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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연재수 :
95 회
조회수 :
215,229
추천수 :
1,167
글자수 :
809,561

작성
20.10.0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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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글자
23쪽

숙원 홍씨 60. 무예시합이 끝나고

DUMMY

숙원 홍씨 60. 무예시합이 끝나고


백겸은 한성부 앞을 서성였다. 단진이 걱정이 앞서 경복궁 서문으로 향했지만 창이만 사지에 혼자 남겨둔 것 같아 발길이 무거웠다. 단진은 궁에서 나오지 않을 수도 있고 나온다 해도 막을 수 있었다.

창이가 한성부에서 자객을 상대하는 것도 단진이 때문이었다. 백겸은 그 책임을 창이에게만 지게 할 수는 없었다. 백겸이 자객을 상대해야 했고 이향을 지켜야 했다. 결국 도화에게 단진을 부탁하고 서둘러 한성부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향이 무사히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안도했다. 하지만 한성부에 와 보니 창이가 없었다. 주변을 다 살펴봐도 창이 뿐 아니라 삼년이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나비문신이 나타난 건가 싶어 걱정하는데 창이가 보였다. 한성부 입구를 지키는 관원들 사이로 키가 껑충 큰 창이가 나왔다.

관원들이 가로막은 창을 거두며 길을 열어주었다.

백겸이 창이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독고준! 너 뭐야! 왜 거기서 나와?”

창이는 백겸을 보고는 후다닥 계단을 내려왔다.

“넌 왜 여깄어? 봄이는? 봄이는 어쩌고?”

“태희 있잖아! 그리고 문종 가는 거 봤어. 봄이 이제 괜찮아!”

창이는 안도했다.

백겸이 창이의 얼굴에 난 상처를 손끝으로 건드렸다.

“이거 왜 이래? 누구랑 싸웠어?”

창이가 백겸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이러지 마. 이런다고 내 마음 너에게 줄 수 없어. 알잖아. 이해해줘!”

백겸은 어이없어하며 손을 잡아 뺐다.

“짝사랑 얘기 그만 좀 해.”

창이가 눈을 부릅떴다.

“짝사랑 아니랬지!”

“너 뇌 두고 온 거 맞어! 뇌 두고 온 김에 마음도 두고 오지 그랬냐!”

창이는 백겸의 목을 팔로 조르며 짝사랑이 아니라고 했다. 입구를 지키던 관원들과 주변에 있던 무관들이 백겸과 창이를 보며 찌푸렸다.

창이는 백겸에게 짝사랑이 아니라고 인정하라고 하다가 갑자기 멈췄다. 창이의 팔에 힘이 풀리자 백겸이 빠져나왔다. 창이는 멍하니 한곳을 보고 있었다. 백겸이 창이의 시선을 따라갔다.

한성부에서 검술시합이 열린다는 걸 알고 몰려와 아직도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세자저하와 눈이 마주쳤다면서 왁자지껄 자랑하고 있었다.

나무 아래에 아이들이 나뭇가지를 들고 검술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얍!” “얍!” 소리가 들렸다. 나무에 기대앉아 아이들을 보고 있는 사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 승무가 서 있었다.


절벽 끝에 백겸과 창이가 서 있었다. 승무가 증오에 가득 차 소리쳤다.

‘백겸 우리의 원수, 네놈의 껍질을 벗겨 죽일 것이다!’

‘창이 이 배신자! 네놈을 죽여 형제의 원한을 풀어줄 것이다!’

승무의 화살이 날아와 창이의 왼쪽 어깻죽지에 박혔다.


승무의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승무는 또다시 돼지 수레를 끌던 놈을 놓쳤다. 놈은 미행당하는 걸 금세 눈치챘고 발이 어찌나 빠른지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놈을 쫓아 형제들을 죽인 놈들을 잡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다른 날을 기약하며 한성부로 돌아왔는데 눈앞에 백겸과 창이가 있었다. 회색 무사복을 입은 백겸과 창이가 멀쩡한 얼굴로 살아있었다.

화살에 맞아 얼굴이 으깨진 창이의 시신이, 통나무에 축 늘어져 있던 백겸의 시신이 떠올랐다.

