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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연재수 :
95 회
조회수 :
215,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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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7
글자수 :
809,561

작성
20.09.0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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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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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숙원 홍씨 52. 죽이려는 자, 지키려는 자

DUMMY

숙원 홍씨 52. 죽이려는 자, 지키려는 자


진양이 김가와 순포와 함께 한성부에서 나왔다. 진양은 말없이 걸었다. 진양은 검은 문양이 들어간 짙은 자주색 답호를 입었고 자주색 보석이 박힌 상투관을 쓰고 있었다. 마주 오던 사람들은 진양에게 뿜어져 나오는 강렬함에 저도 모르게 길을 비켜섰다.

얼마 전 모필가 염가의 행방을 알아냈다. 서둘러 가봤지만 염가로 추정되는 자는 이미 죽어있었다. 진양은 모필가 박가의 상점에서 본 사내의 말을 떠올렸다. 사내의 말대로 염가는 손등에 점이 있었다. 진양은 염가가 확실한지 아닌지를 사병들에게 확인시키지 않았다. 그 대신 살인사건을 포도청으로 넘겼다. 그리고 한성부에서 기별이 왔다. 살인자는 찾지 못했지만 염가가 확실하다고 했다.

이로써 진양이 쫓던 염가는 죽었다. 모필가 박가가 괴문서를 쓴 것처럼 위장하면서까지 염가를 지키려던 놈들이 염가를 죽였다? 왜? 진양은 답을 찾고 있었다.

설가를 죽인 놈도 찾아냈다. 심가였다. 심가와 순포의 말이 계속 엇갈리자 김가와 은가가 둘을 미행했다. 심가는 설가를 죽인 놈이 어슬렁거린다는 정보를 들었다며 운종가 일대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마주 오는 사내와 부닥쳤다. 심가의 옷섶에서 밀지가 발견됐다. 진양이 의심하고 있으니 앞으로는 먼저 연통하지 말고 염가가 배신할 기미가 있어 처리해야겠다고 쓰여 있었다. 심가가 설가를 죽인 범인임을 가리키는 확실한 증좌였다.

진양은 분에 못 이겨 심가를 죽일 뻔했다. 놈들의 계략에 깜빡 속을 뻔했다. 하지만 놈들이 놓친 게 있었다. 심가는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멍청했다. 진양이 상상조차 못할 만큼 멍청했다. 해서 심가는 살 수 있었다.

진양은 갑자기 멈춰서 박장대소했다. 김가와 순포가 진양을 보았다. 진양의 웃음소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댔다.

진양이 웃음을 멈추고 순포를 보았다.

“설가를 죽인 놈도 찾고, 염가도 찾아내고, 네가 고생이 많았다.”

“아니옵니다 대군마마.”

진양이 김가에게 말했다.

“너도 형제 같던 설가를 잃고, 형제 같던 심가를 죽이고 마음이 편치는 않을 것이다. 허니 당분간은 쉬도록 하거라.”

“아니옵니다 대군마마.”

“이제 염가를 죽인 놈들의 행방을 쫒을 것이다. 그건 순포에게 맡기고 너는 사병들 마음 추스르고 훈련에 힘쓰도록 하거라.”

“예 대군마마!”

진양이 순포의 양 어깨를 잡고 말했다.

“너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 염가를 죽인 놈의 행방을 찾아내거라. 또한 설가의 49재가 끝날 때까지, 설가가 있는 흥천사에 찾아가는 것도 네가 하거라. 설가가 아주 반길 것이다.”

순포는 움찔했지만 바로 고개를 숙였다.

“예 대군마마.”

진양이 순포를 보며 웃었다. 진양은 설가의 시신을 발견한 날 이름을 걸고 맹세했다. 설가를 죽인 놈을 찾아내 죽이겠다고 했다. 당장이라도 이놈을 죽여야 했지만 언제든 죽일 수 있었다. 진양은 설가와 염가를 죽인 순포를 통해 역당의 본거지를 찾아낼 생각이었다. 순포가 지키고자 하는 놈들을 찾아내 죽일 것이다. 해서 진양은 반드시 놈들에게서 세자저하를 지켜낼 것이다.

진양은 안평을 만나기 위해 기방으로 향했다. 안평은 갑자기 급한 일이 있다고 사라진지 열흘이 지나서야 기별이 왔다.

