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연재수 :
95 회
조회수 :
215,194
추천수 :
1,167
글자수 :
809,561

작성
20.08.17 11:00
조회
2,299
추천
11
글자
21쪽

숙원 홍씨 47. 목멱산의 결의

DUMMY

숙원 홍씨 47. 목멱산의 결의


“형님!”

용무용이 승무를 보았다.

“진양이 아니라면 안평일까요?”

용무용은 실력 뿐 아니라 지략에도 뛰어났던 창이의 존재가 아쉬웠다. 승무는 용무용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용무용이 국밥집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창이의 머리맡에 도화가 앉아 있어서 창이의 얼굴은 가려졌다. 그들 뒤로 방문이 열려 있었지만 용무용에겐 백겸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낮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도화가 용무용을 빤히 보았다. 용무용도 도화를 보았다. 한눈에 봐도 기녀였다. 화려한 기녀가 국밥집과 어울리지 않았으나 눈빛은 묘하게 어울렸다. 눈빛이 담대했다. 용무용은 사연 있는 계집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잠시였다. 용무용은 어젯밤 형제들을 죽인 놈들이 대체 누굴까 하는 생각에 빠져 들었다.

뒷간으로 간 호는 순포와 부닥칠 때 받은 서찰을 읽은 후 입에 넣고 삼켰다. 호가 뒤뜰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창이가 호를 보았다. 호의 시선은 창이보다 붉은 꽃이 수놓아진 저고리를 입은 도화에게 먼저 갔다. 호는 도화에게 둔 시선을 거두고 용무용에게 향했다. 호가 창이를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창이는 호가 스칠 때 살기가 느껴졌다. 아까부터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창이가 일어나 앉았다. 삿갓을 쓴 용무용과 승무, 호의 뒷모습이 보였다.

용무용과 승무, 호가 걸어갔다.

호가 용무용에게 말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서찰을 보냈다 합니다. 어젯밤 일과 진양은 상관없는 듯 하답니다. 진양은 지금 호위무사가 죽어 눈이 뒤집혔다 합니다. 진양의 호위무사가 눈치를 채서 죽였는데 진양이 그 시신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역당의 무리에게 당할 수 있으니 둘씩 짝을 지어 다니라고 했답니다. 눈치껏 빠져나와 찾아보겠답니다.”

승무가 말했다.

“호위무사가 죽었으니 진양이 긴장을 한 듯합니다.”

“진양은 의심을 하는 것이다.”

용무용의 걸음이 빨라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이향 뿐 아니라 진양도 뛰어났다. 용무용은 이향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이향은 용무용을 의심하면서도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 이향의 눈빛은 바다처럼 고요했다. 그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또한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바다가 요동치면 얼마나 대단할지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진양은 직감이 빠르고 예리했다. 뿐만 아니라 거침없었다. 진양의 움직임은 눈으로 볼 수 있으나 멈추지 않으니 잠깐의 실수로 당할 수 있었다.

창이가 배신을 한 이후로 일이 어렵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향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고 거기에 진양이란 무기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향에게 본때를 보여주려던 형제들은 알 수 없는 적들에게 당했다. 진양의 호위무사를 죽이는 바람에 순포는 손발이 묶였고 자신들 역시 불편한 상황에 있었다. 용무용은 대책을 세워야 했다. 멈춰서 적들을 기다릴 것인가. 팔 다리를 내어주면서라도 돌격할 것인가.

승무가 멈춰서 용무용에게 말했다.

“형님!”

승무가 길을 가리켰다.

“돼지를 실은 수레를 본 곳이 이곳입니다! 저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용무용은 수레 자국을 눈으로 따라갔지만 얼마 안가 끊겼다. 한양 일대의 모든 수레가 나다닌 것인지 수레 자국은 겹치고 겹쳐 있었다. 용무용의 속에 불길이 치솟았다. 어젯밤에 미친 마님 때문에 발목을 잡힌 것이 큰 실수였다. 혹시라도 김종서의 짓이라면 의심을 살까 싶어 나서지 않았다. 한수 앞만 봤어야 했다.

용무용은 수레가 왔다던 방향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용무용은 골목으로 들어가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그러다 그가 찾는 게 눈에 들어왔다. 용무용은 처마 밑 벽에 묻은, 굳어 검게 변한 피를 만져봤다. 사방을 둘러보니 곳곳에 혈흔이 있었다. 용무용은 어젯밤 사건이 일어난 곳이 이곳임을 확신했다.


