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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연재수 :
95 회
조회수 :
215,158
추천수 :
1,167
글자수 :
809,561

작성
20.05.1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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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글자
18쪽

숙원 홍씨 1. 미친 서봄

DUMMY

숙원 홍씨 1. 미친 서봄


아바마마....아바마마...소자를 혼자 두지 마십시오. 아바마마...


주상은 흐릿해져가는 어린 세자를 바라보았다. 이제껏 조선의 국본으로 의젓한 모습을 보이던 세자가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주상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세자의 얼굴이 눈물에 너울너울 흔들렸다. 세상에 홀로 남겨질 열두 살 세자가 사라지는 것 같아 주상은 더럭 겁이 났다. 주상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마지막 힘을 다해 세자에게 입을 열었다.

“세자..”

주상의 목소리는 떨어지는 꽃잎처럼 가냘펐다. 그것이 서글퍼 세자는 목청 높여 대답했다.

“예 아바마마, 소자 홍위이옵니다.”

“세자...가까이 오라.”

주상은 세자의 눈을 바로 보며 말했다.

"세자. 명심하거라...모든 일은 좌의정 김종서와 의논하여라.”

“아바마마...”

“너를 끝까지 지켜줄 사람은...김종서 뿐이다.”

주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소리 하나가 강녕전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전하! 전하!”

주상의 깊어진 근심이 세자에게 향했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대군이 달려 들어왔다. 대군은 세상을 다 잃은 듯, 주상을 따라죽기라도 할 듯 애통해하며 울부짖었다.

“어. 어찌 이리되실 때까지 이 아우, 수양에게 알리지 않으신 겁니까!”

주상은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세자를 보았다. 세자는 대군이 들어오자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있었다. 세자의 숨소리는 사라지고 대군의 목소리만이 강녕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주상은 눈동자를 돌려 대군을 향했다. 주상은 대군에게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보다 빨리 눈이 스르르 감겼다. 주상은 대군을 눈에 담은 채 세상을 떠났다.

“아바마마....”

“전하...”

아비를 잃은 어린 세자는 ‘아바마마’를 외치며 울어댔다. 이에 질세라 대군은 더 크게 ‘전하’를 부르짖었다.

문 밖에 서 있던 내관과 나인들이 엎드려 통곡했다. 그 사이에 나인 하나만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인은 다른 나인들과 다르게 무수리 옷을 입고 있었고 조금은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반듯한 이마에 하얀 얼굴이 참으로 고왔다. 눈빛에선 세상의 전부를 잃은, 정인을 잃은 여인의 슬픔이 보였다. 그 슬픔이 너무 깊어 애처로웠다. 나인은 양손으로 입을 막고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혹시라도 주상이 다시 깨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슬픔을 삼키고 또 삼키고 있었다.

대군은 주상에게 엎드려 비통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전하께 청심원을 올리지 않은 것이냐! 어째서 올리지 않은 것이냐!”

슬피 울던 나인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전하, 이 수양이 세자저하를 잘 보필하겠나이다!”

나인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전하. 이 아우 수양을 믿으시고 편히 눈 감으시옵소서!”

나인의 눈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대군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나인의 얼굴에서 손이 미끄러지듯 떨어지더니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인의 사슴 같은 눈이 사나워졌다.

“전하...수양만 믿으시옵소서. 이 수양이”

나인의 노여움이 수양의 입을 막았다.

“수양 네 이노옴.”

대군이 돌아보기도 전에 나인은 문을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왔다. 문짝이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나인은 죽이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대군을 향해 걸어왔다. 당황한 대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이 그저 입만 떡 벌리고 보고 있을 뿐이었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나인의 눈동자에 대군 앞에 잠들 듯 죽어있는 주상의 용안이 들어왔다. 슬픔이 분노를 밀어냈다. 나인은 갑자기 가랑잎이 흔들리듯 털썩 주상 곁에 주저앉았다. 나인은 주상의 얼굴을 안고 쓰다듬으며 흐느꼈다.

“전하...전하...”

