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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연재수 :
9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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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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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09.1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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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숙원 홍씨 55. 단진의 간절함

DUMMY

숙원 홍씨 55. 단진의 간절함


하늘에 하얀 구름이 떠다녔다. 오늘도 운종가는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상점 앞에서 물건을 고르던 사대부가 사내와 오고가는 사내들이 한곳을 보고 있었다. 여인들 역시 한곳을 보았다.

도화와 월, 초련, 기녀들 다섯이 걸어왔다. 어찌나 화려하게 꾸몄는지 붉은 꽃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모두가 가채에 화려한 장신구를 했고 월과 초련은 전모를 쓰고 부채를 들었다. 다섯 명의 기녀들은 지우산을 어깨에 걸치고 돌리며 걸어왔다. 한지로 만든 우산에 저마다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도화는 월이만 데려가려 했지만 월은 다른 기녀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도화는 그녀들을 보고 입이 쩍 벌어졌지만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기녀들 뒤로 키가 큰 백겸과 창이가 보일 듯 말 듯 했다.

월과 기녀들의 걸음걸이는 상당히 느렸다. 그녀들은 걸으면서 지나치는 모든 이들에게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월이 부채질을 할 때마다 짙은 향기가 풍겼다. 도화는 생각 같아서는 잡아끌고 가고 싶었지만 필요했기에 참고 있었다.

월이 걷다가 멈췄다.

“헌데 성님...열매바위가 남색이오? 어찌 나보다 더 진양대군을 좋아한단 말이오! 돈이 필요하면, 내게 돈을 빌려 달라 했으면, 돈만 줬겠소!”

월은 한숨을 내쉬고는 초련과 함께 쪼르륵 장신구 상점으로 갔다. 노리개를 들고 서로에게 대보며 웃었다. 도화가 빨리 가자고 재촉했다.

월은 몇 걸음 걷다가 이번엔 비단을 파는 상점으로 갔다. 푸른색 비단을 들고 몸에 대보며 말했다.

“열매바위에게 이게 어울리지 않겠소? 헌데 성님, 성님은 마음은 꽃바위에 있으면서 어찌 꽃바위에게 이런 비단옷 하나 지어 입히지 않는 것이오?”

초련이 부채질을 하며 웃었다.

“몰라 묻느냐? 남들이 채갈까 무명옷만 입히는 것이지! 헌데 무명옷 입힌다고 향기까지 가려지겠느냐!”

기녀들이 까르르 웃었다. 지나가는 사내들이 힐끔거리자 기녀들은 부채질을 하고 지우산을 높이 들며 속살을 드러냈다.

도화는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초련이 말했다.

“성님, 정말로 바위들이 많단 말이지요?”

도화가 성질을 누르며 말했다.

“그래! 너희들이 좋아할만한 사내가 있는 곳을 알아서 데려가는 것이다, 허니 빨리

따라오거라.”

월이 찌푸렸다.

“내가 좋아할만한 사내가 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답니까? 열매바위는 하나인 것을...그러고 보니 성님, 매일 나가서 사내를 찾아다니는 것이오?”

뒤쪽에서 기녀들 모르게 따라오던 백겸과 창이가 도화와 눈이 마주쳤다.

창이는 애가 타서 죽겠는데 기녀들은 몇 걸음 걷고 멈추고 몇 걸음 걷고 멈추곤 했다. 창이는 빨리 가라고 신경질적으로 손짓을 했다.


도화와 월, 초련, 기녀들이 김종서 집 뒤쪽으로 가서 별채를 들여다보았다. 도화는 별채 마당을 보고서야 인옥이 왜 그들의 몸에 문신이 없다고 했는지를 알았다. 야인들은 윗옷을 벗고 검술 수련을 하고 있었다.

마당에서 목검을 들고 연습하던 호와 결, 석이 기녀들을 보았다. 기녀들은 울긋불긋 꽃이었다. 기녀들이 가져온 향기가 마당에까지 들어찼지만 그들에겐 닿지 않았다.

기녀들이 부채질을 하고 지우산을 돌리며 담장에 붙어 까르르 웃으며 그들을 보고 있었다.

도화가 마당에 시선을 둔 채로 서둘러 말했다.

“이쪽으로 오게 해. 얼굴을 보고 싶으니.”

월이 부채질을 하며 태평하게 말했다.

“그리 보고 싶으면 성님이 직접 하시오...”