초가집 마당에 가마솥 두 개가 펄펄 끓고 있었다. 아낙이 솥뚜껑을 열자 하얀 김이 올라오며 구수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릇을 손에 든 아이들은 아낙 곁에 붙어 연신 침을 삼켰다. 동네잔치라도 하듯 마을 사람들이 이리저리 앉아 삶은 고기를 먹고 있었다.

사내가 땔감을 장작불에 넣으며 말했다.

“많이들 잡숴...이 돼지는 하늘이 내린 거여...가물어 걱정했는디 비가 내려주질 않나...살다 살다 이런 날도 다 있네 그려...아, 밭 망가질까 일어났는디, 여편네 냄새가 좋아 아랫도리가 딱 서더니, 시상에 떡하니 돼지가 누워있는 게 아니여...”

모두가 낄낄거렸다.

아낙이 고기가 잘 익었는지 칼로 푹 찔러보며 흘겼다.

“아니 넘사시럽게 아랫도리 얘긴 왜 하는 겨...남들이 들으믄, 뭐 대단한 줄 알겄네...”

사내가 멋쩍어했다.

“대단이야 허지...밭이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겄어...”

사람들이 또다시 껄껄 웃었다. 그들 중에서 웃지 않는 건 삼년이 뿐이었다. 삼년은 이런 저속한 농담을 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삼년은 왈패들 소굴로 가다가 고기 냄새에 저도 모르게 멈춰섰다. 담장 너머로 침만 꿀떡꿀떡 삼키고 있는데 초가집 사내가 삼년에게도 들어와 먹으라고 했다. 하늘이 내린 고기라 나눠 먹어야 올해 농사가 풍년이 들 거라고 했다.

삼년은 자기가 가져다준 돼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고기가 입으로 들어가니 살살 녹았다. 돼지고기가 이토록 맛있는지 처음 알았다. 삼년은 손으로 고기를 뜯어먹으면서 사람들을 봤다.

고기를 집으로 들고 간 사람들은 서서 고기를 먹으며 담장을 사이에 두고 이야길 했다. 조선의 백성들은 왜 담장을 만들다 만 건지, 뛰어넘을 수 있는 담장을 왜 만든 건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할 거면 만나서 이야기 하던지 하는 쓸데없는 잡생각을 했다.

왈패 여섯이 장검을 차고 지나가다 구수한 냄새에 잠시 멈춰 섰지만 그대로 지나쳤다. 하늘이 초가집에 돼지를 내렸다면 왈패들에겐 비싼 장검을 내렸다. 왈패들은 단순 무식해서 시신을 누가 두고 갔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비싼 장검을 누가 차지할까를 두고 싸웠다. 서열 순으로 위의 여섯이 장검을 차지했다. 그들은 삼년의 계획처럼 다른 패거리가 시신을 두고 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장검을 자랑할 생각에 들떠 있었다.

삼년은 왈패들을 보지 못했다. 삼년은 그릇이 비자 아쉬워하며 입 주변에 묻은 돼지기름을 손으로 닦아 핥아먹었다. 사내가 이제 막 가마솥에서 꺼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 한 점을 삼년의 그릇에 놓아주었다. 사내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먹다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은 겨...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둬라...너 같은 놈이 살아생전, 언제 괴기 맛을 또 보겄냐...”

삼년은 조선에 와서 처음으로 받는 친절이었지만 고마워하긴커녕 콧방귀를 뀌었다. 삼년은 이제껏 고기도 한우만 먹었었다. 입을 씰룩이며 고기를 먹으려는데 육갑과 나눠먹던 주먹밥이 떠올랐다. 삼년은 육갑을 죽인 건 단진이라고 자신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단진이 육갑을 죽였다.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었다. 삼년은 육갑의 생각을 밀어내고 뜨거운 고기를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입천장이 다 까졌지만 느껴지지 않았다. 삼년은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고 돌아갈 것이다.

도화 백겸 창이의 표정을 보아하니 자신의 계획은 성공했다. 마지막 남은 건 가장 골치 아픈 단진이었다. 그러다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가, 단종을 살리면 집으로 갈 수 있다는 허구가 시간이 지날수록 사실처럼 느껴졌다.


“그지 발싸개 같은 놈은 어디 갔나보네...”

