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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연재수 :
9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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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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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08.1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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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숙원 홍씨 46. 계유정난을 막아라

DUMMY

숙원 홍씨 46. 계유정난을 막아라


삼년은 기방 앞에 서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해야 할 말을 순서대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고 있었다.

조선의 노비로 홀로 살아갈 바엔 죽는 게 나았다. 돌아갈 때까지 어떻게든 함께 해야 했다. 적어도 이들은 자신이 노비가 아닌 이재열이란 걸 알았다. 아무리 무시를 해도 자신은 이들 위에 있었다. 자신에겐 이미 주어진 자리가 있으니까, 미래의 병원 이사장 학교재단 이사장 자리를 맡을 이재열이니까, 삼년이 입에 물고 태어난 금수저가 이들에겐 없으니까, 그저 가진 자의 여유로운 마음으로 이곳에서 견뎌줄 것이다. 그리고 돌아가서 다 앙갚음을 해주면 그뿐이었다.

삼년이 다시 반복하고 있는데 도화와 백겸 창이가 대문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전혀 반갑지 않은 얼굴로 어쩔 수 없는 발걸음을 옮겨 삼년에게 향했다.

삼년이 쪼르륵 다가갔다. 삼년은 도화가 묻지도 않았는데 서둘러 말했다.

“어젯밤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했어. 아무 일 없고 수상한 자들도 없었어.”

도화는 별 반응이 없었지만 삼년은 계속 이야기했다.

“서봄이 문종에게 한글 편지 쓴 거 사실인지 아닌지 궁금하지? 사실이야! 내가 다 들었어. 그리고 민혁...”

삼년은 잠시 말을 멈췄지만 또다시 빠른 속도로 말했다.

“그날, 서봄이 한성부에 민혁을 죽인 놈을 신고하러 왔다가 잡혀 들어왔는데, 문종이 데리고 갔어. 서봄이 한글을 써서 문종이 직접 호위무사들과 나온 거야. 내 눈으로 직접 봤어.”

창이가 짜증스레 말했다.

“야! 이재열! 이게 어디서 사기를 쳐! 봄이가 왜 너한테 그런 말을 하냐?”

삼년이 말을 하려는데 월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님...난 또...숨겨놓은 바위가 또 있는 줄 알았더니...이건 또 뭐요...지푸라기요...”

도화가 돌아보니 월이 삼년을 보며 찌푸리고 있었다. 월이 재미난 구경을 하러 가자고 기녀들을 몰고 나왔다. 대문 앞과 계단에 기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부채질을 하며 보고 있고. 월과 함께 여러 명의 기녀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화려한 모습의 아리따운 기녀들이 밖에 몰려있자 지나가는 사내들이 돌아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대부가 사내는 부채질을 하며 가다가 마주 오는 사람과 부닥쳤다. 사대부가 아씨들은 그녀들의 속살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저고리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리고 갔다. 그러면서도 슬쩍 저고리를 다시 한 번 보고 갔다. 사내들은 기녀들의 뽀얀 속살을 보며 침을 흘렸다.

기녀들은 즐기고 있었다. 기녀들은 사람들의 눈길이 닿을수록 더욱 부채질을 해댔다. 백겸은 삼년도 잊고 잠시 그들을 눈에 담았다. 덥지도 않은데 왜 이렇게 부채질을 하는지 그제야 알았다. 기녀들의 부채질을 하는 손놀림은 춤을 추는 것 같았고 유혹이었다. 사대부가 사내들의 부채질에는 거만과 허세가 담겨 있었다. 백겸의 시선이 자신을 보고 있는 도화와 부닥쳤다. 도화가 싸늘하게 시선을 돌렸다. 백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월이 부채질을 하며 삼년을 살폈다. 삼년은 기녀들의 눈길이 자신을 향하자 당황했다. 하지만 삼년은 금세 잊혀졌다. 기녀들의 눈길은 오로지 백겸과 창이를 향했다.

월은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월은 찡그린 얼굴조차도 교태가 흘렀다.

