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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연재수 :
9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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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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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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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10.1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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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숙원 홍씨 63. 비밀의 열쇠, 백겸과 창이

DUMMY

숙원 홍씨 63. 비밀의 열쇠, 백겸과 창이


“검을 겨룬다는 건, 하룻밤 계집을 품은 것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이다. 허니 너희들은 묵은 감정은 버리고 앞으로 잘 지내도록 하거라. 오늘은 마음껏 마시자꾸나!”

“이놈이 이번 무예시합에서 우승한 놈이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정각에서 가야금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양과 안평, 백겸과 창이, 순포의 술자리가 길어지고 있었다. 진양의 옆엔 화려한 가면을 쓴 월이 앉아 있고 안평의 옆엔 가면을 쓴 도화가 앉아 있었다.

백겸과 창이와 순포의 옆에도 가면을 쓴 기녀들이 앉아 있었다.

진양은 술이 있는데 계집이 빠질 수 없다면서 기녀들을 불렀지만 모두 바깥쪽에 앉히고 눈길도 주지 않았다. 또한 춤을 추라고 해놓고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백겸은 진양이 기녀들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무슨 기괴한 장난인가 싶었다.

백겸은 안평의 옆에 앉은 기녀가 도화라는 걸 알았지만 모른 척하고 있었다.

도화는 백겸 앞에 이렇게 앉아 있는 게 수치스러웠지만 지금 그런 감정은 사치였다. 진양이 괜히 이런 술자리를 가질 리가 없었다.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눈치 빠른 월은 진양의 심기를 간파하고 입을 다물고는 창이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월은 깃털 달린 가면을 손으로 만지며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창이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창이는 진양을 보고 있었다.

진양이 사발에 술을 가득 따라서 돌리고 있었다. 순포가 한 사발을 마시고 놓자 이번엔 창이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창이가 마시고 나면 백겸이 마셨고 그 다음은 진양이 마셨다.

안평은 진양을 말리지 않았다. 진양은 지금 무언가를 알아내려 하고 있었다.

순포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술을 받아 마시고 있었다. 흐트러지진 않았지만

점점 정신이 몽롱해졌다.

순포는 죽은 줄 알았던 백겸이 눈앞에 있자 너무도 놀라 감정을 드러냈다.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양이 백겸을 아느냐고 묻자 순포는 살기가 느껴져 그랬다고 둘러댔다. 진양은 대수롭지 않게 백겸이 창이보다 뛰어난 고수 같으니 살기가 느껴지는 건 당연한 거라고 했다.

순포는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 용무용에게 가야 했다. 더 술에 취하면 안 되겠기에 핑계거리를 찾고 있었지만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백겸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고 창이는 워낙 술이 세서 멀쩡했다.

백겸의 차례가 되었다. 백겸이 술을 마시려다 속이 울렁거려 잠시 멈췄다. 도화가 백겸을 보고 있었다. 백겸은 꾹 참고 술을 꿀꺽꿀꺽 넘겼다.

진양이 순포의 얼굴 가까이 대고 말했다.

“나는 네가 왜 진검을 뽑았는지 알고 있다!”

순포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백겸과 창이, 안평이 진양을 보았다.

진양이 순포를 빤히 보다가 말했다.

“저놈이, 너보다 키도 크고 인물도 잘나서 질투가 난 게지. 그렇지 않으냐?”

진양이 껄껄 웃었다. 순포는 마른 침을 삼켰다.

백겸은 흐릿해지는 정신으로 진양을 보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웃는 모습은 소년 같았고 웃음소리는 호탕했고 하는 짓은 기괴했다. 순해 보이는 얼굴에 눈빛은 강하고 날카로웠다. 그 눈빛에 무엇이 있는지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을 알아내려는 것일까. 저 순포란 자는 왜 자신을 노려본 걸까. 눈가의 흉터가 거슬렸다.

순포와 백겸의 시선이 또다시 부닥쳤다. 순포에게서 살기가 느껴졌다. 순포가 시선을 돌렸다. 백겸은 순포가 둘로 보여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안평은 백겸을 보고 있었다. 안평은 백겸에게 호기심이 느껴졌고 궁금한 게 많았지만 지금은 물어볼 때가 아니었다. 백겸이 용무용을 상대로 이야기할 때의 예리함을 떠올렸다.

