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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craft 님의 서재입니다.

난 당하고는 못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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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craft
작품등록일 :
2021.05.17 12:01
최근연재일 :
2021.10.06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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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6,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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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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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8. 너만 빼고 모두 즐거워 [4]

DUMMY

도적단으로 세뇌되었다 해방된 마을 주민들의 기억은 먹고 살 길이 없던 마을 주민들을 일손이 필요한 ‘연금술사 우’가 고용한 것으로 변경되었다.


“오늘은 중요한 이야기를 위해 모두를 불러 모았다.”

“어, 혹시······ 그만두시려는 겁니까?”

“그래. 그만두려고.”


일우의 말에 ‘고용된 주민’들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그 동안 일자리가 있어서 괜찮았지만 이제 어쩌지······.”

“마을로 돌아가도 당분간은 먹고 살 길이······.”


메모리 임플란트 기술을 이용해 교체된 기억이긴 했지만, 마냥 거짓은 아니었다. 최면으로 도적 생활을 하는 사이 마을의 농업은 완전히 박살났고, 한 해 농사를 망쳐버렸다.

그 원인을 흉작과 병충해로 바꿔놓은 것이지만, 아무튼 이대로 돌아간다면 그들은 꼼짝없이 굶게 된다는 건 변함이 없다.

허나 일우는 이 저택 문을 닫을 생각이 없었다.


“오늘부로 고기 연구소는 폐쇄다.”

“?”


일우가 닫으려는 건 저택에서 고기 구이를 구워대는 일이 아니었다.

저택 상층을 폐쇄하고 세운 ‘고기 연구소’, 정확히는 프로세스센터였다.


“이 곳에서 전설을 보여줬으니, 더 이상의 연구는 필요하지 않다. 물론, 내 연구가 완성된 건 아니다. 고기의 잠재력은 무한! 즐거움도 무한! 무한으로 즐길 수 있는 고기!”


‘연금술사 우’는 그렇게 말하며 등을 돌린 뒤 두 팔을 좍 펼쳤고, 이내 고용된 주민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후대에 나와 같은 마음을 품는 이가 생기면, 내가 다 해먹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겠나?”

“어······ 편하죠?”

“멍청아! 절망에 빠질 거란 말이야! 끝을 보는 건 그런 거야! 자신이 더 파고들 여지가 없다면 얼마나 슬프겠어?!”


촌구석 마을 주민이 이런 심오한 학술의 정점에 대한 고찰을 이해할 리가 없다. 물론 그래서 일우가 언급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나는 어린아이를 위해 훈제 소시지를 만드는 마음으로 연구의 여지를 남긴다.”

“그, 그럼 저희들은······.”

“아직 여기서 고기를 더 구워야지. 난 아직 이 지역에 할 일이 남았거든.”


주민들이 기억할 것은 딱 두 가지면 된다.

저택에 설치되었던 고기 연구소는 철거되었고, 그들은 한동안 계속 여기서 고기 구이를 제공한다는 것.


“그럼 해산! 오늘도 행복을 위해 열심히 구워라!”


당분간 일자리를 보장해주겠다는 일우의 말에 주민들은 의욕에 찬 듯 오늘의 노동을 위해 물러났다.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서 그들은 한동안 여기에서 고기를 구워야 한다. 그 고기로 꼬드길 사람들이 매우 중요한 자산을 물어다주기 때문이다.


[프로세스센터 이전 후 최적화 완료. 주요 자동화 명령, 시범 가동 후 문제 없음으로 판명.]

“좋아. 앞으로 여기선 계속 주변 정보 수집하고 네가 못하거나 넘쳐나는 계산 일감 던져주는 거로 가자고.”


다른 길목이 전부 위험요소로 가득 찬 상황에서 이델린 지방의 위험 요소를 제거하게 된다면 이 곳의 통행량은 늘어날 것이다.

거기에 델린 시에서 구운 고기와 술을 공짜로 얻어먹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일부러라도 이쪽 길을 택할 이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군가는 일우에게 도움이 될 정보를 술자리에서 풀어놓을 것이다.

용사라는 직함을 단 게임 폐인들과 이 모든 짓거리를 벌인 장본인인 여신에 관련된 이야기가 한 마디라도 나온다면, 그것만으로도 이곳을 유지할 이유는 충분하다.


