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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연재수 :
95 회
조회수 :
215,220
추천수 :
1,167
글자수 :
809,561

작성
20.08.2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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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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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숙원 홍씨 49. 여인 홍단진의 결심

DUMMY

숙원 홍씨 49. 여인 홍단진의 결심


진양이 가까워졌다. 창이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갔다. 진양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창이를 보았다. 진양의 눈빛은 고요했지만 창이에게 날카롭게 파고드는 것 같았다. 휘날리는 붉은 빛 속에서 진양과 창이는 서로를 마주 봤다.

진양의 호위무사들이 서둘러 와서 검으로 창이를 막아섰다. 진양이 손을 들어 제지하자 호위무사들이 물러섰다.

백겸이 창이를 잡아당겨 길을 터주었지만 진양은 가지 않았다.

붉은 빛 속에서 진양의 눈길이 창이에서 백겸에게 옮겨갔다. 백겸의 가슴은 맹렬히 뛰었지만 눈빛은 차분했다. 진양은 백겸의 순하지만 강한 눈빛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진양의 눈길이 다시 창이에게 옮겨갔다. 창이의 눈빛은 뜨거웠다. 진양은 그들이 한눈에 봐도 무예가 뛰어나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진양이 창이에게 물었다.

“내게 할 말이 있느냐?”

창이는 단진을 위험에 빠뜨리고 육갑을 죽인 진양에게 적개심을 드러냈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할 말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진양이 웃었다.

“그러하냐? 허면 할 말은, 다시 보면 그때 하거라!”

진양이 지나갔다. 무사들이 뒤를 따랐다.

백겸과 창이의 가슴은 더욱 거칠게 뛰었다.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갔고 손은 땀으로 젖었다.

진양을 쫓던 석의 눈에 창이가 걸렸다. 붉은 천 사이로 창이가 보였다. 석은 너무 놀라 멈춰섰다. 다시 그곳을 봤지만 창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석은 잘못 본 건가 싶었다. 다시 확인해야 하나 망설이다가 멀어져가는 진양을 쫓아갔다.


진양은 말없이 걸었고 두 무사가 뒤를 따랐다. 그 뒤를 석이 쫓았다. 진양은 운종가 곳곳을 누볐다. 진양의 눈에는 사람들이 보이지도 않았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진양은 무언가를 찾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진양은 골목으로 들어가 전에 갔었던 모필가의 상점으로 향했다.

진양이 발을 젖히고 어둠 속으로 들어섰다. 쾌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주인이 없어지고 나서 아무도 찾지 않은 모양인지 문은 열려있었다. 양가가 불을 켜기 위해 주변을 살피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한 사내가 발을 젖히고 들어섰다.

“박가 이 썩을 놈아, 어디 갔다가 이제 나타난 거냐...”

사내가 어둠 속에서 진양을 응시하다가 초에 불을 켰다. 사내는 초를 들고 다른 초에도 불을 붙였다. 사내가 촛불을 들고 진양을 비춰보며 물었다.

“뉘시오?”

“모필가 박가가 어디 있는지 아느냐?”

“내가 묻고 싶은 말이오! 주문받은 거 써야 하는데, 환장할 노릇입니다. 제가 물어다 준 손님이 곧 책을 찾으러 올 텐데...아니 대체 어딜 간 건지...어디 가서 뒤진 건지...돈이라면 환장하는 놈이...”

진양이 사내를 살폈다. 나이는 40대 중후반으로 퉁퉁하고 손은 투박했다.

진양이 물었다.

“혹시 염가를 아느냐?”

“염가...염가라....박가한테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진양이 호위무사에게 눈짓을 했다. 호위무사가 돈 주머니를 내주었다. 사내가 돈 주머니를 받아들고 좋아했다.

진양이 물었다.

“염가에 대해 들은 대로 이야길 해 보거라.”