“성님... 꽃바위랑 열매바위가 너무도 갖고 싶어, 혹시나 남는 바위 있나 싶어 왔더니...밋밋한 지푸라기가 뭐요...이년 울고 싶소...”

월이 창이의 팔짱을 끼며 소곤댔다.

“아까도 말했지만...밤에 내 방에 들르시오...”

창이가 월의 팔을 치우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일편단심 도화성님 밖에 없어서.”

월이 창이의 눈을 바로 보며 말했다.

“어머머...이 사내 좀 보소...내 아까도 말했지만, 이 조선 팔도에 유일하게 절개 있는 이 사내를 이 월이 만나지 않았소!”

월이 부채를 쫙 펴고 부치며 말했다.

“내 한 번 가져보겠소...”

기녀들이 까르르 웃었다.

도화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따라와!”

도화 백겸 창이 삼년은 걸어갔다. 삼년은 가만히 생각하니 기분이 나빴다. 자신의 얼굴이 뭐 어때서 하는 마음으로 돌아보았다. 기녀들이 부채질을 하며 그들을 보고 있었다. 삼년을 보자 모두가 찌푸리며 기방 안으로 들어갔다.


도화 백겸 창이 삼년은 국밥집 방에 둘러앉아 있었다. 도화 백겸 창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보고 있고 삼년은 청문회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삼년은 또다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어젯밤 도화가 시킨 대로 주변을 살폈으나 아무 이상이 없었고 수상한 자도 없다고 했다. 왈패들 소굴은 괜히 갔다가 잡힐까 싶어 아직 가지 않았지만 이따가 꼭 들러볼 거라고 했다.

삼년은 단진이 한글 편지 쓴 것을 어떻게 아느냐는 질문에 솔직히 대답했다. 볏짚 속에 숨어있는데 단진이가 자신이 공두인 줄 알고 말했다고 했다. 그 다음엔 어떻게 됐냐는 창이의 물음에 자신이 도망가는데 단진이 쫓아왔다고 둘러댔다.

창이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결국 단진이 이곳을 나가 이향을 만나게 된 건 삼년이 때문이었다. 당장이라도 두들겨 패고 싶었지만 창이는 참았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백겸 창이 도화는 말이 없었다. 그들은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정말로 삼년이 가는 방법을 알고 있을까? 정말 돌아갈 수 있을까? 걸어오는 동안 그들의 바람은 풍선처럼 점점 커져 하늘까지 닿았다. 그래서 쉽사리 터질까봐 겁이 났다.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그들이 가장 알고 싶어 하고 가장 중요한 질문을 도화가 했다.

“돌아갈 방법 안다며? 사실이야?”

삼년은 도화를 똑바로 보았다.

“사실이야!”

“뭔데?”

“그 전에, 다시 다짐을 받아야겠어. 이제부터 나도 너희랑 한 팀이야!”

창이가 뭐라 하려는데 백겸이 말렸다. 백겸은 일단 들어보자고 눈빛으로 말했다.

도화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올 때부터 한 팀이었어, 그러니까 같이 왔지, 무슨 방법이야?”

“우리가 이곳에 처음 도착한 건 1441년 7월 23일 단종이 태어난 날이야...”

삼년은 처음 이곳으로 통하는 길을 걸어왔을 때를 이야기했다. 이로써 모두가 같은 길을 걸어온 것이 확인됐다. 모두가 눈 덮인 하얀 벌판을 걸어 아기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온 것이다.

“우리가 돌아갈 유일한 방법은...”

모두가 긴장했다. 창이는 삼년을 믿지 않았지만 단진을 데리고 돌아갈 방법이 눈앞에 있는 듯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백겸도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모두가 기다렸다. 빨리 말하라고 재촉하지도 않았고 그저 기다렸다.

삼년은 잠시 숨을 내쉬고 나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역사를 바꾸면 돼! 계유정난을 막으면 집에 갈 수 있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창이가 벌떡 일어나 삼년을 걷어찼다. 삼년은 벽에 쿵하고 부닥쳤다. 창이가 또다시 걷어차려는데 백겸이 말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이는 삼년에게 달려들어 걷어찼다. 백겸이 창이를 뒤에서 안았다.

