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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연재수 :
95 회
조회수 :
215,223
추천수 :
1,167
글자수 :
809,561

작성
20.08.2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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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글자
22쪽

숙원 홍씨 50. 무예시합 날이 정해지다

DUMMY

숙원 홍씨 50. 무예시합 날이 정해지다


왈패들 움막에는 모닥불이 피워져있고 한쪽에선 죽을 끓이고 다른 한쪽에선 토끼고기를 굽고 있었다. 서열이 낮은 왈패들은 모닥불 앞에서 불을 들쑤시거나 콧구멍을 파거나 천막에 드러누워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있었다.

검을 든 왈패 둘이서 검술을 펼치고 있었지만 실력은 형편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최고의 검객이라도 되는 듯 우쭐했고 검이 없는 왈패들은 부러운 듯 보고 있었다.

유난히 머리가 커 ‘대두’ 라 불리는 우두머리 왈패는 통나무에 앉아 검을 닦고 있었다. 평생을 도둑질해서 먹고 살았는데 처음으로 땀 흘려 얻은 검이었다. 시신을 두고 간 놈들에게 시신 처리 값으로 검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우두머리 왈패는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뚱뚱한 왈패가 토끼를 굽다가 불만을 토해냈다.

“시벌. 땅은 내가 젤 많이 팠는데, 검은 지들이 다 갖고, 시벌. 이게 뭐여 대체.”

검을 든 삐쩍 마른 왈패가 뚱뚱한 왈패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리 억울하믄 일찍 태어나지 그랬냐, 어디 형님들 걸 넘보고 지랄이여 지랄이.”

뚱뚱한 왈패가 버럭 성질을 냈다.

“형님 좋아하네, 시벌, 야! 내가 너보다 열댓살은 많어!”

삐쩍 마른 왈패가 말했다.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한 살이여! 이 돼지 같은 놈아! 어서 토끼나 구워! 저 돼지새끼는 밤마다 뭘 잡아 뭘 처먹나, 왜 저렇게 뚱뚱해...”

뚱뚱한 왈패가 토끼를 패대기치고 일어섰다.

“누가 나 위해 그러나? 들창코 왈패 놈들한테 우리 힘을 보여줄라 그러는 거 아니여! 늬들만 검을 갖고 다니면 여섯이지만, 우리가 검을 갖고 나가면, 놈들이 우리 검이 열두 개인 줄 알 거 아녀.”

왈패들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생각해보니 그럴싸했다. 이제껏 그들은 시신이 실린 수레가 이곳에 온 이후로 검을 들고 다니며 다른 왈패들을 찾아다니며 자랑했다. 다른 왈패들은 이런 비싼 검도 없거니와 있다고 해도 겨우 한두 개였다.

이곳 대두 왈패 패거리는 모두 열두 명이었고 장검은 서열이 높은 여섯만이 가지고 다녔다. 검을 든 왈패들이 모닥불 앞으로 모여들었다.

“맞네...쟤들도 하루 줘서 들고 다니게 하믄, 우리는 열두 개가 되는 거네...”

우두머리 왈패가 뚱뚱한 왈패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런 옘병할 놈이, 뒈지고 싶냐? 그런 기막힌 방법을 왜 지금에서야 말하는 겨...그렇잖아도 들창코 왈패 놈들은 노름쟁이들 뜯어먹느라 쩐두 많은데.”

우두머리 왈패가 검을 뚱뚱한 왈패에게 넘겨줬다. 뚱뚱한 왈패가 썩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다른 왈패들도 서열이 낮은 왈패들에게 검을 넘겨주었다.

검을 든 왈패들은 좋아 죽었다. 망치며 도끼, 그것도 없을 땐 짱돌을 들던 왈패들에게 장검은 그야말로 최고의 호사였다.

곰보자국이 많은 왈패가 말했다.

“살다 살다 이런 출세도 다하네그려. 우리 집안이 어쩐지는 알지 못하겄지만, 우리 집안서, 아니지 우리 고향서 내가 젤 출세했을 겨...”

