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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연재수 :
95 회
조회수 :
215,196
추천수 :
1,167
글자수 :
809,561

작성
20.08.20 11:00
조회
2,268
추천
11
글자
21쪽

숙원 홍씨 48. 백겸과 창이, 진양대군을 만나다

DUMMY

숙원 홍씨 48. 백겸과 창이, 진양대군을 만나다


김종서가 인옥을 보고 놀라 말했다.

“왜 여기 있는 것이냐?”

인옥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인옥의 눈길이 용무용에게 닿았다. 인옥은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루에서 깡총 뛰어내려와 쪼르륵 달려갔다. 용무용의 표정에 싫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인옥은 알지 못했다.

인옥이 용무용의 옷소매를 붙잡고 서둘러 말했다.

“아저씨...저 여기 앉아만 있을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진짜 소리도 안 낼게요. 울지도 않고 말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니까 절대...”

인옥이 별채 대문 쪽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그 아저씨한테 나 여기서 쫓아내라고 말하면 안돼요...네? 부탁이에요...제발요...”

용무용은 인옥을 쳐다보지도 않고 옷소매를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김종서는 하도 기가 막혀 보고만 있었다.

간난어멈과 분년은 김종서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김종서가 인옥에게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어찌 된 것이냐?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 했는데, 어찌 이곳에 있는 것이냐?”

간난어멈은 난감했다.

“...마님께서...역병을 앓으셨는데, 역병은 아니라 하고...한 달을 앓고 일어나셨는데 기억을 잃으셨습니다...”

용무용은 창이가 떠올랐지만 그들을 연결시키진 못했다. 그저 돌림병이 함길도 뿐 아니라 한양까지 퍼졌다고 여겼다.

때마침 승규가 뛰어 들어왔다.

“아버님...”

인옥이 승규를 보고는 겁에 질려 용무용 뒤로 숨었다.


“어찌해서 말하지 않은 것이냐?”

등불이 밝혀져 있고 김종서와 승규가 앉아 있었다.

“송구합니다 아버님.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줄 알았습니다...”

김종서는 하도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다. 인옥은 인품이 훌륭한 전 대제학 심문호의 손녀였다. 조부를 꼭 빼닮아 생각과 행동이 반듯했고 심성이 고와 김종서는 며느리를 아꼈다. 그런 며느리가 정신줄을 놓았다고 하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김종서가 인옥을 데리고 오라고 했다.

승규가 인옥과 함께 들어왔다. 인옥은 겁에 질린 듯 잔뜩 움츠리며 앉았다.

김종서는 인옥을 물끄러미 보았다. 달라진 건 눈빛이었다. 전에는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깊은 눈빛이었지만 지금은 겁에 질린 아이의 눈빛이었다. 김종서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승규가 말했다.

“아버님, 허락하시면 친정에 다녀오게 할까 합니다.”

인옥이 잠시 있다가 그제야 말뜻을 알아들었다.

“제 친정이...어딘데요?”

승규가 인옥을 보며 말했다.

“강원도 영월입니다!”

인옥은 잠시 생각하다가 절레절레 저었다.

“아...안돼요...안 갈래요...친구들 두고 못 가요...”

김종서가 단호히 말했다.

“그건 아니 된다. 그 댁 어른들이 걱정하실 게 아니냐!”

인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한양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김종서가 인옥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당분간은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네 건강만 신경 쓰거라!”

인옥이 말했다.

“김종서님.”

“부인...아버님께...어찌 이러시오...”

김종서가 승규에게 말했다.

“그냥 두거라...”

“김종서 선생님. 제발 부탁인데. 저 그 마루에 앉아 있으면 안 될까요? 저는 다른 건 바라지 않아요. 선생님...그 마루에만 앉아 있게 해주세요...”

김종서가 조용히 말했다.

“그건 아니 된다, 손님이 계시질 않느냐, 또한 남녀가 유별하거늘 어찌 그곳에 있을 수 있겠느냐!”

인옥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김종서 선생님...제발요...”

김종서가 승규에게 말했다.

“네가 각별히 잘 챙기거라. 혼자 두지 말거라!”

“예 아버님...”

