도 찾지 않고 한낱 나인과 가까이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소문이 더 퍼지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허나 방법이 없었다.

향의 눈에서 단진을 치우면 향이 단진을 찾아갔다. 그렇다고 그냥 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박 내관은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박 내관의 눈에 꼴보기 싫은 궁둥이가 들어왔다. 공두가 보기 싫게 엉덩이를 쭉 빼고 문에 귀를 대고 있었다. 박 내관은 갑자기 내금위 별감 옷을 입고 나타나 내시부 망신을 시킨 공두가 떠올랐다. 박 내관이 공두의 엉덩이를 걷어차려 했지만 다리가 짧아 닿질 않았다. 그러자 짜증이 나서 공두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공두는 왜 맞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박 내관은 너무 화가 나서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살다 살다 이런 미친놈은 처음이었다.


동궁전은 등불과 촛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 밝은 빛 속에 밤하늘이 있었다. 열린 창으로 밤하늘의 별들이 반짝이고 시원한 바람과 함께 저만치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향과 단진이 마주 앉아 있었다. 단진의 앞에 다과상이 있었다. 단진은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음식이 입에 들어가자 허기진 뱃속에서 난리를 쳤다.

오물오물 먹는 단진을 보며 향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향은 단진이 하루 종일 먹지도 않고 오매불망 자신을 기다리며 걱정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향은 단진에게 물 한 모금 가져다 줄 사람이 없다는 게 안쓰러웠다. 조선의 문자가 공표될 때까지 홀로 지내야 할 단진이 안쓰러웠다.

향은 단진을 보았다.

외로울 터인데 어찌 저토록 행복한 얼굴일까.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는데 어찌 저토록 세상을 다 가진 얼굴일까.

문득 짚신을 주며 세상을 다 가진 얼굴로 행복해하던 백성이 떠올랐다. 향에게 배가 부르니 사람이 된 것 같다고 웃던 백성이 떠올랐다. 행복하게 웃던 백성들이 떠올랐다.

향은 단진을 보고 있노라면 선량한 백성이 떠올랐고 욕심 없는 백성이 떠올랐고 순수한 백성이 떠올랐다. 향이 지켜야 할 백성이 떠올랐다.

그리고 단진은.

향은 지켜주고 싶었다. 단진의 해맑은 미소를 지켜주고 싶었다.


단진이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저하...내일도...모레도...이리 저하를 보게 해주십시오...’

향이 비공식적으로 나가겠다고 하자 단진이 안도했다. 그리고 웃었다.

‘저하...소인 청이 있사옵니다.’

향이 단진을 잠시 보다가 말했다.

‘나를 위한 청은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는 너를 위한 청을 하거라. 일이 고단하다, 편한 일을 하게 해 달라 청하거라. 처소가 불편하다, 좋은 처소로 바꿔 달라 청하거라. 필요한 게 있으니 달라 청하거라. 네게 필요한 걸 달라 떼를 쓰거라. 다 들어줄 것이다.’

‘허면 주십시오. 소인이 가장 갖고 싶은 건...’

‘강건하신 저하의 미소입니다. 매일 매일 저하의 밝은 미소를 주십시오. 소인은 그거면 됐습니다.’


“저하, 어찌 그리 보십니까?”

단진은 다과상에서 손을 떼고 향을 보았다.

향의 눈길은 다른 때와 달랐다. 애틋했다. 그것이 느껴지자 단진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단진이 일렁이는 촛불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수많은 촛불이 일렁이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향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향의 품에서 단진은 잠들었다. 앓고 있는 단진의 곁을 향이 지켜주었다. 향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단진의 볼이 더욱 발그레해졌다. 단진은 살며시 눈을 들어 향을 보았다.

향은 단진을 보고 있었다. 단진은 그 눈길이 너무도 뜨거워 고개를 숙였다.

향의 눈길이 밤하늘을 향했다.

단진은 일렁이는 촛불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단진의 가슴이 일렁였다. 동궁전에 침묵이 찾아왔다. 침묵 속에 무언의 언어가 있었다. 서로에게 그 소리가 닿았다. 그 애틋함이 동궁전을 감싸고 있었다.

향이 다시 단진에게 눈길을 돌렸을 땐 평소와 같았다.