월이 부채를 탁 접었다.

“허면 성님! 열매바위는 내 것이오!”

“그래 네꺼 하고. 빨리 불러!”

월이 신이 나서 마당을 향해 소리쳤다.

“이보시오! 이쪽으로 좀 와보시오!”

호와 결, 석은 움직임이 없었다.

월이 교태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보시오, 내가 굳이 이 담장을 타고 넘어가야겠소? 내 물어볼 게 있소!”

호와 결, 석은 서로를 보았다.

호가 담장 쪽으로 오자 월이 또다시 말했다.

“다 같이 오란 말이오! 모두에게 물어볼 말이 있소! 어서 와 보시오! 오지 않는다면 이년, 가지 않을 것이오! 담장에 붙어 꽃이 될 것이오! 담장에 붙어 밤낮으로 매미처럼 울어댈 것이오!”

결과 석도 빨리 보내자는 심정으로 담장 쪽으로 다가갔다.

도화의 심장이 뛰었다. 도화가 재빠르게 셋의 몸을 살폈지만 나비문신은 없었다.

다시 한 번 봤지만 상처투성이의 몸에 나비문신은 없었다.

월과 초련은 부채질을 하며 야릇하게 사내들을 보았다.

호가 감정 없이 물었다.

“무슨 일이오?”

월이 까르르 웃었다.

“꽃이 나비를 부르는데 이유 있겠소? 하도 잘난 사내가 있다길래 내 구경 왔소!”

기녀들이 까르르 웃었다. 월이 부채질을 할 때 저고리 사이로 속살이 드러났다.

그들은 월의 속살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도화는 그제야 그들의 눈빛을 보았다. 메마른 사막 같았다. 도화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이때 백겸과 창이가 기녀들 뒤로 지나가며 호와 결, 석의 몸을 살폈다. 문신은 없었다. 호의 눈길이 기녀들 뒤의 백겸에게 향하는데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데 이리 소란한 것이냐?”

호와 결, 석이 고개를 돌렸다. 승무가 방에서 나왔다.

승무가 기녀들을 힐끗 보고는 다시 들어가려다 멈춰섰다. 지우산 사이로 백겸이 보였다.

승무가 서둘러 마루에서 내려와 보니 기녀들 뒤에 있는 사내는 처음 보는 자였다. 기녀들의 분 냄새를 맡고 몰려온 사내가 여럿이었다. 월과 기녀들은 흥미를 잃었다는 듯이 떠나갔다.

승무는 거사를 앞두고 예민해져 있었다. 하지만 어제는 창이를 닮은 자를, 오늘은 백겸을 닮은 자를 본 게 왠지 불길했다. 승무의 시선이 아무도 없는 담장 너머에 머물러 있었다.


창이는 순간이었지만 담장을 따라 걸을 때 검을 쥔 손에 살기가 느껴졌다. 창이는 검을 잡은 순간부터 자신의 생각보다 몸이 더 먼저 움직인다는 걸 알았다. 나비문신을 보는 순간 베었을 것이다. 창이는 나비문신이 없는 걸 확인했을 때 실망했다.

창이는 두렵지 않았다. 창이가 두려운 건 단진을 잃게 되는 것이다.

백겸 역시 담장을 따라 걷던 그 짧은 시간이 생사를 넘나드는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검을 쥔 손에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땀이 흥건했다. 나비문신이 있었다면 베어야 했다. 그러다 자신이 잘못돼 단진이 혼자 남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까지 수많은 생각이 오갔다.

백겸과 창이 도화가 다시 운종가로 들어섰다. 아까 이 길을 걸어갈 때에는 어두컴컴한 동굴로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들키지 않고 동굴 속 적에게 다가가기 위해 잔뜩 긴장해 있었다. 지금은 허허벌판에서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검을 뽑아들고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모든 적들을 베어버릴 각오가 돼 있었다.

기방 앞에 다다랐을 때 반갑지 않은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삼년이 아주 친한 척하며 말했다.

“나 찾았다면서? 주모가 말해줬어! 어젯밤엔 광통교에 숨어 있었어.”

삼년은 왈패들과 민가의 부부가 죽은 게 자신의 완벽한 계획 탓이라고 책망당할까봐, 그걸로 인해 버려질까봐 눈치를 살폈다.

