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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연재수 :
9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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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07.3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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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숙원 홍씨 42. 비 오는 밤, 사라진 자들

DUMMY

숙원 홍씨 42. 비 오는 밤, 사라진 자들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백겸이 도화의 팔을 잡아 수레에서 떼어냈다. 도화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도화가 버럭 성질을 냈다.

“기척 좀 하고 다녀!”

창이가 말했다.

“왕태희! 넌 폭력 좀 쓰지 마, 나 입술 다 터졌어! 살면서 뺨 맞긴 처음이야!”

백겸이 박자를 맞췄다.

“나도!”

“서여름, 넌 함길도에서 얼굴 쥐어터지는 거 많이 봤거든, 나 같이 귀한 사람이 처음이지!”

도화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보다가 눈을 번뜩였다.

“너희가 왜 여깄어? 도망가 있으랬잖아!”

백겸이 차분히 말했다.

“어디로? 잘못한 것도 없잖아. 우린 지킨 건데!”

창이가 말했다.

“정당방위잖아!”

도화는 그들의 눈빛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삼년이 입속으로 들어오는 빗물을 뱉어내며 짜증을 냈다.

“야! 늬들 동창회 하냐?”

창이가 더 짜증을 냈다.

“저 자식은 여기 왜 있어? 넌 가 이 자식아!”

삼년은 행여라도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까 싶어 수레를 더욱 움켜잡았다.

서로가 서로를 보았다. 굵은 빗방울이 얼굴에 몸에 마음에, 사정없이 떨어졌지만 피할 곳이 없었다. 피할 필요도 없었다. 물에 빠졌다 나온 것처럼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그들은 이미 젖을 만큼 젖어 있었다. 노비로 젖어 있었고 기녀로 젖어 있었고 무사로 젖어 있었다. 해서 더는 두려울 게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살기 위해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삼년이 수레를 끌고 백겸과 창이가 뒤에서 밀었다. 도화가 거들려 했지만 백겸이 밀어냈다. 백겸과 창이는 약속이나 한 듯 나무토막을 주워와 바퀴에 받쳤다. 웅덩이에 박힌 바퀴가 들썩들썩 하더니 가까스로 움직였다.

오르막을 가는 동안 백겸과 창이의 발이 연신 미끄러졌다. 백겸이 미끄러질 땐 창이가 버텨주었고, 창이가 미끄러질 땐 백겸이 버텨주었다. 수레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금세 빗줄기에 쓸려 내려갔다. 백겸과 창이의 얼굴에 쉴 새 없이 땀과 함께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조금 전 백겸과 창이는 도화의 말대로 도망치기 위해 달려갔다. 가다가 동시에 멈춰섰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도망갈 곳은 없었다. 그들이 진정 도망치고 싶은 건 자신에게서였다. 백겸도 창이도 살기를 느낀 순간 그들이 아니었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다. 창이는 죽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고 백겸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상했다. 백겸은 손이 떨리지 않았다. 함길도에서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땐 그토록 떨리던 손이 세 명을 더 죽이고 나니 떨리지 않았다. 창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음과 다르게 몸은 떨지 않았다.

백겸과 창이의 몸에 묻은 피는 빗줄기에 다 씻겨 내려갔지만 그들의 마음에 묻은 피는 아무리 씻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방법은 하나였다. 강해져야 했다.

백겸이 말했다.

“우린 죽인 게 아니야. 지킨 거지!”

창이가 말했다.

“그래, 정당방위야!”

백겸과 창이는 단단하게 서로를 보다가 도화에게 향했다.


삼년이 말했던 곳에 도착했다. 이곳은 삼년을 괴롭히던 왈패들의 소굴이었다.

