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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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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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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3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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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원 홍씨 51. 단진, 향의 위험을 알아채다

DUMMY

숙원 홍씨 51. 단진, 향의 위험을 알아채다


삼년이 대두 왈패들에게 시신이 실린 수레를 가져다 놓은지 꽤 지났지만 들창코 왈패 패거리들과 싸움이 났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삼년은 들창코 왈패들이 된통 당하는 걸 보고 싶었는데 아무 소식이 없자 조바심이 났다. 대두 왈패들 소굴은 차마 무서워서 가지 못하고 한양에서 소식이 가장 빠른 광통교 아래로 갔다.

광통교 아래에는 거지 패거리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 중 말놈이가 삼년과 알고 지냈다. 말놈이는 열대여섯 정도의 나이에 넙적한 얼굴에 체구가 작았다. 어릴 적 못 먹어서 자라다 말았다고 했다. 하지만 목소리만큼은 우렁찼다. 말놈이는 삼년을 보자마자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냐고 지랄지랄했다. 말놈이가 구걸하며 들은 정보를 물어다주면 삼년은 도둑질을 하고 그 돈으로 노름을 했고, 올 때마다 말놈이에게 먹을 걸 가져다주었다고 했다. 삼년이 노름빚으로 도망 다니기 전에는 이곳에서 살았다고 했다.

삼년은 도화 일행을 만난 이후로 이곳에 발길을 끊었었다. 삼년은 주막에서 슬쩍한 주먹밥 두 개를 말놈이에게 주었다. 말놈이가 주먹밥을 스윽 감추며 주변을 살폈다. 볏단을 덮고 자거나 볏단 위에 앉아 있는 거지들이 코를 킁킁거렸다.

이곳은 무질서해 보여도 각자의 영역이 있었다. 볏단이 각자의 집이었고 볏단 위에는 구걸하는 바가지가 놓여 있었다. 집도 개성이 있었다. 어떤 거지는 볏단으로 천막을 만들어 놓고. 부채를 펴놓기도 하고 어떤 거지는 나무를 파서 만든 조각으로 자신의 집을 가꿨다. 어떤 거지는 주운 쓰개치마를 이불로 덮었다.

이곳 거지들은 왈패들과는 다르게 도둑질을 하지 않았고 게을러서 싸우는 걸 싫어했다. 구걸을 해서 먹고 살았고 먹을 걸 놓고만 다퉜다.

말놈이는 거지 소굴에서 조금 벗어나 나무 아래에 주저앉았다. 말놈이의 똘마니 노릇을 하는 열 살이 조금 넘은 놈이도 따라나섰다. 놈이도 체구가 작았고 때 구정물을 벗겨내면 꽤 귀여웠을 얼굴이었다.

삼년도 말놈이 옆에 걸터앉았다. 말놈이는 주먹밥을 놈이에게 나눠주었다. 며칠이나 굶은 듯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이들은 먹을 땐 절대 말을 하지 않았다. 해서 기다려야 했다.

삼년은 멍하니 있었다. 조선에 와서 처음으로 누려보는 여유였다.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주변엔 푸르른 나무들이 많고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삼년은 광통교로 지나다니는 사대부가 사내들을 보았다. 덥지도 않은데 부채를 부치며 뒷짐을 지고 걷고, 몸종이 말을 끌고 그 위에 앉아 하늘과 푸르른 나무를 보며 풍류를 즐기는 사내, 가마를 타고 가는 사내도 보였다.

사대부가 애기씨와 몸종이 함께 걸었다. 애기씨가 얼굴이 예쁜지 지나가는 도령들이 힐끔댔다. 또한 애기씨 뒤로 도령 셋이 따라오고 있었다.

광통교 아래에선 몇몇 거지들이 다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광통교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물건을 떨어뜨릴 때가 있었다. 가장 큰 수확은 역시 돈 주머니였다. 그런 행운은 자주 오지 않았다. 가장 많이 떨어뜨리는 게 부채였다. 하지만 부채도 돈이 돼 팔면 꽤 짭짤했다. 이 바닥에선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였다.