“물론 마냥 공짜로 하면 안 되겠지. 나 가고 난 다음부터는 조금씩이라도 돈을 받아야 해.”

[사고회로 계산 완료. 서비스 요금 책정 시 방문객 추정치에 심각한 영향을 끼침.]

“생각보다 세상엔 의심병 가진 놈이 많고, 마냥 공짜로 줬다간 이 도시 식당들 상당수가 쫄딱 망할 걸? 대충 고기 무한리필 뷔페 하나 돌린다는 식으로 받으면 돼.”


일우가 원하는 건 이 ‘저택’이 외부 변수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오랫동안 알아서 잘 돌아가는 것이고, 공짜 고기를 의심하거나 쫄딱 망한 식당 주인들의 반격 같은 상황은 별로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고려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요원의 계획, 심각한 문제 요인 존재함.]

“뭔데.”

[통신 한계거리 문제. 지역 이탈 시 설치한 프로세스센터와의 연결 두절됨. 정보 재갱신을 위해선 해당 지역으로 재접근이 필요함.]

“매직 스트림 네트워크는?”

[이용 불가. 해당 네트워크, 양방향 통신 불가능 설정. 단방향 정보 다운로드 기능만 허용됨. 업로드 불가.]


물리적인 거리로 인한 통신 단절 문제다.

스카웃이 활용하고 있는 매직 스트림 네트워크는 이 세계에 축적된 정보와 이어진 모양이지만, 축적되는 정보의 유형엔 한계가 존재한다.

프로세스센터를 만들고 계속 늘려가도 지속적인 활용을 위해선 주기적으로 통신 가능 거리까지 방문해야 한다는 말에, 일우는 미간을 좁혔다.


“······UAV를 이용한 물리적 데이터교환은 어때?”

[권장하지 않음. 고수준 데이터저장장치, 노출 위험성 극히 높음.]

“흐음, 그럼 어쩐다······ 아.”


한참 고민하던 일우는 뭔가를 떠올렸다.

통신 회선 문제라면 장거리 통신 중계 설비를 구축하면 된다. 하지만 지역을 넘어선 무선통신을 위한 시설은 본격적인 규모가 필요하고, 핵심 요소인 통신탑은 특별한 조건이 요구된다.

무조건 개방된 장소에 크고 높은 탑 형태의 구조물을 두고, 방해물 근처에 두어선 안 된다.

개방된 장소에 툭 튀어나온 첨탑 형태의 구조물은 당연히 눈에 띄고,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금방 위험해진다. 그렇다고 숨기거나 가려버리면 통신 효율이 떨어진다.

통신 시설, 특히 통신탑을 무슨 수로 설치를 하나 고민하던 일우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말이야, 이 저택 소유주가 여태까지 살상에 지대한 공헌을 했잖아?”

[긍정. 현재까지 소비된 육류 총합······.]

“그러니, 다짜고짜 뭘 하나 더 세워도 다들 그러려니 할 거야.”


일우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동안 고기 때문에 희생된 생물체가 좀 많잖아?”


***


며칠 뒤, 델린 시 인근의 언덕에는 상당한 규모의 회색 오벨리스크, 그리고 그 주변을 뒤덮는 석판 바닥으로 된 제단이 세워졌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완공된 날, 오벨리스크 앞에 마련된 제단에는 수많은 공물들이 놓여졌다.

곡물, 푸성귀, 야채, 과일, 거기에 몇몇 짐승의 형상을 본뜬 인형까지.


“아아아! 왜 나는 그걸 몰랐던 것인가! 고기를 즐기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희생!”


이 ‘제단’을 만들 계획을 밀어붙인 건, 그 동안 도시에 고기구이 광풍을 몰고 온 ‘연금술사 우’였다.

그는 마시 고대 의식의 제사장마냥 제단 앞에서 희생된 무언가에 대한 추모의식 비슷한 몸짓과 외침을 내뱉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 도시에서, 이 지역에서, 대륙 전체에서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 희생되었던 수많은 짐승들을!”


근처 농가, 도시의 식당, 저택의 일꾼, 심지어 이전에 일우에게 대결을 신청한 노인들의 무리와 할 일 없는 구경꾼 모험가들, 그리고 아로엔과 그녀의 호위기사들까지.