왈패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여섯 채의 움막이 있었다. 삼년의 계획은 ‘던지기’ 였다. 이 시신을 왈패들의 소굴에 던져놓으면 된다고 했다. 어차피 왈패들은 사람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또한 사람을 죽이면 죄가 된다는 걸 알 정도의 머리는 돌아갔다. 그들은 반대파 왈패들의 짓으로 생각하고 시신을 처리하고 복수할 것이다. 삼년은 이곳 왈패들 뿐 아니라 반대파 왈패들에게도 두들겨 맞았다. 해서 양쪽에서 당한 수모를 갚아주고 싶었다. 쾌감과 함께 두려움이 밀려왔다. 빨리 벗어나고 싶은데 백겸과 창이는 수레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백겸이 수레의 짚단에 손을 대자 창이가 말렸다. 그러나 백겸은 짚단을 젖히고 죽은 자들을 보았다.

백겸은 마음속으로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사과라고 여겼다. 같은 상황이 온다면 똑같이 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 잠시라도 머뭇거렸다면 단진은 죽었을 것이다.

창이도 죽은 자들을 보았다. 창이에겐 그들이 살인자였다. 창이는 그들에게서 단진을 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도화가 백겸과 창이에게 서두르라고 하려는데 삼년이 도화의 팔을 잡았다. 삼년이 빨리 자리를 뜨자고 지랄지랄했다. 도화는 신경질적으로 삼년의 손을 탁 쳐냈다. 삼년이 중심을 잃고 뒤뚱거리다 미끄러지려는 찰나에 도화를 붙잡았다. 둘은 함께 흙탕물에 나동그라졌다. 백겸과 창이가 그들을 보았다. 도화는 화가 났지만 소리도 지를 수 없어 더 끓어올랐다. 일어서려 했지만 발이 미끄러웠다. 백겸이 도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화는 어둠 속에서 백겸을 잠시 보다가 손을 잡고 일어섰다. 빗물에, 흙탕물에 미끈거렸지만 백겸의 손은 따뜻했다. 삼년도 일어서려 뒤뚱거리며 손을 내밀었지만 창이는 본 척도 안했다.

도화가 흙탕물을 뒤집어 쓴 옷을 털어내다가 다급히 말했다.

“아! 아까 그곳으로 다시 가야 돼! 두고 온 게 있어!”


별채의 방에 등불이 밝혀져 있었다. 용무용이 앉아 있고 그 앞에 승무와 야인 결이 비에 흠뻑 젖은 채 앉아 있었다. 야인 호와 석은 문 앞에 서 있었다.

용무용은 생각에 잠겼다. 자객으로 위장한 형제들이 이향의 호위무사들을 죽였을 거라 여기고 기다렸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승무가 결과 함께 그 일대를 다 뒤졌지만 아무도 없었다. 자객으로 위장한 형제 여섯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용무용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형제들이 당했다면 시신이라도 있어야 했다. 이향의 짓이라면 금군을 비롯해 관군이 동원돼 자신들을 찾으려 혈안이 돼 있어야 했다. 하지만 궁 일대는 고요했고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뭔가가 이상했다.

용무용은 승무에게 말했다.

“네 말대로라면 쥐새끼 하나 얼씬거리지 않는데, 우리 형제들만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럴 리가 없다. 어딘가에 피 한 방울이라도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다!”

승무가 물었다.

“형님은 죽었다 생각하십니까?”

“이향의 무사들이 살아 있으니 우리 형제들이 죽은 것이다!”

승무는 걸리는 게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무릎을 꿇었다.

“형님. 사실은...커다란 수레를 끄는 백정 놈이 있었습니다. 수상쩍어 확인했으나 돼지만 실려 있어서...”

“해서?”

승무는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용무용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대체 일을 어찌하는 것이냐? 너는 순라군을 죽이고 백정 놈을 죽이고 수레를 확인했어야 했다. 수레에 아무것도 없어도 수레를 잘라서라도 확인했어야 했다!”

“송구합니다. 백정 놈들에겐 살기가 전혀 없었습니다. 해서...”

용무용은 대의를 위한 첫걸음부터 실패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실패가 문제가 아니었다. 적의 실체를 모른다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였다.

용무용이 일어섰다.

“내가 직접 가봐야겠다!”

용무용이 삿갓을 쓰고 검을 들고 문을 열었다. 쏟아지는 빗소리가 방으로 밀려들었다. 승무와 야인들이 뒤따라 나섰다.

용무용이 신발을 신었다.