속았다.

그리고 당했다. 이놈들이 형제들을 죽인 놈들이었다. 승무의 피가 빠르게 돌면서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창이가 알아채고 검을 잡으려 했지만 빈손이었다. 창이가 백겸의 검을 뽑으려 했다. 백겸은 승무에게 시선을 둔 채로 창이의 팔을 잡았다.

“여기선 안돼!”

아이들이 “얍!” “얍!” 검술 흉내를 내며 한성부 앞으로 왔다. 관원들이 아이들에게 고함치자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다시 나무 아래로 갔다. 한성부를 지키는 관원들의 수는 여전히 많았고 들고 나는 관원들과 겸사복들이 많았다. 겸사복 네 명은 나무 그늘에 서서 아까의 시합에 대해 떠들었다. 겸사복이 창이를 가리키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계단 위에는 용무용과 호와 결, 석이 보고 있었다.


용무용은 창이를 죽이기로 결심했지만 한성부 안에서는 곤란했다. 해서 창이를 쫓아 나오는데 백겸이 있었다. 백겸과 창이를 보고 용무용은 그대로 멈춰섰다.

용무용은 더는 놀라지도 않았다.

용무용은 이향에게 보기 좋게 당했다. 이향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무서운 자였다. 이향이란 거대한 적을 상대해야 했고 창이가 만들어놓은 살얼음판을 걸어야 했다. 예상치 못한 진양까지 진을 치고 있었다. 거기에 언제 터질지 모를 백겸까지 나타났다.

사면초가였다. 허나 용무용은 위기에 처할수록 강해졌다. 용무용은 무서우리만큼 침착해졌다.


한성부 계단 위에는 용무용이, 계단 아래에는 백겸과 창이가 있었고 그들 앞에는 승무가 있었다. 서로를 보고만 있을 뿐 미동도 없었다.

용무용은 형제들을 죽인 정체불명의 자객이 백겸과 창이라는 걸 확신했다. 보이지 않는 작은 적을 상대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큰 적을 상대하는 편이 나았다.

용무용이 계단을 내려와 백겸과 창이의 뒤에 섰다. 호와 결, 석이 검을 뽑을 자세를 취했다.

용무용은 계산했다. 나무 그늘 아래 있는 겸사복들과 담장에 기대 있는 관원들, 입구를 지키는 관원들이 모두 무예시합의 승자인 창이를 보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 용무용은 득과 실을 빠르게 계산했다. 어차피 백겸과 창이가 입을 연다면 대의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이놈들을 베고 나서 책임을 지고 죽어야 한다 해도, 남은 형제들이 있었다. 또한 빠져나갈 구멍은 있었다. 지금 이놈들을 베고 나서 순포와 함께 엮어 던져주면 될 일이었다.

문제는 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 였다.

승산은 없었으나 지금 당장 입을 막을 수는 있었다. 또한 창이는 빈손이었다.

용무용의 계산이 끝났다. 용무용이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는데 백겸이 창이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놈을 그냥 죽이면 안돼. 알아내야 돼. 저놈들의 정체.”

용무용은 움직임이 없었다.

창이가 승무에게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그렇다고 그냥 보내줄 수는 없어. 저놈들이 언제 다시 자객을 보낼지 몰라. 나비문신, 저놈들의 대의가 무엇인지 알아내야 돼. 그래야 봄이가 안전해!”

창이는 계산했다. 달리듯이 세 걸음을 가서 베면 될 일이었다. 허나 죽인다면 알아낼 수 없었다. 또한 관원들에게 잡히기라도 하면 창이는 손발이 묶이는 셈이었다. 창이는 망설였다. 그러다 등 뒤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창이 뿐 아니라 백겸도 알아채고 뒤를 힐끗 봤지만 용무용 일행이었다.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승무에게 시선을 돌렸다. 주변엔 무관들 천지라 살기가 느껴지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백겸과 창이는 승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승무가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이는 순간 그들은 튀어나갈 것이다. 그들은 승무가 도망치길 기다리고 있었다.

