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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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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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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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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07.2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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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숙원 홍씨 39. 이향, 김종서와 야인을 만나다

DUMMY

숙원 홍씨 39. 이향, 김종서와 야인을 만나다


백겸과 창이는 멀어져 가는 향을 바라보았다.

향이 닿을 듯 가까이 왔을 때 백겸과 창이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려 했다. 무사들이 쏜살같이 달려와 그들을 막아섰다. 도화가 백겸과 창이를 잡아끌어 길을 비켜주었다. 무사들이 수상쩍은 눈길로 그들을 봤지만 향이 그냥 가자고 손짓했다. 향은 백겸과 창이를 보다가 백겸에게 시선을 둔 채로 갔다.

백겸과 창이 도화는 여전히 멀어져 가는 향을 보고 있었다.

백겸과 창이는 향과 눈이 마주친 순간 숨을 쉬지 않았다. 백겸은 현기증이 일었고 창이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들의 시선에서 향이 사라졌다. 셋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단종 유배지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백겸이 향이 사라진 곳에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진짜, 우리가 세자빈이 왜 없냐고, 그거 물어보러 온 걸까?”

백겸과 도화가 동시에 창이를 보았다. 눈빛으로 너 때문이라고 하고 있었다.

창이가 어이없다는 듯 그들의 시선을 받아쳤다.

“물어보겠다고 한 건 나지만, 물어보라고 시킨 건 여름이야! 살인죄와 교사죄가 같은 거 알잖아!”

창이는 어이없어 하는 백겸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말했다.

“이왕 온 거, 궁금증은 풀어야지, 깔끔하게 물어보고, 산뜻하게 집에 가자!”

백겸이 또다시 향이 사라진 곳을 보았다.

“진짜 멋있긴 하다...그 아우라는...”

창이가 백겸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창이가 백겸을 보며 찌푸렸다.

“난 눈 버렸어. 문종 보다 너 보니까 왜 이렇게 상스럽냐?”

백겸이 받아쳤다.

“난 상스런 양반이고, 넌 성스런 백정이다!”

창이가 웃으며 말했다.

“문종, 인정, 멋지다, 남자인 내가 봐도, 그래도 키는 우리가 조금 더 컸지? 0.1 센치라도 더 컸을 거야, 커야만 해! 아, 머리에 쓴 상투관에 비녀, 그거 묘하게 섹시하네, 우리 집에 갈 때 하나씩 사가자!”

도화가 서늘히 말했다.

“야! 독고준, 서여름, 늬들 놀러왔어?”

창이가 정색했다.

“아니! 난 견학 왔어, 조선 왕 보러.”

창이는 웃었지만 도화는 웃지 않았다.

“서봄 문종한테 인사하고 온다던 애야, 문종이 나온 거 알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창이의 얼굴에 장난기가 사라지고 튀어나가듯 달려갔다. 뒤이어 백겸이, 도화가 국밥집을 향해 달렸다.


가장 먼저 도착한 창이가 국밥집 방문을 벌컥 열었다. 창이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문고리를 잡은 채 마루에 주저앉았다. 창이는 방안을 보며 혼잣말했다.

“고맙다 봄아...”

창이는 세상의 전부를 잃었다 다시 되찾은 기분이었다.

백겸도 뛰어 들어와 방안을 보고는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뒤늦게 도착한 도화 역시 방안을 보고는 안도했다. 세 사람의 얼굴에 땀이 비 오듯 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단진이 자고 있었다.

백겸과 창이는 오는 내내 혹시라도 단진이 없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에 살얼음판을 달리는 심정이었다.

도화가 부엌으로 들어갔다. 퉁퉁한 주모는 보이지 않고 오래된 부엌의 정감 있는 냄새가 그릇과 함께 있었다. 오래 찾을 것도 없이 부엌 끝에 물동이가 있었다. 벽에 걸린 바가지로 물을 떠서 벌컥벌컥 마셨다. 입가를 손등으로 닦고 그을린 부뚜막에 걸터앉았다. 오늘 단진을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란 생각에 어찌나 긴장했는지, 자고 있는 단진을 보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도화는 그날 밤을 떠올렸다. 칼을 든 진양의 뒤를 안평이 쫓고 수상한 순포가 쫓아가고, 도화가 그 뒤를 밟았다.