도화 백겸 창이 삼년은 자객들을 처치한 곳으로 돌아왔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도화는 숨겨둔 자신의 옷을 찾았다. 구석에 꽁꽁 숨겨둔 줄 알았는데 와서 보니 누구의 눈에도 띌 만큼 잘 보였다. 도화는 골목으로 들어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입었던 머슴 옷은 돌돌 말아 손에 들었다. 도화는 조선이라 우습게 여기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자신들이 사는 세상은 과학이 발전했지만 조선은 사람들이 뛰어났다. 감각이 예리했고 영리했고 집요했다.

도화가 백겸과 창이를 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나를 따라와, 이제 국밥집에 있으면 안돼!”

삼년이 다급히 말했다.

“나는? 약속했잖아! 나도 너희들과 함께 하기로!”

도화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함께 하는 거랑, 같이 있는 건 다르다, 네 살 길은 네가 찾아!”

삼년은 재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왕태희, 부탁할 땐 언제고! 물에 빠진 놈 구해줬더니, 진짜 골 때리네! 야! 서여름 독고준 나 아니었으면 살인죄로 끌려갔을 수도 있어!”

창이가 조용히 말했다.

“지금 널 죽일 수도 있어, 닥쳐라 좀!”

삼년이 입을 계속 나불거렸다.

“내 계획이 아니었으면, 자객들이 지금 시신을 발견했을 거고, 그러면 너희들은 쫓기는 거야! 내가 돼지까지 훔쳐와 완벽한 계획을 세웠잖아!”

창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완벽한 개고생이지! 네가 왜 공부를 못했는지 이제 알겠다. 이 멍청한 자식! 그걸 계획이라고 세웠냐? 그냥 시구문에 가져다 놓으면 되지!”

삼년은 그 생각은 미처 못 했기에 아무 말 못했다.

도화가 말했다.

“가자!”

삼년이 도화 앞을 가로막았다.

“나도 같이 가! 약속했잖아! 도와주면, 너희들과 함께 집에 가게 해주겠다고, 너희들 나 없으면 못 가! 집에 가는 방법은 나만 안다고!”

백겸이 거지꼴의 삼년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

“얘도 데려가야 하잖아!”

창이가 말했다.

“알아서 하겠지!”

삼년이 창이를 노려봤다.

도화가 삼년을 보다가 말했다.

“넌 국밥집에 가 있어, 내일 이 근처랑 왈패들 소굴까지 상황 살펴, 수상한 자가 있으면 와서 보고해!”

삼년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네 따까리냐?”

“하기 싫음 말던가!”

삼년이 바로 꼬리를 내렸다.

“아 알았어!”

백겸과 창이가 가려다 시신이 있던 곳을 돌아봤다. 그들은 이제 죄책감이 아닌 누가, 왜, 세자를 죽이려 했느냐라는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또다시 향을 노린다면 단진이 위험했다.

창이는 자객이 죽는 순간 무슨 말을 한 것 같은데 알아듣지 못했다. 백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였다. 인기척이 들렸다.


인옥은 별채 마루에 앉아 있었다. 몸종 분년이와 간난어멈까지 와서 달랬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간난아범과 함께 승규가 들어왔다.

승규가 인옥에게 다가갔다. 인옥은 승규를 보고는 후다닥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섰다.

승규가 난감해 했다.

“부인, 대체 어찌 이러시오?”

인옥은 애원했다.

“아저씨...그냥 여기 앉아 있게만 해주세요.”

“부인...”

“저는 꼭 여기 앉아 있고 싶어요.”

“부인, 이곳은 손님이 있질 않소, 왜 하필 이곳에 앉아 있겠단 것이오?”

승규가 분년이와 간난어멈을 향해 말했다.

“마님을 모시지 않고 무얼 하느냐?”

인옥은 후다닥 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닫았다.

밖에서 승규가 문을 열려고 했다.

“부인. 어서 나오시오!”

“제발요...그냥 마루에 앉아만 있겠단 거예요. 제발요...”

방안에는 용무용과 승무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인옥을 보고 있었다.