승무는 용무용이 결단을 내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용무용의 계산이 흔들렸다. 용무용이 승무를 보았다. 승무 옆으로 가마 두 채가 지나가고 있었다. 용무용은 잠시 망설이다가 승무에게 신호를 보냈다.

때마침 김가가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네 이놈! 낭만적인 야생마인지 창이인지 하는 네놈 말이다!”

창이와 백겸이 동시에 보았다.

김가가 은가, 양가와 함께 장검 두 자루를 들고 내려왔다. 김가는 용무용을 힐끗 보고 창이에게 다가갔다.

창이와 백겸이 다시 앞을 봤지만 승무가 사라졌다. 창이와 백겸이 사방을 살폈지만 지나가는 가마만 보일 뿐 승무는 보이지 않았다.

창이와 백겸이 서둘러 가려는데 김가가 창이를 잡고 노여워했다.

“네 이놈! 감히 저하께서 하사하신 검을 이리 함부로 두고 다녀서야 되겠느냐?”

창이가 김가의 손을 떼고 가려고 하자 김가가 막아섰다.

백겸이 창이를 잡고 귀엣말했다.

“쫓지 마. 가서 우리가 살아있는 걸 알리게 그냥 두자!”

창이가 백겸을 보았다. 백겸이 또다시 말했다.

“차라리 잘됐어. 이제 우리에게 달려들 거야. 그러니까 기다리면 돼. 잘못하다간 우리가 쫓기게 돼.”

백겸이 겸사복들을 눈으로 가리켰다.

그들의 심각함을 알 리 없는 김가가 창이에게 호통을 쳤다.

“이놈이 귓구멍이 막힌 것이냐?”

창이는 그제야 김가를 보았다. 김가는 창이의 실력이 뛰어남을 알고 있기에 더욱 기선을 제압하려 하고 있었다.

“네놈이 우리 대군마마께 돈을 갚기 위해 대련에 나섰다고는 하나, 네놈은 이제 우리 대군마마의 호위무사다. 네놈의 잘못된 행동이 우리 대군마마께 해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저하께서 내리신 검이다. 네놈 목숨보다 중한 것이란 말이다!"

은가와 양가는 김가의 옆에서 기싸움 하듯 창이와 백겸을 보고 있었다.

창이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잠시 맡겨둔 것이오.”

창이가 검을 받자 김가가 물었다.

“헌데, 네놈은 검술을 누구에게 배운 것이냐?”

용무용이 창이를 보았다. 창이에게 검술을 가르친 건 용무용이었다.

창이가 말했다.

“모르오.”

“모른다?”

“일전에도 대군마마께 말씀드렸소. 역병을 앓고 일어나 기억이 나질 않소.”

용무용은 보고 있었다.

김가가 어이없다는 듯이 보았다.

“누구한테 배운지는 기억이 나질 않고, 검술은 기억 난다? 참으로 요상하구나.”

김가의 눈길이 백겸을 향했다.

“네놈도 한양기방 앞에서 본 적이 있다. 허면 네놈도 역병을 앓고 나서 기억이 나질 않느냐?”

백겸이 말했다.

“그렇소.”

김가와 은가, 양가가 껄껄 웃어젖혔다.

백겸은 진양의 무사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백겸이 싸늘하게 말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 게 댁들한테 조롱당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이놈 저놈 하지 마시오. 난 그쪽 모르니까.”

“이놈이 감히.”

은가가 욱해서 백겸에게 달려들려 하자 김가가 잡았다.

백겸이 창이와 함께 걸어갔다. 용무용이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용무용과 호와 결, 석이 운종가로 들어섰다. 용무용은 말이 없었고 호와 결, 석은 용무용에게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용무용의 다음 지시를 기다릴 뿐이었다.

가을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서인지 운종가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걸을 때마다 마주 오는 사람들과 부닥치지 않기 위해 몸을 피해야 했다. 그러다보면 뒤에서 오는 사람이나 상점 앞에서 구경하는 사람들과 부닥쳤다.