민가의 부부가 죽은 참혹한 현장을 목격한 삼년은 겁에 질려 있었다. 국밥집에서 검은 무사복을 입은 자들을 보고 무서워서 도망치듯 빠져나와 광통교로 갔다. 그곳에서 거지들과 하룻밤을 보냈다. 삼년이 다시 한 번 깨달은 건 백겸 창이 도화 이들만이 살길이었다.

삼년은 계속 나불댔다.

“내가 죽으면 돌아갈 길을 잃게 되잖아. 그래서 살기 위해 잠깐 피신해 있었어. 잘했지? 나 왜 찾았어? 내가 없으니까 일이 안 돌아가지! 무슨 일 할까? 뭐부터 할까?”

도화와 백겸 창이에겐 삼년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도화가 백겸과 창이를 보았다.

“하나는 해결했어. 김종서 집 야인들은 나비문신이 없어. 자객을 보낸 놈들이 아니야. 이제 어쩔 거야?”

백겸이 차분히 말했다.

“기다려야지. 나비문신은 이향한테 날아들 테니까.”

창이가 말했다.

“내일 경복궁 앞에서 이향을 따라갈 거야. 한성부에 들어갈 방법도 찾아봐야지.”

도화가 말했다.

“듣던 중 가장 좋은 계획이네. 기다린다. 좋다. 문제는 서봄이네...”


단진은 처소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새벽이슬에 젖어 있을 땐 햇살이 따스해 고맙더니 계속 서 있으니 어지러웠다. 가을이 왔다고는 하지만 한낮의 햇살은 뜨거웠다.

공두는 옆에서 물동이를 엎어두고 앉아 약밥을 먹었다.

“닭 네가 별별 미친 짓을 다 하는 걸 봤지만, 물귀신 작전을 쓸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너는 정말 네 별명에 맞게 최선을 다해 사는구나...미친 서봄...”

공두가 한 입 더 베어 물고 말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머리는 없고 몸통만 있는 너를 팀원으로 두고 브레인 하는 거. 너무 너무 힘들다...하루죙일 이 딱딱한 물동이에 앉아 있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냐? 닭, 너는 나한테 잘해야 한다! 부모한테 효도한다는 건 옛말이야. 요즘은 브레인이 곧 부모야. 나한테 효도해야 하는 거야.”

공두가 윗사람이 아랫사람한테 하듯 톤을 바꾸어 말했다.

“홍단진 너는 앞으로 녹봉의 반을 내놓거라!”

공두는 단진이 향의 미움을 받아 궁 밖으로 나갈 일이 없게 돼 기분이 좋았다. 또한 저렇게 기운이 빠져 있으니 내일은 몸살이 나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단진은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향은 비현각에 앉아 장계를 보고 있었다. 책상 위엔 읽어야 할 장계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향은 다 읽은 장계를 오른쪽에 두었다. 향은 또 다른 장계를 펼쳐 읽었다. 꼼꼼하게 장계를 읽었고, 읽고 나서는 생각을 하고, 그 다음에는 빈 서책에 적었다.

촛불이 밝혀졌다. 향은 빈 서책에 글을 써내려갔다. 박 내관이 먹을 갈아놓으러 들어와 향을 살폈다. 향의 붓은 거침없었다. 박 내관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박 내관이 또다시 먹을 갈아놓으러 들어왔다. 박 내관은 향의 눈치를 살폈다. 제멋대로인 단진이 꼴 보기 싫긴 하지만 향을 걱정하는 마음은 박 내관도 같았다.

박 내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하...소신이 어제 최 별감을 만났사온데, 최 별감도 그날 밤에 수상한 낌새를 느꼈다 하옵니다. 누군가 따라붙은 게 느껴져 긴장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졌다 하옵니다.”

.....

“저하...홍단진의 행동은 야단맞아 마땅하오나, 소신도 저하께서 내일 나가지 않으셨으면 좋겠사옵니다.”

향이 서책의 마지막 장을 쓰고 덮었다.

“단진이는 아직도 그대로 있느냐?”

“장 내관이 지금 왔사온데, 이제껏 움직이지도 않고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있다 하옵니다.”

향이 일어섰다.


내금위 마당에 화톳불이 훤하게 밝혀져 있었다. 별감들의 기합소리와 목검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십 명의 별감들이 검술 대련을 하고 있고 최 무사가 감독하고 있었다. 최 무사는 별감들 사이를 걸어 다니며 살폈다. 최 무사는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팔에 힘을 빼거라!” “정신을 똑바로 차리거라!” “그게 아니라 했다!”