도화가 경복궁 앞에서 이향과 진양 안평을 숨어서 지켜봤었다. 이향에게 충성 맹세를 하는 진양과 안평을 보며 도화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아찔했다. 강심장인 도화의 심장이 떨렸다. 역사 속의 한 광경을 목격해서 떨리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향과 두 대군들의 감동적인 모습을 봐서 떨리는 게 아니었다. 이향이 죽을 때까지 진양은 충신이었다. 그런 진양이 훗날 안평을 죽이고 단종을 죽이는 잔인한 역사 때문도 아니었다. 육갑을 죽이고도 웃으며 말하는 진양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도화를 두렵게 한 건 이향이었다. 이향의 곧은 미소였다. 이향 앞에서 훗날 수양대군인 진양은 아이처럼 웃었다. 도화는 그 순간 단진이 떠올랐다. 이향을 위해 단진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백겸도 창이도, 그리고 자신도 온전치 못할 거란 예감이 들었다.

도화는 오늘 밤 무슨 일이 있어도 인옥을 빼와야겠다고 결심했다. 서둘러 나가려다 물동이에 시선이 갔다.

도화가 백겸에게 무심히 바가지를 내밀었다. 백겸은 물을 보자 갈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백겸은 입도 떼지 않고 마시다가 반쯤 남겼다. 창이가 남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백겸의 눈이 텅 빈 바가지를 향했다. 도화는 목이 마르다는 말을 하며 부엌으로 갔다.

도화가 다시 떠다준 물을 백겸은 달게 마셨다. 물은 백겸이 마시는데 도화의 갈증이 해소되는 것 같았다. 백겸이 바가지를 내리다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도화를 보았다. 백겸이 미소 지었다. 도화의 눈길이 당황했다.

도화는 방으로 눈길을 돌렸다.

“웬일로 나원빈이 잘 지키고 있었나보네.”

도화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몸이 방으로 기울었다. 방문을 닫으려던 창이의 손이 멈췄다.

백겸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원빈이 어딨어?”

셋은 서로를 보았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창이가 이불을 확 젖혔다.

공두가 몸을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셋이 동시에 소리쳤다.

“나원빈!”

공두는 눈도 뜨지 않고 맥없이 말했다.

“이불 덮어.”

도화가 소리쳤다.

“야, 나원빈! 서봄 어딨어?”

창이가 다그쳤다.

“야, 봄이 어디 갔어?”

백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잘 지키랬잖아. 봄이 어딨어?”

공두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기운 없이 말했다.

“닭은 닭장에 가서 찾고, 이불 덮으라고, 나 기운 없으니까.”

도화가 공두를 확 잡아 일으켰다.

“잘 지키랬잖아, 어디 갔어? 말 안해?”

공두가 짜증을 팍 냈다.

“아! 몰라! 몰라! 내가 똥도 못 싸는데...내가 닭 지키게 생겼냐...”

공두는 뒷간에 갔다 온 후로 우울증에 빠졌다. 뒷간에서 나와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방으로 들어와 엄마를 그리워하며 누워있었다. 단진이 어디 갔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배설의 통로가 막힌 게 이토록 서러울 줄 몰랐다.

도화는 치밀어 공두의 멱살을 잡았다.

“말해! 궁에서 문종이 나왔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서봄 인사하러 갔다가 잡혀 들어가면? 우리 여기서 못 나가!”

공두는 도화를 팍 밀치고 누웠다.

“나도 똥 싸기 전엔 못 나가. 문종이 나왔으면. 박 내관도 왔겠네...”

공두가 한 대 얻어맞은 얼굴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누가 나왔다고?”


“누가 오셨다고?”

노을빛이 가득 찬 후원 마당에 목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김종서가 부장 군관 별감들, 용무용과 함께 승무와 김 별감의 검술대결을 보고 있었다.