“애 죽일 거야? 그만 해!”

창이는 잠시 잠깐 너무도 큰 꿈을 꾸어 그만큼 화가 치밀었다.

“이 멍청한 자식 말을 듣고 있는 내가 미쳤지!”

삼년은 눈을 똑바로 뜨고 소리쳤다.

“사실이야! 우린 들었어!”

창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멍청한 새끼! 계유정난이 몇 년도에 일어나는지는 알고 있냐? 1453년이야! 12년 후라고! 이 돌대가리 같은 새끼!”

창이는 어찌나 화가 나는지 부들부들 떨렸다. 창이는 삼년이 때문에 단진이가 이향을 만나 궁으로 들어갔단 사실이 떠오르자 더욱 치밀었다.

삼년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다시 짐승보다 못한 노비로 혼자가 되느니 여기서 두들겨 맞아 죽는 게 났고, 더 세게 밀어붙여야 믿게 할 수 있을 거란 결론을 내렸다.

“돌대가리는 너야! 그날 계유정난이 일어났다고, 꼭 그날 역사를 바꿔야 하는 건 아니잖아! 10년 후, 100년 후의 역사를 오늘 바꿀 수도 있어!”

도화가 삼년에게 조용히 물었다.

“좋다, 그렇다 쳐, 너는 어떻게 알았는데? 역사가 바뀌면 돌아갈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데?”

“들었어!”

“누구한테?”

창이와 백겸의 눈에 실낱같은 희망의 빛이 다시 떠올랐다. 창이와 백겸은 삼년을 보고 있었다.

삼년이 진지하게 가슴에 손을 대고 말했다.

“마음의 소리로.”

백겸은 하도 어이가 없어 마음대로 하라고 창이를 놓았다.

창이가 달려들어 삼년을 걷어찼다.

“이 사기꾼 같은 새끼!”

“진짜야...진짜라고...”

삼년은 배를 움켜잡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진짜라고 우겼다.

도화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조용히 해!”

모두가 잠시 멈추었다. 도화가 창이를 잡았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말은 다 듣고 나서 죽이자!”

삼년은 겁에 질려 있었다. 여기서 죽을까봐 겁이 난 게 아니라 버려질까봐 겁이 났다.

창이는 이대로 있다간 삼년을 죽일 것 같아 문을 박차고 나갔다.

도화와 백겸이 자리에 앉았다.

백겸이 물었다.

“마음의 소리...”

백겸이 깊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래, 그 마음의 소리가 무슨 말을 했는데?”

삼년이 억울한 듯 소리를 높였다.

“진짜야! 진짜라고! 아기울음소리를 듣고 걸어가는데, 갑자기 소리가 들렸어. 나만 들린 줄 알았는데 민혁도 들린다고 했어. 귀로 들린 게 아니야. 진짜 마음으로 들렸다니까! 우리에게 계유정난을 막아라! 단종을 살려라! 그러면 다시 너희들 세상으로 보내줄 것이다. 그렇게 말했다고!”

백겸이 또다시 물었다.

“왜 하필 너희에게 그 말이 들렸을까? 우린 아무도 못 들었는데!”

삼년이 말했다.

“그건 나도 몰라, 왜 우리가 그 버스에 탔는지도 모르겠고, 우린 단종과 연관도 없는데, 왜 우리가 그걸 들었는지 나도 몰라, 다만...”

삼년이 잠시 있다가 말했다.

“한 사람이 죽을 거라고 말했어. 그때가 시작이라고. 민혁이 죽을 줄은 몰랐어.”

백겸이 어이없어 했다.

“그 말을 믿으라고?”

삼년이 쌀쌀맞게 말했다.

“우리가 조선에 온 건 믿겨? 나는 거짓말하지 않았어! 우리는 반드시 함께 움직여야 하고.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어.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가, 우리 중에 있을 거야. 나는 서봄 때문인 거 같아.”