인옥의 젖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안돼요...김종서 선생님. 저...그 마루에 안 갈게요...그러니까 이 아저씨 제 방에만 못 오게 해주세요...제발요...아니...제가 정신이 온전치 않으니 저를 내쫓아주세요...제발요...그리고 이 아저씨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되잖아요...제발 저를 내쫓아주세요...제발요...”

김종서는 깊은 한숨이 또다시 나왔다. 승규가 인옥을 데리고 나갔다.


“그날, 사냥을 할 것이다!”

별채 마당의 화톳불 앞에 용무용과 승무, 호, 결, 석이 서 있었다. 그들의 눈에 결기가 있었다. 용무용은 이향을 사냥하는 날을 계획보다 앞당겼다. 기다리기보다 팔다리를 내어주더라도 돌진하기로 결정했다. 돌발 상황이 계속해서 일어나기에 완벽한 기회를 기다리기보다는, 기회가 왔을 때 완벽하게 만들기로 했다.

용무용이 결과 석을 보며 말했다.

“너희들이 순포를 도와야겠다.”

이때 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인...” “마님...”

용무용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인옥이 후다닥 달려와 용무용을 잡았다. 용무용은 생각 같아서는 집어던지고 싶었지만 참고 있었다. 용무용이 살기를 번뜩이며 쳐다봐도 미친 마님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승규와 간난어멈, 분년이가 달려 들어왔다.

인옥이 용무용의 뒤에 숨어 승규에게 말했다.

“잠깐만요. 잠깐이면 돼요...”

용무용은 등에 거머리라도 붙은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인옥이 용무용에게 다가가 그를 잡고 속삭였다.

“아저씨...제 친구들이 오면. 몇 시에 만나는지만 물어봐주세요. 제가 국밥집으로 간다고 해주세요...제발요. 제 친구들이 와서 소이를 찾을 거예요! 저에게 왔다고만 전해주세요. 네?”

용무용은 누르며 말했다.

“예 마님. 알겠으니 이 손 놓으시지요!”

승규가 인옥을 떼어냈다. 간난어멈과 분년이가 인옥을 데리고 갔다. 인옥은 돌아보며 연신 꼭 전해달라고 얘길 했다.

승규가 말했다.

“미안하오. 전에도 말했지만 원하면 거처를 바꿔주겠소.”

용무용이 말했다.

“아닙니다. 이곳이 편합니다. 해서...앞으로는 별채 문을 잠가둘까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용무용은 김종서의 집에서 이 별채가 은밀히 밖으로 드나들기 좋은 곳임을 알았기에 꼭 이곳이어야 했다.

“그리 하시지요!”

승규가 나가자 호가 문을 걸어 잠갔다.

용무용은 이번 기회에 쥐새끼처럼 드나드는 군관들도 막을 수 있으니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용무용이 눈짓을 하자 결과 석이 담장을 넘어갔다.


어둠이 내린 진양의 사병 처소 마당에 화톳불이 훤히 밝혀져 있고 장례가 치러지고 있었다. 가장 넓은 마루에 병풍이 세워져 있고 설가의 위패가 있고 향이 피워져 있었다. 그 앞에 김가와 은가가 상주 노릇을 하고 앉아있었다.

마당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무사들은 침통해했다. 심가는 술에 취해 순포를 붙잡고 설가를 죽인 놈을 반드시 잡아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색주가에서 온 창기들은 여기저기 앉아 무사들에게 술을 따랐다. 창기들은 고관대작들이 드나드는 기녀들과는 다르게 행동이 천했다. 하지만 천하다 해서 마음까지 천한 건 아니었다. 모두가 설가와 하룻밤이라도 보낸 기녀들이었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한 나이 지긋한 기녀가 구슬프게 노래를 불렀다. 기녀는 설가보다 스무 살은 더 많아 보였다. 얼굴의 주름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줬지만 젊었을 때는 고왔던 얼굴임을 알 수 있었다. 설가는 평소 색주가에 자주 드나들었고 나이 지긋한 기녀와 각별했다. 설가는 어미 얼굴도 모르고 자라서인지 퇴기의 배에 누워 젖가슴을 조물딱 거리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하루 건너 젊은 계집을 품고는 했다. 나이 든 기녀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바람 같은 사내의 마음을 잡아 무엇 하겠으며, 잡았다 한들 바람인 것을, 다 어리석고 허망한 짓이란 걸 알만큼의 세월을 먹었다.