조금 전 용무용이 신발을 신으려는 찰나에 인옥이 별채로 뛰어 들어오고 몸종과 간난어멈이 들어왔다. 오늘 밤 일을 김종서가 알고 있다면, 용무용이 야밤에 사라져 의심을 사게 될 수도 있었다. 적을 알지 못하니 모든 수에 대비해야 했다. 용무용은 정신 나간 마님인 인옥을 잠시 보다가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적에 미치광이 마님까지 나타나 용무용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인옥은 문을 잡고 버텼지만 승규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문이 열리고 승규가 들어와 인옥을 잡아 데리고 나갔다.

인옥은 끌려 나가며 애원했다. 인옥의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아저씨...마루에 앉아만 있게 해주세요...제발요...잘해주지 않아도 돼요...그냥...이 마루에 앉아만 있게 해주세요...전 이 마루가 좋아요...다시는 집 안 나갈게요...”

승규는 결국 인옥의 뜻을 들어주었다.

분년이와 간난어멈과 함께 인옥은 마루에 걸터앉아 뚫어져라 담장 너머를 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도화가 손을 흔들길 기다리고 있었다. 단진이가 깨어났다면 반드시 자신을 데리러 올 거라 믿고 있었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고 있었다.

간난아범이 술상을 들고 별채로 들어왔다. 인옥은 간난아범을 힐끗 보고는 마루를 움켜잡았다.

간난아범은 마루로 올라갔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용무용과 승무가 앉아 있었다. 40대의 간난아범은 술상을 그들 앞에 두었다.

“나으리께서 미안하다 하셨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시키시오.”

간난아범은 야인에게 존대를 해야 할지 하대를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간난아범은 아무리 머슴이어도 조선인이고 야인보다 신분이 높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용무용의 눈빛에 쉽사리 말을 놓을 수는 없었다. 간난아범은 사람은 한없이 좋으나 말이 좀 많았다. 그들이 궁금해 하지도 않는데 친절하게 말을 해줬다.

“이해들 하시오. 우리 마님이 역병에 걸렸다 살아났는데 기억이 온전치 않소. 한양에 돌림병 비슷하게 미치광이 병이 유행을 했소. 역병에서 깨어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병이오.”

간난아범이 나간 후 용무용이 승무를 보며 말했다.

“날이 밝는 대로 순포를 불러라!”

승무가 말했다.

“형님, 혹시 진양 그놈 짓이 아닐까요? 요즘 세자 일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질 않습니까!”

용무용은 후회했다. 이향이 눈앞에 있을 때 베었어야 했다. 용무용은 술을 따라 거칠게 들이켰다.


진양이 술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열린 창으로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려왔다. 문양이 있는 짙은 색 야장의를 입고 보석이 박힌 상투관에 비녀를 꽂고 있었다. 진양은 평소 습관대로 한쪽 다리를 올리고 술잔을 든 팔을 올려놓았다.

모필가 박가와 염가를 알고 있는 모필가 역시 행방이 묘연해졌다. 진양은 역당들이 자신의 말을 다 엿듣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양은 사냥할 때를 떠올렸다.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놈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듯 역당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나 가까이 있는 게 느껴졌다.

진양은 뭔가를 빠뜨리고 있는 것 같아 찜찜했다. 분명 뭔가를 놓치고 있었다. 진양이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대려는데 단진이 떠올랐다.


‘짐승이라 했느냐? 사람을 짐승이라 말하는 네놈은 대체 어디서 무얼 배운 것이냐! 배우긴 한 것이냐? 사람과 짐승을 구분할 줄은 아느냐?’

‘한 사람이 죽는다는 건, 한 세상이 끝나는 것이다.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친구고 누군가의 전부가 끝나는 것이다, 그 누군가의 세상이 끝나는 것이다. 해서 그 세상을 끝나게 했을 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진양이 한 걸음 다가갔다.

‘나를 죽이려면 힘을 키워야 할 것이다.’

단진이 조용히 말했다.

‘너 같이 사리분별 못하는 꼬마를 상대하는데, 그리 큰 힘이 필요할 것 같진 않구나! 기다리거라!’