백겸과 창이가 평상에 앉아있고 도화는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퉁퉁한 주모가 국밥 세 그릇을 담은 상을 들고 와 평상에 놓았다. 인심 좋은 주모는 그릇 가득 국밥을 담아와 국물이 흘러넘쳤다. 김치도 가득 담고 물그릇도 있었다. 주모는 밥상에 흘린 국물을 손으로 스윽 닦았다.

도화가 주모 옆으로 왔다.

“그지 발싸개, 앞으로 이곳에 머물 거예요, 밥은 달라는 대로 주세요, 제가 돈은 다 드릴게요!”

백겸과 창이가 뜻밖의 말에 도화를 보았다.

“그 그지 발싸개 같은 놈이랑 한 식구네 이제...”

퉁퉁한 주모는 좀 아쉬운 듯 백겸과 창이를 힐끔거리다 갔다.

삼년이 나간 후부터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었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결론을 향해 내달렸다. 하지만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도화가 백겸과 창이 앞에 서서 먼저 침묵을 깼다.

“미친 소리 같은데, 나는 이재열 말이 사실 같아. 그것 말고는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어. 우린 이곳에 온 순간부터 알고 있었어. 우리는 단종 때문에 온 거야!”

백겸은 말했다.

“알아! 하지만 왜 하필 이재열과 민혁한테만 들렸을까?”

도화가 빠르게 말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우리는 단종이 태어난 날 온 거고, 단종 유배지, 단종 일기장, 단종의 목을 졸랐다는 밧줄. 그 밧줄을 유배지에서 원빈이 가져왔어.”

백겸과 창이가 황당해 동시에 말했다.

“밧줄?”

도화는 계속했다.

“동궁전 나인, 김종서 며느리, 진양한테 죽은 민혁, 너희들의 신분도 분명 문종과 관계가 있어. 나도 너희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백겸과 창이는 돌무덤을 본 순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도화가 평상으로 올라가 밥상 앞에 앉았다.

“밥 먹자. 일단 밥부터 먹자. 그래야 머리도 돌아가지!”

도화의 말에도 불구하고 백겸과 창이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도화가 짜증스레 말했다.

“배고파, 밥 좀 먹자! 밥 먹고, 서봄 살려서 집에 데려가야 할 거 아냐!”

백겸과 창이의 눈에 불이 켜졌다. 백겸과 창이가 서둘러 상 앞에 앉았다.

창이는 식욕이 없었지만 수저를 들고 한 입 먹는 순간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창이는 누가 빼앗아 먹기라도 하듯 허겁지겁 먹었다. 백겸 역시 국밥의 구수한 냄새를 맡으니 그제야 배가 고픈 걸 깨닫고 달게 먹었다.

도화는 수저를 든 채로 백겸과 창이를 보았다. 잠시 잠깐 단진이 부러웠다.

백겸은 국밥을 다 비우자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고 동시에 나른해졌다. 뜨거운 국밥을 먹느라 얼굴에 땀방울이 맺혔다. 바람이 시원하게 닿았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문득 조선의 사계절을 다 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도화는 말없이 국밥을 먹고 있었다. 백겸은 땀을 닦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밥때가 지나 한가했지만 퉁퉁한 주모는 가마솥의 국을 젓고 있었다. 백겸은 주모가 앉아 있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백겸은 국밥을 다 먹고 말없이 앉아 있는 창이를 보았다. 창이가 어설픈 농담을 던질 만도 한데 그는 말이 없었다.

창이는 한 가지 생각만 하고 있었다. 돌아갈 수 있을까? 단진이와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창이는 단진이와 함께라면 이곳에서도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꿈을 꿀 수조차 없음을 알았다.

백겸이 딴 생각을 하지 않는 틈을 삼년이 비집고 들어왔다.

‘우리에게 계유정난을 막아라! 단종을 살려라! 그러면 다시 너희들 세상으로 보내줄 것이다. 그렇게 말했다고!'

도화가 밥을 다 먹고는 방으로 들어가 무사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도화는 백겸과 창이에게 따라오라고 했다. 도화가 가다가 돌아보았다.

“그리고, 미친 소리, 우리 걸음이 멈췄을 때도 미친 소리가 사실 같다면, 사실인거야!”


도화는 운종가를 지나 남촌으로 향했다. 백겸과 창이는 어디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평소와 다르게 그들의 눈에는 운종가의 활기찬 모습도, 맑은 하늘도, 가뭄이 해결돼 좋아하는 백성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바람이 시원한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 했다. 사실이라고 믿고 싶었고, 걸을수록 사실이라고 믿겼고, 간절함이 두려움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들에게 또다시 실낱같은 희망이 떠올랐다. 그 희망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커졌다.