그런 운종가에 용무용과 호와 결, 석이 걸어오자 사람들은 그들에게 길을 내주었다. 눈으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사람의 육감만큼 뛰어난 건 없었다. 사람들은 용무용 일행이 아무 해도 끼치지 않았지만 두려운 존재란 걸 알아챘다. 눈만 마주쳐도 행여나 죽임을 당하게 될까 싶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비단으로 눈을 가리고 괜히 딴청을 부리기 일쑤였다. 아이들은 어미의 치마폭으로 숨었다.

용무용은 그들을 보았다. 용무용은 저들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허나 저들은 용무용이 두려워 지레 겁을 먹고 피하고 있었다. 언제든 죽일 수 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백겸과 창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언제든 용무용에게 검을 겨눌 수는 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해서 용무용은 본능적으로 피를 보기보다는 조용히 자리를 피하는 결정을 내린 건지도 몰랐다.

용무용은 육감을 믿었다. 짐승 같은 육감만큼 정확한 건 없었다.

백겸과 창이가 모른 척하며 말을 흘린 건, 지금은 자신들이 해가 되지 않으니 싸울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인가. 아니면 진짜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인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용무용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한놈도 아닌 두놈이 다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용무용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놈들의 수를 읽을 수가 없었다.

허나 믿는다고 가정해보면 수가 보였다.

창이라면 절대 백겸과 다정할 수는 없었다. 창이라면 순포를 죽였을 것이고 창이라면 절대 검을 뽑다가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창이라면 절대 배신하지 않았을 것이다.

백겸은 충신이었다. 백겸이라면 용무용의 존재를 안다면 이향을 한성부에 내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백겸이라면 김종서에게 보고했을 것이다. 김종서가 다 알면서 자신을 이향의 눈앞에 둘 리 없었다. 어불성설이었다.

용무용은 김종서 집의 대문으로 들어섰다. 김종서를 봐야겠다는 생각에 이끌려 서둘러 돌아왔다. 김종서를 만나보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허나 김종서는 한성부에서 바로 형조로 가서 집에는 없었다.

용무용은 마음을 비우고 다시 생각을 해야 했다. 생각을 할수록 점점 더 믿기 힘든 게 사실 같았다. 별채로 들어선 순간 그곳에 답이 있었다.

미친 마님 인옥이 마루에 앉아 발을 대롱대롱 흔들며 담장너머를 보고 있었다.

용무용의 가슴이 흥분으로 들썩였다.


향과 진양, 안평이 한성부 관아에서 나왔다. 박 내관과 무사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향은 진양, 안평과 함께 걷다가 무예시합 참가자들이 모두 돌아갔을 때 즈음해서 다시 한성부로 돌아왔다. 농가 부부와 왈패들의 시신을 살피고 검시 결과를 확인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향은 무고한 백성의 죽음에 소리 없이 분노하고 있었다.

향은 어제 살인사건 보고를 받고 왠지 괘서사건과 연관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진양의 사병의 죽음을 떠올리고 진양에게 시신을 살펴보도록 했다.

진양은 느낄 수 있었다. 이미 죽은 자들은 말을 할 수 없지만 그들의 몸에 난 칼자국이 말하고 있었다. 검으로 벨 때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고 정확했다. 괴문서를 쓴 자들의 소행이 분명했지만 지금 진양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무예시합이 끝나고 향은 진양과 안평에게 잘했다고 칭찬했다. 허나 진양은 진검을 뽑아든 순포로 인해 저하를 곤경에 빠뜨린 것 같아 몸 둘 바를 몰랐다. 여전히 대신들의 비난하는 소리가 귓가에 머물러 있었다.

안평 역시 무예시합에서의 일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저하께 누가 되고 말았다. 대군으로서 가지 말았어야 했나 하는 후회마저 들었다.

향과 진양 안평이 국밥집 방에 둘러앉았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방문의 낡은 한지로 빛이 들어왔다. 그 빛 또한 침묵만큼 무거웠다.

향이 물었다.

“어찌 보았느냐?”

진양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향이 다시 물었다.

“진양, 어찌 보았냐고 물었다.”

진양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소신의 생각으로는 이번 살인사건과 설가의 죽음이 모두 연관된 듯하옵니다.”