나이든 기녀는 설가가 올 때마다 처음 보듯이 품었다. 축 늘어진 젖가슴과 뱃살을 보며 곱다고 말해주는 설가가 싫지만은 않았다. 몸을 줄 때마다 몸만 준다고 여겼는데 마음까지 건너간 모양이었다. 노래를 하는 나이 지긋한 기녀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이내 눈물이 흘렀다. 기녀의 삶에 마지막으로 곱다고 말해준 설가를 보내기 아쉬워서인지 눈물이 세월의 흔적에 걸려 있었다.

그 구슬픔이 무사들에게도 전해져 눈이 벌게졌다. 어느 날 눈 떠보니 태어나 있고 배를 곯으며 이리저리 떠돌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기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천기였다. 기녀들 중에도 가장 밑바닥 창기의 삶을 살았다. 울음이 전염되듯 기녀들이 훌쩍이자 심가는 순포를 잡고 눈물 콧물을 흘리며 통곡을 했다.

진양이 들어섰다. 진양은 검정색에 붉은 무늬가 들어간 답호를 입고 붉은 보석이 박힌 상투관을 썼다. 때마침 노래가 끝나고 진양을 본 무사들이 모두 일어섰다.

진양은 마루로 올라가 향을 꽂고 앉았다. 진양은 밥을 먹지도 못하고 간 설가가 안타까워 고기를 잔뜩 얹은 국밥을 차려놓게 했다.

진양은 말없이 앉아 설가의 위패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름도 성도 없이 돌놈이라고 불리며 살아왔던 설가에게, 설가라고 성을 붙여주자 그 덩치 큰 놈이 아이처럼 좋아했다.

진양은 낮의 일을 떠올렸다.


설가의 시신이 발견된 숲속을 사병들이 이 잡듯이 뒤졌지만 아무 흔적도 나오지 않았다. 진양이 대청마루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는데 김가가 찾아왔다. 김가의 눈빛이 은밀했다.

김가는 진양 앞에 앉아 주변을 살폈다.

“대군마마...”

김가가 손을 펴 진양에게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깃털이 아니냐?”

“대군마마, 소인이 설가의 염을 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사온데, 설가의 움켜쥔 손에서 이게 나왔사옵니다. 비둘기 깃털이옵니다.”

설가가 죽은 이유는 이 깃털 때문이었다. 진양은 그제야 아귀가 맞아 들어감을 알았다. 숲에서는 아무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증거였다. 아무 흔적이 없다는 건 언제든 흔적을 치울 수 있는 놈인 것이다. 또한 설가를 죽인 놈은 역당의 간자이고 글을 아는 놈이었다.

진양이 조용히 물었다.

“설가가 없을 때 뒤늦게 나타난 놈들이 누구라 했느냐?”

“순포와 심가이옵니다. 둘 다 뒷간에 다녀왔다 했사옵니다. 헌데 둘은 뒷간에서 서로를 못 봤다고 하옵니다.”


진양이 일어섰다. 진양의 눈이 심가와 순포에게 닿았다. 심가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훌쩍였고 순포는 침통해했다.

진양의 눈길이 다시 설가에게 닿았다. 죽으면서까지 역당의 단서를 남기려 한 설가의 충심이 가슴 한편에 들어왔다.

진양이 가려다 무사들을 보며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움직이지 마라. 앞으로는 처소에도 둘씩 자도록 해라. 서로가 서로를 보호해야 한다. 알겠느냐?”

“예 대군마마.”

“또한 당분간은, 모필가의 뒤는 캐지 말고, 설가를 죽인 놈을 찾는데 총력을 다하거라!”

“예 대군마마!”

“설가를 잘 보내 주거라, 피붙이 하나 없는 놈이니 홀가분할 것이다. 허니 걸판지게 놀다 가게 해주어라.”

진양이 색주가의 창기들을 힐끗 보고 말했다.

“계집 좋아하는 놈인데, 성이 차겠느냐? 계집을 마음껏 품어 원도 한도 없도록, 더 불러들이거라, 또한 워낙 식성 좋은 놈이니, 술과 음식은 차고 넘치게 준비해 주거라.”

진양이 김가를 보았다. 김가는 알아듣고 따라나섰다.

순포는 진양이 어디를 가는지 따라가고 싶었지만 꼼짝달싹할 수 없으니 미칠 것 같았다. 더구나 심가가 순포를 붙잡고 울고불고 난리를 쳐 곤혹스러웠다.