주상의 몸이 움찔했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나인은 주상의 용안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며 슬픔을 토해냈다.

“아니되옵니다...아니되옵니다...이리는 못 보냅니다.”

나인의 눈물 콧물이 주상의 용안을 사정없이 적셨다.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주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잠시 놀라 울음을 멈춘 세자와 대군의 눈이 마주쳤다. 세자는 다시 슬퍼하기 시작했고 대군은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전하! 전하!”

나인은 통곡하는 대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분노가 슬픔을 밀어냈다. 나인은 바로 옆에서 주상의 팔을 잡고 애통해하는 수양을 노려봤다. 나인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군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대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입을 뻐끔대며 두리번거렸다.

“수양 네 이 노옴, 네 놈의 눈물이 슬픔이더냐! 기쁨이더냐! 그리도 좋으냐! 가슴을 치고 눈물을 펑펑 흘릴만큼 좋은 것이냐! 김종서를 죽이고, 형제인 안평, 금성대군을 죽이고, 세자를 죽이고, 왕이 될 생각을 하니 그리도 좋은 것이냐! 네 놈이 사람이더냐! 짐승이더냐!


모니터를 보고 있던 진호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컷! 저거 뭐야, 저거 뭐야 이 자식아!”

조연출은 난감해하며 뒤로 물러섰다. 드라마 감독인 진호는 너무 당황스러워 보고만 있다가 정신을 차린 직후였다.

“당장 끌어내! 저건 또 뭐야!”

나인이 대군의 멱살을 잡은 채 슬픔에 겨워 울고 있는데 키가 큰 내관 하나가 달려왔다. 내관은 칼을 든 채로 가슴을 풀어헤쳐 복근이 보이게 하고 나인 앞으로 와서 카메라를 향해 섰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한 내관은 더욱 눈을 크게 뜨고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안면 근육을 움직였다. 복근이 보이도록 옷을 뒤로 젖히며 칼을 허공에 그으며 멋있는 척을 했다.

진호의 인내가 바닥을 드러냈다. 진호는 조연출을 향해 당장 끌어내라고 소리쳤다.

그러다가 보았다. 클로즈업 된 나인의 얼굴을. 아주 많이 익숙한 얼굴. 진호의 딸 서봄이었다. 진호는 모니터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다시 한 번 보고는 세트장 안의 봄이를 봤다.

내관은 연신 칼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봄은 아랑곳 않고 대군의 멱살을 더욱 힘껏 잡았다.

“그리는 안 된다. 내가 살아있는 한, 그리는 안돼. 네 놈의 사지를 찢어죽일 것이다. 네 놈을 죽여 사직을 바로 세울 것이다! 네 놈을 죽일 수만 있다면, 내 목숨 따위는 상관없다!”

내관은 칼을 단진에게 겨누고 책을 읽듯 더듬거리며 말했다.

“수 양 대 군 앞에서 떨 어 져 라. 감 히 무 수 리 년 따위가.”

봄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양손으로 잡아 분질러 던졌다. 봄의 분노한 손이 다시 대군에게 향하는데 조연출이 달려왔다. 조연출이 봄을 끌어내려하자 봄은 대군의 옷을 잡고 필사적으로 버텼다. 순한 얼굴의 체구가 작은 나인이 안절부절 못하며 봄이 곁에 있었고 내관은 부러진 칼을 들고 카메라를 향해 멋진 척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진호는 너무 창피해서 차마 세트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거칠게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조연출이 봄이를 필사적으로 대군에게서 떼어내려 했다. 봄이 잡고 있던 대군의 옷이 찢어졌다. 이때다 싶어 작은 나인이 봄이의 한쪽 팔을 힘껏 잡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 했다. 봄은 온 힘을 다해 몸부림 쳤다. 봄의 가발뿐 아니라 말리는 작은 나인의 가발까지 벗겨졌다. 이에 아랑곳 않고 봄은 끌려가며 필사적으로 발길질을 해댔다. 치마 속의 청바지를 입은 다리가 헛발질을 해댔다.

봄은 광기로 부들거리며 소리쳤다.