안평은 백겸과 창이 두 사람을 보았다. 둘 다 범상치 않은 자들이었고 흠잡을 곳 없는 사내였다. 안평은 가야금소리를 들으며 둘을 보고 있자니 봄과 여름 두 계절을 함께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창이는 여전히 진양을 보고 있었다. 창이는 훗날 상대해야 할 진양을 살폈다. 진양은 열어야 할 문이었고 부숴야 할 벽이었고 막아야 할 파도였다. 막든 부수든 열든 진양을 상대해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자 그리운 얼굴이 떠올랐다.

창이의 마음이 궁궐 담장을 넘어가려는데 진양이 잡아당겼다.

진양은 창이에게 술을 가득 따른 사발을 내밀었다.

“안평! 잘 봐 두거라. 이놈은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 것이다.”

안평이 창이를 보았다.

진양이 말을 이었다.

“이놈이 그러더구나. 세상에 여인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한 일은 없다고 하더구나. 이놈은 제 계집 지키느라 시간이 없을 것이다.”

일순 창이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백겸은 무슨 소린가 싶어 창이를 보았다. 도화가 창이를 보았다. 월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계집이 아닌 여인이라 했습니다!”

창이는 진양에게 시선을 둔 채로 술을 벌컥벌컥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진양이 창이를 싸늘히 보았다.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한낱 기부가 아니더냐? 헌데 네놈이 품는 계집이 여인일 수가 있겠느냐? 뻔한 계집이지. 별 볼일 없는 놈의 품에 안겨드는 계집이란 게.”

창이가 거칠게 술상을 내리쳤다.

“계집이 아니라 여인이라 했습니다! 더는 입에 올리지 마십시오!”

백겸은 너무 놀라 술이 확 깼다. 도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감히 대군께 저지른 무례는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가야금소리가 멈추고 월이 슬그머니 일어났다. 기녀들이 하나 둘 일어나고 월이 가만히 앉아 있는 도화의 팔을 잡아끌고 나갔다.

안평은 진양을 보았다.

진양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허면 증명해 보이거라!”

창이는 말없이 진양을 노려보고 있었다.

진양이 비웃었다.

“네깟 놈이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겠느냐! 한낱 기부 따위가. 물러가거라!”

“해보이지요!”

“해보이겠다?”

진양은 자신을 노려보는 창이를 보며 말했다.

“사내놈이 허언을 하진 않을 터, 허면 나중에 기별하마. 증명하지 못하면 네놈이 죽게 될 것이다. 다들 물러가라.”

진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물러가라 하였다!”


백겸이 창이를 잡아끌고 별채를 나서는데 순포가 따라왔다. 순포는 백겸과 창이에게 눈길을 둔 채로 갔다.

백겸은 창이에게 화를 냈다.

“너 미쳤어?”

“안 미쳤어!”

“대군이야! 우리는 신분도 모른다고. 우리 신분을 알아낸다 해도 대군보다 높을 리는 없어!”

“내가 대군 쳤어? 술상 쳤지!”

“이 와중에 농담이 나와?”

“나와!”

“해보이겠다고? 뭘? 뭘 할 건데? 뭘 증명하는데? 뇌 두고 오는 김에 객기도 두고 오지 그랬어!”

“와보니 주머니에 있더라구. 내 객기가 워낙 작아서!”

창이가 피식 웃고는 깊게 숨을 내뱉었다. 다시 숨을 들이마시는데 취기가 확 올라왔다. 술을 잘 마신다고 해서 취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백겸은 계속해서 잔소리를 해댔다.

“나비문신 안 잡을 거야? 그놈들 잡아야 우리가 누군지 알 수 있어. 그놈들이 우리 죽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잡아야 돼. 그러니까 제발 사고 좀 치지 마!”

“나 사고 안 쳤어! 술상 쳤지!”

창이가 쓸쓸하게 웃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치게 그리웠다.

창이가 터덕터덕 걸어갔다. 창이의 발자국에 사무치는 그리움이 남겨졌다.

백겸은 벙찐 얼굴로 창이의 뒷모습을 보았다.

“아니...짝사랑하는 여자 누구야? 대체 누구길래...”


진양과 안평은 정각에 서서 멀어져가는 백겸과 창이를 보고 있었다.