“박가가 조선 팔도에서 모필에 있어선 자기가 최고지만, 술만 마시면 염가 그놈을 따라갈 수 없다 그리 말했습니다. 다른 건 잘 모릅니다....쬐끔한 놈이 실력은 좋다고 했습니다. 아...손등에 점이 있어 실력이 좋은 건 아닌가...하는 소릴 들었습니다...”

진양이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갔다.

진양이 걸어갔다. 골목 끝에 숨어있던 석이 나왔다.


“저하...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동궁전에 등불이 밝혀져 있었다. 열린 창으로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향과 단진이 마주 앉아 있었다. 향은 잔무늬가 들어간 흰색 야장의를 입고 은 상투관에 비녀를 꽂고 있었다. 향의 책상엔 서책이 쌓여 있었다. 향은 공양왕에 관해 기록해 놓은 책들을 읽고 있었다. 향은 괴문서를 왜 공양왕의 필체로 썼을까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 있었다.

단진이 찾아와 긴히 할 말이 있다고 청했다. 향은 기다리고 있었지만 단진은 말이 없었다.

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엇이냐?”

“소인 청이 있사옵니다. 들어주시겠다 약조하시면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향이 단진을 보다가 말했다.

“들어줄 것이다. 허니 말해 보거라!”

단진이 활짝 웃었다.

“저하...정말이십니까? 약속하신 겁니다.”

향이 미소 지었다.

“그래. 무엇이냐?”

단진은 향이 읽고 있는 책을 덮었다.

“저하...앞으로는 소인과 명상을 해야 하옵니다.”

“명상이라 했느냐?”

“예 저하...또한 산책도 하셔야 하옵니다. 소인은 동궁전 나인입니다. 소인은 저하의 건강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사옵니다. 허락치 않으시면, 소인에게 역당을 잡는 일을 맡겨주셔야 하옵니다.”

향이 단진을 보았다. 단진의 눈에서 빛이 났다.

단진은 향을 바라보았다. 단진은 다짐했다. 향에게 닥쳐올 운명에 더는 눈물 흘리지 않을 것이다. 단진은 향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울 시간이 없었다. 단진은 향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봤다. 중전마마께서 돌아가시고, 대리청정을 하며 원칙대로 3년 상을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상전하께서 돌아가셔서 향은 또다시 상을 치르다가 2년 반 만에 세상을 떠났다.

단진은 모든 걸 바꿀 수 있다고 여겼다. 향이 건강하기만 하다면, 오래도록 살게 할 수 있고 비극도 없을 것이다.

“어찌하는 것이냐?”

단진의 첫 번째 계획은 향이 서책을 멀리하게 하는 것이다. 단진이 향을 바로 보고 양손을 모아 배에 가져다댔다.

“이렇게 하시고 눈을 감으시면 되옵니다. 눈을 감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마시고. 소인이 눈을 뜨라고 할 때 뜨시면 되옵니다.”

향이 미소 지었다.

단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조했다.

“저하..몸의 긴장을 풀고, 모든 생각을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이 순간은 백성도, 주상전하도, 역당도, 그 무엇도 생각해선 아니 되십니다. 소인도 같이 할 것입니다. 허니 절대 눈을 뜨시면 아니 되옵니다.”

향이 눈을 감았다.

단진이 눈을 감았다.

“잠이 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허면 참지 마십시오. 소인이 눈을 뜨라고 할 때까지 뜨시면 아니 되옵니다.”

향이 눈을 뜨고 단진을 보았다.

“절대 눈을 뜨셔선 아니 되옵니다.”

향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알았다 하질 않느냐!”

향은 단진의 얼굴을 보았다. 반듯하고 고운 얼굴은 꾸밈이 없었다. 단진의 입이 또다시 열리자 향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저하...마음을 내려놓으셔야 하옵니다.”

“그리 말을 시키는데 어찌 내려놓겠느냐...”

“아...맞다...”

단진은 혀를 살짝 내밀고는 입술을 닫았다. 입이 또 열리는가 싶다가 닫혔다. 향이 미소 지었다.