모두가 일우의 ‘추모 의식’에 동참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물론 몇몇은 원해서 온 게 아니라 초청받았고, 개중에 몇 명은 신분과 직위에 의한 의무라는 주장을 하는 일우에게 끌려왔다.


“······일단 행차해달라는 요청을 수락하긴 했다만, 정말 이런 의식이 필요한 것인가?”


아로엔으로선 굳이 이런 의식이 필요한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처음 제안을 받을 때야 왕족이니 의무니 하는 말을 들었고, 동물의 넋을 기리기 위한 의식은 흔하진 않아도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거대한 오벨리스크까지 세우고 본격적인 제단을 세울 정도로 거창하게 하는 건 아무래도 이상한 모양이다.


“맙소사! 공주라면서 이 의식의 중요성도 깨닫지 못하다니!”

“······엄연히 따지면 우리가 이런 의식을 치를 만한 잘못을 저지르진 않았잖은가.”

“세상에! 공주라면서 지역에서 소비되는, 도축되는 가축 두수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니!”

“대체 얼마나 많은 수가······.”


잽싸게 호위기사 겸 친구 겸 부관 역인 이엔이 귓속말로 이 지방의 총 사육두수와 연평균 도축 두수, 거기에 이번에 벌인 ‘연금술사 우’의 행적으로 급증한 도축된 가축의 수를 알려주었다.


“······그렇게나 많이?!”

“나도 시 정기 축산보고서 보고 안 거야······ 한 달 사이에 연 평균 두수만큼 도축됐어.”

“······만일 가축에게 원한이 있다면 그를 가만 내버려두지 못할 수준이군.”

“그러니까. 꿈에서 우 귀신이라도 나왔나봐. 아니면 꿈속에서 거울을 봤다니 자기 얼굴이 우가 되었다던가.”

“당연히 거울 보면 우의 얼굴이 보이지! 내가 곧 우니까! 우의 얼굴은 내 얼굴!”


공주님과 친구의 속삭임이 다 들린다는 듯 일우가 목청을 높이며 두 팔을 좍 벌렸다.


“허나 이 몸이 모든 업보를, 원한을 업을지라도 걔들이 순순히 나만 조질까? 너희들은? 너희들은 고기 안 먹었니?”

“······.”

“니들도 공범자야. 다 같이 한몫 거든 사람들이라고. 특히 저 노인네들은 그렇게 희생시켜놓고 소금도 안 친 개죽음을 선사했다고 빨리 저세상으로 끌고 가고 싶을 걸?”


또다시 떠오른 그 때의 실수에 노인들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일우는 개의치 않고 첨탑을 향해 두 팔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이곳이 그들의 희생을 기리는 장소가 될 것이다. 우리는 고기를 즐기지만, 고기를 참혹하게 희생시키는 무례한 자가 아니다! 최소한! 고기에 대한 예의는 지키자!”


일우는 그 말을 외친 뒤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가동 절차 개시.”

[통신탑 시범 가동 절차 돌입. 암호화된 데이터 전송 개시. 데이터 유형 별 신호 탈취 감시 중.]


통신탑이 작동을 시작하자, 일우는 마치 의식의 진행자가 된 것 마냥 소리쳤다.


“들리는가!네 발을 디딘 짐승들이여! 날개 달린 짐승들이여! 우리는 너희들의 희생을 잊지 않겠다!”

[시험 데이터 유출 가능성 계산 중. 유의미한 가능성을 지닌 데이터 유출 경로 차폐 중.]

“잘 커줘서 고마워! 우리의 고기가 되어줘서 고마워! 너희들이 없었다면 우린 행복해지지 않았을거야아아아아!”


참으로 괴상망측한 광경이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혹시라도 이 탑에서 수상한 신호가 전달되는 걸 누군가가 감지했을 경우, ‘희생된 영혼들과의 소통’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걸기 위해서였다.


“이 기념비로 너희들의 영혼과, 정신과 맞닿기를 간절히 바라마! 미아아아아아안! 고마워어어어어어어어!”


혹시라도 우연찮게 마법사나 연금술사, 혹은 다른 누군가가 이 탑이 정체불명의 신호를 방출하고 받아들이는 걸 알아차린다 하더라도, 그들은 어렵사리 받아들일 것이다.