최 무사가 별감들을 보며 소리쳤다.

“그만!”

모두가 일제히 줄을 맞춰 목검을 세우고 최 무사를 보았다.

“너희들은 내일 야인과의 무예시합을 위해 그동안 애써왔다! 허나, 너희들은 본분을 잊어선 아니 된다! 너희들은 세자저하의 안위를 지키는 일이 최우선이다! 어떤 경우에도 저하의 곁을 떠나선 아니 된다.”

최 무사의 시선이 정 무사에게 닿았다. 정 무사가 고개를 숙였다.

“지난번처럼 또다시 경솔하게 저하의 곁을 떠났다가는 내금위를 떠나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예!”

“내일은 세 개조로 나누어 저하를 호위한다. 일조는 나와 함께 저하를 뫼시고 한성부로 간다. 이조는 우리의 뒤를 따라 수상쩍은 자가 있는지 살핀다. 삼조는 먼저 한성부로 가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 알겠느냐?”

“예!”

“다시 한 번 말한다. 일조는 수상쩍은 기미가 보였을 때 너희들이 할 일은 세자저하의 곁을 지키는 것이다. 지원군이 올 때까지 너희들은 목숨을 걸고 저하를 지켜야 한다. 알겠느냐?”

“예!”

먼발치에서 향이 그들을 보고 있었다.


향이 비현각을 나섰다. 공두가 제등을 들고 향을 따랐고 박 내관이 곁에서 함께 걸었다. 박 내관이 향의 눈치를 살폈다. 이 길은 단진의 처소로 가는 길이었다.

먼발치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단진이 보였다. 달빛조차 구름에 가려 있었다. 향이 단진을 보았다. 향이 단진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보폭이 커졌다. 느긋하게 걷던 공두가 제등을 비추기 위해 후다닥 앞서 갔다. 박 내관이 뛰듯이 향을 따랐다.

단진이 가까워지자 박 내관이 공두에게 눈짓을 했다. 공두는 알아듣고 제등을 박 내관에게 넘겨주고는 달려갔다.

향이 단진이 앞에 섰다. 단진의 얼굴은 초췌했고 서 있는 것도 힘겨워보였다.

단진이 향을 보았다. 단진의 힘없이 꺼져가던 눈에 빛이 났다.

향이 단진을 보다가 말했다.

“그만하면 되었다. 처소로 들어가거라.”

“그리 할 수 없사옵니다. 소인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사옵니다.”

“아니 된다 했다.”

“알고 있사옵니다.”

“네가 이리 고집을 부린다면 박 내관이 야단을 맞을 것이다, 또한 장 내관도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단진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결기가 느껴졌다.

“저하의 안위가 걸린 일이옵니다. 박 내관님도 장 내관도 저하를 위해서라면 목숨인들 아깝겠사옵니까! 저하 뜻대로 하십시오!”

박 내관의 입이 쩍 벌어졌다. 박 내관이 다급히 말했다.

“어서 가지 못할까! 저하께서 네가 걱정이 돼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냐!”

향이 말했다.

“따라 오너라!”

향이 단진이 처소로 들어갔지만 단진은 그대로 있었다. 박 내관은 강제로 단진의 등을 밀어댔다.


처소 안은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촛불이 일렁였다. 박 내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박 내관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단진의 처소를 밝게 하기 위해 등불과 초를 잔뜩 가져다 놓았다. 저하께서 오셨을 때 공두에게 눈짓을 하면 먼저 들어가 초에 불을 밝히기로 했었다. 하지만 이건 그냥 밝은 게 아니고 분위기가 묘했다. 촛불이 일렁일 때마다 박 내관의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공두가 박 내관의 칭찬을 기다리며 다가갔지만 박 내관은 눈을 부라렸다. 박 내관은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가다 입구에 있는 초 몇 개를 불어서 껐다. 박 내관은 아주 천천히 문을 닫았다.

향이 단진이 앞에 섰다. 단진은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촛불이 일렁였다.

단진의 창백한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지만 단진은 버티고 있었다.

향이 단진을 보았다.


‘물고를 당해도 좋사옵니다. 죽어도 좋사옵니다. 저하...죽음이 두려워 입을 다문다면, 저하껜 누가 바른 말을 할 것이며, 누가 저하를 지킬 것이옵니까! 저하께서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걸 소인은 보고 있을 수 없사옵니다. 차라리 소인이 먼저 뛰어들 것입니다! 해서 소인이 활활 타올라 저하께 불구덩이란 걸 알려드릴 것입니다!’