“몸은 괜찮은 것이냐?”

“예 저하.”

단진은 너무 긴장해서 침을 삼키다가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해댔다. 향이 물잔을 주었다. 단진은 물을 마시고는 가슴을 탁탁 쳤다. 너무 세게 친 탓에 단진은 가슴팍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향이 웃었다.

“저하. 소인은 몸이 건강하여 하루만 자고 일어나면 괜찮사옵니다.”

“홀로 생활하는 것이 갑갑하지 않으냐?”

“아니옵니다 저하. 박 내관님이 잘해주시고, 장 내관이 말벗이 되어 주어 괜찮사옵니다.”

“네게 궁금한 게 있구나.”

단진이 보았다.

“오늘 어찌하여 장 내관을 데리고 나가라고 한 것이냐?”

단진이 웃었다.

“장 내관은 워낙 사고방식이 독특해서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뛰어나옵니다. 혹시라도 역당이 나타났을 때 장 내관이 도움이 될 듯하여 그리한 것이옵니다.”

“도움이 된다?”

“지금 적은 우리를 알고 있지만, 우리는 적을 알지 못합니다. 그럴 때 필요한 건 적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법이옵니다. 역당은 검을 다루는 자들입이다. 또한 저하를 지키는 내금위 별감들도 검을 다루지 않습니까! 헌데 장 내관은 검을 잡을 줄도 모르옵니다. 만일, 역당이 나타났을 때 장 내관이 어떤 행동을 할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옵니다.”

.....

“장 내관의 행동으로 인해 역당들은 잠깐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검객들이 검을 겨루려 하는데 갑자기 날파리가 눈에 들어간다면, 그 작은 날파리 하나로 인해 승패가 달라진다면, 그건 그저 작은 날파리가 아니옵니다!”

향이 웃다가 말했다.

“그렇구나. 헌데 말이다.”

단진이 보았다.

“그것이 득이 될 수도 있으나 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장 내관의 예상치 못한 행동으로 내금위 별감들이 당황해 적에게 당할 수도 있는 일이다.”

단진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

“저하. 송구하옵니다. 미처 거기까진 생각을 못했사옵니다.”

향이 웃었다.

“저하.”

단진은 잠시 있다가 각오한 듯 말했다.

“소인이 역당을 잡으면 안 되겠사옵니까?”

향이 웃었다.

“어찌 잡으려 그러느냐?”

“소인은 잡을 수 있사옵니다.”

“너는 괴문서를 쓴 역당이 누구라 여기느냐?”

“고려인이지요!”

향이 단진을 보았다.

“소인이 역당을 잡으러 나가면 아니 되겠습니까? 소인은 역당과 눈이 마주친 순간 알 수 있사옵니다.”

“아니 된다.”

단진이 시무룩해있자 향이 말했다.

“너는 네 할 일을 하거라. 내일 심부름을 다녀오거라.”

향이 문을 보며 말했다.

“박 내관은 들거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고 박 내관이 들어왔다.

향이 박 내관에게 지시하는 소리를 들은 단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겸과 창이가 걸어왔다.

백겸과 창이는 석양 속의 향과 진양, 안평을 보다가 넋이 나갔다. 해서 궁의 서문으로 도화에게 가던 길임을 잊어버렸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오다가 뒤늦게 생각이 나서 도화를 데리러 갔다.

도화는 나비문신을 만난 이야길 듣고는 지금이 향과 진양 안평의 모습에 넋 나갈 때냐면서 질책했다. 일에는 순서가 있다면서 지금은 나비문신을 잡아야 할 때라고 어찌나 성질을 내는지 백겸과 창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백겸과 창이는 슬그머니 나와 운종가 일대를 뒤졌지만 승무를 찾을 수 없었다.

기방의 화려한 불빛이 가까워졌다.

백겸은 오늘 하루 넋이 나간 것 같았다. 나비문신이 석양에 묻혔다. 나비문신을 잡아야 하는데 이향과 진양, 안평을 보고는 역사적인 한 순간을 본 것 같아 아직도 가슴이 두런거렸다. 훗날 피바람이 불게 될 시작을 알리는 장면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또한 돌아가기 위해 바꿔야 할 역사였다.