진양이 걸어가는데 바람이 불어왔다. 나뭇잎이 바람에 날려 진양을 스쳐갔다. 진양의 눈길이 느티나무에 닿았다.


‘네놈이 틀렸다!’

단진이 눈을 부릅뜨고 다리를 절룩이며 걸어오고 있었다.

단진이 진양 앞에 섰다. 푸르른 느티나무 아래 단진과 진양이 마주 서 있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흩날렸다. 얼굴은 멍들고 입가는 터져 피가 맺혀 있었지만 눈빛은 또렷했다. 단진의 눈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너 같이 사리분별 못하는 꼬마를 상대하는데, 그리 큰 힘이 필요할 것 같진 않구나! 기다리거라!’


진양은 잠시 서서 느티나무를 바라보았다. 푸르른 잎이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꼬마를 상대하는데 큰 힘이 필요치 않을 거라 하던 놈이 어찌 이리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요즘 진양은 습관처럼 단진을 떠올렸다. 걸어가는데 뒤에서 사람 소리가 들리면 단진이 아닐까 기대했다. 매번 실망했다. 실망할 때마다 기다림이 조금씩 더 커졌다. 진양은 자신을 죽이겠다고 달려오는 단진을 기다렸다.

진양의 앞으로 검은 무사복에 검은 삿갓을 눌러 쓴 다섯 명의 사내가 걸어왔다. 진양은 그들을 보았다. 용무용이 진양을 스쳐갔다. 용무용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진양의 코끝에 피비린내가 머물렀다. 진양이 돌아봤지만 용무용은 그대로 갔다.


“공양왕에게 숨겨진 아들이 있었다?”

기방에서 가장 조용한 정각에 진양과 안평이 술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안평은 공양왕에게 숨겨진 아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공양왕이 죽을 당시에 궁녀가 임신 중이었고 도망쳐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추측에 불과했다. 하지만 공양왕의 아이를 가진 궁녀의 수발 궁녀를 찾아냈다. 그때 당시 열 살이던 수발 궁녀는 궁녀가 아들을 낳는 것을 옆에서 도왔다고 했다. 이후로 수발 궁녀는 평생 도망을 다니며 살았다고 했다. 공양왕 아들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그 세력이 몸종을 죽이려 했다.

진양은 이제야 아귀가 들어맞음을 알 수 있었다. 왜 염가를 죽였을까? 그 답을 찾았다. 놈들은 안평이 공양왕 아들의 존재를 알게 되자 더는 염가가 필요 없었다. 더구나 염가는 이미 노출이 돼있어 아예 제거해버린 것이었다.

진양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놈들은 50년 동안 준비를 하고 있었구나...”

진양은 안평에게 버럭 화를 냈다.

“너는 어찌해서 이런 중차대한 일을 이제야 이야길 하는 것이냐! 왜 미리 이야길 하지 않은 것이야! 내가 나섰다면 더 빨리 찾았을 것이 아니냐!”

“형님이 이리 나오실까 그리한 것입니다. 혹시라도 사병들을 이끌고 찾아다닐까 싶어서요. 허면 겁에 질려 숨어버렸을 것입니다!”

“놈들을 유인해 잡았을 수도 있는 일이다! 어찌 일언반구도 없이 열흘이나 유람을 갔다 오고서는 뜬구름 같은 소리만 가져온 것이냐! 공양왕에게 아들이 있다 해도 찾아내야 있는 것이 아니냐!”

안평은 심기가 불편했다.

“형님이 찾으시면 될 일이 아닙니까!”

진양은 잔뜩 토라져 있는 안평을 보며 웃었다.

“잘 하였다! 안평, 네가 한 일 중에 제일 잘하였다. 한 잔 받거라!”

진양이 술병을 들었지만 안평은 하늘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더 칭찬해 줘야 얼굴을 펼 것이냐? 뜬구름이 얼마나 좋으냐...잡을 수 없으니 그보다 좋은 건 없지 않느냐...”

진양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라 한 잔 마시고는 덧붙였다.

“하늘에 안평이 떠다니는구나...”

“형님...”

진양이 진지하게 말했다.

“내 사병에 쥐새끼가 있어 문제가 많았다. 내가 움직였으면 그 궁녀는 우리가 찾기도 전에 죽었을 것이다.”

“간자는 잡았다 하질 않았습니까?”