용무용과 승무, 야인들은 검정색 무사복을 입었고 질끈 묶은 머리에 건을 둘렀다. 마당 한쪽엔 목검을 든 야인들이, 다른 쪽엔 목검을 든 별감들이 서 있었다.

야인들의 무예가 뛰어나다는 소문이 도성 안팎에 퍼졌고 그들을 보기 위해 궁에서 별감들이 나왔다. 김종서는 기꺼이 그들을 맞았고 야인들의 실력을 잘 살피도록 했다. 그들의 무예를 본 별감들은 너무도 놀라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 별감이 승무와 겨루고 싶다고 해서 두 사람의 목검대결이 펼쳐졌다. 김 별감은 힘이 좋아 한 방에 제압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승무의 날쌘 동작에 김 별감이 당황하고 있었다. 김종서는 용무용을 보았다. 김 별감이 용무용과 맞선다면 진즉에 승패가 가려졌을 것이다.

김종서는 이런 자리를 가진 것을 후회했다. 우리의 실력이 일천함을 보여준 게 됐다. 하지만 이로 인해 무관들의 훈련을 강화해야겠다는 걸 깨달았으니 됐다. 김종서는 자신도 모르게 용무용을 적으로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술이 한참 진행되고 있는데 승규가 뛰어 들어와 소식을 전했다.

김종서는 놀라 다시 물었다.

“누가 오셨다고?”

“아버님, 세자저하께서 오셨습니다!”

김종서가 가려다 별감과 군관들을 보며 말했다.

“자네들은 나를 따라오게.”

승무가 긴장과 흥분감으로 용무용을 보았다. 용무용은 차분했다. 혹시 향이 나올지도 몰라 준비해두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목검을 든 야인들이 용무용에게 다가왔다. 용무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인 한 명이 담을 타고 넘어갔다. 용무용은 보일 듯 말 듯 입꼬리가 올라갔다.


창으로 석양이 들어와 향을 비추었다. 향이 문갑 위의 서책을 펼쳐보고 있었다. 서책이 많고 사군자가 그려진 병풍이 있는 방은 주인을 닮아 단정했다.

김종서가 방으로 들어섰다.

“저하...”

장신인 향의 앞에 작은 체구의 김종서가 섰다. 작은 체구지만 어떤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을 결기와 강직함이 있는 믿음직한 신하를 보며 향이 미소 지었다.

“주인 없는 방에 이리 들어와 있었습니다.”

향이 서책을 제자리에 놓았다.

김종서는 향을 만나 벅찼지만 무거운 마음이었다. 향에게 다가섰다.

“저하...어찌 기별도 없이 납시셨사옵니까! 연통을 하시면 소신이 뵈러 갔을 텐데...”

향이 미소 지었다.

“영감이 보고 싶어 왔습니다!”

김종서는 가슴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왔다. 원손마마가 태어난 기쁜 소식과 함께 세자빈마마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함길도의 밤하늘을 보며 가슴으로 울었다. 김종서는 그대로 향의 앞에 엎드렸다.

“저하...소신의 불충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어찌 그러십니까?”

“세자빈마마께서 그리 비명에 가시고...어리신 원손마마께서 혼자 되셨는데...저하께 이리 참담한 일이 생겼사온데, 소신 미천하여 저하께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사옵니다...소신의 불충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향이 잠시 보다가 김종서를 일으켰다.

“일어서세요 영감! 인명은 재천이거늘 어찌 이러십니까!”

김종서가 일어나서 향을 올려다보았다.

향이 말했다.

“미천하다 하셨습니까! 미천한 마음을 보러 본관이 이리 왔겠습니까? 영감께서 미천하시면 본관 역시 미천한 것입니다!”

김종서가 놀라 머리를 조아렸다.

“저하...말씀을 거두어주시옵소서...”

향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거두겠습니다! 허니, 영감께서도 다시는 미천하다 말씀하지 마세요. 영감께 오는 동안 참으로 좋았습니다.”

향이 김종서의 손을 잡았다.

“영감, 잘 오셨습니다!”

김종서의 눈이 붉어졌다.