한 도령이 부채를 펼친다는 것이 그만 아래로 떨어뜨렸다. 거지들이 물로 뛰어들어 먼저 차지하려고 서로를 밀쳐댔다.

삼년은 지랄들 한다면서 돌멩이를 시냇물에 던졌다. 누구는 비단 옷 입고 연애질인데 누구는 거지 밥 처먹는 거나 기다리고 앉아있으니 세상 불공평하단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야말로 전주 이씨 이성계의 직계손인데 왜 하필 노비 신세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삼년은 조선에 온 이후로 하루에 만 번도 더 질문했다. 내가 왜? 왜 노비야? 왜?

삼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화 백겸 창이는 자신을 무시하고 저희들끼리만 돌아다녔다. 처음엔 그들과 함께 하기만 하면 바랄 게 없었는데 이젠 같이 어울리고 싶었다. 삼년도 대화라는 걸 하고 싶었다. 불현듯 죽은 육갑이 떠올랐다. 육갑은 삼년의 말이라면 다 들어주었고 삼년이 가장 똑똑하다고 여겼었다. 삼년은 고개를 내저어 육갑을 물리쳤다. 그리고 육갑은 단진이가 죽였다고 중얼거렸다.

말놈이가 남은 주먹밥을 입에 넣고 말했다.

“삼년이 너 없는 동안 이상한 일이 있었어...”

삼년은 말놈이를 보았다. 나이도 한참 어린놈이 꼭 ‘너’ 라고 불렀다.

말놈이는 목이 메는지 서둘러 가서 얼굴을 시냇물에 처박고 꿀꺽꿀꺽 마셨다. 놈이도 말놈이를 따라 했다. 말놈이가 입가에 묻은 물을 손으로 쓰윽 닦아내자 놈이도 따라 했다.

말놈이가 삼년 옆에 주저앉아 입을 열었다.

“대두 왈패들...”

삼년이 귀를 쫑긋 세웠다.

“대두 왈패들이 어디서 구했는지 비싼 긴칼을 들고 장터에 나타났어. 들창코 왈패 소굴에도 가고, 장돌 왈패 소굴에도 가고, 모든 왈패들에게 자랑질을 하고. 매일같이 비싼 긴칼을 들고 다니면서, 지들은 이제부터 도적질을 안할거라믄서, 긴칼을 든 수준에 맞게 살 거라고 한 거여. 다른 왈패들이 훔쳤다고 했는데두 절대루 안 훔친 거고...뭐라더라...뭘 묻어줬다나...암튼 피땀 흘려서 번 거라고 떠들고 다닌 겨...”

삼년은 벙 쪄서 듣고만 있었다. 자신의 생각과 왈패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랬는데, 들창코 왈패 패거리 중에 젤 어린놈이, 대두 왈패의 칼에 손을 댔다가 뒤지게 두들겨 맞은 겨.”

놈이가 입 안 가득 주먹밥을 물고 말했다.

“그냥 두들겨 맞은 게 아니야, 대갈빡이 다 터졌어...”

“암튼 그래서, 야밤에 들창코 왈패놈들이 대두 왈패놈들에게 쳐들어갔는데. 다 뒤져있더래...”

삼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죽어? 누가?”

“대두 왈패들이 다 뒤져있더래. 그리고 그 긴칼도 없더래. 어떤 놈들이 와서 다 죽이고 칼 훔쳐갔다고 했어. 근데 다른 왈패들은, 들창코 왈패들이 다 죽이고 칼을 훔쳐가 놓고는 발뺌한다고 수군댄다니까...”

삼년은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놈이가 말했다.

“삼년이 얘가 노름빚 갚기 싫어 다 죽인 거 아녀!”

놈이와 말놈이가 썩은 이를 드러내며 깔깔 웃었지만 삼년은 웃지 않았다.


공두가 뒷간 앞에서 팔에는 수건을 걸치고 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서 있었다. 뒷간 문이 열리고 박 내관이 나왔다. 박 내관은 공두를 보고 놀랐다.