삼년은 입을 다물고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백겸과 도화가 서로 마주 봤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꽃비가 내리고 있고 단진과 향이 마주 서 있었다.

삼년은 그들과 함께라는 걸 못 박기라도 하듯 말했다.

“누구 때문에 온 게 뭐가 중요하겠어! 이젠 함께 돌아가는 게 중요하지, 난 왈패들 소굴 갔다 올게!”

삼년이 마당으로 나오다 움찔했다. 창이가 평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창이는 양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삼년은 슬그머니 창이를 지나 빠져나갔다.

창이는 잠시 그대로 있었다. 하루아침에 계절이 바뀌었다. 바람이 제법 선선했다. 하루아침에 단진의 계절이 바뀐 것 같았다. 창이는 밤새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경복궁 앞에 서 있었다. 그렇게라도 단진의 곁에 있고 싶었다.

함길도에서 한양까지 오면서 단진이 무사할까 걱정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단진을 만날 수 있을 거란 설레임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잠깐이지만 다시 단진을 만나고 나니 세상을 가진 것 같았다. 다시 단진과 헤어지고 나니 세상을 잃은 것 같았다. 그 세상이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단진을 만나기 전에는 늘 가슴 속에 불화산이 끓고 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그런 불화산이. 단진을 만나고 나서 사라졌던 불화산이 창이의 가슴에서 다시 끓기 시작했다.

창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창이의 마음과는 다르게 눈부시게 맑고 쾌청했다. 맑은 하늘도 창이에겐 무의미했다. 창이는 알고 있었다. 단진이 있어야만 하늘이 아름답다는 걸 알 수 있고, 단진이 있어야만 웃을 수 있고, 단진이 있어야만 살 수 있었다. 단진이 보고 싶었다.


“야, 나원빈, 빨리 나와!”

단진이 수라간 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단진은 수라간을 등지고 서서 도둑질하는 공두의 망을 봐주고 있었다.

수라간 안에서 공두가 입이 미어지게 전을 쑤셔 넣었다. 공두는 손에 전을 들고 익숙하게 걸어가 소쿠리를 열었다. 공두는 떡을 찾아 입에 밀어 넣고 달달하게 주전부리할 간식을 준비해 온 보자기에 싸서 옷소매에 넣었다. 공두는 수라간이 제 냉장고라도 되는 듯 뭐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공두가 조선에 와서 가장 좋은 건 수라간 음식이었다.

단진은 초조했다. 이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박 내관한테 둘 다 죽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나오라고...이러다 들키면 박 내관님한테 혼나...”

공두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야, 닭! 내 몸에서 5kg이 빠져나갔어, 3.5kg 애 낳고도 몸보신 하는데, 나는 자그만치 5kg이야. 2박 3일을 먹어도 부족하다고...먹어야 맷집도 좋아지는 거야...”

단진은 끓어올라 그냥 두고 가고 싶었지만 백겸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단진은 백겸이 걱정돼 삼년을 쫓다가 진양대군을 만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모든 게 자신의 탓인 것 같아 자책하고 있는데 향을 만났다. 향은 단진을 보듬어줬다. 향에 대한 마음 때문에 백겸도 잊었고 육갑도 잊었다.

단진은 백겸에게 미안했다. 단진이 향과 함께 운종가를 걸어올 때 바로 옆에 백겸과 창이 도화가 있었다고 했다.

누군가를 가슴에 품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해진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럼에도 너무도 행복하다는 것을.

공두는 탕약을 먹기도 전에 장침 덕분에 뒷간에서 일을 봤다. 어찌나 일을 열심히 봤는지 다리가 휘청거렸다. 좀 살만하다 싶으니 이번엔 배가 고파 다리가 휘청거렸다. 때마침 단진이 나타나 배시시 웃으며 백겸의 안부가 걱정된다고 했다.

공두는 단진을 이용해 허기진 배를 채우기로 했다. 단진이 때문에 두들겨 맞은 건 잊어버리고 궁팀 브레인이 돼 있었다. 궁팀 브레인을 하기 위해선 팀원 한명은 있어야 했다.