향은 단진의 고운 이마를, 가지런한 눈썹을, 감고 있는 속눈썹을, 단정한 입매를 보았다. 단진은 눈을 감고 있지만 향에겐 눈빛이 보였다. 단진이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향에겐 들렸다. 단진의 가지런한 숨소리가 듣기 좋았다.

단진의 야무진 입술이 열리다가 또다시 닫혔다.

향이 미소 지었다.


동궁전 밖에는 박 내관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고, 공두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박 내관은 단진이 향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밖에 나와 있었다. 세치 혀도 모자라 몸뚱이까지 드러내더니 이번엔 무슨 요망한 짓거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속이 타들어갔다. 박 내관은 전하께서도 알게 된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조선의 첫 적장자로 보위에 오르실 세자저하셨다. 이제껏 세자로 책봉되시고 나서 단 한 번도 주상전하를 실망시키신 일이 없는 저하셨다. 대신들과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저하셨다. 그런 저하를 저런 생기다 만 홍단진 때문에 흠집이 생기게 둘 수는 없었다. 박 내관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아야 했다.

박 내관은 말이 새나가는 걸 막기 위해 내관과 나인들을 모두 밖으로 나가게 했다.

공두가 문에 귀를 대고 속삭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수상한 홍단진이 저하를 기절이라도 시킨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박 내관이 공두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입조심하거라!”

박 내관이 눈을 부릅뜨자 공두가 또 맞을까 싶어 머리를 막았다.

박 내관이 잠시 있다 슬쩍 공두에게 물었다.

“네가 보기에 홍단진 생긴 게 어떤 것 같으냐?”

공두는 평소 생각을 진실되게 말했다.

“홍단진은 생겼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홍단진은 생기다 만 얼굴입니다.”

박 내관의 표정이 밝아졌다.

공두가 계속했다.

“홍단진은 눈도 더 커야 하고, 코도 더 오똑해야 하고, 입술도 더 도톰해야 하고, 키도 더 커야 합니다. 웃을 때가 가장 꼴불견입니다. 눈이 아래로 처지고 눈도 보이지 않습니다. 헤벌레할 때 보면 어딘가 맹해 보입니다. 홍단진은 한마디로, 못생겼습니다!”

박 내관은 어찌나 좋은지 풋하고 웃음이 나왔다. 공두가 처음으로 마음에 들었다.

“꼴에 눈은 또 제대로 달렸구나...”

공두는 이때다 싶어 말했다.

“박 내관님, 박 내관님 눈에서 홍단진을 치워버릴 수 있는 묘책이 제게 있습니다.”

박 내관의 귀가 쫑긋했다.

“무엇이냐?”

공두는 엄청난 비밀이라도 되는 듯 아무도 없는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박 내관은 공두의 뛰어난 눈썰미에 반해 대단한 무언가가 나올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다.

공두가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고 박 내관에게 은밀히 말했다.

“유배를 보내는 것입니다!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제주도가 좋을 듯합니다. 내일이라도 당장 떠나겠습니다.”

박 내관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공두가 눈치를 살폈다. 점점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산? 아니면 강화도? 그럼...여의도라도...”

박 내관은 목소리를 높일 수 없어 이를 악물고 말하며 공두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유배는 아무나 가는 줄 아느냐? 너 같은 놈은 유배보다 저승 가는 길이 빠를 것이다...”

공두가 뒷걸음질 치다 문 쪽으로 향하는 바람에 문이 열릴 뻔했다. 박 내관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공두를 슬쩍 밀었다. 문이 살짝 열리고 미소 짓고 있는 향의 모습이 보였다.


단진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향은 물끄러미 단진을 보았다. 졸고 있는 모습을 보자 안타까웠다. 단진의 고개가 떨어지려 하자 향이 단진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향의 손에 단진의 볼이 닿았다. 단진은 향이 잡아준 걸 알지 못하고 몸을 벌떡 세웠다.