왈패들이 시커먼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다 모두의 웃음이 동시에 멈췄다.

검은 무사복에 검은 삿갓을 쓴 용무용과 승무, 호가 다가왔다.

뚱뚱한 왈패가 말했다.

“시벌. 저승사자여? 그라믄 무서워할께베서. 아이고 무서워라...아이고 나 오줌 지렸네...질질질...”

뚱뚱한 왈패가 오줌 싸는 흉내를 내자 왈패들이 또다시 웃어댔다.

왈패들은 도끼며 망치를 들고 싸울 태세를 갖췄다. 그들은 좀도둑질을 하고 자신들보다 약한 자를 괴롭히며 사는 단순 무식한 부류였다. 자신의 적수가 되는지 안 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왈패들은 자신들의 숫자가 많기에 이길 거라 여겼다. 또한 저들은 장검이 세 개가 전부지만 자신들은 여섯 개가 있었다.

용무용이 왈패들이 차고 있는 장검에 시선이 갔다.

“수레의 시신은 어디 있느냐?”

우두머리 왈패가 잔뜩 찌푸렸다.

“뭐여 시벌. 어디 있느냐? 옘병하네, 무릎 꿇고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어라! 이 시커먼 놈아!”

왈패들이 목젖이 드러나게 웃어젖혔다. 승무가 단칼에 우두머리 왈패의 목을 베었다. 우두머리 왈패는 찍소리도 못한 채 쓰러졌다. 옆에 있던 왈패가 놀라 도끼를 휘둘렀지만 승무가 또다시 베었다. 그제야 아둔한 왈패들도 자신들이 적수가 되지 않음을 알았다. 왈패들이 겁에 질려 도망치려 하자 승무와 호가 순식간에 그들 모두를 베었다. 뚱뚱한 왈패만 살려두었다. 뚱뚱한 왈패의 다리 사이로 누런 오줌이 질질 흘러내렸다.


밤이 내렸다. 용무용과 승무, 호가 오솔길로 내려왔다.

용무용은 뚱뚱한 왈패에게 형제들이 묻힌 곳으로 안내하게 했다. 왈패에게 시신을 다시 파내게 했다. 용무용이 형제들의 시신을 확인했으나 부패가 심했다. 상처엔 구더기가 잔뜩 끼어있었다. 승무와 호는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용무용은 앉아 구더기를 손으로 치워내고 자세히 살폈다. 부패가 심해 검술을 알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단칼에 베어졌고 두 사람의 짓임을 알 수 있었다. 한양에 실력이 뛰어난 두 놈이 있었다. 용무용이 일어서는데 창이의 얼굴이 바람처럼 스쳐갔다. 잠시였다. 이미 죽은 놈이 검을 들 수는 없었다. 용무용은 창이를 밀어내고 왈패에게 시신을 잘 묻어주게 했다. 그리고 몸을 연신 굽히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뚱뚱한 왈패를 가차 없이 베었다.

용무용은 초가집 마을로 걸음을 옮겼다. 호가 마당에 나물이 널려있는 초가집 앞에서 멈춰섰다. 하늘에서 내려준 돼지를 이웃과 나눠먹던 인심 좋은 농부의 집이었다.

때마침 사내가 방에서 나왔다.

“밭에 한 번 더 갔다와야겄어...”

아낙이 얼굴을 내밀고 말했다.

“밭 닳겄시우...밭에서 온지 얼마나 됐다구...”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놈들이 쭉쭉 크니께 좋아서 그런 거 아니여...집에 오는 동안 얼마나 컸나 궁금하다니께...서운해 말어...갔다 와서 제대로 할라고 그러는 거여...”

아낙이 알아듣고 답했다.

“아이고...누가 보믄 진짠 줄 알겄네...같이 가유...”

아낙이 방에서 나왔다. 두 부부는 금슬이 너무 좋아서인지 자식이 없었다. 무자식이 팔자려니 하고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오고 있었다.