공두는 수라간에서 나오다 주변을 열심히 살피고 있는 단진을 보았다. 배가 고플 땐 친구이던 단진이가 배가 부르고 나니 사고뭉치 닭이 됐다. 왜 하필 저 닭이랑 한배를 타서 두들겨 맞고. 또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을지를 생각하자 성질이 났다.

단진은 자신을 째리고 있는 공두를 보고 쪼르륵 달려갔다.

“이제 금군 만나러 갈 거지?”

“야, 닭, 머리는 나빠도 눈은 똑바로 떠라, 내가, 지금, 너 되게 싫어하는 거 안 보여? 나는 너, 너~무 너~무 싫어! 아 꼴보기 싫어! 너 얼굴만 봐도 입맛이 없어!”

공두가 습관처럼 윗옷을 확 들췄다. 채찍으로 맞은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단진이 봐도 너무 심하게 맞은 것 같아 미안했다.

“미안해 원빈아. 앞으로는 내가 대신 맞을게! 아, 그건 안 된다! 저하께 다치지 않겠다고 약속했거든, 그러니까 그냥 맞지 말자!”

공두는 끓어올라 양손을 펴고 단진의 머리채라도 잡을 기세였다.

“이 닭을 그냥...치킨을 만들어 버리는 수가 있어.”

상궁 나인들이 걸어오다 공두와 단진을 흘겨보았다. 수라간 앞에 낯선 내관과 나인이 있는 게 수상쩍어 보이는 건 당연했다.

공두는 바로 알아채고 서둘러 걸어갔다.

단진이 눈치 없게 따라오며 말했다.

“곶감 너무 먹지 마, 변비 생기잖아!”

공두가 돌아보며 눈을 부릅뜨고 조용히 하라고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공두가 잽싸게 달려가고 단진이 공두를 따라 달리며 소리쳤다.

“야! 금군 만나러 가야지! 여름이한테 소식 알려야지! 내가 망도 봐줬잖아!”

공두가 수라간에서 벗어나 멈춰서 확 돌아봤다. 단진이 말을 하기도 전에 공두가 눈을 부릅뜨고 입을 열었다.

“그래, 서여름, 그놈을 직접 만날 것이다! 내가 직접 만나 네년의 죄를 물을 것이다, 앞으로는 네 죄를 너에게 묻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네 죄는 네년의 오라비가 지게 될 것이다. 그놈 뿐 아니라 네년의 친구들을 모조리 잡아 물고를 낼 것이다. 법도를 어긴 죄를 엄히 물을 것이다!”

공두는 박 내관 흉내를 낸 자신이 만족스러웠는지 기세등등해졌다. 갑자기 점잖게 이야기했다.

“내가 생사를 넘나들고 보니, 많은 생각이 나더구나, 앞으로 너를 닭이라 하지 않겠다, 닭도 너랑 비교 당하면 기분 나빠할 것이다. 너 같은 머리 없는 닭이 어찌 나 같은 훌륭하신 브레인님을 만난 건지...늘 내게 감사하거라...따라오너라...”

공두가 뒷짐을 지며 걸어갔다. 단진은 벙찐 얼굴로 있다가 웃었다. 아파 누워있는 것보다는 저렇게 이상한 행동을 해도 멀쩡한 게 나았다. 공두가 ‘닭’ 빨리 오라고 지랄지랄했다.

단진은 어쩌다 보니 조선에 와서 ‘닭’ 이 됐다. 예전 같았으면 팔팔 뛰며 싸우고 난리가 났을 텐데 ‘닭’ 이라고 불러도 ‘꽃’ 이라고 들렸다. 왜 그럴까 생각하다보니 그 끝에 향이 있었다.

단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마침 단진이 향에게 고백했던 곳을 지나고 있었다.


‘저하...좋아합니다...’

나뭇잎이 밤새 머금은 빗방울을 뿌려댔다. 향의 하얗고 큰 손이 단진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푸르른 나무 사이로 햇살에 빗방울이 반짝였다. 향과 단진은 서로를 보며 활짝 웃었다.