“잡았지, 잡았는데 말이다, 쥐새끼를 잡으려 했는데 멍청한 토끼가 걸려들었다...헌데 너는 공양왕의 아들이 있다는 소릴 누구에게 들었느냐? 그놈의 입을 열면 되겠구나! 그놈이 누구냐? 어떤 놈이냐?”

안평은 당장이라도 쫓아갈 기세인 진양을 보았다. 안평은 차분했다.

“형님,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입을 여는 순간 형님이 장검을 빼들고 도성을 활보할까 겁이 납니다.”

“그리 말하는 걸 보니 내가 잘 아는 놈이구나...”

진양은 잠시 있다가 말했다.

“왜 괴문서가 더 나오지 않는 걸까...”

진양은 한동안 괴문서가 나돌지 않는 게 수상쩍었다. 또한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더구나 저하께서 궁 밖으로 나오시는 게 공공연히 알려져 있으니 더욱 불안했다. 마치 등 뒤에서 사나운 짐승이 숨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두운 숲속을 수많은 횃불이 밝히고 있었다. 용무용과 승무는 몰래 도성을 빠져나왔다. 용무용과 승무와 스무 명의 형제들이 집결해 있었다. 스무 명의 형제들은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중반으로 어려서부터 훈련 받은 살수였다.

용무용이 순포에게 말했다.

“진양이 지금은 속았다고는 하나 의심을 거두지 않았을 것이다, 매사에 조심 또 조심하거라, 알겠느냐?”

“예 형님!”

“또한 그날 너는 나서선 아니 된다. 네 눈앞에서 형제들이 다 죽어도 너는 나서선 아니 된다. 알겠느냐?”

“예 형님!”

용무용이 모두를 보았다.

“기억해라!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가던 우리의 부모를, 우리의 형제를, 우리의 누이를, 우리의 고려를 기억해라! 반드시 이씨 놈들을 죽여라!”

“예 형님!”

“너희들은 모두 죽게 될 것이다, 죽어야 한다, 허나.”

용무용이 모두의 눈을 하나 하나 보았다.

“이향을 죽이고 죽거라!”

모두의 눈이 뜨거워졌다.

“너희들끼리 해내야 한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해내야 한다! 할 수 있겠느냐?”

“예 형님!”

“고려인의 한맺힌 원한을 풀어줄 수 있겠느냐?”

“예 형님!”

“가라! 내 형제들이여! 반드시 너희들의 피는 이씨놈들 피 위에 뿌려져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예 형님!”

죽기를 각오한 그들의 눈빛이 타오르고 있었다. 용무용이 말했다.

“내일 밤과 모레 아침 각자 흩어져 도성으로 들어온다. 한성부에 이향이 도착한 후에, 무예시합 때 우리가 놈들의 힘을 빼놓을 것이다. 너희들은 무예시합이 끝나갈 때 내가 신호를 보내면 움직인다.”

....

“너희들이 검을 뽑는 순간 너희들은 형제가 아니다, 허니 서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지 마라. 팔다리가 다 잘려나가도 이향을 죽여야 한다.”

....

“반드시 이향을 먼저 죽여야 한다. 눈앞에 있는 다른 놈을 죽이기 위해 시간을 허비해선 아니 된다. 너희들은 윤이 이향을 벨 수 있게 길을 터줘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예 형님!”

용무용은 체격이 좋고 각진 얼굴에 눈빛이 사나운 윤을 보았다.

“너는 이향 하나만 벤다. 알겠느냐?”

“예 형님!”

용무용은 윤을 보았다. 창이가 해야 할 일을 윤이 대신해야 했다. 용무용은 고귀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이향을 떠올렸다. 당장이라도 이향을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지금 나설 수 없었다. 형제 여섯을 죽인 자들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용무용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했다.

고려인의 피로 고귀한 삶을 살아온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인지 보여줄 것이다.

기다리거라 이향.


“저하 한성부 무예시합에 가셔선 아니 되옵니다...”

동궁전에 등불이 밝혀져 있고 책상의 촛불이 너울너울 움직였다.

향이 앉아서 차분히 단진을 보고 있었고 단진은 향에게 간절히 애원하고 있었다. 박 내관은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들어와 단진을 보았다.

단진은 목청 높여 애원했다.

“저하...한성부 무예시합에 가셔선 아니 되옵니다...”

향이 단진을 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건 아니 된다 했다. 어찌 이리 고집을 부리느냐...”