고기에 미쳐 사는 인간이 짐승들의 영혼과 소통하겠답시고 만든 기념비가, 정말 짐승들의 혼과 교감한다고.


[시험 가동 완료. 정상 작동 확인. 본 가동에 돌입. 현재 데이터 송수신, 정상 작동. 데이터 누출, 없음. 매직 스트림 네트워크 감시망, 정상 작동.]

“좋아! 이걸로 우리는 양심의 가책을 떨쳐내고 고기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사과하면 다 해결돼!”


필요한 모든 위장이 끝나자마자 일우는 확 돌변해 사람들을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놀라울 만큼 빠른 태세전환에 아로엔은 왠지 질리는 표정이 되었다.


“그······ 살생을 저지르고 사과를 하고 끝낸다는 발상은 좀······ 그런 것 같다만.”

“그럼 풀 뜯을래?”

“크흠, 그건 아니다만.”

“봐봐. 저기 저 농장 사람들을 보라고. 자기네들 먹고 살자고 팔았지만 가슴이 얼마나 아프겠니? 이런 곳이 있어야, 쟤들도 집에 가서 맛나게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어느 새 ‘연금술사 우’의 의식이 끝난 뒤 각 농가에서 온 사람들은 나름의 공양용 제물을 제단에 바치며 각자의 기도를 했다.

그들로서는 자신이 키우던 자식같은 가축들이 결국 도살된다는 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의식이 꽤 의미 있는 모양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일우는 이내 아로엔을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닿을 거야. 분명히 닿아. 난 진심을 담았으니까.”

“그대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보여줬지만, 결국 결과는 모든 것이 그대의 뜻이 옳았다는 걸 증명했었지. 이번 일 또한 그렇게 될 거라고 보는가?”

“그걸 위해서 저 위에 비싼 스탈리움 뿔도 달아놨다구? 뿔은 상징이고 교감의 매개체니까!”

“······.”


첨탑 위에 달린 푸른 색으로 빛나는 금속 뿔을 본 아로엔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금속 중에서 저런 청명한 푸른색을 낼 수 있는 건 ‘오색의 금속’이라 불리는 스탈리움밖에 없고, 저 구조물 만한 크기의 스탈리움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스탈리움을 이런 용도로 쓰는 건 좀 낭비라고 본다만······.”

“어허! 내겐 무엇보다 중요해! 고기의 행복을 위한 길에는 그 어느 투자도 아깝지 않아!”

“소문이 나면 누가 훔쳐갈지도 모르겠네요. 대놓고 훔쳐가라고 매달아둔 것도 아니고.”


아로엔은 적당히 둘러서 말했지만 이엔은 대놓고 도난을 걱정했다. 물론 일우는 그 점은 문제 말라는 듯 히죽 웃었다.


“짐승들과 교감을 위해 만든 건데 누가 손을 대면 저주받는다고. 천벌 받아. 짐승들의 원혼이 튀어나와서 복수할거라고?”

“······참으로 대단한 보안 대책이네요.”


농담 같이 말했지만, 실제로 보안대책은 모두 수립해놨다. 이 거대한 첨탑의 핵심부품이자, 통신설비의 주요 부품을 일우가 그냥 허허벌판에 방치할 리 없었다.

다만 지금은 보이지 않을 뿐이다.

모두가 잘 속아넘어간 현장에서 일우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스카웃이 실시간으로 모니터링 중인 통신 상태를 확인했다.

그 때, 스카웃이 막 프로세스센터에서 들어온 정보를 보고했다.


[알림. 프로세스센터 데이터 분류감식 중 중요사항 감지. 해당 코드, ‘용사’]

“······.”


그 말을 듣자 일우의 표정은 저도 모르게 딱딱하게 굳었다.

이 모든 행동의 뿌리를 찾아가면 용사가 있다.

이 장소에서 고기 구이 광풍을 불러온 것도, 카이옌에서 그렇게 난리법석을 부린 것 역시, 거슬러가면 결국 여신 누아즈와 그 손아구에 놀아간 네 명의 게임 폐인 용사가 있다.

그러니 순간 자제력을 잃는 건 어쩔 수 없다. 그 단어만큼 일우를 열 받게 만드는 건 이쪽 세계엔 존재할 수 없다.