진양과 김가가 진양의 집 마당을 거쳐 밖으로 나왔다.

진양은 김가를 보았다. 김가는 진양이 가장 믿는 오래된 호위무사였다.

“너는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있다! 들어가서 잘 지켜보거라! 누가 들고 나는지 지켜보고, 반드시 둘씩 함께 다니게 하거라!”

“예 대군마마!”

“또한 밖에 나간 놈들이 있으면 반드시 어딜 다녀왔냐고 묻거라!”

“예 대군마마.”

“함께 있을 때 묻고. 따로 있을 때, 한 번씩 다시 물어보거라. 또한 왜 자꾸 묻냐고 묻거든, 물은 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리 말하거라! 놈들이 한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나에게 고해야 한다. 알겠느냐? 특히 글을 아는, 심가 순포 윤가 장가 진가를 잘 살펴야 한다.”

진양을 보는 김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김가는 시선을 떨구고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설가 그놈이 복이 많사옵니다. 천한 놈, 대군마마께서 이리도 잘 보내주시니, 원도 한도 없을 것이옵니다.”

진양이 김가의 어깨를 툭 쳤다. 김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김가가 진양을 보며 다짐하듯 말했다.

“대군마마! 반드시 설가를 죽인 놈을 잡겠사옵니다!”

진양의 무사들 중 가장 어린 열대여섯 정도 된 양가와 문가가 달려왔다. 둘 다 체격은 좋았으나 얼굴은 앳된 티가 났다.

양가가 말했다.

“안평대군께 말씀을 전했사옵니다!”

진양이 김가에게 말했다.

“너는 들어가거라!”

김가가 두 무사에게 말했다.

“이놈들을 데리고 가시옵소서. 대군마마를 잘 모셔야 한다!”

양가와 문가는 처음으로 대군마마를 모실 수 있어 힘이 팍 들어갔다.

“예 형님!”

진양이 두 무사들과 걸어갔다.

나무 뒤에서 이제껏 숨어있던 결이 나왔다. 결은 집 뒤쪽에 숨어 있던 석에게 손짓했다. 석이 진양의 뒤를 밟았다.


밤이 내린 운종가는 오늘도 활기가 넘쳤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린다 하여 이름 지어진 운종가답게 모여든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백겸 창이 삼년 도화가 운종가로 들어섰다. 앞서 가던 백겸과 창이가 멈춰서 도화를 보았다.

도화는 아까부터 기방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백겸과 창이를 따라오고 있었다. 목멱산에서 결의를 다졌지만 내려오자마자 다투기 시작했다. 창이가 당장이라도 금군 경가를 불러내 단진을 데려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창이가 단진을 데리고 도성 밖으로 나간다고 하자 도화는 생각 좀 하라고 고함을 질렀다.

도화는 백겸에게 김종서의 집으로 가서 야인들을 보고 함길도에서 본 적이 있는지 살피라고 했다. 백겸은 야인들은 조선과 사이가 나빠서 오지 않았을 거라고 단정 짓고는 금군 경가를 만나러 가겠다고 했다.

결국 도화가 폭발했다. 당장 문종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금군 경가놈을 만나 상대하는 건 자기라며 화를 냈다.

백겸과 창이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와 김종서 집으로 가기로 했다. 도화가 기녀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국밥집으로 갔다. 삼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삼년은 왈패 소굴에 무서워서 못 갔지만 이상이 없다고 보고했다. 삼년은 그들이 어디에 다녀왔는지 알고 싶어 물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도화는 삼년에게 백겸과 창이를 따라갔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기방으로 연통하라고 했다. 하지만 도화는 백겸과 창이만 보내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아 선뜻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도화는 뭐든 직접 해야 직성이 풀렸다.

창이가 도화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이런 식은 곤란해. 서로 힘들게 하지 말자. 나 좋아하는 건 알지만 여기까지야. 돌아가. 너에게 줄 마음 이미 여름이가 가져갔어.”

도화는 어이없어 했다.

백겸은 미안했다. 생각해보니 도화가 단진이 때문에 힘든 일은 도맡아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내들은 연신 기녀인 도화를 힐끔거렸다.

백겸이 도화에게 말했다.