“네놈이 예서 무얼 하는 것이냐?”

공두가 배시시 웃으며 대야를 내밀었다.

“박 내관님께서 큰일을 보시는데 제가 어찌 가만있겠습니까!”

박 내관은 공두의 아부가 싫지는 않은 듯 손을 씻었다. 공두가 수건을 내밀자 박 내관이 손을 닦았다.

공두가 예의바르게 말했다.

“박 내관님, 통변하는데 불편함은 없으셨습니까?”

“왜 없었겠느냐?”

“통변하시면서도 홍단진이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습니까? 이런...이런...”

박 내관은 요즘 단진이 때문에 자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났다. 매일같이 저하께서 단진이와 함께 방에서 이야길 하시고 산책을 하셨다. 박 내관은 어쩔 수 없이 단진이가 저하께서 침소 드실 때 살펴드리게 했다. 그래야 단진이 저하의 처소에 있는 게 이상하지 않았고 저하께서 단진의 처소에 가는 걸 막을 수 있었다. 또한 밤마다 산책하실 땐 꼭 공두까지 함께 가게 했고, 만일을 대비해 단진의 처소에 등과 초를 잔뜩 가져다 놓았다.

그나마 요즘은 공두가 박 내관의 비위를 잘 맞췄다. 박 내관이 한숨을 쉬면 무엇 때문인지 단박에 알아맞히고 아부를 떨었다. 시도 때도 없이 생기다 만 단진의 흉을 봐서 박 내관의 마음이 편했다.

공두가 박 내관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박 내관님, 저하께서 한성부 가실 때 홍단진이 따라가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나인 주제에 감히 어찌 제 맘대로 저하를 따라간다는 것이냐! 말이 되는 소릴 하거라!”

“예 박 내관님, 행여라도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되겠기에 미리 알려드리는 겁니다. 홍단진이 그날 궁 밖으로 나가 도망을 가려는 것 같습니다.”

박 내관이 눈을 부릅떴다.

“홍단진이 뭐라 했느냐? 사실대로 말해 보거라!”

“증좌는 없습니다. 허나 저하께서 한성부에 나가실 때 자신은 고향에 간다고 했습니다. 이게 뭐겠습니까! 도망가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허니 절대 홍단진을 궁 밖으로 내보내선 아니 됩니다. 제가 따라가긴 하겠지만...지난번처럼 혹시라도 놓칠까 싶어...”

공두가 박 내관의 눈치를 보았다.

박 내관은 단호히 말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다! 홍단진은 궁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할 것이다! 너는 앞으로도 더욱 철저히 감시하거라 알겠느냐?”

“예...박 내관님!”

공두가 씨익 웃었다.

박 내관이 걸어가자 공두는 뒤를 따랐다. 공두는 대야에 있는 물을 쫙 버리고 신이 난 듯 엉덩이를 볼썽사납게 흔들었다. 공두는 몇 걸음 걷다가 춤을 추고 또 몇 걸음 걷다 춤을 추었다.

단진이 담장 뒤에서 나와 벙찐 얼굴로 공두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도화 백겸 창이를 만나고 온 공두는 단진에게 모두가 잘 있다고 했다.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고 한글편지 사건을 저질렀으니 궁 밖엔 나오지 말라고 했다. 특히 저하가 한성부에 가는 날은 모두가 약속이 있어서 바쁘다고 했다. 해서 단진을 만날 수 없으니 절대 나오지 말라고 했다. 공두는 그렇게 말을 전하고는 바쁘다면서 후다닥 내빼듯이 갔다.

단진은 생각해보니 인옥이 소식을 물어보지 못해 공두를 다시 찾았다. 다른 내관이 공두가 뒷간에 갔다고 알려줬다.

단진이 공두를 부르려는 찰나에 박 내관이 나와서 담장 뒤로 숨어있었다. 단진은 공두가 박 내관에게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뭔가 꿍꿍이가 있었다. 백겸 도화 창이를 만나고 무슨 이야길 들었는데 단진에겐 숨기고 있었다.

