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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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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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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08.0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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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숙원 홍씨 44. 홍단진, 주상전하를 만나다

DUMMY

숙원 홍씨 44. 홍단진, 주상전하를 만나다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는 주상전하의 교지를 받들라.”

편전에서 어전회의가 열렸다. 부왕이 어좌에 앉아 있고 향이 앉아 있고 영의정, 우의정, 좌찬성, 호조판서, 장문호, 대신들이 서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긴장감과 경계심이 편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도승지가 교지를 읽고 김종서가 그 앞에 있었다.

“김종서를 형조판서에 제수한다.”

도승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작은 웅성임이 일었다. 영의정, 우의정, 좌찬성은 옳은 결정이라는 듯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고. 호조판서와 장문호와 몇몇 대신들은 갑작스레 물벼락이라도 맞은 표정이었다. 호조판서와 장문호는 서로를 보고는 김종서를 못마땅하게 보았다.

김종서가 교지를 받고 부왕을 향했다.

“신 김종서, 주상전하의 명을 받들어 성심을 다하겠나이다.”

부왕이 말했다.

“형조판서 김종서는, 형조의 일 뿐 아니라 북방의 방비에도 책임을 다해 살펴야 할 것이다.”

“신 김종서, 주상전하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영의정이 부왕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전하. 형조판서 김종서가 전하께서 원하시는 야인과의 화친을 이루고 왔사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전하!”

부왕이 말했다.

“과인은 역당을 잡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대들과 말을 하지 않겠다 했소.”

영의정이 고개를 숙였다.

“전하...신들의 불충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벌하여 주시옵소서!”

부왕이 모두를 못마땅하게 보았다.

“역당을 잡아들일 때까지 모든 정무는 세자가 볼 거라 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허니, 과인은 이곳에 없는 것이다. 세자의 말이 곧 과인의 말이다.”

영의정이 부왕을 보고 말했다.

“전하...”

부왕이 영의정에게 말했다.

“과인은 말하는 것도 힘이 드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시오. 하고자 하는 일을 하고 나서 그때 하고자 하는 말을 하시오. 과인은 몸이 불편해 곧 일어설 것이오.”

부왕이 어지러운 듯 머리에 손을 대자 영의정은 못 본 척했다.

향이 대신들을 보며 말했다.

“야인과의 첫 화친은 북방을 튼튼히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거흘합족 뿐 아니라 다른 야인 부족과도 화친을 이뤄내야 합니다.”

영의정이 말했다.

“그렇사옵니다 저하...전하께서 말씀하신대로 토벌로 북방을 정벌했으니 이젠 화친으로 북방을 안전하게 지켜내야 하옵니다.”

향이 말했다.

“거흘합족의 족장에게 양인 신분과 가옥을 내주어야 합니다. 재물을 내어주고 살림살이를 준다 해서 그들이 조선인이 되는 게 아닙니다. 허니 조선인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재능을 펼칠 수 있게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형판대감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김종서가 말했다.

“소신의 생각도 저하와 같사옵니다.”

향이 말했다.

“그들의 무예가 뛰어나다 들었습니다.”

김종서가 말했다.

“그렇사옵니다 저하...신 김종서, 그토록 날랜 자들을 본 적이 없사옵니다.”

향이 말했다.

“허면 그 재능을 높이 사 무예를 가르치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금군들을 훈련시키는 무예별감을 맡기는 건 어떻겠습니까?”

김종서가 말을 하려는데 호조판서가 가로챘다.

“호조판서 김윤 아뢰옵니다. 그건 아니 될 말씀이옵니다 저하...형판께서도 처음 보는 무시무시한 실력이라면, 그들을 가까이 품는 건 위험한 일이옵니다.”

장문호가 거들었다.

“판한성부사 장문호 아뢰옵니다. 저하...짐승처럼 살던 자들이옵니다. 속을 알 수 없는데 어찌 가까이 두시려 하십니까. 멀리 지켜보시다가 처우를 결정해도 늦지 않을 거라 사료되옵니다.”