“전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 화친을 영감께서 해내셨습니다.”

방안을 등불이 밝히고 있었다. 향이 상석에 앉아 있고 술상을 사이에 두고 김종서가 앉아 있었다. 김종서는 함길도에서의 일을 이야기했고 향은 듣고 있었다. 야인과의 첫 화친이 성사됐으니 앞으로 어떤 방법으로 이어가야 할지를 의논했다.

김종서는 괘서사건을 걱정했다.

“저하...당분간 암행은 나오지 않으시는 게 좋을 듯하옵니다.”

“영감께서 계시니 더 안심하고 나와도 좋을 듯합니다!”

“저하...”

“영감...”

김종서가 향을 보았다. 향이 옆에 놓인 짚신을 손에 들었다. 향은 촘촘히 꼬은 짚신을 만져 보았다. 김종서가 영문을 몰라 짚신을 보고 향을 보았다.

향이 말했다.

“지난번에 역병을 앓았던 민가에 갔었습니다. 구휼미를 받지 못해 어찌나 굶었는지, 전낭을 내주었더니 서로 갖겠다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싸우더이다, 백성에게 구휼미를 나눠주라 했고, 나눠줬다 그리 들었는데, 그 구휼미가 백성들의 배가 아닌, 대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웠습니다.”

김종서는 마음이 아팠다.

“오늘, 그 민가를 다시 가봤습니다. 핏대를 세우던 사람들이 환하게 웃더이다. 배가 고프면 짐승이 되는 것 같다면서, 귀로만 듣던 구휼미가 뱃속으로 들어오니 사람이 됐다 하면서, 웃더이다.”

....

“그리고는 이 귀한 걸 본관에게 주었습니다...”

향이 짚신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허나 너무도 무거워 혼자 들기에 벅찹니다.”

향이 김종서를 보았다.

“영감. 누군가 그러더군요. 본관의 근심이 받는 이에게는 기쁨이라고.”

향이 짚신을 김종서에게 내밀었다.

“영감께서 본관과 전하의 근심을 나눠 가지시겠습니까?”

김종서가 놀란 듯 보았다.

향이 단호히 말했다.

“영감께서 이 조선에 더는 굶주리는 백성이 없도록 힘을 보태시겠습니까?”

김종서가 무릎을 꿇었다. 김종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소신, 저하와 전하의 근심을 나눠 가질 수만 있다면, 이 한 목숨 아깝지 않사옵니다. 저하...소신에게 이런 은혜를 내려주셔서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소신 기쁘게 받겠사옵니다. 또한 사력을 다하겠사옵니다.”

김종서가 짚신을 받았다. 태산 같이 기쁘고 태산 같이 무거웠다. 김종서는 붉어진 눈으로 향을 보았다. 함길도에 가 있는 동안 향은 이미 군주가 돼 있었다. 조선에 길이 남을 성군이 되실 거란 생각을 하자 가슴이 뿌듯해 울컥했다.


마당 곳곳을 횃불이 훤히 밝히고 있었다. 향의 호위무사 뿐 아니라 부장 군관과 별감들까지 긴장해 지키고 있었다. 야인들의 검술 실력을 본 그들은 검에 손을 댄 채 바람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박 내관 역시 긴장하고 있었다.

안채에서 향과 김종서가 나왔다. 향과 김종서가 몇 걸음 걷고 있을 때 군관이 용무용과 승무를 데리고 별채 문을 나오고 있었다. 무사들과 군관 별감들이 재빠르게 향의 양쪽으로 가서 호위했다.

향의 눈길이 용무용을 향했다.

용무용이 향에게 시선을 둔 채로 걸어왔다. 용무용의 가슴은 뜨거웠지만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용무용은 향을 훑어봤다. 듣던 것보다 더 완벽한 인물이었다. 자신감 넘치는 눈빛과 뿜어져 나오는 고귀함. 그 고귀함은 고려인의 피의 대가였다. 고려인이 피맺힌 절규를 하며 죽어갈 때 도적놈 이씨는 자신의 핏줄을 저토록 고귀하게 만들었구나. 용무용의 마음에 불길이 치솟았다.