“놔라! 수양을 죽여야 모두가 산다 하지 않느냐! 놔라! 수양을 죽여야 한다! 죽여야 한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봄은 괴력을 발산해 팔을 앞으로 모았다가 자신을 잡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팍 내리쳤다. 작은 나인과 조연출이 나동그라졌다. 나인은 독수리처럼 날쌔게 대군에게 달려들어 힘차게 박치기를 날렸다. 세트장 안은 볼륨을 끈 텔레비전처럼 침묵이 찾아왔다. 대군이 쿵 하고 쓰러졌다. 이와 동시에 볼륨을 최대치로 높인 것처럼 세트장 안이 아수라장이 됐다.

죽은 주상이 벌떡 일어나고 세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작은 나인은 놀라 봄이를 바라봤고 칼을 든 내관은 여전히 멋진 척하며 허공에 부러진 칼을 휘둘렀다.

기절한 대군에게 진호가 달려갔다. 대군은 의식을 잃었고 쌍코피가 흘러내리며 정점을 찍었다. 모두들 놀라 안절부절 못하는 상황임에도 봄이는 여전히 광기로 벌벌 떨고 있었다.


봄이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조연출에게 밀려 방송국 밖으로 쫓겨나고 있었다. 내관 역의 원빈과 나인 옷을 입은 소이까지 한꺼번에 밀려 밖으로 나왔다. 방송국 안의 온기는 사라지고 12월의 찬바람이 인정사정없이 불어댔다. 봄은 머리는 풀어헤쳐 산발이고 저고리는 반쯤 벗겨지고 치마 한쪽이 청바지 주머니에 말려 올라가 있었다. 12월의 칼바람이 인정사정없이 불어댔지만 봄은 후회와 걱정으로 넋이 나가 있어 추운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원빈은 윗옷은 아예 풀어 젖친 상태로 봄이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야, 미친 서봄. 이 미친 또라이.”

봄은 모든 것을 불태우고 허망하게 남은 재처럼 힘없이 말했다.

“인정, 미친 서봄 맞고, 오늘은 내가 봐도 미친 또라이가 맞느니라!”

“너 때문에 내 무사 역할 날아갔어!”

원빈은 자신의 복근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봄을 힐난했다.

“보이냐? 초코렛 복근, 이 미치게 흥분되는 복근을 가진 남자 중의 남자”

봄은 개 짖는 소리에 일일이 대꾸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있을 뿐이었다.

원빈은 아랑곳 않고 봄에게 다가갔다.

“세계 최강 조각 외모에, 귀족보다 더 우아하고, 귀티가 철철 흐르는 내가! 내가!”

원빈의 입에서 튀어나온 침이 사정없이 날아들자 봄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내시 단역 한 번 하고, 다음 번에 무사 역할인데, 그 미친 짓거리하는 통에 쫓겨났어. 미친 서봄, 미친 닭대가리, 네 친구란 이유만으로!”

“닭? 대가리?”

봄은 더는 참아줄 수 없어 원빈을 쏘아보며 다가갔다.

“야 나원빈, 머리는 나빠도 말을 바로 하거라! 내 친구라 네가 쫓겨난 것이 먼저가 아니라, 내 덕에, 내 친구라는 이유로 방송국 문턱이라도 넘은 것이다, 내시는 아무나 하는 줄 아느냐? 내시도 공무원이다, 네 새대가리로는 어림없다! 내시복도 너에겐 과분한 줄 알거라!”

봄에게 밀려 한걸음씩 물러서던 원빈이 멈춰 섰다.

“미친 서봄!”

원빈이 봄이의 머리채를 잡으려는데 소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제발 그만 좀 해에. 지금 싸울 때가 아니잖아. 알바 첫날부터 잘렸어. 등록금 모아서 내년엔 꼭 복학해야 하는데...”

소이의 큰 눈이 금세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았다. 봄은 소이의 손을 잡았다.

“소이야...미안해. 전하가 돌아가시니까...나 진짜 안 그러려고 했는데...”

“지랄하네. 미친 서봄. 널 믿느니 차라리 나를 믿지. 내가 네 미친 짓거리 15년째다.”