백겸이 말했다.

“결국 문종이 진양과 안평을 조정에 들이게 되는 거네.”

“세종도 같은 생각이었어. 진양과 안평이 인재인 건 사실이니까. 결국 문종이 진양에게 단종을 죽일 칼을 쥐여준 셈이지.”

백겸이 창이를 보았다.

“문종은 기회를 준거야. 칼을 잡은 건 진양이지.”

백겸이 아쉬움에 덧붙였다.

“문종이 오래 사셨다면 진양은 충신으로 역사에 남았을 텐데.”

창이가 말했다.

“하나마나 한 소리 하지 마. 고려 권문세족들이 돈을 다 해먹지 않았으면 고려가 망하지 않았겠지! 천년 신라도 잘 했으면 안 무너졌어!”

백겸이 웃었다. 백겸은 또다시 석양 속의 향과 진양 안평을 떠올랐다.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 속에서 향을 지우고 나니 빛이 바뀌었다. 향이 사라진 그 석양은 진양에겐 핏빛이었다.

백겸은 이럴 때가 아닌데 싶어 고개를 저었다.

“나비문신 잡아야 하는데, 집중이 안 되네.”

창이가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그래서 네가 공부를 못한 거야. 태희 봐. 어떤 상황에서도 집중하잖아. 공부 못하는 이유가 괜히 있는 게 아니야!”

백겸이 어이없어 했다.

“너 나보다 못했거든!”

창이가 웃었다.

“야! 서여름, 너는 공부만 죽어라 하고도 태희를 못 이겼고, 난 놀면서 안 이긴 거고!”

백겸이 창이의 팔을 치워버렸다. 어느덧 기방 앞에 다다랐다.

사대부가 사내들 여럿이 기녀들의 배웅을 받으며 기방을 나왔다. 허세에 취해 뒷짐을 지고 들어간 사내들은 나올 때는 술과 기녀들의 분 냄새에 취해 비틀거렸다.

기녀들은 연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내들을 보며 까르르 웃었다. 화려한 꽃으로 장식한 기녀들의 웃음소리가 지저귀는 종달새 같았다.

창이가 백겸을 보며 말했다.

“세수하고 나비문신에 집중하자! 간단한 나비문제 풀고 역사를 바꾸는 힘든 과제 해야지! 그래야 집에 가지!”

백겸과 창이가 가려는데 장문호가 탄 화려한 가마가 다가왔다. 제등을 든 가노가 큰소리로 외쳤다.

“비키거라! 판부사대감 행차시다. 비키거라!”

백겸과 창이가 찡그리고 가려는데 가마 옆을 따르는 용무용과 석과 결이 보였다.

용무용의 시선이 창이에게, 백겸에게 닿았다.

가마가 멈춰서고 장문호가 내렸다. 장문호는 가마에서 내릴 때 도포를 한 번 크게 젖혔다. 장문호는 용무용을 보았다. 최고의 검객을 데리고 다니니 새로운 맛이었다. 용무용은 생각보다 다루기 쉬운 자였다. 아 하고 운을 띄우니 그 다음은 일사천리로 알아들었다. 탐욕스러운 자만큼 쉬운 건 없었다. 입을 벌리고 원하는 걸 털어 넣어주면 그만이었다.

용무용이 자신의 검을 석에게 건넸다. 석과 결은 백겸과 창이를 힐끗 보고 갔다.

백겸과 창이가 용무용을 빤히 보고 있었다. 용무용은 그들에게 시선을 둔 채로 기방 안으로 들어갔다.


기방의 잘 가꿔진 정원에 등불이 훤히 밝혀져 있고 그 안에 고풍스럽게 지어진 정각에서 가야금소리가 흘러나왔다.

월이 부채를 들고 가야금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월의 손사위 하나하나 발사위 하나하나에서 교태가 흘렀다. 월의 춤은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월이 부채를 든 손을 물결처럼 움직였다. 월이 치마를 살포시 잡고 살짝 걷고는 버선코를 바닥에 톡톡 치며 앞으로 한 걸음 뒤로 한 걸음 움직였다.

그 발걸음이 어찌나 가벼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손님들 뿐 아니라 기녀들도 가야금소리에 맞춰 손을 물결처럼 흔들며 춤을 감상하고 있었다.