“가서 잘 확인하고 올게. 그리고, 금군은 해결을 해야 할 거 같아. 언제까지...”

도화가 백겸을 보았다. 백겸이 말을 이었다.

“말 잘 듣게 손을 좀 봐줄게!”

도화가 삼년을 보았다. 도화가 입을 열기도 전에 삼년이 말했다.

“태희야 걱정 마! 내가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보고할게!”

도화가 벙 쪄서 삼년을 보았다. 백겸 창이 역시 잔뜩 찌푸렸다.

창이가 말했다.

“태희야? 어디서 친한 척이야!”

삼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지금 조선시대잖아. 왕태희라고 할 수는 없잖아. 앞으로는 태희라고 부를게!”

도화는 너무 싫어 오돌도돌 소름이 돋았다.

“조용히 해! 부르지 마! 확 그냥...”

삼년이 말했다.

“그럼 킹태희라고 할게, 사실 네가 우리들 킹이잖아.”

셋은 벙 쪄서 삼년을 보았다. 싸가지 없기로 유명하던 놈이 조선에 와서 정신이 나간 건지 싸가지 없을 때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다. 삼년은 비호감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도화는 한 대 치고 싶은 걸 간신히 누르고 돌아섰다. 도화는 다시 삼년을 보며 찌푸리고 한걸음을 내딛었다. 맞은편에서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지만 도화는 보지 못했다. 사대부가 사내는 도화를 봤지만 일부러 부딪치고 싶어서 피하지 않았다. 사내의 눈이 음탕했다. 사내와 부닥치려는 찰나에 백겸이 도화를 잡아당겼다. 도화의 얼굴이 백겸의 가슴이 닿았다. 도화의 가슴이 콩닥거렸다.

백겸이 사내를 싸늘하게 보았다. 사내는 김이 샜다는 듯이 부채질을 해대며 걸어갔다.

백겸이 도화를 놓아주며 말했다.

“조심해, 여기 사람 많아!”

도화는 확 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갔다. 걸을 때마다 열이 올라와 볼이 발그레해졌다.

삼년이 도화를 보며 외쳤다.

“킹태희, 걱정 마! 내가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뛰어갈게!”

삼년이 돌아서서 보니 백겸과 창이는 가고 없었다.

백겸과 창이, 삼년이 포목전 쪽으로 들어섰다. 오늘따라 유독 사람들이 북적였고 모든 포목전에서 길가에 천들을 걸어 놓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값비싼 물건을 파는 곳이어서인지 지나다니는 사람들 역시 사대부가 사람들이었다.

백겸이 삼년을 힐끗 보고 말했다.

“야, 아까 한 얘기 진짜야?”

“진짜지 그럼, 거짓말 아니야, 민혁도 같이 들었어!”

“없다고 막 던지네! 그래도 제 친구였는데!”

삼년이 뻔뻔하게 말했다.

“진짜라니까! 아! 서봄이 혁이랑 같이 있었잖아. 서봄 나오면 물어봐! 혁이가 말했을 수도 있잖아!”

백겸과 창이는 너무도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삼년을 보자 진짜인 것 같았다. 백겸과 창이는 목멱산에서 결정하고 결심하고 다짐하고 내려왔지만, 삼년을 보자마자 의심이 커져 자꾸 확인하고 싶었다.

창이가 심드렁하게 백겸에게 말했다.

“얘 말이 사실이면 수양대군이든 김종서든 눈앞에 나타나겠지!”

삼년은 그들이 뭐라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삼년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완벽한 계획이 성공했음을. 그들은 자신을 믿었고 이제 함께였다. 삼년이 신이 나서 앞서 걷는데 진양이 보였다. 붉은 빛 사이로 진양이 걸어왔다. 죽은 육갑이 떠올랐다. 삼년은 마치 진양이 죽이기라도 하듯 공포에 사로잡혔다. 삼년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백겸과 창이가 가려다 삼년을 보았다.

백겸이 삼년을 보고 말했다.

“쟤 왜 저래?”

창이가 말했다.

“쑈지, 가자, 짜증난다!”

삼년이 입을 열었다.

“...지...진양...수...수양대군이야...”

창이는 어이없어했다.

“미친...”