백겸과 창이 도화는 목멱산으로 올라갔다. 산길을 오르느라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백겸과 창이는 도화가 왜 이곳으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조선에 오기 전 백겸과 창이 도화는 무슨 일이 있거나 결정을 할 때면 꼭 남산에 올랐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각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도 남산에 올라가는 습관이 생겼다. 생각을 가지고 올라가 결정을 가지고 내려왔다.

산꼭대기에 이르렀다. 백겸 창이 도화가 정상에 도달했을 때 그들의 희망이 그곳에 먼저 와 있었다. 탁 트인 하늘 아래 그들의 희망이 있었다.

절벽에 서서 한양을 내려다보았다. 오랜만에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살 것 같았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제야 맑은 가을 하늘과 시원한 바람, 푸르른 나무들과 한양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무질서하게 삐죽 솟은 빌딩도 아파트도 없는 조선은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고즈넉함과 오밀조밀 모여 있는 집들은 사람 냄새가 나서 따뜻했다. 이 아름다운 곳을 두고 왜 돌아가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바람처럼 왔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창이는 숨을 들이마셨다. 맑은 공기가 폐 속까지 들어와 창이의 마음까지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것 같았다. 창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선의 하늘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또다시 들었다. 창이는 단진과 함께 할 꿈을 꾸고 있었다.

창이가 도화를 보며 말했다.

“난 네가 왜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온 줄 알고 있어, 너의 마음을 알아!”

백겸이 무슨 소린가 싶어 창이를 보았다.

창이가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 올라올 땐 셋인데, 내려갈 땐 둘이 되는 거지?”

창이가 백겸을 잡고 어이없어하는 도화에게 말했다.

“네가 밀래? 내가 던질까?”

백겸은 창이의 농담 덕분에 긴장이 풀렸다.

창이가 백겸을 놓고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우리는 대체 뭘 보고 살아온 거야. 남산이 이렇게까지 아름다운 곳인 줄 몰랐어...이 많은 나무들은 다 어딜 간 걸까...후손들이 자연을 파괴한 걸 알면 조상들이 슬퍼할 거야. 우리 환경운동가 시키려고 여기 데려온 거 아닐까?”

백겸이 도화에게 물었다.

“넌 이재열 믿어?”

“아니, 나는 나를 믿어! 이재열이 내 생각과 같을 뿐이야! 우리 모두 같잖아!”

백겸이 말했다.

“그래, 우리가 단종이 태어난 날 온 것부터 이미, 우린 역사 속에 발을 담갔어!”

창이가 말했다.

“우리가 발을 담근 게 아니라, 역사가 우리를 삼킨 거지!”

도화가 말했다.

“어차피 뺄 수 없어, 피하지 말자!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도 아니고, 우린 숨을 곳도 없고, 잃을 것도 없잖아.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단 실패를 하는 편이 나아! 그리고 우리가 아니어도, 서봄은, 혼자서라도 할 거야! 아니, 벌써부터 그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 서봄은,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종을 위해 하는 게 문제지만.”

창이가 단진의 역성을 들었다.

“문제될 건 아니지. 봄이가 워낙 착하잖아! 배가 고파 먹든, 그냥 먹든, 배가 부른 건 마찬가지야! 돌아가기 위해 하든, 그냥 하든, 결과는 같아!”

창이는 잠시 있다 단호히 말했다.

“우리는 집으로 가는 거야! 다 같이! 미친 짓 하자! 조선에도 왔는데 단종 하나 못 지키겠어!”

백겸의 눈빛이 결연해졌다.

“그래, 해보자! 미친 짓!”

도화가 단단히 말했다.

“좋아! 우린 이제 마라톤을 준비해야 돼! 단거리가 아니야! 지금 당장 무얼 하는 게 아니야! 일단은 우리가 조선 땅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게 중요해! 거기서부터 시작하자. 명심해!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살아있어야 하는 거야!”

그들은 서로를 보았다. 서로의 눈빛을 보며 서로 믿었고 돌아갈 수 있다고 다짐했고 확신했다. 맑디맑은 하늘 아래 셋은 말없이 서 있었다. 바람에 숲이 움직였다.