첫사랑이 시작됐다. 끝사랑이 될 첫사랑이...

단진은 하늘을 보았다. 향이 있었다. 단진은 걸어갔다. 바람이 불었다. 향의 손길이었다. 단진은 활짝 웃었다. 단진이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꽃비가 내렸고 반짝이는 빗방울이 흩날렸다.


국밥집 쪽으로 용무용과 승무, 야인 호가 걸어갔다. 이향이 암행을 나올 때마다 들른다는 국밥집을 승무가 미리 정보를 주어 알고 있었다.

국밥집 안은 밥때가 돼 손님들로 북적였고 퉁퉁한 주모가 국밥을 날랐다.

평상에 창이가 하늘을 보고 누워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방문은 열려있지만 도화와 백겸은 벽에 기대어 앉아 있어 밖에서 보이지 않았다.

퉁퉁한 주모가 날쌔게 와서 한편에 있는 가마솥의 국을 휘휘 저었다. 주모는 창이를 힐끗 보았다. 세를 준 방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이상했다. 허우대 멀쩡한 사내들에, 기녀에, 이젠 거지발싸개 같은 놈까지 드나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사연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말썽을 피우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었다.

퉁퉁한 주모의 눈에 용무용 일행의 모습이 보였다. 셋은 검은 무사복에 검은 삿갓을 쓰고 장검을 들고 걸어왔다. 장사를 오래한 주모는 사람을 보기만 해도 알았다. 저런 사람들은 손님으로 와도 골칫덩이였다. 있던 손님들이 무서워 가버리기 때문에 오히려 손해였다.

순포가 심가와 함께 용무용 일행을 향해 걸어왔다. 순포와 승무가 시선을 잠시 주고받았다.

호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국밥집을 들여다보다가 순포와 탁 부닥쳤다 .

호가 바로 사과했다.

“미안하오!”

순포는 힐끗 보고 심가를 따라갔다. 심가는 진양이 앞으로 사소한 모든 일을 예의주시하라고 했지만, 설가의 죽음으로 침통해있어 관심을 두지 않았다. 순포는 진양의 명을 받아 심가와 함께 설가가 죽기 전까지의 행방을 알아내고 있었다. 순포는 맥없이 걸어가는 심가의 뒤를 따랐다.

호가 국밥집 안으로 들어와 주모에게 물었다.

“뒷간이 어디요?”

주모는 나가라고 할 수도 없어 손짓으로 가리켰다. 호가 창이를 지나 국밥집 뒤로 들어갔다. 용무용과 승무는 주막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용무용의 눈길이 창이에게 닿았다. 그 순간 창이가 얼굴에 얹은 팔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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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숙원 홍씨 48. 백겸과 창이, 진양대군을 만나다 +2 20.08.20 2,269 11 21쪽
47 숙원 홍씨 47. 목멱산의 결의 +4 20.08.17 2,300 11 21쪽
» 숙원 홍씨 46. 계유정난을 막아라 +2 20.08.13 2,335 11 20쪽
45 숙원 홍씨 45. 단진의 고백 +2 20.08.10 2,349 11 20쪽
44 숙원 홍씨 44. 홍단진, 주상전하를 만나다 +2 20.08.06 2,364 12 18쪽
43 숙원 홍씨 43. 백겸과 창이 한양 기방에 들다 +1 20.08.03 2,388 11 16쪽
42 숙원 홍씨 42. 비 오는 밤, 사라진 자들 +3 20.07.30 2,401 11 18쪽
41 숙원 홍씨 41. 이향의 마음 +3 20.07.27 2,427 11 16쪽
40 숙원 홍씨 40. 꽃비 그리고 고려 제일 무사 창이, 조선 제일 무사 백겸 +1 20.07.23 2,444 11 20쪽
39 숙원 홍씨 39. 이향, 김종서와 야인을 만나다 +2 20.07.20 2,464 11 19쪽
38 숙원 홍씨 38. 운명적인 만남 +2 20.07.16 2,498 1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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