.....

‘한 사람을 지키는 일은 한 세상을 지키는 일이온데 어찌 힘이 들지 않겠습니까! 소인은 괜찮사옵니다. 지킬 수 있는 저하가 있어 괜찮고,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 괜찮고, 저하를 이리 보니 괜찮사옵니다. 소인은 이곳에 있겠사옵니다.’

.....

‘아니 되는 걸 안다 해서, 어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소인이 나가 역당을 잡을 수도 없는 일이고 저하를 지킬 힘조차 없사옵니다. 소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이것이 전부이옵니다. 헌데 이것마저 하지 말라 하시면 소인은 어찌...’

...

‘신하들과의 약속보다 저하의 안위가 우선이옵니다!’

‘야인들의 무예 실력은 후일에도 볼 수 있는 일이옵니다!’

‘내금위 별감들이 저하를 지키려다 다 죽게 될 것입니다! 별감들의 실망은 잠깐이지만 그들의 목숨은 돌이킬 수 없사옵니다!’

‘저하...저하는 저하의 일을 하십시오. 소인은 소인의 일을 할 것이옵니다!’


처소 안은 촛불만이 일렁일 뿐 향과 단진은 움직임이 없었다. 향은 단진을 바라보고 있었고 단진은 여전히 눈길을 들지 않았다.

촛불이 일렁였다.

수명을 다한 초가 마지막으로 가장 밝은 빛을 드러냈다. 불꽃이 타오르더니 사라졌다. 자신의 몸을 다 태우고 하나 둘 꺼져갔다.

단진의 시선이 머문 용포가 불꽃에 밝아졌다 흐려졌다.

단진은 꺼져가는 촛불처럼 정신이 혼미해졌다. 향의 용포가 흐릿해지자 향이 없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단진이 서둘러 눈길을 들었다. 향이 있었다. 향의 깊은 눈이 단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향이 단진의 맑은 눈을 보았다.

“이제야 나를 봐주는 것이냐?”

....

“네가 봐주니 좋구나...”

향이 미소 지었다.

미소가 너무도 따뜻해 단진의 긴장감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단진은 향의 앞에 엎드렸다.

“저하...내일도...모레도...이리 저하를 보게 해주십시오...”

....

“저하...위험하다 여기면 가지 마십시오. 힘든 길은 가지 마십시오. 원칙을 지키는 저하가 되지 마십시오. 완벽한 저하가 되지 마십시오...그저...백성의 곁에 오래도록 있는 그런 군주가 되십시오...저하...소인의 마지막 청을 들어주십시오...”

향이 단진의 앞에 앉았다. 단진이 고개 들어 향을 보았다. 단진의 눈에서 간절함이 흘러 내렸다.

향이 단진을 보았다.


숲속에 수많은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스무 명의 형제들이 장검을 뽑아 들었다.

윤이 그들 앞에 있었다. 윤의 눈빛은 맹수처럼 사나웠다.

“내일 나의 피는 이향의 피 위에 뿌려질 것이다, 우리의 피로 고려인의 한을 풀어 줄 것이다!”

형제들의 눈이 횃불처럼 타올랐다.

“우리의 수급은 수습되지 않을 것이다. 허나 우리는 고려인으로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우리의 땅인 이곳에, 우리 고려인이 살게 될 이 땅에 살게 될 것이다!"

윤이 장검을 넣고 단검을 꺼내 자신의 머리카락 끝을 잘라 보자기에 넣었다. 모든 형제들이 머리카락 끝 부분을 잘라 같은 보자기에 넣었다.

“우리 고려인이 땅을 되찾는 날, 우리는 이곳에 묻힐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고려에 묻힐 것이다!”

윤이 형제들과 하나 하나 눈을 마주치고 소리쳤다.

“고려인이여 살아나라!”

“고려인이여 살아나라!”

그들은 입고 있던 무사복을 벗었다. 각자 위장할 옷으로 갈아입었다. 윤이 저고리와 바지를 벗었다. 상처투성이의 몸이 드러났다. 땅에 놓인 횃불에 윤의 무릎 아래에 나비문신이 보였다. 다른 형제들도 종아리에 나비문신이 있었다.