“저하...눈을 뜨시면 아니 되십니다...”

단진이 눈을 떴다. 향이 눈을 감았다. 단진이 향을 보았다.

향의 반듯한 얼굴을 보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향에게선 기품 있는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단진은 사람에게 어떻게 이런 아름다움이 있을까 싶었다. 단진은 망건을 두르고 상투관에 비녀를 꽂은 곳에 시선이 갔다. 단정함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게 놀라웠고 향은 무엇을 입어도 빛이 났다. 단진은 알고 있었다. 향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에서 나온다는 것을. 단진은 향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반듯함과 아름다움에 심취해 있었다. 향에게서 느껴지는 건 세상 그 무엇도 이겨낼 수 있는 사랑이었다. 단진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단진은 또다시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향을 오래 살게 하겠다고.

단진은 저도 모르게 향의 얼굴 가까이 손을 가져다댔다.

향이 눈을 떴다. 향과 단진이 서로를 보았다.

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단진은 그대로 있었다. 단진이 놀라 팔을 내리는데 향이 단진의 손을 잡았다.

향은 단진의 손을 잡고 상처를 보았다. 향의 손길은 따뜻했다. 단진은 가슴이 콩닥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숙였지만 잠시였다.

단진이 향을 보았다. 향이 미소 지었다. 단진은 향의 눈길을 마음에 담았다.

박 내관은 너무도 다급해 문을 열고 공두를 걷어찼다. 공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안으로 나자빠졌다. 단진은 놀라 향에게서 손을 뺐다.

박 내관이 서둘러 들어와 공두를 잡아 일으키고는 야단을 쳤다.

“저하 앞에서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박 내관이 공두를 잡아 던지듯이 하고는 문을 닫았다.

박 내관이 말했다.

“저하...송구하옵니다. 아랫사람을 잘못 훈육한 소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아니...”

박 내관은 말하면서 은근슬쩍 다가왔다.

“저하...날씨가 춥사옵니다.”

박 내관이 단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저하께서 고뿔이라도 걸리시면 어쩌려고 이러느냐. 어서 창을 닫거라!”

박 내관은 향이 모르게 단진에게 발길질을 했다.

향이 일어섰다.


밤이 내린 기방은 형형색색의 등불에 기녀들의 웃음소리에, 사대부가 사내들의 웃음소리와 술주정 소리에 가야금 소리가 더해져 시끌벅적했다.

기녀들은 부채를 부쳐대며 발이 땅에 닿지도 않듯 가볍게 걸었고. 사대부가 사내들은 땅에 발을 꼭 붙여가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오늘따라 기방은 신진 사대부가의 자제들이 많이 와 있어 더 어수선했다. 신진 사대부가의 자제들은 기녀들보다 더 화려하게 치장을 했고, 허세와 권력을 조금이라도 더 과시하기 위해 걷는 건지 기는 건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움직였다.

진양이 기방으로 들어섰다. 행수 연월이 진양을 맞았다. 진양은 자신감 넘치는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진양을 알아본 신진 사대부가 사내들이 납작 엎드리듯 인사를 하며 양쪽으로 갈라져 길을 터주었다. 진양은 눈길도 주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진양이 정각으로 올라섰지만 술상만 있을 뿐 안평이 없었다. 연월은 진양에게 서찰을 내밀었다.

“안평대군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진양이 서찰을 보았다.

“형님, 시급을 다투는 일이라 먼저 일어섰습니다. 며칠 걸릴 것 같습니다. 자세한 건 확인한 연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괴문서의 실체를 밝혀낼 듯합니다.”

연월이 기녀를 부른다고 하자 진양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다.