백겸은 이 기분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어 잠시 있다 가자고 했다. 백겸이 먼저 앉고 도화가 앉았다. 창이는 앉으려다 돌 틈새에 핀 작은 들꽃을 보았다. 단진을 닮았다. 창이는 꽃에 손을 뻗다가 거두었다. 행여나 꽃이 다칠까 염려가 됐다. 창이는 백겸 곁에 앉았다. 셋은 물끄러미 한양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마지막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목멱산을 내려가면 이런 시간은 이제 더는 없음을 알고 있었다.

시원하게 느껴지던 바람이 서늘하게 느껴질 때쯤 도화가 일어섰다. 백겸과 창이도 일어섰다.

도화가 콕 찍어 창이를 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신분이 밝혀질 때까지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리고, 절대 감정적으로 나서지 마!”

창이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감정 두고 왔어! 급히 오느라!”

도화가 창이와 백겸을 보며 말했다.

“가장 시급한 문제부터 해결하자. 조만간 문종이 궁 밖으로 나올 거야.”

창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왜 자꾸 나온대...”

백겸은 진지했다.

“자객들이 또 문종을 노릴 텐데! 너도 알고 있는 사실을 자객들이 모를 리가 없잖아.”

“서봄이 같이 나올 거 같아.”

백겸과 창이의 가슴이 쿵 내려앉아 도성으로 떨어졌다.


김종서가 마당을 서성였다. 김종서는 어전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부왕을 알현했었다.


부왕이 말했다.

“과인은 선위를 할 것이다!”

“전하...그건 아니 될 말씀이옵니다.”

“그만. 아니 된다, 불가하다, 모든 대신들이 말하고 있어 이미 잘 알고 있다, 허나, 과인은 이제 지쳤다, 이 나라를 태평성대로 이끌 수 있는 사람은 세자다, 그대는 세자가 부족함이 있다 여기는가?”

“어찌 감히 부족함을 입에 올리겠나이까, 전하. 세자저하께선 분명 성군이 되시고 조선에 길이 남으실 왕이 되실 것이옵니다. 해서 아니 된다는 것이옵니다. 5대째 선위는 있을 수 없사옵니다. 조선 첫 적장자 계승이옵니다. 보위도 완벽하게 오르셔야 하옵니다. 세자저하의 업적에 누가 될 것이옵니다!”

“과정이 무에 중요하겠는가! 세자가 보위에 올라 태평성대를 이루면, 그것이 세자의 업적일 것이다. 과인은 이제 백성이 눈에 보이질 않는다...쓸모가 다 하였으니, 쉬겠다는 것이다.”

“전하...”

“김종서 그대는 앞으로 세자의 사람이다, 앞으로는 세자에게 충심을 다하라, 앞으로 어떤 일이 있다 해도 그대만은 아니 된다 말하지 말고, 무조건 세자 편이 돼라, 또한 조정의 썩은 뿌리를 다 도려내도 버틸 수 있게 받쳐주어라, 또한 새 뿌리가 내리게 힘이 돼 줘야 할 것이다.”


김종서는 마음이 무거웠다. 많은 조정 대신들이 썩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어찌하면 전하와 세자저하의 짐을 나눠질 수 있을까 고심하고 있었다.

이때 용무용과 승무, 호가 들어왔다.

김종서의 눈이 용무용의 손에 든 삿갓에 닿았다.

“어딜 다녀오는 것이냐?”

“집에 있기 불편하여 바람 좀 쐬고 왔습니다.”

“할 말이 있다. 들어오너라.”


김종서와 용무용이 마주앉았다. 용무용은 방을 둘러보다 문갑 위에 고이 모셔둔 것 같은 짚신에 시선이 갔다.

김종서가 잠시 보다가 말했다.

“세자저하께서 너의 실력을 보고 싶어 하신다. 한성부에서 곧 무예시합 날을 정할 것이다.”

.....

“그날 세자저하께서도 나오시니 준비를 잘 하거라!”

용무용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사방이 막힌 줄 알았는데 가장 큰 문이 열렸다. 용무용은 감정을 숨기고 말했다.

“예 대감!”

“그날 너의 거취가 정해질 것이다, 허니 당분간은 이곳에 머물거라.”

“예 대감!”

“불편한 게 있으면 기탄없이 말하거라!”

“모두가 불편해 합니다!”

김종서는 무슨 뜻인지 몰라 용무용을 보았다.


인옥이 마루 끝에 걸터앉아 담장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어제 늦은 밤까지 기다렸지만 단진도 도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새벽같이 일어나 기다리고 있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단진이 보고 싶었다.