단진은 공두가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


“여름이 준이 태희는 아주 잘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또한 닭은 잘 듣거라, 네가 한글편지 써서 이 브레인님이 힘드셨다. 하지만 이 브레인님은 너그러이 널 용서했다, 허니 밖에 나가선 아니 된다. 알겠느냐?”

“그래도 다들 기다릴 거야. 저하 나가실 때 따라 나가는 건 괜찮잖아!”

공두가 흥분해서 말했다.

“저하 따라 나갔다 죽을 일 있냐!”

공두는 아차 싶어 서둘러 둘러댔다.

“여름이한테 맞아 죽을 일 있냐고! 여름이가 너 한글편지 쓴 거 때문에 화가 났어, 그러니까 절대 나오지 말래. 꼴도 보기 싫대! 특히 저하 한성부에 나가시는 날, 태희 여름이 준이가 약속이 있대, 정 나오고 싶으면 그 다음 날 나오래. 알았냐?”


단진은 혼잣말했다.

“원빈이가 태희를, 왕태희라고 하는데 웬일로 태희라고 한 거야? 궁 밖에 나가면 안 된다...특히 저하께서 가실 때 나가면 안 된다...그날 약속이 있다? 나오고 싶으면 다음 날 나오라고? 편지사건 때문에 나오지 말라고 해놓고...뭐야...대체...”

단진은 서둘러 동궁전으로 향했다. 공두가 그곳으로 갔을 것이다. 향은 어전회의를 끝내고 강녕전에 들었다. 향은 늦게까지 강녕전에서 전하와 함께 있을 계획이었다. 해서 박 내관이 단진에게 동궁전과 비현각 정리를 하라고 했다.

분명 뭔가가 있었다.

단진은 공두가 했던 말을 되새김질하다 답답해서 멈춰섰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가려는데 하늘의 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구름이 뭉실 뭉실 떠 있었다.

어제도 맑은 하늘에 하얀 구름이 가득했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찾아온 것인지, 하얀 구름에 파란 하늘이 찾아온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향이 걸어가다가 멈춰섰다. 향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단진이 따라서 하늘을 보았다. 향과 단진은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은 구름을 보고 있었다. 향은 잠시 있다가 다시 걸어갔다. 단진이 따라 걸었다.

단진은 향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향이 멈춰서 하늘을 올려다본 건 단진에게 하늘을 보여준 것이고. 향이 멈춰서 바람을 느끼면 단진에게 바람을 느끼게 해준 것이다. 향과 단진은 떨어져 있었지만 단진은 향과 함께 있었고. 향은 돌아보지 않았지만 단진에겐 향의 미소가 보였고. 향이 말을 하지 않았지만 단진에겐 들렸다.

향은 어디를 가든 꼭 경회루를 거쳐서 갔다. 단진이 향에게 경회루가 아름답다고 했었다. 경회루를 걸으면 행복하다고. 향은 말없이 경회루를 걸으며 단진을 행복하게 해주었다.

단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단진은 비현각의 창을 활짝 열었다. 창 사이로 나뭇잎이 바람에 나부꼈다. 나뭇잎들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단진은 밖을 보는 척하면서 공두를 살폈다. 단진이 돌아보자 공두는 서책을 펴서 읽고 있었다. 공두는 책에 심취한 듯 보였다. 단진은 어이가 없었다. 공두가 책을 읽을 리도 없었고 더구나 논어였다.

단진은 공두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책상을 정리했다. 향의 책상은 단정했다. 향이 떠오르자 단진은 또다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다 자신을 보고 있는 공두와 눈이 딱 마주쳤다. 공두는 서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단진은 더는 의심할 것도 없었다. 공두는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단진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단진은 서책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먼지라도 묻었을까 싶어 후후 불었다. 그러는 사이사이 공두에게 치고 들어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공두는 펼친 서책 사이로 눈만 빼꼼 내밀고 단진을 보고 있었다.