아낙과 사내가 마당에 서 있는 호를 보았다. 달빛에 마당이 훤했다.

사내의 눈에는 호가 호리호리하고 말라서 배가 고픈 듯이 보였다.

“뉘시오? 배고파 왔수?”

사내가 웃었다.

“우리 집 돼지 소문 듣고 왔구먼...목구멍이 하도 많어 돼지는 없구먼...임자, 감자 남은 거.”

사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용무용이 던진 단검이 사내의 목에 꽂혔다. 호가 움찔했다. 아낙이 놀라기도 전에 호가 베었다. 용무용이 부부를 죽인 건 실체 없는 적들에게 전하는 경고였다.

호가 초가집에서 나오자마자 용무용에게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저 자는 죄가 없는 듯하여, 저도 모르게 검에 인정을 두었습니다.”

용무용이 조용히 말했다.

“조선의 백성인 것이 큰 죄다. 또한 죽여야 할 자의 눈을 오래 보지 마라.”

“예 형님.”

용무용이 승무에게 말했다.

“순포의 일은?”

“심가가 멍청해서 미끼를 늦게 물었습니다. 내일 안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용무용과 승무, 호가 어둠 속을 걸었다. 달이 그들에게 빛을 내주었다.

무예시합 날에 이향이 나온다고 한성부에서는 유난스러웠고 예조까지 나서서 연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는 바람에 무예시합 날짜가 점점 미뤄져 화가 난 김종서가 한성부로 쫓아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용무용은 오히려 잘된 일이라 여겼다. 그동안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 중 하나를 오늘 처리했다.

때마침 무예시합 날짜가 정해졌다.


하늘은 맑고 쾌청했다. 백겸과 창이가 마루로 나오다 잠시 멈춰섰다. 기녀들이 빙 둘러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야릇한 눈길을 보내며 백겸과 창이를 위 아래로 훑었다. 그 중심에는 늘 월이 있었다. 월은 검무복을 입고 창이를 보며 말했다.

“열매바위, 오늘은 또 어딜 가는 거요? 방이 좁지 않소? 도화성님은 꽃바위라 내 그리 말했거늘...”

백겸과 창이는 이제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하며 내려와 신발을 신었다. 더구나 한성부에서 무예시합 날짜가 정해져 마음이 급했다. 빨리 가서 단진이 궁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조치를 취해야 했다.

월이 창이의 팔짱을 끼려는 찰나에 창이가 밀어냈다. 월은 더욱 간드러지는 소리로 말했다.

“밀어내고 밀어내시오, 나는 더욱 다가서고 다가설 테니, 이년이 살아갈 이유가 생겼지 뭐요...열매바위, 그대는 내 것이오!”

기녀들이 까르르 웃었다. 도화가 검무복을 입고 나왔다. 몰려있는 기녀들에게 뭐라고 하는 것도 이제 입이 아팠다. 도화는 어떻게 해야 단진이 궁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할까만 궁리했다. 도화가 신발을 신었다.

백겸이 불안한 듯 말했다.

“원빈이가 오늘은 나와야 하는데...”

백겸은 김종서의 집에 있는 야인들을 살폈지만 함길도에서 본 자들이 아니었다. 금군 경가는 제대로 손을 봐줬다. 도화가 경가를 불러냈다. 경가는 오늘이라도 날을 잡자며 도화에게 치근덕거렸다. 도화는 서찰을 써주면 오늘밤이라도 허락하겠노라고 했다. 경가는 도화가 원할 때 언제든 공두를 내보내주겠다는 서신을 써 줬다. 그걸 받자마자 백겸과 창이가 나섰다. 경가는 그들의 검술실력을 보고 겁에 질렸다. 거기다 창이가 경가의 머리 위로 단검을 날렸다. 경가는 그대로 주저앉았고 도화는 경가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이 서찰을 들고 금군 별장에게 전하겠다고 겁박했다. 그리곤 돈 주머니를 내주었다.