분년이와 간난어멈은 하루 종일 인옥의 곁에 앉아 옷을 기우고 있었다. 간난어멈의 시선이 인옥에게 갔다. 간난어멈은 인옥이 아프기 전에는 단정하고 빈틈없고 인자한 분이셨던 걸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승무와 야인 셋은 마당 끝에서 목검을 들고 인옥을 보고 있었다. 승무는 끓어올랐다. 생각 같아서는 죽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수레를 놓친 것 때문에 일이 어려워졌다. 그런데 저 미친 마님 때문에 바깥을 드나드는 것도 자유롭지 않았다.

김종서가 용무용을 따라 별채로 들어섰다. 인옥은 마루에 걸터앉아 담장 쪽을 보며 발을 대롱대롱 흔들고 있었다. 김종서가 인옥을 보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숙원 홍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67 숙원 홍씨 67. 단진의 깊은 슬픔 +2 20.11.30 1,828 10 22쪽
66 숙원 홍씨 66. 단진, 진양에게 돌격하다 +2 20.10.29 1,891 10 16쪽
65 숙원 홍씨 65. 단진, 한양 기방에 들다 +3 20.10.26 1,928 10 26쪽
64 숙원 홍씨 64. 단진, 궁 밖으로 나오다 +2 20.10.22 1,933 11 22쪽
63 숙원 홍씨 63. 비밀의 열쇠, 백겸과 창이 +1 20.10.19 1,947 11 21쪽
62 숙원 홍씨 62. 진양, 비밀의 단서를 찾아내다 +2 20.10.15 1,952 11 19쪽
61 숙원 홍씨 61. 단진을 향한 애틋함 +2 20.10.12 1,960 11 21쪽
60 숙원 홍씨 60. 무예시합이 끝나고 +3 20.10.08 1,973 13 23쪽
59 숙원 홍씨 59. 무예시합-3 +4 20.10.05 1,990 12 22쪽
58 숙원 홍씨 58. 무예시합-2 +2 20.09.24 2,029 10 21쪽
57 숙원 홍씨 57. 무예시합-1 +2 20.09.21 2,046 10 20쪽
56 숙원 홍씨 56. 이향, 무예시합에 가지 않기로 하다 +1 20.09.17 2,064 10 17쪽
55 숙원 홍씨 55. 단진의 간절함 +1 20.09.14 2,089 9 21쪽
54 숙원 홍씨 54. 향을 지키려는 단진 +2 20.09.10 2,117 10 18쪽
53 숙원 홍씨 53. 나비문신 +2 20.09.07 2,138 10 19쪽
52 숙원 홍씨 52. 죽이려는 자, 지키려는 자 +1 20.09.03 2,163 11 21쪽
51 숙원 홍씨 51. 단진, 향의 위험을 알아채다 +1 20.08.31 2,188 11 20쪽
50 숙원 홍씨 50. 무예시합 날이 정해지다 +2 20.08.27 2,202 11 22쪽
49 숙원 홍씨 49. 여인 홍단진의 결심 +1 20.08.24 2,228 11 20쪽
48 숙원 홍씨 48. 백겸과 창이, 진양대군을 만나다 +2 20.08.20 2,268 11 21쪽
» 숙원 홍씨 47. 목멱산의 결의 +4 20.08.17 2,300 11 21쪽
46 숙원 홍씨 46. 계유정난을 막아라 +2 20.08.13 2,334 11 20쪽
45 숙원 홍씨 45. 단진의 고백 +2 20.08.10 2,348 11 20쪽
44 숙원 홍씨 44. 홍단진, 주상전하를 만나다 +2 20.08.06 2,363 12 18쪽
43 숙원 홍씨 43. 백겸과 창이 한양 기방에 들다 +1 20.08.03 2,387 11 16쪽
42 숙원 홍씨 42. 비 오는 밤, 사라진 자들 +3 20.07.30 2,400 11 18쪽
41 숙원 홍씨 41. 이향의 마음 +3 20.07.27 2,426 11 16쪽
40 숙원 홍씨 40. 꽃비 그리고 고려 제일 무사 창이, 조선 제일 무사 백겸 +1 20.07.23 2,443 11 20쪽
39 숙원 홍씨 39. 이향, 김종서와 야인을 만나다 +2 20.07.20 2,464 11 19쪽
38 숙원 홍씨 38. 운명적인 만남 +2 20.07.16 2,498 11 1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