향이 말했다.

“멀리서 지켜본다 한들 속이 보이겠습니까! 본디 인간의 속은 보이는 게 아니지요, 그저 만들어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호조판서가 말했다.

“하오나 저하, 궁을 지키는 금군들의 무예별감은 아니 될 말씀이옵니다. 명을 거두어주십시오!”

몇몇 대신들이 입을 모았다.

“명을 거두어주십시오!”

장문호가 말했다.

“저하...뛰어난 자라고는 하나 위험한 자일 수 있사옵니다. 각별히 살피고 주의해야 하옵니다!”

향이 말했다.

“허면, 판부사대감께서 데리고 계시면 되겠습니다.”

장문호가 당황했다.

김종서가 말했다.

“소신의 생각도 저하와 같사옵니다. 금군보다는 한성부에서 관원들에게 무예를 가르치는 게 더 좋을 듯하옵니다.”

장문호가 말했다.

“하오나 저하...”

향이 웃으며 말했다.

“같은 검이어도 누군가에겐 지키는 검이 되고, 누군가에겐 해가 되는 검이 되는 법입니다. 그 검을 어찌 쓰느냐는 오직 검을 쥔 사람에게 달려있지 않겠습니까! 판부사대감께선 잘 하실 겁니다!”

장문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서...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저하...”

“판부사대감께서 자리를 마련하세요. 한성부에서 그들의 무예실력을 본 연후에 거취를 결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향이 영의정을 보며 물었다.

“영상대감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영의정이 웃으며 말했다.

“소신도 저하의 뜻과 같사옵니다.”

향이 김종서에게 말했다.

“판부사대감께서 역당을 쫓느라 노고가 많으십니다. 앞으로는 형조판서께서 많이 도와주셔야겠습니다.”

김종서가 말했다.

“신 김종서,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장문호가 못마땅한 얼굴로 김종서를 보았다.

향이 말했다.

“지난번 역병을 앓았던 민가에 관한 일입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여전히 방치 돼 있습니다. 임시로 마을 사람들이 데리고 있다고는 하나 언제까지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해서, 아이들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아이들을 맡아줄 집에는, 아이가 자립할 때까지 나라에서 구휼미를 보내줘야 하고, 때마다 아이들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영의정이 미소 지었다.

“백성을 생각하시는 저하의 마음에 감복할 따름이옵니다. 육조에 일러 그리 하도록 하겠사옵니다!”

“또한 그곳 민가 사람들은 역병을 앓았다 하여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해서 궁에서 필요한 물품을 그곳에서 조달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호조판서가 말했다.

“하오나 저하...역병을 앓았던 마을이옵니다. 그곳에서 나오는 물품을 어찌 지엄한 궁으로 들일 수 있단 말입니까!”

향이 말했다.

“허면 대감께서 그들을 귀히 쓰시겠습니까?”

호조판서가 대답을 못했다.

김종서가 말했다.

“신 김종서 아뢰옵니다. 형조에서 사람을 보내 그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고, 형조에서 그들의 물품을 받겠사옵니다.”

호조판서가 발끈해서 나섰다.

“과유불급입니다! 저하의 명이신데 마음이 앞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까 저어됩니다. 형판께선 형조의 일도 익혀야 하고, 야인과의 화친도 해야 하고 여러모로 바쁠 것입니다! 또한 이는 호조에서 마땅히 할 일입니다.”

호조판서가 향을 보며 말했다.

“저하! 호조판서 김윤 아뢰옵니다. 호조에서 사람을 보내 조사토록 하고 대책을 마련하겠나이다!”

향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하시지요 호판대감!”

영의정은 대신들을 쥐락펴락하는 향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의정이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채 부왕을 보며 말했다.