봄은 소이를 걱정하느라 원빈이 궁시렁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소이는 순하게 웃었다.

“아니야. 네가 문종대왕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건데 뭐...그리고 봄이 네 덕에 알바자리 얻은 거잖아. 괜찮아.”

괜찮다는 말과는 다르게 소이의 맥없는 눈을 본 봄이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걱정마 소이야, 네 알바는 내가 책임져. 나, 서봄이야! 방송국 절대권력의 외동딸이자, 권력의 쌍두마차 작가님의 하나뿐인 보조작가! 나만 믿어!”

원빈의 두 눈이 반짝이며 갑자기 봄이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원빈은 소이를 확 밀치고는 봄이 곁에 바짝 다가가서 그녀를 방송국 안으로 밀어대기 시작했다.

“그래, 서봄, 나는 너를 믿어, 우린 15년 친구잖아, 자, 가자!”

봄은 초등학교 때부터 웬수인 원빈은 관심도 없고 중학교 때부터 단짝인 친구 소이를 위해 방송국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엔 온통 소이가 알바를 해야만 복학할 수 있다는 생각뿐 대형 사고를 친 것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봄은 앞머리를 손으로 살려주고 어깨까지 오는 뒷머리를 양손으로 쓸어주고 여신인 듯 도도하게 걸어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방송국 안에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서슬퍼런 눈으로 서 있는 진호와 눈이 마주쳤다. 봄은 경솔하게 들었던 다리를 조신하게 있던 자리에 돌려놨다. 봄은 진호와 눈이 마주치지 않은 척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무언가가, 어둠이 스윽 덮쳤다. 봄의 몸집 두 배 만한 두툼한 패딩이 봄의 어깨에 걸쳐졌다. 봄은 진호와 눈이 마주쳤다. 봄이는 아무 말 없는 진호 앞에서 점점 작아졌다.


봄은 진호의 손에 이끌려 방송국 밖으로 나왔다. 숨어서 보고 있던 원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궁시렁거리다 사라졌다.

“저만 믿어? 저 미친 서봄 추워서 옷 입으러 들어갔어, 저만 추워? 저게 친구야?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내 살길 찾아야지.”

소이도 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그보다 더 차갑게 느껴지는 건 진호였다. 소이는 봄이가 걱정됐지만 진호가 무서워서 추운 몸을 웅크리며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봄은 진호에게 끌려가며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 대본 재촬영을 주청 드리러 왔다가, 단역이 부족하다 하여 도움을 드리려다 그만, 아바마마께 누가 되었사옵니다.”

진호는 들은 척도 안하고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들었다.

“소인의 죄는 죽음으로 물으시고, 제 충심을 헤아려주십시오, 작가님과의 전쟁은 아니되옵니다.”

진호는 빈 택시가 서지도 않고 그냥 가자 짜증이 났다.

“작가의 마음을 얻는 감독만이, 시청률을 보장받는 것입니다, 작가의 마음을 얻는 감독만이, 충분한 수면 시간을 보장 받는 법입니다!”

참다못한 진호가 봄을 보며 입을 열었다. 화는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주변을 의식해 조용히 말했다.

“아빠가 방송국 근처에도 오지 말랬지!”

“아바마마가 집 근처에도 안 오시니 어찌합니까!”

“서봄!”

“아바마마”

봄은 더는 안 되겠는지 아까와는 다르게 강하게 말했다.

“나도 어쩔 수 없어 아빠, 나 보조작가잖아!”

진호의 목소리가 커졌다.

“누가 너보고 작가래? 너 보조작가 백년을 해도 작가 안돼! 알아? 너 작가 자질 없어, 제로야 제로.”

“인정. 정정할게, 작가 아니고, 작가님 보조야, 그냥 보조.”

“보조가 자랑이야? 겨우 들어간 대학 때려 치고 한다는 게, 고작, 넌 꿈도 없어?”

눈치 없게도 봄이 앞에 택시가 멈춰 섰다. 봄은 다급해져서 말했다.