진양은 안평이 무슨 일이기에 며칠이 걸릴까 생각해 봤다. 진양은 술을 따라 한잔 들이켰다. 설가의 깃털로 인해 역당의 무리는 한양이 아닌 다른 곳에 본거지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설가를 죽인 놈은 심가와 순포 둘 중 한 놈이 분명했다. 안개 속에 발자국은 찾아냈으나 제대로 보이지 않아 갑갑했다. 진양은 이럴 땐 마음을 비워야 눈이 맑아짐을 알았다.

진양은 한쪽 다리를 올리고 술잔을 든 팔을 올려놓고 있었다. 진양이 술잔을 보는데 단진이 떠올랐다. 생각을 치우고 나니 단진이 그 자리에 들어앉아 있었다.


‘한 사람이 죽는다는 건, 한 세상이 끝나는 것이다.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친구고 누군가의 전부가 끝나는 것이다, 그 누군가의 세상이 끝나는 것이다. 해서 그 세상을 끝나게 했을 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기다리거라!’


진양은 오늘 같은 날 그 계집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달려들면 반가울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지 술잔에 단진이 있었다. 어디선가 구슬픈 가야금 소리가 들렸다.


창이가 기방으로 들어섰다. 김종서 집의 별채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창이는 갑갑증이 나서 힘들어했다. 백겸은 자신이 조금 더 기다려보겠다며 창이에게 먼저 가라고 했다. 삼년은 창이를 따라나서는 것보다 백겸과 있는 걸 택했다.

창이는 진양을 만난 이후로 마음이 부산해졌다. 진양을 그 자리에서 죽였다면 자신들이 돌아갔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그리 쉬운 일이라면 굳이 조선에 오지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창이에겐 단진이를 자객들로부터 보호하는 일이 가장 급한 일이었다.

백겸은 창이에게 도화가 걱정하니까 상황을 전하라고 했다.

창이에겐 기방의 시끌벅적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기녀들이 자신을 보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오로지 금군 경가를 어떻게 손봐줄까 하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래야만 단진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다.

월의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창이의 생각을 깨뜨렸다. 월은 창이를 불러도 대답이 없자 창이에게 팔짱을 꼈다.

“열매바위, 어찌 불러도 대답이 없는 것이오! 대체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 것이오!”

창이가 월을 보았다.

“이년 생각이라면 그리할 것 없소, 생각이 보이길 하겠소, 만져지길 하겠소, 음식은 먹어야 맛이고, 계집은 품어야 맛이 아니겠소! 이년은 눈앞에 있으니, 어떻소, 오늘 밤 내 방에 들르겠소!”

창이가 월에게 눈길을 거두고 팔을 뺐다. 월은 사뿐히 창이 앞으로 와서 빤히 보았다. 월이 빙그레 웃으며 창이를 살폈다. 월이 창이의 앞머리에 손을 가져다댔다. 창이가 거칠게 월의 손목을 낚아챘다. 월은 놀라 창이를 보았지만 잠시였다. 월은 간드러지는 소리로 말했다.

“어찌 그러시오! 도화성님 마음은 꽃바윈걸 모른단 말이오?”

창이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던 단진이 떠올랐다.

창이가 가려는데 형형색색의 등불 사이로 진양이 걸어왔다.

진양이 창이를 보았다. 운종가의 붉은 빛 아래에서 자신의 앞을 가로막던 창이였다. 진양은 웃었다.

진양이 다가왔지만 창이는 피하지 않았다.

진양이 창이 앞에 멈춰섰다.

“이리 빨리 볼 줄은 몰랐구나.”

창이가 진양을 보았다.

진양이 창이의 옆에 있는 월을 힐끗 보았다. 월은 진양에게 인사를 하고 서둘러 물러갔다.

진양이 말했다.

“사내놈이 배짱도 있어 보이기에 뭐 대단한 게 있나 싶었더니, 겨우 기녀 치마폭에 사는 기부더냐?”

창이가 차갑게 말했다.

“사내가 한 여인을 지키는 것보다 더 대단한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진정 그리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진양이 웃었다.

“재밌는 놈이구나. 좋다. 아까 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냐?”