점점 가까워졌다.

향이 용무용을 살폈다. 단단한 사내였다. 거친 야인이 아닌 용맹한 장수의 눈빛이었다. 무엇에도 굴복하지 않는 의지가 보였고 강인함이 보였고 잔인함이 보였고 순수함이 보였다. 자신이 믿는 것에 목숨을 걸 수 있는 눈빛이었다. 내가 갖게 되면 나를 보호하는 방패가 될 것이고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되면 나를 향하는 검이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향은 문득 운종가에서 본 두 사내가 떠올랐다. 그들의 단단하고 순수한 눈빛이 떠올랐다. 한 사내는 깨끗하면서 곧았고 다른 사내는 뜨거우면서 순수했다. 그들을 막았던 최 무사는 두 사내가 검을 다루는 자들 같다면서 무예가 뛰어날 거라 했다.

향은 검을 다루는 사람들은 참 순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키고자 하는 마음보다 더 순수한 게 어디 있겠는가. 이상했다. 깨끗한 눈빛을 한 사내를 봤을 때 단진이 떠올랐었다.

더 가까워졌다.

용무용은 계산했다. 한 걸음 달려가 호위무사의 검을 빼 향을 베고 호위무사 네 명과 부장 하나, 군관 다섯, 별감 다섯을 처리하면 되는 일이었다. 별감과 겨누게 한 건 김종서의 실수였다. 김 별감이 뛰어난 자라고 말한 것 역시 실수였다. 용무용은 혼자서도 이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오합지졸이었다. 호랑이 한 마리를 상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수십 마리의 들개를 상대하기는 쉬운 일이었다. 힘이 들 뿐이었다.

용무용이 한 걸음 달려가면 닿을 거리에 향이 있었다. 모든 게 멈추었다. 용무용의 눈이 무사의 검에 닿았다. 일순 호위무사들이 긴장했다. 검을 잡은 무사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용무용이 날쌔게 향의 앞으로 와 팔을 움직였다. 무사들의 몸이 움직이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 향은 보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용무용이 팔을 뻗어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승무는 당황했지만 따라서 향에게 절을 했다.

용무용이 엎드린 채 말했다.

“세자저하, 조선의 백성으로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저희 부족을 사람답게 살도록 보살펴 주십시오!”

용무용은 대업을 이루기 위해 더 좋은 때를 기다려야 했다. 어차피 조선 최고의 무사 백겸은 죽고 없었고 오늘은 계획대로 맛만 보여주기로 했다.

향이 한걸음 다가서려 하자 박 내관이 서둘러 막았다.

“저하...더는 가까이 가지 마시옵소서. 야인이옵니다.”

향은 용무용에게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이젠 조선의 백성이다!”

향이 용무용 앞에 섰다.

“일어서거라!”

용무용이 일어섰다.

향이 말했다.

“무예가 뛰어나다 하던데, 한 번 보고 싶구나.”

용무용이 대답했다.

“일천하오나 원하신다면 언제든 보여드리겠습니다.”

향이 잠시 보다가 말했다.

“조선말을 잘 하는구나!”

“잡은 짐승을 팔 때 조선인 행세를 하면 값을 후하게 받아, 어깨너머로 배웠습니다.”

향이 웃었다.

“어깨너머로 배운 어투가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배웠겠구나. 글도 쓸 줄 알겠구나.”

용무용이 일순 당황했지만 냉정을 찾았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향이 김종서를 보았다.

“쓰임이 많은 자 같습니다. 영감께서 잘 살펴주시지요!”

향이 가려다 군관들을 보며 김종서에게 물었다.

“헌데 야인과의 화친을 위해 공을 세운 수하는 누구입니까? 백겸이라 했던가요?”

김종서가 무겁게 말했다.

“백겸은, 생사를 알 수가 없사옵니다.”

승무가 용무용을 보았다.

향이 말했다.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영감께서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향의 눈길이 용무용에게 닿았다. 용무용이 고개를 숙였다.


향과 박 내관, 호위무사들이 밤길을 걸어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복면을 쓴 자객들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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