안평이 말했다.

“저하, 이는 너무도 잔인무도한 짓이옵니다. 어찌 죄 없는 백성을 이리도 참담하게 죽일 수 있단 말이옵니까! 왈패들 열둘과 선량한 농가의 부부가 죽었사옵니다.”

향이 말했다.

“이번 사건을 맡은 문 판관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부부는 원한을 사거나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고. 워낙 인심도 심성도 좋아 모든 사람들이 좋아했다고 하더구나. 왈패들은 적이 많으나, 다른 왈패들은 이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지 않다 했다. 사건이 일어난 날에 본 자는 아무도 없었고, 어찌해서 왈패들과 부부가 같은 날, 같은 자들에게 당했는지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진양과 안평의 표정은 무거웠다. 진양은 설가가 떠올랐다. 설가를 죽이고, 감히 저하 앞에서 진검을 휘두르던 순포를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었다.

안평이 말했다.

“헌데 저하. 아까 문 판관이 한 말 중에 이상한 점이 있사옵니다.”

향이 보았다.

“부부가 죽기 얼마 전에, 비가 많이 오던 날에 누군가 돼지를 집 앞에 떨어뜨리고 갔다고 했사옵니다. 누군가 수레에 돼지를 싣고 가다가 떨어뜨린 것 같다고 하던데. 어찌해서 그 비오는 날에 돼지를 싣고 그 길을 지나갔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사옵니다. 또한 그 길을 따라가면 왈패들이 사는 곳이 나온다 했사옵니다.”

“나도 그 점이 이상하다 여겼다. 무언가가 다 연결돼 있는 듯 보이지만 아무것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구나.”

향은 잠시 있다가 진양에게 말했다.

“진양은 듣거라. 너는 이번 사건을 네 사병의 죽음과 연관시켜 조용히 알아보도록 하거라. 괘서사건이 아닌, 네 사병의 죽음을 파헤치는 것이다. 괘서사건은 입에 올려선 아니 된다. 행여나 괘서사건을 쓴 자들의 소행인 것 같다고 여기면 조정 대신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고, 그리되면 죄 없는 많은 백성이 죽어나갈 것이다.”

“예 세자저하.”

진양의 눈에 근심이 가득했다. 향은 진양을 잠시 보았다. 안평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성부에 들렀을 때도 그들은 향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향은 진양과 안평이 무얼 생각하는지, 무슨 마음인지 다 알고 있었으나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향이 안평을 보았다.

“안평은 공양왕의 후손을 은밀히 찾도록 하거라. 소문이 어디서 시작됐는지를 밝혀 거슬러 가다 보면, 어딘가에 흔적이 보일 것이다.”

“예 저하!”

향이 진양을 보았다.

“그 간자라는 자는 그대로 두도록 하거라.”

“예 저하!”

진양은 잠시 있다가 향의 앞에 엎드렸다. 더는 마음이 무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향이 진양을 보았다.

“저하. 오늘 소신의 잘못으로 저하를 곤경에 빠뜨리게 하였사옵니다. 소신이 더 신중했어야 했사옵니다. 그런 위험천만한 자를 저하의 앞에 서게 하는 게 아니었사옵니다. 저하. 어리석은 소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향이 일어섰다.


향은 궁을 향해 걸었고 진양과 안평이 양 옆에서 걸어갔다.

박 내관은 키가 큰 향을 사이에 두고 걸어가는 진양과 안평을 보며 흐뭇해했다. 박 내관은 향과 대군들이 있으면 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감청색에 금빛 문양이 들어간 무사복을 입은 향과, 자주색 무사복을 입은 진양, 푸른색 무사복을 입은 안평이 걸어가자 모든 사람들이 홀린 듯이 보았다.

향의 눈빛은 고귀했고 진양의 눈빛은 살아 있었고 안평은 깨끗했다.

향이 궁 앞에 서서 수문장에게 모두를 물리라고 했다. 모두가 멀찍이 떨어졌다.

해가 서서히 지고 있었다. 석양이 하늘의 흰 구름을 물들이고 경복궁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석양이 향에게 머물렀다.