백겸과 창이는 순포를 모르는 게 확실했다. 하지만 순포의 적인 것은 분명했다. 적의 적은 벗이었다. 진양은 뜻하지 않게 길동무를 만난 기분이었다. 백겸과 창이는 진양과 같은 적을 쫓고 있었다.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진양은 백겸과 창이가 역당을 찾든, 역당이 그들을 찾든 할 거라 여겼다. 아마도 백겸과 창이가 많은 걸 알고 있는 듯싶었다. 분명 그들의 잃어버린 기억 속에 역당의 정체가 있었다.

진양은 모래알 하나 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산을 통째로 얻은 기분이었다. 해서 들떴으나 해서 실수를 할 수 있기에 이제부터 신중을 기해야 했다.

긴 하루였다.

진양은 날카롭게 파고들다가 창이가 떠오르자 웃음이 나왔다.

“나는 말이다. 저놈의 계집이 누군지 참으로 궁금하구나.”

“형님. 좋게 알아낼 수도 있는데 어찌 자극하시오!”

“저놈은 야생마라 이리 해야 반응을 하는 놈이다. 저놈에게 좋게 백날 천날 얘기해봐라. 저놈을 손에 넣지 못할 것이다. 저놈은 이제부터 내가 부를 때 언제든지 달려올 것이다. 또한 백겸이란 놈도 딸려 올 것이고 저놈들이 우리에게 역당이 있는 곳을 알려줄 것이다.”

바람이 불어왔다. 취기가 오른 진양은 시원한 바람이 반가웠다. 기방 정원의 나뭇잎들은 바람에 흔들릴 때도 교태가 흐르는 듯싶었다.

진양이 물끄러미 정원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안평, 나는 말이다.”

안평이 보았다.

“내 앞에서 술상을 치는 놈을 처음 봤다.”

진양이 큰 소리로 웃었다. 안평은 찌푸렸다.

“다음에는 저놈 계집을 여인으로 인정해줘야겠다. 다음엔 술상이 아니라 나를 치겠더구나!”

안평이 잠시 있다가 말했다.

“저들의 기억에 역당이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소 형님. 이제 어찌 알아낼 것이오?”

“어찌 어찌 알아낼 것이다!”

안평이 불만스레 진양을 보았다.

“형님, 저하께서 역당이 잡히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형님은 어찌해서 나에게 다음 계획을 말해주지 않는 것이오?”

“너는 어찌해서 나에게 공양왕 후손에 관한 일을 누구에게 들었는지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냐? 함께 찾아야 더 빨리 찾을 게 아니냐!”

진양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누구냐?”

안평은 입을 열려다 다물었다. 지금 알려줬다가는 진양이 검을 빼들고 갈 게 자명했다. 공양왕의 후손에 대해 떠든 사람은 술에 취한 호판의 장자 김은 이었다.

진양이 안평을 뚫어져라 보았다.


순포가 검은 삿갓을 쓰고 어두운 밤길을 걸었다. 용무용에게 먼저 연통이 와 있었다. 순포는 서둘렀다. 혹시라도 미행이 붙었을까 싶어 색주가를 통해 빠져나왔다.

순포는 백겸을 떠올렸다. 백겸을 봤을 땐 충격이었지만 지금은 살아있는 게 오히려 고마웠다. 제 손으로 죽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반드시 죽일 것이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건 창이 그놈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백겸과 함께 있단 말인가.

순포는 백겸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검을 겨루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는 조선과 야인 부족들이 전쟁 중일 때였다. 야인과 조선과의 전쟁, 야인 부족끼리의 전쟁으로 하루도 피바람이 불지 않을 때가 없었다.

백겸이 자신들이 임시로 살던 산채를 감시하고 있었다. 백겸은 그곳에서 야인들이 군사훈련을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백겸은 그들이 고려인이란 사실까진 몰랐었다. 그저 야인들이 전쟁을 준비한다고 알고 있었다.

창이가 매복해 있는 백겸의 수하들 수십 명을 죽였다. 뒤늦게 나타난 백겸이 참담히 죽어있는 수하들을 보고 울부짖었다.

이후 백겸은 산채를 급습해서 형제들을 무참히 죽였다. 백겸이 창이의 동생도 죽였다. 창이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창이는 동생의 시신 앞에서, 형제들의 피 앞에서 백겸 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모두를 도륙하겠다고 맹세했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하늘이 어둑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순포가 산길을 가는데 숨어 있던 백겸이 나타났다. 순포는 백겸과 처음으로 검을 겨루게 됐다.