거목 아래에 공두가 앉아 있고 백겸 창이 도화가 빙 둘러 서 있었다. 도화가 그날 밤 자객이 이향을 쫓았고 백겸과 창이가 자객을 처리했다고 했다. 또한 이향이 한성부에 나오는 날 자객들이 다시 노릴 가능성이 있어 위험하다고 했다.

공두는 가만히 있다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무슨 또. 뭐 엄청 대단한 일이라고...별 일도 아닌 거 가지고.”

백겸이 물었다.

“좋은 대책 있어?”

“야! 닭은 닭장에 가두고! 저하는, 박 내관한테 말하면 알아서 내금위에서 별감들 보내겠지. 이런 일은 나라의 녹을 먹는 나한테 맡기고, 미천한 너희들은 어서 가 보거라!”

공두가 허세를 부리며 일어섰다.

도화가 싸늘히 말했다.

“야, 나원빈, 장난하지 마! 네가 박 내관한테 자객 얘길 하는 순간, 여기 있는 서여름 독고준 나, 그리고 너, 서봄, 다 자객과 한패가 되고 역당이 되는 거야!”

공두가 움찔했다.

“왜? 내가 왜?”

“민혁은 죄가 있어서 죽었어?”

공두는 죽은 민혁이 떠올랐다.

“우리가 문종을 위협하는 자객을 물리쳤다고 상을 내릴 것 같아? 아니야, 얘들은 아직 신분도 몰라! 거기다 서여름 독고준 너랑 서봄을 쫓아간 건데, 왜 쫓았냐고 물으면, 친구라고 해? 친구 쫓다가 자객 다 죽였다고? 너는 함길도에서 온 얘들하고 왜 친구가 된 건데? 앞뒤가 안 맞잖아! 여기 조선이야! 조선에선 입 닥치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서봄, 문종이 한성부로 나갈 때 못 나오게 해!”

공두가 도화를 째려보며 말했다.

“그러면, 그렇게 잘난 네가 해!”

공두가 가려는데 백겸이 잡았다.

“원빈아, 봄이, 부탁 좀 하자!”

창이가 달랬다.

“너 브레인이잖아. 솔직히 여기 너보다 머리 좋은 사람 누가 있어! 봄이 못 나오게 할 사람 너 밖에 없어!”

공두가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백겸을 보았다. 창이가 백겸을 툭 쳤다.

백겸이 말했다.

“그래, 너 브레인이잖아!”

공두는 기분이 좋아 입가가 씰룩였다. 공두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치켜들고 도화를 보았다. 백겸과 창이가 도화를 보고 있었다.

도화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너 브레인이다.”

공두가 찌푸렸다.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크게 말해!”

도화는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걸 참았다. 백겸과 창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공두가 백겸을 보며 쌀쌀맞게 말했다.

“서봄은 네 쌍둥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 나는 궁 밖에 안 나갈 거야!”

도화가 큰 소리로 말했다.

“나원빈, 너 브레인이다!”

공두가 도화를 비웃었다.

“그걸 이제 알았냐?”

공두가 거만하게 걸어갔다. 가다가 돌아서서 그들을 보았다.

“닭은 나한테 맡겨! 아~브레인님이 나서야지!”


공두는 정식으로 궁팀 뿐 아니라 조선 브레인이 됐다. 어차피 저하는 내금위에서 알아서 잘 지킬 터였다. 공두가 걱정하는 건, 단진이 때문에 따라 나갔다가 자기가 위험해질까 하는 거였다. 공두는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단진을 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해야 했다. 그리고 절대로, 자객들이 저하를 노린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을 것이다. 공두는 브레인이니까. 공두는 도화에게 브레인 소리를 들은 게 가장 기분이 좋았다. 이겼다. 한껏 우쭐해진 공두가 혼자 웃고 있는데 단진이가 얼굴을 디밀며 말했다.

“브레인 말 들을게! 안 나가는 게 좋겠어! 궁 밖은 위험하잖아!”

공두가 바로 답했다.

“잘 생각했어. 괜히 저하 노리는 자객들한테 우리만 죽어!”