호조판서가 상석에, 장문호와 공조참판 심민, 맞은편에 예조판서 장우성, 형조참판 민계수가 앉아 있었다. 예조판서 옆은 초련이, 민 참판 옆은 난이, 심 참판 옆엔 초이, 장문호 옆엔 도화가 앉아 있었다.

늘 같은 자리에 앉았으나 오늘은 별채가 아닌 정각에 있었고 늘 싸웠으나 오늘은 가무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분위기 속에 날카로운 신경전이 있었다.

장문호가 예판에게 슬쩍 말했다.

“우리끼리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좀 도와주시지요!”

예판은 일부러 못들은 척 월의 춤만 보고 있었다.

장문호는 호판의 기분을 풀어주러 왔지만 아직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장문호는 예판을 못마땅하게 보고는 용무용을 힐끗 보았다.

술상 끝에 호판을 마주 본 자리에 용무용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모두가 월을 보고 있었지만 도화는 용무용을 살폈다. 용무용은 아무것도 보는 것 같지 않으면서도 모든 걸 다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도화가 용무용을 보고 있는데 기분 나쁜 감촉이 느껴졌다. 장문호의 끈적이는 손이 도화의 손 위에 있었다. 도화는 벌레라도 닿은 것처럼 손을 확 빼고 장문호를 보았다. 장문호는 야릇한 눈빛을 보내고는 호판에게 시선을 옮겼다.

월의 춤이 끝나자 호판과 대신들이 박수를 쳤다. 월이 살포시 앉자 호판이 술을 한잔 따라주었다.

“너는 언제 봐도 나비 같구나!”

월이 은밀하게 말했다.

“허면, 이 나비는 오늘 어느 꽃에 앉아야겠습니까?”

호판이 껄껄 웃었다.

장문호가 호판의 비위를 맞추려 했다.

“호판대감, 제가 대감께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글쎄요. 받을 손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장문호가 용무용을 보았다.

“앞으로 네가 모시게 될 호판대감이시다. 앞으로 잘 모셔야 할 것이다.”

용무용이 호판에게 큰절을 올렸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오르시게 될 대감을 뵌 것만으로도 광영이온데, 대감을 뫼실 수 있게 돼 소인,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호판은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장문호가 알아채고 말했다.

“대감께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시게 될 때까지 네가 잘 모셔야 할 것이다.”

용무용이 말했다.

“미천한 소인이 뫼시고 말고 할 게 무에 있겠습니까! 어차피 그 자리는 호판대감을 위한 자리가 아닙니까!”

호판이 용무용을 보았다.

“이 조선이 세워진 데 가장 큰 공을 세우신 호판께서 당연히 앉으셔야지요. 호판대감의 집안은 고려 때부터 대대손손 나라의 재정을 맡지 않으셨습니까! 대감께서 재정을 잘 관리해 조선이 이렇게 자리 잡은 게 아닙니까!”

호판이 만족스러운 듯 용무용을 보았다.

용무용은 속에서 칼을 갈고 있었다. 호판은 고려의 권문세족 출신으로 호판의 집안은 대대손손 고려의 재정을 다 갉아먹고 호의호식하며 살았다. 고려를 가장 먼저 버리고 조선으로 배를 갈아탄 것도 호판의 집안이었다. 용무용은 이향을 죽이고 나서 호판을 찢어 죽일 작정이었다. 호판의 사돈의 팔촌까지 씨를 말릴 것이다.

장문호는 호판의 기분이 풀린 것 같아 좋았으나 마음속으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는 자신의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장문호는 웃으면서 거짓말했다.

“대감, 노여움을 푸시지요! 대감께서 형판대감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리 세자저하께 말씀드렸습니다. 모르고 계셨지요?”

호판이 못미더운 듯 보았다. 장문호가 덧붙였다.

“세자저하께서 호판대감은 역시 남다르시다 하셨습니다! 대감께서 계셔야 제가 있고, 대감의 나무가 클수록 제가 쉴 그늘도 많아지지 않습니까! 저 많이 섭섭합니다!”

호판은 오뉴월에 눈 녹듯이 불편한 심기가 녹아내렸다.

장문호가 예판을 보며 말했다.