“저하...저하께서 한성부에 나가신다는 걸 세상이 다 알고 있는데 어찌 역당이라 모르겠사옵니까! 저하께서 한성부에 나가시는 날을 노리고 있을 수도 있사옵니다!”

“역당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역당이 있다 해서 내 할 일을 하지 못해서야 되겠느냐! 심려치 말거라!”

“저하...소인의 청을 다 들어준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향은 단호했다.

“들어줄 것이다. 허나 이건 아니 된다, 신하들과 약조가 돼 있는 것이다, 내가 네게 들어줄 수 있는 건, 너와 나의 문제다.”

향은 단진을 보았다. 향이 강녕전에서 돌아오니 단진이 동궁전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웠다. 단진은 향을 그저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향이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갔다. 단진은 향을 물끄러미 보더니 청이 있다고 했고 향은 들어주겠노라 했다. 동궁전 안으로 들어와서는 내내 단진은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단진은 잠시 향을 보다가 원망스레 말했다.

“저하...아니 되옵니다! 들어주셔야 하옵니다!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보다 못한 박 내관이 나섰다. 박 내관은 향의 앞이라 최대한 누르며 이야기했다.

“어찌 저하께 이런 무례를 범하는 것이냐! 어찌 나인 따위가 감히 저하께 하라 마라 하는 것이냐! 정녕 물고를 당해야 정신을 차릴 것이냐!”

“물고를 당해도 좋사옵니다. 죽어도 좋사옵니다. 저하...죽음이 두려워 입을 다문다면, 저하껜 누가 바른 말을 할 것이며, 누가 저하를 지킬 것이옵니까! 저하께서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걸 소인은 보고 있을 수 없사옵니다. 차라리 소인이 먼저 뛰어들 것입니다! 해서 소인이 활활 타올라 저하께 불구덩이란 걸 알려드릴 것입니다!”

단진의 눈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하도 어여뻐 향은 소리 내어 웃었다.

박 내관이 놀라 향을 보았다. 향은 웃고 있었다. 행복한 듯 웃고 있었다.

단진은 더욱 애가 탔다.

“저하...”

향은 한참을 웃었다. 향이 단진을 보고 미소 지었다.

“허면 아니 된다 하지만 말고 이유를 설명해 보거라.”

“타당하다 여기시면, 소인의 청을 들어주실 것입니까?”

“그건 아니 된다.”

“저하...”

단진은 잠시 있다가 말했다.

“저하...괴문서가 나온 이후로 너무도 조용하옵니다. 역당이 금방이라도 무슨 일을 낼 것처럼 괴문서를 써서 나라를 어지럽게 하더니, 갑자기 너무도 조용한 게 이상합니다. 이렇게 평화로우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나오라고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지난번에 궁 밖에 나갔을 때 역당을 보았습니다!”

향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단진은 애가 타서 미칠 지경이었다. 단진은 사실대로 자객 이야길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되면 백겸과 창이가 위험에 처해질 것이다. 단진은 무슨 수를 써서든 향이 밖으로 나가는 걸 막아야 했다.

단진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생각이 떠올랐다.

“저하...장 내관도 알고 있사옵니다. 장 내관께 물어보시면 알 것입니다. 지난번 궁 밖에 나갔을 때, 장 내관도 역당의 무리를 봤다 했습니다. 소인만 본 게 아닙니다!”

단진이 박 내관을 보며 애원했다.

“박 내관님, 박 내관님도 저하의 안위가 우선이지 않습니까! 장 내관에게 확인해 보십시오!”


동궁전 문을 살짝 열고 엿듣던 공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 기가 막혀 입이 쩍 벌어졌다. 박 내관이 문을 열려고 하자 공두는 놀라 문을 막았다. 박 내관이 안에서 문을 열지 못하게 공두가 있는 힘껏 문을 잡고 버텼다. 공두의 얼굴이 벌게졌다. 박 내관이 문이 왜 안 열리냐면서 뭐라고 하자 공두는 어쩔 수 없이 문에서 떨어졌다.

공두는 박 내관과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도망치듯 뛰쳐나갔다. 공두는 끓어올라 단진의 머리털을 다 뽑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멍청한 닭 때문에 자신까지 끓는 가마솥에 들어가게 생겼다.

공두는 비현각에서 단진의 유도심문에 넘어가 백겸 도화 창이에게 들은 이야길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단진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공두에게 말했다.