순포도 검이라면 꽤 잘 다루는 편이었다. 창이를 이긴 적은 없지만 백겸을 상대로는 자신이 있었다. 허나 백겸의 검은 냉정했다. 순포는 백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백겸은 순포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순포를 잡아다가 입을 열어 창이를 찾고 그들의 본거지를 알아낼 참이었다. 허나 백겸은 순포가 입을 열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생각을 바꾸었다.

순포가 더는 안 되겠기에 도망을 치려는데 백겸의 검이 얼굴에 닿았다. 순포의 눈가에서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 피가 빗방울에 섞여 흘러내렸다. 순포가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백겸이 순포에게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창이가 나타났다.

창이의 검이 백겸의 검을 막아섰다.

백겸과 창이는 검을 맞댄 채로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빗방울은 수하들의 피고 형제들의 피였다. 그들은 증오심 가득한 눈으로 서로를 보다가 피를 토하듯 고함을 내질렀다.

백겸과 창이의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다. 순포는 피가 흐르는 한쪽 눈을 가린 채로 그들을 보았다. 창이와 함께 온 용무용과 승무는 두 사람의 대결을 보고 있었다.

순포는 창이와 그토록 오래도록 검을 겨루는 자를 본 적이 없었다. 진검승부였다.

창이는 바람처럼 검을 휘둘렀고 백겸의 검은 정확했다. 창이의 검이 백겸에게 날아들자 백겸은 막았고. 백겸의 검이 창이에게 날아들면 창이는 날듯이 뛰어넘어 백겸의 뒤에서 검을 휘둘렀고 백겸은 또다시 막아냈다. 백겸이 검을 내리치자 창이의 몸이 밀리듯이 뒷걸음질 쳤다. 백겸의 검은 힘이 좋았다. 백겸이 또다시 창이에게 검을 내리치려 하자 창이가 나무를 딛고 백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두 사람의 검술은 너무도 달랐고 너무도 빨랐고 너무도 정확했다. 도저히 끝나지 않을 싸움이었다. 굵은 빗줄기 속에서 백겸과 창이는 날듯이 검을 겨루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고도 승부는 나지 않고 계속됐다.

갑자기 김종서가 병력을 이끌고 숲으로 왔다. 창이는 싸움을 끝낼 생각이 없었으나 용무용이 멈추게 했다. 창이는 검을 거두었다.

백겸이 쫓았으나 그들을 따라올 수는 없었다.

순포는 고려 땅에 묻힐 한줌의 머리카락을 남기고 도성으로 와서 진양의 호위무사가 됐다. 얼마 후 백겸이 사라졌다고 했다. 알고 보니 백겸이 야인으로 위장해 모든 부족에 잠입한 것이다. 백겸이 그때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됐고 역으로 그들이 백겸을 쫓게 됐다. 그러다 백겸이 역병에 걸려 죽은 시신들 속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백겸과 창이가 같이 도망을 쳤다.

순포가 김종서 집을 돌아 별채 쪽으로 갔다. 석이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석이 눈짓을 하자 순포가 담장을 뛰어넘었다.


촛불이 밝혀져 있었다. 용무용과 호와 결, 석, 승무와 순포가 둘러앉았다.

용무용은 이제껏 백겸과 창이에게서 알아낸 것들을 이야기했다. 결국 그들의 기억이 없음을 확인했고 이제 또다른 국면에 들어섰다고 했다. 용무용은 창이 뿐 아니라 백겸을 제대로 써 볼 생각이었다. 허니 죽여선 안 된다고 했다.

그제서야 순포는 철천지 원수지간인 백겸과 창이가 함께 있는 게 납득이 갔다.

순포는 백겸과 창이, 진양과 안평과 함께 있었던 일들을 보고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승무가 용무용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형님, 이 모든 게 함길도에서 제가 백겸과 창이에게 속아 넘어가 생긴 일입니다. 또한 비오는 밤에도 실수를 해서 일을 그르쳤습니다! 제가 죽겠습니다!”

순포가 무릎을 꿇었다.

“형님, 무예시합장에서 제가 실수를 하는 바람에 진양이 눈치챈 듯합니다. 이는 제 잘못입니다. 제가 죽겠습니다!”