그들은 농부에서부터 상인, 사당놀이패로 위장해서 도성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수레의 바닥을 뜯어내고 그곳에 검을 넣고 볏짚을 쌓았다. 수레에 검을 숨기고 들어갈 형제 둘이 준비를 끝마쳤다.


별채 방에 용무용과 승무, 결, 석이 앉아 있었다. 호가 들어와 준비를 다 마쳤다고 보고하고 앉았다. 거사 전의 긴장감과 흥분이 그들을 들뜨게 했다.

용무용은 이향의 피가 뿌려질 걸 생각하자 가슴이 뜨거워졌지만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되기에 냉정을 되찾았다.

용무용이 말했다.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드디어 내일이다.”

용무용이 호와 결, 석을 보았다.

“정신을 바짝 차리거라! 너희들은 내일 형제들이 이향을 벨 때 아무것도 해선 아니 된다. 형제들의 피가 뿌려진다 해도 표정 하나 바뀌어선 아니 된다. 알겠느냐?”

“예 형님.”

“윤이 이향을 베고 나서는, 나와 너희들이 형제들을 베어야 한다.”

호와 결, 석의 심장이 뜨거워졌다.

“그래야 믿음을 줄 것이다. 또한 형제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우리가 보내줘야 한다. 형제들은 대의를 위해 기꺼이 죽을 것이다. 알겠느냐?”

“예 형님!”

“또한 검술시합을 할 때 너희들은 최대한 놈들의 힘을 빼놔야 한다. 허나 다쳐선 아니 된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용무용이 바짝 긴장해 조용히 하라고 손을 들었다. 호와 결이 잽싸게 검을 뽑아 슬그머니 문 쪽으로 갔다. 호가 문을 열려는 찰나에 목소리가 들렸다.

“순포입니다.”

문이 열리고 검은 복면을 쓴 순포가 들어와 복면을 내렸다.

용무용이 놀라 보았다.

“조심하라 그리 일렀거늘 여길 오면 어쩌자는 것이냐?”

“상황이 너무 긴급하여 왔습니다.”

용무용이 보았다.

순포가 다급히 말했다.

“이향이...이향이...”

용무용이 놀라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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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숙원 홍씨 56. 이향, 무예시합에 가지 않기로 하다 +1 20.09.17 2,065 10 17쪽
» 숙원 홍씨 55. 단진의 간절함 +1 20.09.14 2,090 9 21쪽
54 숙원 홍씨 54. 향을 지키려는 단진 +2 20.09.10 2,118 10 18쪽
53 숙원 홍씨 53. 나비문신 +2 20.09.07 2,139 10 19쪽
52 숙원 홍씨 52. 죽이려는 자, 지키려는 자 +1 20.09.03 2,164 11 21쪽
51 숙원 홍씨 51. 단진, 향의 위험을 알아채다 +1 20.08.31 2,189 11 20쪽
50 숙원 홍씨 50. 무예시합 날이 정해지다 +2 20.08.27 2,203 11 22쪽
49 숙원 홍씨 49. 여인 홍단진의 결심 +1 20.08.24 2,229 11 20쪽
48 숙원 홍씨 48. 백겸과 창이, 진양대군을 만나다 +2 20.08.20 2,269 11 21쪽
47 숙원 홍씨 47. 목멱산의 결의 +4 20.08.17 2,300 11 21쪽
46 숙원 홍씨 46. 계유정난을 막아라 +2 20.08.13 2,335 11 20쪽
45 숙원 홍씨 45. 단진의 고백 +2 20.08.10 2,349 11 20쪽
44 숙원 홍씨 44. 홍단진, 주상전하를 만나다 +2 20.08.06 2,364 12 18쪽
43 숙원 홍씨 43. 백겸과 창이 한양 기방에 들다 +1 20.08.03 2,388 11 16쪽
42 숙원 홍씨 42. 비 오는 밤, 사라진 자들 +3 20.07.30 2,401 11 18쪽
41 숙원 홍씨 41. 이향의 마음 +3 20.07.27 2,427 11 16쪽
40 숙원 홍씨 40. 꽃비 그리고 고려 제일 무사 창이, 조선 제일 무사 백겸 +1 20.07.23 2,444 11 20쪽
39 숙원 홍씨 39. 이향, 김종서와 야인을 만나다 +2 20.07.20 2,465 11 19쪽
38 숙원 홍씨 38. 운명적인 만남 +2 20.07.16 2,499 1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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