“무슨 일인가. 뭔가 문제라도······ 있는가?”


곁에서 바라본 ‘연금술사 우’의 분위기가 확 변한 걸 가장 먼저 눈치챈 건 아로엔이었다.

지금 그를 잘못 건드렸다간, 말 그대로 폭발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그녀에게 무수히 경고하고 있다.

섣불리 건드리지 마라. 좋은 꼴은 결코 못 본다.

허나 그 직감의 경고에도 아로엔은 말을 걸었다.

그 말을 듣자, 일우는 순간의 흔들림에 모든 걸 망칠 수 없다는 일념으로 자신을 다스렸다.


“······들어왔으니 이제 내보낼 시간이로군.”

“······.”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한 채 꺼낸 일우의 말에, 아로엔은 왠지 모르게 자신이 멍청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게 자연의 순리지. 왜. 난 그런 과정에서 벗어난 존재인 줄 알았니.”


자신의 분노를 들끓게 한 원인의 소식을 들어 흔들린 모습을 단순히 개인 위장 사정으로 포장한 일우는 표정 변화 없이 그대로 딱딱한 모습과 분위기를 유지하며 걸어갔다.


“지금 날 건드리지 말라구. 어딘가가 분명 터져나갈 거니까. 좋은 꼴은 못 볼 거야.”

“어, 음······ 순탄한 결과 있길 바라겠네.”

“쾌변하세요.”


아무래도 공주님이 표현하기엔 적나라한 단어였지만, 이엔은 충분히 말할 수 있는 단어인 모양이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이자 부관이자 호위기사가 그 말을 꺼내자, 아로엔은 그녀를 쏘아보았다.


“생리현상은 뭐든 해내는 대단한 연금술사님도 어쩔 수 없지 뭐.”

“그 단어를 굳이 거론해야만 했나?”

“뭐 어때. 안 말한다고 내장에 들어찬 게 사라져? 내보내야지.”

“······그대는 기사가 된 이후로 나날이 교양이 없어지는 것 같군.”

“그러게.”


뒤에서 떠들어대는 공주기사와 그 친구의 이야기는 더 이상 일우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이걸 잘 속여 넘겼다는 것이고, 지금 그의 앞에 그토록 원하는 정보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좋아, 해당 데이터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관련자료 싹 다 긁어모아. 던전 쪽 사전조사 예약 걸어놓은 건 일시 중지. 지금은 용사놈 데이터를 최우선으로 한다.”

[확인. 프로세스센터 데이터처리 우선순위 변동. 해당 정보와 관계된 사항, 최우선순위.

“생각보다 빨리 찾았어. 그 동안 얼마나 거들먹거렸는지 한 번 보자고.”


일우는 딱딱해진 표정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은 채 대놓고 으르렁댔다.

지나치는 사람마다 그 얼굴을 보고 무슨 일이 생겼나 싶었지만, 뒤이어 들리는 외침에 다들 그러려니 했다.


“어, 연금술사 님. 뭔가 문제라도······.”

“그 분 급하시대요! 붙잡았다가 터지면 대참사 날지도 몰라요오!”

“이엔! 목소리 좀 낮추게! 개인 화장실 사정을 그렇게 공개적으로 떠들다니! 기사로서 그게 할 소린가?”

“공주님, 원래 급한 사람 붙잡다가 대참사 나지 않도록 하는 게 당사자에겐 더 도움이 되고 체면을 돕는 행위랍니다. 더 큰 참사를 막기 위한 작은 무력, 저희들과 같은 거에요.”

“어딜 봐서! 다른 이들이 올베린의 기사를 무엇으로 보겠는가?”

“어, 음······ 연금술사님, 쾌변하십쇼.”


일우는 대답 대신 손을 까딱이는 것으로 속아 넘어간 이들에게 적당히 맞장구를 쳤고, 그 덕에 그의 행동은 더욱 신뢰를 얻었다.

정말 급하면, 말도 꺼내기 어려운 법이니 말이다.


작가의말

이번 챕터의 의의는 활동에 필요한 모든 기반설비 구축입니다.

그리고 설비 구축하자마자 딱 월척이 걸리는 거 봐선 성능 확실하죠.


예, 곧바로 중간보스전 갑니다. 위장신분 정체성 확립하고 설비 깔았으니 이제 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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