“삼촌이 아빠가 대본 고쳤다고 난리 났어, 대본 그대로 촬영 다시 하래, 안 그럼 대본 안 쓴대, 삼촌이 대본 안 쓰면 아빠만 힘들잖아!”

진호는 그걸 왜 네가 신경 쓰냐고 말하려다 소용없겠다 싶어 봄이를 택시에 태우고 문을 닫았다. 봄은 창문을 내리고 진호를 향해 순하게 말했다.

“아빠, 잠은 집에 와서 자야 해, 나 집에 가서 기다릴게, 아빠 약속한 거야!”

봄은 택시가 출발하자 돌아보며 멀어지는 진호를 바라봤다. 진호가 그런 봄이를 보다가 돌아섰다. 봄은 잽싸게 몸을 돌려 기사에게 소리쳤다.

“아저씨, 여기서 세워주세요!”


봄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씩씩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 서봄이야. 내 사전에 후퇴란 없어. 내 인생에 포기란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아빠 설득해서 다시 촬영하고 삼촌 대본 쓰게 해야 해!”

봄이 가려다 멈춰 섰다. 봄의 굳은 결기는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산산이 부서졌다. 머리는 어디서 쥐어뜯긴 듯 산발이고, 패딩 사이로 옷고름이 풀어져 속살이 훤히 보이고. 얼굴에는 숯을 발랐는지 여기저기 시커멓게 칠해져 있었다. 사람들의 힐끔거리는 시선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봄은 자신의 책무를 다해야했기에 대수롭지 않은 듯 중얼거렸다.

“일하다 그런 건데 뭐, 작가 보조는 아무나 하는 줄 알아? 방송국에 나 이런 거 모르는 사람도 있어? 없지!”


임금과 후궁이 은밀한 밤을 보내고 있었다. 촛불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후궁은 농밀한 웃음을 던지고 임금은 열정에 불타는 눈으로 후궁을 바라봤다. 임금은 술상을 옆으로 밀어내고 촛불을 끄려고 입을 모으는데 “컷” 소리가 들려왔다.

임금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는데 병풍 뒤에서 교복을 입은 여고생 봄이 나왔다. 봄은 손에 든 대본을 가리키며 임금을 야단쳤다.

“대사를 안치고 바로 액션으로 가시면 안 되죠, 임금이, 후궁을 보며,”

봄은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리얼리티를 살려 말했다.

“네가 따라 준 한 잔의 술이, 이리도 달더란 말이냐, 이리도 좋더란 말이냐, 평생 마시고 또 마셔도 갈증이 났었는데, 이 한 잔의 술이 짐의 갈증을 풀어주는 구나, 이리, 이리, 짐의 품으로 들어오라, 이리도 단 네 입술을 맛보고 싶구나.”

임금과 후궁은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보고만 있었다. 봄은 자신의 연기에 넋을 잃은 줄 알고 더욱 밀어붙였다.

“이거죠, 이 주옥같은 대사를, 이 대사를 안하면 촛불을 끈다한들 시청자가 느껴지겠습니까?”

임금과 후궁은 봄이가 감독의 딸임을 알기에 아무 말 못하고 진호를 바라봤다. 진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누르며 심호흡을 했다.

“서봄!”

봄은 진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 작가님 보조 서봄입니다 감독님, 이런 식은 곤란합니다, 저희 작가님 대사는 숨소리 하나 못 뺍니다, 느낌표 하나 못 바꿉니다.”


봄은 초등학교에 가기 전부터 늘 이런 식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사도세자를 살리겠다고 뒤주에 들어가는 바람에 난리가 났었다. 사도세자와 함께 뒤주에 끼어서 결국 뒤주를 부셔야만 나올 수 있었다.

봄은 진호를 떠올렸다.

“내 딸이 그랬으면...감히 어미가 하는 일에 이리 망신을 시키는 것이냐, 네가 누구의 딸이란 말이냐, 왜 내 편이 아닌 것...”

봄은 몸에 걸쳐진 패딩이 죄책감과 미안함 부끄러움으로 점점 무거워져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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