“전하...조정이 한 마음 한 뜻이 돼 서로 일을 하겠다고 하니, 이 또한 전하의 홍복이 아니겠사옵니까! 또한 세자저하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는 마음이 이토록 크고도 깊으시니, 이 또한 전하의 홍복이시옵니다. 더욱 옥체를 강건히 하소서!”

부왕이 실눈을 뜨고 영의정을 째려봤다.

영의정이 속으로 말했다.

‘전하. 선위는 아니되옵니다. 조선 건국 이래 첫 적장자 계승이옵니다. 세자저하께선 성군이 되실 분이시옵니다. 보위도 제대로 올라가셔야 하옵니다. 소신 목숨을 걸고 그리 할 것이옵니다!’

영의정이 향을 바라보았다. 향이 대신들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내가 걱정하는 건, 너다.’

단진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이 온통 향의 얼굴이었다.

새벽까지 천둥번개와 함께 무섭게 비를 쏟아붓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요하고 쾌청했다.

어젯밤 단진은 향과 함께 빗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필요 없었다. 향이 가고 나서도 단진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지만 어느 때보다 눈빛은 초롱초롱했다. 얼굴엔 여전히 멍이 들어있지만 입가에 미소가 걸려있었다.

청명한 하늘 아래 나뭇잎들이 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다. 살랑살랑 나뭇잎들이 움직일 때마다 단진의 마음도 살랑거렸다. 단진은 처음 느껴보는 설렘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좋았다. 마냥 좋았다. 너무 좋았다.

운종가에서 꽃비가 내리던 순간이 떠올랐다. 꽃잎이 단진의 눈물 젖은 뺨에 톡 내려앉았다. 향의 하얀 손이 다가와 단진의 얼굴에 붙은 꽃잎을 떼어냈다.

단진은 향의 손길이 머물렀던 볼에 손을 가져다댔다. 단진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단진은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셨다. 바람에서 가을 냄새가 났다. 단진은 너무도 행복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뿐이었다.

“야! 닭! 너 가면 안돼! 너 혼자 가면 나 박 내관한테 죽어!”

공두가 뒤뜰에 있는 뒷간에서 단진에게 소리쳤다.

단진은 달콤한 꿈에서 깬 얼굴이었다. 단진은 사방이 온통 푸르른 산이고 하늘은 맑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에 앉아 뒷간에 간 공두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진이 아침 일찍 향에게 가려고 나오는데 소환 내시가 달려왔다. 장공두가 쓰러져 있는데 단진을 찾는다고 했다. 소환 내시가 어찌나 다급히 말하는지 단진은 무조건 달려왔다. 와보니 공두가 뒤뜰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공두는 박 내관에게 야단맞는 게 두려워 단진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뒷간에 다녀올 동안 기다리라고 하고는 함흥차사였다.

단진이 더는 기다릴 수가 없어 벌떡 일어섰다.

“야 나원빈, 나 먼저 갈래!”

이때 공두가 담벼락을 잡으며 걸어왔다. 공두의 멍든 얼굴은 누렇게 변해 땀에 젖어 있었고 다리가 풀려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단진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원빈! 너 왜 그래?”

공두가 휘청하며 쓰러지려 하자 단진이 그를 잡았다.

“닭...박 내관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나 내 방에 데려다 줘...”

단진은 공두가 걱정이 돼 서두르려 했지만 축 늘어지는 공두를 부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진의 얼굴에도 연신 땀이 흘러내렸다.

가까스로 공두의 처소에 이르렀다. 담벼락 앞에 긴 마루가 있고 여러 칸의 방이 있었다. 공두의 처소는 맨 끝에 있었다. 공두의 방은 작은 창이 있고 문갑 위에 밧줄과 이불 한 채가 있었다. 단진이 서둘러 이불을 펼치는데 그 속에 감춰둔 곶감이 쏟아졌다. 단진은 공두를 눕히고 창을 열어 바람이 들어오게 했다. 밤새 비를 맞아 푸르른 나뭇잎이 바람에 흩날렸다.