경가는 그들의 충견이 됐다. 하지만 공두가 문제였다. 공두가 박 내관의 눈을 피해 나오는 게 쉽지 않았다. 열흘 동안 공두는 단 한 번 밖에 나오지 않았다.

창이가 도화에게 물었다.

“봄이도 같이 나올까?”

“서봄은 안 나오는 게 도와주는 거다!”

도화가 가려는데 기방 행수 연월이 다가왔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가진 연월은 붉은 꽃무늬 저고리에 붉은 연지에 화려한 장신구를 했다. 연월은 꾸밈에도 빈틈이 없고 급하다 해서 서둘러 걷지도 않았다. 연월의 걸음은 여유가 있었지만 표정은 싸늘했다.

“오늘도 연습을 하지 않는 것이냐?”

도화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잠깐 다녀올 데가 있습니다!”

“언제까지 널 봐줘야 하는 것이냐? 역병을 앓고 일어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 해서 이제껏 너를 봐줬으나 더는 그럴 수가 없다, 언제까지 금을 잡지 않을 것이냐? 언제까지 춤을 추지 않을 것이냐? 더구나 예판께서 이번 연회가 중하다 매일같이 찾아와 당부하지 않더냐!”

예조판서가 직접 기방에 찾아와 행수를 만났다. 한성부에서 검술시합이 있는 날 연회를 연다고 했다. 연월은 도화와 월, 기녀들을 불러놓고 앞으로 검무 연습을 하라고 했다. 기녀 짓도 모자라 춤까지 춰야 한다고 생각하니 끓어올랐다. 더구나 춤이라고는 제대로 본 적도 없는데 무슨 춤을 추라는 건지 난감했다.

도화가 차갑게 말했다.

“검술시합에 왜 연회가 들어가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세자저하도 연회를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연월이 노여워했다.

“그걸 왜 네년이 생각하는 것이냐? 기녀는 하라면 하는 것이다! 오늘 비단금침에서 잠들어도, 내일 짚단에서 깨어날 수 있는 게 기녀다. 오늘 사대부를 안고 잠들다가도 내일이면 백정 놈 품에 떨어질 수 있는 게 기녀다. 기녀는 다 가진 듯 보이나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그리 일렀거늘! 기녀는 사람이 아니라 했다, 기녀는 여인이 아니라 했다, 기녀는 기녀인 것이다!”

무릉도원처럼 잘 꾸며진 정원에서 기녀들의 존재는 꽃일 뿐이었다. 지고 나면 무참하게 짓밟히는 그저 나약한 꽃이었다. 하지만 이 꽃들은 술이 한 잔 들어가야만 나약한 꽃임을 알고 신세한탄을 했다. 이토록 맑은 하늘 아래에선 아무도 새겨듣지 않았다. 도화도 이제 적응이 돼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연월의 시선이 창이에서 백겸에게로 갔다.

“네가 기부를 둘을 두던 열을 두던 상관없다. 허나 너는 네 할 일을 다 해야 할 것이다! 예판께서 오늘도 너의 검무를 보지 못한다면, 네년은 물론이고 나까지 관비로 떨어지게 할 거라 엄포를 놓으셨단 말이다!”

이때 기녀 설화가 들어왔다.

“그럴 일은 없소 성님. 허니 애 좀 그만 잡으시오!”

모두가 설화를 보았다. 설화는 연월이 없을 때 행수를 대신하는 기녀였다. 또한 기녀들의 훈육을 담당했다. 버드나무처럼 가녀린 듯 보이지만 화를 내면 아무도 당해내지 못했다.

연월이 물었다.

“무슨 소리냐?”

설화는 재밌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예판께서 지금 와 계신데 아무도 들지 말라 하셨소, 어전회의에서 김종서대감께 크게 당하셨다 하오, 뿐만 아니라 판부사대감까지 야단을 맞았다 하오, 저하께서 무예를 본다고 하신지가 언제인 줄은 아냐면서...”

어느새 모두가 설화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도화와 백겸 창이 역시 귀를 쫑긋 세웠다.