단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단진이 차분히 말했다.

“자객들이 저하께서 한성부에 나가시는 날 노리는 거구나. 나가면 안 되겠다.”

“그래! 그날만 피하면 돼!”

공두는 서책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단진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삼년은 내달렸다. 아침에 국밥집에서 들은 소리가 헛소리가 아니었다. 돼지 잔치를 하더니 죽었다면서, 하늘이 돼지를 내린 게 아니고 저승사자를 내린 거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한 귀로 듣고 흘렸었다.

때마침 삼년의 눈에 백겸 도화 창이가 걸어오는 모습이 들어왔다.

백겸과 창이는 공두에게 신신당부했다. 절대로 단진에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사실을 이야기하는 순간 단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오려 할 것이라고 했다. 백겸과 창이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공두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다. 후회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공두가 단진에게 아무 말 하지 않고 나오지 못하게 하길 바랄 뿐이었다.

삼년이 백겸과 창이 도화 앞에 멈춰섰다.

도화가 하얗게 질린 삼년을 보고 심상찮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아챘다.

“무슨 일이야?”

백겸 창이 도화가 민가 쪽으로 뛰어갔다. 뒤이어 삼년이 달려갔다.

초가집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고 포도청에서 관원들이 나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훌쩍이고 있었다. 아이들은 어미의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사내들은 참담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모두가 부부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사람 좋은 부부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땅을 적셨다. 사내와 아낙의 손이 닿아 있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사내도 아낙도 눈을 뜬 채로 죽어 있었다. 삼년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사람 좋은 얼굴로 고깃덩어리를 내밀며 웃던 사내가 떠올랐다. 삼년은 그대로 돌아서서 나무를 붙잡고 토했다.

백겸 창이 도화가 왈패들 소굴에 도착했다. 열 명이 넘는 왈패들이 모두 죽어있었다. 백겸과 창이는 삽시간에 피가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도화는 그저 멍하니 보고 있었고 뒤늦게 온 삼년은 충격에 주저앉았다.

백겸과 창이는 약속이나 한 듯 시신을 살폈다. 적들은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뛰어나고 잔인한 놈들이었다. 놈들이 자신들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고 이향을 죽일 계획을 갖고 있는 게 확실했고, 단진은 위험에 처해있었다.

백겸과 창이가 서로를 보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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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 작성자
    Lv.7 cr*****
    작성일
    20.08.31 11:24
    No. 1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요즘같이 우울한 시기에 작가님 작품 읽으면서 큰 위로 받고 있어요. 다음화도 기대하겠습니다!

    찬성: 6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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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숙원 홍씨 49. 여인 홍단진의 결심 +1 20.08.24 2,228 11 20쪽
48 숙원 홍씨 48. 백겸과 창이, 진양대군을 만나다 +2 20.08.20 2,269 11 21쪽
47 숙원 홍씨 47. 목멱산의 결의 +4 20.08.17 2,300 11 21쪽
46 숙원 홍씨 46. 계유정난을 막아라 +2 20.08.13 2,334 11 20쪽
45 숙원 홍씨 45. 단진의 고백 +2 20.08.10 2,349 11 20쪽
44 숙원 홍씨 44. 홍단진, 주상전하를 만나다 +2 20.08.06 2,364 12 18쪽
43 숙원 홍씨 43. 백겸과 창이 한양 기방에 들다 +1 20.08.03 2,387 11 16쪽
42 숙원 홍씨 42. 비 오는 밤, 사라진 자들 +3 20.07.30 2,400 11 18쪽
41 숙원 홍씨 41. 이향의 마음 +3 20.07.27 2,427 11 16쪽
40 숙원 홍씨 40. 꽃비 그리고 고려 제일 무사 창이, 조선 제일 무사 백겸 +1 20.07.23 2,444 11 20쪽
39 숙원 홍씨 39. 이향, 김종서와 야인을 만나다 +2 20.07.20 2,464 11 19쪽
38 숙원 홍씨 38. 운명적인 만남 +2 20.07.16 2,498 1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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