공두는 다 죽어가면서도 연신 입을 나불댔다.

“닭아...너는 아니? 우산이 파라솔인걸...이...이렇게 죽을 줄 몰랐어...”

“엄살 좀 피우지마, 배탈로 안 죽어!”

“나는 네가 싫어...초등학교 때 너랑 짝꿍이 될 때부터 싫었어...왜 나처럼 귀티 나는 분이, 너처럼 싼티 나는 애랑 짝꿍이 돼서...결국 너 때문에 내가 죽는 거야...너는 처 웃고...나는 처 맞고...결국...”

공두가 갑자기 눈을 뒤집어 까고 배를 움켜잡았다. 공두는 너무 고통스러워 짐승 같은 신음소리를 냈다. 단진은 놀라고 당황해 보고만 있었다. 공두는 아팠던 적이 거의 없었다. 너무 많이 먹어 배탈이 난 걸 빼고는 감기도 걸리지 않는 체질이었다.

공두가 땀범벅이 된 얼굴로 단진을 잡고 애원했다.

“사...살려줘 봄아...봄아...나 좀 살려줘...”

단진은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 후다닥 뛰쳐나갔다.


부왕이 편전 밖으로 나왔다. 부왕은 잠시 편전 쪽을 돌아보았다. 향이 어좌에 앉아 성군이 되고 태평성대를 이룰 거란 생각에 내심 뿌듯했다. 또한 향의 옆에 김종서를 데려다 놓으니 든든했다. 부왕은 돌아가신 성상을 떠올렸다. 성상께선 자신을 어좌에 앉히기 위해, 사직을 바로 세우고 조선을 굳건히 하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히시는 걸 마다하지 않으셨다. 이제야 조금이나마 성상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성상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한 왕이었고 아버지였다. 부왕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김 내관이 걱정스레 보았다.

“원손이 보고 싶구나.”

부왕이 어가에 오르려다 한편에 서 있는 박 내관을 보았다. 김 내관이 알아채고 박 내관을 불렀다. 박 내관이 부왕의 앞에 와 예를 갖추었다.

부왕이 박 내관을 보며 말했다.

“네게 물어볼 게 있다!”

박 내관은 긴장이 돼 심장이 벌렁거렸다.

“하문하시옵소서 전하!”

부왕이 말을 하려는데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박 내관님! 박 내관님!”

부왕이 단진을 보았다. 박 내관은 아무 생각 없이 봤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단진이 치마를 잡고 날쌔게 달려오고 있었다.

“박 내관님! 박 내관님!”

박 내관은 입이 쩍 벌어져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단진이 박 내관 앞에 서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크...큰일 났습니다!”

김 내관이 박 내관을 야단치듯 보았다. 박 내관이 김 내관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하라고 눈으로 겁박했지만 단진은 알아채지 못했다.

단진은 또다시 말했다.

“큰일 났습니다!”

김 내관이 박 내관을 보았다.

“전하께서 계시는데 이 무슨 짓이냐!”

박 내관이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단진은 너무도 다급한 마음에 박 내관만이 보일 뿐이었다.

“큰일 났습니다. 장공두가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어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박 내관이 조용히 말했다.

“조용히 하거라.”

“지금 조용히 할 때가 아닙니다.”

박 내관이 이를 악물고 조용히 말했다.

“조용히 하라질 않느냐!”

“조용히 하다 장공두가 죽으면 박 내관님이 책임지실 겁니까?”

김 내관이 뭐라고 하려는데 부왕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부왕이 단진을 보았다.

단진은 그제야 박 내관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 단진의 눈에 부왕이 들어왔다. 광화문 사거리에 앉아있는 세종대왕이 살아난 것 같았다. 단진은 너무 놀라워 눈을 말똥말똥 뜨고 부왕을 보았다.

“우와~세종대왕이시다...키가 진짜 크시네요...”