용무용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네놈들이 지금 장난을 하는 것이냐? 지금 지난 실수를 따질 만큼 한가하더냐? 실수를 덮기 위해 죽을 만큼 네놈들 목숨이 그리도 하찮더냐?”

순포가 다급히 말했다.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진양은 저를 의심하고, 어깨에 나비문신이 있는 자를 찾는다니, 제가 나서겠습니다. 저를 잘라내십시오.”

승무가 말했다.

“형님, 백겸과 창이가 아는 얼굴은 제가 유일합니다. 제가 지금 백겸과 창이 앞에 나서겠습니다. 해서 나비문신의 꼬리를 잘라 더는 쫓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용무용이 노여워했다.

“언제부터 너희들이 생각을 했느냐? 언제부터 너희들이 결정을 내렸느냐? 언제부터 너희들이 죽고자 하는 걸 네놈들 마음대로 결정을 했느냔 말이다!”

호와 결, 석도 무릎을 꿇었다.

승무와 순포가 납작 엎드렸다.

“송구합니다 형님.”

용무용이 엄히 말했다.

“귀히 죽으라 했다. 때가 되면 내가 알려줄 것이다. 너희들을 지금 잘라낸다면 놈들은 더 들쑤시고 다닐 것이다. 지금은 너희들이 그놈들의 눈을 가려야 한다.”

용무용이 승무와 순포, 호와 결, 석을 보며 말했다.

“다시는 실수하지 마라. 또한 실수를 했다 해서 돌아보지 마라. 실수를 큰 기회로 만들어라. 알겠느냐?”

모두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예 형님!”

“아무리 급하다 해도, 일에는 순서가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급할 것은 없다. 급한 것은 저놈들이다. 나비문신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놈들은 어깨에 나비문신이 있는 자들을 찾고 있다.”

용무용의 눈길이 잠시 촛불에 머물렀다. 순포의 어깨에 나비문신을 새겨준 사람이 창이인 것을 그놈은 알고 있을까. 창이가 죽인 어깨에 나비문신이 있는 놈들이 죄다 저의 호형호제하던 형제들이란 걸 알고 있을까.

용무용이 승무를 보았다.

“지금 백겸과 창이가 아는 얼굴은 네가 유일하다. 허니 너는 산채로 돌아가 때를 기다리거라.”

“예 형님!”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김종서에게 인사하고 함길도로 돌아간다고 하거라. 절대, 거사가 있기 전까지 산채를 내려와선 아니 된다. 너는 가장 필요할 때 쓰일 것이다. 알겠느냐?”

“예 형님.”

용무용이 호와 결을 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내일 승무의 뒤를 살펴주거라.”

용무용이 순포를 보았다.

“너는 이미 진양의 눈에 들어가 있다.”

순포의 눈빛은 단단했다.

“너는 이 시각부터 진짜 진양의 호위무사로 있거라. 진양이 네 뒤를 쫓을 것이다. 허니 적당히 놀아주고 적당히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진양의 눈을 어지럽히거라.”

“예 형님.”

용무용이 승무를 보며 말했다.

“산채에 가서 윤과 은호를 보내거라.”

용무용은 잠시 있었다.

“헌데.”

모두가 보았다.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왜 그놈들이 나비문신을 찾느냐는 것이다. 제놈들이 도망을 쳐놓고 어찌해서 찾을까? 어찌해서 이향을 죽이려는데 그놈들이 나타나 형제들을 죽였을까? 어찌해서 그놈들이 이향을 쫓았을까? 기억도 없는 놈들이...어찌해서, 무엇을 위해 나비문신을 찾을까?”

용무용은 잠시 있다 말했다.

“창이가 말했다던 그 계집은 대체 누구란 말이냐? 기억도 없는 놈이 계집 때문에 진양과 맞섰다?”

순포가 말했다.

“진짜 계집이 있는 듯싶었습니다. 함길도에서 계집이 있었을 리도 없고, 기억도 없으니 역병을 앓고 일어난 후에 만났을 텐데, 진양은 이미 그놈의 계집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승무는 믿기지 않았다.

“속임수가 아닐까요? 창이에게 계집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이미 말도 안 되는 일은 벌어지고 있었다.