백겸이 먼저 삼년이 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이가 같은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운종가 길을 따라 수많은 등불이 훤히 밝히고 있었다. 포목점에서 명나라에서 들여온 속이 훤히 보이는 붉은 천을 걸어두었다. 바람에 붉은 천이 휘날렸다.

백겸과 창이의 눈에는 붉은 천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걸어가려는데 휘날리는 붉은 천 사이로 진양의 모습이 보였다. 진양을 본 적이 없지만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붉은 천이 휘날렸다. 그 사이로 진양이 걸어왔다. 검은 색에 붉은 문양이 들어간 답호를 입고 붉은 보석이 박힌 상투관을 쓴 진양이 걸어왔다. 강렬했다.

붉은 천이 휘날릴 때마다 진양이 가까워졌다. 등불의 불빛으로 붉은 천이 나부낄 때마다 더욱 붉게 보였다.

백겸과 창이는 멍하니 서서 붉게 물든 핏빛 속을 걸어오는 진양을 보았다. 갑자기 바람이 거세져 붉은 천이 더욱 맹렬히 흔들렸다. 피가 흩뿌려지는 것 같았다.

백겸과 창이의 가슴이 거칠게 뛰었다. 백겸과 창이에게 집으로 돌아갈 문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이 부숴야만 하는 진양이 걸어왔다.

진양의 시선이 백겸과 창이에게 닿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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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7 cr*****
    작성일
    20.08.20 11:32
    No. 1

    마지막이 영화의 한장면 같네요~ 작가님은 스치는 작은 인물 하나하나에도 감정이입이 됩니다!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찬성: 6 | 반대: 0

  • 작성자
    Lv.15 mj******..
    작성일
    20.08.21 00:15
    No. 2

    핏빛 속을 걸어오는 진양. 명장면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벌써 가슴이 뜁니다. 작가님 건필하세요. 홀딱 빠지게 하는 작품입니다!!!

    찬성: 6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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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숙원 홍씨 58. 무예시합-2 +2 20.09.24 2,029 10 21쪽
57 숙원 홍씨 57. 무예시합-1 +2 20.09.21 2,047 10 20쪽
56 숙원 홍씨 56. 이향, 무예시합에 가지 않기로 하다 +1 20.09.17 2,064 10 17쪽
55 숙원 홍씨 55. 단진의 간절함 +1 20.09.14 2,089 9 21쪽
54 숙원 홍씨 54. 향을 지키려는 단진 +2 20.09.10 2,117 10 18쪽
53 숙원 홍씨 53. 나비문신 +2 20.09.07 2,138 10 19쪽
52 숙원 홍씨 52. 죽이려는 자, 지키려는 자 +1 20.09.03 2,163 11 21쪽
51 숙원 홍씨 51. 단진, 향의 위험을 알아채다 +1 20.08.31 2,188 11 20쪽
50 숙원 홍씨 50. 무예시합 날이 정해지다 +2 20.08.27 2,202 11 22쪽
49 숙원 홍씨 49. 여인 홍단진의 결심 +1 20.08.24 2,228 11 20쪽
» 숙원 홍씨 48. 백겸과 창이, 진양대군을 만나다 +2 20.08.20 2,269 11 21쪽
47 숙원 홍씨 47. 목멱산의 결의 +4 20.08.17 2,300 11 21쪽
46 숙원 홍씨 46. 계유정난을 막아라 +2 20.08.13 2,334 11 20쪽
45 숙원 홍씨 45. 단진의 고백 +2 20.08.10 2,348 11 20쪽
44 숙원 홍씨 44. 홍단진, 주상전하를 만나다 +2 20.08.06 2,363 12 18쪽
43 숙원 홍씨 43. 백겸과 창이 한양 기방에 들다 +1 20.08.03 2,387 11 16쪽
42 숙원 홍씨 42. 비 오는 밤, 사라진 자들 +3 20.07.30 2,400 11 18쪽
41 숙원 홍씨 41. 이향의 마음 +3 20.07.27 2,426 11 16쪽
40 숙원 홍씨 40. 꽃비 그리고 고려 제일 무사 창이, 조선 제일 무사 백겸 +1 20.07.23 2,443 11 20쪽
39 숙원 홍씨 39. 이향, 김종서와 야인을 만나다 +2 20.07.20 2,464 11 19쪽
38 숙원 홍씨 38. 운명적인 만남 +2 20.07.16 2,498 1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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