진양은 ‘꼬마’ 라고 혼잣말을 하고는 웃으며 술을 털어 넣었다. 술이 달았다. 단진의 뺨이 손에 닿을 때의 전율이 또다시 느껴졌다. 선이 고운 계집이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데 어찌 이리도 재밌단 말인가. 자신을 죽이겠다고 덤벼드는데 어찌 이리도 기다려진단 말인가. 진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시 술을 따라 술잔을 입에 대려는데 번쩍 떠올랐다. 진양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진양이 술잔을 상에 탁 놓고 소리쳤다.

“밖에 누구 없느냐?”

무사복을 입은 진양은 사병들의 처소로 들었다. 진양은 김가와 은가 순포와 함께 설가의 방을 살폈다. 갑작스레 진양이 나타나 제대로 의복도 갖추지 못하고 방에서 나온 무사들이 밖에서 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진양이 김가에게 물었다.

“설가를 마지막으로 본 게 누구냐?”

김가가 말했다.

“모필가를 찾으러 가기 전에, 오줌보가 터질 것 같다면서 뒷간에 다녀온다고 했사옵니다. 기다려도 오지 않아 저희들끼리 먼저 갔사옵니다. 이후로 본 자가 없사옵니다.”

설가의 방은 이불이 깔려 있고 머리맡에 야서가 펼쳐져 있었다. 고기가 수북하게 올려진 국밥 한 그릇에 술병이 놓여있었다. 체격이 좋은 설가는 남들보다 두 배로 먹었다. 저녁밥을 먹고 야서를 보다가 출출해서 야식을 먹으려는데 진양이 부른 것이다. 진양은 불어터지고 쉰내 나는 국밥을 물끄러미 보았다. 수저가 바닥에 놓여있는 걸로 봐서 한 입도 먹지 않고 뛰쳐나온 것이다.

진양은 처음 설가가 온 날을 떠올렸다. 사납고 굶주린 짐승 같았다. 진양은 그를 길들였다. 굶주린 짐승이니 밥을 주고 사나운 짐승이니 다가가지 않았다. 다가오길 기다릴 뿐이었다. 진양은 설가의 과거에 대해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설가라고 이름을 붙여준 것도 진양이었다. 어느새 설가는 진양의 충견이 돼 있었다. 술을 마시면 지나치게 계집을 밝혀 종종 문제가 됐지만 진양은 설가를 아꼈다. 설가가 방이 생겨 좋다고 헤벌쭉 웃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순포가 진양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계집을 만나러 간 것 같사옵니다. 워낙 계집을 좋아하는 놈이니...”

진양은 단호히 말했다.

“설가는 단 한 번도 내 명을 허투루 들은 적이 없다, 계집질을 하다가도 내가 부르면 달려왔던 놈이다!”

진양이 김가를 보며 말했다.

“당장 사병들을 모두 불러라!”

비가 잦아들고 있었지만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사병들의 훈련장에 화톳불이 활활 타올랐고 횃불을 든 수십 명의 무사들이 집결했다.

진양이 그들을 보며 말했다.

“당장 이 일대를 샅샅이 뒤지거라! 설가를, 설가의 시신을 찾아내라!”

무사들은 놀라 서로를 보다가 뒷산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순포는 잔뜩 긴장해 달려갔다. 진양의 얼굴에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진양의 눈빛은 더욱 사나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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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숙원 홍씨 62. 진양, 비밀의 단서를 찾아내다 +2 20.10.15 1,953 1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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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숙원 홍씨 60. 무예시합이 끝나고 +3 20.10.08 1,973 13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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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원 홍씨 42. 비 오는 밤, 사라진 자들 +3 20.07.30 2,401 11 18쪽
41 숙원 홍씨 41. 이향의 마음 +3 20.07.27 2,427 11 16쪽
40 숙원 홍씨 40. 꽃비 그리고 고려 제일 무사 창이, 조선 제일 무사 백겸 +1 20.07.23 2,444 11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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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숙원 홍씨 38. 운명적인 만남 +2 20.07.16 2,498 1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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