향이 궁을 등지고 섰다. 그 앞에 진양과 안평이 있었다.

향이 잠시 보다가 말했다.

“나는 이 자리에서 너희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에게 나를 돕는 일은 목숨을 내놓아야 할 일이라 했다. 어떤 자리도 명예도 권세도 없을 것이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이라 했다.”

진양과 안평이 향을 보았다.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너희에게 비난이 쏟아질 것이고, 잘나면 잘난 대로 이간과 음모가 너희를 향할 것이라 했다. 아무 공도 없을 것이고, 한 번의 실수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했다. 기억하느냐?”

진양이 대답했다.

“저하, 어찌 기억하지 못할 수가 있겠사옵니까! 소신, 이 가슴에 새기고 있사옵니다!”

안평이 말했다.

“소신,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향이 진양을 보았다.

“짐승들도 제 새끼를 구하기 위해 죽을 줄 알면서도 끝까지 덤벼든다, 말 못하는 짐승도 그리 사는데 대군의 삶은, 짐승만도 못한 삶이라 했다!”

향이 안평을 보았다.

“종친은 그저 잘 먹고 잘 놀기만 하면 된다. 아무것도 해선 안 된다. 평범한 반가의 자식으로 태어나지 못한 게 한스럽다 했다.”

향이 진양을 보았다.

“진양은 사내로 태어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느니 하루를 살아도 가슴이 원하는 일을 하며, 나와 조선을 위해 기꺼이 죽겠다 했다! 나의 신하로 죽겠다 했다!”

향이 안평을 보았다.

“안평은 대군으로서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다 내려놓겠다 했다. 권력도 명예도 다 원치 않는다 했다. 나의 신하로 죽겠다 했다!”

진양과 안평은 긴장해서 향을 보고 있었다.

향이 엄히 말했다.

“헌데 너희들이 나의 신하로 죽겠다 한 게 고작 이 정도더냐?”

진양과 안평은 놀라 보았다.

향이 진양을 보며 말했다.

“나의 손과 발이 되라 했다. 헌데 어찌 작은 바람에도 이리 휘청이는 것이냐? 해서 어찌 나의 손과 발이 될 수 있단 말이냐? 진양, 내가 너를 잘못 본 것이냐?”

진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가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것이냐?”

진양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저하. 소신이 너무도 부족하여 잠시 흔들렸사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하. 소신, 앞으로 저하의 신하로서 굳건히 버티겠나이다. 모진 비바람이 불어도 견디겠나이다! 더한 것이 온다 해도 소신은 버틸 것이옵니다! 소신, 저하의 신하로 죽을 것이옵니다!”

진양의 눈에 빛이 났다.

안평이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저하, 소신 역시 어리석고 유약한 마음을 품었사옵니다. 저하. 소신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소신, 저하의 눈과 귀가 돼 저하의 신하로 죽을 것이옵니다!”

석양이 더욱 붉게 물들었다.

향이 진양과 안평을 보며 말했다.

“일어서거라.”

진양과 안평이 일어섰다.

향이 말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느니라. 너희들이 가야 할 고단한 길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허니, 더욱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할 것이다. 여기저기 바람이 불어 너희들을 흔들어대면, 너희들은 더욱 강하게 버틸 힘을 만들어야 하고. 여기저기 화살이 쏟아지면, 너희들은 더욱 강한 방패로 막아야 할 것이다.”

진양과 안평의 눈에 빛이 났다.

“나의 신하로 죽겠다 했느냐? 아니다. 나의 신하로 죽기를 각오하기보다, 나의 신하로 살기를 각오하거라. 나의 신하로 살아 남거라.”

향이 진양의 눈을, 안평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너희들의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저하...”

진양과 안평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향이 말했다.

“강해지거라. 단단해지거라. 그래야 내 길을 따라올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너희들이 내 신하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할 수 있겠느냐?”

진양과 안평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예 세자저하! 진양, 목숨을 걸고 그리하겠나이다!”

“예 세자저하! 안평, 목숨을 걸고 그리하겠나이다!”