용무용은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백겸과 창이가 나비문신을 찾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향을 위해서는 아니다. 그랬다면 형제들의 시신을 치우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게 있다. 분명 아주 중요한 무언가가. 놈들의 숨통을 쥘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용무용은 그것을 찾아야 했다. 용무용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경복궁에 아침이 찾아왔다. 단진이가 이른 아침부터 단정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늘 뛰던 단진이가 다소곳하게 동궁전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하늘은 맑고 쾌청했다. 맑은 하늘에 뭉게구름이 뭉실뭉실 떠다녔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단진은 날듯이 뛰고 싶었으나 다소곳하게 걸어갔다.

동궁전으로 아침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향은 어전회의에서 논의할 장계를 다시 살피고 있었다. 박 내관이 옆에 서 있었다.

밖에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하. 나인 홍단진 들었사옵니다!”

향이 말했다.

“들여보내거라.”

향이 읽고 있던 장계에서 눈을 들었다.

문이 열렸다. 박 내관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쩍 벌어졌다.

동궁전으로 햇살이 비추었다.

단진이 그 햇살 속으로 걸어왔다. 향은 단진에게 눈길을 둔 채로 보고 있었다.

단진은 흰색 저고리에 하늘색 치마를 입고 남색 쓰개치마를 팔에 걸치고 있었다. 길게 땋은 머리에 댕기를 둘렀다. 그 모습은 너무도 단아하고 어여뻤다.

향은 보고만 있었다. 단진이 다소곳이 걸어왔다.

단진이 향의 앞으로 와서 섰다.

“저하!”

단진이 활짝 웃었다.

향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향과 단진의 얼굴에 햇살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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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 작성자
    Lv.7 cr*****
    작성일
    20.10.19 14:18
    No. 1

    오늘은 용무용에게도 감정이입이 되네요 작가님 덕분에 역사의 또 다른 이면을 보게 됩니다~ 항상 좋은 글 감사해요~

    찬성: 3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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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숙원 홍씨 59. 무예시합-3 +4 20.10.05 1,990 12 22쪽
58 숙원 홍씨 58. 무예시합-2 +2 20.09.24 2,029 10 21쪽
57 숙원 홍씨 57. 무예시합-1 +2 20.09.21 2,047 10 20쪽
56 숙원 홍씨 56. 이향, 무예시합에 가지 않기로 하다 +1 20.09.17 2,065 10 17쪽
55 숙원 홍씨 55. 단진의 간절함 +1 20.09.14 2,089 9 21쪽
54 숙원 홍씨 54. 향을 지키려는 단진 +2 20.09.10 2,117 10 18쪽
53 숙원 홍씨 53. 나비문신 +2 20.09.07 2,138 10 19쪽
52 숙원 홍씨 52. 죽이려는 자, 지키려는 자 +1 20.09.03 2,163 11 21쪽
51 숙원 홍씨 51. 단진, 향의 위험을 알아채다 +1 20.08.31 2,188 11 20쪽
50 숙원 홍씨 50. 무예시합 날이 정해지다 +2 20.08.27 2,202 11 22쪽
49 숙원 홍씨 49. 여인 홍단진의 결심 +1 20.08.24 2,228 11 20쪽
48 숙원 홍씨 48. 백겸과 창이, 진양대군을 만나다 +2 20.08.20 2,269 11 21쪽
47 숙원 홍씨 47. 목멱산의 결의 +4 20.08.17 2,300 11 21쪽
46 숙원 홍씨 46. 계유정난을 막아라 +2 20.08.13 2,334 11 20쪽
45 숙원 홍씨 45. 단진의 고백 +2 20.08.10 2,349 11 20쪽
44 숙원 홍씨 44. 홍단진, 주상전하를 만나다 +2 20.08.06 2,364 12 18쪽
43 숙원 홍씨 43. 백겸과 창이 한양 기방에 들다 +1 20.08.03 2,387 11 16쪽
42 숙원 홍씨 42. 비 오는 밤, 사라진 자들 +3 20.07.30 2,400 11 18쪽
41 숙원 홍씨 41. 이향의 마음 +3 20.07.27 2,426 11 16쪽
40 숙원 홍씨 40. 꽃비 그리고 고려 제일 무사 창이, 조선 제일 무사 백겸 +1 20.07.23 2,443 11 20쪽
39 숙원 홍씨 39. 이향, 김종서와 야인을 만나다 +2 20.07.20 2,464 11 19쪽
38 숙원 홍씨 38. 운명적인 만남 +2 20.07.16 2,498 1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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