“세자저하께서 내금위에서도 준비할 시간을 달라했으니 시간이 지체된 건 상관없으나 연회는 하지 말라 하셨답니다. 어전회의를 끝내고 나오는데 김종서대감이 예판께, 그리 연회가 좋으면 혼자서 기방에 가라고 했답니다.”

모두가 쌤통이라는 듯이 까르르 웃었다.

월이 말했다.

“예판께서 그리 목에 힘을 주고 다니시더니, 목이 부러지시진 않았나 걱정입니다. 술 대신 탕제라도 올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모두가 까르르 웃었다.

연월과 설화가 연꽃 문양이 들어간 발을 젖히고 방으로 들어섰다. 연월의 방은 조선 최고의 기방 행수답게 넓고 화려했다. 너무도 화려해 눈을 둘 곳이 없을 정도였다. 연월이 화려한 병풍 앞 보료에 앉았다. 연월은 한숨을 내쉬었다. 연월은 예판이 이런 꼴을 당할 거라고 예상했다. 어려서부터 기녀 밥을 먹으며 이제껏 지금의 예조판서처럼 형편없는 자를 본 적이 없었다. 연월은 내색하진 않았지만 예판 때문에 아주 피곤했다. 연월이 관자놀이에 손을 대자 설화가 말했다.

“성님 괜찮으시오?”

연월은 불현듯 백겸과 창이가 떠올랐다. 그들이 기방에서 지낸지 꽤 됐지만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둘 다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창이가 진양과 마주 서 있을 때 연월은 보고 있었다. 연월은 창이를 곁에 두면 쓰임새가 많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백겸은 왠지 낯이 익었다. 하지만 도화 때문에 오래 머물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도화의 눈빛을 떠올렸다. 연심이었다. 드러내지 않는 연심만큼 위험한 건 없었다.

연월이 잠시 생각하다가 설화에게 말했다.

“꽃바위 말이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설화가 웃으며 말했다.

“성님은 꽃바위요? 나는 성님이 열매바위인 줄 알았더니.”

연월이 설화를 야단쳤다.

“너까지 그래서야 이 기방이 어찌 되겠느냐? 애들 단속 좀 제대로 하거라!”

“성님, 그냥 두시오, 우리도 저 시절엔 그러지 않았소! 내 눈에도 그리 이쁜데 애들 눈이야 오죽 하겠소,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기녀이니, 그리 설레는 곳 하나 있는 것도 괜찮지 않겠소!”

설화가 웃었다. 연월은 잠시 설화를 보다가 다시 백겸을 떠올렸다. 연월은 눈썰미가 좋아 한 번 본 사람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기방이 아닌 다른 곳에서 분명히 본 적이 있었다.


경복궁 서문 쪽으로 백겸 창이 도화가 걸어갔다. 백겸과 도화는 앞서 걸으면서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기방에서 나오면서부터 공두에게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는 도화와 절대 이야기해선 안 된다는 백겸, 둘 사이의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창이가 끼어들어 단진이 나오면 자신이 데리고 도성 밖으로 나간다고 했다가 된통 욕만 먹었다.

창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뭉게구름이 뭉실 뭉실 떠 있었다. 오래된 거목이 그들을 반기기라도 하듯 바람에 춤을 추었다. 푸르른 들판이, 푸르른 숲이 흩날렸다.

창이는 매일같이 이곳으로 단진을 만날 기대감을 품고 왔다가 돌아갈 때는 그리움만 가득 안고 갔다.

창이는 꽃비가 내리던 날 단진이 이향을 바라보던 눈빛을 보았다. 불안했다. 단진이 이향을 노리는 자객들에게 위험에 처해질까 하는 걱정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란 참으로 신비한 명약이었다.

단진을 만날 수 없어 그리움을 품고 가는 대신 창이는 단단해졌다. 이향을 바라보던 단진의 눈빛은 왕을 바라보는 신하의 눈빛이 됐다. 자객으로 인해 단진이 위험에 처할까 걱정하기보다는 지키기로 결심했다.