‘금군 경가에게 전해. 원빈은 아무 말 하지 않았고, 서봄은 궁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박 내관에게 벌을 받는 중이라고. 그리고 저하께서 데리고 나가지 않으시니 걱정하지 말라고 해.’

공두는 단진이 몰래 나갈 궁리를 하고 있을 거라 여겨 대책을 세우고 있었다. 헌데 단진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동궁전이 떠나가라 외쳐대고 있었다. 마당으로 나온 공두가 서둘러 나가려는데 박 내관이 불렀다.

“어딜 가는 것이냐?”

공두는 찌푸리고 다리를 꼬고 양손으로 엉덩이를 막으며 말했다.

“뒷간이 급해서 그만. 송구하오나 쌀 것 같습니다..이만...”

“싸거라.”

박 내관이 서늘히 다가왔다.

“싸면 죽일 것이다.”

공두가 바로 차렷 자세를 했다.

“명 받들었습니다. 쏙 들어갔습니다!”

박 내관은 진지했다.

“다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홍단진 말이 사실이냐?”

공두가 눈치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박 내관님, 홍단진이 지금 궁 밖에 나가 고향으로 도망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입니다. 절대 넘어가선 아니 됩니다! 저하께서 한성부에 다녀오신 다음 날, 홍단진을 내치심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홍단진의 기고만장한 저 행태는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내시부의 규율에 따라 엄히 문책해야 합니다!”

박 내관이 공두를 걷어찼다. 박 내관은 단진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만약에 사실이라면 이는 심각한 문제였고 김종서 집에서 본 야인들이 자꾸만 거슬렸다.

“사실대로 말해야 할 것이다. 지난번 궁 밖에 나갔을 때 역당의 무리를 보았느냐?”

“그럴 리가 있겠습...”

공두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꽃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공두는 눈치 없이 박 내관에게 보고하듯 말했다.

“내관 장공두, 홍단진이 사라져 보고하러 왔습니다.”

공두가 단진을 보고 놀란 듯 말했다.

“아니, 이런, 여기 있었느냐?”

공두가 향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저하. 홍단진이 저하를 지키겠다며, 역당을 물리치겠다고 해서 소인이 따라왔사온데, 갑자기 없어져 찾으러 다녔사옵니다. 소인, 역당과 싸우다 몸이 이리 됐사옵니다.”


공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못 봤다고 하면 지난번에 거짓말을 한 게 돼 죽도록 두들겨 맞을 것이다. 봤다고 하면...공두에게 살 길이 있었다. 봤다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었다. 상을 받을 수도 있겠다 싶어 자신 있게 말했다.

“예...역당은 있었습니다. 제가 역당과 싸우다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단진과 함께 나온 향이 물었다.

“역당이란 증좌가 있었느냐?”

단진이 공두를 보며 도와달라고 눈짓을 했지만 공두는 외면했다.

공두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말했다.

“소신, 홍단진이 역당이다! 하는 소리를 듣고 쫓아가 두들겨 맞았사옵니다. 생사를 넘나드느라 얼굴을 보진 못했사옵니다! 증좌는 홍단진 밖에 없사옵니다...홍단진에게 왜 역당이라 했냐고 물었더니 검은색 옷을 입어 역당이라 했사옵니다!”

공두가 납작 엎드렸다.

“저하...증좌를 찾지 못한 소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벌하여 주시옵소서....”

박 내관이 공두를 걷어찼다. 공두가 고개를 들고 보니 향과 단진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향과 단진이 경회루를 걸었다. 바람이 불어 나무들이 일제히 살랑였다. 밤하늘에 하얀 구름이 떠다녔다. 그 사이로 달빛이 훤히 비추고 있었다.

단진은 잠시도 쉬지 않고 간청했다. 공두가 향의 곁에서 제등을 비추며 따라왔고 그 옆에 박 내관이 있었다.

향이 경회루 다리에 올랐다. 향이 손짓하자 박 내관과 공두가 물러섰다.

향과 단진이 마주 섰다.

향이 말했다.

“신하들과의 약속을 이유 없이 저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신하들과의 약속보다 저하의 안위가 우선이옵니다!”

“조선의 백성이 된 야인들의 무예 실력을 봐야 하는 일이다.”

“야인들의 무예 실력은 후일에도 볼 수 있는 일이옵니다!”