“없습니다.”

“헌데 어찌 길을 가로막았느냐?”

“제가 가로막은 것이 아니고, 제가 가는 길로 오신 겁니다.”

“너는 내가 누군지 알지 않느냐?”

“알고 있습니다. 진양대군이십니다.”

도화는 숨어서 보고 있었다.

“허면, 나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너는 누구냐?”

“저도 제가 누군지 모릅니다.”

“무어라?”

“역병을 앓고 일어났는데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해서, 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검을 다루느냐?”

“그런 것 같습니다. 허나 검을 잘 다루는지 알지 못하고, 누구를 위해 검을 쓰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진양이 웃었다. 진양은 창이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눈빛이 계집을 위함이란 게 재밌었다. 낭만적인 야생마라. 창이를 길들이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어떠냐? 갈 곳이 없으면 내 집으로 들어오거라!”

“제가 누군 줄 알고 들이십니까! 역당일 수도, 살수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건 내가 알아 할 것이다!”

“저는 여인을 지키며 사는 걸로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진양이 웃었다.

“그 계집이 누군지 궁금하구나...”

창이가 차갑게 말했다.

“계집이 아닌 여인입니다.”

진양이 박장대소했다. 진양은 또다시 단진이 떠올랐다. 요즘 들어 재밌는 놈들을 자주 보는구나 싶었다.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는데 창이 때문에 다시금 기분이 좋아졌다. 진양은 웃으며 창이를 보았다. 진양은 창이가 마음에 쏙 들었다.

여인이라...

진양은 문득 야생마 같은 창이가 마음에 품고 있는 계집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밤하늘의 별이 쏟아질 듯 반짝이고 있었다. 향과 단진이 별 속으로 걸었다.

맑디 맑은 하늘 아래 푸르른 나무가 바람에 살랑였다. 그 사이로 향과 단진이 걸었다.

노을이 아름답게 물들고 있었다. 향과 단진이 걸었다.

밤하늘의 별 속으로 향과 단진이 걸었다. 향과 단진이 마주 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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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 작성자
    Lv.7 cr*****
    작성일
    20.08.24 11:41
    No. 1

    설레고 아프고 긴장되고...진짜 너무 재밌네요~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찬성: 6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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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숙원 홍씨 51. 단진, 향의 위험을 알아채다 +1 20.08.31 2,189 11 20쪽
50 숙원 홍씨 50. 무예시합 날이 정해지다 +2 20.08.27 2,202 11 22쪽
» 숙원 홍씨 49. 여인 홍단진의 결심 +1 20.08.24 2,229 11 20쪽
48 숙원 홍씨 48. 백겸과 창이, 진양대군을 만나다 +2 20.08.20 2,269 11 21쪽
47 숙원 홍씨 47. 목멱산의 결의 +4 20.08.17 2,300 11 21쪽
46 숙원 홍씨 46. 계유정난을 막아라 +2 20.08.13 2,335 11 20쪽
45 숙원 홍씨 45. 단진의 고백 +2 20.08.10 2,349 11 20쪽
44 숙원 홍씨 44. 홍단진, 주상전하를 만나다 +2 20.08.06 2,364 12 18쪽
43 숙원 홍씨 43. 백겸과 창이 한양 기방에 들다 +1 20.08.03 2,388 11 16쪽
42 숙원 홍씨 42. 비 오는 밤, 사라진 자들 +3 20.07.30 2,401 11 18쪽
41 숙원 홍씨 41. 이향의 마음 +3 20.07.27 2,427 11 16쪽
40 숙원 홍씨 40. 꽃비 그리고 고려 제일 무사 창이, 조선 제일 무사 백겸 +1 20.07.23 2,444 11 20쪽
39 숙원 홍씨 39. 이향, 김종서와 야인을 만나다 +2 20.07.20 2,464 11 19쪽
38 숙원 홍씨 38. 운명적인 만남 +2 20.07.16 2,498 1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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