김 내관이 야단쳤다.

“감히 어디서 고개를 드느냐! 어서 숙이지 못할까!”

단진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부왕이 단진을 보며 말했다.

“고개를 들거라!”

단진은 그대로 고개를 비스듬히 해서 박 내관을 보았다. 박 내관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단진이 고개를 들고 부왕을 보았다. 단진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전하. 처음 뵙겠사옵니다. 동궁전 나인 홍단진이라 하옵니다!”

박 내관이 입을 다물라고 단진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부왕이 박 내관을 보고 말했다.

“이 아이에게 물으면 되겠구나.”


부왕이 조금 걸어갔다. 단진과 박 내관, 김 내관이 뒤를 따랐다. 부왕은 나무 그늘 아래에 섰다. 푸르른 나무 사이로 햇살이 들어왔다. 밤새 빗물을 먹은 나뭇잎은 더욱 싱그러웠다. 부왕이 단진을 살폈다. 고운 얼굴에 눈에는 총기가 가득했고 눈빛이 단단하고 깨끗했다. 맑은 하늘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햇살이 반짝일 때마다 단진의 눈빛도 반짝였다.

부왕이 단진의 멍든 얼굴을 보며 말했다.

"얼굴은 어찌해서 그리 된 것이냐?”

“넘어졌사옵니다!”

“넘어져 생긴 상처가 아닌 것 같구나.”

“땅에만 넘어져 다치는 게 아니옵니다. 때론 사람에게 잘못 넘어져 다칠 때도 있사옵니다.”

부왕이 단진을 잠시 보다가 말했다.

“썩은 뿌리가 있다, 허면 너는 어찌할 것이냐?”

단진은 뜻밖의 질문에 놀라 박 내관을 보았다. 박 내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동궁전의 일이 새어나간 것이다. 박 내관은 마른침을 삼키고 정신을 차리고는 단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진은 부왕을 잠시 보다가 대답했다.

“다 도려내야 하옵니다. 그냥 두면 성한 뿌리마저 썩게 할 것입니다.”

“허면, 나무가 휘청일 텐데!”

“그렇지 않사옵니다.”

“어찌해서?”

“소인이 받치고 있을 것이옵니다!”

부왕이 단진을 보다가 말했다.

“그냥 나무가 아니다. 거목이다. 헌데 어찌 받치고 있겠단 것이냐?”

“거목이라면 소인은 더 큰 바위가 돼 받치고 있을 것이옵니다. 사람은 미약해 보이지만 마음은 위대하옵니다. 해서 한 사람의 마음을 얻으면 태산을 얻는 것보다 더 크다 하지 않사옵니까! 나무를 받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태산이 되는 것이옵니다!”

부왕은 말없이 보았다.

단진이 말했다.

“또한 나무를 받치고자 하는 사람이 소인이 전부가 아닐 것이옵니다.”

부왕이 말했다.

“가보거라. 바쁘다 하지 않았느냐!”

단진이 해맑게 웃었다.

“예 전하. 소인은 바빠서...헌데 박 내관님을 모시고 가도 되겠지요?”

박 내관이 부왕의 발아래 납작 엎드렸다.

“전하...소신을 죽여주시옵소서...죽여주시옵소서...”

부왕은 박 내관에게 단진을 데리고 가라고 했다. 박 내관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단진을 데리고 서둘러 걸어갔다.

부왕은 단진의 뒷모습에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저 아이로구나...”

김 내관이 은밀히 답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이때 편전에서 향이 나왔다. 향이 걸어가려다 단진을 보고는 멈춰섰다. 단진은 박 내관과 서둘러 가고 있었다. 향은 단진을 보고 있었다. 대신들이 나오며 향에게 인사를 했다. 향은 인사를 하고서도 단진에게 눈길을 두고 있었다. 푸르른 나무 사이로 햇살이 반짝였다.

부왕이 향과 단진을 번갈아 보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홍단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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