향이 진양과 안평의 어깨에 손을 얹고 미소 지었다.

석양이 향과 진양과 안평에게 가장 아름다운 빛을 내어주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백겸과 창이가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 속에 향이 있었다. 석양이 향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향은 석양보다 더 아름답고 강인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백겸과 창이는 넋이 나간 듯 보고 있었다. 백겸은 꿈같은 이 장면에 너무도 벅차올라 가슴이 두근거리고 현기증이 났다.

창이는 뜨겁고 아름다운 열기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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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원 홍씨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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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숙원 홍씨 67. 단진의 깊은 슬픔 +2 20.11.30 1,829 10 22쪽
66 숙원 홍씨 66. 단진, 진양에게 돌격하다 +2 20.10.29 1,892 10 16쪽
65 숙원 홍씨 65. 단진, 한양 기방에 들다 +3 20.10.26 1,929 10 26쪽
64 숙원 홍씨 64. 단진, 궁 밖으로 나오다 +2 20.10.22 1,934 11 22쪽
63 숙원 홍씨 63. 비밀의 열쇠, 백겸과 창이 +1 20.10.19 1,948 11 21쪽
62 숙원 홍씨 62. 진양, 비밀의 단서를 찾아내다 +2 20.10.15 1,953 11 19쪽
61 숙원 홍씨 61. 단진을 향한 애틋함 +2 20.10.12 1,961 11 21쪽
» 숙원 홍씨 60. 무예시합이 끝나고 +3 20.10.08 1,974 13 23쪽
59 숙원 홍씨 59. 무예시합-3 +4 20.10.05 1,990 12 22쪽
58 숙원 홍씨 58. 무예시합-2 +2 20.09.24 2,030 10 21쪽
57 숙원 홍씨 57. 무예시합-1 +2 20.09.21 2,047 10 20쪽
56 숙원 홍씨 56. 이향, 무예시합에 가지 않기로 하다 +1 20.09.17 2,065 10 17쪽
55 숙원 홍씨 55. 단진의 간절함 +1 20.09.14 2,090 9 21쪽
54 숙원 홍씨 54. 향을 지키려는 단진 +2 20.09.10 2,118 10 18쪽
53 숙원 홍씨 53. 나비문신 +2 20.09.07 2,139 10 19쪽
52 숙원 홍씨 52. 죽이려는 자, 지키려는 자 +1 20.09.03 2,164 11 21쪽
51 숙원 홍씨 51. 단진, 향의 위험을 알아채다 +1 20.08.31 2,189 11 20쪽
50 숙원 홍씨 50. 무예시합 날이 정해지다 +2 20.08.27 2,203 11 22쪽
49 숙원 홍씨 49. 여인 홍단진의 결심 +1 20.08.24 2,229 11 20쪽
48 숙원 홍씨 48. 백겸과 창이, 진양대군을 만나다 +2 20.08.20 2,269 11 21쪽
47 숙원 홍씨 47. 목멱산의 결의 +4 20.08.17 2,300 11 21쪽
46 숙원 홍씨 46. 계유정난을 막아라 +2 20.08.13 2,335 11 20쪽
45 숙원 홍씨 45. 단진의 고백 +2 20.08.10 2,349 11 20쪽
44 숙원 홍씨 44. 홍단진, 주상전하를 만나다 +2 20.08.06 2,364 12 18쪽
43 숙원 홍씨 43. 백겸과 창이 한양 기방에 들다 +1 20.08.03 2,388 11 16쪽
42 숙원 홍씨 42. 비 오는 밤, 사라진 자들 +3 20.07.30 2,401 11 18쪽
41 숙원 홍씨 41. 이향의 마음 +3 20.07.27 2,427 11 16쪽
40 숙원 홍씨 40. 꽃비 그리고 고려 제일 무사 창이, 조선 제일 무사 백겸 +1 20.07.23 2,444 11 20쪽
39 숙원 홍씨 39. 이향, 김종서와 야인을 만나다 +2 20.07.20 2,465 11 19쪽
38 숙원 홍씨 38. 운명적인 만남 +2 20.07.16 2,499 1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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