거목 아래에 다다랐을 때 도화가 돌아보고는 창이에게 성질을 팍 냈다.

“독고준! 넌 뭐야! 소풍 왔어?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창이가 벙 쪄서 말했다.

“너는 꼭 성질낼 때만 나랑 눈 마주치더라! 여름이랑 싸우다 주먹은 꼭 나한테 날려! 왜에?”

도화는 짜증이 났다. 백겸이 고집을 꺾지 않아 저도 모르게 창이에게 성질을 냈다.

창이가 진지하게 말했다.

“원빈이에게 말을 안 해도 봄이는 나올 거고, 말을 해도 봄이 귀에 들어갈 거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게 아니라, 일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하는 거야.”

때마침 공두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뒷짐을 지고 소리쳤다.

“네 이놈들, 내가 오시는 게 보이지 않는 것이냐? 어찌 주둥이를 나불대느라 이 귀하신 분을 못 보는 것이냐! 내 생각 같아서는 다시 돌아가고 싶다만, 내 인품이 훌륭하여 참는 것이다! 어서 나에게 달려와 인사하거라! 어서 나에게 와서 절을 올리거라! 어서 나에게 비단과 재물을 바치거라!”

백겸과 도화는 헛소리하는 공두를 보자 갑갑했다. 창이는 단진이 나오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막상 공두가 혼자인 것을 보자 실망스러웠다.

창이가 짜증스레 말했다.

“장난치지 말고 빨리 와라!”

공두가 걸어오자 창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봄이는 안 왔어?”

공두가 찌푸리며 말했다.

“첫인사가 닭 안 사왔냐냐? 닭은 닭장에 있다!”

공두가 잠시 창이를 보다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단진이 흉내를 냈다.

“쭌아, 쭌아, 잘 있었느냐! 마마가 오셨느니라!”

공두가 창이의 품에 꼭 안겼다. 창이가 기겁을 하고 공두를 밀어냈다. 공두는 눈을 감고 괴상하게 웃으며 창이의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헤헤헤헤헤.

창이가 뒤로 물러서며 머리에 오물이라도 묻은 듯 털어냈다.

“아, 이 자식 진짜. 미쳤어. 아 소름 끼쳐!”

공두가 이번엔 백겸을 보며 단진이처럼 말했다.

“여룸아! 잘 지내고 있찌? 헤헤헤헤헤!”

백겸이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다.

공두가 도화를 향해 팔을 활짝 벌려 안으려 했다. 공두가 혀 짧은 소리로 말했다.

“태희야...고마웡...”

도화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하지 마!”

공두가 한숨을 내쉬고는 짜증스레 말했다.

“누군 하고 싶어 하냐? 닭이 이렇게 전해 달란다. 누가 닭 아니랄까봐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나도 말하는 게 귀찮아서 닭 흉내 좀 내봤다. 아, 소이한테도 안부 전하란다.”

공두가 창이에게 다가가 말했다.

“특히 너, 제대하자마자 조선 군대에 온 것이니 각별히 잘해주라더라. 쓰담쓰담도 해주고. 왜? 형이 한 번 더 안아줘!”

창이는 잔뜩 찌푸렸지만 마음은 웃고 있었다. 창이는 숨을 들이마셨다. 살 것 같았다.


‘네가 있으니 든든하구나. 다시는 떠나지 말거라!’

단진이 창이에게 다시 안겼다. 창이는 단진을 꼭 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 마마. 다시는 마마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미용실 들렀다 온 것이냐? 층을 예쁘게 냈구나! 참으로 멋지구나!”

단진이 창이의 앞머리를 쓸어주었다.


창이가 웃고 있는데 공두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너 나 되게 좋아한다.”

창이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공두가 거목의 뿌리에 걸터앉았다.

“좀 앉자. 나도 닭이랑만 있다 보니까 수준 떨어진 거 같아. 뭐 얼추 비슷한 애들끼리 대화 좀 해보자!”