“다음 무예시합은 예판과 함께 준비하겠다 그리 말씀 올릴 것이니 서운함 푸세요!”

예판이 솔깃해졌다.

호판이 용무용을 보았다.

“너는 형판과 각별한 사이가 아니었느냐?”

“김종서 대감과는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온데 어찌 각별할 수가 있겠습니까! 소인은 호판대감께서 보는 방향을 보고 있습니다!”

호판은 한쪽 다리를 잡아당기고 말했다.

“그래. 판부사대감의 성의를 봐서 한번 지켜보도록 하겠다!”

호판이 월에게 눈짓했다. 월이 알아듣고 술잔을 들었다. 호판이 술을 따라주자 월이 술잔을 들고 용무용에게 가져다주었다. 용무용이 몸을 돌려 술을 마시고 호판에게 엎드렸다.

“소인 이제 대감을 이 가슴에 품고, 대감을 위해 살겠습니다. 언제든, 무엇이든 하명만 하십시오. 대감을 위해 이 한 목숨 바치겠습니다.”

호판은 기분이 좋아서 용무용을 보며 말했다.

“내일 어전회의에서 네 문제를 논의할 터인데, 내가 힘을 써줄 것이다. 이제 조선인이 됐으니 좋은 집에서 살고 재물도 좀 있어야 할 게 아니냐!”

용무용이 납작 엎드렸다.

“망극하옵니다 대감.”

용무용이 덧붙였다.

“헌데, 청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제 수하들은 가옥을 정해주면 그리로 보내고, 소인은 김종서 대감 댁에 더 머물렀으면 합니다.”

“연유가 무엇이냐?”

“김종서 대감 댁에 머물러야, 돌아가는 근황을 파악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들고나는 사람이 많습니다.”

호판과 장문호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용무용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용무용을 보고 있던 도화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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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숙원 홍씨 57. 무예시합-1 +2 20.09.21 2,047 10 20쪽
56 숙원 홍씨 56. 이향, 무예시합에 가지 않기로 하다 +1 20.09.17 2,065 10 17쪽
55 숙원 홍씨 55. 단진의 간절함 +1 20.09.14 2,090 9 21쪽
54 숙원 홍씨 54. 향을 지키려는 단진 +2 20.09.10 2,118 10 18쪽
53 숙원 홍씨 53. 나비문신 +2 20.09.07 2,139 10 19쪽
52 숙원 홍씨 52. 죽이려는 자, 지키려는 자 +1 20.09.03 2,164 11 21쪽
51 숙원 홍씨 51. 단진, 향의 위험을 알아채다 +1 20.08.31 2,189 11 20쪽
50 숙원 홍씨 50. 무예시합 날이 정해지다 +2 20.08.27 2,203 11 22쪽
49 숙원 홍씨 49. 여인 홍단진의 결심 +1 20.08.24 2,229 11 20쪽
48 숙원 홍씨 48. 백겸과 창이, 진양대군을 만나다 +2 20.08.20 2,269 11 21쪽
47 숙원 홍씨 47. 목멱산의 결의 +4 20.08.17 2,300 11 21쪽
46 숙원 홍씨 46. 계유정난을 막아라 +2 20.08.13 2,335 11 20쪽
45 숙원 홍씨 45. 단진의 고백 +2 20.08.10 2,349 11 20쪽
44 숙원 홍씨 44. 홍단진, 주상전하를 만나다 +2 20.08.06 2,364 12 18쪽
43 숙원 홍씨 43. 백겸과 창이 한양 기방에 들다 +1 20.08.03 2,388 11 16쪽
42 숙원 홍씨 42. 비 오는 밤, 사라진 자들 +3 20.07.30 2,401 11 18쪽
41 숙원 홍씨 41. 이향의 마음 +3 20.07.27 2,427 11 16쪽
40 숙원 홍씨 40. 꽃비 그리고 고려 제일 무사 창이, 조선 제일 무사 백겸 +1 20.07.23 2,444 11 20쪽
39 숙원 홍씨 39. 이향, 김종서와 야인을 만나다 +2 20.07.20 2,465 11 19쪽
38 숙원 홍씨 38. 운명적인 만남 +2 20.07.16 2,499 1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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