“내금위 별감들이 그날을 위해 열심히 무예 연습을 하고 있다. 내가 가지 않으면 실망할 것이다.”

“내금위 별감들이 저하를 지키려다 다 죽게 될 것입니다! 별감들의 실망은 잠깐이지만 그들의 목숨은 돌이킬 수 없사옵니다!”

박 내관의 입이 쩍 벌어졌다.

단진은 간절했다.

“저하...허면 그들의 목숨을 살리고자 하신다면 이유가 되겠습니까?”

향이 단진을 보았다. 단진의 고운 얼굴을 달빛이 비춰주고 있었다. 이토록 고집을 부리는 단진의 마음을 알기에 향은 어여뻤다.

향은 근심 가득한 단진의 눈을 보았다.

“눈을 감거라!”

단진은 듣지 않았다. 향이 손을 뻗어 단진의 눈을 가렸다. 단진은 멍하니 있었다.

박 내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박 내관은 서둘러 공두를 붙잡고 뒤돌아섰다.

밤하늘의 달빛이 향과 단진을 비춰주고 경회루 연못에 또 하나의 달빛이 향과 단진을 비춰주고 있었다. 향이 단진의 얼굴에 가져다 댄 손을 내렸다.

단진이 보았다.

“보거라. 나는 네 앞에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허니 아무 걱정하지 말거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단진이 향을 보았다. 향의 깊은 눈을 보았다. 향이 미소 지었다. 단진의 콧등이 시큰해졌다. 단진은 향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향을 단진은 좋아했다. 그런 향이기에 단진은 좋았다.

“저하...”

‘소인이 저하를 지킬 것입니다.’

향이 보았다. 촉촉해진 단진의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하늘의 달빛이 비추었다. 연못의 달빛이 너울너울 일렁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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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 작성자
    Lv.7 cr*****
    작성일
    20.09.03 11:43
    No. 1

    다음화까지 어떻게 기다리나요!!! 마지막엔 설레서 심장 멈추는줄^^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찬성: 6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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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숙원 홍씨 57. 무예시합-1 +2 20.09.21 2,047 10 20쪽
56 숙원 홍씨 56. 이향, 무예시합에 가지 않기로 하다 +1 20.09.17 2,065 10 17쪽
55 숙원 홍씨 55. 단진의 간절함 +1 20.09.14 2,089 9 21쪽
54 숙원 홍씨 54. 향을 지키려는 단진 +2 20.09.10 2,117 10 18쪽
53 숙원 홍씨 53. 나비문신 +2 20.09.07 2,138 10 19쪽
» 숙원 홍씨 52. 죽이려는 자, 지키려는 자 +1 20.09.03 2,164 11 21쪽
51 숙원 홍씨 51. 단진, 향의 위험을 알아채다 +1 20.08.31 2,189 11 20쪽
50 숙원 홍씨 50. 무예시합 날이 정해지다 +2 20.08.27 2,202 11 22쪽
49 숙원 홍씨 49. 여인 홍단진의 결심 +1 20.08.24 2,228 11 20쪽
48 숙원 홍씨 48. 백겸과 창이, 진양대군을 만나다 +2 20.08.20 2,269 11 21쪽
47 숙원 홍씨 47. 목멱산의 결의 +4 20.08.17 2,300 11 21쪽
46 숙원 홍씨 46. 계유정난을 막아라 +2 20.08.13 2,334 11 20쪽
45 숙원 홍씨 45. 단진의 고백 +2 20.08.10 2,349 11 20쪽
44 숙원 홍씨 44. 홍단진, 주상전하를 만나다 +2 20.08.06 2,364 12 18쪽
43 숙원 홍씨 43. 백겸과 창이 한양 기방에 들다 +1 20.08.03 2,387 11 16쪽
42 숙원 홍씨 42. 비 오는 밤, 사라진 자들 +3 20.07.30 2,400 11 18쪽
41 숙원 홍씨 41. 이향의 마음 +3 20.07.27 2,427 11 16쪽
40 숙원 홍씨 40. 꽃비 그리고 고려 제일 무사 창이, 조선 제일 무사 백겸 +1 20.07.23 2,444 11 20쪽
39 숙원 홍씨 39. 이향, 김종서와 야인을 만나다 +2 20.07.20 2,464 11 19쪽
38 숙원 홍씨 38. 운명적인 만남 +2 20.07.16 2,498 1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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