백겸과 도화가 어이없어했다.

백겸이 앉으려는데 공두가 벌떡 일어나 성질을 냈다.

“야, 서여름, 넌 서 있어! 네 쌍둥이 닭 때문에...그 닭이, 요즘 무슨 짓 하는 줄 아냐? 그거 때문에 박 내관이 떨어지질 않아서 내가 똥 쌀 시간도 없어!”

도화가 물었다.

“무슨 짓을 하는데?”

“저하 일을 지가 다 한대. 지가 다 막을 수 있대, 그걸 하려고 온 거란다, 저하가 오래 살면 역사가 바뀔 거래. 저하의 건강을 위해 모든 걸 다할 거래. 그래서 하루 종일 저하 따라다니면서 책도 못 읽게 하고 계속 걸으라 하고. 그럴 때마다 박 내관이 날 붙들고 얼마나 지랄지랄 하는지...”

백겸 창이 도화가 서로를 보았다.

“저러다 용포 입고 지가 세자저하 한다고 할지도 몰라...저하 한성부에 나가실 때도 따라 나간다고 난리다 난리!”

백겸과 창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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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숙원 홍씨 61. 단진을 향한 애틋함 +2 20.10.12 1,960 11 21쪽
60 숙원 홍씨 60. 무예시합이 끝나고 +3 20.10.08 1,973 13 23쪽
59 숙원 홍씨 59. 무예시합-3 +4 20.10.05 1,990 12 22쪽
58 숙원 홍씨 58. 무예시합-2 +2 20.09.24 2,030 10 21쪽
57 숙원 홍씨 57. 무예시합-1 +2 20.09.21 2,047 10 20쪽
56 숙원 홍씨 56. 이향, 무예시합에 가지 않기로 하다 +1 20.09.17 2,065 10 17쪽
55 숙원 홍씨 55. 단진의 간절함 +1 20.09.14 2,089 9 21쪽
54 숙원 홍씨 54. 향을 지키려는 단진 +2 20.09.10 2,118 10 18쪽
53 숙원 홍씨 53. 나비문신 +2 20.09.07 2,139 10 19쪽
52 숙원 홍씨 52. 죽이려는 자, 지키려는 자 +1 20.09.03 2,164 11 21쪽
51 숙원 홍씨 51. 단진, 향의 위험을 알아채다 +1 20.08.31 2,189 11 20쪽
» 숙원 홍씨 50. 무예시합 날이 정해지다 +2 20.08.27 2,203 11 22쪽
49 숙원 홍씨 49. 여인 홍단진의 결심 +1 20.08.24 2,229 11 20쪽
48 숙원 홍씨 48. 백겸과 창이, 진양대군을 만나다 +2 20.08.20 2,269 11 21쪽
47 숙원 홍씨 47. 목멱산의 결의 +4 20.08.17 2,300 11 21쪽
46 숙원 홍씨 46. 계유정난을 막아라 +2 20.08.13 2,335 11 20쪽
45 숙원 홍씨 45. 단진의 고백 +2 20.08.10 2,349 11 20쪽
44 숙원 홍씨 44. 홍단진, 주상전하를 만나다 +2 20.08.06 2,364 12 18쪽
43 숙원 홍씨 43. 백겸과 창이 한양 기방에 들다 +1 20.08.03 2,388 11 16쪽
42 숙원 홍씨 42. 비 오는 밤, 사라진 자들 +3 20.07.30 2,401 11 18쪽
41 숙원 홍씨 41. 이향의 마음 +3 20.07.27 2,427 11 16쪽
40 숙원 홍씨 40. 꽃비 그리고 고려 제일 무사 창이, 조선 제일 무사 백겸 +1 20.07.23 2,444 11 20쪽
39 숙원 홍씨 39. 이향, 김종서와 야인을 만나다 +2 20.07.20 2,464 11 19쪽
38 숙원 홍씨 38. 운명적인 만남 +2 20.07.16 2,498 1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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